2021-08-29

광복회 홈페이지 : 적을 알아야 이깁니다! “민족주의는 知性을 마비시키는 독약”이라는 반일민족주의반대모임의 낙성대경제연구소의 논리

광복회 홈페이지 방문을 환영합니다 : 만남의 광장
https://www.kla815.or.kr/sub_6/6_1.php?mode=view&number=3425&b_name=free&page=1&wr_id=lhg0921
광복회 홈페이지 방문을 환영합니다
만남의 광장





====================================

[배진영의 어제오늘내일] 반일민족주의반대모임 대표 이우연



배진영의 어제오늘내일
반일민족주의반대모임 대표 이우연
“反日이데올로기는 民族主義가 아니라 種族主義”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 “‘강제징용노동자상’의 모티브가 된 사진 속 인물은 일본인 노예 노동자”
⊙ “‘조선인 강제연행설’은 조총련 학자 박경식이 한일협정 방해하기 위해 쓴 책에 처음 나와… 조총련 선동에 한국 전체가 놀아나고 있어”
⊙ “영화 〈군함도〉는 사실과 달라… 망루, 철조망, 조선인들만의 노예 노동 없었다”
⊙ “‘愛韓派’ 일본인들도 ‘한국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할 때, ‘한국이 정말 외로워지는구나’ 싶어”
⊙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 우리에게 무슨 미래가 있겠나?”

李宇衍
1966년 출생. 성균관대 경제학과 졸업. 同대학원 박사. 美 하버드대학 교환연구원, 日 규슈대 교환교수, 서울대·성균관대 강사 역임. 現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사진=조현호
지난 6월 5일 오후 6시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는 ‘선구자’와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퇴근길의 시민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잠깐 눈길을 주었다가 이내 제 갈 길을 갔다. 주동식 《제3의 길》 편집장이 행사 시작을 알렸다.

“지금부터 역사왜곡 외교참사 노동자상 설치 반대 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행사는 반일(反日)정서가 기승을 부리는 분위기에서, 온라인에서 소수(少數)로만 존재하던 한일(韓日)관계 정상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처음으로 서울 중심부에서 울려 퍼지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행사 참석자는 30여 명 정도. 김기수 변호사, 조형곤 21세기미래교육연합 대표, 이경자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 대표, 김병헌 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 손기호 한국근현대사연구회 대표 등 우파운동 계열 인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주대환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부회장, 최재기 전 사무금융노련 위원장, 최덕효 한국인권뉴스 시솝 등 ‘진보’ 인사들의 모습도 보였다. ‘이게 진짜 좌우합작(左右合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내 언론은 ‘펜앤마이크’ ‘미디어워치’ ‘한국인권뉴스’ 등과 우파 성향 유튜브 방송 등에서 나왔을 뿐, 메이저 언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반면 《요미우리신문》 《아사히신문》 《니혼게이자이신문》 《교도통신》 등 일본 주요 언론사들은 관심을 갖고 취재했다.

이우연 반일민족주의반대모임대표가 경과보고를 한 후 국사교과서연구소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기수 변호사가 성명서를 낭독했다.

“역사의 흐름을 거꾸로 되돌리려는 무지(無知)와 광기(狂氣)가 이 나라를 덮고 있다. 이른바 위안부 소녀상과 노무동원 노동자상을 일본대사관이나 영사관 근처 등 전국 각지에 세우려는 시도는 결코 진보와 민주, 노동자의 이름으로 합리화될 수 없다.

위안부 소녀상과 노무동원 노동자상은 이 나라 국민들의 역사의식을 왜곡하고, 가장 가까운 우방국과의 소중한 친선과 협력을 근저에서부터 무너뜨리려는 악마적 기획이다. 우리는 이성(理性)과 지성(知性)의 힘을 믿는 민주진보시민들의 뜻을 모아 노동자상 설치를 반대한다.”

김기수 변호사는 성명서 말미에서 “민주와 진보, 시민의 이름을 내걸고 역사를 왜곡하는 민노총과 시민단체 등은 강제징용 노동자상의 설치를 당장 취소하라”면서 “문재인 정권과 집권여당은 한일관계를 무너뜨려 김씨조선의 이익에 복무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당장 중단하고, 엄중한 공권력 행사를 통해 노동자상 설치를 완전 차단하라”고 요구했다.


“민족주의는 知性을 마비시키는 독약”



지난 6월 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반일민족주의반대 행사에서 주대환 죽산조봉암기념사업회 부회장은 민족주의의 폐해를 지적했다. 사진=배진영
이어 참석자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주대환 죽산조봉암기념사업회 부회장의 발언이었다.

“나는 이른바 진보 진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어느 진영에 속한다기보다도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왜곡이 너무 심하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얘기들을 너무 많이 한다’ 그래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저는 항상 말하고 있습니다. 민족주의는 지성을 마비시키는 독약이다! 민족주의는 독약, 알코올, 이런 것과 아주 비슷해서 마시는 그 순간에는 상당히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자꾸 하다 보면 중독이 되죠. 그다음에 자꾸 하다 보면 지성이 마비됩니다. 우리 국민들이 예전에 비해 훨씬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이렇게 바보가 되어 가느냐? 이게 다 민족주의라는 독약에 중독이 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과거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을 할 때도 민족주의와 싸웠습니다. 우리나라의 노동운동, 진보운동, 왜 이렇게 타락했습니까? 민족주의에 오염돼서 그런 겁니다!”

지나가는 시민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폴리스 라인 뒤쪽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다. 데이트 나온 젊은 남녀 중 여성이 “부끄러운 줄 알라!”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 것이다. 남자친구와 경찰이 말렸지만, 그녀는 한동안 악을 써댔다. 주최 측의 한 인사는 “전교조 키즈 아니겠느냐?”며 혀를 찼다. 주대환 부회장이 말했듯 ‘민족주의라는 독약에 중독되어 지성이 마비된’ 오늘날 한국인들의 평균적 모습을 보는 듯했다.

이날 행사에는 ‘위안부와 노무동원 노동자 동상 설치를 반대하는 모임’ ‘반일민족주의를 반대하는 모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국사교과서연구소 등이 참여했다. 이 중 앞의 두 단체는 페이스북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 모임이다. 이 두 모임을 만들고, 이날 행사를 주도한 사람이 이우연(李宇衍・53) 박사다. 이 박사는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同)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경제사학자로, 현재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있다. 이날 행사가 있기 이틀 전인 6월 3일 서울 관악구 은천동(옛 봉천동)에 있는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이우연 박사를 만났다.


“징용노동자상·신일철 판결 보고 만들어”

― ‘반일민족주의를 반대하는 모임’은 어떻게 만들게 됐습니까.

“재작년 8월 민노총・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중심으로 소위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만들겠다고 하는 것을 보고 ‘이것이 또 하나의 위안부 소녀상처럼 그렇게 되겠구나, 이걸 막아야겠다’ 싶어 그해 9월 페이스북에서 ‘위안부와 노무동원 노동자 동상 설치를 반대하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회원이 700명 정도 됩니다.

그러다가 작년 10월경에 신일철주금(新日鐵住金・지난 4월 1일부터 일본제철로 개명-기자 주) 징용공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나오고 현 정권이 정치적 목적으로 내부적인 국민 결속을 위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반일종족주의를 조장하는 것을 보고 페이스북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반일민족주의를 반대하는 모임’이라는 걸 만들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습니다. 이틀 만에 100여 명이 찬성하더군요. 거기에 힘을 입어 바로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 어떤 분들이 함께하고 있습니까.

“아주 다양합니다. 가정주부, 학자, 연구자, 언론인, 일본인, 교포, 일본에 이민 간 분들, 변호사, 회사원, 의사, 학부모운동가, 노동운동가 등…, 그야말로 시민단체라고 할 수 있죠. 회원 수는 1000여 명쯤 됩니다. 아직은 강령・규약・회비가 있는 오프라인 모임은 아니지만 앞으로 많은 분이 함께했으면 좋겠습니다.”

― 그동안 어떤 활동을 해왔습니까.

“지난 5월 10일 부산의 정발(鄭撥) 장군 동상 앞에서 노무동원 노동자 동상 설치 반대 집회를 가졌습니다. 서울과 영남 지역에서 17명이 참석했습니다. 한국근현대사연구회・국사교과서연구소 등이 함께하고 있고, 대학생・청년단체들과도 연대(連帶)하기 위해 접촉 중입니다. 연대 활동을 위해 시민단체 활동 경험이 많은 주동식 선생(지역평등시민연대 대표・《제3의 길》 편집장)의 도움도 받고 있습니다.”

― 태클이 들어오지는 않습니까.

“태클이 들어올 정도면 한국 사회가 지금보다는 수준 높은 사회가 됐겠지요. 한국 사회는 태클도 할 줄 모르는 사회입니다. 한국에서는 일반 대중들은 무관심하고, 학자들은 무시하고 있습니다. 한국 국사학계의 아주 고질적이고 나쁜 습속이 논리와 객관적 자료를 이용해서 자신들과 다른 논리, 다른 주장을 펼치면 그걸 봤으면서도 안 본 체하는 것입니다.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님이나 제가 이승만TV를 통해 반일종족주의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얘기했지만 전혀 반응이 없어요. 오히려 일본어 자막방송을 본 일본인들이 ‘조심하시라’고 걱정하는 얘기를 전해오고 있습니다.”


“감정에 호소하는 反日이데올로기는 前근대적”



초등학교 교과서 등에 실린 일제하 강제징용 노동자 사진(오른쪽)은 1926년 홋카이도에서 노예노동에 시달렸던 일본인들의 사진이다. 왼쪽은 당시 상황을 보도한 《아사히카와신문》 기사.
― 반일민족주의가 아니라 반일종족주의라….

“이영훈 교수님이나 저는 애써 반일종족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민족주의는 근대(近代)의 소산이지만, 한국에서의 반일(反日)반이데올로기는 근대의 산물이 아니라 그 내용・성격・본질이 전(前)근대적이기 때문입니다. ‘근대성’에서 중요한 것은 과학성과 지성을 중시하는 태도인데, 우리나라의 반일이데올로기는 비(非)과학적・반(反)지성적이고, 지극히 감정에 의존하고, 감정에 호소하고, 감정으로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민족주의라고 하기 곤란합니다.”

이우연 박사는 반일종족주의를 조장하는 선동 중 하나로 널리 알려진 ‘조선인 강제징용공’ 사진을 꼽았다. 반라(半裸)의 삐쩍 마른 사내들의 사진이다.

“그 사진 속의 인물들은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들입니다. 1926년 9월 일본 홋카이도의 토목공사 현장에서 일본인 업주에 의해 강제노역에 시달리다가 경찰에 구출된 일본인 노동자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도 종종 발생하는 ‘염전 노예’와 비슷한 이들입니다. 이 사진은 1926년 9월9일자 《아사히카와신문》에 실린 것입니다.



서울 용산역 앞에 세워진 징용공 동상은 조선인 징용공 사진으로 잘못 알려진 일본인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 ‘조선인 강제징용공’ 사진으로 둔갑해 교과서에 실려 있습니다. 2017년 간행되어 최근까지 사용된 고등학교 《한국사》에서는 슬그머니 사라졌지만, 올해부터 사용하는 초등학교 6학년 국정 《사회》 교과서에는 ‘강제 노역에 동원된 우리 민족’이라며 아직도 버젓이 실려 있습니다. 용산역 앞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바로 이 사진 속 오른쪽에서 두 번째로 서 있는 사람을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 그에 대해 문제 제기를 여러 번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교육부에 문제 제기를 했더니, 담당자는 ‘교과서 사진 크기의 하얀 스티커를 나누어줘서 그걸 붙여서 사용하게 하겠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그것조차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뿐이 아니에요.”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일본 탄광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이 쓴 것이라고 알려진 이 낙서는 1965년 〈을사년의 매국노〉라는 영화를 찍던 조총련계 영화인들이 조작한 것이다.
― 또 뭐가 있습니까.

“2017년 7월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 옥외(屋外) 전광판에 ‘군함도(하시마섬)의 진실’ 고발 영상을 내보냈어요. 여기 등장하는 엎드려서 채탄(採炭)하는 ‘조선인’ 광부의 사진도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입니다. 그 사진은 아직도 생존해 있는 일본 사진작가 사이토 고이치 씨가 찍은 것입니다. 그 사진이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습니다.

또 있습니다. 일본 탄광에 끌려간 조선인 노동자들이 남겼다는 ‘엄마 배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라는 낙서 아시죠?”

― 아! 압니다. 그거 가짜라면서요.

“그건 결국 북한으로 넘어간 재일 조총련계 감독이 1965년 〈을사년의 매국노〉라는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너무 밋밋하다’고 하니까, 옆에 있던 소품 담당 스태프가 그 자리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벽에다 새긴 것입니다.”

― 〈군함도〉 〈암살〉 〈밀정〉 〈덕혜옹주〉와 같은 영화를 통한 반일선동도 심하지요.

“〈군함도〉를 보면 영화 초입에 ‘어떻게 해서 군함도에 오게 되었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중 한 사람이 ‘결혼식 하고 신방을 꾸렸는데, 일본 헌병이 신혼 방에 들이닥치는 바람에 첫날밤도 치르지 못하고 끌려왔다’고 합니다. 이는 작가의 창작이 아닙니다.”

― 그럼 근거가 있다는 얘긴가요.

“1965년 조선인 강제연행설을 처음으로 주장했던 박경식의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박경식은 조총련계 조선대학교 교원이었습니다. 이 책은 좌익 계열 일본 출판사 미래사에서 출간되어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책이 왜 1965년에 나왔는지 아세요? 박경식 스스로 인정했듯이 한일협정이 맺어져 북조선이 한국과 일본에 의해 포위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을사년의 매국노〉라는 영화가 그해에 만들어진 것도 같은 목적에서였죠.”

― 헐, 그거 참….

“54년 전 조총련계 지식인이라는 사람의 주장에 지금까지 한국의 학계, 영화계를 포함한 문화계, 언론계, 교육계, 노동계가 놀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에서 노무동원 문제로 학위를 받은 사람이 10여 명에 가깝지만 그 어느 누구도 박경식의 주장이 타당한지 실증적(實證的)으로 검토해보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천박한 역사학계가 학술이 아닌 조총련계의 선전선동이 날뛸 수 있는 배경을 만들어준 것이죠.”


영화 〈군함도〉의 허구



일본 나가사키 앞에 있는 하시마섬. 실루엣이 군함과 닮았다고 해서 ‘군함도’라고 불린다.
― 〈군함도〉를 보면, 나치독일이나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 같은 느낌을 주더군요.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망루와 철조망이 있고, 무장 헌병이 지키는 모습은 군함도는 물론이고, 일본의 어떤 사업소에서도 없었습니다. 단 한 명의 군인도 부족한 상황에서 그런 사실도,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군함도에는 조선인들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조선인보다 2배 이상 많은 일본인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인들만 있었다면, 군함도는 수십, 수백 번 날아가버렸을 겁니다.”

― 무슨 얘기입니까.

“1929년 세계대공황, 일본인들의 표현으로는 쇼와(昭和)공황 이후 일본의 탄광에서는 인건비 절감 차원에서 전기드릴・유압식 드릴・컨베이어 벨트・석탄재단기 등을 도입했습니다. 게다가 광산에는 엄청난 양의 화약과 다이너마이트가 있었습니다.

조선인들은 2년 계약으로 일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다룰 기술을 익히기 어려웠습니다. 조선인들만 투입해서는 위험하고 생산성이 낮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조선인과 일본인이 조(組)를 짜서 일했습니다. 조선인들만 위험한 탄광에 몰아넣었다는 건, 당시의 상황이나 광업 기술 수준을 아예 무시하는 얘기입니다.”

― 군함도에 있었던 조선인 노무자의 수는 얼마나 됩니까.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가장 많았을 때 100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일본인은 그 2배 정도였고….”

― 군함도에서의 생활은 어떠했습니까.

“당시 일본의 주요 사업장 인근에는 특별위안소(산업위안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군함도에는 2개의 위안소가 있었는데, 하나는 일본인, 하나는 조선인 전용이었습니다. 거기를 드나들 만큼 자유로웠다는 얘기입니다.

군함도에는 헌병은 없었지만 파출소는 있었습니다. 경찰관은 두 명이 근무했는데, 사무실이 제 연구실만 했던 모양입니다. 취객을 술 깰 때까지 잡아두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특정 영화를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반일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허구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渡日한 징용 노무자는 7만~10만명”

― 징용으로 일본에 건너간 조선인의 수는 얼마나 됩니까.

“정확한 통계 자료는 없지만, 추정컨대 최대한 10만명, 합리적 숫자로는 7만명 이하라고 생각합니다.”

―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가 뭡니까.

“일본에서 징용령이 발동된 것은 1939년 9월입니다. 이때부터 조선에서는 모집・관알선(官斡旋)이라는 형태로 조선인 노무자를 데려가다가 1944년 8월에 이르러서야 조선에서도 징용령이 내려집니다. 징용노무자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기 시작한 것은 1944년 9월부터인데, 이듬해 3월이 되면 미군이 현해탄(玄海灘)을 장악하면서 부산~시모노세키 간 관부(關釜)연락선 운항이 중단됩니다. 1939년 9월부터 1945년 3월까지 66개월 동안 모집・관알선・징용 등의 형태로 도일(渡日)한 노무자의 수는 총 72만3000명입니다. 그렇다면 1944년 9월 이후 6개월 동안 건너간 징용 노무자의 수는 7만~10만명 정도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 모집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일본에서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자, 민간기업에서 일본 정부의 승인과 조선총독부의 협조를 얻어서 노무과 직원을 보내 일할 사람들을 자유롭게 모집한 것을 말합니다.”

― 모집에 응하는 사람이 많았습니까.

“모집 인원의 몇 배가 몰렸습니다. 전체적인 수는 없지만, 예컨대 200명 모집하는 데 600명이 몰렸다는 식의 기록이 개별 민간기업에 남아 있습니다.”

― 왜 그렇게 많이 몰렸던 것입니까.

“1939년, 1940년에는 조선에서 농사가 극심한 흉작(凶作)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조선과 일본 간의 임금 차이가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 탄광에서 일하면 1940년에는 조선의 방직공 월급의 5배, 은행원 월급의 3배를, 1944년에는 일본 대졸(大卒) 초임(初任) 사무직 월급의 2.6배, 순사 월급의 3.7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 광부 월급이 그렇게 높았던 이유가 뭡니까.

“당시 탄광은 일본의 전쟁 수행에 반드시 필요한 핵심 사업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석유가 나지 않는 일본으로서는 석탄이 없으면 전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조선에서 모집을 해가도 도망치는 사람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징용을 이용한 사람들

― 도망을 쳤다고요.

“1970년대에 미국에 가는 것이 로망이었듯, 당시에는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이 로망이었습니다. 일본으로 밀항(密航)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농촌 출신이다 보니 탄광에서 일하는 것이 고되고 무섭거든요. 그래서 사업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한 달 내에 도망치는 사람이 60~70%에 달했습니다. 심지어는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자마자 도망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탄광보다 안전한 토목공사장 등에서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관알선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총독부가 직업소개소 역할을 하면서 선발 요건을 엄격하게 관리하려 한 것이죠.”

― 형식은 자유모집이었지만, 실제로는 강제성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모집에 대해서는 ‘강제’라는 말을 하기 어렵지만, 1942년 2월~1944년 9월 시행된 관알선과 관련해서 그런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예컨대 일본 전체 기업에서 5만명의 조선인 노무자를 필요로 한다고 하면, 총독부에서는 이 수를 채우기 위해 면사무소 직원들을 동원, 지주(地主)·구장(區長) 같은 지역 유지들에게 협조를 요청했겠지요. 지주가 자기네 소작인이나 하인에게 ‘네가 좀 가라’고 하는 경우, ‘옳다구나’ 하고 가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별로 내켜 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를 거부한다고 해서 강제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징용의 경우 100엔 이하의 벌금이나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관알선의 경우 그런 처벌규정이 없었습니다.”

― 이론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거역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 경우를 두고 ‘구조적 강제’라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한국에서 지금 일하기 싫은데 직장 다니는 사람들도 모두 ‘구조적 강제’겠지요.”

― 징용은 분명히 강제성이 있었지요.

“그렇죠. 하지만 징용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일본으로 밀항하려면 일본에서 버는 월급 2개월 치를 주고 작은 배에 목숨을 맡겨야 했는데, 징용의 경우는 그런 위험 없이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었으니까요. 심지어는 징용영장을 받은 사람에게 돈을 주고 호적을 산 후 대신 징용을 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당시 신문에는 부산 경찰의 가장 큰 일이 밀항단속과 호적을 바꿔치기해 도일(渡日)하는 사람들을 적발하는 것이라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징용으로 일본에 건너간 후 지정된 사업장에서 도망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징용 간 사람들 처우가 더 좋았다”

― 그건 불법이었을 텐데, 그게 가능했단 말입니까.

“일본의 탄광 등으로 징용 온 사람들을 빼내는 조선인 업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더 많은 임금과 더 안전한 일자리를 약속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토목공사장이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이 미군 상륙에 대비하기 위한 공사를 많이 벌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워낙 일손이 부족하다 보니 각 기관이나 기업에서는 징용 왔다가 도망친 조선인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냥 썼지요. 그런 걸 염두에 두고 보면 징용의 강제성이라는 것도 대단히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일종의 불법체류자 비슷한 경우인데, 그런 경우 임금은 제대로 받았습니까.

“전시(戰時)경제하에서 미쓰비시 같은 기업들에 현금은 차고 넘쳤습니다. 생산하는 족족 정부에서 다 사주니까요. 부족한 것은 일손이었습니다. 군함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징용의 경우에도 통상적인 임금은 지불됐다는 얘기죠.

“오히려 징용으로 간 사람들의 처우가 더 좋았습니다. 국가의 부름에 응한 것이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원호(援護)체계가 적용됐거든요. 1944년경 탄광에서는 평균적으로 월급이 150엔가량이었는데, 징용에 의한 경우 가족수당이 지급됐습니다. 조선에 두고 온 가족이 세 명인 경우 1인당 5엔씩 본인에게 15엔, 별도로 조선에 있는 가족에게도 15엔이 지급됐습니다. 물건을 사거나 배급에서도 우선권을 주었습니다.”

― 그럼 징용으로 끌려가 한 푼도 못 받았다는 식의 기억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6・25 때의 기억이 투사(透寫)된 경우가 많습니다. 노인들이 나이가 들어서 기억을 못 하니까, 한국전쟁 당시 고등학교 앞에다가 차 세워놓고 학생들을 끌고 갔다거나, 임금도 주지 않았다거나, 대가(代價) 없이 쌀을 공출(供出)했다거나 하는 기억을 일제(日帝) 때의 기억으로 혼동하는 거죠.”

― 임금이나 강제저축한 돈을 받지 못했다는 주장이 있지 않습니까.

“대부분 정산(精算)하고 돌아왔어요. 한국인들이 그렇게 금전 관념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다만 하루빨리 귀국하겠다면서 포기한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는 대개 반 달 치 내지 한 달 치 정도 월급에 불과했어요. 일본 정부는 나중에 문제가 될 경우에 대비해 기업들로 하여금 그 돈을 공탁(供託)하도록 했습니다.”


“대법원 판결은 망상에 근거한 것”



이우연 박사는 지난 6월 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반일민족주의반대 행사를 주도했다.
― 그럼 신일철주금을 비롯한 징용공 판결은 어떤 돈을 내놓으라는 것입니까.

“원고(原告)들이 소장(訴狀)에서 요구한 것은 미불(未拂)임금과 정신적・육체적 피해에 따른 손해배상금(위자료)입니다.”

― 그들의 미불임금은 어느 정도입니까.

“소송을 제기한 4인(사망자 3명, 생존자 1명)을 비롯해 46명이 신일철주금 가마이시(釜石)공장에서 일한 문서가 남아 있어요. 이들이 받아가지 않은 돈은 대략 반 달~한 달 치 월급 정도였습니다. 조선인 여자정신대를 가장 많이 고용했던 후지코시의 경우 그들이 남기고 간 돈은 180~200엔 정도인데, 이 역시 한 달 치 월급이 채 안 돼요. 이에 대해 대법원은 손해배상금까지 포함해 1억~1억5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것입니다.”

― 대법원은 어떻게 그런 판결을 내린 것일까요.

“대법원 판결은 박경식이나 선행(先行)연구자들이 그랬듯이,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게 1939~1945년 임금을 거의 주지 않고 노동을 시켰다는 망상을 가지고 한 판결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 한국의 대법원은 어떤 조사도 하지 않고, 판결을 내렸어요.”


‘우리나라가 정말 외로워지고 있구나’

― 징용공 판결 이후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조약으로 형성된 한일관계 자체가 망가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최근 친한파(親韓派) 일본 지식인 두 사람을 만나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순간 바로 단호하게 나온 답변이 ‘한국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이 해결할 일’이라는 것과 ‘한국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것은 뉘앙스가 다르지 않습니까. 다른 한 사람은 자기를 ‘애한파(愛韓派)’라고 소개했는데, 똑같은 얘기를 하더군요. 그 대답이 너무 신속하게 나와서 놀랐습니다. ‘우리나라가 정말 외로워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해법이 있을까요.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해야겠지만, 고도의 정치적인 행위로서의 외교적 판단도 있지 않았습니까. 이 문제는 ‘우리나라가 힘이 없는 것도 아니니, 우리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생각으로 국민이 합의할 수 있는 수준에서 우리 정부가 원고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 일본 정부는 이 문제를 중재(仲裁)위원회에 회부하자고 하고 있지요.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일본 정부와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중재위로 가자고 하지만 두 나라가 대화하자고 하면 일본 정부는 당장 응할 것입니다. ‘그 당시의 실태와 1965년 한일협정에 대해 같이 살펴보자. 그동안 우리는 원고들이 일본 기업에 대해 재산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하지 않도록 설득하겠다. 일본도 당장 중재위로 가는 것을 미루자’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외교에는 상대가 있는 법인데 지금처럼 일본에 ‘한국 사법부의 판결에 따르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 문재인 정부에 그럴 만한 의지가 있을까요.

“국가의 수반답게 문재인 대통령이 나서야 합니다. 상징적으로 지금의 무능하고 대책 없는 외교팀을 교체해 시그널을 주는 것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일본의 책임



2018년 8월 15일 부산 동구 초량동 정발 장군 동상 앞에서 민주노총 지역본부장들과 적폐청산 사회대개혁 부산본부 관계자들은 강제징용 노동자상 건립을 선언했다. 사진=조선DB
― 거의 고의적으로 한일관계를 망가뜨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런 노력을 하겠습니까. 김일성의 ‘갓끈론’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이라는 갓은 미국과 일본이라는 갓끈만 잘라버리면, 바람이 휙 불기만 해도 날아가 버린다’라는….

“네. 알고 있습니다. 김일성이 똑똑한 거지요. 그런데 저는 상황이 이렇게 악화된 데에는 일본 측의 잘못도 있다고 봅니다.”

― 어떤 점에서요.

“하나는 동정주의(同情主義)에 찌든 이른바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시민단체・오피니언 리더들입니다. 이들은 문제의 실태를 제대로 알아서가 아니라 일제(日帝)의 식민지배가 잘못됐다는 전제 아래서 동정심을 바탕으로 이른바 위안부 문제나 징용노동자 문제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동정을 받아야 합니까? 또 일본 정부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봅니다.”

― 그게 어떤 겁니까.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보여준 태도는 그야말로, ‘우리가 식민통치했으니까 그냥 봐주고 넘어가지’ 하는 태도였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이렇게 커진 거지요. 10년 전부터라도 일본 정부・지식인・언론이 사실을 놓고 제대로 따지자고 나왔으면, 지금 한일관계가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한국의 연구자들, 국민들이 이런 식으로 막 가지 못했을 겁니다. 그 점에서 일본도 심각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日帝 잔재 청산’ 운운은 시대역행”

― 대만은 50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지만, 우리처럼 반일감정이 심하지는 않다고 하더군요. 왜 그런 것일까요.

“두 가지 정도 차이가 있었다고 봅니다.

첫째, 한국의 경우 북한의 직접적인 위협 아래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민들을 통합하기 위해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했습니다. 대만의 경우는 우리처럼 중국의 위협이 직접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덜했지요.

둘째, 우리에게는 반일을 지속적으로 선동하고 반일이 진보의 표징인 것처럼 선전해온 북한이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런 북한이 한국의 소위 진보적인 지식인들에게 수십 년 동안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덩달아 춤을 췄습니다. 반면에 중국은 대만을 흡수하기 위해 분열시키고, 일본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 요즘 고등학교 ‘친일(親日) 교가’ 바꾸자는 캠페인이 있던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 나라, 국민, 사회의 능력이라는 것에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능력뿐 아니라, 다른 사회의 좋은 문화를 습득할 수 있는 능력도 포함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계속 ‘일제 잔재 청산’ 운운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逆行)하는 소리죠.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다른 사회의 기술과 문명을 흡수하는 것 자체가 능력입니다. 그걸 흡수하지 못하는 것이 무능력한 것입니다. 한국이 이만큼 발전한 것도 좋은 이웃에게 좋은 것을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런 성과를 이어가야 하는데 100년 전으로 돌아가자니….”

―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반일민족주의의 세례를 받았는데, 어떻게 거기서 벗어나게 됐습니까.

“제가 운이 좋았지요. 이영훈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뒀고, 낙성대연구소에서 ‘지도교수의 지도교수’였던 안병직・이대근 교수님께 배울 수 있었으니까요.”

― 어떻게 이영훈 교수님께 배우게 됐습니까.

“저도 대학시절에는 주사파(主思派)는 아니었지만, 운동권이었습니다. 당시 대학원에서 마르크스경제학을 경제학으로 인정해주는 분은 이영훈 교수님밖에 없어서, 그분께 배우게 됐습니다.

경제사를 공부하다 보니, ‘인생이라는 것이 단순치 않듯이 역사라는 것도 단순치 않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점차 마르크스주의를 버리고, ‘주의(主義)보다도 지금 우리 한국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가’ 하는 관점에서 역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박사 학위 논문에서도 식민지 수탈론을 비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학위 논문은 무엇에 대한 것이었습니까.

“조선시대 이후 임야(林野) 소유권(所有權)의 형성에 대한 것입니다. 산림 훼손으로 인한 조선왕조의 생태학적 위기, 총독부가 추진했던 산림녹화(山林綠化) 정책, 일제의 산림녹화 정책과 박정희 정부의 산림녹화 정책 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등을 다루었지요. 그 과정에서 식민지수탈론을 많이 비판했습니다.”

―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인데, 그런 주장은 우리 학계에서 설 땅이 좁지요.

“논문을 내놓아도 반응이 없으니, 그게 답답합니다. 그에 대해 반론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학자가 그에 대해 인용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인용을 한다 하더라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의 연구가 있다’면서 각주(脚註)에 이름과 논문 제목만 써놓습니다. 논문 본문에 내용을 소개하고 그것을 비판・동의하거나, 어떤 점에서 비판・동의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지 않는 것이죠. 그나마 이 정도면 양호한 편입니다. 대부분이 없는 논문, 없는 책으로 치고, 유령과 같은 연구자로 취급하는 거죠. 차라리 SNS에서는 ‘친일파’라고 비난하기라도 하죠.”

― 여전히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수탈론’이 대세지요.

“수탈론이라는 것은 사실과 다를 뿐 아니라,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 조상, 우리 역사, 우리 정신을 폄하하는 주장입니다. 쌀을 수탈당하고, 토지를 수탈당할 때, 우리 조상들은 뭘 했다는 얘기입니까. 위안부로 자기 딸, 여동생, 이웃집 소녀가 끌려갈 때,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는 얘기입니까. 조선인들은 일본에 끌려가서 월급도 못 받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고작 ‘엄마, 배가 고파요’라고 낙서나 하고 있었다는 겁니까.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것도 역사왜곡입니다.”


“시진핑이 천안문 사태에 대해 입 막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 박광온 민주당 의원은 5·18민주화운동을 폄하하는 행위, 4·3사건을 폄하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안과 함께 일제 침략을 부인하거나 찬양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안도 제안해놓고 있습니다.

“5・18에 대한 연구가 되어 있는 게 무엇인가요? 5・18 시작 이후 북한에서 특수군이 내려왔는지 어쩐지는 알 수 없지만, 사태가 왜 그렇게 심각한 상황으로까지 진행됐는지, 그 성격은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 이런 것에 대해서는 밝혀진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밝혀진 게 하나도 없는데, 사실규명, 그가 학자건 누구건 간에 사실연구를 하겠다는 사람들의 입을 막는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아주 부분적인 이야기들을 정치인들이 자기들 입맛에 맞는 것만 뽑아다가 국민들에게 강요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처벌하겠다는 것은 시진핑(習近平)이 천안문 사태에 대해 공산당의 해석과 다른 해석을 못 하도록 입을 막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일제시대나 4・3사건에 대해 다른 소리를 하면 처벌하겠다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 긴 시간 동안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해주시죠.

“반일민족주의・반일종족주의를 문제 삼는 것은 단순히 ‘일본과 사이가 나빠지면, 우리가 군사적・경제적으로 손해를 본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런 운동을 벌이는 진정한 이유는 일본뿐 아니라 우리도 역사를 제대로 보자는 것입니다. 왜 조선이 망했나, 왜 6・25가 일어났나 등. 과거의 역사를 제대로 봐야 우리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우리의 경험을 스스로 왜곡한다면, 우리에게 무슨 미래가 있겠습니까.”⊙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적을 알아야 이깁니다! 
“민족주의는 知性을 마비시키는 독약”이라는 
반일민족주의반대모임의 낙성대경제연구소의 논리
작성자 : 이형진
작성일 : 2019.08.27


지난 6월 5일 오후 6시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는 ‘선구자’와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퇴근길의 시민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잠깐 눈길을 주었다가 이내 제 갈 길을 갔다. 주동식 《제3의 길》 편집장이 행사 시작을 알렸다.

“지금부터 역사왜곡 외교참사 노동자상 설치 반대 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행사는 반일(反日)정서가 기승을 부리는 분위기에서, 온라인에서 소수(少數)로만 존재하던 한일(韓日)관계 정상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처음으로 서울 중심부에서 울려 퍼지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행사 참석자는 30여 명 정도. 김기수 변호사, 조형곤 21세기미래교육연합 대표, 이경자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 대표, 김병헌 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 손기호 한국근현대사연구회 대표 등 우파운동 계열 인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주대환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부회장, 최재기 전 사무금융노련 위원장, 최덕효 한국인권뉴스 시솝 등 ‘진보’ 인사들의 모습도 보였다. ‘이게 진짜 좌우합작(左右合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내 언론은 ‘펜앤마이크’ ‘미디어워치’ ‘한국인권뉴스’ 등과 우파 성향 유튜브 방송 등에서 나왔을 뿐, 메이저 언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반면 《요미우리신문》 《아사히신문》 《니혼게이자이신문》 《교도통신》 등 일본 주요 언론사들은 관심을 갖고 취재했다.

이우연 반일민족주의반대모임대표가 경과보고를 한 후 국사교과서연구소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기수 변호사가 성명서를 낭독했다.

“역사의 흐름을 거꾸로 되돌리려는 무지(無知)와 광기(狂氣)가 이 나라를 덮고 있다. 이른바 위안부 소녀상과 노무동원 노동자상을 일본대사관이나 영사관 근처 등 전국 각지에 세우려는 시도는 결코 진보와 민주, 노동자의 이름으로 합리화될 수 없다.

위안부 소녀상과 노무동원 노동자상은 이 나라 국민들의 역사의식을 왜곡하고, 가장 가까운 우방국과의 소중한 친선과 협력을 근저에서부터 무너뜨리려는 악마적 기획이다. 우리는 이성(理性)과 지성(知性)의 힘을 믿는 민주진보시민들의 뜻을 모아 노동자상 설치를 반대한다.”

김기수 변호사는 성명서 말미에서 “민주와 진보, 시민의 이름을 내걸고 역사를 왜곡하는 민노총과 시민단체 등은 강제징용 노동자상의 설치를 당장 취소하라”면서 “문재인 정권과 집권여당은 한일관계를 무너뜨려 김씨조선의 이익에 복무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당장 중단하고, 엄중한 공권력 행사를 통해 노동자상 설치를 완전 차단하라”고 요구했다.


“민족주의는 知性을 마비시키는 독약”



지난 6월 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반일민족주의반대 행사에서 주대환 죽산조봉암기념사업회 부회장은 민족주의의 폐해를 지적했다. 사진=배진영
이어 참석자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주대환 죽산조봉암기념사업회 부회장의 발언이었다.

“나는 이른바 진보 진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어느 진영에 속한다기보다도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왜곡이 너무 심하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얘기들을 너무 많이 한다’ 그래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저는 항상 말하고 있습니다. 민족주의는 지성을 마비시키는 독약이다! 민족주의는 독약, 알코올, 이런 것과 아주 비슷해서 마시는 그 순간에는 상당히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자꾸 하다 보면 중독이 되죠. 그다음에 자꾸 하다 보면 지성이 마비됩니다. 우리 국민들이 예전에 비해 훨씬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이렇게 바보가 되어 가느냐? 이게 다 민족주의라는 독약에 중독이 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과거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을 할 때도 민족주의와 싸웠습니다. 우리나라의 노동운동, 진보운동, 왜 이렇게 타락했습니까? 민족주의에 오염돼서 그런 겁니다!”

지나가는 시민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폴리스 라인 뒤쪽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다. 데이트 나온 젊은 남녀 중 여성이 “부끄러운 줄 알라!”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 것이다. 남자친구와 경찰이 말렸지만, 그녀는 한동안 악을 써댔다. 주최 측의 한 인사는 “전교조 키즈 아니겠느냐?”며 혀를 찼다. 주대환 부회장이 말했듯 ‘민족주의라는 독약에 중독되어 지성이 마비된’ 오늘날 한국인들의 평균적 모습을 보는 듯했다.

이날 행사에는 ‘위안부와 노무동원 노동자 동상 설치를 반대하는 모임’ ‘반일민족주의를 반대하는 모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국사교과서연구소 등이 참여했다. 이 중 앞의 두 단체는 페이스북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 모임이다. 이 두 모임을 만들고, 이날 행사를 주도한 사람이 이우연(李宇衍・53) 박사다. 이 박사는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同)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경제사학자로, 현재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있다. 이날 행사가 있기 이틀 전인 6월 3일 서울 관악구 은천동(옛 봉천동)에 있는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이우연 박사를 만났다.


“징용노동자상·신일철 판결 보고 만들어”

― ‘반일민족주의를 반대하는 모임’은 어떻게 만들게 됐습니까.

“재작년 8월 민노총・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중심으로 소위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만들겠다고 하는 것을 보고 ‘이것이 또 하나의 위안부 소녀상처럼 그렇게 되겠구나, 이걸 막아야겠다’ 싶어 그해 9월 페이스북에서 ‘위안부와 노무동원 노동자 동상 설치를 반대하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회원이 700명 정도 됩니다.

그러다가 작년 10월경에 신일철주금(新日鐵住金・지난 4월 1일부터 일본제철로 개명-기자 주) 징용공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나오고 현 정권이 정치적 목적으로 내부적인 국민 결속을 위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반일종족주의를 조장하는 것을 보고 페이스북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반일민족주의를 반대하는 모임’이라는 걸 만들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습니다. 이틀 만에 100여 명이 찬성하더군요. 거기에 힘을 입어 바로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 어떤 분들이 함께하고 있습니까.

“아주 다양합니다. 가정주부, 학자, 연구자, 언론인, 일본인, 교포, 일본에 이민 간 분들, 변호사, 회사원, 의사, 학부모운동가, 노동운동가 등…, 그야말로 시민단체라고 할 수 있죠. 회원 수는 1000여 명쯤 됩니다. 아직은 강령・규약・회비가 있는 오프라인 모임은 아니지만 앞으로 많은 분이 함께했으면 좋겠습니다.”

― 그동안 어떤 활동을 해왔습니까.

“지난 5월 10일 부산의 정발(鄭撥) 장군 동상 앞에서 노무동원 노동자 동상 설치 반대 집회를 가졌습니다. 서울과 영남 지역에서 17명이 참석했습니다. 한국근현대사연구회・국사교과서연구소 등이 함께하고 있고, 대학생・청년단체들과도 연대(連帶)하기 위해 접촉 중입니다. 연대 활동을 위해 시민단체 활동 경험이 많은 주동식 선생(지역평등시민연대 대표・《제3의 길》 편집장)의 도움도 받고 있습니다.”

― 태클이 들어오지는 않습니까.

“태클이 들어올 정도면 한국 사회가 지금보다는 수준 높은 사회가 됐겠지요. 한국 사회는 태클도 할 줄 모르는 사회입니다. 한국에서는 일반 대중들은 무관심하고, 학자들은 무시하고 있습니다. 한국 국사학계의 아주 고질적이고 나쁜 습속이 논리와 객관적 자료를 이용해서 자신들과 다른 논리, 다른 주장을 펼치면 그걸 봤으면서도 안 본 체하는 것입니다.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님이나 제가 이승만TV를 통해 반일종족주의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얘기했지만 전혀 반응이 없어요. 오히려 일본어 자막방송을 본 일본인들이 ‘조심하시라’고 걱정하는 얘기를 전해오고 있습니다.”


“감정에 호소하는 反日이데올로기는 前근대적”



초등학교 교과서 등에 실린 일제하 강제징용 노동자 사진(오른쪽)은 1926년 홋카이도에서 노예노동에 시달렸던 일본인들의 사진이다. 왼쪽은 당시 상황을 보도한 《아사히카와신문》 기사.
---

― 반일민족주의가 아니라 반일종족주의라….

“이영훈 교수님이나 저는 애써 반일종족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민족주의는 근대(近代)의 소산이지만, 한국에서의 반일(反日)반이데올로기는 근대의 산물이 아니라 그 내용・성격・본질이 전(前)근대적이기 때문입니다. ‘근대성’에서 중요한 것은 과학성과 지성을 중시하는 태도인데, 우리나라의 반일이데올로기는 비(非)과학적・반(反)지성적이고, 지극히 감정에 의존하고, 감정에 호소하고, 감정으로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민족주의라고 하기 곤란합니다.”

이우연 박사는 반일종족주의를 조장하는 선동 중 하나로 널리 알려진 ‘조선인 강제징용공’ 사진을 꼽았다. 반라(半裸)의 삐쩍 마른 사내들의 사진이다.

“그 사진 속의 인물들은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들입니다. 1926년 9월 일본 홋카이도의 토목공사 현장에서 일본인 업주에 의해 강제노역에 시달리다가 경찰에 구출된 일본인 노동자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도 종종 발생하는 ‘염전 노예’와 비슷한 이들입니다. 이 사진은 1926년 9월9일자 《아사히카와신문》에 실린 것입니다.



서울 용산역 앞에 세워진 징용공 동상은 조선인 징용공 사진으로 잘못 알려진 일본인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 ‘조선인 강제징용공’ 사진으로 둔갑해 교과서에 실려 있습니다. 2017년 간행되어 최근까지 사용된 고등학교 《한국사》에서는 슬그머니 사라졌지만, 올해부터 사용하는 초등학교 6학년 국정 《사회》 교과서에는 ‘강제 노역에 동원된 우리 민족’이라며 아직도 버젓이 실려 있습니다. 용산역 앞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바로 이 사진 속 오른쪽에서 두 번째로 서 있는 사람을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 그에 대해 문제 제기를 여러 번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교육부에 문제 제기를 했더니, 담당자는 ‘교과서 사진 크기의 하얀 스티커를 나누어줘서 그걸 붙여서 사용하게 하겠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그것조차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뿐이 아니에요.”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일본 탄광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이 쓴 것이라고 알려진 이 낙서는 1965년 〈을사년의 매국노〉라는 영화를 찍던 조총련계 영화인들이 조작한 것이다.
----

― 또 뭐가 있습니까.

“2017년 7월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 옥외(屋外) 전광판에 ‘군함도(하시마섬)의 진실’ 고발 영상을 내보냈어요. 여기 등장하는 엎드려서 채탄(採炭)하는 ‘조선인’ 광부의 사진도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입니다. 그 사진은 아직도 생존해 있는 일본 사진작가 사이토 고이치 씨가 찍은 것입니다. 그 사진이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습니다.

또 있습니다. 일본 탄광에 끌려간 조선인 노동자들이 남겼다는 ‘엄마 배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라는 낙서 아시죠?”

― 아! 압니다. 그거 가짜라면서요.

“그건 결국 북한으로 넘어간 재일 조총련계 감독이 1965년 〈을사년의 매국노〉라는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너무 밋밋하다’고 하니까, 옆에 있던 소품 담당 스태프가 그 자리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벽에다 새긴 것입니다.”

― 〈군함도〉 〈암살〉 〈밀정〉 〈덕혜옹주〉와 같은 영화를 통한 반일선동도 심하지요.

“〈군함도〉를 보면 영화 초입에 ‘어떻게 해서 군함도에 오게 되었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중 한 사람이 ‘결혼식 하고 신방을 꾸렸는데, 일본 헌병이 신혼 방에 들이닥치는 바람에 첫날밤도 치르지 못하고 끌려왔다’고 합니다. 이는 작가의 창작이 아닙니다.”

― 그럼 근거가 있다는 얘긴가요.

“1965년 조선인 강제연행설을 처음으로 주장했던 박경식의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박경식은 조총련계 조선대학교 교원이었습니다. 이 책은 좌익 계열 일본 출판사 미래사에서 출간되어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책이 왜 1965년에 나왔는지 아세요? 박경식 스스로 인정했듯이 한일협정이 맺어져 북조선이 한국과 일본에 의해 포위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을사년의 매국노〉라는 영화가 그해에 만들어진 것도 같은 목적에서였죠.”

― 헐, 그거 참….

“54년 전 조총련계 지식인이라는 사람의 주장에 지금까지 한국의 학계, 영화계를 포함한 문화계, 언론계, 교육계, 노동계가 놀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에서 노무동원 문제로 학위를 받은 사람이 10여 명에 가깝지만 그 어느 누구도 박경식의 주장이 타당한지 실증적(實證的)으로 검토해보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천박한 역사학계가 학술이 아닌 조총련계의 선전선동이 날뛸 수 있는 배경을 만들어준 것이죠.”


영화 〈군함도〉의 허구



일본 나가사키 앞에 있는 하시마섬. 실루엣이 군함과 닮았다고 해서 ‘군함도’라고 불린다.
― 〈군함도〉를 보면, 나치독일이나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 같은 느낌을 주더군요.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망루와 철조망이 있고, 무장 헌병이 지키는 모습은 군함도는 물론이고, 일본의 어떤 사업소에서도 없었습니다. 단 한 명의 군인도 부족한 상황에서 그런 사실도,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군함도에는 조선인들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조선인보다 2배 이상 많은 일본인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인들만 있었다면, 군함도는 수십, 수백 번 날아가버렸을 겁니다.”

― 무슨 얘기입니까.

“1929년 세계대공황, 일본인들의 표현으로는 쇼와(昭和)공황 이후 일본의 탄광에서는 인건비 절감 차원에서 전기드릴・유압식 드릴・컨베이어 벨트・석탄재단기 등을 도입했습니다. 게다가 광산에는 엄청난 양의 화약과 다이너마이트가 있었습니다.

조선인들은 2년 계약으로 일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다룰 기술을 익히기 어려웠습니다. 조선인들만 투입해서는 위험하고 생산성이 낮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조선인과 일본인이 조(組)를 짜서 일했습니다. 조선인들만 위험한 탄광에 몰아넣었다는 건, 당시의 상황이나 광업 기술 수준을 아예 무시하는 얘기입니다.”

― 군함도에 있었던 조선인 노무자의 수는 얼마나 됩니까.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가장 많았을 때 100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일본인은 그 2배 정도였고….”

― 군함도에서의 생활은 어떠했습니까.

“당시 일본의 주요 사업장 인근에는 특별위안소(산업위안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군함도에는 2개의 위안소가 있었는데, 하나는 일본인, 하나는 조선인 전용이었습니다. 거기를 드나들 만큼 자유로웠다는 얘기입니다.

군함도에는 헌병은 없었지만 파출소는 있었습니다. 경찰관은 두 명이 근무했는데, 사무실이 제 연구실만 했던 모양입니다. 취객을 술 깰 때까지 잡아두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특정 영화를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반일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허구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渡日한 징용 노무자는 7만~10만명”

― 징용으로 일본에 건너간 조선인의 수는 얼마나 됩니까.

“정확한 통계 자료는 없지만, 추정컨대 최대한 10만명, 합리적 숫자로는 7만명 이하라고 생각합니다.”

―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가 뭡니까.

“일본에서 징용령이 발동된 것은 1939년 9월입니다. 이때부터 조선에서는 모집・관알선(官斡旋)이라는 형태로 조선인 노무자를 데려가다가 1944년 8월에 이르러서야 조선에서도 징용령이 내려집니다. 징용노무자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기 시작한 것은 1944년 9월부터인데, 이듬해 3월이 되면 미군이 현해탄(玄海灘)을 장악하면서 부산~시모노세키 간 관부(關釜)연락선 운항이 중단됩니다. 1939년 9월부터 1945년 3월까지 66개월 동안 모집・관알선・징용 등의 형태로 도일(渡日)한 노무자의 수는 총 72만3000명입니다. 그렇다면 1944년 9월 이후 6개월 동안 건너간 징용 노무자의 수는 7만~10만명 정도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 모집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일본에서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자, 민간기업에서 일본 정부의 승인과 조선총독부의 협조를 얻어서 노무과 직원을 보내 일할 사람들을 자유롭게 모집한 것을 말합니다.”

― 모집에 응하는 사람이 많았습니까.

“모집 인원의 몇 배가 몰렸습니다. 전체적인 수는 없지만, 예컨대 200명 모집하는 데 600명이 몰렸다는 식의 기록이 개별 민간기업에 남아 있습니다.”

― 왜 그렇게 많이 몰렸던 것입니까.

“1939년, 1940년에는 조선에서 농사가 극심한 흉작(凶作)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조선과 일본 간의 임금 차이가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 탄광에서 일하면 1940년에는 조선의 방직공 월급의 5배, 은행원 월급의 3배를, 1944년에는 일본 대졸(大卒) 초임(初任) 사무직 월급의 2.6배, 순사 월급의 3.7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 광부 월급이 그렇게 높았던 이유가 뭡니까.

“당시 탄광은 일본의 전쟁 수행에 반드시 필요한 핵심 사업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석유가 나지 않는 일본으로서는 석탄이 없으면 전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조선에서 모집을 해가도 도망치는 사람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징용을 이용한 사람들

― 도망을 쳤다고요.

“1970년대에 미국에 가는 것이 로망이었듯, 당시에는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이 로망이었습니다. 일본으로 밀항(密航)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농촌 출신이다 보니 탄광에서 일하는 것이 고되고 무섭거든요. 그래서 사업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한 달 내에 도망치는 사람이 60~70%에 달했습니다. 심지어는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자마자 도망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탄광보다 안전한 토목공사장 등에서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관알선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총독부가 직업소개소 역할을 하면서 선발 요건을 엄격하게 관리하려 한 것이죠.”

― 형식은 자유모집이었지만, 실제로는 강제성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모집에 대해서는 ‘강제’라는 말을 하기 어렵지만, 1942년 2월~1944년 9월 시행된 관알선과 관련해서 그런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예컨대 일본 전체 기업에서 5만명의 조선인 노무자를 필요로 한다고 하면, 총독부에서는 이 수를 채우기 위해 면사무소 직원들을 동원, 지주(地主)·구장(區長) 같은 지역 유지들에게 협조를 요청했겠지요. 지주가 자기네 소작인이나 하인에게 ‘네가 좀 가라’고 하는 경우, ‘옳다구나’ 하고 가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별로 내켜 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를 거부한다고 해서 강제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징용의 경우 100엔 이하의 벌금이나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관알선의 경우 그런 처벌규정이 없었습니다.”

― 이론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거역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 경우를 두고 ‘구조적 강제’라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한국에서 지금 일하기 싫은데 직장 다니는 사람들도 모두 ‘구조적 강제’겠지요.”

― 징용은 분명히 강제성이 있었지요.

“그렇죠. 하지만 징용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일본으로 밀항하려면 일본에서 버는 월급 2개월 치를 주고 작은 배에 목숨을 맡겨야 했는데, 징용의 경우는 그런 위험 없이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었으니까요. 심지어는 징용영장을 받은 사람에게 돈을 주고 호적을 산 후 대신 징용을 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당시 신문에는 부산 경찰의 가장 큰 일이 밀항단속과 호적을 바꿔치기해 도일(渡日)하는 사람들을 적발하는 것이라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징용으로 일본에 건너간 후 지정된 사업장에서 도망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징용 간 사람들 처우가 더 좋았다”

― 그건 불법이었을 텐데, 그게 가능했단 말입니까.

“일본의 탄광 등으로 징용 온 사람들을 빼내는 조선인 업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더 많은 임금과 더 안전한 일자리를 약속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토목공사장이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이 미군 상륙에 대비하기 위한 공사를 많이 벌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워낙 일손이 부족하다 보니 각 기관이나 기업에서는 징용 왔다가 도망친 조선인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냥 썼지요. 그런 걸 염두에 두고 보면 징용의 강제성이라는 것도 대단히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일종의 불법체류자 비슷한 경우인데, 그런 경우 임금은 제대로 받았습니까.

“전시(戰時)경제하에서 미쓰비시 같은 기업들에 현금은 차고 넘쳤습니다. 생산하는 족족 정부에서 다 사주니까요. 부족한 것은 일손이었습니다. 군함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징용의 경우에도 통상적인 임금은 지불됐다는 얘기죠.

“오히려 징용으로 간 사람들의 처우가 더 좋았습니다. 국가의 부름에 응한 것이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원호(援護)체계가 적용됐거든요. 1944년경 탄광에서는 평균적으로 월급이 150엔가량이었는데, 징용에 의한 경우 가족수당이 지급됐습니다. 조선에 두고 온 가족이 세 명인 경우 1인당 5엔씩 본인에게 15엔, 별도로 조선에 있는 가족에게도 15엔이 지급됐습니다. 물건을 사거나 배급에서도 우선권을 주었습니다.”

― 그럼 징용으로 끌려가 한 푼도 못 받았다는 식의 기억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6・25 때의 기억이 투사(透寫)된 경우가 많습니다. 노인들이 나이가 들어서 기억을 못 하니까, 한국전쟁 당시 고등학교 앞에다가 차 세워놓고 학생들을 끌고 갔다거나, 임금도 주지 않았다거나, 대가(代價) 없이 쌀을 공출(供出)했다거나 하는 기억을 일제(日帝) 때의 기억으로 혼동하는 거죠.”

― 임금이나 강제저축한 돈을 받지 못했다는 주장이 있지 않습니까.

“대부분 정산(精算)하고 돌아왔어요. 한국인들이 그렇게 금전 관념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다만 하루빨리 귀국하겠다면서 포기한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는 대개 반 달 치 내지 한 달 치 정도 월급에 불과했어요. 일본 정부는 나중에 문제가 될 경우에 대비해 기업들로 하여금 그 돈을 공탁(供託)하도록 했습니다.”


“대법원 판결은 망상에 근거한 것”



이우연 박사는 지난 6월 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반일민족주의반대 행사를 주도했다.
― 그럼 신일철주금을 비롯한 징용공 판결은 어떤 돈을 내놓으라는 것입니까.

“원고(原告)들이 소장(訴狀)에서 요구한 것은 미불(未拂)임금과 정신적・육체적 피해에 따른 손해배상금(위자료)입니다.”

― 그들의 미불임금은 어느 정도입니까.

“소송을 제기한 4인(사망자 3명, 생존자 1명)을 비롯해 46명이 신일철주금 가마이시(釜石)공장에서 일한 문서가 남아 있어요. 이들이 받아가지 않은 돈은 대략 반 달~한 달 치 월급 정도였습니다. 조선인 여자정신대를 가장 많이 고용했던 후지코시의 경우 그들이 남기고 간 돈은 180~200엔 정도인데, 이 역시 한 달 치 월급이 채 안 돼요. 이에 대해 대법원은 손해배상금까지 포함해 1억~1억5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것입니다.”

― 대법원은 어떻게 그런 판결을 내린 것일까요.

“대법원 판결은 박경식이나 선행(先行)연구자들이 그랬듯이,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게 1939~1945년 임금을 거의 주지 않고 노동을 시켰다는 망상을 가지고 한 판결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 한국의 대법원은 어떤 조사도 하지 않고, 판결을 내렸어요.”


‘우리나라가 정말 외로워지고 있구나’

― 징용공 판결 이후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조약으로 형성된 한일관계 자체가 망가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최근 친한파(親韓派) 일본 지식인 두 사람을 만나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순간 바로 단호하게 나온 답변이 ‘한국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이 해결할 일’이라는 것과 ‘한국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것은 뉘앙스가 다르지 않습니까. 다른 한 사람은 자기를 ‘애한파(愛韓派)’라고 소개했는데, 똑같은 얘기를 하더군요. 그 대답이 너무 신속하게 나와서 놀랐습니다. ‘우리나라가 정말 외로워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해법이 있을까요.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해야겠지만, 고도의 정치적인 행위로서의 외교적 판단도 있지 않았습니까. 이 문제는 ‘우리나라가 힘이 없는 것도 아니니, 우리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생각으로 국민이 합의할 수 있는 수준에서 우리 정부가 원고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 일본 정부는 이 문제를 중재(仲裁)위원회에 회부하자고 하고 있지요.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일본 정부와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중재위로 가자고 하지만 두 나라가 대화하자고 하면 일본 정부는 당장 응할 것입니다. ‘그 당시의 실태와 1965년 한일협정에 대해 같이 살펴보자. 그동안 우리는 원고들이 일본 기업에 대해 재산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하지 않도록 설득하겠다. 일본도 당장 중재위로 가는 것을 미루자’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외교에는 상대가 있는 법인데 지금처럼 일본에 ‘한국 사법부의 판결에 따르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 문재인 정부에 그럴 만한 의지가 있을까요.

“국가의 수반답게 문재인 대통령이 나서야 합니다. 상징적으로 지금의 무능하고 대책 없는 외교팀을 교체해 시그널을 주는 것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일본의 책임



2018년 8월 15일 부산 동구 초량동 정발 장군 동상 앞에서 민주노총 지역본부장들과 적폐청산 사회대개혁 부산본부 관계자들은 강제징용 노동자상 건립을 선언했다. 사진=조선DB
― 거의 고의적으로 한일관계를 망가뜨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런 노력을 하겠습니까. 김일성의 ‘갓끈론’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이라는 갓은 미국과 일본이라는 갓끈만 잘라버리면, 바람이 휙 불기만 해도 날아가 버린다’라는….

“네. 알고 있습니다. 김일성이 똑똑한 거지요. 그런데 저는 상황이 이렇게 악화된 데에는 일본 측의 잘못도 있다고 봅니다.”

― 어떤 점에서요.

“하나는 동정주의(同情主義)에 찌든 이른바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시민단체・오피니언 리더들입니다. 이들은 문제의 실태를 제대로 알아서가 아니라 일제(日帝)의 식민지배가 잘못됐다는 전제 아래서 동정심을 바탕으로 이른바 위안부 문제나 징용노동자 문제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동정을 받아야 합니까? 또 일본 정부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봅니다.”

― 그게 어떤 겁니까.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보여준 태도는 그야말로, ‘우리가 식민통치했으니까 그냥 봐주고 넘어가지’ 하는 태도였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이렇게 커진 거지요. 10년 전부터라도 일본 정부・지식인・언론이 사실을 놓고 제대로 따지자고 나왔으면, 지금 한일관계가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한국의 연구자들, 국민들이 이런 식으로 막 가지 못했을 겁니다. 그 점에서 일본도 심각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日帝 잔재 청산’ 운운은 시대역행”

― 대만은 50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지만, 우리처럼 반일감정이 심하지는 않다고 하더군요. 왜 그런 것일까요.

“두 가지 정도 차이가 있었다고 봅니다.

첫째, 한국의 경우 북한의 직접적인 위협 아래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민들을 통합하기 위해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했습니다. 대만의 경우는 우리처럼 중국의 위협이 직접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덜했지요.

둘째, 우리에게는 반일을 지속적으로 선동하고 반일이 진보의 표징인 것처럼 선전해온 북한이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런 북한이 한국의 소위 진보적인 지식인들에게 수십 년 동안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덩달아 춤을 췄습니다. 반면에 중국은 대만을 흡수하기 위해 분열시키고, 일본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 요즘 고등학교 ‘친일(親日) 교가’ 바꾸자는 캠페인이 있던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 나라, 국민, 사회의 능력이라는 것에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능력뿐 아니라, 다른 사회의 좋은 문화를 습득할 수 있는 능력도 포함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계속 ‘일제 잔재 청산’ 운운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逆行)하는 소리죠.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다른 사회의 기술과 문명을 흡수하는 것 자체가 능력입니다. 그걸 흡수하지 못하는 것이 무능력한 것입니다. 한국이 이만큼 발전한 것도 좋은 이웃에게 좋은 것을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런 성과를 이어가야 하는데 100년 전으로 돌아가자니….”

―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반일민족주의의 세례를 받았는데, 어떻게 거기서 벗어나게 됐습니까.

“제가 운이 좋았지요. 이영훈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뒀고, 낙성대연구소에서 ‘지도교수의 지도교수’였던 안병직・이대근 교수님께 배울 수 있었으니까요.”

― 어떻게 이영훈 교수님께 배우게 됐습니까.

“저도 대학시절에는 주사파(主思派)는 아니었지만, 운동권이었습니다. 당시 대학원에서 마르크스경제학을 경제학으로 인정해주는 분은 이영훈 교수님밖에 없어서, 그분께 배우게 됐습니다.

경제사를 공부하다 보니, ‘인생이라는 것이 단순치 않듯이 역사라는 것도 단순치 않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점차 마르크스주의를 버리고, ‘주의(主義)보다도 지금 우리 한국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가’ 하는 관점에서 역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박사 학위 논문에서도 식민지 수탈론을 비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학위 논문은 무엇에 대한 것이었습니까.

“조선시대 이후 임야(林野) 소유권(所有權)의 형성에 대한 것입니다. 산림 훼손으로 인한 조선왕조의 생태학적 위기, 총독부가 추진했던 산림녹화(山林綠化) 정책, 일제의 산림녹화 정책과 박정희 정부의 산림녹화 정책 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등을 다루었지요. 그 과정에서 식민지수탈론을 많이 비판했습니다.”

―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인데, 그런 주장은 우리 학계에서 설 땅이 좁지요.

“논문을 내놓아도 반응이 없으니, 그게 답답합니다. 그에 대해 반론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학자가 그에 대해 인용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인용을 한다 하더라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의 연구가 있다’면서 각주(脚註)에 이름과 논문 제목만 써놓습니다. 논문 본문에 내용을 소개하고 그것을 비판・동의하거나, 어떤 점에서 비판・동의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지 않는 것이죠. 그나마 이 정도면 양호한 편입니다. 대부분이 없는 논문, 없는 책으로 치고, 유령과 같은 연구자로 취급하는 거죠. 차라리 SNS에서는 ‘친일파’라고 비난하기라도 하죠.”

― 여전히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수탈론’이 대세지요.

“수탈론이라는 것은 사실과 다를 뿐 아니라,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 조상, 우리 역사, 우리 정신을 폄하하는 주장입니다. 쌀을 수탈당하고, 토지를 수탈당할 때, 우리 조상들은 뭘 했다는 얘기입니까. 위안부로 자기 딸, 여동생, 이웃집 소녀가 끌려갈 때,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는 얘기입니까. 조선인들은 일본에 끌려가서 월급도 못 받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고작 ‘엄마, 배가 고파요’라고 낙서나 하고 있었다는 겁니까.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것도 역사왜곡입니다.”


“시진핑이 천안문 사태에 대해 입 막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 박광온 민주당 의원은 5·18민주화운동을 폄하하는 행위, 4·3사건을 폄하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안과 함께 일제 침략을 부인하거나 찬양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안도 제안해놓고 있습니다.

“5・18에 대한 연구가 되어 있는 게 무엇인가요? 5・18 시작 이후 북한에서 특수군이 내려왔는지 어쩐지는 알 수 없지만, 사태가 왜 그렇게 심각한 상황으로까지 진행됐는지, 그 성격은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 이런 것에 대해서는 밝혀진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밝혀진 게 하나도 없는데, 사실규명, 그가 학자건 누구건 간에 사실연구를 하겠다는 사람들의 입을 막는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아주 부분적인 이야기들을 정치인들이 자기들 입맛에 맞는 것만 뽑아다가 국민들에게 강요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처벌하겠다는 것은 시진핑(習近平)이 천안문 사태에 대해 공산당의 해석과 다른 해석을 못 하도록 입을 막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일제시대나 4・3사건에 대해 다른 소리를 하면 처벌하겠다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 긴 시간 동안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해주시죠.

“반일민족주의・반일종족주의를 문제 삼는 것은 단순히 ‘일본과 사이가 나빠지면, 우리가 군사적・경제적으로 손해를 본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런 운동을 벌이는 진정한 이유는 일본뿐 아니라 우리도 역사를 제대로 보자는 것입니다. 왜 조선이 망했나, 왜 6・25가 일어났나 등. 과거의 역사를 제대로 봐야 우리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우리의 경험을 스스로 왜곡한다면, 우리에게 무슨 미래가 있겠습니까.”⊙

조회 : 14038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