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27

박한식 ‘평화에 미치다’ 한겨례 (1) 미국가기 전후

박한식 ‘평화에 미치다’ 한겨례 기고 다시 읽기 – 박한식 사랑방

Articles 26-46 here  밑일수록 오래된 것 - 밑부터 읽을 것

[1-15] 평화 편
[16-25] 통일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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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4] 미국 편
[35-46] 한국편 - 미국 가기 전

박한식 ‘평화에 미치다’ 한겨례 기고 다시 읽기 – 박한식 사랑방

한겨례 기고 다시 읽기 – 박한식 사랑방


한겨례 신문에 연재 된 ‘평화에 미치다’ 글 모음밑에 링크를 클릭하세요!


  1. 길을 찾아서-45회 한민족 통일 실천방안-마지막회
  2. 길을 찾아서-44회 나의 통일론 (하)
  3. 길을 찾아서-43회 나의 통일론(상)
  4. 길을 찾아서-42회 ‘트랙2 회담’ 성사시키다
  5. 길을 찾아서-41회 국제문제연구소(GLOBIS
  6. 길을 찾아서 (40회) 내가 학문하는 목적은
  7. 길을 찾아서 (39회) 조지아주 애선스 입성기
  8. 길을 찾아서-38회 조지아대학 교수가 되다
  9. “1960년대 ‘반전운동 기지’ 미네소타에서 ‘평화학’ 초석 다졌다”
  10. “모두 이산의 민족이니 ‘750만 재외동포’는 통일 자산이다”
  11. “마틴 루서 킹의 모교에서 준 ‘예비 노벨평화상’…과분할 뿐이다”
  12. “북한 농학자들 ‘미국 농축산업 견학’ 제안에 뛸듯 반겼다”
  13. “두 기자 석방 위해 평양행…북은 ‘빌 클린턴 특사’ 고집했다”
  14. “한국전쟁 70년…미국의 ‘북한 악마화’ 넘어서야 끝난다”
  15. “개성에 이산가족 상봉지구 만들어 ‘민족의 한’ 풀어주길”
  16. “미국 첫 방문한 덩샤오핑 배려로 하얼빈 가서 고모 상봉했다”
  17. “세상 부럼 없다는 북한 사람들 ‘행복지수’ 잣대부터 다르다”
  18. “주체사상-마오쩌둥사상 ‘뿌리’ 같아 유사하지만 ‘표절’ 아니다”
  19. “김일성 없는 북한이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주체사상 때문이다”
  20. “북한은 어버이수령이 지배하는 거대한 가족국가다”
  21. “북한에서 가장 완벽한 ‘사회정치적 생명체’는 김일성이다”
  22. “북한은 주체사상의 나라…‘역지사지’ 눈으로 봐야 보인다”
  23. “허정숙 초청으로 첫 방북…머리에 뿔 달린 악마들 없었다”
  24. “북한 실세는 누구인가…집단의사결정 모르는 우문일 뿐”
  25. “사회주의 국가 ‘북한’ 이해하려면 ‘선’ 넘어 생각해야 한다”
  26. “미국 민주주의는 과연 한국이 따라야 할 표준인가”
  27. “정반대 기독교인 대통령 ‘카터-부시’…민주주의 다양성 상징”
  28. “이방인 반세기 ‘미국 민주주의’ 관찰해보니 선망과 달랐다”
  29. “인디언부터 테러까지…미국은 ‘십자군의 악마’ 찾고 있다”
  30. “미국 역사에서 발견한 ‘전쟁병’…첫번째 원죄는 노예제도다”
  31. “정당성 없는 미국의 베트남전쟁…한국군 파병 명분도 없었다”
  32. “요지부동 한반도 냉전 ‘미국 지적 식민지화’ 탓도 크다”
  33. “미 강단 ‘행태주의’ 지배…평화병 지적 처방 못찾아 절망했다”
  34. “100달러로 시작한 워싱턴살이 홀서빙하며 ‘노예문화’ 실감했다”
  35. “4·19 그날 경무대 앞에서 총격 겪으며 ‘민중혁명’ 체험했다”
  36. “박종홍·니부어·강원용·함석헌…사상의 바다 헤매다”
  37. “고교시절 적십자 활동하며 인생 동반자도 스승도 만났다”
  38. “아버지 ‘빨갱이’ 고초에 정치인 꿈꾸다 ‘소년 웅변왕’ 됐다”
  39. “안식처 찾아 귀향했으나 또다시 ‘전쟁 참상’ 겪어야 했다”
  40. “어릴 적 만주땅 즐비했던 주검 보면서 ‘평화병’ 걸렸다”
  41. “김일성의 이율배반적 유훈…트럼프는 이해하는가”
  42. ‘칠흑같은 북한’ 한반도 야경 사진의 진실은 무엇인가
  43. “제재에 굶어 죽는 북한 아이들…관리들 껴안고 울었다”
  44. “클린턴 행정부는 내게 자꾸 물었다…영변 폭격하면 어찌될까”
  45. “한반도 평화해법 제시하겠다”
  46. “클린턴 ‘카터 평양행’ 돌연 승락하자 김영삼도 급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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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박한식의 평화에 미치다 20회-한국 민주주의의 이상과 현실

‘한국 후진적’ 비판하는 지적 풍토 ‘불편’

한국 민주주의 역사적 도전 과제 5가지
‘왕정의 유산’ 성조기 시위 등 사대주의
‘일제의 유산’ 독립 막은 친일파들 득세
‘분단의 유산’ 한민족 독자 정치의식 부재
‘전쟁의 유산’ 빨갱이 본능적 적대 여전
‘냉전의 유산’ 안보·군사적 긴장 일상화

미국산 수입 제도-한국역사 도전 ‘충돌’
‘개인의 자유’ 간첩조작·고문 등 유린
대권주자-특정 종교세력 결탁 ‘정치실종’
다수결 승복·정치적 타협 문화 ‘취약’

‘평화 우선’ 통일 부정적 사유 확산 추세
“한국 민주주의 과제는 한반도 평화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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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 교수는 한국 민주주의의 특수성을 도외시한 채 미국 민주주의를 표준으로 삼는 국내 풍토를 비판한다. 한편으론 한국 민주주의의 이데알튀푸스(이념형) 가운데 하나인 ‘왕정의 유산’이 극심한 당쟁과 사대주의 행태로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2017년 1월 서울 덕수궁 앞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서 극우파들이 태극기보다 더 큰 성조기를 펼친 채 행진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나는 한국을 방문해서 지인들과 만나 민주주의에 대해 얘기하다보면 고개를 갸우뚱거릴 때가 많았다. 무심코 듣다 보면 거의 언제나 미국 민주주의가 하나의 표준으로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선진’ 민주주의를 예로 들면서 한국의 ‘후진’ 민주주의를 비판하기 때문이다. 그런 얘기를 듣고 돌아올 때면 늘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어찌하여 미국 민주주의를 한국 민주주의가 따라야 할 표준으로 간주할 수 있단 말인가? 미국 민주주의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특수한 환경에서 제기된 도전에 응전하기 위해서 고안된 ‘미국적’ 민주주의가 아니었던가? 그런 특징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한국 민주주의 역시 한국이 처한 특수한 환경에서 제기된 도전에 효과적으로 응전할 수 있는 ‘한국적’ 민주주의로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한국 민주주의를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미국 민주주의가 아니라 앞서 ‘길을 찾아서’ 18회에서 제시한 민주주의의 이데알튀푸스(이념형)여야 마땅하다.
나는 한국 민주주의에 제기된 역사적 도전을 5가지 범주로 정리해봤다. 첫째, 왕정의 유산이 있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는 모두 왕정으로 통치되었다. 왕정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 특히 조선시대는 신유학을 국교로 정함으로써 정치문화의 질적 변화를 초래했는데, 그로부터 파생된 가장 대표적인 유산이 당쟁과 사대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이른바 ‘식민사학’ 극복의 명분으로 당쟁과 사대주의를 외면하거나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당쟁과 사대주의의 유산을 온존시키는 데 기여했을 뿐이었다. 오늘날 한국 정치 현장에서 적나라하게 목격할 수 있는 타협 불가능한 정치적 투쟁, 그리고 성조기를 들고 시위할 정도로 미국에 편향된 사유양식 등은 조선시대의 당쟁과 사대주의의 유산을 빼놓고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일제 식민지배의 유산이 있다. 일제는 창씨개명 등을 통해서 민족 정체성을 말살하고자 했다. 그 와중에 친일파가 득세하고, 독립운동가는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는데, 그처럼 부조리한 유산이 현재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예컨대 ‘독립운동가 후손은 3대가 망한다’는 말은 일제 식민지배의 유산을 예증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분단의 유산이 있다. 한반도가 외세에 의해 물리적으로 갈라지면서 한민족의 사유양식에도 분단의 골이 깊어졌다. 그래서 한민족 공동의 번영을 기약할 수 있는 독자적 정치의식을 개발하지 못했다.
넷째, 한국전쟁의 유산이 있다.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특히 국군이 양민을 ‘빨갱이’로 간주해서 학살한 사람이 무려 100만여명에 이른다. 여순사건, 제주 4∙3 사건, 국민보도연맹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구자환 감독이 양민학살 현장을 10여년간 답사하면서 제작한 영화, <레드 툼>(빨갱이 무덤)과 <해원>을 보면 남한 전역이 킬링필드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나의 아버님도 빨갱이로 몰려 평생을 고난 속에서 사셨다. 나 역시 빨갱이의 별칭인 종북학자 내지 친북학자로 간주되어 학문 연구와 사회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으면서 평생을 살았다. 그런데도 빨갱이라는 ‘주홍글씨’를 본능적으로 저주하는 적대감이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여전히 지배한다. 한국에서 빨갱이는 모든 종류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면죄부로 통용되기 때문이다.
다섯째, 냉전의 유산이 있다. 냉전은 분단과 한국전쟁의 유산 등을 화석화했다. 한반도에서 불신·공포·무력 등을 요체로 삼는 안보 패러다임을 고착시켰고, 남북간의 ‘정통성 전쟁’(legitimacy war)을 가속화했으며,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일상화했다. 그런 와중에 남한과 북한은 모두 군사강국이 되었다. 남한은 미국의 군산복합체를 본뜬 군산복합체를 보유하고 있고, 한-미 군사훈련을 연례적으로 하고 있다. 그로부터 위협을 느낀 북한은 핵무장 국가가 되었다.
박한식 교수는 분단·전쟁·냉전의 유산을 안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는 안보 패러다임에 갇혀 한반도 평화통일의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2017년 9월 북한은 6차 핵실험을 감행함으로써 국제사회에 사실상 핵무장 국가임을 공표했다. 사진 &lt;연합뉴스&gt;
박한식 교수는 분단·전쟁·냉전의 유산을 안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는 안보 패러다임에 갇혀 한반도 평화통일의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2017년 9월 북한은 6차 핵실험을 감행함으로써 국제사회에 사실상 핵무장 국가임을 공표했다. 사진 <연합뉴스>
하지만 한국 민주주의는 한국 역사에서 제기된 도전을 직시할 수 없었다. 한국 민주주의는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 이식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 민주주의는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는 대신,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설정한 의제를 해결하는 데 더욱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친일파가 친미파로 변신해서 한국 민주주의를 선도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현재 한국 민주주의가 미국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수용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으면서도 극심한 갈등과 각종 부조리가 끊이지 않는 까닭은 대부분 미국에서 수입한 제도와 한국의 역사적 유산에서 제기된 도전 간의 충돌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이데알튀푸스를 잣대로 한국 민주주의에 내재된 문제의 실상을 분석해본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한국 민주주의 역사는 개인의 자유가 유린된 사건으로 점철된 역사이기도 하다. 친일 경찰이 주도한 반민특위 사건, 일제 판검사가 주도한 국회 프락치 사건, 간첩의 누명을 씌워 희생시킨 조봉암 사건, 해방 이후 최대 간첩조작 사건인 동베를린 사건, 인혁당 사건, 5·18 광주민중학살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지금도 국회에서는 한국전쟁유족회에서 간청하는 과거사법을 통과시켜주지 않고 있다.
18세기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자유와 방종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강조했다. 자유는 반드시 사회 질서의 근간인 법과 규범을 준수하는 절제력(discipline)을 요구한다. 자유가 절제력을 상실하게 되면 이내 방종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볼 때 한국 민주주의에서 주장하는 자유는 방종에 가까운 사례가 많다. 예컨대 박근혜 정부에서는 탈북민이 가세한 인권단체에서 북한으로 ‘삐라 풍선’을 날려 보내는 행위를 표현의 자유의 이름으로 옹호했다. 국제정치의 세계는 전쟁의 가능성이 상존한다. 북한에 삐라를 보내는 행위가 빌미가 되어 전쟁이 발생한다면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그 전쟁을 방어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북한은 남한에서 풍선을 계속 보내면 총격을 가하겠다고 수차례 경고했었다. 자유를 방종으로 이해하는 무지가 한반도의 대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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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 교수는 ‘자유’를 넘어선 ‘방종’은 민주주의와 평화를 오히려 위협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2014년 10월 자유북한운동연합 회원들이 민통선 부근에서 대북전단 풍선을 날렸을 때 북한군이 총격을 했고 이에 한국군도 대응사격을 한 사례가 있다. 사진 <한겨레>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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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서 중시하는 자유는 기본적으로 계몽사상에서 탄생한 가치다. 그런데 계몽사상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요체로 삼는다. 따라서 민주주의에서 허용하는 정치적 자유와 종교적 자유는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 그런 분리는 종교의 터전을 개인의 사적 영역으로 한정함으로써 정치의 공적 영역에 침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유력 대권주자와 특정 종교가 긴밀하게 제휴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체험한 가장 끔찍한 재앙은 대부분 정치와 종교가 결탁한 종교전쟁에서 파생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종교전쟁이 끝없이 창궐하는 중동을 보라! 협상과 타협을 요체로 삼는 정치적 투쟁은 협상과 타협이 불가능한 종교적 투쟁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런데도 정치와 종교가 결탁하게 되면 협상과 타협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됨으로써 정치 그 자체가 실종되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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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 교수는 민주주의의 기본인 ‘정교 분리’가 ‘정교 결탁’이 될 때 정치는 실종한다고 지적한다. 지난달 20일 청와대 앞에서 단식투쟁에 나선 황교안(왼쪽) 자유한국당 대표가 ‘개신교 극우세력’ 전광훈(오른쪽) 목사와 함께 손을 잡고 ‘반문재인 투쟁’을 결의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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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서 중시하는 평등이라는 가치는 다수결의 이론적 기초가 된다. 다수결은 평등을 전제했기 때문에 반드시 승복을 요구한다. 다수결에 승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평등을 부정하는 특권적 주장이다. 그러나 내가 볼 때 한국 민주주의에서는 승복의 문화가 대단히 취약하다.
권력집중이 아니라 권력분립이 민주주의의 근간이라는 사실은 하나의 상식에 속한다. 그러나 그런 상식이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에서는 제대로 통용되지 않았다. 주지하듯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는 대통령이 막강한 권력을 불법적으로 행사하면서 국민의 인권을 수없이 유린했다. 그처럼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대통령을 국부나 국모로 이해하는 현상은 한국 사회가 여전히 왕정의 유산을 탈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예증한다.
그런 반면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 민주화가 진전되자 대통령의 권력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런 공감대에는 유럽 자유민주주의 사상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다. 자유민주주의에서는 최소정부를 지향하기 때문에 통치자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현대 민주주의는 통치자의 권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통치자의 권력이 약한 정부는 정치적으로 무능한 정부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무능한 정부는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함으로써 독재정권이 들어설 빌미를 제공하기 쉽다. 정치적으로 무능했던 장면 정부가 박정희 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했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민주주의는 권력의 합법적 행사를 의미한다. 민주주의에서 권력분립을 수단으로 대통령의 권력을 견제하는 목적은 권력의 불법적 행사를 방지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 권력의 약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통치의 핵심 수단인 권력을 약화시키면 통치 본연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국가가 안보, 경제 성장, 분배의 정의, 환경문제 해결 등과 같은 공공이익(public good)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많은 권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국민의 동의를 기초로 운영되는 정치체제다. 내가 볼 때 국민의 동의의 요체는 중산층의 지지다. 솔직히 말해서 상층의 일차적 관심사는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있고, 하층의 관심사는 경제적 생존에 집중되어 있다. 그 반면 중산층은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를 가지고서 국가의 공적 가치와 장래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 특히 중산층이 활동하는 시장의 문화는 민주주의의 문화와 ‘선택적 친화성’을 지닌다. 중산층이 시장에서 합리적 계산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는 행위는 선거판에서 합리적 계산에 따라 후보자를 선택하는 행위와 질적으로 유사한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은 대기업 중심 경제개발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중산층이 육성되기가 쉽지 않았다. 더욱이 한국에서는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부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데, 이는 중산층의 몰락이 가속화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중산층이 몰락하게 되면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합리적 설득에 의해 운영되는 정치체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 민주주의에서 합리적 설득의 문화 역시 대단히 취약하다. 민주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 폭력적 시위가 연출되는가 하면, 국회의원의 장외투쟁도 매우 빈번하게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여야 간의 사생결단적 투쟁의 양상을 유심히 관찰하면 조선시대 당쟁의 양상을 쏙 빼닮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합리적 설득을 방기한다면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도 기약할 수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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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 교수는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합리적 설득 문화가 취약해 국회에서도 종종 폭력 사태를 연출한다고 진단한다. 2008년 12월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 처리를 둘러싼 여야의 극한 충돌은 <타임> 아시아판 표지(맨 왼쪽 사진)에 등장하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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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민주주의의 이데알튀푸스에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한국의 역사적 유산에서는 선명하게 드러나는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가 하나 있다.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이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은 오직 한국 민주주의에 부과된 특수한 과제다. 평화적 통일 없이는 한반도의 안정적 평화는 영원히 기약할 수 없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유통되는 한국 민주주의 관련 연구서나 교과서에는 한반도 평화통일의 과제가 거의 공통적으로 빠져 있다. 이런 현상은 한국 민주주의가 주로 미국에서 발간된 민주주의 책을 보면서 따라 한 데서 파생된 심각한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한국의 ‘여론의 풍토’(climate of opinion)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중요성이 자꾸만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한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다’, ‘통일 대신 평화를 우선시해야 한다’ 등등의 견해가 확산되는 추세에 있다. ‘여론의 풍토’를 선도해야 할 지식인들 사이에서 민족의 실존적 도전을 외면하는 통일 부정적 사유가 팽배하는 까닭은 그들의 몰역사적·반지성적·비주체적 사유양식에서 파생된 것이다. 도대체 그들이 숭상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어떤 지식인이 미국이 직면한 도전을 외면한 적이 있었나? 한국 민주주의는 한국이 직면한 민족의 실존적 문제를 끊임없이 해결하는 ‘한국적’ 민주주의여야만 한다. 한국 지식인의 존재 이유도 바로 그 과제의 해결에 헌신하는 데서 찾아야만 할 것이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21056.html#csidx1c56f14c588248ab924ed09867067e5 


[27] 정반대 기독교인 대통령 ‘카터-부시’…민주주의 다양성 상징”


민주당 4명·공화당 6명 대통령 관찰
최초 흑인 대통령 오바마 등장 ‘기이’
“실제 흑인인권운동 했다면 당선 불가”
여성 대통령 한명도 배출 못한 한계도

‘카터’ 재임시절 유일하게 전사자 없어
연방헌법 ‘정교분리 원칙’ 철저 준수
사다트-베긴 ‘캠프데이비드협정’ 산파

‘아들 부시’ 9·11 대응 ‘테러와 전쟁’
기독교 선악관 그대로 ‘악의 축’ 규정
“전쟁 지속할수록 민주주의 원칙 침식”

미국 민주주의 장점은 ‘창조 정신’
자유·평등·행복 ‘독립선언서’ 명시
도전 때마다 연방헌법에 ‘수정조항’

‘제도 안에서의 자유’로 방종 견제
‘언론 자유’로 민주주의 산소 공급
“다른 의견도 서로 존중하는 관습”

길을 찾아서 19회-​미국 민주주의의 이상과 현실


‘평화병’ 처방을 찾고자 미국에 정착한 박한식 교수는 역대 10명의 대통령 가운데 지미 카터와 조지 W. 부시(아들 부시) 두 대통령의 상반된 행적에 특히 주목해왔다. 1978년 9월5일 워싱턴디시 북쪽 메릴랜드주에 있는 대통령 별장 캠프 데이비드에 지미 카터(가운데) 대통령의 초대를 받은 안와르 사다트(맨왼쪽)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맨오른쪽) 이스라엘 총리가 도착해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 지미커터도서관 제공


1978년 9월5일부터 13일간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서 합숙하며 협상을 벌인 사다트(맨왼쪽) 이집트 대통령과 베긴(맨오른쪽) 이스라엘 총리는 17일 백악관에서 카터(가운데) 대통령의 주선으로 역사적인 ‘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사진 지미카터도서관 제공

박한식의 평화에 미치다


내가 반세기 이상 미국에 살면서 관찰한 10명의 미국 대통령은 미국 민주주의의 다양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동안 민주당에서 4명의 대통령을, 공화당에서는 6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다. 존슨은 베트남전쟁의 책임을 지고 재선을 포기했고,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 직전 사표를 내고 물러났다. 또한 인종주의를 해소하지 못한 미국에서 오바마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등장하는 기이한 모습도 보았다. 오바마의 당선은 마틴 루서 킹의 흑인인권운동을 통해서 미국의 정치문화가 크게 혁신된 덕분이었다. 그러나 오바마가 정작 흑인인권운동을 했더라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여성 대통령이 한 명도 나오지 못한 한계도 보았다.

‘평화병’을 앓고 있는 내가 특별히 주목한 대통령은 카터와 아들 부시였다. 미국은 전쟁의 나라다. 카터를 뺀 역대 미 대통령 모두가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카터 재임 중에는 단 한 명의 전사자도 나오지 않았다. 카터는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을 정부의 정책에는 결코 반영시키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미국 연방헌법에서 규정한 정교분리의 원칙을 철저하게 준수했다. 중동 평화를 위해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슬람을 믿는 팔레스타인 자치구도 정치적으로 인정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는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탄생시키는 산파 구실을 했다.


조지 더블유 부시 미국 대통령은 2003년 3월 18일 오전 10시(한국시각) 대국민담화를 통해 이라크 전쟁을 선포했다. 하지만 이라크 침공의 주요 구실이였던 대량살상무기는 2006년 12월 30일 사담 후세인의 사형으로 전쟁이 막을 내린 이후 증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하지만 아들 부시는 카터와 정반대였다. 그는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자 곧바로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했다. 특히 북한, 이라크, 이란, 시리아 등을 ‘악의 축’으로 선포하면서 지상에서 영원히 제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역시 카터처럼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이지만, 카터와 달리 자신의 기독교 신앙을 정책에 단호하게 반영시켰다. ‘악의 축’이라는 개념 자체가 기독교의 선악관이 적나라하게 투영된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과 같은 ‘악의 축’은 정치적 협상 대상이 아니라 군사적으로 철저히 응징해야 할 대상만이 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아들 부시가 표방한 ‘테러와의 전쟁’이란 용어도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테러의 본질은 전쟁이 아니라 일종의 캠페인이기 때문이다. 캠페인을 통해서 국제여론의 지지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미국이 아무리 막강한 전쟁 수단을 지녔다 해도 그 캠페인은 결코 끝낼 수 없다. 따라서 ‘테러와의 전쟁’은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다. 그처럼 전쟁이 지속되면 미국이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원칙은 지속적으로 침식될 수밖에 없다.


버락 오바마는 2008년 미 역사상 첫 아프리카계 대통령에 당선된 데 이어 2012년 연임에 성공했다. 2009년 1월 백악관에서 오바마가 부인 미쉘(오른쪽)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44대 미국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8년 12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가 당선되자 한 흑인 지지자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박한식 교수는 오바마가 마틴 루터 킹처럼 실제로 흑인 인권운동을 했다면 대통령으로 뽑히지 못했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러나 미국의 민주주의에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길을 찾아서’ 18회에서 구성한 ‘민주주의의 이데알튀푸스’를 수단으로 미국 민주주의의 장단점을 분석적으로 평가해 보기로 하자.

무엇보다 미국 민주주의는 기존 제도를 답습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한 것이다. 미국이 처한 특수한 환경에서 제기되는 각종 도전에 슬기롭게 응전할 수 있는 처방책으로서 고안되었다. 그러한 창조 정신은 1787년 6월28일 연방헌법 제정회의 때 벤저민 프랭클린의 연설에 여실히 담겨 있다. “우리는 좋은 정부의 모델을 찾기 위해 고대사로 거슬러 올라가 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상이한 형태의 공화국 정부를 검토했지만, 그것은 모두 붕괴의 씨앗을 품고서 수립된 불완전한 정부였기 때문에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 우리는 유럽의 모든 근대 국가를 검토해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국가도 우리 실정에 맞는 헌법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진리를 찾고 있습니다.”

미국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환경의 특수성을 중요하게 고려하는 지식사회학적 고찰이 필요하다. 건국 초기 미국이 직면한 도전을 다섯가지 정도로 정리해봤다. 첫째, 독립혁명 이후 독립선언서에서 천명한 자유, 평등, 행복의 추구 등을 보장할 수 있는 정치체제를 만들어야만 했다. 둘째, 국가의 치안 능력이 취약한 상황에서 개인의 안전을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셋째, 13개 주의 권리를 평등하게 보장해야 했다. 넷째, 남북전쟁 이후 해방된 흑인과 인디언 등 소수 인종의 권리를 평등하게 보장할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정치체제를 만들어야 했다. 다섯째, 미국은 이민사회다. 따라서 다인종이 제기하는 문제를 정치제도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어야 했다.


미국은 1776년 대륙회의에서 준비한 ‘연합헌장’을 1781년 3월 영국 식민지였던 13개 주의 승인을 거쳐 채택했다. 이후 지금까지 ‘수정조항’을 추가해 보완을 하고 있다. 사진은 1787년 9월 17일 연방 헌법 제정 장면을 그린 하워드 챈들러 크리스티의 1940년 작품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미국은 이들 도전에 맞서 비교적 효과적인 대책을 강구했다. 먼저 민주주의의 이데알튀푸스에서 설정한 자유의 관점에서 평가해 보기로 하자. 우선 독립선언서에서 천명한 자유, 평등, 행복의 추구 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 연방헌법에 ‘수정조항’을 추가했다. 권리장전으로 불리는 수정조항에서는 종교·언론·출판·집회 등의 자유를 규정했다. 특히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되 계몽주의의 지적 전통에 따라 정치와 종교를 철저히 분리하는 원칙을 천명했다. 또한 그때 국가의 치안 능력이 취약한 상황에서 개인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수정조항 제2조에서 개인의 총기 휴대 권리를 규정했다. 흑인과 인디언 등 소수 인종의 권리를 보장하는 과제도 어려운 과정을 거쳐 해결했다. 1870년 비준된 수정조항 제15조를 통해서 흑인의 참정권을, 1920년 비준된 수정조항 19조를 통해서 여성의 참정권을, 1924년 통과된 스나이더법(Snyder Act)을 통해서 인디언의 참정권을 각각 인정한 것이다.

미국의 연방헌법에서 보장한 자유는 현실 정치에서 비교적 잘 이행되고 있다. 미국 사람들에게 자유란 한마디로 ‘제도 안에서의 자유’를 의미한다. 제도를 벗어난 자유는 철저히 제재를 받아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탄탄하다. 미국 사회에서 자유가 18세기 자유주의 사상가가 우려한 ‘방종’으로 전락하지 않는 결정적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정치와 종교를 철저히 분리하는 원칙 역시 적어도 미국 국내 정치에서는 비교적 잘 지켜지고 있다. 선거판에서 특정 종교세력이 특정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면 그들 모두 국민들로부터 완전히 외면을 당한다. 따라서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사라져 버린다. 미국의 높은 시민교육 수준이 민주주의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내가 가장 주목하는 것은 ‘언론의 자유’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야만 민주주의가 호흡할 수 있는 ‘산소’를 공급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공급 방식은 ‘객관보도’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언론은 ‘객관보도’에 충실함으로써 매체에 한정된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국민에게 옳고 그른 것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는 선에서 멈춘다. 특히 미국 언론은 선거운동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미국에서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을 노골적으로 옹호하는 언론은 국민들이 외면해 버리기 때문에 생존할 수 없다. 언론의 자유 역시 미국의 높은 시민교육 수준이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반면 미국 언론의 사설·논설·칼럼 등의 필자는 각자의 식견에 따라 언론의 보도 내용을 해석하고 비평한다. 이는 언론이 정치교육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론사 간부가 필자로 나서는 사례는 없다.

나 역시 미국이나 국제 매체를 통해 내 견해를 적극적으로 밝혀왔다. 나는 미국 <에이비시>(ABC) 방송에서 1994년부터 2008년까지 14년간 정치평론가로 활동했고, 그 이후에는 <시엔엔>(CNN) 등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지금도 영국의 <비비시>(BBC), 중동의 <알자지라>, 터키의 <티아르티>(TRT), 일본의 <엔에이치케이>(NHK) 등에도 출연해서 정치평론을 계속하고 있다.


박한식 교수는 <에이비시> <시엔엔>(사진) 등 미국의 주요 언론매체는 물론 영국 <비비시>, 중동 <알자지라>, 터키 <티알티>, 일본 <엔에이치케이> 등에도 출연해 정치평론 활동을 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나는 특히 국제 매체의 정치평론을 통해 민주적 토론 규범을 체득할 수 있었다. 예컨대 내가 미국과 정치적 이해를 달리하는 알자지라에 출연해서 북한 문제에 관한 정치평론을 하고 나면 미국의 방송사에서 나에게 유사한 주제로 인터뷰를 요청하는 적이 많았다. 미국 방송사는 대체로 나와 견해를 달리하는 전문가를 섭외해서 나와 논쟁을 붙인다. 나는 나의 연구에 기초를 둔 북한에 대한 견해를 알자지라나 미국 방송에서 일관되게 얘기했다. 나와 견해를 달리하는 전문가 역시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밝힌다. 그러나 서로 얼굴을 붉히며 논쟁이 파국으로 치닫는 사례는 없다. 나는 상대방에 동조는 하지 않지만 그의 견해를 이해하는 태도를 취하고, 상대방 역시 같은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시청자는 우리들의 논쟁을 보면서 흥미를 느낀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방송사에서 자꾸만 나를 인터뷰에 초청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생각할 때 더욱 중요한 것은 시청자가 우리의 논쟁을 지켜보면서 이해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런 과정 자체가 살아 있는 정치교육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미국이나 국제 언론의 인터뷰에 참여하면서 배운 또 하나의 중요한 관점은, 철저히 ‘전문직주의’(professionalism)가 지배한다는 것이다. ‘전문직주의’는 개인의 전문적 능력을 의미하는 ‘전문가주의’(expertism)와 달리 문화적 현상을 의미한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모르는 ‘잡학다식가’(generalist)가 발을 붙일 수 없다.

그러나 미국 민주주의에서 실천하는 자유가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이데알튀푸스에서 설정한 자유의 관점에서 볼 때 연방헌법의 개인 총기 휴대 권한은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다. 나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총기를 휴대한다는 것은 곧 타자의 자유를 말살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이 세계에서 총기 사고가 가장 많이 나라로 꼽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미국은 13개 주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연방제도를 만들었다. 또한 의회에서도 주의 크기와 상관없이 각 주에 의원 2명을 일률적으로 배분하는 상원제를 택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각 주의 자율성을 반영하기 위해 선거인단 제도도 만들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이데알튀푸스에서 설정한 평등의 관점에서 볼 때 위와 같은 제도들은 문제가 없지 않다. 계몽주의에서 평등이란 개인의 평등을 의미했지, 집단의 평등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의 상원제나 선거인단 제도 등은 ‘주’라는 집단의 평등을 전제로 한다. 그러다 보니 앨 고어나 힐러리 클린턴처럼 미국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고서도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하는 비민주적 모순이 반복되고 있다.

물론 미국 민주주의를 평등의 관점에서 평가해도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첫번째는 ‘승복의 문화’다. 예컨대 대통령 후보자가 선거 기간 중 아무리 치열하게 싸웠더라도 선거 결과가 나오면 패자는 지체 없이 승복하고 승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축하 인사를 건넨다. 나는 미국에 정착된 승복의 문화가 미국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상징하는 지표 중 하나라고 본다. 다수결은 개인의 평등을 전제한 제도다. 따라서 다수결에 승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개인의 평등을 유린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면 민주주의 그 자체가 와해될 수밖에 없다.

미국은 1776년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에서 준비한 ‘연합헌장’(Articles of Confederation)을 1781년 3월 모든 식민지의 승인을 거쳐 채택했다. 그러나 연합헌장을 통해서 탄생한 연합국가는 정치적 조정 능력이 취약했다. 연합국가에 부여된 권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1787년 제헌회의에서 연방정부를 탄생시켰다. 연방정부는 대통령제를 신설해서 정치적 조정이 필요한 권력을 부여했다. 다만, 대통령의 권력 남용으로 국민의 자유가 유린될 것을 우려해서 삼권분립 제도 또한 채택했다. 입법부·사법부·행정부가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권력의 부패를 방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특히 냉전 시기에 대통령의 권한이 크게 강화되었다. 예컨대 대통령은 의회의 승인을 거치지 않은 행정명령을 통해서 전쟁을 개시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대통령은 대법관 9명을 모두 임명할 수 있고, 사면권까지 행사할 수 있는데, 이런 권력은 모두 삼권분립의 근간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연합헌장’의 첫번째 문장은 ‘위 더 피플’로 시작한다. 사진 위키피디아

미국 민주주의의 또 다른 장점은 ‘배심원 제도’다. 국민에 의한 동의를 가장 극적으로 구현한 제도라고 본다. 12명으로 구성된 배심원은 무작위로 선발된다.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 등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선발된 배심원은 민주적 토론을 거쳐 의사결정을 한다. 나 역시 배심원에 여러 차례 선발되어 민주적 토론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마다 미국 민주주의가 표방하는 ‘위 더 피플’(We the people)의 동의가 실천되는 현장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끝으로 미국 민주주의는 합리적 설득에 의해서 운영되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혈연·학연·지연·돈·권력 등이 연루된 설득은 거의 용납되지 않는다. 민주적 관습이 탄탄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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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18회 민주주주의 ‘이데알튀푸스’


박한식 교수는 1965년 유학 이래 지금까지 55년째 36대 린든 존슨부터 45대 도널드 트럼프까지 모두 10명의 미국 대통령 시대를 살아왔다. 사진 위키피디아, 일러스트 송권재 디자이너

1960년 4·19 현장에서 민주주의가 유린되는 광경을 적나라하게 목격한 이후 지금까지 계속해서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 하나 있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나는 서울대 강의실에서 ‘미국 민주주의’를 하나의 모범으로 배웠다. 그런 미국 민주주의가 이승만 정부의 폭정으로 유린되는 모습을 보면서 거리로 뛰어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나와 함께 스크럼을 짜고서 경무대로 향한 친구들도 대부분 같은 생각이었다.


그 뒤 1965년부터 지금까지 반세기 이상 미국에서 살아오면서 나는 선망했던 미국 민주주의를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그 기간은 린든 존슨부터 지금의 도널드 트럼프까지 무려 10명의 대통령을 겪은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방인의 시각에서 미국 민주주의를 거리를 두고서 관찰해왔다. 또한 나는 정치학 교수의 시각에서 미국 민주주의를 학문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4·19 한복판에서 던졌던 질문을 되묻고 있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내가 관찰해온 민주주의는 미국 특유의 민주주의다. 미국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탄생한 역사적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한국에서 선망하고 답습해야 할 민주주의가 결코 아니었다. 한국 민주주의는 한국이 처한 특수한 환경에서 직면한 특수한 문제를 독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처방책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박한식 교수는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사진)의 연구방법론인 ‘이데알튀푸스’(이념형)를 차용해 미국 민주주의의 특징을 분석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한편, 막스 베버와 만나면서 나는 오랜 학문적 방황을 끝내기 시작했다. 미네소타대학 사회학과 돈 마틴데일(1915~85)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 베버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마틴데일은 베버로부터 직접 사회학을 배운 독일계 미국인 학자였다. 나는 베버를 공부하면서 내가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을 탐구할 수 있었다. 내가 정치학 공부를 시작한 까닭은 정치 현실의 문제를 진단하고 가급적 처방책까지 마련하고 싶어서였다. 베버는 나의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어주었다. 무엇보다도 베버가 사회과학적 연구 수단으로 제시한 ‘이데알튀푸스’(Idealtypus: 이념형·이상형)는 내가 과학철학적 맥락에서 독자적 연구방법론을 개발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박한식 교수는 미네소타대학 돈 마틴데일(사진) 교수의 사회학 강의를 통해 막스 베버의 이론을 알게 되면서 학문적 방황을 끝내고 나름의 연구 체계를 세웠다. 사진 미네소타대학 누리집

민주주의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민주주의의 이데알튀푸스를 먼저 구성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데알튀푸스를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다. 이데알튀푸스를 빠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인물의 캐리커처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듯 캐리커처는 그 인물의 특징적 부분을 과장해서 부각시키고 나머지 부분은 거의 생략해 버린다. 예컨대 에이브러햄 링컨의 캐리커처를 보면 구레나룻, 진한 눈썹, 깡마른 얼굴 등을 유독 크게 강조한다. 따라서 캐리커처는 실제 모습과 동떨어진 추상적 구성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캐리커처는 한 인물의 특징적 면모를 선명하게 알려주는 장점이 있다.

이데알튀푸스도 캐리커처와 유사한 방식으로 구성하고 유사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이데알튀푸스는 역사 현실에서 부각시킨 특징적 부분을 중심으로 구성한 하나의 개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는 이데알튀푸스에서 ‘이데알’이 도덕적 이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 이상’을 뜻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의 이데알튀푸스를 구성해보면, 그것을 미국 민주주의와 비교할 수도 있고 한국 민주주의와 비교할 수도 있다. 그래서 미국 민주주의와 한국 민주주의가 각각 민주주의의 이데알튀푸스와 어느 정도 가까운지 아닌지를 분석해서 각국 민주주의의 성취도를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둘을 비교해서 각자가 직면한 문제를 선명하게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길을 찾아서’ 이번 회에서는 민주주의의 이데알튀푸스를 구성하는 데 역점을 두고자 한다. 여기에서 구성한 이데알튀푸스를 수단으로 미국과 한국 민주주의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내용은 다음 회에 담고자 한다. 이런 내 연구 방식이 널리 활용되어 여타 국가의 민주주의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연구가 꾸준히 축적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민주주의는 계몽주의 시대에 탄생했다. 주지하듯 계몽주의는 17세기 과학혁명을 계기로 창출된 근대 세계관에서 배양되었다. 계몽주의의 요체는 크게 3가지로 집약할 수 있는데, 이성·과학·개인이 각각 그것이다. 인간의 이성이 주도한 과학혁명은 중세 천년의 기독교적 세계관을 대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 따라 운명을 개척하는 독립적 주체로 재탄생했다. 계몽주의 시대 이전의 인간은 자신에게 부과된 의무만을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에 재탄생한 인간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주체적 개인이었다. 이러한 속성을 지닌 계몽주의는 다양한 민주주의 사상가가 탄생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계몽주의 시대에 탄생한 민주주의 사상가들을 참조해 민주주의의 이데알튀푸스를 구성할 수 있다. 거기에는 5가지 관점이 중요한데, 자유·평등·권력분립·동의·설득이 그것이다.


17세기 서구 민주주의의 개념을 제시한 대표적인 자유주의 사상사인 존 로크는 <통치론>(Two Treatises of Governmen)에서 자유·평등의 개념을 정의했다. 왼쪽은 1697년 독일 화가 고트프리 넬러가 그린 존 로크의 초상화, 오른쪽은 네덜란드 망명 시절 집필해 1689년 익명으로 출판한 ‘통치론’ 초판 표지. 사진 위키피디아

민주주의에서 필수적인 ‘자유’의 의미는 이른바 사회계약론(the social contract)을 통해서 확정되었다. 그 자유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데, 하나는 중세 신권으로부터 자유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의 폭정으로부터 자유다. 중세는 종교가 정치를 지배하는 시대였다. 그러나 과학적 이성에 기초를 둔 계몽주의는 정치를 종교로부터 분리시켰다. 따라서 민주주의에서 향유하는 정치적 자유 역시 종교로부터 자유를 의미했다. 우리는 바로 이 부분에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교분리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계몽주의를 배경으로 탄생한 민주주의의 존립기반이 곧바로 붕괴되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주의에서 요청되는 국가는 사회계약론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이제 통치자는 피통치자와 계약을 맺어서 선출되었다. 치자는 일방적으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피치자와 체결한 계약에 따라 권력을 행사해야 했다. 따라서 피치자는 계약의 조건 내에서 자유를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민주주의에서 향유하는 자유를 이해할 때 반드시 유의해야 할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자유는 결코 방종(licence)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일 허용된 자유를 방종으로 실천한다면 민주주의는 이내 아나키즘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18세기 자유주의 사상가는 자유와 방종의 차이를 일관되게 강조했다. 예컨대 존 로크는 <통치론>에서 그 점을 이렇게 강조했다. “자연상태는 자유의 상태이지 방종의 상태가 아니다. … 자연상태는 그것을 지배하는 자연법이 있는데, 모든 인간은 바로 그 자연법의 구속을 받는다.”


존 밀턴이 1644년 영국 의회의 사전 검열에 대항해 허가 받지 않고 출판할 권리를 주장한 연설문 <아레오파지티카>(라틴어·법정과 의회의 기능)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핵심인 ‘언론·출판의 자유’를 설파한 선언이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희귀서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1644년 존 밀턴의 <아레오파지티카> 초판본 표지.

둘째, 민주주의의 자유에는 저항권 내지 혁명권이 내포되어 있다. 치자가 사회계약에 따라 약속한 피치자의 자유를 수호하는 대신 그것을 유린했을 때 피치자는 그에게 저항하거나 교체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셋째, 민주주의의 자유는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를 모두 포괄한다. 소극적 자유는 무엇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를 말한다. 예컨대 종교로부터의 자유, 국가의 폭정으로부터의 자유 등이 해당한다. 반면 적극적 자유는 선택의 자유를 의미한다. 예컨대 투표에 참여해 정당을 선택할 자유 등을 말한다. 넷째, 내가 민주주의의 자유에서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언론의 자유다. 언론은 민주주의의 호흡에 필요한 산소를 제공하는 구실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질식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존 밀턴도 <아레오파지티카>에서 언론의 자유를 이렇게 강조했다. “그 어떤 자유보다도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이해하고, 말하고, 주장할 수 있는 자유를 나에게 달라.” 그러나 언론의 자유가 언론의 방종으로 실천된다면 그 역시 민주주의는 곧바로 아나키즘으로 전락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평등이 보장되어야 한다. 통상, 평등은 사회주의의 원칙으로 이해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도 평등을 요구한다. 로크 역시 <통치론>에서 “인류는 모두 평등하고 독립된 존재로 태어났다”고 강조했다. 인간의 평등이 보장될 때에만 민주주의의 요체인 다수결의 원칙이 유지될 수 있다. 또한 다수결은 인간의 평등을 전제했기 때문에 반드시 ‘승복’을 요구한다. 다수결에 승복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평등한 인간의 다수가 결정한 사안에 승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인간의 평등 그 자체를 거부하는 특권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입법·사법·행정의 분리를 처음 제시했다. 미국은 1787년 필라델피아 비밀헌법회의에서 세계 처음으로 ‘삼권분립’을 헌법에 명시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은 1784년 출간하자마자 금서가 됐다. 사진 위키피디아

민주주의는 권력의 분립을 요구한다. 권력은 통치에 필수불가결한 수단이다. 그러나 역사는 권력이 독점되면 거의 예외 없이 남용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치자의 권력이 남용되면 피치자의 자유는 보장될 수 없다. 따라서 통치에 필요한 권력은 인정하면서도 권력의 남용은 방지해야 하는 이율배반적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 문제의 고전적 해법은 몽테스키외가 제시한 삼권분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 제11편 ‘헌법에서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는 법’에서 입법·사법·행정을 분리해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게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동의에 의한 정치를 뜻한다. 국민의 현명한 동의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국민의 활발한 정치적 참여가 필요하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질적 수준은 국민의 정치적 성숙도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정치교육 내지 시민교육이 민주주의의 중요한 테마로 부각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민주주의의 정치적 참여를 이해할 때 중산층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가의 평화와 번영 등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는 계층은 대체로 중산층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상층의 일차적 관심사는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 반면 하층은 하루하루 먹고살기가 벅차기 때문에 국가의 장래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가 없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발전하려면 반드시 건강한 중산층의 존재가 필요하다. 중산층이 활동하는 시장의 문화가 민주주의의 문화와 대단히 유사한 속성을 지녔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장에서 합리적 계산에 따라 상품을 고르는 행위는 선거판에서 합리적 판단에 따라 후보자를 선택하는 행위와 질적으로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동의에 의한 정치는 국민의 동의를 얻어 제정된 법에 따라 통치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로 여기에서 법에 의한 지배, 즉 헌정주의(constitutionalism)가 등장한다. 국민이 동의한 법에 따라 통치가 이뤄질 때 국민의 심정적 지지를 의미하는 정통성(legitimacy)을 확보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정통성을 확보해야만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할 때, 그래서 정통성의 위기에 직면할 때, 그 민주주의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헌정주의는 국민의 준법 또한 요구한다. 국민이 자신이 동의해서 제정한 법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이내 아나키즘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끝으로 민주주의는 이성에 의한 설득을 요구한다. 주변의 각종 압력, 예컨대 권력·금력·정당 등의 압력에 밀려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통한 합리적 설득 과정을 거쳐 의사결정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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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인디언부터 테러까지…미국은 ‘십자군의 악마’ 찾고 있다”

북미대륙 원주민 인디언 ‘평화 영위’
18세기 루소 ‘고귀한 야만’ 이상화도

콜럼버스 ‘북미 신대륙 발견’ 주장은
원주민 무시한 유럽 중심 편견일 뿐

‘인디언 터전 무자비하게 파괴·강탈’
‘무기’ 필수 상품화…군사주의 ‘원죄’
1791년 제정한 연방헌법 ‘수정 2조’
‘개인 총기’ 합법… 미국총기협회 막강

미국인 사상 뿌리 ‘퓨리터니즘’ 영향
존 윈스럽 ‘언덕 위의 도시’ 선민사상
“적은 무조건 악…백인우월주의 파생”
‘선한 동기가 초래하는 지옥’ 되풀이


‘안보’ 아닌 ‘평화’ 패러다임 전환해야

17회-미국의 두 가지 ‘원죄’(하)



박한식 교수는 ‘미국의 전쟁병’ 근본 요인으로 건국의 배경 사상인 기독교의 청교도주의와 그 시초인 십자군 전쟁을 지목한다. 그림은 1189년 리차드 1세가 십자군 원정을 위해 영국을 떠나는 장면을 묘사한 글린 워렌 필폿의 작품이다. 사진 영국의회 아트컬렉션 갈무리



백인들의 인디언에 대한 상투적인 시각 가운데 하나인 ‘잔인한 가해자’로 묘사된 그림. 1848년 어린이 지리 교과서에 실린 삽화. 사진 <이데올로기와 미국 외교>(마이클 헌트 지음·권용립 이현휘 옮김) 중에서.

미국이 ‘전쟁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노예제도와 함께 미국의 인디언 정복을 탐구해야 한다. 내가 볼 때 노예제도와 인디언 정복은 미국의 원죄를 구성하는 두 개의 축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원죄는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의미한다. 노예제도와 인디언 정복 역시 미국의 정신사에서 씻기 어려운 죄악으로 존재한다.


인디언이 북미 대륙으로 이주한 시기는 13~14세기로 추정된다. 아시아와 중남미 대륙 등지에서 이주한 인디언은 15세기 무렵 약 200만~700만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인디언은 북미 대륙의 광야에 흩어져 평화롭게 살았다. 각 부족마다 고유의 문화와 언어가 있었고, 학교를 운영할 정도로 교육열도 높았다. 장 자크 루소(1712~1778)와 같은 유럽 지식인은 북미 대륙에서 인디언이 영위하는 삶의 양식을 법 없이 평화롭게 사는 ‘고귀한 야만’(noble savage)으로 이상화하기도 했다.




박한식 교수는 조지아대학에서 가까운 애틀란타 북부지역 인디언 보호구역을 방문했을 때 체로키족의 생김새는 물론 생활풍습이 한국인과 너무나 비슷해 놀랐던 기억이 있다. 사진은 1865년 북미 원주민 부족장들. 위키피디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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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애틀란타 북부지역 체로키족이 거주하는 인디언 보호구역을 여러차례 방문해서 그들의 생활 풍습을 주의 깊게 관찰한 적이 있다. 그때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그들의 얼굴 생김새가 한국인과 너무 유사하다는 사실을 한눈에 발견한 것이다. 나는 만주에서 태어나 성장했기 때문에 중국인의 얼굴 특징을 잘 안다. 또 일본도 자주 방문했기 때문에 일본인의 얼굴 특징도 잘 안다. 중국인과 일본인은 한국인과 달리 얼굴에 광대뼈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체로키족의 얼굴은 한국인처럼 광대뼈가 튀어나와 있지 않은가? 나는 그들의 그런 모습이 무척이나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것뿐만 아니다. 그들은 밥을 하기 이전에 쌀에서 겨를 골라내기 위해 키질을 하고 있었다. 또한 맷돌로 콩을 갈기도 했고, 떡메를 쳐서 떡을 빚기도 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어린 시절의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체로키족의 조상과 한민족의 조상 사이에 어떤 친화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나는 오래전부터 한국의 시민사회가 체로키족과 협력해서 어떤 공동의 이익을 꾸준히 창출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서유럽인의 식민지 지배 이전 북미 대륙의 문명화된 5대 부족이자 유일하게 고유 문자를 지녔던 체로키 인디언들이 1830년대 미시시피강 동남부 조지아주의 골드 러시를 찾아 몰려온 백인들에 쫓겨 중서부 오클라호마의 보호구역으로 강제이주당한 고난사를 그린 맥스 디. 스탠들의 ‘눈물의 여로’ 연작. 사진 maxdstandley.com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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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북미 대륙에 상륙하면서 인디언의 평화로운 삶에 암운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상식에서 콜럼버스는 ‘지구는 둥글다’는 신념에 따라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해서 마침내 북미 신대륙을 발견한 위대한 탐험가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하지만 북미 대륙에는 수세기 전부터 인디언이 살고 있었는데 어찌 그런 상식이 통용될 수 있단 말인가? ‘북미 신대륙 발견’이라는 상식은 인디언을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는 유럽 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이 노골적으로 투영된 편견일 뿐이었다. 콜럼버스의 항로는 유럽의 여러 국가에 식민지 개척의 길을 열어주었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은 16~20세기 동안 콜럼버스의 항로를 따라 북미와 중남미 대륙으로 건너갔다. 식민지 개척은 한마디로 무력을 동원해서 인디언의 삶을 무자비하게 유린하는 폭력적 과정이었다. 인디언 역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력이 필요했다. 따라서 무기가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상품으로 올라섰다.

미국의 선조 역시 인디언의 삶의 터전을 무력으로 강탈했다. 미국의 군사주의라는 원죄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인디언 문명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현재 미국에서 인디언은 약 320개의 인디언 보호구역에 흩어져 살고 있다. 보호구역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인디언의 멸종을 촉진하는 제도적 장치라고도 할 수 있다. 1960년에 발표된 인구 센서스를 보면, 보호구역에 거주하는 인디언은 약 1000만명에 이른다. 미국 인구의 약 2.4%에 해당한다. 하지만 현재는 약 500만명이 거주할 뿐이다. 이처럼 격감한 까닭은 인디언 젊은이들이 보호구역 밖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추세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미국 정부는 인디언 보호구역에만 도박사업을 허용해주는 흑백 분리정책을 쓰고 있다. 사진은 애틀란타 북쪽 체로키 인디언 보호구역에 있는 카지노 리조트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미국 정부는 인디언 보호구역 안에서 노름(카지노)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었다. 하지만 백인 사회에서는 노름을 금지하고 있다. 노름이 백인 사회의 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폐풍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인은 인디언 보호구역에 들러 심심풀이로 노름을 하곤 한다. 백인이 뿌리고 간 돈은 인디언의 중요한 수입원 중 하나다. 또한 인디언은 나바호 기술대학을 설립해서 운영할 정도로 교육에 관심이 많지만 활성화되지는 못하고 있다. 많은 인디언 학생이 졸업 뒤 취업이 쉬운 미국의 대학교에 진학하기 때문이다.



1791년 제정된 연방헌법 수정 2조 ‘개인 총기 보유권’은 미국의 군사패권주의를 파생시켰다. 총기 보유권 지지자들의 집회에서 ‘수정 2조’를 새겨 놓은 성조기를 내걸고 있다. 사진 AP/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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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국의 군사주의를 고찰하면서 특별히 주목하는 부분 중 하나는 개인의 총기 휴대를 헌법으로 보장했다는 사실이다. 1791년 제정한 연방헌법 ‘수정조항 2조’에서 개인의 총기 휴대를 권리로서 보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연방헌법 제정 때 국가의 치안능력이 충분히 갖춰지지 못했다는 사정을 고려하면 수정조항 2조를 신설한 까닭을 이해할 여지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20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바뀌지 않는 이유는 이해하기 어렵다. 현재 미국은 세계에서 총기 사고가 가장 많이 나는 나라다. 총기 사고가 날 때마다 개인의 총기 휴대를 금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지만 수정조항 2조를 폐기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처럼 건재한 수정조항 2조는 미국의 무기시장을 안정적으로 부양하는 제도적 기반이 되고 있다. 현재 미국총기협회(NRA)는 미국 최대의 이익단체로 군림하고 있다.



지난 4월 미국 최대 이익단체인 전미총기협회(NRA)와 입법로비그룹이 주최한 ‘2019 리더쉽 포럼’에서 라피에르(오른쪽) CEO가 트럼프(왼쪽)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있다. 전미총기협회는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 진영의 강력한 후원단체였다. 사진 AP/연합



​ 2012년 12월 전미총기협회의(NRA)의 기자회견 직전 ‘개인 총기 보유’ 반대단체인 코드핑크가 ‘전미총기협회가 우리의 아이들을 죽이고 있다’는 펼침막을 깜짝 노출시키는 방법으로 시위를 하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어찌하여 미국은 군사주의를 혁파하지 못하는가? 무엇보다 시선을 미국의 기독교로 돌릴 필요가 있다. 바로 그 기독교가 미국의 군사주의와 인종주의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미국은 지구상에서 기독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다. 일찍이 알렉시 드 토크빌은 “미국보다 기독교가 인간의 영혼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곳이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하버드대학의 페리 밀러는 “퓨리터니즘(청교도주의)과 그것의 원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를 갖추지 않으면 미국을 이해할 수 없다”고 단언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미국이 신봉하는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신조 중 하나는 ‘언덕 위의 도시’(City upon a Hill)라는 표현으로 상징되는 ‘선민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에서 퓨리터니즘을 신봉하는 변호사였던 존 윈스럽(1588~1649)은 1630년 3월21일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로 향하는 아르벨라호 선상에서 “기독교적 자비의 한 모범”(A Model of Christian Charity)이란 제목의 설교를 했다. 윈스럽은 그 설교에서 식민지에 도착하면 신의 뜻을 받들어 전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언덕 위의 도시를 건설하자고 역설했다.



미국인의 기독교 선민사상은 서유럽에서 건너온 초기 이민자들의 청교도주의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림은 1630년 영국 변호사 존 윈스럽이 청교도들을 이끌고 매사추세츠만 플리마우스 록에 상륙한 장면이다. 사진 reformation.org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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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언덕 위의 도시를 매개로 신의 뜻을 세상에 전파하려는 선한 동기는 실제 현실에서 지옥의 문을 여는 사례가 많았다. 이른바 ‘선한 동기가 초래하는 지옥’(the hell of good intentions)이 미국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행한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덕 위의 도시로부터 파생된 미국의 지배적 행동양식을 검토해야 한다. 언덕 위의 도시는 오직 백인만이 신의 뜻을 이행할 수 있다는 백인 우월주의를 파생시켰고, 미국적 가치를 선으로 간주하고 비미국적 가치를 악으로 간주하는 흑백논리를 파생시켰으며, 미국적 가치를 세상에 전파하는 과정에서 필요하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지상의 악을 제거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파생시켰다. 또한 그런 소명의식에 따라 지상에서 악을 많이 제거하면 할수록 ‘신의 뜻에 부응하는 업적’(good works)을 성취한 것으로 믿었다. 아울러 업적 그 자체는 신의 구원을 보증할 수 있는 간접적 증표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신의 구원을 갈구하는 미국은 무자비한 무력을 동원해서 지상의 악을 제거하는 ‘십자군 전쟁’을 끝없이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 군산복합체가 거대하게 성장하고, 그러한 군산복합체를 중심으로 딥스테이트가 광범위하게 활동하는 궁극적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내가 미국에 유학을 온 까닭 중 하나는 미국은 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원수를 사랑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깨달았다. 미국은 자국에 도전하는 세력을 원수가 아니라 악마로 치환해버렸다. 그리고 그 악마를 제거하는 ‘십자군 전쟁’을 기독교 신앙에 입각해서 정당화시켰다. 이런 추세는 특히 냉전을 거치면서 악화되었다. 무신론을 신봉하는 공산주의자를 악마로 지목해서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을 자행했고, 9·11테러 이후에는 이슬람권의 테러 세력을 악마로 지목해서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을 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악마와 싸우는 미국의 ‘십자군 전쟁’에서는 어떤 윤리적 고려도 불필요하게 되었다. 예컨대 선전포고는 전쟁 당사국이 묵시적으로 공유했던 대표적 전쟁윤리였다. 그러나 미국이 볼 때 그런 윤리는 악마에게 사치에 불과할 뿐이었다. 노벨 평화상을 탄 버락 오바마가 빈 라덴을 선전포고 없이 암살해버린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요컨대 미국의 십자군적 전쟁관은 기존의 전쟁윤리를 모두 전복해버리는 악마적 습성을 탄생시켰다.

내가 미국의 십자군적 전쟁관을 고찰하면서 심각하게 우려하는 문제가 또 하나 있다. 마찬가지로 십자군적 전쟁관이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에서도 강력하게 관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쟁 전후 ‘빨갱이 소탕’을 명분으로 무려 100만여명의 양민을 학살한 것도 미국의 십자군적 전쟁관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북한을 악의 축의 일원으로 간주하는 미국의 사고방식이 지금도 여전히 한반도 냉전을 강요하고 있다. 그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한반도의 분단은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다. 북한이라는 악마는 정치적 협력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끝끝내 제거해야 할 악마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2002년 1월29일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에 참석해 발표한 연두교서에서 적대적인 나라들을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지목해 국제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한겨레> 자료사진



부시 미 대통령이 ‘악의 축’으로 지목한 나라인, 이라크·시리아·북한·이란·쿠바 등의 반응을 묘사한 2003년 시사만평.

미국의 군사주의는 미국 자체의 건강성 또한 파괴시키는 원천이 되고 있다. 미국이 선도하는 자본주의의 장점으로는 자유로운 경쟁의 원칙에 따라 작동하는 시장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주의가 부양한 군산복합체는 개인이 아니라 국가를 상대로 무기를 판매한다. 국가는 국민의 세금으로 무기를 구입한다. 따라서 그곳에서는 자본주의 시장의 건강한 경쟁이 있을 수 없다. 그러면 부패가 만연할 수밖에 없다. 그런 과정을 거쳐 자본주의의 시장 질서가 무너지게 되면 민주주의의 주역인 중산층 또한 몰락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얘기는 비현실적 가정이 아니라 지금의 미국에서 적나라하게 전개되는 현실이다.

미국의 선조는 전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언덕 위의 도시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은 현재 인종주의와 군사주의가 결합된 원죄를 세계에 끊임없이 강제하는 패권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미국은 냉전 종식 직후 세계 최고 수준의 강대국이었다. 그러나 30여년이 지난 지금의 미국은 쇠퇴하는 모습을 역력하게 보여주고 있다. 쇠퇴의 원인을 찾고자 한다면 군사주의라는 원죄에도 주목해야 한다. 미국은 세계 곳곳에 나가 막대한 비용이 드는 전쟁을 끊임없이 자행하고 있는데 어찌 국력의 소진을 피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미국은 자국의 미래를 진정 위한다면 원죄인 군사주의와 인종주의를 혁파할 필요가 있다. 나만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미국이 안주하는 ‘안보 패러다임’을 ‘평화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말이다. 미국은 적대국을 악마로 간주해서 섬멸하는 대신 그들 또한 미국이 신봉하는 ‘신의 선물’(godsends)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고, 그들과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삶의 윤리를 창출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미국의 미래뿐만 아니라 인류의 미래 또한 달라지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선조가 꿈꾼 언덕 위의 도시가 바로 거기에 있지 않겠는가?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15794.html#csidxea80afc117c41c99c4cd1535c678d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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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미국 역사에서 발견한 ‘전쟁병’…첫번째 원죄는 노예제도다”

대학 도서관마다 ‘전쟁 연구서’ 가득
역대 미국 대통령 모두 ‘전쟁 수행’

‘인디언 정복 원죄’ 군사주의 파생
‘흑인노예 노역 원죄’ 인종차별 조장
“미국 정신문화 뿌리로 고착된 상태”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 등 영향
남북전쟁으로 노예해방 됐다지만…
백인우월주의 낳아 유색인종 비하로

마틴 루서 킹 ‘흑인인권운동’ 감동적
‘인종차별 수정조처’ 흑인 입학 우대

1971년 남부 명문 조지아대 부임
2천명 교수 가운데 유일한 ‘유색인종’
‘남부 특유 친절함’에 숨은 차별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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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 교수는 미국 역사에 점철된 ‘전쟁병’의 요인 가운데 첫번째 원죄로 흑인노예제도를 꼽는다. 15~18세기 영국 상인들은 미국 시장에 팔기 위한 서아프리카 흑인들을 최대한 많이 싣고자 노예선의 하갑판에 사람을 화물처럼 켜켜이 쌓아서 실어날랐다. 사진 <노예선>(갈무리출판사 펴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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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영국 노예선 부르크스호의 흑인노예 운송 평면도. <노예선>(갈무리출판사 펴냄)에서.
16회-미국의 두 가지 ‘원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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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국에 평화를 공부하러 왔다. 하지만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베트남전쟁을 체험해야만 했다. 대학도서관을 아무리 뒤져도 내가 찾는 평화 연구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는 전쟁 연구서만 가득했다. 시선을 미국의 역사로 돌려봤다. 놀랍게도 미국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라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전쟁을 수행하지 않은 대통령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쟁은 미국 전쟁의 역사에서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할 뿐이었다. 나는 너무 당혹스러웠다.
그래서 평화 공부를 유보하고 미국의 역사가 곧 전쟁의 역사인 까닭을 찾아봤다. 그런데 미국이 수행한 전쟁을 상세하게 서술한 서적은 수없이 많았지만 내가 찾는 까닭을 명쾌하게 제시한 기록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미국에서 무엇을 공부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더욱 당혹스러웠다.

 내가 독자적인 연구 끝에 찾은 ‘전쟁병’의 궁극적 원인은 미국의 ‘원죄’였다. 주지하듯 기독교 신학에서 원죄는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짓게 되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의미한다. 내가 볼 때 미국의 원죄는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되었는데, 하나는 흑인 노예제도를 운영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디언(북미 원주민)의 삶의 터전을 무력으로 강탈한 것이다. 미국은 지금까지 원죄를 씻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기는커녕 원죄의 유산은 미국의 정신문화 전역에 확산되어 고착되었다. 노예제도로부터 작금의 인종주의가 파생되었고, 인디언 정복으로부터 작금의 군사주의가 파생되었다. 그리고 그 양자가 결합해서 미국의 전쟁을 끊임없이 조장하고 있다. 그 전쟁병은 이미 치유가 불가능한 고질병이 되어버렸다. 내가 내린 결론은 미국의 원죄를 이해하지 못하면 미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영국의 장사꾼들은 16~17세기 아프리카에서 끌고 온 흑인 약 500만명을 미국 농부들에게 노예로 팔았다. 가장 선호하는 노예는 20대 중반의 흑인 남성으로 한명에 약 1200달러에 팔렸다. 그다음 선호하는 노예는 임신 가능한 흑인 여성이었다. 그들 가임 여성은 대부분 백인 주인의 자녀를 낳았다. 백인의 피가 섞인 흑인 노예는 더욱 고가로 팔렸다.
약 400만명의 흑인 노예가 디프사우스(조지아, 남북 캐롤라이나, 앨라배마,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플로리다 등)로 팔려갔고, 약 100만명의 흑인 노예는 미국 전역에 팔려갔다. 디프사우스에서 흑인 노예들은 주로 목화밭에서 일했다. ‘노동 쿼터’가 존재했다. 남성 노예는 하루에 80파운드의 목화를, 여성 노예는 하루에 70파운드의 목화를 따야 했다. 쿼터를 채우지 못하면 등에 피가 나도록 채찍질을 당했다. 디프사우스에서 수확한 목화는 주로 영국으로 팔렸다. 그 시대 영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섬유산업의 메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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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코네티컷주 하트포드에 세워진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의 작가 해리엇 비처 스토(왼쪽)과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오른쪽)의 동상. 남북전쟁 와중인 1862년 두 사람이 만난 장소이다. 해리엇 비처 스토 센터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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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듯 흑인 노예는 4년간에 걸친 남북전쟁(1860~64)을 계기로 해방되었다. 남북전쟁은 북부와 남부 간의 대조적인 문화, 상이한 이해관계 등으로부터 촉발되었다. 북부는 상공업 사회였고, 노예해방을 옹호했고, 연방정부를 지지했고,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흥행했다. 그 반면 남부는 농업 사회였고, 노예해방을 반대했고, 주정부를 지지했고, 침례교회를 선호했다. 특히 노예제도의 참상을 폭로한 해리엇 비처 스토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남북전쟁을 촉발시킨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남북전쟁은 노예를 해방시키는 계기가 되었지만, 남북 간 대립의 골을 더욱 심화시키고, 백인 우월주의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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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은 이른바 ‘스리디(3D) 업종’에서 일하기를 싫어한다. 미국에서 3D 업종이란 위험하고(데인저러스), 더럽고(더티), 품위가 떨어지는(디미닝) 일을 의미한다. 남북전쟁 이전까지 주로 흑인 노예가 담당했던 노동이다. 노예해방 이후에는 점차 멕시칸, 라티노, 아시아인 등과 같은 유색인종이 3D 업종에 종사했다. 그런 추세에 따라 흑인 인종차별은 모든 유색인종을 열등한 존재로 간주하는 백인 우월주의로 점차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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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 직후인 1876년부터 1965년 위헌 판결이 날 때까지 미국의 모든 주에는 공공시설의 식수대까지 ‘백인용-유색인용’으로 분리하고 이용을 차별하는 ‘짐 크로우 규정’(The Jim Crow Rules)이 있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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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회에서 흑인 인종차별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도 꾸준히 전개되었다. 가장 대표적 사례로는 마틴 루서 킹(1929~68) 목사의 흑인 인권운동을 꼽을 수 있다. 나는 킹 목사의 삶을 회고하면서, 그리고 그의 저술을 읽으면서 깊은 감화를 받았다. 39살의 짧은 삶을 산 사람의 글이 어떻게 그처럼 심원한 진리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킹 목사의 저술을 읽을 때마다 신의 음성을 듣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1983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킹 목사의 생일을 미국 국경일로 정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2000년 마침내 미국 50개 주 모두가 레이건의 행정명령을 수용했다. 미국에서 개인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한 사례는 조지 워싱턴과 마틴 루서 킹 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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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에 맞서다 암살당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흑인 인권운동과 평화운동의 상징이 됐다. 킹 목사가 앨라바마주 몽고메리의 흑백 좌석분리 버스정책에 대한 위헌 판결을 끌어낸 로자 파크스와 손을 잡고 1965년 3월 공공 장소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 제정’을 요구하며 ‘셀마~몽고메리 대행진’을 이끌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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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인종차별 문제를 해결하려는 또 하나의 노력으로는 ‘인종차별 수정조처’(Affirmative Action)를 꼽을 수 있다. 이는 각 대학의 자율적 판단에 따라 흑인의 입학 조건을 다소 완화시켜 주는 제도다. 그러자 백인 학생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예컨대 1978년 앨런 바키라는 학생은 인종차별 수정조처 때문에 자신이 지원한 캘리포니아대(데이비스 캠퍼스) 의과대학에서 탈락하자 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미국에서 많은 논란을 일으킨 이 소송은 연방 대법원에서 바키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자 하버드대에 지원했다가 탈락한 아시아 출신의 많은 학생들도 인종차별 수정조처에 근거해서 대학을 상대로 집단 소송을 제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하지만 법원은 하버드대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면서 인종차별 수정조처는 이전에 노예 생활을 했던 흑인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서 마련된 것이라는 해석을 제시했다. 타당한 해석이다.
미국이 1960년대부터 인종차별 해소를 위해 도입한 ‘소수집단 우대정책’(어퍼머티브 액션)은 1970년대 후반 백인 학생 앨런 바키가 흑인 특례입학제도 탓에 대학에서 탈락했다며 ‘역차별 소송’을 내면서 반찬 시위와 대논쟁을 일으켰다. 사진 civilrightsmovement 블로그 갈무리
미국이 1960년대부터 인종차별 해소를 위해 도입한 ‘소수집단 우대정책’(어퍼머티브 액션)은 1970년대 후반 백인 학생 앨런 바키가 흑인 특례입학제도 탓에 대학에서 탈락했다며 ‘역차별 소송’을 내면서 반찬 시위와 대논쟁을 일으켰다. 사진 civilrightsmovement 블로그 갈무리
예전보다 흑인 인권이 향상된 것은 사실이지만, 흑인 인종차별 문제는 여전히 심각한 사회문제로 존재한다. 내가 디프사우스에 속하는 조지아주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까닭 중 하나는 흑인 인종차별 문제를 몸소 체험하면서 연구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미국 북부에 위치한 미네소타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인 1971년 나는 남부에 위치한 조지아대학에 교수로 부임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가족과 함께 중고차에 세간살이를 가득 싣고서 북부에서 남부로 가는 긴 여행을 시작했다. 남부 접경지대에 도착할 즈음 자동차의 기름이 떨어져갔다. 마침 눈앞에 보이는 주유소에 차를 댔다. 그런데 직원이 흘끔 쳐다보더니 내 차를 발로 차면서 기름을 줄 수 없다고 소리쳤다. 나는 차창을 열고 말했다. “내 얼굴이 양키처럼 보입니까?” 미국에서 양키는 북부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자 직원은 급히 미안하다면서 기름을 넣기 시작했다. 내 차는 아직 미네소타주에서 발급한 표지판을 달고 있었다. 그 순간부터 남부와 북부 간의 적대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마침내 조지아대학이 있는 애선스에 도착했지만 날이 너무 어두워 계약한 집을 찾아갈 수가 없었다. 마침 24시간 운영하는 맥도널드에서 음료수를 마시는 경찰 두 사람을 발견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조지아대학 교수로 부임했는데 초행길에 날이 어두워서 그러니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음료수를 들이켠 다음 아주 친절한 태도로 따라오라고 그랬다. 우리 가족은 경찰 오토바이 두 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애선스에 입성했다. 안내하는 경찰 오토바이의 뒤를 무심코 바라보는데 ‘4·19’ 때 경찰 총격을 당했던 체험이 떠오르면서 묘한 대조가 느껴졌다.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아하, ‘남부의 친절함’(southern hospitality)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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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대학은 1785년 조지아주 애선스에 설립된 미국 최초의 공립대학으로 남부 명문에 꼽힌다. 1971년 부임했을 때 2천명의 교수 가운데 유일한 유색인종이었던 박한식 교수는 학내에서 인종차별을 겪기도 했다. 사진 조지아대학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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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대는 1785년에 설립된 미국 최초의 주립대학으로서 현재 남동부의 명문대학으로 평가된다. 그때 조지아대의 약 2천명 교수 중에서 나는 유일한 유색인종이었다. 백인 교수들은 내 앞을 지나가면서 신기한 듯 흘끔흘끔 쳐다봤다. 나는 그럴 때마다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백인 교수들은 내게 비교적 친절하게 대해주었고 양보도 많이 해주었다. 예컨대 문을 열고 들어갈 때 먼저 들어가라고 한다든가,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면서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그들은 돈 문제 앞에서는 철저히 인색한 태도로 돌변했다.

내가 대학원에서 지도하는 학생 중에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 한국 유학생이 있었다. 그는 형편이 어려워서 하버드대 출신의 백인 원로 교수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런데 그 학생의 성적이 영 시원치 않았다. 하루는 그를 불러서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백인 교수가 일을 너무 많이 시켜서 도저히 공부할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했다. 그 이후 얼마 되지 않아서 학생 장학금을 심사하는 교수회의가 열렸다. 심사위원들은 내 학생의 성적을 잠깐 확인하더니 심사 대상에서 탈락시켜 버렸다. 나는 내 학생을 고용한 백인 교수에게 공개적으로 요청했다. 내 학생이 공부할 시간이 너무 없어 힘들어하니 배려해 달라고 그랬다. 그러자 그 교수는 곧바로 내 학생을 사랑한다고 답변했다. 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 외쳤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 알겠다. 그런데 그 사랑이 당신 강아지를 사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그건 사랑이 아니다!” 그때 나는 테뉴어(종신교수)를 받지 않은 상태였고, 그 백인 교수는 나를 파면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 학생에 대한 인종차별에서 비롯된 일이었기에 참을 수가 없었다.

조지아대에 부임했을 때만 해도 강의실 청소는 모두 흑인이 했다. 청소 현장에 백인은 딱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열쇠 꾸러미를 들고서 흑인이 청소할 강의실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조지아대에서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을 받으면서도 최선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치고자 했다. 교수는 보통 2~3과목을 가르친다. 하지만 나는 미국정부론, 국제정치학, 비교정치론, 정치발전론, 아시아정치론, 인권정책, 정치학방법론 등을 가르쳤다. 글로비스(GLOBIS·글로벌이슈연구센터)를 창설해서 학생들의 국제적 안목을 키우는 데도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미국 대학에서는 흑인과 백인이 뒤섞여 공부를 한다. 정부도 그것을 권장한다. 군대도 정부 정책에 따라 흑인과 백인이 많이 뒤섞여 운영된다. 그러나 자발적 결사체인 교회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흑인교회와 백인교회가 철저히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흑인과 백인 간의 심리적 거리를 단적으로 상징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내 친구가 잘 아는 피보디음악대학의 흑인 교수가 있다. 그는 유명한 피아니스트다. 어느 날 그는 강의시간에 늦을 것 같아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백인 경찰이 그를 쫓아와 체포했다. 청천대낮이었지만 뛰어가는 흑인은 수상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그를 대학에 끌고 가서 교수 신분을 확인하고서야 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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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흑인 남성 교육을 위해 설립된 애틀란타의 모어하우스 칼리지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모교로, 교정 안에 그를 기리는 채플과 동상도 있다. 박한식 교수는 이 대학에서 1년간 교환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사진 이현휘 박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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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어하우스대에서 1년간 교환교수로 재직한 적이 있다. 모어하우스대는 애틀랜타 소재 흑인 남성 대학으로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모교로 유명하다. 나는 학생들에게 오바마 대통령 재임 시절(2009~16) 미국에서 흑인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는지를 물어봤다. 그러자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런 사실이 전혀 없다고 답변했다. 학생들은 밤이 되면 혼자서 거리를 돌아다니지도 못한다고 했다. 백인들이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싫어하면서 총을 쏘거나 괜한 시비를 걸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바마의 모친은 백인이었다. 오바마가 킹 목사처럼 흑인 인권운동을 했다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바마의 사고방식은 사실상 백인의 사고방식과 유사했다.

미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마침내 미국에 ‘탈인종주의’(post-racism) 시대가 도래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주장이 미국의 현실과 동떨어진 공리공론에 불과할 뿐이라고 판단했다. 내가 볼 때 인종주의는 여전히 미국의 원죄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바마 이후 대통령에 출마한 트럼프는 백인 우월주의를 노골적으로 주장하면서 당선되었다. 오바마에 내심 적대감을 갖고 있던 백인들이 대거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14062.html#csidxa53ce36bfd3869b9b5aea7bf36ee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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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정당성 없는 미국의 베트남전쟁…한국군 파병 명분도 없었다”

1965년 11월 퀘이커교도 노먼 모리슨
국방성 앞 분신자살로 ‘반전운동’ 발화
“충격에 분신 현장 달려가 깊은 상념”


대학교수들 ‘반전이론’ 설파하며 주도
미네소타대학원 시블리 교수 대표적
“4·19 경험 살려 ‘반전’ 대열에 동참”

미군들 대학 들어와 직접 진압 ‘경악’
1970년 5월 총격 사망 ‘켄트대 학살’

200만 양민학살·생화학무기 사용 등
‘목적·과정·결과’ 모두 부당한 전쟁
‘전쟁’ 대신 ‘내전’ 용어조작으로 인정

8년간 미군 50만명 보내 5만8천명 전사
‘참전하면 죽는다’ 청년들 병역기피 열풍
박정희 ‘한국군 파병’ 제안에 존슨 환영
‘미군 베트남 이동에 북한군 침략’ 이유
“동아시아 공산화 도미노이

15회-베트남전쟁과 한국군 파병



박한식 교수는 1965년 미국 유학 직후부터 베트남전쟁과 반전운동으로 이어진 미국 현대사의 소용돌이 현장에서 정당성 없는 전쟁의 폐해를 실감했다. 린든 존슨 대통령은 1965년 5월16일 전용기까지 보내 박정희 대통령을 초청해 국빈 대접을 하면서 한국군 사단 규모의 파병을 요청했다. 그때 박정희는 워싱턴 도착 카퍼레이드에 이어 5월18일 뉴욕 맨허튼에서도 브로드웨이 고층 건물에서 오색종이 세례를 해주는 환영을 받았다.(왼쪽 사진) 

박정희 정권은 1965년 10월 첫 전투병 ‘맹호부대'와 ‘청룡부대’ 파병으로 화답했다. 그해 10월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파월 장병 환송식’에서 아들을 죽음의 전쟁터로 보내는 어머니의 슬픈 표정을 포착한 사진기자 정범태씨의 ‘파월’. 사진 국가기록원, <정범태사진집>에서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5년 11월2일, 31살의 퀘이커교도 노먼 모리슨이 미국 국방성 앞에서 분신자살을 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모리슨이 1살짜리 막내딸 에밀리까지 껴안은 채 분신을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다행히 지나가던 행인이 달려들어 에밀리는 빼앗아 왔다. 모리슨은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가 집무실에서 쉽게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를 선택했다. 베트남전쟁 반대의 메시지를 가장 분명하게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내와 1남 2녀의 자녀를 뒤로하고 선택한 모리슨의 죽음은 미국 전역을 커다란 충격에 빠뜨렸다. 반전운동이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1965년 11월 워싱턴 펜타곤 입구에서 시민들이 ‘베트남전쟁 반대’ 분신자살한 노먼 모리슨을 추모하고 있다. 박한식 교수도 그때 분신 소식을 듣고 달려갔던 현장이다. 사진 ‘워싱턴포스트’나도 충격에 빠지기는 마찬가지였다. 1965년 3월 워싱턴에 도착한 뒤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질주하던 내 삶이 한순간에 정지해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발길은 그의 분신 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모리슨이 사라진 그 현장은 나에게 말할 수 없는 슬픔과 함께 깊은 상념에 빠지게 했다. 모리슨의 분신은 미국의 베트남전쟁 정당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한국은 미국을 따라 대규모 한국군을 파병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한국군 파병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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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11월 워싱턴의 펜타곤 앞에서 ‘베트남전쟁 반대’ 분신자살로 반전운동을 발화시킨 노먼 모리슨(왼쪽)은 세 아이를 둔 31살의 젊은 가장이자 퀘이커 교도였다. 사진 <에이피>(AP)

1965년 11월2일 노먼 모리슨은 1살짜리 막내딸을 품에 안고 분신을 시도해 더 큰 충격을 줬다. 그날 저녁 부인 앤 모리슨이 주위 시민들에 의해 구조된 딸을 데리고 볼티모어의 집으로 가고 있다. 사진 <에이피>(AP)전쟁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과 국가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선택하는 수단이다. 그런데 베트남은 미국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영토도 침략하지 않았지 않은가? 더욱이 미국은 ‘베트남전쟁’(Vietnam War)이란 용어 대신 ‘베트남내전’(Vietnam Conflict)이란 용어를 선호한다. 베트남전쟁은 미국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의미를 갖지만, 베트남내전은 미국이 단순히 남베트남을 도와주었다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용어 조작은 미국 스스로 베트남전쟁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줄 뿐이다. 우리는 미국이 오랫동안 ‘한국전쟁’(Korean War) 대신 ‘한국내전’(Korean Conflict)을 선호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미국 역사에서 한국전쟁은 미국이 승리하지 못한 최초의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또한 미국 스스로 한국전쟁의 정당성을 부인한 셈이다.


베트남은 1858년부터 프랑스 식민지였다. 1940년부터는 일본의 식민 지배도 받았다. 그러다 제2차세계대전 종료와 함께 프랑스와 일본이 철수하면서 베트남에 권력 공백이 생겼다. 호찌민은 1930년 코민테른의 지원으로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설립하고, 1941년 베트남에 잠입해 결성한 월맹(베트남독립동맹)을 중심으로 해방운동을 전개했으며, 1945년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 주석으로 취임했다.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인도차이나 전역이 공산화될 것을 크게 우려했다. 미국은 응오딘지엠(고딘디엠)을 지원해 1955년 10월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 대통령으로 앉혔다. 베트남이 분단된 것이다.

응오딘지엠은 부정부패와 정통성 위기에 시달리다 1963년 11월2일 암살되었다. 같은 해 11월22일에는 존 케네디도 ‘댈러스 피격’으로 암살당했다. 그러자 소련은 베트남을 자기 세력으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호찌민에게 대규모 군사 지원을 시작했다. 이에 케네디 후임으로 대통령이 된 린든 존슨은 1965년부터 베트남에 대규모 미군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미-소 대리전쟁(proxy war)이 시작된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전쟁에 총 50만명을 파병했고, 5만8315명을 전사로 잃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미군이 약 200만명의 베트남 양민을 학살했고, 무엇보다 ‘에이전트 오렌지’로 대표되는 생화학무기까지 썼다는 점이다. 물론 낮에는 농사를 짓다가 밤이 되면 게릴라 활동을 하는 베트남인이 많았기 때문에 양민 학살의 불가피성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까지 미국이 백인에게 생화학무기를 쓴 적은 없다. 오직 유색인종에게만 생화학무기를 썼다. 인디언전쟁에서도 그랬고, 한국전쟁에서도 그랬다. 이런 현상은 미국의 ‘유전자’(DNA)에 인종주의가 각인되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 때 독일이 아니라 일본에 원자탄을 떨어뜨렸던 까닭도 인종주의를 빼놓고는 결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군은 베트남전쟁에 본격 개입하기 이전인 1962년부터 71년까지 북베트남 정글 고사 작전에 따라 ‘에이전트 오렌지’로 대표되는 맹독성 다이옥신 화합물(고엽제)을 약 8천만 리터 살포했다. 사진 베트남 전쟁박물관



베트남전쟁 동안 미군이 살포한 고엽제로 인해 지금도 수백만명의 베트남인 뿐만 아니라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3세·4세까지 유전성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고엽제로 황폐화된 베트남 가마우지역 고사목 지대를 1976년 어린아이가 벌거벗은 채 돌아다니고 있다. 사진 베트남 전쟁박물관베트남전쟁 동안 티브이에서 날마다 ‘공지’하는 전사자 수는 참전하면 죽는다는 메시지를 미국 전역에 퍼뜨렸다. 그러자 젊은이들 사이에서 병역기피 열풍이 일어났다. 미국은 약 1600만명의 청년에게 징집 영장을 보냈지만 겨우 50만명 정도만이 응했을 뿐이다. 수많은 미국 정치인 자녀가 병역을 기피했다. 우리에게 친숙한 도널드 트럼프, 빌 클린턴, 아들 부시, 딕 체니, 존 웨인, 무하마드 알리 등등 지도층에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병역을 기피했다. 약 4만~5만명이 캐나다 등지로 도피 유학을 떠났다.

그러자 미국 정부는 대학 졸업 때까지 징집을 연기해주던 기존 정책을 확대해서 대학원 졸업까지로 연장했다. 그 결과 너도나도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 여파로 평소 2 대 1 정도였던 대학원 진학 경쟁률이 7 대 1로 폭증했다. 내가 미네소타대학 정치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할 때도 16명을 뽑는 데 수백명의 지원자가 몰리는 바람에 간신히 합격할 수 있었다.

미국의 베트남전 반전 시위는 대학에서 주도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혹시 한국 대학에서 배운 것이 아닐까?” 내가 서울대 시절 앞장섰던 ‘4·19 시위’ 방식과 영락없이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었다. 한국에서 4·19 시위는 경찰이 진압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군대가 대학 캠퍼스까지 치고 들어와 무력으로 탄압했다. 예컨대 1970년 5월4일 미군은 켄트주립대학에서 반전 시위대에 총을 쏘았다. 학생 4명이 죽었고, 9명이 다쳤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군사문화가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만큼 친숙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박한식은 1965년 유학 직후부터 본격화된 미국의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를 지켜보면서 1960년 ‘4·19’와 비슷한 학생들의 시위 방식과 경찰이 아닌 군대가 직접 시위를진압하는 사실에 놀랐다. 1970년 5월4일 미 오하이오주 방위군이 켄트주립대 교정에 진입해 반전시위대를 공격하고 있다. 사진 켄트주립대 누리집



1970년 5월4일 오하이오 주방위군의 총격으로 4명의 학생이 숨진 ‘켄트대의 학살’ 현장.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친구를 보며 절규하고 있는 학생을 찍은 사진은 그해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다. 사진 켄트주립대 누리집

1970년 ‘켄트대의 학살’은 번져가던 미국내 반전운동에 충격과 함께 기름을 부었다. 대학생들이 ‘왜 4만8천여명의 미국인과 4명의 학생이 죽어야 했냐’는 팻말을 들고 켄트대 학살을 항의하는 반전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켄트주립대 누리집그뿐 아니다. 한국 교회는 대체로 반공주의를 명분으로 베트남전쟁을 적극 옹호했다. 반면 미국에서는 퀘이커교도를 위시한 진보적 기독교인들이 반전운동을 적극 펼쳤다. 또한 4·19 때는 대학교수들이 시가행진 등을 하기는 했지만 앞장서 나서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많은 대학교수가 최고급 수준의 반전 이론을 설파하면서 반전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웠다. 예컨대 내가 학문적으로 존경하는 미네소타 대학의 정치철학 교수, 멀포드 시블리는 ‘정의의 전쟁’ 시각에서 반전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한 것으로 유명했다. 4·19 현장에서 시위 실력을 충분히 연마했던 나도 시블리와 함께 베트남전쟁의 부당성을 강력하게 성토했다.



1960~70년대 미국 사회의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은 이론으로 무장한 대학 교수들이 주도한 것이 특징이다. 박한식 교수도 1968년 미네소타대학 대학원 정치학과 박사과정 때 정치철학자이자 평화주의자 멀포드 시블리(Mulford Q. Sibley) 교수가 앞장 선 반전운동에 참여했다.전쟁은 목적·과정·결과에서 모두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 먼저 전쟁의 목적이 정의로워야 한다. 하지만 미국이 수행한 베트남전쟁은 사람을 살상하는 것이 목적이 되었다. 전쟁 과정도 공정해야 한다. 하지만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고, 심지어 생화학무기까지 썼다. 전쟁 결과는 역사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은 미국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전쟁일 뿐이다. 요컨대 베트남전쟁은 모든 단계에서 정당성을 잃은 전쟁이었다.

베트남전쟁은 1975년 마침내 끝났다. 지미 카터는 1977년 대통령이 되자마자 베트남전쟁 참전을 기피한 모든 젊은이를 일반사면해주었다. 이를 반대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베트남전쟁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미국인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전쟁 반대운동과 청년층의 병역 기피가 확산되자 박정희의 한국군 파병 제안을 받아들였다. 1967년 10월 오클랜드의 징병 사무소 앞에서 시민들이 반전과 파병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미국 국립기록보관소그런 베트남전쟁에 박정희는 대규모 한국군을 파병했다. 미국은 1500만명 이상의 젊은이가 병역을 기피했기 때문에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는 외국 병력을 ‘수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국이 제일 먼저 응했다. 한국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모두 32만명을 보냈고, 5099명의 전사자를 냈다. 한국의 파병 규모는 미국 다음으로 많았다.

한국이 베트남전에 파병한 까닭은 무엇인가? 우리 쪽에서는 파병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한국을 전혀 침략하지 않은 베트남 관점에서 볼 때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박정희는 베트남 참전 명분을 ‘한국의 안보’로 내세웠다. 그 시절 초등학생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맹호부대 참전 노래 가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킵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박정희는 1967년 대선 유세에서 한국군을 베트남에 파병하지 않으면 미국이 주한미군을 베트남으로 이동시킬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북한의 남침이 우려된다는 논리로 국민을 설득했다. 요컨대 맹호부대 참전 노래 가사는 그때 미국이 선전한 ‘도미노이론’, 즉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동아시아 전역이 차례로 공산화될 것이라는 논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도미노이론은 동아시아의 구체적인 정치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 많은 미국의 지성인·대학생·기독교인 등이 도미노이론을 몰라서 그토록 치열하게 반전운동을 전개했겠는가?

박정희가 원한 것은 결국 ‘돈’이었다. 한국군 파병으로 벌어들인 총수입은 약 2억3556만달러로 집계됐다. 총수입의 약 80%인 1억9511만달러가 한국 정부에 송금되었다. 한국은 그 돈을 경제개발 자금으로 썼다. 물론 나는 그 부분을 부정하지 않는다. 또한 베트남전쟁에서 희생된 한국 젊은이의 삶을 가볍게 평가할 생각도 전혀 없다.



박정희 정권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모두 32만명을 베트남전쟁에 보내 5099명이 전사자로 돌아왔다. 1965년 10월 12일 서울 여의도 비행장 특설 식장에서 박정희·육영수 대통령 부부가 참석한 가운데 첫 파월 전투부대인 육군 맹호부대 장병 환송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 대통령기록관그러나 박정희는 한국 젊은이를 희생시킨 돈으로 경제개발을 했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나는 꽃다운 한국 젊은이의 목숨과 돈을 바꾸는 행위의 정당성을 도저히 찾기 어렵다. 돈을 버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베트남전쟁 파병은 과연 그때 한국이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는가? 국제금융기관에서 차관을 받고 각종 외교 활동 등으로 정당하게 돈을 벌 수는 없었을까?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진 까닭은 자국민에게서 전쟁의 정당성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도 정당성이 그처럼 중요한데 경제행위의 정당성을 묻지 않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본다.

나는 갈수록 물신주의로 전락하는 미국 민주주의를 ‘머니톡크러시’(Moneytalkcracy·When money talks, people listen)라고 이름지었다. 오늘날 미국은 돈을 숭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돈이 곧 종교의 성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돈이 말하면 사람들이 듣는다’. 내가 볼 때 한국 민주주의 역시 머니톡크러시로 전락한 지 오래다. 나는 묻고 싶다. 한국에서 베트남전쟁은 이른바 ‘베트남 특수’ 이상의 의미를 갖는가?

트럼프와 문재인은 연일 북한에 핵을 포기하라고 주문한다. 이어서 핵을 포기하면 북한의 장밋빛 미래가 보장된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북한은 기회의 땅이니 경제적으로 잘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햇볕정책도 마찬가지 얘기였다. 미국과 한국의 영혼이 머니톡크러시에 빠져 있다 보니 북한도 돈을 얘기하면 자기들처럼 들을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 구술 정리 박연진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12372.html#csidx6820a5e5f41a6b986e1ccb4d7e863d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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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요지부동 한반도 냉전 ‘미국 지적 식민지화’ 탓도 크다”

소련·동유럽 사회주의 붕괴 이후 30년
남북한만 여전히 ‘안보 패러다임’ 갇혀

미국보다 더 만연한 한국 행태주의 ‘절망’
논문 질보다 양으로 학자 능력 평가…
“정신까지 지배하는 인식론적 제국주의”

북한 연구방법도 미국식 실패 답습
‘탈북자 증언·면담’ 1차 자료 의존
여행자 방북 몇차례로 ‘전문가’ 대접
“객관성 없는 데이터 북한 실상 왜곡”

햇볕정책 바탕에도 행태주의 인식
‘서구적 잣대로 북한 비정상국가로’

베트남전쟁 방식 군비경쟁은 ‘필패’
평양 지하철부터 방공호로 요새화

길을 찾아서 14회-한국 행태주의와 한반도 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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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오른쪽) 교수는 1990년대 후반 김대중(왼쪽) 대통령 재임 시절 청와대를 여러 차례 방문해 햇볕정책에 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햇볕정책 역시 비정상국가인 북한을 정상국가로 바꿀 수 있다는 행태주의적 인식에서 출발한 까닭에 결과적으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사진 박한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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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차원의 냉전은 종식되었지만 한반도 냉전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냉전은 공포·불안·불신 등을 조장하면서 군비경쟁이 불가피한 ‘안보 패러다임’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1980년대 말 소련이 붕괴되면서 냉전이 종식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우리 또한 한반도 냉전도 조만간 종식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지금까지 실현되지 않았다. 나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삶을 옥죄는 ‘안보 패러다임’이 유독 한반도에서 그토록 강고하게 지속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한국에 이식된 행태주의적 사고방식도 한반도 냉전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고 판단한다.

 나는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 중에 각종 정치제도를 암기시키는 교육방식에 커다란 실망을 느꼈다. 그런데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하면서 가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더욱 커다란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에서 수입한 행태주의가 미국보다 더욱 번창해 있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 학계에서는 개별 논문의 질을 따지기보다는 논문의 출판 편수를 양적으로 측정해서 학자의 능력을 평가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의 행태주의적 사고방식을 액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나는 조지아대학 재직 시절 교수회의에서 종종 이렇게 주장했다. “막스 베버라는 걸출한 사회학자도 만약 40대에 조지아대학의 ‘테뉴어’(종신교수)를 신청했다면 분명 탈락했을 것이다. 베버는 논문의 양이 아니라 논문의 질이 우수한 학자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행태주의는 철학적으로 파산했지만 한국 학자들을 매개로 한국의 정신세계에 강매되었다. 나는 그런 현상을 ‘인식론적 제국주의’(epistemic imperialism)라고 부른다. 행태주의가 한국 정신세계에 침투해서 ‘지적 식민지’(intellectual colony)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한반도 냉전은 바로 그 식민지에서 풍요롭게 서식하는 악성 종양 중 하나인 셈이다.

한반도 냉전의 한복판에 ‘북한’이 존재한다. 북한이 한반도 냉전의 원인이라는 뜻은 아니다. 한반도 냉전의 거의 모든 양상이 북한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야기된다는 뜻이다. 소련이 붕괴하자 소련에 의존하고 있던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도 줄줄이 붕괴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소련에 완전히 장악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건재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한반도 냉전이 지속되는 까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북한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나는 한국 학계의 북한 연구방법에 대해서는 지극히 회의적이다. 한국의 북한 연구는 미국의 행태주의적 냉전 연구와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미국에서 소련 내부를 관찰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북한 내부를 관찰하기가 쉽지 않다. 미국 사회과학자들이 소련을 ‘블랙박스’로 간주하고, 그것의 투입과 산출을 관찰해서 블랙박스 내부의 역학을 추론하고자 했는데, 한국의 북한 연구자들 역시 유사한 방식을 따르고 있다. 북한을 단편적으로 관찰한 데이터나 탈북자 면담 내용 등을 1차 자료로 간주해서 북한 내부의 역학을 추론하는 연구가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행태주의적 냉전 연구가 실패했던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한국의 행태주의적 북한 연구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한식 교수는 북한에서 군용 트럭으로 남쪽의 인도주의적 지원 쌀을 운송하는 위성사진만으로 군량미 전용의 증거로 비난하는 식의 표피적 보도를 북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2006년 한 시사주간지 보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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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북쪽 군사분계선 인근에서 촬영된 것으로 일부 보수 매체에서 보도한 사진. 북이 인도적 지원 쌀을 군량미로 전용하고 있다는 증거로 종종 인용된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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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예를 들어 보자. 미국과 한국은 북한에 식량을 지원한 뒤 위성사진을 통해서 북한 군용트럭이 식량을 운송하는 모습을 확인한다. 그들은 그 사진을 근거로 북한 군대가 인민에게 전달되어야 할 식량을 탈취하고 있다고 성토한다. 그러면서 그들이 당연시하는 북한에 대한 불신을 더욱 강화시킨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확신은 북한의 실상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도출한 오판에 불과하다. 내가 북한에서 직접 확인하기로, 북한의 운송수단은 워낙 군용트럭밖에 없다. 또한 북한 군대는 독립채산제로 운영된다. 국외에 무기를 판매한 대금 등도 독자적으로 운용한다. 따라서 군량미는 늘 충분히 확보해 둘 수 있다. 혹여 외국에서 지원한 식량을 군대로 보내면 군에서는 오히려 군량미 풍족한데 왜 가져왔느냐고 반문하면서 군인 가족들에게 전달해 주라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군인 가족들의 불만이 쌓이고, 그 가족의 일원인 군인들의 사기가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박한식 교수는 독립채산제인 북한군은 자체 재정으로 군량미를 구입해 비축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2019년 봄 두만강 인근에서 군량미를 트럭에 싣고 있는 북한군.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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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의 증언 역시 객관적 데이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탈북자의 ‘존재론적 지위’ 그 자체가 북한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탈북’이라는 행위는 북한을 혐오하고 부정하는 가치판단을 명시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북한을 실존적으로 부정한 사람이 어찌 북한에 대해서 공정한 얘기를 할 수 있겠는가? 일찍이 막스 베버는 “우리가 가치판단을 하는 순간 사실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중지된다”고 역설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다. 나는 황장엽과 개인적 친분이 있어서 그의 망명 이전 북한에서부터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를 통해서 직접 확인한 적도 있는데, 탈북자의 얘기는 대부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내지 국가정보원(국정원)의 각본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한국의 많은 북한 연구자들은 탈북자의 증언을 기초로 각종 학술서를 저술하고, 탈북자 자신 또한 북한에 대한 가치판단을 기초로 저술한 책을 출판해서 북한 문제 ‘최고의 전문가’로 행세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한국의 북한 연구자들에게 꼭 전달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바로 행태주의 그 자체의 본질적 결함이 그것이다. 행태주의는 반드시 측정 가능한 관찰 데이터가 있어야만 연구를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데이터를 아무리 많이 확보했다손 치더라도 북한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성취할 수는 없다. 일찍이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수백만명이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오직 뉴턴만이 그것을 보면서 역학관계의 수학적 도식(mathematical scheme)을 구상했다. 지금까지 수백만명이 사원과 교회에서 램프가 좌우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오직 갈릴레오만이 그것을 보면서 뉴턴과 유사한 수학적 도식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수백만명이 미국을 방문했고, 그 이상의 사람들이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미국 사회를 관찰하고서 <미국 민주주의>라는 불멸의 저서를 쓴 사람은 알렉시 드 토크빌과 같은 지적 통찰력과 개념적 사유능력을 소유한 이들뿐이었고,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불멸의 논문을 작성한 사람도 막스 베버와 같은 지적 통찰력과 개념적 사유능력을 소유한 학자뿐이었다. 

무면허 의사가 환자의 환부에 청진기를 아무리 들이댄다 한들 병을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뉴턴과 갈릴레오와 토크빌과 베버에 버금가는 지적 통찰력과 개념적 사유능력을 결여한 ‘무면허 의사들’이 북한을 방문해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촬영한 다음, 남한에 돌아와 북한 전문가로 행세하고, 북한에 관한 책을 쓰고, 남한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북한에 대한 강의를 한다. 그러나 그런 행위는 한마디로 학문에 대한 ‘모독’이다. 학문이란 최고급 수준의 전문 분야는 결코 그런 식으로 탄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들의 행위가 북한을 온갖 형태로 곡해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각종 편견을 한국 사회에 광범위하게 유포시킨다는 데 있다. 단언컨대 그런 편견이 바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강력하게 방해하는 원천이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북한을 자주 방문했기 때문에 북한 전문가가 된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 나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굴욕을 느낀다. 나의 북한 방문과 북한 이해를 동일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여행자는 출발하기 이전에 장비를 단단히 챙긴다. 나는 북한을 방문하기 이전에 나의 학문적 연구 경험과 독자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개발한 수많은 ‘이론적 명제들’(theoretical propositions)을 단단히 챙긴다. 예컨대 나는 “모든 정치체제는 정통성 위기에 봉착했을 때 붕괴의 위험에 처한다. 정통성의 요체는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이념적 가치와 정신이다”라는 이론적 명제를 세웠다. 북한에 가서는 나의 이론적 명제에 견주어 북한 사회를 주의 깊게 관찰한다. 북한이 경제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붕괴되지 않는 까닭을 구체적으로 확인한다. 나는 그런 관찰 이후 나의 이론적 명제가 옳고, 세계에서 통용되는 북한붕괴론이 틀렸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지난해 한국에서 출간된 <선을 넘어 생각한다>의 제1장 ‘북한은 과연 붕괴할 것인가’는 바로 그런 과정을 거쳐서 집필된 것이다. 따라서 나의 북한 방문은 이론적 명제들을 경험적으로 검증하고, 수정하고, 보완하는 일련의 ‘참여관찰’이었다.

이른바 ‘햇볕정책’에도 행태주의적 사고방식이 진하게 녹아 있다. 물론 나는 햇볕정책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길을 개척하는 데 기여한 ‘위대한’ 업적을 모르지 않는다. 또한 나는 김대중과 수없이 만나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 등을 주제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나는 햇볕정책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의 한계를 발전적으로 극복하는 노력 또한 필요하다고 본다. 햇볕정책에 깔려 있는 중요한 전제 중 하나는 북한이 ‘비정상국가’라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과 평화적 교류와 협력을 강화해서 북한을 ‘정상국가’로 변화시키고자 했다. 햇볕정책에서 염두에 둔 정상국가란 미국이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민주주의적 정치체제와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였다. 그러나 햇볕정책에서 당연시한 그러한 전제는 궁극적으로 미국 행태주의의 여러 이론들, 예컨대 데이비드 이스턴의 정치체제론, 가브리엘 알몬드의 구조기능주의, 탤컷 파슨스의 근대화론 등에서 공유하는 ‘서구적 편견’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론은 모두 경험적으로 실패했으며, 따라서 햇볕정책에서 소망하는 목적 또한 실현할 수 없었다. 햇볕정책을 통해서 북한의 정치체제와 경제체제를 전혀 변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냉전이 요지부동의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는 한-미 동맹에 따라 연례적으로 수행되는 한-미 군사훈련, 남북한 군비경쟁, 북핵 문제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를 지배하는 사고방식에도 행태주의가 깊이 스며들어 있다.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전사자 수에 강박적으로 집착했다. 인간 대신 물질을 중시하는 행태주의적 사고방식을 따르다 보니 북베트남 전쟁 지휘부의 정치적 판단에 주목하는 대신 물질과 다를 게 없는 전사자를 헤아리는 일에 몰두했던 것이다. 미국은 전투 현장에서는 패배한 적이 없지만 베트남전쟁을 수단으로 미국이 추구하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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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 교수는 ‘미국식 행태주의 전쟁관’에 따른 군비경쟁 끝에 한미연합군이 북한과 지상전을 벌인다 해도 베트남전쟁 때처럼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의 하나로 철저한 방공요새로 설계된 평양의 지하철 역사를 꼽는다. 한국보다 1년 앞선 1973년부터 개통된 평양 지하철은 3개 노선에 17개 역이 대동강 서쪽 시내를 연결하고 있다.(맨 왼쪽 사진) 모스크바를 본떠 높은 돔형 천장에 넓은 광장을 자랑하는 개별 역사는 평양 시민들 전부가 대피할 수 있는 공간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가장 관광객이 붐비는 영광역.(가운데 사진) 대부분 지하 100~150m 깊이에 자리한 지하철역은 45도 경사의 가파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맨 오른쪽 사진) 사진 통일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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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행태주의적 사고방식을 불식시키지 못한 한-미 군사훈련 방식으로 북한과 전쟁을 수행한다면 전사자 수에서도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원자탄 폭격에도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지하 방공호, 지하철 등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양 지하철은 지하 평균 100m 깊이에서 운행된다. 대동강변 밑을 오가는 것이다. 내가 관찰하기로, 평양 시내에는 모두 17개의 지하철역이 2㎞ 간격으로 배열되어 있다. 그런데 각 지하철역은 운동장처럼 커다란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이곳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휴식공간으로도 안성맞춤이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130~150m 깊이로 내려가는 동안 책을 보기도 좋다. 그런데 평양 인구는 200만명 정도 된다. 평양의 방공호, 지하철 등은 평양 인구를 모두 수용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에서도 이런 사실을 모두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서울의 수많은 자동차에 장착된 연료통, 서울 전역에 거미줄처럼 연계된 도시가스 배관 등은 북한의 폭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지 않은가? ‘서울 불바다’ 발언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미국 해군 전투기 조종사를 지냈고 펜타곤(국방부)에서도 근무했던 군사전문가 팀퍼레이크 역시 “한국과 미국이 북한과 지상전을 벌인다면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할 것”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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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군 전투기 조종사 출신으로 펜타곤에서도 근무했던 군사전문가 팀퍼레이크.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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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라도 우리는 무엇보다도 미국의 행태주의적 전쟁관이 남북한 군비경쟁을 교묘하게 조장함으로써 한반도 냉전을 끝없이 지속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는 사실을 간파해야 한다. 미국은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한과 정치적 협상을 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폐기’(CVID)라는 비현실적인 요구를 하면서 북한으로 하여금 핵무기를 포기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런 반면 남한에 대해서는 미국의 핵우산을 이유로 핵무장을 막고 있다. 그러면 북의 핵이 두려운 남한은 미국의 군산복합체로부터 첨단 재래식 무기를 무한정 구입해야만 한다. 더욱이 미국은 한-미 군사훈련을 한국과 세계에 미국의 최첨단 신무기를 홍보하는 수단으로도 활용한다. 그런데도 한국은 미국의 행태주의적 사고방식에 세뇌되어 미국이 홍보하는 무기를 끝없이 사들여야만 안전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한반도 군비경쟁이 끝없이 고조되는 바로 그 현장에서 말이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10628.html#csidxfeda7dfd13ddff8a47420a31c1450d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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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미 강단 ‘행태주의’ 지배…평화병 지적 처방 못찾아 절망했다”

1965년 미국 베트남내전 본격 개입
“평화 찾아온 미국에서 또다시 전쟁”

냉전시대 소련 ‘철의 장막’에 공포감
1953년 데이비드 이스턴 ‘정치체제론’
‘자연과학의 투입-산출 모형 차용’
‘소련의 행태’ 예측 시도했으나 실패

과학철학 명문 미네소타대학원에서
‘행태주의의 문제’ 규명하고자 씨름
조지아대학 교수로 ‘비판 강의’ 개설

기계적·산술적·가치중립적 ‘중시’
행복·정의·평화·이상 등 ‘도외시’
“군비강화로 승리한다는 맹신 낳아”
베트남전·이라크전…패배 필연적
13회-미국 행태주의의 철학적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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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아메리카대학 대학원에서 기대했던 ‘평화병의 지적 처방’을 찾지 못해 절망한 박한식 교수는 역으로 행태주의의 문제점 연구에 몰두했다. 1971년 조지아대학 국제관계학과 교수로 부임해서는 ‘정치학 방법론: 과학철학적 성찰’ 과목을 열어 행태주의 비판 강의를 해왔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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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미국 땅에 도착하자마자 서울에서 품었던 나의 꿈은 산산조각 나버리고 말았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미국이란 나라에서는 나의 ‘평화병’을 치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한순간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 국공내전과 한국전쟁을 체험하면서 중독된 평화병을 미국에서 치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미국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 정신을 건국이념으로 삼은 나라가 아닌가?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 세워진 나라라면 지구상에서 평화를 가장 애호하는 나라가 아니겠는가? 그런 기대를 가지고서 미국 땅을 밟았지만 미국은 평화 대신 베트남 전쟁을 들이밀었다. 미군은 그해 2월 북베트남 폭격을 시작으로 본격 개입을 하고 있었다. 또 전쟁이란 말인가? 도대체 왜 나의 인생에서는 가는 곳마다 전쟁을 만나야 한단 말인가?

 또 다른 이유는 나를 더욱 절망하게 만들었다. 그즈음 미국 정치학계에서는 이른바 ‘행태주의’(behavioralism)의 붐이 막 일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나 역시 행태주의에 대해서 많은 호기심과 기대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메리칸대학 강의실에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서울대에서 느낀 실망감보다 더 극심한 실망감을 반복적으로 느꼈다. 행태주의를 통해서는 내가 염원하는 ‘평화병의 지적 처방’을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행태주의는 오히려 나의 학문적 관심을 압살했다. 미국에 와서 또다시 ‘학문적 고아’가 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나의 미국 유학 생활은 평화를 해명하지 못하는 행태주의의 문제점을 학문적으로 해명하는 난제와 씨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행태주의는 냉전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핵무기를 보유한 미국과 소련 양국의 이념 대결로 시작된 냉전은 전세계를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으로 양분하면서 인류의 공멸을 야기할 정도의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켰다. 그런데 미국은 ‘철의 제국’ 소련의 행태를 예측할 수 없었고, 그처럼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소련에 대한 공포감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러자 사회과학자들이 나섰다. 그들은 과학적 방법을 활용해서 소련의 행태를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측’까지 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또 소련의 행태에 대한 불확실성을 감소시킴으로써 소련이 야기하는 공포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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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 교수가 아메리칸대학 대학원에서 유학을 시작한 1960년대 중후반 미국 사회과학계에는 ‘행태주의’ 방법론이 지배하고 있었다. 1953년 ‘정치체제론’으로 행태주의를 주창한 데이비드 이스턴 시카고대학 교수를 비롯, 행태주의의 거장으로 불린 가브리엘 알몬드 스탠퍼드대학 교수(왼쪽), 구조기능주의 사회학자 탤컷 파슨스 하버드대학 교수(오른쪽) 등이 대표 학자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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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태주의 혁명을 선도한 데이비드 이스턴은 1953년에 <정치체제론>(The Political System)을 출간했다. 이스턴은 자연과학의 ‘투입-산출 모형’을 차용해서 정치체제의 행태를 예측하고자 했다. 냉전 시기 소련의 정치체제 내부는 직접 관찰할 수 없기 때문에 ‘블랙박스’로 간주하고, 블랙박스의 투입과 산출을 관찰하면 소련의 정치체제 내부의 역학을 추론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행태주의의 거장으로 평가되는 가브리엘 알몬드는 한걸음 더 나갔다. 그는 구조기능주의 시각에서 블랙박스를 해부했다. 자연과학적 객관성을 신봉한 그는 모든 정치체제 역시 몇 가지 보편적 기능을 수행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즉 모든 정치체제는 정치사회화, 이익 표출, 정치커뮤니케이션 등과 같은 투입이 이뤄지면 정치체제 내부의 역량 기능, 전환 기능, 유지 및 적응 기능 등을 통해서 입법·행정·사법 등과 유사한 결과를 산출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각국이 처한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특수성에 따라 투입에서 산출에 이르는 경로는 상이할 수 있다. 그러나 알몬드는 모든 정치체제의 구조와 기능이 진화해서 결국은 미국 민주주의 체제로 수렴된다는 근대화론의 철학을 견지했다. 바로 그 경로가 역사의 보편적 법칙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알몬드의 구조기능주의는 사회학자 탤컷 파슨스의 구조기능주의를 정치학적으로 변용시킨 것이었다. 파슨스는 정치체제를 포함한 모든 사회체제는 그 자체의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기능을 수행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런 기능을 ‘패턴변수’라고 지칭했다. 파슨스는 패턴변수를 5가지 유형으로 집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파슨스는 귀속적 지위, 기능적으로 뒤섞인 지위, 독특한 가치, 패거리 지향, 정서 지향성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사회를 전통사회로 지칭하고, 그것들과 상대적인 기능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사회를 근대사회로 지칭했다. 그런데 파슨스가 볼 때 인류의 역사는 전통사회에서 수행하는 패턴이 근대사회에서 수행하는 패턴으로 변화하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파슨스가 이해하는 근대사회란 미국 민주주의가 대표하는 서구사회를 의미했다. 결국 파슨스는 ‘서구적 편견’을 지닌 근대화론의 기수였던 것이다.

그러나 행태주의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행태주의의 방식에 따라 아무리 연구해도 소련의 행태를 설명할 수 없었고, 예측은 더더욱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행태주의를 탄생시킨 데이비드 이스턴은 1969년 ‘정치학에서 새로운 혁명’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스턴은 정치행태의 설명과 예측을 목표로 출발한 행태주의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자인하고, 앞으로 정치학은 시대의 절박한 문제를 해결하는 연구에 헌신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미국 학계에서 이스턴의 제안은 외면당했다. 

이스턴으로부터 독립한 행태주의가 이제는 너무도 장성해서 학계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9년 후반 소련이 붕괴되면서 냉전이 종식되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냉전 종식을 예측한 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행태주의가 인간의 행태를 설명하고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미 오래전에 판명되었는데도 그것을 관성적으로 고수하는 미국 학계의 ‘지적 지체’를 단적으로 예증하는 사례가 아닐 수 없었다.

박한식 교수는 1967년 미네소타대 대학원에 들어가 행태주의 문제점을 분석한 연구로 3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특히 1953년 설립된 미네소타 과학철학센터는 허버트 파이글(앞줄 오른쪽 둘째), 메이 브로드벡(앞줄 맨 오른쪽) 등 쟁쟁한 교수진을 자랑했다. 사진  미네소타대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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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네소타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가 허버트 파이글, 메이 브로드벡 등의 과학철학 강의를 집중적으로 수강하면서 행태주의의 문제점을 철학적으로 진단하고자 했다. 내가 볼 때 행태주의가 인간의 행태를 설명하고 예측하지 못한 결정적 이유는 자연과학적 방법을 차용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행태주의의 연구 대상인 인간과 자연과학의 연구 대상인 자연은 존재론적으로 다르다. 예컨대 인간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인 반면, 자연은 그런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면 자결하기도 하지만, 자연의 세계에서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행태주의는 자연과학적 방법을 차용한 나머지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을 의미를 추구할 수 없는 자연으로 간주하면서 연구를 진행시켰다. 다시 말해서 연구 목적에 적합한 연구 수단을 개방적으로 모색한 것이 아니라, 연구 수단을 고정시켜 놓고 연구 목적을 그것에 인위적으로 짜맞췄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행태주의의 모든 재앙이 잉태되었다.

첫째, 행태주의는 자연과학적 논리로 연구할 수 있는 기계적인 인간관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냈다. 예컨대 행태주의는 인간을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동물로 간주했다. 여기에서 인간의 합리성이란 경제적 이익에 따라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또한 경제적 이익은 양적으로 측정할 수 있기 때문에 수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경제적 이익만을 좇는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예컨대 종교전쟁을 경제적 이익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둘째, 행태주의는 개인들의 산술적 종합을 사회로 간주하는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전제했다. 그러나 사회에서 공유하는 역사적 유산, 문화적 특성, 공적 가치 등은 개인들의 산술적 종합을 초월해서 존재한다. 일찍이 장자크 루소는 사회에서 공유하는 일반의지는 그 사회 구성원의 산술적 종합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런데도 행태주의는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고수함으로써 사회 구성원 전체를 규율하는 가치를 추방해 버렸다. 하지만 그런 가치를 도외시하고 어찌 사회를 제대로 연구할 수 있겠는가?

셋째, 행태주의는 통계학·확률론 등을 중요한 연구 수단으로 채용함으로써 양적 측정이 가능한 데이터에만 배타적으로 주목하고, 행복·정의·평화 등과 같이 측정이 용이하지 않은 질적 가치를 연구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그러자 행태주의는 그러한 질적 가치에 대해서 사회적 책임을 질 필요가 전혀 없게 되었다. 오히려 그런 가치를 철저히 외면해야만 가치중립이라는 과학적 이상에 충실하게 복무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넷째, 행태주의는 인간의 ‘사색’ 또한 추방했다.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장 우선적으로 문제를 색출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상적 (문제가 없는) 사회에 대한 개념을 먼저 견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상적 사회에 대한 개념에 비추어 비정상적 사회의 문제를 선명하게 색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적 사회에 대한 개념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철학·역사·윤리, 특히 인간의 본성을 깊이 성찰해야만 한다. 하지만 수학적 합리성에 배타적으로 주목한 행태주의에서는 이를 도외시했고,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도 몽매했다. 그러자 행태주의는 이상적 사회에 대한 개념을 독자적으로 구상할 능력 또한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면 그런 행태주의를 통해서 학생들에게 어떤 사회의 이상을 가르칠 수 있고, 그런 이상을 구현할 수 있는 사유능력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다섯째, 행태주의적 사고방식은 ‘군비경쟁’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 주지하듯 전쟁은 인간이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쟁은 인간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다. 전쟁의 와중에도 외교적 협상과 정치적 타협이 숨가쁘게 이뤄지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인간 대신 사물에 주목하는 행태주의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전쟁의 본질은 인간이 아니라 ‘무기’였다. 그래서 인간의 정치와 외교를 추방하고 오직 막강한 무기를 적대국보다 많이 축적해야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신념을 탄생시켰다. 그러면 적대국이 가만히 있겠는가? 인간을 누락시킨 무기 중심 전쟁관은 필연적으로 끝없는 군비경쟁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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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봄 박한식 교수가 미국 유학 생활을 시작할 때 존슨 행정부는 북베트남군(월맹군)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을 시작으로 베트남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다. 마침 산업사회 진입의 상징인 텔레비전이 대중적으로 보급된 시기여서 미국인들은 안방에서 생생한 베트남 전투 현장 중계를 볼 수 있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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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막강한 무력을 보유하고서도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국이 베트남의 전투 현장에서 패배한 적은 없다. 그러나 미국은 정치적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전쟁은 무기 그 자체가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치적 판단을 통해서 수행하는 것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단적으로 예증하는 사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도 미국은 여전히 정치와 외교를 경시하면서 자국의 군산복합체가 양산하는 첨단 무기로 무자비한 전쟁을 강행하는 ‘낭만적’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의 정치적 본질을 거스르는 낭만적 습관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치적 패배뿐이었다. 실제로 미국은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또다시 패배했다. 두 전쟁에 삼성 장군으로 참전했던 대니얼 볼저는 500여쪽에 이르는 자신의 저서 <왜 우리는 졌는가>(Why We Lost·2014)에서 미국이 스프레드시트의 데이터와 추상적 이론을 맹신했기 때문에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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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날마다 방송으로 보도되는 ‘전사자 수’ 속보는 미군의 압도적인 우위를 보여줬다. 그러나 미국은 결국 베트남전에서 패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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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미국의 행태주의적 전쟁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점은 ‘전사자 수’(body count)에 대한 강박적 집착이다. 내가 1965년 미국에 도착해서 목격한 잊을 수 없는 기억 중 하나는 텔레비전에서 연일 보도하는 베트남 전쟁 전사자 숫자였다. 미군 전사자 수와 베트남군 전사자 수를 대비시킨 도표를 보면 항시 베트남 전사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따라서 그 도표만 보면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매일 승리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행태주의는 전사자 수라는 통계로 전쟁의 정치적 본질을 은폐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훗날 조지아대학 대학원 교수로서 필수과목으로 개설된 ‘정치학 방법론: 과학철학적 성찰’에서 위에서 예시한 행태주의의 한계를 상기시키면서 행태주의를 수십년간 가르쳤다. 그런데 한국을 방문해보니 행태주의가 미국보다 더욱 번창해 있었다. 충격이었다! 

이제 한국의 사회과학을 지배하는 행태주의를 자각하지 못할 지경에 이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거의 모든 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입하다 보니 행태주의의 적폐까지 ‘선진학문’으로 포장해서 끊임없이 수입했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08961.html#csidxf2383e9bef7ff5ab1c926880daf943a 



[34] “100달러로 시작한 워싱턴살이 홀서빙하며 ‘노예문화’ 실감했다”

‘만주 조부모 찾으라’ 부친 유언에
‘평화병’ 해법도 찾으려 유학 ‘결단’

1965년 봄 약혼자 전성원과 미국행
아메리칸대-조지워싱턴대 각각 ‘입학’
‘여행자 1인 50달러 제한’에 무일푼

숙박비 줄이려 결혼…뉴욕 신혼여행
“캔사료를 개장국인 줄 알고 먹기도”

접시 치우는 ‘버스보이’ 허약해 포기
택시운전사는 시내지리 몰라 탈락
영어 서툴러 호텔 전화교환수 해고
‘심야’ 엘리베이터 보이 박봉에 중단

중국식당 홀서빙 순발력으로 ‘성공’
담당 테이블 늘어나며 ‘팁’도 독점
‘공평분배’ 제안 다른 직원들 호평
“팁 생활하며‘ 직업 귀천’ 뼈져리게”


박한식의 평화에 미치다
나는 1965년 약혼자 전성원과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전성원은 조지워싱턴대학에서, 나는 아메리칸대학에서 각각 입학 허가서를 받았다. 전성원의 주머니에는 달랑 50달러가 들어있었고, 나의 주머니에도 달랑 50달러가 있었다. 나에게 돈도 없었지만 박정희 정권은 50딜라 이상을 소유하고서 외국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당시 국가의 외환보유고가 그렇게 많지 않았겠지만, 국외 여행자 최대 보유 한도액을 50달러로 제한한 것은 사실상 나가지 말라는 뜻이었다. 또한 외국 유학을 가기 위해서는 국가에서 주관하는 영어와 국사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는데, 그 시험의 합격율도 아주 낮게 책정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우리 두 사람의 유학은 너무나도 무모한 일이었다. 전성원도 무일푼인 나 하나만 보고서 인생을 걸었다.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동기생 중에서도 그때 미국 유학은 나 혼자 뿐이었다.
내가 그처럼 어려운 여건에서, 그처럼 비현실적 꿈을 꾼 까닭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었다. 빨갱이로 몰려 어려운 삶을 살아가시던 아버님의 평생 소원은 만주에 계시는 조부모님을 찾는 것이었다. 아버님께서는 훗날 임종 순간에도 나에게 조부모님을 찾아 달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그러나 그 당시 중국은 ‘죽의 장막’이었고, 소련은 ‘철의 장막’이었다. 한국에서 살면 조부모님을 찾을 길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미국에 간다면 혹시 어떤 방법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처럼 막연한 꿈이 나의 실존적 결단을 이끈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둘째, 학문적 이유가 있었다. 내가 유년시절부터 앓고 있는 ‘평화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전쟁과 평화 문제, 한반도 통일문제 등을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서울대 재학 중에 극심한 지적 방황을 겪으며, 한국에서는 나의 평화병을 더 이상 치유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전성원과 함께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도착하니 꼭 사막에 들어선 것 같았다. 절해고도에 와 있는 듯도 했다. 당장은 배가 고팠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전성원과 나는 생존을 위해 결혼을 서둘렀다. 방을 하나로 합치면 이중으로 나가는 숙박비를 절약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65년 4월 24일 감리교회인 워싱턴한인교회(화부 한인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황재경 담임 목사가 주례를 서 주셨다. 뉴욕으로 신혼여행도 갔다. 전성원과 손을 꼭 잡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도 가보고,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함께 사진도 찍었다. 또 뉴욕에 오니 내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해둔 ‘절친’ 김태원이 떠올랐다. 나는 김태원과 함께 걷기로 했던 브로드웨이를 나 홀로 몇 블록 걸으면서 진한 그리움에 젖기도 했다.
월세 75달러 짜리 단칸방을 얻어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1967년 4월 큰딸 주영이가 태어났다. 나는 매일 아침 가게로 달려가 우유를 샀다. 배달 우유는 비쌌기 때문이다. 하루는 아침 7시무렵 ‘세븐업’(7up)에 도착했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나는 문을 힘차게 두드렸다. 그러자 주인이 문을 바스스 열고서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간판에 표시된 세븐업을 손으로 가르치면서 고함을 쳤다. “지금 7시가 넘었는데 도대체 왜 문을 열지 않는 겁니까?” 주인이 눈을 끔벅이면서 나를 째려봤다. 그 순간 나는 아차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료수 상표인 세븐업을 아침 7시에 문 여는 것으로 잘못 해석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 같았다면 주인이 총을 들고 나와서 나를 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성보다는 남성의 직업이었다. 사진은 엘리베이터 보이가 등장하는 영화의 한 장면.
여성보다는 남성의 직업이었다. 사진은 엘리베이터 보이가 등장하는 영화의 한 장면.
한번은 마트에 갔는데 통조림 깡통에 개가 그려진 것이 있었다. 순간 생각했다. 와! 미국에서도 개장국(보신탕)을 먹는구나!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그것을 샀다. 왠지 기분이 뿌듯했다. 집에 와서 깡통을 따고 아내와 함께 개장국을 먹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 마주보면서 개장국 건더기를 우물우물 씹었다. 서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맛이 괜찮다는 사인도 주고 받았다. 너무 배가 고팠기 때문이었을까? 개사료가 개장국으로 보였으니까!
내가 목격한 1965년의 미국 사회는 아직 산업사회 초기 단계였다. 생산직 근무자가 서비스업 근무자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아직 컬러 티브이도 없었고, 물론 휴대전화기도 없었다. 미국은 1969년도에 가서야 비로소 초산업사회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주지하 듯 미국에서 생활하려면 반드시 자가용이 있어야 한다. 나는 1965년에 사용한 지 9년된 쉐보레 중고차를 200달러를 주고 구입했다. 그래도 나는 내 차를 애지중지 사용했다. 집 앞 길가에 차를 세워 놓고서 바케스에 물을 담아 콧노래를 부르면서 자주 세차했다. 그렇게 정성껏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약 1년정도 타고나서도 225달러에 되팔 수 있었다.
1965년 박한식(오른쪽)·전성원(왼쪽) 부부는 워싱턴 디시의 원룸 월세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일과 학업을 동시에 하는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부부가 10여 년 전 다시 찾아 갔을 때도 아파트가 그
1965년 박한식(오른쪽)·전성원(왼쪽) 부부는 워싱턴 디시의 원룸 월세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일과 학업을 동시에 하는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부부가 10여 년 전 다시 찾아 갔을 때도 아파트가 그
이대 약대를 나온 박한식 교수의 부인 전성원은 조지 워싱턴대학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lt;한겨레&gt; 자료사진
이대 약대를 나온 박한식 교수의 부인 전성원은 조지 워싱턴대학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미국에서 당장 생활하기 위해서는 직장이 있어야 했다. 한국에서 약학을 공부한 아내는 쉽게 정규 직장을 구했지만,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곧장 직업소개소에 갔다. 나에게 무슨 기술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기술이 하나도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선택지가 그렇게 많지 않다면서 ‘버스 보이’(bus boy)를 해보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버스 차장을 하라는 줄 알았다. 나는 흔쾌히 좋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소개소 직원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버스 회사가 아니라 식당이었다. 나는 거기 가서야 버스 보이가 식당 테이블의 접시 등을 치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처지가 급한 나로서는 곧장 일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당시 접시는 모두 사기로 만들어서 매우 무거웠다. 몸이 허약한 내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할 수 없이 새 직장을 구해야만 했다.
정치학을 전공한 박한식은 유학 초기 특별한 기술이나 자격이 없어 갖가지 허드렛일을 전전해야 했다. 밤새 교대근무하는 엘리베이터 보이는 너무 일당이 적어서 그만 뒀다. 1960년대 중반까지 미국에서도 엘리베이터마다 사람이 타서 수동으로 작동시키는 단계였고
정치학을 전공한 박한식은 유학 초기 특별한 기술이나 자격이 없어 갖가지 허드렛일을 전전해야 했다. 밤새 교대근무하는 엘리베이터 보이는 너무 일당이 적어서 그만 뒀다. 1960년대 중반까지 미국에서도 엘리베이터마다 사람이 타서 수동으로 작동시키는 단계였고
두번째로 구한 직업은 엘리베이터 보이였다. 그 시절 엘리베이터는 지금처럼 자동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직접 조작을 해야만 움직였다. 나에게 배당된 근무시간은 밤 11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였다. 나는 너무 좋았다. 우선 그 시간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밤새 책을 보면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급여가 너무 적어서 오래 할 수 없었다. 한 학기 등록금만 700달러가 넘었는데, 엘리베이터 보이 급여로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내가 도전한 세번째 직업은 택시 운전수였다. 택시 운전을 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다는 얘기에 귀가 솔깃하기도 했다. 그런데 운전 면허증 필기시험은 문제가 없었지만 실기시험은 두번이나 떨어졌다. 실기시험 문제는 예컨대 공항에서 국무부까지 가는 길을 설명해 보라는 것이었다. 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내가 그 길을 알 수는 없었다. 택시 운전사 일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네번째 직업은 호텔 전화교환수였다. 그 때는 호텔에 전화가 오면 교환수가 각 방에 연결해 주어야 통화가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교환수는 영어를 잘 해야 했다. 나는 영어를 잘한다고 얘기해서 채용되었다. 그러나 막상 일을 해보니 영어 듣기가 쉽지 않았다. 한번은 알아듣기 어려운 발음으로 장시간 얘기하는 전화가 왔다. 여러 차례 되물었지만 여전히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할 수 없이 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알았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호텔방에 연결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냥 뭉갰다. 그런데 내가 뭉갠 것은 하필 상갓집의 급한 부고였다. 나는 이틀만에 전격 해고되었다.
박한식 교수는 호텔의 전화교환수로 들어갔으나 영어를 잘 못 알아듣는 바람에 해고되기도 했다. &lt;한겨레&gt; 자료사진
박한식 교수는 호텔의 전화교환수로 들어갔으나 영어를 잘 못 알아듣는 바람에 해고되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다섯번째 구한 직장에서는 제니스(Jenny’s)라는 이름의 중국식당에서 홀 서빙을 했다. 제니스는 미국 국무부 근처에 있어서 국무부 직원들이 많이 찾았다. 나는 뚱뚱한 아줌마 몇 사람과 함께 일했다. 최저임금은 없고 오직 팁만 받아갈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처음에 내가 담당한 테이블은 5개였다. 점심 때가 되면 손님들이 들이닥쳐 순식간에 테이블 5개가 꽉 찾다. 나는 5개의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의 주문을 한꺼번에 받았다. 그래서 주방에 한꺼번에 음식 주문을 했다. 예컨대 볶음밥 10개, 소고기 볶음 9개, 새우튀김 8개, 탕수육 4개 등등과 같이 대량으로 주문을 한 것이다. 그러면 주방에서 내가 주문한 음식부터 만들어 주었다. 분량이 많았기 때문이다. 음식이 나오면 나는 번개처럼 빠르게 5개 테이블에 배달했다. 체구가 작은 나는 대단히 민첩하게 움직였다. 그러자 내가 맡은 5개 테이블의 손님 회전율이 매우 빨랐다. 음식이 많이 팔리니 사장이 아주 좋아했고, 나에게는 팁이 쏟아졌다. 사장은 내가 담당하는 테이블 숫자를 점차 늘려줬다. 이는 아줌마들이 담담하는 테이블 숫자가 점차 줄어드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그들은 상대적으로 몸이 비대하니 나처럼 빠르게 움직이지도 못했다. 주문도 개별 테이블 단위로 받았다. 그러니 그들이 받는 팁은 내가 받는 팁에 반비례해서 자꾸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아줌마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나는 사회주의 정신을 발휘해서 아줌마들의 불만을 순식간에 해소시켰다. 아줌마들을 다 불러 모았다. 나는 팁을 받으면 각자 주머니에 넣지 말고 우리가 준비한 통에 넣자고 말했다. 일이 끝나면 통에서 돈을 꺼내 평등하게 분배하자고 제안했다. 나의 얘기가 끝나자 마자 모든 아줌마들의 입이 귀에 걸려있었다! 나는 아줌마들 사이에서 인기 최고였다. 주인도 나날이 매상을 올려주는 나를 매우 좋아했다. 나 역시 수입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몹시 행복했다.
하루는 깔끔한 양복을 입은 신사 한 분이 내가 담당하는 테이블에 앉았다. 잠시 그분과 얘기를 나눠보니 한국에서 온 교수 같았다. 그분도 내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 와서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분에게 딱하게 보였기 때문일까? 홀에서 일을 하다가 테이블에 와보니 팁 20달러가 접시 밑에 숨겨져 있었다. 대단히 많은 액수였다. 그 당시 제니스의 음식 값은 1~2 달러 정도였다. 팁은 보통 25센트 정도를 준다. 그것도 10%를 넘는 액수이니 많이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의 손님은 2달러 짜리 음식을 먹지도 않았는데 20달러 되는 팁을 놓고 나간 것이다. 나는 그 팁을 보는 순간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힌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곧장 팁을 들고서 손님을 뒤쫓아 나갔다. 먼 발치에서 손님이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전속력으로 달려서 손님을 붙잡았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말했다. “선생님 마음 잘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팁을 너무 과하게 놓으셨더군요. 25센트만 받고 싶습니다. …” 25센트를 손에 쥐고 돌아서는 나의 발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눈 앞에서 20달러가 어른거리는 내 처지가 너무 비참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하루는 젊은 녀석들이 여자 친구들과 함께 왁자지껄 떠들면서 들이닥쳤다. 나의 테이블에 앉자마자 거드름을 피우면서 나에게 차를 따르라고 명령했다. 나는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 녀석들은 음식을 먹고 난 다음 팁을 딱 1센트 놓고 걸어 나갔다. 나는 말할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다. 나는 곧장 테이블의 1센트를 그 녀석들의 뒤꽁무니에 내던지며 외쳤다. “야 ~ 이 자식들아! 여기에 너희들 전 재산이 있다! 다 가지고 꺼져버려라! …” 그래도 화가 가시지 않았다. 나는 홀 서빙복을 벗어 던지고 집으로 와 버렸다. 그러자 지배인이 집까지 찾아와서 통사정을 했다. 내가 없으면 매상이 오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팁으로 생활하면서 미국의 독특한 팁문화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내가 그렇게 많이 돌아다닌 유럽에서는 미국과 같은 팁문화를 볼 수 없었고, 그밖의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오직 식당 종업원과 택시 운전수에게만 팁을 준다. 내가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미국의 노예제도에서 팁문화가 유래했다는 것이었다. 노예들은 노예제도에서 해방되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들에게 익숙한 식당일, 운전, 농사같은 것뿐이었다. 그런데 노예제도가 있을 때는 주인이 먹여주고 재워줬지만 노예제도에서 해방된 다음에는 스스로 먹고 살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팁을 주는 문화가 생겼다. 손님이 주인 노릇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박한식 교수는 대형 중국식당의 홀서빙을 맡아 특유의 순발력으로 팁을 독차지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팁’에 배어 있는 미국 특유의 노예문화와 직업귀천 세태를 체감했다. 실제로 미국의 레스토랑 종업원 노동조합(ROC)에서는 ‘팁 폐지 캠페인’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사진 ROCunited.org 갈무리
박한식 교수는 대형 중국식당의 홀서빙을 맡아 특유의 순발력으로 팁을 독차지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팁’에 배어 있는 미국 특유의 노예문화와 직업귀천 세태를 체감했다. 실제로 미국의 레스토랑 종업원 노동조합(ROC)에서는 ‘팁 폐지 캠페인’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사진 ROCunited.org 갈무리
흔히 미국에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팁으로 생활해 본 나는 직업에 귀천이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래서 그 어떤 경우에도 직장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런데 내가 최근 한국에 가서 배운 용어 중 하나로 ‘갑질’이 있었다. 그 용어의 뜻은 나에게 너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국문화가 결국 ‘노예문화’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러나 내가 미국에서 겪은 좌절은 직업의 귀천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지긋지긋한 국공내전과 한국전쟁 경험을 뒤로 하고 평화를 연구하기 위해서 미국에 왔다. 그런데 미국에서 나를 기다린 것은 베트남전쟁이었다. 또한 나는 서울대에서 해소하지 못한 지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미국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행태주의’(Behavioralism)가 지배하는 미국 대학은 나에게 말할 수 없는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내가 서울대 정치학과 강의실에 들어서면서 체험했던 실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미국에서 앓게 된 ‘평화병’과 지적 실망에 관해서는 다음 회에서 자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07219.html#csidx800058e729d3fdb8da14ad597901a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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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4·19 그날 경무대 앞에서 총격 겪으며 ‘민중혁명’ 체험했다”

1960년 서울대 문리대 2년때 ‘4·19’
갖가지 선언문 영어 번역작업 맡아
스크럼 맨앞 교문 나서다 경찰 충돌

팔뼈 부러진 줄도 모른 채 경무대로
발포 순간 수도관 뒤에 숨어 ‘무사’
버려진 교복 명찰 보고 ‘사망’ 추정

‘민중이 주도한 옆으로부터의 혁명’
“스스로 고난 극복의 뜻 실현한 역사”

‘4·19혁명 가치는 자주·민주·민생’
“미국만 의존한 ‘이승만 독재’ 무너져”
장면·박정희·전두환도 ‘민중’ 외면
“촛불혁명 ‘민중의 여망’ 실현 기대”

11회-4·19와 한국 민중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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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 교수는 서울대 문리대 2학년 때 ‘4·19혁명’을 온몸으로 겪었다. 1960년 4월19일 오전 9시께 문리대생을 선두로 법대 미대 약대 수의대 치대생 등 모두 3천여 명이 경찰 저지선을 뚫고 태평로 국회의사당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다. 사진 4·19혁명기념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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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대학시절을 회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사건은 ‘4·19’를 체험한 것이다. 대학 2학년 때인 1960년 4·19가 터졌다. 나는 서울대 문리대에서 작성한 각종 선언문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매달렸다. 또한 동숭동 교정에서 대열을 정비하는 시위대의 맨 앞에 섰다. 스크럼을 짜고 이승만을 성토하는 구호를 외치며 교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교문을 나서자 마자 바로 앞에서 대기하던 경찰이 방망이를 인정사정없이 휘두르면서 시위대를 진압했다. 나는 경찰의 방망이를 팔을 들어 방어하다가 팔뼈가 부러졌다. 이후 나는 평소 즐기던 바이올린 연주를 하지 못하게 됐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팔이 아픈 줄도 모르고 시위를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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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19일 서울대 문리대 전 학생 일동은 시위에 참가하면서 ‘4·19 선언문’을 발표했다. 정치학과 3학년이던 이수정 전 문화부 장관이 작성했다. 박한식 교수는 1960년 4월19일 발표된 ‘서울대 문리대 선언문’ 등을 영문으로 번역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이날 시위에 참가한 서울대생 6명이 경찰의 총격에 사망했다. 사진 <한국방송>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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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숭동에서 종로로 나오니 동대문 쪽에서 고려대 시위대가 내려오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과 합세해서 경무대로 향했다. 나는 경무대 앞에서도 시위대의 맨 앞에서 수도관을 밀면서 진격했다. 그러자 경찰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내 주변의 여러 학우들이 픽픽 쓰러졌다. 나는 키가 작아 수도관 뒤에 몸을 숨길 수 있어서 화를 면했다. 하지만 나 역시 사지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효자동의 높은 흙담을 뛰어 넘어 어느 풀밭에 쓰러져 있었다. 그 높은 벽을 어떻게 넘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마도 생명의 위협을 느낀 상황에서 초인적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복 상의를 벗어 던져버렸다. 교복을 입은 학생은 경찰이 무조건 체포했기 때문이다. 나는 가정교사로 머물고 있던 집을 향해 힘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부러진 팔이 퉁퉁 부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말할 수 없이 아픈 통증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내 교복 상의를 수거한 서울대에서는 명찰을 보고 내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단다.
1960년 4월19일 서울대와 고려대 학생들을 필두로 종로 일대에서 합류한 시민 시위대들이 효자동 경무대 입구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박한식 교수도 이  시위 대열의 선두에 나서 경무대 앞까지 돌진했다. 도로 오른쪽으로 공사중이던 수도관이 보인다. 사진 4·19혁명기념도서관
1960년 4월19일 서울대와 고려대 학생들을 필두로 종로 일대에서 합류한 시민 시위대들이 효자동 경무대 입구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박한식 교수도 이 시위 대열의 선두에 나서 경무대 앞까지 돌진했다. 도로 오른쪽으로 공사중이던 수도관이 보인다. 사진 4·19혁명기념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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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19일 경무대 앞으로 몰려드는 시민들의 기세에 경찰들이 후퇴를 하고 있다. 고 이명동 <동아일보>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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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19일 경무대 입구에서 시위대와 대치중이던 경찰은 오후 1시가 넘자  돌연 시민들에게 발포를 시작했다. 이 순간 박 교수는 수도관 뒤에 숨어 총격을 피할 수 있었다. 고 이명동 <동아일보> 사진기자
1960년 4월 19일 경무대 입구에서 시위대와 대치중이던 경찰은 오후 1시가 넘자 돌연 시민들에게 발포를 시작했다. 이 순간 박 교수는 수도관 뒤에 숨어 총격을 피할 수 있었다. 고 이명동 <동아일보>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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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19일 경무대 앞에서 시작된 경찰의 총격으로 서울에서만 120명 넘는 시민들이 사망하고 500여명이 부상당하는 ‘피의 화요일’ 참극이 벌어졌다. 박한식 교수는 서울대 교복 상의를 벗어 버려 경찰의 체포를 피할 수 있었다. 고 이명동 <동아일보> 사진기자
1960년 4월 19일 경무대 앞에서 시작된 경찰의 총격으로 서울에서만 120명 넘는 시민들이 사망하고 500여명이 부상당하는 ‘피의 화요일’ 참극이 벌어졌다. 박한식 교수는 서울대 교복 상의를 벗어 버려 경찰의 체포를 피할 수 있었다. 고 이명동 <동아일보>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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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선생은 한국역사의 ‘뜻’을 고난의 역사로 파악했다. 그러나 나는 그 고난을 극복하는 데서 뜻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내가 볼 때 4·19는 한국 현대사에서 고난의 극복이라는 뜻을 전형적으로 실현한 사건이었다.

 우리는 보통 4·19를 혁명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4·19는 노동자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혁명도 아니고, 군부 쿠데타에 의한 위로부터의 혁명도 아니다. 내가 볼 때 4·19는 민중이 주도한 ‘옆으로부터의 혁명’(Revolution from the side)이다. 민중이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확정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민중을 미국 연방헌법 첫 문장에서 명시한 ‘위 더 피플’(We the people)과 유사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주지하듯 4·19의 주역은 대학생이었다. 하지만 대학생이 선도하는 대열에 대학 교수, 고등학생, 일반 서민 등도 대거 참여했다. 나는 이들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민중이 적합하다고 본다.
인류 역사 최초로 ‘참정 민주주의’(participatory democracy)의 신기원을 연 미국은 민주주의의 정통성을 ‘인민주권’에 둔다. 링컨이 역설한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도 미국 참정 민주주의의 인민주권을 강조한 것이었다. 또한 미국 독립선언서에서는 인민주권을 유린하는 정부에 대한 저항을 다음과 같이 정당화했다. “인류는 (생명·자유·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에서 유래한다. 어떤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한다면 언제든지 정부를 변혁 내지 폐지하여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원칙에 기초를 두고 또 그런 원칙을 구현할 수 있는 형태로 권력을 재편한 정부를 창출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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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 교수는 4·19 민중혁명의 가치를 ‘자주·민주·민생’으로 정의했다. 서울대생들이 1961년 4·19 1돌을 맞아 ‘민족자주통일’ 구호를 내걸고 침묵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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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볼 때 4·19가 추구한 가치는 ‘자주·민주·민생’이었다. 애초 이승만 정부는 바로 그 가치를 체제의 정통성으로 삼아야만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 정통성을 구성하는 가치를 모두 철저히 부정했다. 미국에 과도하게 의존하면서 자주를 부정하고, 수많은 양민학살과 부정선거를 반복하면서 민주를 부정하고, 도탄에 빠진 경제를 외면하면서 민생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민중은 비폭력적 수단으로 이승만 정부의 ‘사이비’ 정통성을 강력하게 부정했다. 미국 독립혁명이 인민의 권리를 파괴하는 영국 정부로부터 그 권리를 되찾기 위한 인민의 투쟁이었던 것처럼 4·19 역시 민중의 권리를 파괴하는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그 권리를 되찾기 위한 민중의 투쟁이었다. 그러나 4·19는 미국 독립혁명과 달리 대학생이 선도한 민중혁명이었다는 점에서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국 특유의 사건이었다. 요컨대 4·19는 민중이 자신에게 강요된 고난을 스스로 극복하는 ‘뜻’을 구체적으로 실현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민중을 선도한 대학생은 권력의 야망을 갖고서 4·19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이승만을 축출한 직후 곧바로 대학으로 복귀했다. 그러자 정치권에 권력의 공백이 생겼다. 그 공백은 기성 정치인이 채워줘야만 했다. 그러나 4·19 이후 등장한 장면 정부는 극심한 권력투쟁을 전개하면서 민중의 여망을 적절하게 수용하지 못했다. 장면 정부의 정치적 무능력은 결국 5·16 군사 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민중이 피를 흘리며 성취한 4·19의 뜻이 박정희의 군홧발에 무참히 짓밟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박정희의 18년 군사독재 정권도 이승만의 12년 독재 정권과 유사한 방식으로 무너졌다.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로 집권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체제 정통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 박정희가 정통성이 부재한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은 미국의 권력에 철저히 의존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남로당 출신이었지만 5·16 쿠데타 이후 미국이 표방하는 반공주의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면서 미국의 권력에 적극 영합했다. 미국이 세계적 차원에서 반공주의를 실현하는 방법 중 하나는 반공 거점 국가의 경제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박정희 역시 미국이 지도하는 경제개발전략을 따르면서 미국의 세계전략에 적극 복무했다. 박정희는 미국의 반공주의적 세계전략을 이른바 ‘조국 근대화’의 이름으로 포장해서 자신의 체제 정통성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한국의 민중에게 박정희가 유린한 자주와 민주의 가치는 민생이라는 가치 하나만으로 대체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이었다. 결국 부산과 마산의 대학생이 선도한 ‘민중’이 박정희 정권의 정통성을 강력하게 부정하기 시작했다. 김재규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를 사살한 것은 부마민중항쟁의 맥락에서 터진 사건이었다. 요컨대 한국의 민중은 이승만 독재 정권의 정통성을 심판했던 것처럼 박정희 독재 정권의 정통성을 또다시 심판하면서 자신에게 강요된 고난을 극복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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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19혁명으로 ‘독재 대통령’ 이승만이 하야하고 ‘제2공화국’ 정부가 출범했다. 8월13일 국회 민·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열린 ‘제4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윤보선(맨 왼쪽) 대통령과 장면(오른쪽 둘째) 총리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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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19혁명에 힘입어 탄생한 제2공화국은 1년도 버티지 못한 채 ‘5·16쿠데타’로 무너졌다.윤보선 대통령은 1961년 6월20일 장도영 육군참모총장과 박정희 소장이 배석한 가운데 하야 번의를 발표한 데 이어 이듬해 3월22일 끝내 물러났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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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중항쟁을 통해서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이 왔지만, 정치권의 권력의 공백 또한 형성되었다. 정치권의 권력의 공백으로 생긴 위험천만한 상황은 최규하 과도정부가 슬기롭게 극복해야만 했다. 또한 서울의 봄으로 해금된 유력 대권주자 ‘3김’도 가장 우선적으로 최규하 정부에 적극 협조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3김의 가장 우선적 관심사는 대권에 대한 욕심이었다. 3김은 각자도생하면서 대권 준비를 서둘렀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최규하 정부가 전두환의 군사 쿠데타를 막을 수 없을 만큼 정치적으로 무능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세칭 박정희의 양아들이었던 전두환은 12·12 쿠데타로 군통수권을 실질적으로 탈취하고, 5·18 광주민중항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정권까지 탈취했다. 4·19에서 시작되고 부마민중항쟁, 5·18 광주민중항쟁 등에서 계승하고자 했던 민중의 뜻이 또 다시 전두환의 군홧발에 짓밟히고 말았다. 5·16 군사 쿠데타의 데자뷰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5·18 광주민중항쟁을 회고해보면, 나는 가장 먼저 두 가지가 떠오른다. 하나는 김수환 추기경이 수행한 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전두환이 광주항쟁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빨갱이 소행으로 낙인 찍은 것이었다. 김 추기경은 전두환이 광주민중을 무력으로 탄압하고 있다는 소식에 위로편지와 위로금을 보냈다. 편지에는 전두환의 무력 진압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는 약속도 담았다. 실제로 김 추기경은 1980년 5월20일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전두환을 만나 무력 진압을 자제할 것을 요청했다. 또한 1987년 6월 민중항쟁 때는 경찰이 명동성당에서 시위 중인 학생들을 잡으러 들이닥치자 이렇게 외쳤다. “학생들을 잡아가려면 먼저 나를 밟고, 내 뒤의 신부를 밟고, 신부 뒤의 수녀를 밟고서 잡아가라!” 김 추기경은 서슬이 시퍼런 전두환과 정면에서 대결하는 강인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내가 김 추기경을 몇 차례 만나면서 직접 확인한 모습은 전혀 달랐다. 김 추기경은 ‘바보 김수환’이란 별명이 말해주는 것처럼 지극히 온화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 추기경은 언제나 낮은 목소리로 잔잔하게 얘기하면서 상대방의 얘기를 끝까지 경청했다. 특히 김 추기경의 정치적 관심은 정치 권력에 야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정치 권력의 폭력에 희생된 민중을 한없이 껴안는 방식으로 실천되었다. 김 추기경이 실천한 방식은 한국의 모든 종교인이 본받아야 할 귀감이 아닐 수 없다고 본다.
전두환은 김 추기경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광주 민중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그것도 모자라 전두환은 광주 민중을 빨갱이로 낙인찍고, 자신은 빨갱이를 때려잡은 애국자로 선전했다. 이승만이 빨갱이 이름으로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고, 박정희가 빨갱이 이름으로 사법살인을 반복적으로 자행한 ‘희생자 비난하기’(Victim Blaming) 수법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러자 한국의 수많은 정치인·지식인·언론인 등이 전두환의 선전에 적극 호응했고, 지금도 호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호응할 것이다. 광주민중항쟁과 북한은 전혀 관련이 없다는 객관적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불구하고 광주 민중을 빨갱이로 호도하는 추세는 전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안치환이 그런 세태에 몸서리치면서 ‘빨갱이’란 제목의 노래를 이렇게 절규하듯 부르고 있지 않은가? “… 아무런 논리도 필요 없어, 누구도 책임질 필요 없어, 무조건 빨갱이라 몰아붙이기만 하면 돼 … 눈엣가시처럼 거슬리는 자, 단숨에 쓸어버리고 싶을 땐, 무조건 빨갱이라 몰아붙이기만 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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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수환 추기경은 1980년 5월20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만나 ‘광주 무력 진압 자제’를 요청했다.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2013년 5·18광주항쟁 33돌을 맞아 제작한 ‘5·18과 천주교 증언록'에서 공개한 고 김 추기경의 육성 증언 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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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를 체제 이념으로 선택한 소련·중국·북한 등의 국기는 온통 빨강색으로 되어 있다. 지금도 서양에서는 중국을 ‘레드 차이나’(Red China)라고 부른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빨갱이는 사회주의자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주지하듯,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빈부 격차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현실에서도 중국·베트남·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가 존재한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는 사회주의의 장점을 수용해서 민주주의의 단점을 보완한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사회주의를 철저히 배척한 나라였다. 하지만 최근 미국의 중산층이 붕괴되자 버니 샌더스와 같은 정치인은 사회주의적 강령을 들고 나와 중산층 구제를 역설하고 있다. 현재 샌더스는 1)의료보험 국영화, 2)대학교 무상교육, 3)국가에서 최저임금 보장 등을 역설하면서 유력한 대권주자로 부상했다. 만약 우리가 맹종하는 빨갱이 논리대로라면, 중국·베트남·북한 등과 같은 현실 사회주의 국가, 유럽 사회민주주의, 버니 샌더스와 같은 사회주의자도 모두 부정하고 죽여야만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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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 교수는 대구 경북중·고 시절 바이올린을 배웠으나 ‘4·19’ 때 경찰 진압봉에 맞아 팔목을 다친 후유증 탓에 이후 연주를 할 수 없게 됐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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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빨갱이 누명 때문에 한평생을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사셨다. 변변한 직업을 가질 수 없었고, 세상에 떳떳이 나설 수도 없었다. 결국 술을 자주 드시면서 세상을 일찍 하직하시고 말았다. 하지만 어찌 나의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사신 분이 우리 사회에서 한두분 뿐이겠는가? 우리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빨갱이를 맹목적으로 부정하기 이전에 빨갱이가 상징하는 사회주의를 이성적으로 꾸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사회주의의 장단점을 식별할 수 있는 안목을 우리 사회에서 공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럴 때라야 우리의 영혼을 옥죄는 빨갱이 주술로부터 해방될 수 있고, 또 그럴 때 남북한의 평화적 공존과 통일의 지평을 열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4·19가 제시한 뜻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온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한국의 민중은 1987년 6월항쟁을 통해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다. 하지만 김영삼과 김대중이 정치적으로 분열하면서 노태우가 겨우 36.6%의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되는 길을 열어주고 말았다. 4·19 이후 민중의 여망을 적절하게 수용하지 못하는 한국정치의 한계가 또다시 드러난 것이다. 그러면 2017년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민중의 여망을 적절하게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4·19가 제시한 자주·민주·민생의 가치를 제도적으로 실현하는 것, 그래서 한국 민주주의와 남북통일의 초석을 탄탄하게 다지는 것, 문재인 정부가 민중의 여망에 부응하는 길도 여전히 거기에 있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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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05365.html#csidxfbe94a7f0be6b6abcf99545e75c080e 



[36] “박종홍·니부어·강원용·함석헌…사상의 바다 헤매다”



‘서울대 합격’ 라디오 방송에 환호
1959년 정치학과 첫 강의부터 ‘실망’

철학 박종홍 교수 ‘변증법 강의’ 흥미
‘변증법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 ‘심취’
훗날 ‘정반합의 동력 내부모순’ 이해
“내 나름 ‘변증법적 통일론’ 토대 마련”

통일교 문선명 ‘원리 강의’도 호기심
“가족주의·민족주의 독특하게 결합”
훗날 주체사상과 ‘선택적 친화성’ 발견

경동교회 강원용 목사 설교에 ‘감화’
“대화 중시·지식인 현실참여론 계승”

서영훈 선생 통해 ‘함석헌 사상’ 영접
씨알농장 인간미·‘종교적 개방성’ 등
“고난 극복 한국사 ‘오뚝이 민족’ 발견”
박한식은 1959년 아버지를 비롯한 온가족의 환호 속에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사진은 낙산을 배경으로 미라보 다리 건너 정문과 마로니에 나무 정원이 상징이었던 서울 동숭동 문리대 캠퍼스의 1960년대 모습이다. &lt;한겨레&gt; 자료사진
박한식은 1959년 아버지를 비롯한 온가족의 환호 속에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사진은 낙산을 배경으로 미라보 다리 건너 정문과 마로니에 나무 정원이 상징이었던 서울 동숭동 문리대 캠퍼스의 1960년대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서울대 입학하자마자 정신적 방황에 빠진 박한식은 철학과 박종홍(1903~76·사진) 교수의 변증법 강의를 즐겨 들었다. &lt;한겨레&gt; 자료사진
서울대 입학하자마자 정신적 방황에 빠진 박한식은 철학과 박종홍(1903~76·사진) 교수의 변증법 강의를 즐겨 들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온 집안 식구가 대구 남산동 비좁은 방에서 숨을 죽이고 라디오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나운서의 낭랑한 목소리가 400단위의 숫자를 듬성듬성 읽어 내려갔다. 숨이 멎을 듯했다. 순간 갑자기 식구들 모두가 ‘우와 ~!’ 하고 함성을 질렀다. 평소 말이 없으시고 감정 표현도 거의 하지 않으셨던 아버님께서도 빙그레 웃으시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가서 막걸리 한잔 받아 오너라~.” 어머님께서 서둘러 밖으로 나가셨다. 나의 수험번호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던 것이다. 서울대 합격자 수험번호를 라디오로 방송해주던 시절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 그 순간 아버님께서 보여주신 기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1959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하면서 시작된 나의 대학시절은 한마디로 정신적 방황의 시기였다. 나는 가슴 벅찬 기대감을 안고서 개강 첫날 정치학과 강의실에 들어섰다. 그러나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대부분의 강의가 각종 정치제도를 암기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정치적 사유를 하고 싶었다. 특정 정치제도를 탄생시킨 매우 복잡한 사유의 과정이 나의 관심사였다. 따라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정치제도라는 결과물을 단순히 암기할 것을 요구하는 강의에서 지적 호기심을 느낄 수는 없었다.

미국의 ‘변증법 신학자’이자 기독교 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부어(1892~1971년)는 나치의 만행에 맞서다 교수형까지 당한 독일의 행동주의 신학자 본 회퍼의 스승이기도 하다. 대학시절 박한식은 그의 책을 읽고 종교철학에 심취했다. &lt;한겨레&gt; 자료사진
미국의 ‘변증법 신학자’이자 기독교 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부어(1892~1971년)는 나치의 만행에 맞서다 교수형까지 당한 독일의 행동주의 신학자 본 회퍼의 스승이기도 하다. 대학시절 박한식은 그의 책을 읽고 종교철학에 심취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나는 이내 정치학과 강의실을 뒤로하고 더 넓은 세상을 전전하기 시작했다. 정신적으로 헤매기 시작한 것이다. 학문의 궁극적 본질이란 무엇일까? 나의 내면에서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질문이 발길을 철학과 강의실로 향하게 했다. 그 와중에 시선을 사로잡는 강의를 발견했다. 박종홍 교수의 철학 강의였다. 특히 박 교수의 변증법 강의에서 매력을 느꼈다. 변증법에서는 ‘정’(正)과 ‘반’(反)의 관계를 상호 배타적 관계 대신 상호 의존적 관계로 파악했다. 그래서 정의 본질이 반이고, 반의 본질 또한 정이라는 역설을 강조했다. 동양의 음양사상에서 음이 양을 머금고 있고, 양도 음을 머금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논리와 유사했다. 변증법의 역설에 따른다면 자본주의에서 중시하는 자유의 본질은 사회주의에서 중시하는 평등에 있고, 평등의 본질 또한 자유에 있다는 논리가 성립했다. 그렇다면 남한의 본질은 북한에 있고, 북한의 본질은 남한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변증법의 역설에 진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나는 훗날 미국에 유학해서도 변증법을 계속 공부했다. 사실 박 교수 강의에서는 정에서 반으로 이행하는 동력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에서 서양의 수많은 변증법 논리를 공부하다가 마침내 그 동력을 발견했는데, ‘내적 모순’이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정이 그 자체의 내적 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반으로 이행하게 된다는 논리에 주목했다. 예컨대 자본주의는 빈부격차가 심화되면서 분배의 정의가 와해되는 내적 모순을 겪게 되는데, 그 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밖에 없다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논리가 나의 마음을 강하게 끌었다. 학창시절에 공부한 변증법은 훗날 내가 인생 후반에 정립한 ‘변증법적 통일론’의 지적 토대가 되었다. 나는 남한과 북한이 서로 머금고 있는 역설적 존재이며, 따라서 각자의 내적 모순을 극복하면서 변증법적으로 통일될 수 있다고 믿는다.

종교철학에 심취한 박한식은 서울대 문리대 근처에 있던 통일교 교회에도 다닌 적이 있었다. 1950년대 중반 서울 흥인동의 통일교 교회에서 문선명(왼쪽) 창시자가 제1회 원리 시험을 감독하고 있다. 사진 선학역사편찬원 제공
종교철학에 심취한 박한식은 서울대 문리대 근처에 있던 통일교 교회에도 다닌 적이 있었다. 1950년대 중반 서울 흥인동의 통일교 교회에서 문선명(왼쪽) 창시자가 제1회 원리 시험을 감독하고 있다. 사진 선학역사편찬원 제공


내가 철학과 강의실에서 매력을 느낀 또 하나의 주제는 종교철학이었다. 특히 변증법 신학자로 평가되는 라인홀드 니부어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빛의 자식들과 어둠의 자식들> 등을 탐독하면서 많은 감화를 받았다. 그래서 아예 전공을 비교종교철학으로 바꾸는 문제로 오랫동안 고민하기도 했다.

종교철학에 대한 관심은 그 무렵 서울대 주변에 있던 통일교 교회를 발견하고서 호기심을 느끼게 했다. 통일교에서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나는 새벽마다 통일교 교회에 나가 문선명의 설교를 직접 들었다. 통일교를 이단으로 간주하던 때였지만 나는 그런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가족주의와 민족주의를 독특하게 결합시켜 성립한 통일교 ‘원리’의 골격이었다. 통일교의 가족주의적 성격은 가족이 파괴된 서구사회에 크게 어필할 수 있는 원천이 되었다. 나는 훗날 주체사상을 연구하면서 가족주의와 민족주의가 주체사상의 기본 골격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따라서 내가 볼 때 통일교 원리와 주체사상 사이에는 ‘선택적 친화성’(elective affinity)이 있었다.

박한식은 대학시절 ‘양심적 병역 거부’ 등 반전 평화주의를 실천하는 메노나이트 교단의 선교사와도 교유했다. 한국전쟁 터진 뒤인 1951년 국내에 진출한 메노나이트 교단은 경북 경산에 선교본부를 두고
박한식은 대학시절 ‘양심적 병역 거부’ 등 반전 평화주의를 실천하는 메노나이트 교단의 선교사와도 교유했다. 한국전쟁 터진 뒤인 1951년 국내에 진출한 메노나이트 교단은 경북 경산에 선교본부를 두고


또 한편으로 나는 미국에서 온 메노나이트 선교사와 가깝게 지냈다. 메노나이트는 일상의 삶 속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와 같은 반전 평화주의를 철저하게 실천하고자 한다. 그 시절 징병제를 유지했던 미국은 메노나이트 신도가 군 복무 기간에 국외에서 봉사활동을 하면 병역의무를 면제해주었다. 내가 메노나이트와 접하면서 특히 주목한 부분은 정치와 종교의 철저한 분리를 통해서 평화를 추구하는 그들의 삶의 양식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이 무려 100년 이상 종교전쟁의 나락으로 전락했던 궁극적 까닭은 정치와 종교를 긴밀하게 결합시켰기 때문이었다. 물리적 강제력이라는 정치적 수단을 동원해서 종교적 신념을 타자에게 강제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유럽 전역을 피바다로 만든 종교전쟁이 폭발했던 것이다. 유럽은 100여년의 종교전쟁을 치르고 나서야 오직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켜야만 평화의 지평이 열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서는 많은 정치인이 기독교적 신앙에 따라 정치를 하고, 또 적지 않은 교역자가 자신이 선호하는 정치인을 신도들 앞에서 종교적으로 옹호하기도 한다. 한국 정치가 17세기 유럽 종교전쟁의 시기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정치의 그러한 퇴행성은 한반도를 ‘약속의 땅’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종교전쟁 때처럼 ‘폭력의 땅’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기독교 선악관을 견지했던 해리 트루먼, 서북청년단 등이 한국전쟁 전후 무려 100만명에 이르는 양민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어찌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의 대학시절을 풍요롭게 만든 가장 따뜻한 추억은 전성원과 함께 4년 내내 경동교회를 다닌 것이다. 강원용 담임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크게 두 가지를 배웠는데, 하나는 대화가 없으면 평화와 통일도 불가능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지식인의 현실참여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강 목사의 뜻을 이어 내 나름의 대화이론을 정립했다. 나는 대화의 요체를 ‘가치관의 교환’으로 파악한다. 가치관의 교환이 꾸준히 축적되면 상호 이해의 지평이 열린다. 상호 이해의 지평이 열리면 상호 공존할 수 있는 커뮤니티가 새롭게 형성된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북한에 가서 무엇을 했는지 궁금해한다.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답변은 나의 대화이론에 따라 북한의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했다는 것이다. 나는 북한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것은 순수한 학문적 관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나는 미국의 주류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미국의 주류 사회과학이 현실의 문제를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그런 병폐를 철학적으로 진단한 다음,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과학이론을 정립하고자 했다. 2017년 출간한 500여쪽 분량의 저서 <세계화: 축복인가 저주인가?>(Globalization: Blessing or Curse?)는 그 노력을 집대성한 셈이다. 나는 이 책에서 사회과학의 존재 이유를 당대 현실의 지배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 가능케 하는 학문적 논리를 상세하게 제시했다. 나의 북한 연구, 그리고 내가 언론에 나와서 하는 얘기는 모두 나의 독자적 사회과학이론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나의 대학시절에서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추억은 함석헌 선생을 알게 된 것이다. 어느 날 서영훈 선생 댁을 방문했는데 함 선생이 그곳에 와 계셨다. 내 기억으로 장준하 선생 등과 함께 <사상계> 편집회의를 하던 중이었던 것 같다. 함 선생은 명동에 있는 흥사단의 대성빌딩에서 매주 강연을 하시기도 했다. 나는 거의 빠짐없이 강연에 참가하면서 함 선생의 사상에 점차 빠져들었다. 또한 함 선생 댁도 방문하고, 천안에서 운영하시는 씨알농장에도 가봤다. 손주를 등에 업고 방바닥을 이리저리 기어 다니시는 모습을 보면서 말할 수 없이 인간적인 보통사람의 체취를 느꼈다.

나는 씨알농장에서 소가 끄는 쟁기로 밭을 갈고 계시는 함 선생을 따라가면서 평소 궁금했던 질문을 드렸다. “선생님께서는 늘 저희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죽어야 할까요?” 그러자 곧바로 이렇게 답변해 주셨다. “나는 지금 이 밭일을 하다가 팍 고꾸라져 죽으면 가장 멋있게 죽는 거다!” 함 선생의 답변은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깊은 사색에 잠기게 했다.

내가 함 선생을 뵈면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은 기독교의 믿는 폭을 무한히 확대한 ‘종교적 개방성’이었다. 함 선생은 자신의 종교적 회심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기독교만이 참종교요, 그 기독교는 성서에만 있다고 생각하였다. … (그러나) 모든 종교의 알짬(진리)은 한 가지. … 이제 시대가 달라서 기독교도 믿는 폭이 넓어져야겠다. … 제 것만 주장하며 남을 부정하는 것도 폭이 좁은 사상. …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것은 모자란 생각이다. 불교, 힌두교, 유교 다 높은 믿음이다. 다만 이 시대를 바로 보고 일할 수 있는 것이 기독교가 아닌가 생각된다.”


함 선생의 종교적 개방성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높은 산봉우리에 도달할 수 있는 다양한 등산로를 생각해볼 수 있다. 산봉우리는 종교적 진리를 상징하고, 다양한 등산로는 기독교, 불교, 유교 등과 같은 다양한 종교를 상징한다. 우리는 다양한 등산로를 이용해서 산봉우리에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산봉우리에서 모두가 함께 만난다. 산봉우리에서 둘러보는 경치는 하나뿐이다. 함 선생은 우리 또한 다양한 등산로와 같은 다양한 종교를 수단으로 산봉우리와 같은 종교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봤다. 요컨대 종교적 수단은 다르지만 그 수단을 통해 도달하는 종교적 진리는 결국 하나라는 것이다.

함 선생의 종교적 개방성을 극적으로 상징하는 사례 중 하나는 1950년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출간했지만 수년 후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제목을 바꿔 다시 출간한 것이었다. 함 선생은 그 까닭을 이렇게 밝혔다. “천국이 만일 있다면 다 같이 가는 데가 아니겠나! … 의인, 죄인, 문명인, 야만인을 다 같이 구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 그래서 한 소리가 ‘뜻’이다. 하나님은 못 믿겠다면 아니 믿어도 좋지만 ‘뜻’도 아니 믿을 수는 없지 않으냐. … 져서도 뜻만 있으면 되고, 이겨서도 뜻이 없으면 아니 된다. 그래서 뜻이라고 한 것이다. 그야말로 만인의 종교다.”

함 선생은 한국 역사의 ‘뜻’을 ‘고난의 역사’로 파악했다. 즉 고난 그 자체에서 뜻을 찾았다. “그저 고난의 역사가 스스로 나타났을 뿐이다. 제가 제 까닭이다. 제(自)가 곧 까닭(由)이다. 그러므로 자유, 곧 스스로 함이다. 그러므로 고(苦)는 생명의 근본 원리다. 고를 통해 자유에 이른다.”

그러나 나는 “고를 통해 자유를 얻는다”는 함 선생의 고난의 역설을 수용하면서도 그 고난이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고난 그 자체에서 뜻을 찾는 대신 고난을 극복하는 데서 뜻을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한국 역사를 성찰할 때 한민족은 나에게 ‘오뚝이 민족’으로 다가왔다. 한민족은 단 한 차례도 그 어떤 타율적인 힘에 영원히 굴복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민족 오천년의 역사가 바로 그런 진실을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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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고교시절 적십자 활동하며 인생 동반자도 스승도 만났다”

경북고 때 ‘하이와이’ 지도교사 전성균
집에 놀러갔다 ‘누이’ 전성원과 친해져
1959년 이대-서울대 입학해 ‘유학 꿈’
장인 전호열 ‘한국의 슈바이처’ 존경

경북중·고 청소년적십자 단장 맡아
“앙리 뒤낭의 인도주의 정신에 끌려”
간부수련회 때 웅변대회 우승해 ‘두각’
‘청소년’ 부장 서영훈 선생 ‘총애’ 받아

1956년 국제청소년적십자 리더강습회
한국대표단 ‘남녀 10명’ 뽑혀 일본으로
어머니 상경해 여의도공항까지 배웅

재일동포들 궁금 ‘조선대학교’ 문의
“일본정부 해방후 조선인학교 ‘방해’
1955년 김일성 전폭 지원에 ‘친북화’
이승만은 ‘친북’ 이유 적대시·외면”

올초 뉴욕 좌·우 한인단체 ‘강연’ 초청
‘합동초청이면 승락’ 제안했으나 무산
길을 찾아서 9회-고교시절 특별한 인연들
길을 찾아서 9회-고교시절 특별한 인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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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은 어릴적 전쟁을 겪으며 생겨난 ‘평화병’ 영향으로 기독교 학생운동과 적십자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특히 앙리 뒤낭의 인도주의 정신에 끌려 대구 경북중·고 시절 ‘청소년적십자’ 단장으로 활약했다. 박한식(뒷줄 맨왼쪽)은 1956년 여름 도쿄에 있던 미국적십자사 극동지구본부가 주최한 국제청소년적십자 리더쉽 강습회에 한국대표단으로 뽑혀 참가했다. 사진 청소년적십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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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교 시절을 회고할 때 두 분의 소중한 인연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하나는 내 ‘오디세이’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어준 아내를 만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제까지나 내 삶의 등불이 되어주신 서영훈 선생님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이다. 나는 서영훈 선생님을 알게 된 덕분에 재일동포가 처한 삶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고, 내 평생 정신적 스승으로 모신 함석헌 선생님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1956년 경북고에 입학해 와이엠시에이(YMCA)의 고등부 동아리 ‘하이와이’(HiY)에 적극 참여하면서 전성균을 알게 되었다. 경북대 의대생이던 전성균은 우리 하이와이의 지도교사로 활동했다. 나는 대여섯살 위인 전성균과 친해져 그의 집에도 자주 놀러 갔다. 그런데 그 집에 한 여학생이 이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전성원, 바로 전성균의 누이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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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은 경북고 하이와이 시절 ‘지도교사’였던 전성균(앞줄 오른쪽 세째)과 친밀해진 덕분에 그의 누이동생 전성원을 만나 훗날 결혼을 했다. 전성균은 의사인 부친(전호열)의 뜻을 잇고자 경북대 의대를 다니던 1958년 ‘생명경외클럽’ 창립을 주도해 지금껏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사진은 2008년 생명경외클럽 50돌 기념 정기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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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균의 아버님이자 나의 장인이 되시는 전호열은 대구에서 광제병원을 운영하는 의사였다. 부자는 모두 알베르트 슈바이처를 롤모델로 존경했다. 장인께서는 이른바 ‘독일군 오토바이’, 즉 오토바이에 부착된 사이드카에 의약품을 가득 싣고서 무의촌을 누비고 다녔다. 1950년대 중반 한국 사회는 전후 온갖 질병이 창궐하는 ‘집단병동’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내게는 그런 장인의 모습이 ‘한국의 슈바이처’로 보였다. 이미 ‘평화병’을 앓고 있었던 까닭에 더더욱 존경스러웠다. 장인 역시 나를 많이 아껴주셨고, 인생의 깊은 의미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훗날 미국 미네소타대학 의대 교수가 된 전성균 역시 장인과 같은 정신을 간직하고서 같은 길을 걸었다. 전성균은 1958년 슈바이처의 정신을 실천하는 ‘생명경외클럽’ 창립을 주도해 지금껏 평생토록 활동했고, 그런 공로 등으로 2017년 ‘서재필 의학상’을 받기도 했다.
외동아들로 성장한 장인께서는 무려 13남매의 자녀를 두었다. 종합병원 개원을 꿈꾸며 자녀들 대부분에게 의학 공부를 권장했다. 전성원이 경북여고를 졸업한 뒤 1959년 이화여대 약학과에 입학한 것도 그런 영향 때문이었다. 나도 같은 해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나는 전성원보다 한살 많았지만, 9살 때 남산초등학교에 재입학하는 바람에 전성원과 같은 학번이 되었다.

 전성원은 나보다 운동을 좋아했다. 그래서 자전거도 아주 잘 탔다. 나 역시 대구 수창동 집에서 남산동 초등학교까지 먼 거리를 자전거 타고 통학하면서 나름 축적한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전성원에게 크게 밀리지는 않았다. 대학 시절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데이트를 자주 했다. 전성원은 신촌에서, 나는 동숭동에서 출발해서 종로에서 만났다. 저 멀리서 해맑게 웃으면서 다가오던 전성원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는 곧장 태릉으로 향했다. 책을 좋아했던 전성원과 책보다는 생각을 좋아했던 나는 철학·종교·예술·인생·사랑 등 수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 얘기 속에는 미국 유학의 꿈도 들어 있었다. 우리는 1964년 약혼반지에 ‘1+1=1’이라는 초수학적 수식을 새겼다. 우리는 하나가 되어 인생의 오디세이를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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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오른쪽)은 경북고 시절부터 사귄 전성원(왼쪽)과 1959년 서울대와 이대에 각각 입학한 뒤 함께 미국 유학의 꿈을 키웠다. 사진은 유학을 앞둔 1964년 대구에서 올린 약혼식 모습. 사진 박한식 교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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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북중과 경북고 시절 청소년적십자(JRC·현 RCY) 단장으로도 활동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전쟁터에서 차별 없이 부상자를 구호한 앙리 뒤낭의 인도주의 정신에 커다란 매력을 느꼈다. 그때 한국적십자 대표 이범석이었고, 청소년적십자 부장은 서영훈이었다. 청소년적십자는 여름이면 한강변에서 하령회(하기 간부수련회)를 열었다. 하령회의 ‘단골 프로그램’ 중 하나는 웅변대회였다. 어느 해 나는 ‘일심폭탄’ 제목의 웅변으로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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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은 경북중고 청소년적십자 단장으로 참가한 하기 간부수련회의 웅변대회에서도 웅변 실력 덕분에 서영훈 선생의 총애를 받았다. 사진은 1955년 8월 서울 잠실 한강변에서 열린 ‘제3회 간부수련회’ 모습이다. 사진 청소년적십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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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우승 덕분에 서영훈 선생님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서 선생님은 종교·신앙·철학 등의 분야에서 조예가 깊었다. 나는 훗날 서울대에서 정치학을 전공으로 선택했지만, 종교학·철학 등에 더욱 흥미를 느꼈다. 전공을 종교철학으로 바꾸는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서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질문을 드리는 시간을 매우 좋아했다. 서 선생님도 나를 많이 아껴주셨다. 나는 서 선생님을 평생 따르면서 좋은 말벗이 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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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은 경북고 시절 청소년적십자 부장이던 서영훈 선생과 각별한 인연을 맺어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1953년 한국적십자 초기부터 활동한 서영훈 선생은 2000~03년 총재를 지냈다. 1964년 서영훈 선생이 청소년적십자 간부 하계강습회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사진 청소년적십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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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서 선생님으로부터 일본에서 열리는 ‘제1회 국제청소년적십자회의’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영어 시험을 치러야만 했다. 중·고교 시절 영어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공부했던 나는 시험에 무난히 통과해서 선발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학생 5명과 여학생 5명을 한국 대표단으로 뽑았는데, 서울 출신 8명에 인천과 대구에서 1명씩이었다.
우리는 서 선생님의 인솔에 따라 일본으로 향했다. 1956년 경북고 1학년 때였다. 내 생애 최초로 국제회의에 참가할 생각에 설레고 기뻤다. 난생처음 비행기도 타게 되었다. 나는 서울 여의도공항에서 빡빡머리에 선글라스를 쓰고서 제법 폼도 잡아봤다. 어머님(이동수)께서는 대구에서 그 먼 거리를 와서 배웅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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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박한식(오른쪽)이 국제청소년적십자 리더십 강습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기 위해 일본으로 출국할 때 어머니(이동수·왼쪽)는 대구에서 서울 여의도공항까지 같이 와 고교생 아들의 첫 외국여행을 배웅해줬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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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도쿄 서쪽 다치가와 미공군기지에서 열린 국제청소년적십자 리더십 강습회 때 박한식(왼쪽)은 뛰어난 영어 실력 덕분에 미국 대표(오른쪽)와 일대일 토론을 벌였다. 사진 청소년적십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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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으로 향하는 내 마음이 그저 기쁜 것만은 아니었다. 만주 시절 조선족 동포들의 생활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만주라는 이국땅에서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어머니 등이 참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자랐다. 그곳에서 보낸 나의 유년 시절 역시 대부분 가슴 아린 기억으로 채워졌다. 이내 질문이 떠올랐다. 일본에는 우리 동포가 얼마나 살고 있을까?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도쿄에서 국제청소년적십자회의를 마친 뒤 재일 조선대학교에 연락을 했다. 재일동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좀 알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 소속의 나이 지긋한 어른이 나를 직접 찾아왔다. 그분은 매우 친절했다. 맛있는 밥도 사주고, 기념으로 도장도 파주었다. 또한 일본 조선대학교와 재일동포의 현황을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재일동포 삶의 여건을 알면 알수록 중국 조선족의 현실과는 천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중국은 조선족의 자율성을 상당 수준 이상 허용한다. 조선족의 자녀에게는 크게 두 가지 길이 열려 있다. 하나는 중국의 ‘중점대학’으로 분류되는 명문대에 진학해서 중국 사회의 엘리트로 진출하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연변대학에 진학해서 엘리트 조선족이 되는 길이다. 그러나 재일동포는 조선족만큼의 자율성을 일본 사회에서 누리지 못했다. 일본은 재일동포를 사실상 하층민으로 취급했다.


박한식은 1956년 일본 방문길에 도쿄 조선대학교를 통해 재일동포에 대한 일본 당국의 부당한 대우를 알게 됐다. 사진은 해방 직후부터 세운 국어강습소를 비롯한 조선인 학교에 대해 1948년 일본 당국이 폐쇄령을 내리자 재일동포들이 반발 시위를 벌이는 모습이다. 사진 재일한인역사자료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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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는 해방이 되자 자녀들에게 모국의 언어와 역사 등을 가르칠 필요성을 느꼈다.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조선인학교를 설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의 비협조 내지 방해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자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김일성이 1955년부터 재일동포의 교육 프로그램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조선인학교 건물을 지어주고, 일체의 학용품을 무상으로 지원했다. 그런 까닭에 재일동포는 지금도 김일성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조선인학교 학생들이 정기적으로 북한 수학여행을 가는 것도 그런 연유다. 또한 재일동포는 일본의 ‘파친코’와 불고기 식당을 석권해서 벌어들인 현금을 북한에 정기적으로 송금한다. 물론 북한 역시 재일동포의 ‘결초보은’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김일성의 지원을 받는 재일동포를 철저하게 배척했다. 일본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동포를 전혀 도와주지는 않으면서 김일성의 지원을 받는다는 이유로 적대시했다. 이승만은 한국전쟁 전후 양민학살 피해자의 유가족까지 ‘빨갱이’로 낙인찍어 철저하게 배척했던 ‘희생자 비난하기’(빅팀 블레이밍)를 재일동포에게도 그대로 적용했던 것이다. 요컨대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자였던 재일동포는 또다시 한반도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남북한 ‘정통성 전쟁’, 즉 남한과 북한 각자가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강변하는 체제경쟁의 희생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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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이 1956년 여름 문의를 했던 도쿄 조선대학교는 55년부터 조총련을 통해 이뤄진 북한의 재일동포 교육 지원에 따라 2년제로 개교한 직후였다. 사진은 56년 4월부터 59년 6월까지 도쿄도 키타구에 있었던 조선대학교의 임시 교사. 사진 재일한인역사자료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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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에는 남북한 정통성 전쟁에 저항하면서 힘겨운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는 동포들이 존재한다. 이른바 ‘조선적’으로 분류되는 약 3만명의 동포가 그들이다. ‘조선적’이란 1947년 주일 미군정이 재일동포에게 임시로 부여한 국적을 말한다. 그런데 이들은 남한이나 북한의 국적을 취득하게 되면 조국의 분단을 인정하게 된다는 이유로 조선적을 지금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나는 조선적이야말로 조국의 통일을 가장 극적으로 열망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하루빨리 조국의 통일을 이루어 조선적의 고단한 영혼을 껴안아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미국의 동포사회로 시선을 돌리면 마음이 더욱 무거워진다. 올해 초 뉴욕에 본부를 둔 재미동포전국연합회(재미동연)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뉴욕협의회(민주평통뉴욕)에서 거의 동시에 내게 강연 요청을 해왔다. 주지하듯 재미동연은 북한과 가깝게 지내는 단체이고, 민주평통뉴욕은 한국에서 설립한 단체다. 나는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연달아 개최되는 화해 분위기가 민간 차원에서도 조성되면 좋겠다고 판단했다. 또한 재미동연과 민주평통뉴욕은 모두 뉴욕에 본부를 두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래서 두 단체가 서로 협의해서 강연을 공동으로 주최하면 내가 나가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두 단체 대표자는 그렇게 해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뒤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오질 않았다. 결국 나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남북한 정통성 전쟁과 한국 남남갈등의 양상이 200만명에 이르는 미국의 동포사회에서도 거의 그대로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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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평통 뉴욕협의회(회장 양호)에서 지난 2019년 2월 주최한 ‘2019 평화통일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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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전국연합회(회장 윤길상·왼쪽) 2019년 2월 정기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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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평통은 1981년 전두환 정부가 북한 조선노동당의 대항 조직으로 창설했다. 그러나 민주평통과 조선노동당의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조선노동당은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조직이고, 민주평통은 대통령 자문기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평통을 창설한 것은 조선노동당의 성격을 너무도 모른 채 벌인 일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민주평통은 국제사회에서 남북한 정통성 전쟁을 주도하는 제도적 기반으로 정착했을 뿐이다. 하지만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남북한 정통성 전쟁이란 개념 그 자체를 이론적으로 해체하고, 그 개념이 강제하는 남북한 체제경쟁의 관행을 혁파해야만 한다.
나는 서영훈 선생님을 통해서 함석헌 선생님도 알게 되었다. 나는 함 선생님의 강연에 참석하고, 또 함 선생님이 직접 운영하시는 천안 농장도 방문하면서 정신적으로 많은 감화를 받았다. 함석헌 선생님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정신적 스승으로 남아 있다. 그렇게 된 사연에 대해서는 ‘평화에 미치다’ 다음 회에서 자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01853.html#csidx466ffd4604c0b08bf40935887e297d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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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아버지 ‘빨갱이’ 고초에 정치인 꿈꾸다 ‘소년 웅변왕’ 됐다”

남산초교 때 전쟁고아 김태원과 절친
불쌍한 아이들 보며 ‘사회사업가’ 꿈

전쟁 직후 부친 경찰서 끌려가 ‘반죽음’
“빽없어 당했다…국회의원 되자 결심”
경북중 때부터 연습 ‘웅변대회’ 석권
60년 총선 때 ‘양호민 후보’ 찬조연설도

75년 부친 위독 소식에 귀국해 ‘임종’
평생 공포에도 ‘고문 이유’ 끝내 함구
“통일될 때까지 돌아오지 말라” 유언

미군·아군 ‘빨갱이 몰아 양민학살’
“서술 넘어 사회과학적 ‘설명’ 필요”
첫째는 트루먼 ‘기독교 선악관’ 영향
둘째는 미군정 ‘좌익 의심 건준 무시’
셋째는 이승만 ‘친일세력 이용’ 집권
길을 찾아서 8회-전쟁고아, 양민학살 그리고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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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한국전쟁과 학창시절을 보낸 박한식 교수는 아버지의 ‘빨갱이’ 수난을 겪은 영향으로 정치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 평생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1975년 별세한 부친은 그에게 ‘통일될 때까지 미국에서 돌아오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1957~58년 경북고 교복 차림의 박 교수(뒷줄 맨 오른쪽)와 가족 사진, 부친(박영석·맨 가운데)·모친(이동수·앞줄 왼쪽 둘째)과 3남3녀 남매들, 큰매형과 조카들이 함께했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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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회고해 보면, 내 인생을 강렬하게 지배한 두 가지 체험이 떠오른다. 하나는 전쟁고아였던 김태원이란 친구와 함께 지냈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님께서 경찰서에 끌려가셔서 모진 고문을 당하신 뒤 반죽음 상태로 돌아오신 모습을 목격했던 체험이다.

 김태원은 북한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님은 의사였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부모를 모두 잃고 말았다. 졸지에 전쟁고아가 되어버린 것이다. 길가에서 혼자 울고 있던 김태원은 옆을 지나가던 미군에게 발견되었다. 그 미군은 김태원을 차에 태워 남한에서 미국인이 운영하는 대구의 고아원에 맡겼다. 그 고아원은 마침 내가 다니던 남산초등학교 근처에 있던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이었다. 그래서 김태원을 쉽게 만나게 되었고, 또 그가 사는 고아원도 자주 가봤다. 대부분 수녀였던 보모들이 고아들을 보살펴주었지만, 어린 내가 봐도 환경은 너무 열악했다. 고아들이 쪼그리고 앉아 밥을 먹는 모습이 너무도 불쌍하게 보였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장래 ‘사회사업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게 되었다.

김태원과 나는 경북중학교에 함께 입학했다. 여전히 몸이 약했던 나는 들것에 실려 입학시험 시험장에 들어갈 정도였다. 하지만 김태원은 덩치가 크고 건장했다. 우리는 굉장히 친했다. 훗날 커서 미국의 브로드웨이를 함께 걸어보자는 꿈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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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 교수는 ‘절친’이자 전쟁고아 출신인 김태원의 영향으로 사회사업가를 꿈꾸기도 했다. 사진은 김태원이 살았던 대구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의 백백합보육원에서 한국전쟁 때 400명 원생들 김장 준비를 하는 모습. 사진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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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고아였던 ‘절친’ 김태원의 영향으로 박한식 교수는 어릴 때 사회사업가가 되고자 마음 먹기도 했다. 1954년 대구 동인동 피란민촌의 아이들이 분유 배급을 기다리고 있다. 대구국립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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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와중에는 경북대 교수가 경북중학교에 와서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경북대에서 수학을 강의했던 이아무개 교수도 그중 한 분이었다. 나는 반장이었기 때문에 운동장에서 조회를 하면 항시 우리 반 줄 맨 앞에서 교장을 등지고 서 있어야만 했다. 어느 날 교수가 출제한 시험을 봤다. 그런데 문제 중 하나가 ‘교장의 키를 어림짐작으로 적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답을 알아맞히지 못했다. 늘 100점을 맞던 나는 순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교수에게 따졌다. ‘문제가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시면 교수님도 저의 키를 어림짐작으로 맞혀보시겠어요?’ 그런데 내 얘기가 끝나자마자 이 교수는 나를 무자비하게 때렸다. 몸이 약했던 나는 이내 피투성이가 되었다.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은 이 교수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냐고 소리쳤다. 김태원이 주저 없이 손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김태원도 무자비하게 두드려 팼다. 나보다 훨씬 다부진 체격을 지녔던 김태원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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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대구에서 학생들이 미국의 원조를 환영하는 영문·한문 펼침막을 들고 거리 행사에 동원된 모습으로, 미국인 자원봉사자 애덤 유어트가 찍은 사진이다. 그 무렵 경북중에 다녔던 박 교수는 ‘나도 어디쯤 서 있을 법한 장면’이라고 기억했다. 사진 대구국립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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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군에 입대했다. 그런데 어느 날 김태원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망한 이유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소문이 들려왔다. 그러나 어떤 것도 자세히 확인할 수 없었다. 김태원의 죽음은 나에게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안겨주었다. 정말 똑똑하고 유능했던 젊은이의 목숨을 그토록 빨리 앗아가 버린 전쟁의 시대가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나는 노래를 참 좋아한다. 한때는 집에도 노래방을 꾸며놓았을 정도다. 지금도 김태원이 그리울 때면 종종 혼자서 조용필의 ‘친구여’를 부른다. 그러나 숨이 멎을 듯 목이 메고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어 노래를 다 부르지는 못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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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 교수는 한국전쟁 전후 미군과 국군이 수많은 양민학살을 자행한 이유를 ‘설명’해내는 것이 학자로서 소명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사진은 6·25 때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다룬 다큐 <레드룸>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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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무렵은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시기이기도 했다. 현재 한국전쟁유족회에서는 학살된 양민의 수를 약 100만명으로 추산한다. 그런데 내가 특히 주목하는 학살은 미군과 국군에 의한 양민학살이다. 예컨대 여순사건, 제주 4·3사건, 국민보도연맹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등에서 반복적으로 자행되었다. 도대체 왜 미군과 국군은 적군이 아닌 아군의 양민을 그토록 대규모로 죽였단 말인가? 한국 현대사에서 반복적으로 자행된 양민학살을 단순히 ‘서술’(description)하는 것을 넘어 사회과학적으로 ‘설명’(explanation)하는 것은 한국 사회과학자의 시대적 사명이 아닐 수 없다고 본다.
미군과 국군이 양민을 학살한 까닭으로는 보통 ‘빨갱이’라는 죄목이 제시된다. 빨갱이는 공산주의자의 속칭이다. 산속에 숨어 있던 빨치산이나 인민군이 야밤에 마을로 내려와 양민들에게 밥을 달라고 요구하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살기 위해서 그랬다. 그러나 미군과 국군은 그런 양민을 모두 ‘부역자’로 간주해서 학살했다. 부역자는 곧 빨갱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양민학살은 전쟁의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내가 직접 만주 시절 체험했던 국공내전만 해도 양민이 마오쩌둥의 인민혁명군에게 밥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가 그들을 학살하지도 않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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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직후인 1960년 7월28일 대구역 광장에서 ‘경북지구피학살자 합동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가려진 역사 밝혀낸 진실>(진실·화해를 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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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군과 국군이 양민을 학살한 까닭은 크게 3가지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해리 트루먼이 견지한 기독교의 선악관에서 찾을 수 있다. 기독교의 선악관을 보면 신을 부정하는 공산주의자는 곧 ‘악마’였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는 반드시 신의 이름으로 죽여야 할 대상이었다. 트루먼이 견지한 기독교적 선악관은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을 거의 멸종시킨 퓨리턴의 선악관과 거의 유사한 것이었다.

두번째 요인으로는 조선총독부를 꼽을 수 있다. 트루먼 행정부에서 한국에 파견한 존 하지는 미군정을 수행할 수 있는 효율적 행정수단으로 조선총독부를 선택했다. 여운형이 준비했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는 ‘빨갱이’가 다수 포함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세번째 요인은 이승만이다.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미국에서 찾았다. 한국에서는 권력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일제의 식민지 조선인 통제 노하우를 배웠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을 ‘독종’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조선인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고문과 같은 방법으로는 어림없고 반드시 죽여서 모범을 보여주는 방법을 택해야만 한다고 판단했다.
트루먼과 미군정의 시각에서 볼 때 인디언과 피부색이 유사한 조선인이 빨갱이까지 되었다면 결코 살려 둘 수 없는 ‘악마’에 지나지 않았다. 이승만은 조선총독부에서 터득한 조선인 통제 방법을 과감하게 실천하면서 미군정의 이해관계에 적극 호응했다. 요컨대 한국에서 양민학살이 반복적으로 자행되었던 까닭은 트루먼의 기독교적 선악관,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통제 노하우, 이승만의 친미반공주의의 ‘삼자동맹’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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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미국인 자원봉사자 아담 유어트가 찍은 대구 동구 아양교 철교 부근의 이정표 사진. 박한식 교수는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 정책을 홍보하던 ‘너도나도 사랑하자 백두산 가는 길을’ 구호를 기억했다. 사진 대구국립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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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격화되고 양민학살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시대적 분위기에서 나의 아버님도 빨갱이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일제 때 경북 청도에서 하얼빈으로 이민을 갔다가 해방 후 평양을 거쳐 대구에 정착하신 아버님의 삶의 역정 그 자체가 빨갱이 혐의를 뒤집어씌울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버님은 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셨다. 어머님과 누나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아버님을 애타게 기다렸다. 저녁 무렵 경찰차가 우리 집 앞에서 정차했다. 이내 아버님을 마당에 내던졌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아버님의 모습은 시체와 다를 바 없었다.
아버님의 모습을 본 나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주변 어른들에게 아버님께서 고문을 당하신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한결같이 ‘빽’이 없어서 그랬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어떻게 하면 빽이 생기느냐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국회의원이 되면 빽이 생긴다고 말씀해 주셨다. 어떻게 하면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느냐고 또다시 물었다. 그러자 국회의원이 되려면 웅변을 잘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사회사업가가 되려던 꿈을 정치가로 바꾸었다. 빽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웅변 연습을 시작했다. 새벽마다 산에 올라가 발성 연습을 했다. 또한 국회의원의 연설 현장을 수없이 방문해서 그들의 연설 스타일을 꼼꼼하게 점검했다. 그때 내가 본 연설 중에서는 이승만의 연설이 가장 형편없었다. 이승만은 우리말이 매우 어눌했다. 마치 외국 사람이 우리말을 배워서 얘기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수많은 웅변대회에 참여해서 수없이 입상했다. 받은 상금과 상품은 모두 신문사에 기부했다. 나도 배가 고팠지만 김태원처럼 어려운 친구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나의 웅변 실력은 일취월장해서 마침내 대구에서 ‘웅변왕’으로 통했다. 훗날 양호민이라는 학자가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초빙을 받아 찬조 연설을 하기까지 했다. 그런 식의 찬조 연설을 아주 많이 했다. 웅변 원고도 모두 내가 직접 작성했다. 그런데 원고 주제는 모두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원자폭탄보다 더 무서운 폭탄이 ‘일심폭탄’이라고 역설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중학교 1학년 때 내 키는 134㎝였다. 그처럼 조그만 아이가 항시 전쟁과 평화라는 무거운 주제로 웅변 원고를 작성했다는 사실은 이미 깊은 ‘평화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예증하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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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 교수는 ‘대구의 웅변왕’을 소문난 덕분에 1960년 ‘7·29 총선’ 때 사회대중당 소속 민의원 후보로 나선 양호민(사진) 당시 대구대 교수의 유세 때 찬조연설을 하기도 했다. 양 교수는 서울대 법대 교수와 <사상계> 주필을 겸하던 1965년 ‘한일협정 비준 반대’ 서명으로 해직된 뒤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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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7월23일 사회대중당의 부산 유세에서 창당을 주도한 윤길중 대표 등이 연설을 하고 있다. 진보계열로 대구·경북지역에서 선전했던 사회대중당은 61년 ‘5·16 쿠데타’로 해산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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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조지아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아버님께서 위독하시다는 급보를 받았다. 나는 급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버님과 나는 사흘간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 덕분인지 아버님의 병세가 일시적으로 호전되기도 했다. 아버님께서는 가장 먼저 만주에 계시는 조부님을 찾아 달라고 말씀하셨다. 평생 이산가족의 삶을 사셨던 아버님께서 이제 뜻을 이루시지 못할 것 같자 아들에게 부탁을 하신 것이다. 또한 아버님께서는 나에게 통일되기 전에는 한국에 들어오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미국에 남아 통일을 위해서 헌신하라고 당부하시기도 했다. 아버님의 말씀은 나에게 유언이 되었다. 그 무렵 나는 한국의 여러 곳으로부터 매우 좋은 조건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아버님의 유언이 나로 하여금 미국에 머물면서 이산가족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또 평화와 통일을 연구하는 삶을 살게 한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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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 교수는 부친처럼 억울한 고초를 겪지 않으려면 ‘빽’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국회의원이 되고자 발성 연습에 몰두해 ‘대구의 웅변왕’으로 활약했다. 경북중 3학년 때 대구역 광장에서 ‘평화’를 주제로 웅변을 하고 있는 박 교수의 뒷모습. 박한식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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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은 평생 공포에 시달리며 사셨다. 또한 평생 직장을 갖지도 못하셨다. 그래서 집에서 변변찮은 일을 하면서 생활하실 수밖에 없었고, 어머님도 삯바느질로 살림을 꾸려야 했다. 하지만 아버님은 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신 까닭을 나에게 끝내 말씀해 주지 않으셨다. 나는 이제야 아버님의 깊은 속뜻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아버님에게 찍힌 빨갱이라는 낙인이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던 것이다. 나에게 한국에 들어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셨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아버님의 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두신 그 뜻을 조금씩 헤아리는 지금 이 순간 나의 마음이 너무 무거워진다.

인간에게는 희생자에게 오히려 죄를 뒤집어씌우는 아주 못된 사유의 습성이 있다. 학술용어로는 ‘희생자 비난하기’라고 부른다. 전두환이 1980년 5월 그 많은 광주 시민을 학살한 다음, 희생자에게 빨갱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우고 자신을 빨갱이를 때려잡은 애국자로 강변한 것이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기만이 40년 가까이 우리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었다. 하지만 어찌 그뿐이겠는가? 한국에서 수백만명에 이르는 양민학살 유족들이 나의 아버님처럼 한 많은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 아니겠는가? 도대체 그처럼 기가 막힌 기만이 어떻게 우리의 사유를 그토록 오랫동안 그토록 강고하게 지배할 수 있단 말인가? 가장 우선적으로 학자가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 시대의 가장 고통스러운 현실의 문제를 학문적으로 설명하는 것,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꾸준히 안내하는 것, 학자의 ‘존재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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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00045.html#csidx8b959c6b300d82d849cae34e8c96cf0 


[39] 안식처 찾아 귀향했으나 또다시 ‘전쟁 참상’ 겪어야 했다”

박한식의 평화에 미치다-7회 해방과 귀국 그리고 대구 정착
해방 소식에 하얼빈에서 두만강 건너
평양 적산가옥 얻어 1년남짓 피난살이
경마장 말 사료 콩비지로 식구들 연명
소학교 입학 ‘김일성 장군 노래’ 배워

1948년 4월 평양 쑥섬 남북연석회의
미군정·이승만 ‘5·10총선거’ 강행
남한단독 정부 수립즈음 38선 넘어
개성 피난민수용소에서 천연두 걸려

대구 대명동 정착 남산소학교 재입학
길거리 사과·군밤 팔아 생계 돕기도

3학년때 ‘6·25’ 미군 폭격 소리 ‘생생’
“주검행렬 보며 ‘평화병’ 더 깊어졌다”

‘승리하지 못한’ 미국 ‘한국동란’ 표현
베트남전 패배 뒤에야 ‘한국전쟁’으로


 1945년 8월 15일! 하얼빈에도 해방의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자 만주에 거주하던 수많은 조선인들이 귀국길에 오르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 여덟 식구도 귀국길에 올랐다. 하얼빈에서 두만강 쪽으로 내려와 강을 건넜다. 그 시절 두만강을 왕복하는 중국 상인들의 배를 타고서 건넜다. 그 다음엔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향했다. 기차에 탑승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지붕에까지 빼곡히 올라탔다. 그런데 기차가 터널에 진입할 때 지붕에서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렸다. 기차가 터널에서 빠져나오니 이내 정적이 흘렀다.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평양에 도착하자 부모님은 일본인들이 살다 두고 간 적산집을 얻었다. 할머님을 포함한 여덟 식구가 평양의 피난민 수용소에서 머무는 것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숙식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던 피난민 수용소 대신 적산집을 선택했던 까닭에 끼니를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다. 어머님은 품팔이를 나섰다. 아버님은 대구에 우리 가족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홀로 먼저 떠났다. 나는 형과 함께 날마다 평양 경마장에 가서 말 사료로 쓰는 콩비지를 구입했다. 하도 자주 가니까 어느날 경마장 직원이 내게 말을 몇 마리나 키우느냐고 물었다. 나는 집안 사정을 솔직하게 말하기 싫어서 두어 마리 키운다고 둘러댔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1년 넘게 콩비지만 먹고 살았다. 나는 쌀밥의 맛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다. 땔감은 경마장의 썩은 말뚝을 캐서 충당했다. 경마장에 박힌 말뚝은 오래되면 썩지만 땅에 묻힌 부분은 썩지 않는다. 나는 형과 함께 말뚝을 삽으로 캐서 말린 다음 땔감으로 썼다.

나는 일곱 살이 되던 해인 1946년 평양소학교 1학년에 다시 입학했다. 학교에 가니 노래를 대단히 많이 가르쳤다. 그런데 그 노래는 모두 김일성을 찬양하는 노래였다. 예컨대 나는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으로 시작하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자연스럽게 부르면서 평양 거리를 거닐곤 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내 또래의 아이들은 모두 그랬다. 이런 현상은 1946년즈음 이미 북한에서 김일성의 절대적 위상이 확립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줬다. 김일성 반대파는 모두 중국으로 망명했다. 여러 정치 지도자가 치열하게 각축했던 남한과 크게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1945년 미국과 소련은 일본의 항복을 공동으로 접수하기 위해 38선을 획정했다. 미국 쪽에서 38선 획정 작업 실무를 맡았던 딘 러스크가 나와 같은 조지아대 교수로 일했던 덕분에 나는 직접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소련은 미국과 달리 한반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이 적었고, 북한의 신탁통치에 대해서도 소극적 태도를 보여주었다. 러스크는 만약 그때 미국이 38선 대신 원산과 평양을 잇는 선으로 획정했더라도 소련은 수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러스크는 38선 획정을 잠정적 조치로 이해했으며, 이후 이처럼 장기간 지속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러스크의 얘기로부터 추론해 보면 미국은 처음부터 한반도에 분명한 전략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미국이 소련과 달리 남한에서 신탁통치를 철저하게 이행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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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11일 미군 장교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이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벽걸이 지도에 그어 놓은 한반도의 38°선. 1980년대 미국 조지아대 교수시절 러스크는 박한식 교수에게 ‘이처럼 오랜 분단선이 될 줄 미처 몰랐다’고 증언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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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한반도 분단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우선 남한에서 준비 중인 1948년의 5·10 총선거를 막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1948년 4월19일부터 24일까지 평양 대동강의 쑥섬에서 이른바 ‘쑥섬협의회’(남북연석회의)를 열었다. 남한에서 김구, 김규식 등이 참석했고, 이승만은 불참했다. 김일성은 김구와 김규식을 5·10 선거를 저지할 능력을 가진 남한의 대표자로 예상했다. 그러나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에게 자기들은 그런 능력을 가진 대표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또한 김일성은 미국과 이승만의 은밀한 커넥션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결국 쑥섬협의회는 결렬되었고, 한반도는 분단의 길을 걷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1948년 녹음이 무성한 여름철을 택해서 38선을 넘었다. 38선에는 미군이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 녹음이 무성해야만 몸을 숨기기가 쉬웠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보초가 왕복하는 시간을 치밀하게 계산했다. 우리는 눈 앞에서 보초가 사라지자마자 38선을 넘는 전략을 세웠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님까지 모시고 사력을 다해 달렸다.

우리는 38선을 넘어 개성의 피난민 수용소로 갔다. 그때 개성은 38선 이남에 위치해서 남쪽에 속했다. 훗날 한국전쟁 휴전선이 개성 밑으로 그어지면서 북쪽에 속하게 됐다. 개성 피난민 수용소에서 두어 달 동안 머물렀다. 그곳의 위생 상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천연두에 걸렸다. 몸이 몹시 가려웠는데, 긁으면 ‘곰보’가 된다고 그래서 긁지도 못했다. 비가 오는 날 발가벗고서 고개를 들고 처량하게 비를 맞았던 기억이 난다. 비를 맞으면 가려움증이 좀 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콧잔등에는 그 때 생긴 곰보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뒤 대구에 내려와서는 대명동에 정착했다. 아버지가 마련해둔 방 한 칸짜리 셋집에서 여덟 식구가 살았다. 나는 1948년 대구 남산초등학교 1학년에 또다시 입학했다. 아홉 살 때였다. 학교에서 공부가 끝나면 길거리에 나가서 사과도 팔고 군밤도 팔았다. 그처럼 어려운 생활을 하는 와중에 할머님께서 치매에 걸리셨다. 할머님을 간병할 수 있는 방을 마련하기 위해 수창동으로 이사를 해서 방 두 칸짜리 집을 얻었다. 그런데 대명동에서 수창동까지 가는 거리는 대단히 멀었다. 그래서 나는 수창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고 싶었다. 그러나 남산초등학교의 반대로 전학을 할 수 없었다. 나처럼 총명하고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학교의 명예를 위해 놓아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나는 할 수 없이 성인용 중고 자전거를 구입했다. 책가방은 자전거 뒤에 싣고, 한 손은 자전거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의 겨드랑이로 자전거 안장을 감싸고, 한쪽 발을 자전거 옆구리로 집어넣어 자전거 페달을 밞았다. 몸이 무척 약했던 내가 그 먼 길을 성인용 자전거로 통학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각도 참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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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 교수 가족은 1948년 여름 38선을 몰래 넘어와 개성의 피난민수용소에서 두어달 머물렸다. 해방 이후 개성에는 북한·만주·동중국 일대에서 38선을 넘어온 귀환동포들을 위한 임시 거처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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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초등학교 5학년 때로 기억한다. 그때는 한 반에 나이 차이가 많은 아이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그 중에 나이 많은 깡패 두목이 하나 있었다. 그 녀석은 항시 점심 시간에 친구들의 도시락 뚜껑을 강제로 열게 해서는 맛있는 반찬을 모두 집어가 버렸다. 내 도시락의 삶은 계란도 집어간 적이 있었다. 또 겨울에 도시락을 난로에 올려놓고 따뜻하게 데울 때면 언제나 새치기해서 자기 것을 맨 아래에 끼워 넣었다. 나는 그 녀석이 너무도 얄미웠다. 그러나 내가 워낙 약골이라 정면으로 싸울 수도 없었다. 우리 반에서 누구도 그 녀석에게 대들지를 못했다. 나는 머리를 굴렸다. 며칠동안 학교 수업이 끝나면 그 녀석의 뒤를 밟으면서 동선을 파악했다. 그 녀석이 친구들과 헤어져서 혼자 남는 지점도 파악했다. 하루는 야구 방망이를 들고서 그 지점 근처에서 매복했다. 마침내 그 녀석이 내 앞을 지나갈 때 야구 방망이로 그 녀석의 뒤통수를 힘껏 후려쳤다. 그 녀석이 퍽하고 쓰러졌다. 나는 그 녀석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집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날 밤 잠을 한숨도 못 잤다. 그 녀석이 혹시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학교에 가보니 그 녀석이 와 있지 않은가! 더욱이 그 녀석의 친구들과 어제 뒤통수 맞은 일을 얘기하면서 깔깔대고 웃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 녀석의 그 모습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 이후 나는 그 녀석에게 아주 잘해 주었다. 나의 삶은 계란도 자주 주고, 내가 아끼던 카메라까지 주기도 했다. 그러자 힘이 센 그 녀석은 약골인 나를 지켜주었다. 우리는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나의 마음 한구석에는 늘 그 녀석에 대한 미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졸업반이 되었을 때, 나는 그 녀석 뒤통수를 후려친 사건을 고백했다. 하지만 그 녀석은 나의 말을 믿지 않았다. 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그럴 리가 없다고 우겼다. 히죽히죽 웃으면서 계속 우겨댔다. 나도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야구 방망이 사건은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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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은 1948년 대구 남산초등학교에 다시 1학년으로 입학해 1954년 졸업했다. 사진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 설립 초기의 학교 전경이다. 지금은 오른쪽 강당(남산관) 건물만 남아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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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초등학교 시절을 회고할 때 가장 잊을 수 없는 사건은 물론 한국전쟁이다. 대구에서 초등학교 3학년 때 전쟁을 맞이했다. 만주에서 국공내전을 목격하면서 몸서리를 쳤던 나에게 해방 뒤 귀국길은 전쟁이 없는 안식처를 찾아 나선 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고향에서 나를 기다린 것은 미국 전투기의 무자비한 폭격으로 상징되는 한국전쟁이었다. 눈에 띄는 모든 것을 무차별 살상했던 미군의 폭탄은 국공내전에서 사용했던 원시적 무기와는 차원이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폭격소리에 놀란 소가 길가에서 이리저리 날뛰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빗발치는 미국 전투기의 폭격에 사람들이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가 무참하게 고꾸라지는 모습, 주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모습, 가족들이 주검을 부둥켜안고 절규하는 모습… 어린 눈에 반복적으로 각인된 그런 모습은 나로 하여금 결심하게 만들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전쟁을 방지하는 일에 헌신하겠노라고! 나의 온 몸에 전염된 ‘평화병’을 결코 치료하지 않겠노라고!
미군은 공군전략을 중심으로 전쟁을 수행했기 때문에 희생자 규모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미국의 전쟁 역사에서 최초로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었다. 미국은 그런 사실을 은폐하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한국전쟁’(Korean War)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한국 내부의 동란’(Korean Conflict)이란 말을 사용했다. 미국은 베트남전쟁 패배 이후에야 한국전쟁이란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거의 모든 연구자들은 한국전쟁의 발발 기원이나 원인을 연구한다. 그들은 대체로 미국 의회의 도서관 등을 방문해서 다량의 사료를 복사해간다. 그런 다음 그 사료를 읽고 해석해서 ‘목침’처럼 두꺼운 한국전쟁 연구서를 펴낸다. 책의 두께는 대체로 연구자의 학문적 성취도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수많은 사료를 인용하면서 저술한 두꺼운 책이 학술상을 받는 사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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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초등학교 3학년 때 한국전쟁을 겪은 박한식은 미군 전투기의 폭격소리와 무차별 살상의 충격 속에서 자신의 ‘평화병’이 깊어졌다고 말한다. 사진은 1950년 7월 미 해군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전투기들이 북한의 열차를 공격하는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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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그런 식으로 저술된 책을 수없이 읽으면서도 한국전쟁의 발발 기원이나 원인을 발견한 적이 없다.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사회과학적 인과율에 따라서 한국전쟁의 발발을 ‘설명’(explanation)해야만 한다. 그러나 내가 접한 수많은 한국전쟁 연구서는 방대한 사료를 이렇게 저렇게 조합해서 한국전쟁 발발을 ‘서술’(description)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단언컨대 서술을 통해서는 원인을 확정할 수 없다. 그들이 사용한 사료를 다른 연구자가 사용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서 다른 결론을 도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윌리엄 드레이가 “100여년에 걸친 막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남북전쟁 원인에 대한 논쟁이 아직까지 종식되지 않았다”고 평가했고, 또 냉전이 종식되었지만 냉전의 기원에 대한 논쟁은 아직까지 끝나지 않은 까닭은 모두 연구자의 ‘조잡한’ 연구방법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처럼 조잡하게 규명한 원인을 북한에 전가해서 북한을 단죄하고, 남한에 전가해서 남한을 단죄하며, 소련이나 미국에 전가해서 소련이나 미국을 단죄하는 행태를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남북 간의 증오심과 적개심을 끝없이 유발하는 원천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가 한국전쟁에서 진정 배워야 할 것은 우리 모두가 한국전쟁이 물려준 질곡에서 지금껏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쟁이 남겨준 분단, 남북 간의 극단적 적대감, 북한을 핑계로 끝없이 악화되는 남남갈등, 그리고 그런 분단문화에 우리의 의식과 영혼이 부지불식간 세뇌됨으로써 아직껏 충분히 해명하지 못한 한국전쟁 민간인 대량학살 문제, 충분히 해결하지 못한 이산가족 문제, 충분히 해원하지 못한 빨갱이 연좌제 문제 등등을 직시하고, 분석하고, 해체하는 작업에 우리 모두의 학문적 역량을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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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98280.html#csidx2ba8e4f40df7b2a90e27f1143167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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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어릴 적 만주땅 즐비했던 주검 보면서 ‘평화병’ 걸렸다”


길을 찾아서- 6회 나는 왜 평화주의자가 됐는가
1981년 냉전 절정기 북한 첫 방문 나서
“북의 시각에서 주체사상 이해 필요”

애틀랜타공항 출발하기 직전 ‘공포’
세자녀 이름으로 생명보험 즉석 가입
딘 러스크 전 미 국무장관에게 ‘부탁’
“북에 있는 동안 내 신변 확인해달라”

‘미친짓’ 알면서도 북행한 이유 ‘평화병’
“유년기 만주에서 겪은 두 가지 체험”
국공내전 학살·아편중독 주검에 ‘충격’
“만주 조선인들 중독자 없어 놀라워”

마오쩌둥 ‘100년 중국병’ 사형으로 근절
“한반도 평화 보장할 안보문화 혁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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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 교수는 조부모가 1910년대 일제 수탈을 피해 경상도 청도에서 만주로 이주해 정착한 하얼빈에서 1939년 태어나 해방 직후까지 유년시절을 보냈다. 1940년대 만주국 시절 일본의 엽서에 실린 하얼빈의 차이나타운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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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국에서 50년 이상 사는 동안 지난 20년 사이 북한을 50회 넘게 다녀왔다. 미국에서 베이징을 거쳐 평양에 갔다가 다시 미국에 돌아오는 거리는 지구를 한바퀴 도는 거리다. 따라서 나는 지구를 50회 이상 돌았다고도 할 수 있다. 관광을 하러 간 것이 아니었다. 내가 한국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간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내 대학교수 박봉을 쪼개서 다녀왔다.

 북한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81년 여름방학 때였다. 북한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의 시각이 아니라 먼저 북한의 시각에서 주체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는 미국에서 카터를 누르고 보수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냉전의 긴장이 크게 고조되고, 또 한국에서는 전두환 군사정권이 출범하면서 남북간의 군사적 대립도 극에 이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북한을 방문한다는 것은 스스로 ‘사지’에 들어가는 것이나 다를 게 없었다. 실제로 북한을 처음 방문하기 위해 애틀랜타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극심한 공포의 시간이었다. 생각 끝에 나는 그 자리에서 세 자녀 몫으로 300만달러의 생명보험을 들었다. 또한 딘 러스크에게 내가 북한에서 돌아오지 못할 때를 대비해 나의 신변 안전을 계속 확인해달라는 부탁도 해두었다. 러스크는 케네디 행정부와 존슨 행정부에서 9년 동안 국무장관을 역임한 뒤 내가 재직 중이던 조지아대학의 국제법 교수로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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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박한식 교수는 북한 첫 방문 때 조지아대 동교 교수로 있던 딘 러스크에게 ‘신변 안전’을 부탁했다. 딘 러스크는 1945년 8월 일제 패망 직후 ‘한반도 38선’을 가장 먼저 제안한 정보장교 출신으로 케네디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을 지냈다. <한국방송>
왜 그랬을까? 제정신이었다면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스스로 진단해보면 ‘평화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언제부터 평화병에 걸렸을까? 시간을 거슬러 생각을 더듬어 보니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만주의 참혹한 풍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경상도에서 농사를 지으시던 나의 할아버지 3형제는 한일 강제병합 이듬해인 1911년 만주로 이민을 떠났다.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의 비옥한 땅은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이 선점했기 때문에 더 북쪽으로 흑룡강성(헤이룽장성)의 하얼빈에 정착했다. 그 뒤 나의 아버지도 할아버지와 합류했고, 1931년쯤 역시 경상도에서 떠나온 어머니와 결혼을 했다. 나는 1939년 3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두 살 아래 여동생보다 늦게 걸을 정도로 몸은 허약했지만, 두상은 상대적으로 커서 ‘가분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할아버지는 집에서 중국어와 일본어를 쓰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는 조선인 초등학교 국어 교사를 했고, 일본 법정에서 중국어와 일본어 통역도 했다. 내가 다닌 조선인 초등학교는 교실이 딱 하나 있었다. 그래서 맨 앞줄에 1학년 학생이 앉고, 그 뒷줄에 2학년 학생이 앉고, 그 뒷줄에 3학년 학생이 앉는 방식이었다. 나는 입학 뒤 얼마 되지 않아서 셋째 줄에 앉았다. 두 차례 월반했기 때문이다.

나는 유년기 삶의 터전이었던 만주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 두 가지를 반복해서 목격했다. 하나는 ‘국공내전’에서 자행된 원시적 학살 장면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편중독으로 죽은 중국인 주검이 곳곳에 야적된 장면이었다.
국공내전 시기 무기는 변변한 게 없었다. 그래서 칼, 낫, 죽창 등과 같은 원시적 무기로 사람을 난도질해서 죽였다. 참으로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했다. 그 참혹한 광경은 어린 나의 눈으로 도저히 담아낼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런 광경이 내 삶의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비쳤다.

그 당시 만주 일대 조선인은 대부분 마오쩌둥을 적극 지지했다.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은 대부분 소작을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애초 중국인 지주의 소작료율은 70%였다. 하지만 일제가 만주국(1932~45년)을 세우면서 등장한 일본인 지주의 소작료율은 85%에 이르렀다. 그처럼 가혹한 수탈을 당한 조선인이 지주를 좋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장제스(장개석)는 기본적으로 중국인 지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사회주의를 선택한 마오쩌둥은 ‘사유재산 철폐’를 역설했다. 또한 사회주의에서 중시하는 노동자 계급을 중국의 ‘인민’으로 대체시켰다. 즉 마오쩌둥은 서구에서 수입한 사회주의를 중국의 가난한 농민의 현실에 부응하는 ‘중국식 사회주의’로 수정한 것이다. 그러자 중국의 농민은 물론 만주의 조선인도 마오쩌둥을 강력하게 지지하게 되었다. 우리 친척 중에서도 건장한 청년들은 모두 마오쩌둥의 인민해방군에 가담할 정도였다.
만주에서 조선인이 수행한 임무는 ‘북·중의 특수관계’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마오쩌둥은 만주의 조선인을 우대했다. 또한 한국전쟁 때는 약 10만명의 ‘항미원조 지원군’을 파견했다. 그 지원군에는 만주의 조선인이 다수 포함되었는데, 그들이 참전한 목적은 한반도에서 미국을 몰아냄으로써 조국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장남인 마오안잉도 참전시켰다. 마오안잉은 1950년 11월25일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동에서 미국 전투기가 투하한 네이팜탄에 맞아 전사했다. 마오안잉은 평안남도 회창군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능원에 묻혔다. 요컨대 현재 중국의 유일한 동맹국이 바로 북한이라는 사실은 격동의 중국 현대사에서 형성된 ‘특수관계’를 정확하게 예증한다.

트럼프는 2017년 4월7일 시진핑과 미·중 정상회담을 한 뒤 <폭스 비즈니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처음 말을 꺼낸 것은 북한 문제였다. 미국은 북한(핵·미사일)을 용인할 수 없기 때문에 중국이 미국을 도와야 한다.” 그러자 시 주석은 수천년간 맺어온 중국과 한반도의 관계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면서 “중국과 한반도의 관계는 그렇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4월21일 자신의 트위터에 다시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중국은 북한의 엄청난 경제적 생명줄(economic lifeline)이다. 비록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중국이 북한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한다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중국은 4월22일 성명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한·미 군대가 38선을 넘어 북한을 지상에서 침략해 북한 정권을 전복시키려 한다면 즉시 군사적 개입에 나서겠다. 중국은 무력 수단을 통한 북한 정권의 전복과 한반도 통일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이 마지노선은 중국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끝까지 견지하겠다.”

박근혜는 2015년 9월3일 중국 전승절에 참석했다. 중국을 통해서 ‘북한의 비핵화’를 압박하려는 계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근혜는 북·중 특수관계를 전면적으로 거스르는 정책을 시진핑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트럼프의 제안조차 거부한 중국이 박근혜의 제안을 수용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박근혜는 중국에 서운해하면서 개성공단을 폐쇄했고, 또 중국이 강력하게 반대했던 미군의 사드 배치까지 받아들였다. 박근혜의 ‘오판’이 낳은 정치적·역사적 유산은 2019년 현재까지 한반도에 가혹한 질곡으로 남아 있다.
어릴 적 만주에 산재된 아편중독자의 주검은 나를 더욱 깊은 고뇌에 빠뜨렸다. 그때는 1840년 아편전쟁이 발생한 이후 약 100년이나 지났을 때였지만, 애초 만주에는 영국군이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아편은 깊이 침투해 있었다. 이런 현상은 아편이 중국 전역에 퍼졌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중국 성인 남성 약 27%가 아편에 중독된 상태였다. 그때 중국의 인구가 약 6천만명이었으니 약 2천만명이 아편중독자였던 셈이다. 나는 아편도 총칼처럼 살상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적나라하게 목격했다. 더구나 아편은 총칼과 달리 중국의 민족정신까지 마비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야만적인 무기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만주의 조선인은 아편에 중독되지 않았다. 아편을 먹지 말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없었고 단속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현재 북한에도 아편이 없다. 이는 우리 민족이 그만큼 깨끗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그런 중국의 아편중독을 근절시킨 인물이 마오쩌둥이었다. 1912년 청나라가 망한 뒤 등장한 쑨원 정권과 장제스 정권에서도 아편은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중국의 민족정신을 마비시키는 아편이 대단히 심각한 무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아편을 팔다가 잡힌 중국인은 무조건 사형에 처했다. 마오쩌둥은 외세와 결탁해서 밥 벌어먹는 중국인을 가장 천한 계급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그런 계급의 대안으로 ‘인민’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철저히 반외세 민족주의 정신으로 무장한 인민이 ‘혁명 중국’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애연가가 담배를 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마오쩌둥은 약 100년에 걸쳐 아편에 중독된 2천여만명의 중국 인민을 구제하는 ‘위대한’ 일을 성취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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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처음 북한을 방문한 박한식 교수는 자신이 ‘평화주의자’된 이유로 유년기 겪었던 중국인들의 아편중독 참상 영향을 꼽는다. 청나라 말기 19세기 중반 영국과 두 차례 아편전쟁 이래 100년간 만연했던 ‘아편굴’에서 중국인들이 마약에 취해 쓰러져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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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듯, 미국은 영국 사람들이 만든 나라다. 현재 미국은 세계 최대 무기 수출국이다. 미국이 무기를 팔아서 천문학적 이득을 취하는 방식은 영국이 아편을 팔아서 부를 쌓았던 방식과 유사하다. 영국과 미국의 타락한 자본주의 정신이 그 객관적 근거가 된다. 아편이 소비국의 민족정신을 타락시켰던 것처럼 무기 또한 수입국의 자체 국방능력을 고갈시킨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이 세계 최대 미국 무기 수입국의 하나라는 데 있다. 2015년 현재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 분석을 보면, 한국은 최근 5년간 미국 무기 수입 1위 국가에 올랐다. 미국을 ‘맹종’하고 북한을 ‘주적’으로 삼는 한국의 안보정책 내지 ‘안보병’이 그런 결과를 빚은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방산업체는 절대로 핵심기술을 한국에 이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국은 작금의 안보정책을 근원적으로 혁신하지 않는 한 영원히 미국의 방산업체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국의 방산업체가 주축이 된 ‘딥 스테이트’는 미국 민주주의와 헌정질서의 근간을 꾸준히 파괴하고 있다. 또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미국산 무기로 안보를 추구한다면 오히려 안보 그 자체까지 파괴한다는 점을 주목해야만 한다. 미국에서 수입한 무지막지한 무기를 동원해서 핵무기를 가진 북한과 전쟁을 한다고 치자. 그러면 북한만 죽고 남한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현재 미국 무기에 중독된 남한은 영국 아편에 중독되었던 중국과 크게 다를 게 없다. 만주의 조선인은 스스로 아편에 중독되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정신력을 지녔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은 미국 무기에 중독된 사실 그 자체를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력이 타락했다.
한국은 중국의 ‘아편중독 100년사’를 혁파한 마오쩌둥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의 안보를 더 이상 보장해주지 않는 안보정책을 버리고, 한민족의 평화와 번영을 기약할 수 있는 새로운 안보문화를 창조하는 것,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절박한 과제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 구술정리 박연진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96523.html#csidx69e026b201f95128b944709a1aa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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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김일성의 이율배반적 유훈…트럼프는 이해하는가”

길을 찾아서-5회-북핵문제 해법의 허상과 실상

하노이 2차 북미회담 돌연 등장한 ‘볼턴’
‘딥 스테이트의 그림자 대통령’ 소문
“무기 팔아 이익 챙기는 세력들 대변”

‘노란 봉투’ 속에 노딜회담 원인 담겨
선사찰-후보상 ‘리비아 모델’ 제시
미국 약속 믿었던 카다피 ‘비극 종말’
“트럼프는 ‘김정은의 거부’ 예상했다”

‘북한만의 완전한 비핵화’ 비현실적
“북쪽에선 ‘한반도 전체 비핵화’ 주장”

김일성 1958년부터 ‘핵물리학자’ 양성
“핵개발-비핵화 모두 생존전략 유훈”


 지난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 2차 정상회담 직후 도널드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요구했다고 <로이터>가 보도했다. 즉 트럼프는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북핵시설로 의심되는 모든 곳을 일방적으로 조사할 수 있는 ‘특별사찰’에 따라 북한의 핵프로그램과 핵시설을 전면적으로 폐기할 것을 요구했고, 심지어 북한의 핵과학자와 핵기술자에 대해서도 상업적 활동만 허용하도록 요구했다는 것이다. <로이터>는 트럼프의 요구를 평소 존 볼턴이 역설한 ‘리비아 모델’을 따른 것이라고 평가했다. 주지하듯 ‘선 비핵화·후 보상’을 의미하는 리비아 모델은 미국의 약속 위반 탓에 무아마르 카다피의 비극적 죽음으로 끝났다. 따라서 북한은 평소 리비아 모델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트럼프도 처음에는 볼턴의 주장과 거리를 두었다. 그래서 트럼프는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 1차 정상회담에서 리비아 모델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랬던 트럼프가 하노이 회담에서 리비아 모델을 채택한 까닭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트럼프가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시브이아이디를 북한에 갑자기 강제한 까닭은 무엇인가?
내가 볼 때, 트럼프는 북한이 리비아 모델을 틀림없이 거부할 것이라고 이미 판단했다. 다시 말해서 트럼프는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방안을 찾고 또 찾아서 북한의 선택을 강제했던 것이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것, 그래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트럼프를 지배하는 미국의 이른바 ‘딥 스테이트’의 이익에 정확하게 부합하기 때문이다. 딥 스테이트는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심각하게 유지되어야만 한국에 무기를 판매해서 천문학적 이익을 꾸준히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딥 스테이트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은밀하게 활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딥 스테이트가 정보관계 분야의 경험과 전문성이 풍부한 사람들, 막대한 자금력을 소유한 사람들, 군산복합체 등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은 비교적 정확하게 얘기할 수 있다. 딥 스테이트는 공식적 정부 시스템의 이면에서 암약하면서 그 시스템의 정상적 작동논리를 파괴시킨다. 따라서 나는 딥 스테이트를 ‘지진 국가’라고 번역한다. 딥 스테이트의 은폐된 폭발력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 미국 딥 스테이트의 암약이 꾸준히 확대되고 심화되다 보면 결국 미국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그 자체까지 파괴하는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딥 스테이트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따라서 트럼프가 딥 스테이트를 통제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트럼프는 ‘딥 스테이트의 그림자 대통령’(섀도 프레지던트 오브 더 딥 스테이트)으로 회자되는 볼턴을 채용해서 딥 스테이트를 통제하고 싶었겠지만 처음부터 가망이 없는 일이었다. 내가 볼 때 볼턴은 딥 스테이트의 ‘수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로이터>의 보도 내용을 다시 검토해보면, 볼턴이 하노이 정상회담장에서 쥐고 있었던 노란 봉투에는 딥 스테이트의 이해관계가 정확하게 반영된 문서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문서는 사실상 북한의 적극적 수용이 아니라 오히려 단호한 거부를 유도했다. 바로 북한이라는 ‘악마’가 건재하는 것이 곧 딥 스테이트의 존재를 정당화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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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북-미 1차 정상회담 직전인 지난해 5월 트럼프 미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리비아 모델’을 제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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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한국의 대미·대북 정책에서 찾아야만 한다. 한국은 언제나 ‘한-미 공조’를 천명하면서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래서 한국 역시 미국처럼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강조한다. 한국에서 이해하는 완전한 비핵화란 사실상 미국에서 수입한 시브이아이디를 의미한다. 또한 한국에서는 대체로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비핵화’를 개념적으로 구분해서 이해한다. 전자는 북한의 시브이아이디를 의미하고, 후자는 한반도 전체의 비핵화를 의미한다. 한국에서 전자와 후자를 구분하는 까닭은, 후자의 경우 미국의 세계 전략 및 동아시아 전략에 맞지 않아 실현 불가능한 비현실적 개념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비핵화를 구분하는 발상 역시 미국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미국적 발상이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북한에서는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비핵화를 구분하는 발상 그 자체를 일종의 ‘공상’으로 간주한다는 데 있다. 북한의 사유양식에서 ‘북한 비핵화’란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한반도 비핵화(북한 용어로 조선반도 비핵화)란 개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사실을 북한의 수많은 학자들과 토론하면서 직접 확인했다. 나는 그들에게 반복해서 물었다. ‘당신들이 주장하는 비핵화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미국 본토에 있는 핵무기까지 없애야 한다는 뜻인가?’ 나의 질문에 북한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이랬다. 즉 자기들이 주장하는 비핵화란 ‘북한 비핵화, 주한미군의 비핵화, 한반도 주변에서 출몰하는 미국 핵항공모함의 비핵화를 아우르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북한은 공식 성명을 통해서도 지금까지 단 한차례도 북한만의 비핵화를 얘기한 적이 없고, 오직 한반도 비핵화를 일관되게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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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12 상가포르 북-미 1차 정상회담 이전부터 볼턴 보좌관은 ‘리비아 모델’을 주장해 북미 대화의 걸림돌로 지목돼 왔다.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2차 정상회담에서도 막판 등장한 그가 ‘리비아 모델’을 요구한 것이 ‘노딜’의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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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은 2004년 5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를 두번째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우리에게 이라크처럼 핵무기를 무조건 포기하라고 요구합니다. 우리는 그런 요구를 들어줄 수 없습니다. 만일 미국이 우리를 핵무기로 공격한다면 우리도 그냥 손을 놓고 당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손을 놓고 있다면, 이라크의 운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또한 김정일의 우려는 리비아의 사례를 통해서도 구체적으로 예증되었다. 리비아는 미국의 요구에 따라 2003년 ‘완전한 비핵화’를 선언하고 모든 대량살상무기를 폐기했다. 그러자 미국 국무부는 2006년 리비아와 국교 정상화를 선언했고, 기존의 연락사무소를 대사관으로 격상시켰다. 그러나 미국은 2011년 3월 ‘오디세이 새벽작전’을 개시해서 리비아를 폭격했고, 그해 10월 미국이 선도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의 지원을 받은 리비아 반군은 카다피를 체포해서 사살해버렸다. 그러면 리비아 모델의 비극적 결말을 생생하게 목격한 북한이, 북한만의 일방적인 무장해제를 뜻하는 ‘북한 비핵화’를 도대체 어떻게 수용할 수 있겠는가? 한-미 공조에 입각한 한국의 북핵 문제 해법 역시 미국의 해법만큼이나 ‘비현실적’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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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5월 김정일(왼쪽) 북한 국방위원장은 평양에서 두번째 만난 고이즈미(오른쪽)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에서 ‘리비아식 완전 비핵화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밝혔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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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북핵 해법의 비현실성은 북한이라는 나라의 성격을 직시해보면 더욱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북한은 강한 민족적 자긍심을 지닌 나라다. 따라서 북한은 그 어떤 외세의 강압에도 굴복하지 않는 체질을 지녔다. 그래서 북한을 강하게 압박하면 할수록 더욱 강하게 반발한다. 북한의 역사 교과서를 읽어보면 이는 더 분명해진다. 북한의 민족적 자긍심 또는 강력한 민족주의 정신은 주로 고조선, 고구려 같은 한민족 고대사 교육을 통해서 함양된다. 바로 그 시기에 한민족의 정치적 기상이 가장 왕성하게 발현되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예컨대 고구려가 당대 세계 최강의 국력을 지녔던 수나라나 당나라의 침략을 단호하게 격파했던 역사적 사실을 공부하면서 불굴의 저항정신과 뜨거운 민족적 자긍심을 배운다. 따라서 북한이 현재 미국과 대결하면서 견지하는 정신은 고구려의 정신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북한이 미국의 시브이아이디 요구를 순순히 수용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비현실적’ 구상인 것이다.
나는 평양의 주체과학원에서 역사학을 연구했던 케이(K) 교수의 초청으로 역사학 학술대회에 여러 차례 참석하면서 북한의 역사 연구 동향을 상세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북한의 역사 연구에서 특히 고구려를 중시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데 그들은 고구려의 을지문덕, 광개토대왕, 연개소문 등과 같은 특정 개인의 업적을 부각시키는 영웅사관이 아니라, 당대 인민의 결집된 역량을 통해서 국난을 극복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인민사관’을 중시했다. 북한에서 한민족의 역사를 집대성한 <조선전사> 역시 인민사관에 입각해서 저술되었다.

한번은 내가 만주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케이 교수에게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는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 선대 조상 등도 만주에서 태어났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나는 처음에 영문을 몰라서 당황했다. 하지만 케이 교수는 내가 고구려 후손인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나는 동명성왕릉을 두 차례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북한의 고구려 계승 정신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요컨대 북한의 강력한 민족주의 정신은 고구려의 약동하는 정신이 체현된 것이었다.

한국에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할 때 반드시 유의해야 할 사항이 또 하나 있다. 한국과 북한은 건국 이후 지금까지 치열한 체제 경쟁을 전개했다. 나는 남북한의 체제 경쟁을 ‘정통성 전쟁’(리지티머시 워)이란 용어로 개념화했다. 한국은 북한을 전적으로 배제하면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자임하고, 북한 역시 한국을 전적으로 배제하면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자처하기 때문이다. 애초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한 까닭은 북한의 안보를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는 군사적 수단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그런데 김정은은 2018년 신년사에서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즉 북한은 핵무기를 보유함으로써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군사적 수단을 확보했다고 천명한 것이다. 이후 북한의 핵무기는 북한의 정통성을 확증하는 수단으로 자리매김되었다. 다시 말해서 북한 핵무기는 북한의 체제가 한국의 체제에 대해서 우위를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격상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한다는 것은 곧 북한 체제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의미가 있는데, 그것이 과연 실현 가능할 수 있겠는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서는 김일성의 핵무기에 관한 ‘이율배반적’ 유훈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바로 거기에서 북한의 핵개발 동기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다년간 학문적으로 교류했던 북한의 시(C) 교수로부터 김일성이 핵무기에 주목했던 까닭을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항일 무장투쟁에서 고군분투했던 김일성은 일본이 미국의 원자탄 투하에 한순간 항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핵무기의 위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김일성은 핵무기만 확보하면 아무리 강력한 외세의 침략도 단호하게 격퇴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더욱이 김일성은 한국전쟁 때 미국의 무자비한 폭격을 당하면서 핵무기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래서 김일성은 1958년부터 북한의 많은 젊은이를 소련에 유학 보내서 핵물리학을 공부시켰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능력은 그때부터 축적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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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요구대로 ‘완전 비핵화’를 단행했던 리비아의 독재자 카타피는 2011년 ‘아랍의 봄’ 때 미국의 지원을 받는 반군 세력에게 붙잡혀 처형됐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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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일성은 일본의 원자탄 피폭에서 핵무기의 막강한 위력뿐만 아니라, 핵무기가 초래한 참상도 봤다. 따라서 김일성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모두 제거하는 ‘조선반도 비핵화’가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즉 김일성은 핵무기를 보유할 이유와 포기해야 할 이유를 동시에 고려하는 ‘이율배반적’ 사유를 했던 것이다. 김일성의 사유는 이율배반적 외양을 지녔지만, 그 실상에서는 지극히 논리적이고 상식적인 것이었다. 핵무기를 수단으로 북한의 안보를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는 정치적 장치가 마련되면 핵무기를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 김일성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이 현재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다”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의미의 맥락이 여기에 있다. 김일성의 유훈에 주목할 때, 북한의 비핵화는 반드시 북-미 수교, 다자간 불가침 조약 등과 같은 정치적 안전장치가 선결되어야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꿈꾼다. 북한의 안보가 보장되고 한반도 비핵화가 완전히 실현되는 순간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다시 가입하고, 한국·미국 등을 포함한 열강과 손을 잡고 국제무대를 돌면서 핵 야망을 지닌 국가들을 상대로 비핵화를 설득하는 순간을! 지구상의 ‘악마’로 간주되었던 북한이 비핵화와 비확산 운동을 선도함으로써 인류의 평화에 기여하고, 또 국제사회의 정상국가 일원으로 정당하게 평가받는 바로 그 순간을!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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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94588.html#csidx1d72e5a053d3359883be9b5f5ed81c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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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칠흑같은 북한’ 한반도 야경 사진의 진실은 무엇인가

길을 찾아서-4회 시브이아이디(CVID)가 불가능한 까닭
80·90년대 북에서 겪은 ‘팀스피릿 훈련’
한미 연합군사훈련 때면 ‘전시’ 초비상
농번기 맞물리면 한해 농사에도 악영향

집집마다 미군 공습 대비 ‘야간소등’
나사 위성촬영 사진 ‘남북 대비’ 선전
“북 전력난 극심-남 경제발전” 왜곡

“미군이 돌연 선제공격하면 어쩌나”
학자·고위급 정치지도자들 ‘공포감’

‘완전·검증 가능·불가역적 비핵화’
북-미 서로 불신하는한 실현 불가능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면서 시작된 이른바 `북핵위기'는 그로부터 무려 26년이 지난 2019년 현재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동안 미국, 중국, 북한, 한국 등이 북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의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예컨대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합의가 체결되었고, 2005년에는 9·19 공동성명이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성과는 이내 와해되고 말았다. 또한 그런 협상이 반복될수록 북핵위기는 더욱 악화되었다. 다시 말해서 북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북핵위기는 오히려 악화되는 패턴을 보였다. 북한은 현재 실질적인 핵 보유국가가 되지 않았는가? 도대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기이한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1981년 북한을 처음 방문한 이후 지금까지 50회 이상 다녀오면서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북한을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과 북한 사람들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시각으로 북한을 해석하고, 또 심지어 그런 시각을 북한에 강요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런 시각을 통해서는 북한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시각은 오늘도 여전히 북한을 강제하고 있다.
나는 그런 시각으로 북한을 재단하는 행위를 ‘인식론적 제국주의’(epistemic imperialism)란 용어로 개념화했다. 아울러 인식론적 제국주의에 입각해서 입안된 모든 북핵위기 해법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지난 26년 동안 북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궁극적 까닭 역시 인식론적 제국주의에서 찾아야만 한다고 본다.
나는 2002년 <통념을 넘어서 본 북한정치>(North Korea: The Politics of Unconventional Wisdom)(린 리너 출판)를 출간했다. 북한의 정치문화를 직접 관찰하고, 또 북한 내부 학자들과 진지한 토론을 거듭하면서 터득한 주체사상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책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2년 나는 또 한 권의 북한 연구서를 동료 학자들과 함께 펴냈는데, <탈신비화시킨 북한>(North Korea Demystified·케임브리지 프레스)이 그것이다. 우리의 통념으로 각색된 북한의 모습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 2018년에는 우리말로 된 북한 연구서 <선을 넘어 생각한다>(부키)를 펴냈다. 책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통념의 한계를 넘어서서 북한을 이해하자는 제안을 하고 싶었다.
2014년 1월 미국 항공우주국(나사)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찍은 한반도의 야경 사진으로, 그해 <로이터>에서 ‘올해의 사진’으로 뽑혀 화제를 모았다. 박한식 교수는 흔히 ‘남북한의 경제 발전상 대비 자료’로 널리 쓰이고 있는 이런 사진이 미국의 북한에 대한 ‘인식론적 제국주의’ 시각을 상징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2014년 1월 미국 항공우주국(나사)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찍은 한반도의 야경 사진으로, 그해 <로이터>에서 ‘올해의 사진’으로 뽑혀 화제를 모았다. 박한식 교수는 흔히 ‘남북한의 경제 발전상 대비 자료’로 널리 쓰이고 있는 이런 사진이 미국의 북한에 대한 ‘인식론적 제국주의’ 시각을 상징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2년 펴낸 박한식 교수의 저서 <통념을 넘어서 본 북한정치>(린 리너 출판)
2002년 펴낸 박한식 교수의 저서 <통념을 넘어서 본 북한정치>(린 리너 출판)
그런데 약 10년을 주기로 출간된 나의 책 제목들이 어떤 공통의 명제로 수렴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했다. 한마디로 그것은 인식론적 제국주의를 넘어서서 북한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 사람들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담고고 있었다. 그런 나의 연구 태도를 ‘엠퍼시’(empathy)라는 용어로 개념화했는데, 우리말로 의역하면 ‘역지사지’(易地思之) 정도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미국은 현재 이른바 시브이아이디(CVID), 즉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북한에 요구하고 있다. ‘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뜻하는 피브이아이디(PVID), ‘최종적으로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를 뜻하는 에프에프브이디(FFVD) 등의 용어도 사용하고 있지만, 시브이아이디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시브이아이디가 미국의 인식론적 제국주의를 전형적으로 반영한 개념이라고 판단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북한의 핵 개발 동기를 전적으로 무시하면서 일방적으로 무조건 핵을 없애라고 강제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국제정치의 세계에서 실현 불가능한 비현실적 개념이라는 사실도 주목해야만 한다.
시브이아이디에서 ‘시’(C), 즉 `완전한’(Complete)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받아야 한다.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은 크게 일반사찰과 특별사찰로 나뉜다. 보통은 일반사찰로 한다. 북한이 자발적으로 핵무기 소재지와 핵무기 수량 등을 신고하면 원자력기구 에서 현지를 방문해서 검증한다. 북한이 신고한 곳의 일부를 샘플로 선별해서 검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사찰이 성공적으로 수행되려면 반드시 북한에 대한 `신뢰'를 전제해야만 한다. 그러나 현재 원자력기구나 미국은 북한을 극단적으로 불신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이 아무리 정직하게 신고한다손 치더라도 믿지를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특별사찰은 더더욱 어렵다. 원자력기구에서 북한이 신고한 곳뿐만 아니라, 자체 분석에 따라 핵무기 소재지로 의심되는 곳까지 검증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사실상 북한의 모든 곳을 뒤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는가? 그런데도 원자력기구와 미국이 특별사찰을 강행한다면 북한은 자국의 주권을 유린하는 행위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총격전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시브이아이디에서 `브이’(V), 즉 `검증 가능한'(Verifiable) 비핵화는 더욱 어렵다. 이를 위해서는 핵무기 전문가가 북한이 신고한 지역을 검증해야 한다. 그러나 원자력기구와 미국은 근본적으로 북한을 믿지 않으니 신고 지역만 보고 검증할 생각이 없다.
시브이아이디에서 `아이’(I)', 즉 `불가역적'(Irreversible) 비핵화 역시 사실상 실현 불가능하다. 북한은 이미 핵무기를 보유했고, 또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전문가, 핵무기를 만든 경험,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원료 등도 보유했다. 따라서 북한이 현재 보유한 핵무기를 모두 폐기한다손 치더라도 언제든지 다시 만들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불가역적' 비핵화가 가능하겠는가?
이런 분석을 종합해보면 시브이아이디는 개념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북핵위기의 해법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시브이아이디는 이제 그만 얘기해야만 한다.
북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북한의 처지에서 핵을 보유한 까닭을 정확하게 진단할 필요가 있다. 나는 앞에서 얘기한 엠퍼시(역지사지)를 통해서 그런 진단을 해볼 수 있다고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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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나온 박한식 교수의 편저 <탈신비화시킨 북한>(케임브리지 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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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른바 남쪽의 `팀스피릿훈련'(1976~93) 기간 중에 북한에 머물며 상황을 지켜본 적이 여러번 있었다. 팀스피릿훈련은 북한 공격을 목적으로 시행된 한미 합동군사훈련이었다. 해마다 두 달 남짓 동안 냉전시대 세계 최대 규모의 군사훈련으로서 참가병력이 20만~30만명에 이르기도 했다. 남쪽에서 팀스피릿훈련이 시작되면 북한은 곧바로 전쟁상태에 돌입한다. 미국은 훈련이라지만, 언제든지 총부리를 북한으로 돌릴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전쟁 상태에서 일상생활은 전면적으로 마비된다. 팀스피릿훈련이 주로 농번기여서 북한은 농사 준비도 전혀 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악순환을 반복적으로 체험하면서 북한은 필사적으로 자구책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는데, 마침내 찾아낸 해법이 바로 `핵무기'였다. 더욱이 북한은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핵무기를 포기하면서 이내 죽음을 당하고, 또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미국에 의해 쉽게 살해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핵무기가 정답이라는 판단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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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부터 최근까지 거의 해마다 북한을 방문해온 박한식 교수는 한미 연합군사훈련인 ‘팀스피릿훈련’ 때마다 전쟁 상황에 휩싸이는 북한 지도자들과 주민들의 공포를 현지에서 여러차례 체험했다. 사진은 1984년 팀스피릿훈련 때 ‘청군’으로 참가한 주한미군의 모습이다. 사진 국방홍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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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팀스피릿훈련 시기에 북한의 교수나 일반 주민의 집을 방문해서 그들의 대처방식을 관찰하기도 했다. 그들은 밤이 되면 일제히 소등을 하고 창문에 커튼을 친다.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틀어막는 것이다. 혹시라고 불빛이 새어 나가면 정부 당국으로부터 제재를 받는다. 그러면 북한 전역이 곧바로 칠흑 같은 어두움에 휩싸인다.
그런데 미국 항공우주국(나사)에서 위성으로 촬영한 한반도의 야경 사진을 종종 잡지나 언론을 통해 널리 유포되고 있다. 온통 깜깜한 북한의 모습과 대낮같이 밝은 남한의 모습을 선명하게 대비되는 사진이다. 팀스피릿훈련 같은 때 북한에 머문 적이 있었던 나로서는 실소를 하거나 때로는 화가 날 정도로 북한의 현실을 왜곡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얼마나 전기가 없으면 북한 전역이 저렇게 깜깜할 수 있단 말인가? 전기가 풍족한 남한은 저렇게 대낮처럼 밝은데 말이다. 참으로 지옥과 같은 북한과 비교하니 남한과 같은 천국이 따로 없지 않은가?!' 내가 직접 목격한 북한의 밤이 평상시에는 그 정도로 깜깜한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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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박정희 정권의 요청으로 시작해 93년까지 해마다 시행된 팀스피릿 훈련은 ‘평화수호를 위한 한미 결속의 훈련’(1990년) 구호처럼 방어작전을 표방했으나 북한이 자구책으로 ‘핵개발’에 나서는 빌미가 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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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책을 주도했던 럼스펠드(맨왼쪽) 미 국방장관이 ‘남북 대비 한반도 야경 사진’을 미국 방문중 펜타곤의 집무실을 찾은 박근혜(맨오른쪽) 당시 한나라당 대표 일행에게 보여주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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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스피릿훈련이 진행되는 와중에 북한의 학자나 고위급 정치지도자과 대화를 해본 적도 여러차례인데, 그럴 때면 내겐 북한이 먼저 남한을 공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특히 북한의 고위급 지도자들은 지금까지 미국의 공격에 대비해 막강한 무력을 준비해왔음에도, 자칫 선제공격을 당해 대응조차 못하게 되는 상황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나는 미국의 공격에 대한 극도의 `공포' 때문에 북한이 먼저 남한을 공격할 수도 있겠다는 우려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생각해 보라.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History of the Peloponnesian History)에서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팽창에 `공포'를 느낀 나머지 먼저 공격했다는 사실을 무려 3차례에 걸쳐 강조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북-미간 북핵위기가 해결되지 않는 한 북한의 선제공격 가능성은 상존한다고 믿고 있다. 1993년 팀스피릿훈련이 공식적으로 종식된 이후에도 명칭을 달리한 한-미 군사훈련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내가 직접 확인한 북한의 전시 대비 상황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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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미 국무장관 럼스펠드가 공개해 화제를 모은 집무실 탁자 위의 한반도 야경 사진. 나사에서 2003년 9월 위성으로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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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내가 북한을 거쳐 남한에 와보면 완전히 딴 세상이란 것이다. 남쪽에서는 팀스피릿훈련 중에도 전쟁 가능성을 전혀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한은 북-미간의 심각한 긴장구조와 그로인해 반복적으로 전쟁 상태에 내몰리는 북한의 실상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북한이 미국에 대해서 느끼는 극심한 공포와 그 공포에 따른 선제공격 가능성은 더더욱 모르고 있었다. 단지 그런 실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색깔론'만 난무하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색깔론 강변이 곧 애국적 행위인 것처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그처럼 공허한 색깔론으로 한반도의 참혹한 전쟁을 방지할 수 있겠는가? 만약 한반도에서 또 다시 전쟁이 터져도 북한이라는 `악마'가 일으켰다고 저주만 할 것인가?

`전쟁은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오직 누가 살아 남았는지 만을 결정할 뿐이다.'(War does not determine who is right ― only who is left)

버트런드 러셀의 이 경구를 기억하는 것, 한반도 평화의 길에 첫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 구술정리 박연진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92723.html#csidx402a79b5781a0f093369e2ba11d6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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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제재에 굶어 죽는 북한 아이들…관리들 껴안고 울었다”


1994년 ‘제네바 합의’ 경수로 지원 약속
미국 불이행에 북 ‘고난의 행군’ 시작
그무렵 방북…탁아소 아사 현장에 충격

1998년 김정일 ‘선군정치’ 본격 나서
미 경제제재 더 강화 국제사회도 가세
“정통성 기반 북체제 이해 못한 실패책”

유니세프 ‘북 아동 6만명 아사 위기’ 보고
핵은 미실행 위협…제재는 생존권 문제
“식량무기가 핵무기보다 더 잔인하다”

북-미 서로 다른 ‘인권 개념’ 이해 필요
2차대전 승전국 잣대인 ‘세계인권헌장’
‘인류 보편적 가치’ 표방하지만 배타적


1994년 10월 체결된 ‘제네바 합의’에서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 동결 대가로 북한에 1000MWe급 경수로 2기를 제공하고, 경수로 완공 때까지 연간 중유 50만t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미국의 약속 불이행은 북한의 에너지 상황을 크게 악화시켰다. 그리고 그 여파는 1990년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로 그대로 이어졌다. 다시 말해서 미국의 약속 불이행은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기를 악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고난의 행군 시기 북한이 겪은 참상은 약 200만명의 북한 인민이 굶어 죽었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확인해볼 수 있다. 나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그때마다 목에 붉은 띠를 두른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생들이 군가를 부르며 행군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배고픔을 강인한 정신력으로 견디기 위한 말 그대로 ‘고난의 행군’이었던 것이다.

 1998년 김정일은 이른바 ‘선군정치’(Military-First Politics)를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그러자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는 더욱 강화되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많은 나라들도 미국의 정책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미국의 경제제재에 굴복해서 미국의 뜻에 순순히 따를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 북한은 정치체제의 ‘정통성’(legitimacy)의 기반을 경제적 부가 아니라 주체사상이라는 이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의 경제제재를 통해서 북한의 경제적 기반이 훼손되더라도 주체사상이라는 정통성의 기반은 거의 훼손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미국이 대북 경제제재를 통해서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책이 지금까지 실패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도 미국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경제제재를 지속적으로 강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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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김정일은 경제난 돌파와 체제 강화를 위해 ‘선군정치’를 본격 시행하고 나섰다. 2010년 8월2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선군혁명영도 시작 50주년 기념 선군절’도 제정했다. 사진은 2005년 선군정치연구소조의 선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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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식량무기가 핵무기보다 더욱 잔인한 무기”라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국제정치학에서 핵무기는 전쟁 수단이 아니라 외교적 협상 수단으로 이해한다. 핵무기의 엄청난 파괴 능력이 오히려 실제 사용을 제한하는 역설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사용하는 식량무기는 매일 먹어야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인간의 생존을 직접적으로 위협한다. 실제로 1990년대 미국이 주도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이라크 경제제재는 13년간 지속되었는데, 그로 인해 5살 미만의 어린이 약 50만명이 굶어 죽었다. 또한 2018년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의 한 조사보고서를 보면 미국 주도의 대북 경제제재로 약 6만명의 어린이가 굶어 죽을 지경에 처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부모는 이미 굶어 죽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실제 희생자는 6만명을 훨씬 넘어설 수밖에 없다.
나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한의 한 탁아소를 방문했다가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다. 그때 나를 안내하는 북한 관리들에게 이들의 부모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모두 죽었다고 답해 주었다. 생각해 보라. 굶어 죽어가는 자식을 둔 부모는 자신이 굶어 죽는 그 순간까지 마지막 남은 음식을 자식에게 모두 주지 않겠는가? 그때 탁아소에서 굶어 죽어가던 어린아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모습이라고 믿는다. 나는 북한 관리들과 함께 숙소로 돌아왔지만 참담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죽어가는 아이들의 처참한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방문을 조용히 걸어 잠갔다. 이어서 나보다 키가 두배 가까이 큰 북한 관리들 앞으로 다가갔다. 나는 키가 작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나보다 키가 작은 사람을 딱 2명 봤는데, 박정희와 덩샤오핑(등소평)이 그들이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그들의 얼굴을 쏘아보면서 온 힘을 다해 주먹으로 쳤다. 그들의 안경이 땅에 떨어졌다. 나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너희들 ‘배때기’는 이렇게 멀쩡한데,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탁아소의 아이들이 저렇게 죽어가느냐!” 그러자 북한 관리들이 곧바로 나를 부둥켜안았다. 우리는 다 함께 방바닥에 쓰러져 흐느껴 울었다. 아무리 울어도 서러움이 가시지 않았다.
지난 2월 북-미 2차 정상회담에서 트럼프(왼쪽) 대통령은 김정은(오른쪽) 국무위원장의 ‘경제제재 일부 해제’ 요구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2월28일 하노이의 메트로폴 호텔에서 열린 이틀째 확대회담의 결렬 직전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지난 2월 북-미 2차 정상회담에서 트럼프(왼쪽) 대통령은 김정은(오른쪽) 국무위원장의 ‘경제제재 일부 해제’ 요구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2월28일 하노이의 메트로폴 호텔에서 열린 이틀째 확대회담의 결렬 직전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김정은은 지난 2월28일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미국에 ‘유엔 제재의 일부, 즉 민수경제와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는 항목의 해제’를 요구했다. 김정은의 요구는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 인민의 실상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는 김정은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미국 의회에서는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의 결렬을 환영하면서 북한의 인권 탄압 등의 이유로 경제제재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의 경제제재로 6만명에 이르는 북한의 어린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 미국이 그토록 강변하는 ‘인권’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가?
나는 조지아대학에 재직하면서 수십년에 걸쳐 인권 문제를 연구했다. 대학원에 인권 과목을 개설해서 수십년간 강의를 했고, 1995년부터 ‘국제문제연구소’(Center for the Study of Global Issues, GLOBIS)를 만들어 강의실 밖의 인권 문제를 연구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인권을 외교정책의 의제에 포함시킨 지미 카터와 수십년에 걸쳐 인권 문제를 토론하면서 나름의 인권 개념을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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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 교수는 1995년 조지아대학에서 ‘국제문제연구소’(GLOBIS)를 세워 ‘북한 포럼’을 여는 한편 강의실 밖 인권 문제 연구와 해결 방안을 주도적으로 모색해왔다. 조지아대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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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공부한 시각에서 보면 미국의 ‘인권 개념’에는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국가들의 가치관과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은 인류 보편의 가치가 아니라, 미국을 포함한 승전국의 제한된 시각을 반영한 특수한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또한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북한도 북 나름의 인권 개념을 보유하고 있다. 내가 볼 때, 미국과 북한의 인권 개념은 각각 장단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인권은 미국이 독점한 것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볼 때 인권은 크게 3가지 원칙에 기초를 두고 있다. 
첫째, 천부권(universalism)이다.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면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미국에는 인권이 있고, 북한에는 인권이 없다는 식의 얘기는 성립할 수 없다. 
둘째, 양도 불가능성(inalienability)이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권리로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셋째, 공동 책임성(entitlement)이다. 예컨대 평양에서 아이가 굶고 있으면 아이의 책임이 아니라 나의 책임으로 느끼는 것을 말한다.

또한 나는 천부권, 양도 불가능성, 공동 책임성에 기초를 둔 인권은 크게 6가지 차원으로 구성되었다고 본다. 
첫째, 생존권(life right)이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할 권리로서 인권에서 가장 중요한 차원을 차지한다. 
둘째, 귀속권(belonging right)이다. 인간이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삶을 영위할 권리다. 
셋째, 평등권(equality right)이다. 인간이 어떤 이유로도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다. 
넷째, 선택권(choice-making right)이다. 개인이나 집단이 어떤 가치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다. 
다섯째, 사랑권(love right)이다.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예컨대 남자와 여자는 각자의 가정에 소속되어 있다. 가정의 권위를 생각하면 중매결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의 권리는 부모가 결정할 수 없다. 그래서 바로 그 남자와 여자에게 소중한 권리다. 또한 이산가족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권리도 사랑권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섯째, 해방권(liberation right)이다. 인간이 시간과 공간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종교적 해방 내지 해탈을 의미한다. 
인권은 이상의 6가지 차원을 모두 충족할 때 완전히 실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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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의 인권 개념은 1948년 12월10일 유엔에서 발표한 ‘세계인권헌장’에 담겨 있다. 박한식 교수는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잣대를 북한에 적용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유엔의 1950년 세계인권헌장 제정 2돌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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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인류 보편의 가치로 강변하는 인권 개념의 구체적 모습은 1948년에 제정한 ‘세계인권선언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세계인권선언문 제1조에서는 모든 인간의 천부적 자유(free)와 평등(equal)을 동시에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는 자본주의의 키워드이고, 평등은 사회주의의 키워드이다. 따라서 양자는 이론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그런데도 세계인권선언문 제1조에서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규정한 것은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의 욕망을 동시에 충족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자본주의 국가 미국의 자유와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평등을 단순히 병치시킨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이 역설하는 인권 개념은 인류 보편의 가치가 결코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미국의 인권 개념은 내가 분류한 인권의 6가지 차원 중에서선택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면서 구성되었다. 미국이 중시하는 선택권이란 결국 정치적 자유를 의미하며, 그런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민주주의 체제를 요구한다. 그러나 미국의 인권 개념은 내가 분류한 인권의 6가지 차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생존권’을 경시하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미국이 자국의 가혹한 경제제재로 수많은 북한 어린이들이 굶어 죽을 처지라는 명백한 사실을 철저히 외면하고 북한의 인권을 끊임없이 비판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요컨대 미국은 경제제재를 통해서 북한 인민의 생존권이라는 인권을 무자비하게 유린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선택한 북한은 국가의 주권을 개인의 인권보다 우선시한다. 국가의 주권이 보장되어야만 개인의 인권 또한 보장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의 인권 개념은 미국의 인권 개념에서 강조하는 ‘선택권’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북한의 인권 개념은 내가 분류한 인권의 6가지 차원에서 ‘생존권’ ‘귀속권’ ‘평등권’을 대단히 중시하는 방향에서 구성되었는데, 이 3가지 권리는 모두 미국의 인권 개념에서는 취약한 양상을 보인다.
위와 같은 분석에 따른다면, 미국이 신봉하는 인권 개념과 북한이 신봉하는 인권 개념은 모두 상대적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이 신봉하는 인권 개념으로 북한을 아무리 강력하게 비판한다손 치더라도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 없다. 북한은 미국과 전혀 다른 인권 개념을 신봉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아랍권의 이슬람교를 비판한다고 해서 그 비판이 아랍권에 먹힐 수 있겠는가?

미국이 북핵 문제의 해결을 위해 그토록 장기간 노력했는데도 지금까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궁극적 까닭은 미국이 당연시하는 ‘사유양식’(modes of thought)에서 자리하고 있었다. 미국은 자국에 친숙한 인권 개념으로 북한을 규탄하면서 경제제재를 강제하면 북한이 굴복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런 기대는 지금까지 실현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북한을 악마로 간주하면서 끝없이 압박하고 위협하는 대신, 그래서 수없이 많은 북한 인민을 ‘생지옥’으로 몰아넣는 대신, 미국한테 친숙한 사유양식 그 자체를 혁신하는 노력을 경주해야만 한다. 그래서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정책을 새롭게 입안해서 실천해야만 할 것이다. 미국이 굶어 죽기 직전에 있는 북한 어린이의 ‘인권’을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말이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 구술정리 박연진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90021.html#csidx36a9dd6f81d6e4aa2bfc7cb1d4e51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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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클린턴 행정부는 내게 자꾸 물었다…영변 폭격하면 어찌될까”

실제로 그때 카터가 김일성과 만나서 북핵 동결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면 클린턴 행정부는 영변을 폭격할 계획이었다. 그런 와중에 클린턴 정부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여러 차례 했다. “미국이 영변을 폭격했을 때 북한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한국에서는 요즘도 미국이 그때 영변을 폭격했다면 북핵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런 발언은 북한의 실상을 전혀 모른 채 오로지 북한에 대한 극단적 증오심에 기초해서 내뱉는 순진하고도 위험천만한 생각의 소산일 뿐이다. 나는 “미국이 영변을 폭격하면 북한은 반드시 보복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면 북한이 어떤 식으로 보복할 것으로 보느냐고 나에게 다시 질문했다. 이에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주한 미군기지, 주일 미군기지, 괌 주둔 미군기지 등을 폭격할 것이다”, “미군기지 주변에는 많은 민간인도 살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북한이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폭격하면 수십만명의 인명이 살상될 것이다”, “미국은 반드시 국제사회에서 그 피해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져야만 할 것이다”.


1994년 카터의 방북으로 전쟁의 고비를 넘긴 ‘1차 북핵 위기’는 10월21일 ‘제네바 합의’로 일단락되었다. 북한이 핵개발을 동결하는 대신, 국제사회에서는 전력난이 심한 북한에 경수로 2기를 제공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의 유훈으로 맺어진 제네바 합의는 사실상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생명력을 잃은 셈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김일성 없는 북한이 3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미국도 제네바 합의 이행을 위한 예산 배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경수로 설비 비용을 모두 한국에 떠넘겨 버렸다. 한국 역시 제네바 합의를 이행하지 않았다. 그 뒤로 미국은 북한이 붕괴되는 날만 기다렸다.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라는 것도 바로 그런 발상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소비에트연방 붕괴 뒤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연달아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시간은 자기들의 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94년 카터의 방북으로 전쟁의 고비를 넘긴 ‘1차 북핵 위기’는 10월21일 ‘제네바 합의’로 일단락되었다. 북한이 핵개발을 동결하는 대신, 국제사회에서는 전력난이 심한 북한에 경수로 2기를 제공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의 유훈으로 맺어진 제네바 합의는 사실상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생명력을 잃은 셈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김일성 없는 북한이 3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미국도 제네바 합의 이행을 위한 예산 배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경수로 설비 비용을 모두 한국에 떠넘겨 버렸다. 한국 역시 제네바 합의를 이행하지 않았다. 그 뒤로 미국은 북한이 붕괴되는 날만 기다렸다.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라는 것도 바로 그런 발상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소비에트연방 붕괴 뒤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연달아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시간은 자기들의 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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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7월 김일성 사망에도 후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통치’에 따라 북미는 ‘제네바 합의’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 그해 10월21일 로버트 갈루치(왼쪽) 미 대북 특사와 강석주(오른쪽) 북 외무성 제1부상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북핵동결과 경수로 지원’ 등을 담은 합의문을 교환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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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북한은 지금까지 붕괴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북한이 지금까지 건재하다는 사실은, 수많은 정치인이나 연구 학자의 사유를 강력하게 지배해온 ‘북한붕괴론’이 현실 앞에서 반복적으로 ‘파산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한다.
북한이 무너지지 않은 까닭은 대략 5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는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에서 소련에 크게 의존해서 유지된 반면, 북한은 주체사상을 표방하면서 소련의 영향력을 자각적으로 배제하는 노선을 걸었다. 따라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는 소련이 붕괴하자 커다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북한은 그런 충격을 피할 수 있었다.

 둘째, 일반적으로 정치체제가 붕괴되려면 국민의 지지가 철회되는 이른바 ‘정통성 위기’(legitimacy crisis)가 벌어져야 한다. 그런데 북한체제의 정통성은 경제가 아니라 ‘주체사상’이라는 이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경제가 어려워도 체제의 정통성 위기가 곧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은 경제가 어려워지자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더욱 단합된 모습을 보였다. 
셋째, 정치체제를 붕괴시킬 수 있는 쿠데타가 발생하려면 쿠데타 세력끼리 공유할 수 있는 비밀정보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북한은 정보가 철저하게 통제된 나라이고, 또 모든 정보가 투명하게 유통되는 나라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비밀정보를 매개로 쿠데타 활동을 하는 것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넷째, 북한은 남한과 정통성 경쟁을 전개하면서 북한 체제의 정통성을 확보한다. 따라서 만일 남한이 없다면 북한은 정통성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다. 남한을 부정함으로써 정통성을 유지하는 방식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북한 특유의 패턴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주지하듯 동독은 서독에 흡수통일 되었다. 그러나 북한이 남한에 흡수통일 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동독과 북한의 사정이 판이하게 다르고, 서독과 남한의 사정이 판이하게 다르며, 동서독 관계와 남북한 관계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서독과 동독은 모두 독일 민족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강한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반면, 남한은 민족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감 내지 적대감을 갖고 있다. 요컨대 위에서 예시한 요건이나 상황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북한의 붕괴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내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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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6월18일 귀환한 카터(왼쪽)는 청와대로 김영삼(오른쪽) 대통령을 예방해 ‘김일성의 7월중 남북 정상회담 제의’를 전했다. 김 대통령은 조건 없는 수락을 발표했으나 김일성이 사망하자 ‘3개월 이내 북한붕괴론’을 장담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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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북한이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선군정치’(Military-First Politics)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선군정치를 군인이 인민을 착취하는 구조로 이해한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만일 선군정치가 그런 시스템이었다면 북한은 벌써 붕괴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군정치는 이른바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에, 냉전이 종식되면서 사회주의 우방국의 경제적 지원이 거의 끊어진 시절에, 특히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제재가 북한의 숨통을 강력하게 옥죄던 시절에, 요컨대 북한이 철저하게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더 이상 생사를 기약할 수 없을 때, 오로지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처절한 생존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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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 교수는 1994년 7월 김일성의 사망 이래 지금껏 ‘북핵 문제’ 해결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북한 붕괴론’은 체제의 근간인 ‘주체사상’과 ‘선군정치’를 무시한 허상이라고 지적한다. 북한 노동당에 ‘주체사상’ 선전 포스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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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인민 생활이 경제적으로 극심한 어려움에 봉착할 때면 군이 나서서 해결해 주고자 했다. 그래서 농경지에 나가서 일하는 사람의 90%가 군인이었다. 동네마다 군인이 인민을 돕는 사무소도 있다. 인민의 집에서 수도꼭지가 고장 나면 군인 사무소로 전화해 도움을 청한다. 그러면 군인들이 와서 고쳐준다. 군인들은 인민이 봉착하는 각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문지식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군인이 인민을 도와주면 인민은 자연히 군에 대한 충성심을 갖게 된다. 모든 인민의 아들과 딸은 군에서 10년간 복무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군인이 인민을 돕는 선군정치가 시행될수록 군인과 인민은 자연스럽게 일심단결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과 미국에서는 전쟁이 나면 휴가 나온 군인은 곧바로 군부대로 복귀해야 한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전쟁이 나면 군인은 자기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서 가족을 지키는 일을 담당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전쟁에 참여하는 목적은 전투 고지를 탈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고향 동네를 지키고, 그곳에 사는 자기 가족을 지키는 것이다. 가족을 위해 싸운다면 누구나 목숨 걸고 싸우지 않을 수 없다. 심장에서 나오는 충성심이 발휘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김일성의 훈시였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사회과학연구소 특별연구원, 구술정리 박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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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88235.html#csidxcb84a9451d8031db82267fea8e3c6f3 

[45] “한반도 평화해법 제시하겠다”

일제강점기 경북 지역에서 하얼빈으로 이주한 유민집안에서 1939년 태어난 그는 유년기 시절 해방의 혼란과 한국전쟁의 참상과 서울대 정치학과 시절 ‘4·19혁명’을 겪으며 ‘평화’를 인생의 과제로 삼았다. 1965년 미국 유학을 떠난 그는 “통일의 길을 찾을 때까지 귀국하지 말라”는 부친의 유지에 따라 반세기 넘게 한반도 문제 연구에 천착해 독창적인 ‘평화학’을 개척했다. 애초 ‘주체사상’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 그의 북한 연구는 ‘창시자’를 자처한 황장엽은 물론이고 김일성대학 등 북한 학자들을 대상으로 강의와 토론을 할 정도로 객관적인 시각을 인정받고 있다.
더 나아가 그는 학자를 넘어 남-북-미를 잇는 ‘평화의 중재자’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1994년 1차 북핵 위기를 극적으로 해결한 ‘카터 북한특사’ 제안을 비롯해 그는 국제정치 무대의 막전막후에서 전쟁 위협으로부터 한반도를 지켜내는 ‘평화 수호자’ 노릇을 자임해왔다. 2010년 그는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모교인 애틀랜타의 모어하우스대학에서 주는 ‘간디·킹·이케다 커뮤니티빌더상'을 받으며 국제적인 평화운동가로도 인정받았다.
<한겨레>는 지난 수개월에 걸쳐 박 교수와 필자인 이현휘 제주대 사회과학연구소 특별연구원의 인터넷 통신망을 통한 구술 인터뷰를 진행해왔다. 김정은-트럼프의 2차 북미정상회담 중단 이후 북핵 문제는 또다시 중대한 고비를 맞고 있다. 팔순의 원로학자가 열정적으로 풀어놓는 ‘북한 탐구 비사’와 ‘한반도 평화 해법’을 격주로 한 차례씩 소개한다. 김경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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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86355.html#csidxdd0685aedae845db6d5c4759337359b 

[46] “클린턴 ‘카터 평양행’ 돌연 승락하자 김영삼도 급선회했다”

카터는 방북 수속을 밟는 와중에서 나에게 북한에 함께 가자는 제안을 했다. 자신은 북한 내부 사정을 잘 모르니까 북한에 함께 가면서 자신이 꼭 알아야 할 사항을 설명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 역시 카터와 동행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내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한국사람이다. 또 미국 시민권자이기도 하다. 그럼 북한에 가서 카터 옆에 앉아야 할까? 그렇게 되면 결국 ‘이완용’처럼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김일성 옆에 앉을 수도 없는 일 아니겠는가? …” 그런 고민을 밤새도록 하다가 결국 방북을 포기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 대신 약 40쪽 분량의 북한 브리핑 자료를 작성해서 카터에게 주기로 약속했다. 나는 워낙 몸이 약해서 밤을 지새우면서 작업하는 일은 평생토록 하지 못했다. 그러나 카터에게 제공할 브리핑 자료만은 밤을 지새우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작성했다. 카터의 치밀한 성격을 고려하면 아마 그 자료를 거의 암기하고서 북한에 들어갔을 것이다.
1994년 6월15일 ‘방북 특사’ 카터는 판문점을 통한 육로 방북으로 또한번 세계적인 화제를 낳았다.  군사분계선을 넘기 전 남쪽 환송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카터(맨왼쪽)를 동행할 보인 로잘린(오른쪽 둘째)과 제임스 레이니(맨오른쪽) 주한 미대사가 지켜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4년 6월15일 ‘방북 특사’ 카터는 판문점을 통한 육로 방북으로 또한번 세계적인 화제를 낳았다. 군사분계선을 넘기 전 남쪽 환송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카터(맨왼쪽)를 동행할 보인 로잘린(오른쪽 둘째)과 제임스 레이니(맨오른쪽) 주한 미대사가 지켜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카터가 비행기를 타고서 태평양 상공을 날아가고 있을 즈음 정종욱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정종욱과 나는 서울대 정치학과 동창이다. 김영삼 정부에서 카터의 방북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카터와 가까이 지내는 내가 카터의 방북을 막아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 나는 카터를 태운 비행기가 이미 떠났다고 답했다.
그러자 청와대는 계획을 수정해서 내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카터가 평양에 앞서 서울을 먼저 방문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아울러 카터가 김일성을 만나면 청와대의 ‘남북정상회담’ 제안을 전달해 달라고 그랬다. 나는 청와대의 제안을 카터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카터는 타고간 비행기로 평양에 직행하는 대신, 서울에서 도보로 38선을 건너서 북한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결국 카터는 한국·북한·미국의 양해를 얻어 자기의 뜻을 실현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랄 일이었다.
집필/이현휘 제주대 사회과학연구소 특별연구원, 구술정리/박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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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86342.html#csidxbc191c22b9a837884cbc810b91c437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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