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28

손민석 최장집의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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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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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을 왜 지우셨지? 링크를 걸려고 해도 안돼서 공개글로 올립니다. Lee Joungsuk 님 혹시 보시면 댓글 달아주세요.. Lee Joungsuk님이 제게 왜 최장집의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이 최장집의 책 중에 가장 괜찮다고 생각하는지를 여쭤보셔서 저도 나름 생각을 정리해 글로 적다보니 오래 걸렸습니다.. 그 사이에 댓글을 지우셔서..ㅠ Lee Joungsuk님은 <한국 현대 정치의 구조와 변화>가 낫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은데 저는 그 책보다는 역시나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이 좋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니 별것도 아닌 걸 괜히 상찬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민망스럽습니다만 제 나름대로의 이해를 서술해보겠습니다. 저는 최장집 교수가 두번에 걸쳐서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대한 심대한 이론적 개입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더 정확하게는 말씀하신 <한국 현대 정치의 구조와 변화>(까치, 1989. 이하 <구조>)와 <한국 노동운동과 국가>(요걸 까먹었습니다만 논지는 동일합니다)까지 합쳐서 3번 정도라 할 수 있다고 보기는 합니다만 보다 주요한 저서는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이하 <이론>)이라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최장집 교수의 학술적 문제의식은 한국에 어떻게 민주주의가 정착될 것인지에 대한 조건 탐구라 생각합니다. 그 맥락 속에서 권위주의적 국가의 해체 및 민주주의의 정착을 다루고 있다고 저는 생각하는데요, 이 연장에서 이론적 개입을 크게 3번 했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로 <구조>의 경우에는 1987년 이후의 상황을 개괄하면서 한국이 제5공화국에서 제6공화국으로 변모하였는데 여전히 군부 세력의 한 축이라 할 수 있는 노태우의 집권 시기를 어떻게 이론화 할 것인지를 그람시의 이론을 소개하면서 이론화하려는 작업을 행했다고 봅니다만 제 기억으로 그 책에서는 앞으로의 분석틀을 주조하기 위한 그람시의 소개가 주라고 생각됩니다. 이 지점에서 최장집은 민중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대의제 정치에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이유는 아래서 설명드리겠습니다.

 두번째부터는 정말로 한국 민주주의를 이론화하는 것을 넘어서 구체적인 분석과 비평으로 이어지며 이론적 개입을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게 제가 보기에는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입니다. 1993년에 출간되고 1996년에 재간되었나요? 아무튼 그 시점에서 나왔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제5공화국에서 제6공화국으로의 이행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최장집은 네오 마르크스주의, 종속이론, 세계체제론, 풀란차스, 오도넬 등의 다양한 이론가들을 언급하고 소개하면서 한국 민주주의를 분석할 이론적 틀을 주조합니다. 그 이론적 틀을 통해서 한국의 제6공화국의 민주주의 수준을 가늠해보는 작업을 행합니다.

 그에 따르면 한국 민주주의의 수준은 최장집이 보기에 형식적 민주주의의 형태에 지나지 않는, 실질적 민주주의에 미달하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최장집에 의하면 한국은 발전국가이면서 동시에 관료집단이 경제개발을 이끌어낸 '권위주의적 국가' 혹은 '과대성장 국가'로 개념화가 됩니다. 이러한 개념화에는 국가의 과대성장이 낳은 "국가영역의 자율성"에 대한 최장집의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2장에서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18일>에 대한 이론적 분석이 이뤄집니다. 그 책이 계급투쟁 속에서 어떻게 국가가 점점 자율성을 얻으며 보나파르트를 황제로 만들어가는지, 그러니까 국가의 전제적 지배가 가능해지는지를 분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국가의 자율성에 대한 이론적 관심은 풀란차스 등의 네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과 최장집의 민주주의론 간의 접점을 만들어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당대의 좌파, 운동권 등의 한국 진보세력이 주장하는 경제적 토대의 상부구조=정치에 대한 우위성을 비판하려는 맥락입니다. 그 맥락 속에서 경제적 토대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부르주아의 지배가 시민사회 내에서의 헤게모니 창출에 기반하는지, 그람시적 언어로 '진지전'에 해당하는 영역에서 어떻게 국가의 자율성을 침식해야 하는지를 고민합니다. 즉 최장집이 보기에 한국의 근대국가는 권위주의적 성격이 다분한 과대성장 국가 - 폭력국가의 특질을 강하게 품고 있으며 조선일보 등의 언론매체를 통해 지역주의 등의 지배 계층의 헤게모니가 강고하게 작동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앞서 말했듯이 첫번째 책에서는 대의제적 정치에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변화가 생겨납니다. 제가 알기로 최장집은 특이하게도 국가 - 정치사회 - 시민사회로 정치의 영역을 나눠서 이해합니다. 제가 그람시를 안 읽은지가 오래돼서 가물가물합니다만 그람시가 정치사회라는 개념을 썼는지 헷갈리는군요. 시민사회를 둘로 나눴던 것 같기는 한데 아무튼 최장집도 그 독법을 이어받았는지 국가와 시민사회(=경제생활의 영역) 사이에 정치사회를 끼워넣습니다. 여기서 그람시적 의미의 좌파 헤게모니가 작동할 계기가 생겨나는 것이지요. 이 영역에서의 헤게모니의 쟁투, 정당의 발전 등이 민주주의의 기초인데 당대의 좌파, 운동권 등은 이 영역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지점을 비판하기 위해서 많은 이론적 자원을 끌어오는 것입니다. 비록 부족하지만 대의제를 통한 변혁의 가능성을 읽어냈던 것입니다. 이론적인 변화이지요.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좌파들의 이론적 인식의 부족은 한국 민주화를 중산층을 노동자 세력과 분리되게 만듭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최장집이 보기에 중산층은 노동자 계급과 민주주의의 확대라는 차원에서는 의견을 같이 하지만 투표권의 확보라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쟁취 이상으로 나아갈 생각까지는 없었습니다. 쉽게 말해 경제적 토대로서의 자본주의적 생산영역 자체까지의 민주화를 의미하는 실질적 민주주의의 진전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군부 세력과의 타협 속에서 1987년 민주화가 이뤄졌다고 봅니다. 그런데 노동운동 중심의 좌파, 운동권, 노동자 계급 등은 이 지점에서 새롭게 창출된 영역을 이용해 중산층을 끌어오지 못하고 되려 분리되게 되어버립니다. 그 결과 실질적 민주주의의 진전도 없고 중산층이 이탈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거리에서의 투쟁, 노동자 대투쟁으로 대표되는 사회운동으로만 나타났다고 봅니다. 그리고 현실사회주의 패망 속에서 사회운동 또한 몰락하게 되지요.
 최장집은 이런 상황을 앞서 말한 정치사회 영역의 탄생이라는 계기를 헤게모니 이론 등의 좌파적 정치이론을 동원해 해석하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대의정치를 통한 변혁,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 등을 추진합니다. 그러면서 최장집의 입장도 다소 온건해집니다. 정치적 가능성이 생겨난 영역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점차 선회하기 시작합니다. 그 연장에서 1992년 대선의 실패를 논하는 걸로 기억합니다. 왜 실패했는가? 왜 실질적 민주화가 되지 않는가? 지역주의, 계층적 불균형 등이 왜 계속해서 반복되는가? 최장집의 이론적 문제의식, 그가 현재까지 쥐고 있는 정당정치의 활성화라는 문제의식이 완전한 형태로 주조되었기에 <이론>이 기념비적인 저작이 된다고 봅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한국의 근대국가에 대한 저자의 이해에서 얻은 바가 크기 때문에 좋아하고요.

 마지막으로 세번째가 아시겠지만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입니다. 노무현 정부 시기의 한국 민주주의를 비판적으로 독해하면서 실질적 민주주의의 진전이 이뤄지지 않는 이유를 법칙적으로 정립한 책이지요. 상당히 강력한 비판입니다. 물론 둘째와 셋째 사이에는 <한국 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이라는 <한국민주주의의 이론>에 비견될 정치비평서이자 이론서가 있기는 합니다만 큰 맥락에서 내용이 그리 다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중요한 건 첫번째 책에서 시작된 저자의 "한국 민주주의 정착의 좌절"이라는 문제의식이 한국 정치를 관통하는 하나의 '보편적 법칙'의 형태로 제시된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거치면서 기대 환희 실망 경멸이라는 한국 대의제 5년의 사이클을 일종의 법칙처럼 규정하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를 종합한 게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테제이지요.

 길게 말씀드렸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최장집의 이론서에서 가장 중요한 책을 꼽으라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보다는 <이론>이라 봅니다. 대의제 정치의 가능성의 출현을 마주하면서 한국 근대국가의 폭력과 강고한 보수주의 헤게모니 속에서 어떻게 균열을 낼 수 있는지 치열하게 고민했기 때문에 재밌습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사실 좀 최장집의 현타랄까요? 환멸이랄까요? 이런 것이 많이 반영돼서 재밌기는 하지만 중요성은 좀 떨어지지 않나 싶습니다. <이론>은 시대적으로도 현실 사회주의의 패망이라는 재앙적 상황에서 좌파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정당을 조직하고 정치사회에서의 헤게모니를 장악해 노동정치를 통한 실질적 민주화의 실현을 대안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훌륭한 것이지요. 
 이정도면 답이 되었을까요? 너무 길게 쓴 것 같습니다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최장집 민주주의론이 나타나는 이론적 분기가 되는 책이었다. 급하게 써서 정리가 잘 안됐습니다. 감안해주세요..

2 comments
Lee Joungsuk
와ㅎㅎ...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시니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설명해주신 점에 유의해서 [한국 민주주의론]을 다시 찬찬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몇 개월 공부할 꺼리를 주셨네요... 덕분에 맑시즘도 조금씩 공부를 하며. 진보 좌파와 정치 지형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민석님의 의향과 상관없이 예전부터 저 혼자 마음 속으로 지도교수로 모시고 있는데ㅎㅎ... 너무 많은 걸 배우고 있습니다.! 상세하고 친절한 답변에 다시 감사드립니다!
 · Reply · 8 h · Edited
손민석
쓰는 사이에 댓글을 지우셔서 조금 당황했습니다 하하. 전해져서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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