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관자. (2018). [메이지유신 발발 150주년] 메이지유신과 동아시아의 체제 변혁. 지식의 지평,
(24), 124-133.
1.개혁의 '결과'이자 내전의 '시작'인 메이지 유신
일본의 근대는 내전으로 시작해서 패전으로 끝났다. 메이지 유신은 단순히 하급 무사의 영웅적
지도력과 단결력으로 이루어진 쾌사만은 아니다. 우리는 메이지 유신의 성공 신화에 익숙하지
만 일본인들 중에는 '한'을 간직한 사람들이 많을 듯 하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학 주류에서는 자
국 내셔널리즘의 우월성이나 민중 투쟁사를 부각하는데 열중했고 한국과 중국에서는 일본의
아시아 침략사를 탓하기에 바빴다. 일본에 대한 동아시아 각국의 이해에서 일본의 내전과 전쟁
이 갖는 동시대적 의미는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 일본의 근대적 개혁은 1850년대 막번
체제에서 시작됐다. 아편전쟁을 목격한 막부는 번영과 양학 연구기관, 군사 훈련소를 설치하여
전국 각지의 하급 무사와 서민 인재를 수용했다. 양이파의 웅변에서도 서양 사정의 파악과 번
정 개혁에 주력했다. 가령 사쓰마번은 1855년 일본 최초의 증기선인 운코마루 의 운항에 성공
한다. 1858년 막부는 천황의 칙허 없이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개국부터 반대하는 양론
자들을 대량 숙청한다. 이에 존왕양이론자들도 막부 타도 운동과 양이 전쟁을 벌였다. 전쟁을
통해 열강의 힘을 확인한 양이 세력은 막부 타도를 명분 삼아 개국 정책으로 돌아섰다. 사쓰마
번은 영국에서 거꾸로 군항과 무기를 구입했다. 영국의 포로가 되었던 도모이아쓰도 오히려 영
국 유학을 요청한다. 귀국 후 그는 광산개발업에 성공하고, 금융업으로 오사카의 경제 건설을
주도했다. 난학과 양학의 중심지인 조슈번(야마구치)에서도 조슈 5걸로 불리는 인재들이 영국
유학 후에 유신 정부의 근대화를 이끌었다. 그중 이토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로우가 훗날 이본
의 헌정 체제를 이끌었다.
결국 메이지 유신은 개혁을 추진하던 막부와 웅번의 권력투쟁으로 이루어진 체제 변혁이다. 서
남 지역의 하급 무사들은 '왕정복고' 쿠데타에 성공했다. 마지막 쇼군은 통치의 정당성을 천황
에게 반환했지만 실질적인 통치권을 유지하던 상태였다. 통치권 탈환을 위한 서남의 웅번들은
1년 5개워 동안 동북 지역의 친막부군과 보신 전쟁을 벌였다. 이기면 관군이라는 일본어 표어
가 있는데, 막부군에 승리한 삿초(사쓰마+조슈)번이 왕정복고의 실질적인 승자였다.
무사들의 내전은 메이지유신 후에도 일어났다. 왕정복고를 알리고 메이지 정부와 수교하기를
청하는 외교문서를 조선에서 연겨푸 돌려보내는 사태가 반복되자 무례한 조선을 정복하자는
정한논쟁이 벌어졌다. 1873년 징병제의 실시로 불거진 무사들의 불만이 정한론으로 표출되기
도 했다. 그러나 신정부 수뇌부의 내치 우선론이 관철되자, 무례한 조선을 정복하자는 정한 논
쟁이 벌어졌다. 1873년 징병제의 실시로 불거진 무사들의 불만이 정한론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신정부 수뇌부의 내치 우선론은 관철되자 정한론자 600여명이 관직과 군부에서 사퇴하
고 재야로 흩어진다. 1876년 급여 폐지로 각지에서 '불평 무사'들의 반란이 이어지고 1877년 일
본 최후 최대의 내전인 세이난 전쟁이 일어난다. 세이난 전쟁은 '근대와 반근대의 결전'으로 해
논문자료
[논문] 조관자. (2018). [메이지유신 발발 150주년] 메이지유신과 동
아시아의 체제 변혁. 지식의 지평, (24), 124-133.
장호두
2018. 11. 27. 0:23
이웃추가
Orbis terrarum by Walker.Hodu.J
석되고 메이지유신 영웅으로서 반란군을 이끈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해서는 근대화
에 대한 반동성과 삿초 독재에 대한 혁명성이라는 양날의 해석이 공존해왔다.
약 8개월 간 전투 끝에 국민병이 세이난 전쟁에서 승리하자 사초의 번벌 독재에 반대하며 국회
설립을 요구하자 자유민권 운둥과 아시아주의가 확대된다. 대륙 낭인들의 뿌리도 결국 존왕양
이와 정한론에 있다. 1890년 헌법체제가 확립되고 제국의회가 개설된 후 청일전쟁과 삼국간섭
을 계기로 민권론이 국권론에 통합되면서 일본은 제국주의 팽창국가로 변모한다.
1960년대부터 소설가 시비료타로는 일본인의 문명화 의지와 국민적 통합을 이끌던 영웅들의
이야기를 써서 국민 작가로 등극햇다. '시바 사관'으로 불리는 그 역사관에서 1930년대 일본이
파시즘 국가로 이행햇다면, 막부 시대 말부터 러일전쟁까지 일본은 건전한 내셔널리즘을 자랑
한다. 그러나 2000년대 일본에서는 개국의 공적을 빼앗긴 도쿠가와 막부에 등장한 한도 가즈토
시의 막말사가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유신이란 용어도 사쓰마와 조슈의 승리자가 자신들의 폭
력혁명을 구폐어 일신, 대정어일신이라는 적폐 청산 이념으로 포장한 것이라고 한다. 시바의 소
설을 대신하여 보신전쟁 보신전쟁에서 희생된 아이즈번(후쿠시마)의 백호대(白虎隊: 16∼17세
소년병 부대)에 관한 이야기가 만화와 대하드라마, 연극으로 그려지고 게임의 소재로도 다루어
졌다.
메이지유신 50주년을 맞이한 일본의 서점가에서는 유신의 영웅들을 '개혁을 지연한 어리석은
무리','테러리스트'로 재해석하고 일본 근대사를 '거짓말'로 비판하는 책들이 즐비하다. 새로운
관점은 메이지유신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일본은 격심한 전쟁에 연루되지 않고서 평화적으로
근대화르 이루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들은 유신관료와 초망지사의 대륙 낭인을 모두 일본
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한 세력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새로운 시점이 균일하거나 전부 타당
하거나 역사 인식의 흐름을 바꾼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새로운 시점이 균일하거나 전부 타당하
거나 역사 인식의 흐름을 바꾼 것은 아니다. 다만 각 국의 국사가 이렇게 균열하는 가운데 미래
의 화해와 협력을 향한 동아시아의 역사도 만들어 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메이지유신-갑신정변-청일전쟁-삼국간섭
조일전쟁은 없었다. 그렇다면 왜 조선은 청일전쟁-러일전쟁의 전쟁터가 되었나. 그 이유는 '조
선-청-러시아의 왕권'과 '메이지유신을 수출-모방하려는 개혁 세력'의 대립에서 찾을 수 있다.
열강의 대립에 휩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이나 일본의 '침략 본능'만을 앞세운 역사 이해
는 어디까지나 '역사적 약자'에 머무르려는 변명처럼 들린다. 냉정한 역사 이해를 위해서는 동
아시아에서 일어난 체제 변혁의 역학, 그 중에서도 왕권과 체제 개혁파의 길항문제를 직시 할
필요가 있다.
메이지 일본의 입헌 군주제와 자주 독립의 실천은 조선과 중국의 개화 지식인들에게 체제 변혁
의 모델을 제공했다. 일본 자신도 서구 제국에 대한 열세 속에서 식민지화에 대한 위기의식을
늦추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과 중국의 근대화 개혁을 지원하여 아시아를 공동방위하고자 했다.
특히 부동항을 찾아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하여 일본은 한반도를 일본의 주권선 보호를 위한
이익선으로 굳혀갔다. 이 지역을 사수하기 위해 일본은 민관인 한 목소리로 조선의 자주 독립
과 대동합방이라는 아시아 연대론을 외쳤다.
임로군란(1882)을 계기로 청은 조선을 속국으로 간주했고 위안스카이의 군사가 개입하여 갑신
정변(1884)을 제압했다. 그러나 1880년대 초반 일본 정부가 조선 개화당을 정책적으로 지원할
가능성은 없었다. 헌법 제정과 의회 개설을 준비하던 유신 정부는 불평등 조약의 개정을 요구
하는 양이론과 자유민권 운동과 대결하기에도 벅찼다. 게다가 임오군란 이후 중국의 군제개혁
을 조사한 보고서에서는 청의 군사력이 서양제국과 겨룰 만큼 강하다고 판단했다. 비록 프라스
가 베트남 영유를 위해 청과 전쟁중이었지만 아직까지 일본이 청을 물리치고 조선을 독점 할
수 있는 형세는 아니었다.
1882년 김옥균은 처음 일본으로 건너가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김옥균
과 후쿠자와는 조선의 문명 개화를 통한 자주독립 노선에 의기투합하여 정변을 공모했다. 후쿠
자와의 부탁을 받고 이노우에 가쿠고로와 고토 쇼지로가 프랑스 공사의 함대를 빌리고 일본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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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당원들을 조직하여 조선에 보낼 계획을 세웠다. 이노우에는 조선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신
보를 박영효와 함께 간행했으며 고토는 유신 정부에 반대하여 저안론과 민권 운동을 펼친 정치
가다. 한편,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청프 전쟁을 기회로 조선의 친칭 세력을 억압하려
는 목적을 갖고 조선에 부임했다. 그가 김옥균을 지원하기로 한 약속으 배반했다고 알려졌지만
애초에 일본 정부가 청국과의 전쟁을 불사하면서 조선에 개화당 정권을 수립할 의지는 없었다.
여기에서 확인되듯이 일본의 유신 정부보다 유신 독재를 비판하던 민권론자들이 조선의 개혁
에 더욱 필사적이었다. 그들은 갑신정변 당시 청군의 개입을 수수방관한 정부 정책을 추궁했다.
후쿠자와도 청에 대한 공격을 주장했다. 신정부에 저항하여 농민 봉기를 지도한 오이 겐타로는
1885년 자유당 좌파로 불리는 낭인들과 함께 조선 자주의 격문을 발표하고 조선 지출을 시도
하다가 체포된다. 그들은 조선의 개혁과 일본의 자유민권운동을 연계하려 했다. 민권론의 뿌리
는 정한론에 있다. 이때 정복의 대상은 화이 질서를 신봉하는 구체제와 왕당파이다. 그렇다면
만일 일본 정부가 김옥균에게 차관을 제공하고 갑신정변을 군사적으로 지원했다면 청일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역사에서 가지 않은 길을 상상하는 능력은 미래 구상력과 연결되리라 본
다.
1889년에 헌법을 선포한 일본은 조선이 자력으로 독립을 유지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일본이 무
력을 행사해서 조선(일본의 이익선)을 방위한다는 방침을 세운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청군
이 투입되자 일본은 조선을 속국화하려는 청을 저지하고 자국의 '권리 이익'과 '동양의 평화를'
지키겟다며 전쟁을 시작한다. 러일전쟁에 반대한 무교회주의 기독교인 우치무라간조도 청일전
쟁을 욕망이 아닌 정의의 전쟁까지 옹호했다. 청의 간섭으로 '동양의 금성으로 기대되었던 조
선은 아직까지도 가려진 별의 하나에 불과하며 생산은 저조한 채 무거운 세금에 시달린다"라며
청은 조선을 종속시키고자 김옥균 암살을 방조한 "야만주의의 보호자"이다. 어찌하여 기독교
국가인 서구 제국이 청 정부를 방조하고 "세계의 우환을 지구에서 배제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가/"라며 일본의 의리를 피력했다.
선전포고문에서 이토 정부는 "어디까지나 국제법에 입각하여, 각각의 권능에 능하여 일체의 수
단을 다할 것"이라는 다짐과 조선은 일본이 "처음으로 계유하여 열국의 대오에 이르게 한 독립
국"이라는 자부심을 드러낸다. 미국이 일본을 국제법의 세계로 유도했듯이 일본도 조선을 개
항시켜 독립국의 지위를 부했다는 논지다. 이토 히로부미는 힘이 지배하는 국제법의 질서를 수
용하고자 했다. 청일전쟁의 강화조약을 비준한지 6일 만에 러시아의 주도로 프랑스와 독일이
합세한 삼국간섭이 일어났을 때에도 이토는 전쟁으로 돌파하자는 강경 여론을 잠재우고 일본
이 조차하기로 한 랴오둥 반도를 반환한다. 서구 제국과 겨룰 실력이 없는 상황에서 일본은 환
부금 4500만엔을 획득했다. 이토는 '굴욕외교'로 일본 내 '열혈 지사'들의 '애국적 울분'을 샀지
만, 러시아와 격돌에 대응할 실질적 태세를 준비하게 되었다.
갑오개혁-을미사변-러일전쟁-볼셰비키 혁명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하에서 갑오개혁(1894.07-1896.02)이 실시되었다. 친정파 왕군의 입장에
서 그것은 일본의 무력으로 강요당한 근대화였다. 반면 개혁파의 입장에서 그것은 신분제 폐지
등 조선 사회의 오랜 혁신 욕구를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그들에게는 조선의 완고한 구습을 철
폐하기 위해 메이지 유신의 경험과 일본의 지원이 필요했다. 하지만 삼국간섭으로 후퇴한 일본
정부는 조선을 공식적으로 지원할 처지가 아니었다. 결국 개화 세력은 친정,친러 세력과 벌인
권력 투쟁에서 실패했고 일본으로 망명하거나 목숨을 잃었다.
삼국간섭이 벌어지자 고종과 왕비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친일 개혁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탈환
한다. 이에 반발한 일본의 낭인과 군부가 왕비를 시해한다. 조선의 백성들에게는 수치스러운 모
욕과 천인공노할 충격이었다. 그러나 사건에 얽힌 정치적 함의와 갈등 간계는 단순하지 않다.
조선에서는 민씨 일족의 패궝네 반발한 흥선대원군과 유길준, 이미 망명중이던 박영효가 협력
자로 지목되었고 재판으로 처형된 자들도 나왔다. 을미사변으로 피신한 망명객 중에는 "씨 없
는 수박"으로 알려진 우장춘의 아버지로 갑오개혁의 핵심 기관인 군국기무처의 무관 우범선도
있엇다. 그도 조선의 자객에게 암살당한다. 여러 정황에서 친러 세력들을 물리치려던 개화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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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측의 권력의지가 드러난다. 따라서 을미사변은 일본의 반러시아 책략하에서 일
본 낭인이 행동대원으로 나선 한일합작의 정변으로도 해석 할 수 있다.
청일전쟁은 당시 일본은 조선 친일 개혁 정권을 세움으로써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 제국에 대하
여 일본의 강역을 방위하고자 했다. 1945년 미국이 패전국 일본을 점령한 상태에서 민주화 정
책을 추진하고 일본이 아시아의 반공 기지로 역할을 하기 원한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다. 만일
갑오개혁이 성공했더라면 조선과 일본, 영국과 미국이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견제하는데 성공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랬다면 러시아는 자본주의 시장에 편입되고 1905년 혁명과 볼셰비키 혁
명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랬다면 세계사에서 좌우 세력이 폭력적으로 대결하
고도 한반도가 분단되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역사에 가정법은 없다. 만약 가지않은 길을 상
상하며 내일의 변화를 궁리하는 것도 역사 공부의 한 방법이리라.
러시아는 1902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 사이에 시베리아 철도를 개통했고 1903년
5월 압록강 아래 용암포에 군사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궈난과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권한을 서로 인정하지만 '만한 교환론'을 재차 러시아에 제안
한다. 그러나 아관파천 이후 고종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온 러시아가 한반도 내 권한을 일본에
양보할 리 없다. 10월에 러시아가 일본의 제안을 공식적으로 거절하자 1904년 2월 8일 일본은
인천에 정박중이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고 뤼순 기지로 향했다.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러일전쟁으로 차리즘이 붕괴할 것이라고 환영했다. 그에
따르면 러일전쟁은 신구부르주아 국가들 간의 식민지 쟁탈전으로, 정치적으로 자유로워 급속
한 문화적 진보를 이뤄 오고 있는 인민의 나라인 일본이 승리했다. 다만 전쟁을 시작하고 패배
한 것은 "러시아 인민이 아니라, 전제다. 러시아 인민은 전제의 패배로 이익을 얻었다. 레닌은
(러시아가)패배할 경우, 전쟁은 무엇보다 먼저 정부 체제 전체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며 러시아
의 자유를 구하는 사업과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러시아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전
제주의 체제의 군사적 패배에 극단적으로 강하게 의존하고 있다고 보았다. 볼셰비키는 전쟁을
혁명의 방법이자 역사적 진보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인민의 희생보다 체제 붕괴의 효과
를 중시했다. 실제로 1905년 1월 7일 뤼순이 일본에 함락한 후 러시아에서는 1월 9일 피의 일
요일 사건이 일어났다. 전제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은 전함 포튬킨 반란 사건, 총동맹 파업으로
이어지며 1905년 혁명이 일어났다.
아시아에서는 구체제의 변혁은 또다른 전쟁과 혁명, 정치적 지배와 사회적 모순으로 이어졌다.
그 와중에 서구 제국과의 적대적 대립을 절대시하며 아시아 해방 전쟁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좌
우익에서 공통으로 일어났다. 일본의 전향 좌파들은 전쟁을 혁명의 기회로 삼는 레닌의 전략에
따라 중일전쟁을 일본과 아시아 혁명의 계기로 간주하며 전쟁에 협력했다. 아시아 침략을 반성
하는 일본인들도 중일전쟁으로 중국 국민당이 쇠퇴하여 마오쩌둥이 승리 할 수 있었다고 생각
한다. 일본만이 아니라 곳곳의 좌익과 우익이 전쟁을 혁명과 해방의 진보적 계기이자 선순환의
과정으로 긍정한 사례는 확인된다. 마오쩌둥의 중국 혁명에서도 한국 분단과 한국전쟁의 과정
에서도 폭력의 정당화는 지속되었다. 그 혼란기를 거쳐서 인류는 모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서로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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