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04

[신년 특별기획 - 조총련 대해부] 1편- 조총련, 그들만의 세상



[신년 특별기획 - 조총련 대해부] 1편- 조총련, 그들만의 세상



[신년 특별기획 - 조총련 대해부] 1편- 조총련, 그들만의 세상
오사카-노정민 nohj@rfa.org
2018-12-31



도쿄 조총련 중앙본부 건물
RFA PHOTO/ 노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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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과거 재일 동포 열 명 중 여덟 명이 가입할 만큼 탄탄한 조직을 자랑했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조총련은 오늘날 비현실적 사상과 조직운영, 일본인 납치 문제 등으로 존폐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조총련에 회의를 느낀 대부분 재일 동포가 조직을 떠나면서 미래도 불투명하지만, 여전히 그들만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조총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와 배경은 무엇일까요?

RFA 자유아시아방송, 신년 특별기획, ‘조총련 대해부’.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조총련, 그들만의 세상’ 편입니다, .

노정민 기자가 보도합니다.

- 코리아타운 내 조총련계, 규모 축소되고 정체성도 숨겨

- 조총련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생계 지장 있을까 우려

[현장 ACT: 오사카 코리아타운]

일본 오사카시 이쿠노구에 위치한 코리아타운.

흥겨운 한류 음악이 흘러나오는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양옆에는 한글(조선어)과 일본어 간판을 단 상점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상점에서 파는 물건은 생필품부터 김치, 건어물, 라면 등 한국 식품, 그리고 한류를 대표하는 각종 연예인 상품과 화장품까지 다양합니다.

상점마다 물건 앞에 한글로 써 놓은 안내문이 눈길을 사로잡고, 일본어와 한국어를 구사하는 상인들이 친절하게 손님을 맞이합니다.

이곳 코리아타운에는 한국에서 온 이민자와 재일 동포 2세∙3세도 있지만,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즉 조총련 소속 동포들도 일하고 있습니다. 코리아타운의 전체 구성원 중 약 20%를 차지하는 조총련계는 김치 장사나 음식 판매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자신이 조총련계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코리아타운의 식당에서 일하는 이미은 씨는 조총련계 재일 동포들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것은 물론 일반적인 교류도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또 본인 스스로 조총련에 대한 불편한 마음도 숨기지 않습니다.



[기자] 이곳 코리아타운에 조총련계 분들도 계시죠?

[이미은 씨] 네. 있는데 말을 안 하죠. 서로 대화도 안 하고, 안 물어보고. 불편하니까 안 하는 거죠. 들은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납치 문제도 있고, 다른 경로를 통해 강요당할 것도 같고...

조총련계 상인들이 스스로 자신을 밝히지 않는 이유는 주변 시선에 대한 부담감 때문입니다. 실제로 일본 사회에서 조총련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많기 때문에 한 명의 손님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을 감출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일본 조선대학교 조총련 최고학부의 교원을 지낸 코리아국제연구소의 박두진 교수는 지금도 조총련의 규모는 계속 축소하고 있으며 일본 사회에서 스스로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박두진 교수] 재일 동포들도 일본 분위기의 영향을 받거든요. 일본 사람을 상대로 장사를 하니까요. 그런데 ‘이 가게는 조총련과 친하구나’라고 인식이 되면 손님 한 명이라도 빠져나갈 수가 있단 말이죠. 그만큼 조총련에 대한 일본의 민심이 나쁘다는 겁니다. 핵 문제도 있고, 납치 문제도 있고, 인권 문제도 그렇고… 그러니 가능하면 자신들을 좀 감추려고 하는 거죠. 특히 장사하는 사람들은.

오사카에서 매년 조총련과 한국계 민단 사이에 교류 협력 사업을 진행하는 ‘원코리아 페스티벌’의 정갑수 대표도 도쿄는 물론 오사카에서 조총련의 규모가 많이 축소됐다고 진단합니다.

1960년대에 오사카시 이쿠노구에만 약 4만 명의 재일 동포가 살았고 이중 절반 이상이 조총련계였지만, 지금은 거의 없어졌다는 겁니다. 대부분 조총련에서 탈퇴했는데, 일본인 납치 문제가 결정적이었습니다.

[정갑수 대표] 특히 납치 문제. 일본 사람을 납치했다고 김정일이 인정하고 사과했잖아요. 그때부터 조총련계 사람들이 충격을 많이 받고 실망했죠. 그래서 많이 나갔어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믿었고, 북한이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본국이 인정했으니까요. 그때 내가 아는 사람도 충격을 받아서 밤새 울었다고 해요.

- 경제적 이민 선택한 재일 동포, 해방 직후 사회주의 열풍 업고 조총련 가입 급증

- 조총련 결성 이후 김일성 우상화·납치 문제 등으로 조직 급격히 쇠퇴


해방 직후 일본에는 약 60만 명의 재일 동포가 살았습니다. 경제적으로 더 나은 기회를 얻기 위해 바다를 건너 일본에 정착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재일 동포들은 생활기반이 약해 가난했고, 일본 사회의 차별도 심해 같은 조선인들끼리 협력하고 의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당시 재일 동포 사회에는 식민지 과정을 거치면서 좌파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많았고, 전 세계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상당한 힘을 가졌던 시기였는데,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대체한다는 역사관이 팽배해 공산주의자들이 좋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또 재일 동포들은 한 나라에서 하나의 당 외에는 인정할 수 없다는 공산주의 국제연합(코민테른)의 원칙에 따라 일본 공산당원으로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1955년 5월 25일, 일본 공산당이 아닌 북한의 조선 노동당에 소속돼야 한다는 명분 아래 민족파 출신인 한덕수를 중심으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즉 조총련을 결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60만 명의 재일 동포 중 80%(40만 명)가 조총련에 가입할 정도로 조총련 조직은 1970년대까지 크게 발전했습니다.

아버지가 조총련계였고, 자신도 오사카 조선 고급학교에 다녔던 ‘일본 데일리NK’의 고용기 기자는 당시 사회주의에 대한 희망이 컸던 것은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순수한 경제적 동기로 일본에 건너간 재일 동포들이 일본 사회의 차별과 멸시에 맞서 민족주의를 내세운 조직을 만들었고, 당시 사회주의가 매우 발전했던 시대적 배경이 맞물리면서 자연스럽게 조총련에 속한 사람들이 많았던 겁니다.

[고용기 기자] 저희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조총련이었어요. 하지만 김일성김정일 숭배가 아닌, 저희 아버지 세대는 순수한 사회주의자가 많았습니다. 사회주의에 대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또 일단 조총련에 속했지만, 사회주의의 생각과 사상으로 보면 북한이 독재국가가 아닌가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옛날 세대에는.

하지만 조총련이 일반적인 사회주의에서 김씨 왕조 국가로 변질하면서 많은 사람이 조직을 떠나게 됐다고 일본 ‘아시아프레스’ 오사카 사무소의 이시마루 지로 대표는 지적합니다.

[이시마루 지로] 조총련 조직의 성격 하나는 재일 동포의 복지와 권리를 수호하는 목적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지지도 얻었죠. 생활 복지와 권리 부문에서 해왔던 역할이 컸습니다. 두 번째는 북한 조선 노동당의 일본 지부라는 성격이죠. 조총련이 출발한 이후 조직 자체가 완전히 북한 노동당, 북한 김일성 정권에 종속하는 성격이 점점 강해졌습니다.

- 조총련 관계자 “조총련 전인 일꾼 많지 않아”

- 1세대보다 2세·3세 부유해졌지만, 주류사회 진출 어려움 여전

- 조총련 조직 약화로 재정난 심각, 간부·교원 생활 어려워

- 경제력 떨어지면서 북한 당국과 불편한 기류도

- 사정 모르는 조선 노동당, 경제력 없는 조총련 무시

오사카 코리아타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조총련 본부 건물. 3층짜리 빌딩의 출입문 옆에는 ‘오사카 조선회관’이라고 쓰인 간판이 붙어 있고, 건물 앞 게시판에는 조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가 걸려있습니다.



애초 오사카 조총련 본부는 신오사카역 인근에 큰 건물을 소유했지만, 막대한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매각돼 지금의 건물로 이전했습니다.

출입문 옆에 있는 초인종을 눌러봤습니다.

[현장 ACT: 오사카 조총련 건물]

[기자] (모시모시~) 안녕하세요. 조선말 괜찮습니까? (네) 안녕하십니까? 미국에서 온 기자입니다. 여기 관계자분과 대화해 볼 수 있을까요?

(조금만 기다리시오.)

잠시 후 문을 열고 기자를 맞은 조총련 관계자는 미국에서 동포가 찾아왔는데 반갑게 맞이하면서 담소를 나누는 정도는 괜찮다며 오늘날 조총련의 현주소를 살짝 내비쳤습니다.

[조총련 관계자] 총련의 전인 일꾼이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동포들을 대표하는 권리 옹호 단체이지만, 소속하는 맹원들 속에 조선국적은 20%밖에 안 됩니다. 다만 우리는 일본에서 일본 사람으로 동화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말도 지키고, 문화도 지키고, 민족적인 커뮤니티를 계속 지켜나가자고 생각하는 분들이 총련에 들어와 있어요. 민족적인 정체성을 지켜서 일본에서 살아가겠다는 생각이 있는 분들이죠.

이 관계자는 오사카 코리아타운을 구성하는 20%의 조총련계 동포가 식당 운영, 김치 판매 등을 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북한과 무역은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이 접촉한 다른 조총련 관계자는 조총련계의 2세, 3세 동포들이 일본의 경제성장과 함께 1세대보다 부유해진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 사회의 민족적 차별이 남아 있어 대기업, 공공기관 등에 취업은 어렵고, 요식업, 토목건설업, 폐품회수업 등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수준이라고 이 관계자는 설명했습니다.

또 조총련 조직 자체가 크게 약화하면서 재정난도 심각해졌고 조총련을 지키는 간부들과 직원, 조선학교 교원 등의 생계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입니다.

[박두진 교수] 어렵죠. 어려워요. 중앙간부도 제대로 월급을 못 받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와 있고요. 적은 월급마저 제대로 못 받으면 어디 계속해나갈 수 있겠어요? 젊은 사람들은 결혼도 해야 하고, 무언가도 해야 하는데…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 조총련에 일꾼으로 갔다 하더라도 꼭 그만두는 사람이 많죠.

[이시마루 지로] 재정난도 심각해졌습니다. 그곳에서 일꾼으로 일해봤자 먹고살기도 어렵고, 차라리 한국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사업을 하는 것이 조선사람으로서 민족성도 발휘할 수 있고, 배워왔던 조선말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으니까 많은 사람이 떠났죠.

조총련과 북한 노동당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분위기도 감지됐습니다. 일본 도쿄신문의 고미 요지 논설위원은 조총련 조직이 약화하면서 북한과 관계도 소원해졌다고 지적합니다. 조총련의 경제력이 떨어지면서 북한도 크게 주시하지 않게 된 겁니다.

[고미 요지] 옛날보다 조총련의 위치가 많이 낮아졌습니다. 20~30년 전에는 성공한 사업가가 조총련에 많았습니다. 그래서 북한에 송금도 많이 하고, 만경봉호를 통해 기계나 컴퓨터 등도 많이 보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경제력이 떨어져서 조총련의 영향력이 크게 떨어지고, 북한도 조총련을 주시하지 않게 됐다고 합니다.

15~20년 전에는 조총련 관계자가 평양을 방문하면 간부들이 마중을 나오고 준비된 승용차로 평양 중심가까지 이동했지만, 요즘은 보통 손님처럼 버스를 타고 갈 정도라는 겁니다.



박두진 교수도 일본 조총련과 북한 측이 불편한 관계에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박두진 교수] (북한에서) 조총련에 대해 전혀 모르거든요. 대남사업만 해왔기 때문에 조총련 사업울 모르는 거예요. 일본 사정도 모르고, 조총련도 모르고...그리고 요즘 조총련이 돈이 없으니까 돈을 가져다주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조총련에 대해서 깔보고 있는 점이 있거든요.

실제로 한 조총련 관계자도 자유아시아방송에 오늘날 조총련은 해외교포단체의 하나로서 대북 지원 규모가 보잘것 없고 국제적인 경기침체와 대북제재의 영향으로 무역길도 막혀 겨우 친척들에게 용돈을 보내주는 정도라고 털어놨습니다.

그러면서 1960~70년대의 전성기에 비하면 조직의 규모가 크게 약화한 것은 사실이라고 이 조총련 관계자는 인정했습니다.

- 많은 사람이 떠났지만, 여전히 조총련을 지키는 사람들은 누구?

- 조총련 조직과 사상에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

- 자신의 인간관계·인생의 발자취가 조총련인 사람

- 조총련 사회에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사람

자유아시아방송이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 만난 조총련 관계자, 조총련계 재일 동포, 전문가들은 오늘날 조총련의 상황은 매우 어렵고 초라하다고 입을 모읍니다.

수많은 사람이 조총련 조직과 사상에 회의를 느끼고 등을 돌렸지만, 여전히 조총련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문가들은 조총련이 그들만의 마을을 형성했다고 묘사합니다.

아직도 조총련 조직과 사상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 지금 조총련을 떠나면 자신의 인생을 모두 잃어버린 것과 같은 사람들, 그리고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남은 사람들이 겨우 조총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박두진 교수] 처음부터 조총련 사업을 해 온 사람들, 아주 진지한 사람일수록 조총련 생활을 빼면 자기의 인생이 없잖아요. 어떤 종교라도 아주 굳건한 신자가 있죠. 믿고 사는 사람, 그런 사람은 반드시 있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20% 정도 있거든요. 또 친구들이 없잖아요. 인간관계가 없잖아요. 그럼 장사도 못 하게 되잖아요.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마을 속, 인간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 가장 편하다는 거죠. 마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고용기 기자] 사람 관계죠. 어린 시절, 청춘 시절을 조선학교에서 보낸 즐거운 추억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일본 사회에 가면 그런 관계가 아무것도 없잖아요.

조총련계에 속한 일반 재일 동포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조직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노선을 전환하고 북한의 정책을 추종하면서 본인들도 점점 고립돼갈 수밖에 없기 떄문입니다. 실제로 자유아시아방송이 이번 취재 과정에서 조총련 관계자나 조총련계 재일 동포를 직접 만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그들은 일본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 속에 자신을 숨기며 조용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갑수 대표] 일반 사람들도, 간부들도 잘 알고 있지만, 일본에 살다 보면 역시 조국이 필요하고,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갑자기 바꿀 수도 없고... 예전에는 조총련계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조총련에 들어오라고 해서 크게 조직화했는데, 지금은 그런 자신감이 없으니까 자기들끼리 지키는 거죠.

[이시마루 지로] 조총련을 떠나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북한의 조선 노동당을 추종하는 사람들만 남았어요. 마지막까지 고수하겠다는 거죠. 북한의 독재정권을 끝까지 따라가겠다는 사람, 그 주변 사람만 남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먹고사는 이유죠. 조총련 조직이 많이 약해졌지만, 여러 사업체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수입을 얻어 사는 사람들이 있죠. 그래서 조직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유아시아방송이 접촉한 조총련 관계자도 일본 내에서 북한과 조총련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일본 중심가에 위치한 조총련 중앙본부는 진입로와 주변 도로까지 봉쇄하고, 일본 공안들의 경비도 삼엄해 고립된 조총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시대가 빠르게 변하면서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조총련계 3세, 4세대가 조직에서 겪는 괴리감과 갈등도 피할 수 없는 숙제입니다.

하지만 조총련 관계자는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외국 땅에서 살아가는 조선인들이 반세기 동안 조국에 뿌리를 두고 차별에 맞서며 민족의 정체성을 이어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어려움에도 계속 이 길을 걸어가겠다는 조총련 관계자의 말에서 외로운 비장함마저 느껴집니다.

‘조총련은 계속 약화하고 있다’, ‘조총련의 미래는 없다’란 많은 사람의 일관된 진단이 조총련의 현실을 대변하고 있지만, 조총련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걸어온 길을 부정하지 못하고 여전히 그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RFA 자유아시방송 노정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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