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8

16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을 발굴한 문영대씨 : 조선pub(조선펍) > 컬처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을 발굴한 문영대씨 : 조선pub(조선펍) > 컬처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을 발굴한 문영대씨
20년을 매달렸다 그림 한 점 때문에…


글 | 황은순 주간조선 차장2016-03-17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변월룡전이 5월 8일까지 열린다.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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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화가 변월룡(1916~1990)의 전시가 화제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은 지난 3월 3일부터 한국미술거장전 시리즈를 시작했다. 변월룡을 시작으로 이중섭, 유영국전이 내년 2월까지 차례로 이어진다. 세 거장은 모두 1916년생으로 올해가 탄생 100주년이다. 이중섭과 유영국은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변월룡은 낯선 이름이다.

변월룡은 남에서도 북에서도 잊혀진 화가이다. 연해주 유랑촌에서 태어나 러시아 국적을 가지고 살았던 변월룡의 유언은 “내 묘비에 한글 이름을 새겨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러시아 이름으로 개명하지 않고 ‘변월룡’을 고수했다. 만일 미술평론가인 문영대(56)씨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끝내 변월룡의 존재를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변월룡 전시는 문씨가 20년 만에 이뤄낸 것이다. 그는 변월룡연구소를 만들고 2004년 ‘러시아 한인화가 변월룡과 북한에서 온 편지’에 이어 2012년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이란 제목으로 책을 펴내는 등 ‘변월룡’에 매달려 왔다.

하필 ‘그 그림’을 보게 된 것이 문제였다. 1994년 12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러시아미술관. 문씨는 러시아 대표 작가들의 작품을 훑어보다 한 작품 앞에서 전율을 느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그림이었다. 한국인의 작품이 틀림없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한국인의 정서가 짙게 배어 있었다. 작가 이름은 ‘펜 봐를렌’. 러시아어를 모르는 문씨가 겨우 읽어낸 이름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변월룡’의 러시아식 발음이었다. 세상에, 이런 화가가 숨어 있었다니. 그때부터 변월룡의 흔적을 좇기 시작했다. 변월룡은 알면 알수록 놀라운 화가였다. “변월룡을 꼭 한국에 소개해야겠다.” 호기심으로 시작한 일은 책임감을 넘어 사명감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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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8일 변월룡전이 열리고 있는 덕수궁미술관에서 문씨를 만났다. 20여년 공들인 만큼 오죽 할 이야기가 많을까. 그는 변월룡의 모든 작품을 훤히 꿰고 있었다. 전시에는 유화·판화를 비롯해 지인들과 주고받은 친필 서신 등 250여점이 4개의 섹션으로 나눠져 있었다. 변월룡의 작품을 설명하는 그는 신이 났다. 천재화가를 발굴한 ‘문영대’의 스토리를 듣기 위해 만났는데 그는 ‘변월룡’ 이야기로 자꾸만 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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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 화백은 한국 구상미술의 빈 페이지를 메워줄 화가입니다. 서양미술은 사실주의가 400년 가까이 전통을 이어왔는데 우리나라는 서양미술을 받아들이면서 후기인상파, 야수파 등으로 건너뛰었습니다. 변 화백의 사실적 표현은 전통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화가들이 배워야 합니다.”

“외국 미술관에 가면 초상화가 많은데 우리는 왜 없을까요. 무용가 최승희, 벽초 홍명희, 근원 김용준, 새 박사 원홍구, 화가 배운성이 변월룡의 그림 속에 다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후대에 보여주는 것도 화가의 역할입니다. 변월룡의 1953년 작품 ‘판문점에서의 북한포로 송환’은 사진 한 장 남겨져 있지 않은 유일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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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월룡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그의 기억을 1994년으로 돌렸다. 그는 경남대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미술관 큐레이터로 있다 잠시 일을 쉬는 사이 한국에 온 러시아 작가 한 명을 만났다. 그 인연으로 러시아에 놀러갔다 눌러앉아 게르첸 국립사범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변월룡의 그림을 본 것은 러시아에 가서 얼마되지 않았을 때다. 그 그림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레핀미술대에 있는 고려인 이클림 교수를 통해 변월룡의 존재를 확인하고 유족들을 찾았다.

변월룡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레핀미술대에 다니다 같은 대학 학생인 러시아인 제르비조바와 결혼해 아들 세르게이(64)와 딸 올랴(58)를 두었다. 아들, 딸 모두 레핀대 출신으로 온 가족이 화가다. 세르게이는 아버지의 화실을 물려받아 사용하고 있었다. 화실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무명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조선 여인의 초상화가 보였다. 변월룡이 그린 ‘어머니’였다. 변월룡의 작품엔 한글 제목이 많다. 러시아에 머무르는 동안 화실을 여러 차례 찾아가 그들과 친분을 쌓고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변월룡의 한국 전시를 마음에 품고 있다가 학위가 끝나고 세르게이와 올랴에게 제 생각을 밝혔어요. ‘조속한 시일 내에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 귀국해 2~3년 후에 연락을 했더니 웬일인지 세르게이한테서 만나지 않겠다는 답이 왔어요. 설마 문전박대야 하겠냐는 심정으로 무작정 날아갔는데 안 만나주는 겁니다.”

이유도 모르는 채 돌아와 1년 후 또 연락을 했지만 똑같은 대답이 왔다. 그때도 화실 앞까지 갔다가 허망하게 돌아왔다.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오기도 생겼다. 아마도 부인이 반대하는 것 같았다. 결국 세 번째 방문에 화실 문이 열렸다. 세르게이는 애먹인 게 미안했던지 다락방에 보관된 그림들이며 북한 화가들이 보낸 편지들을 공개했다. 그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부인도 만났다. 자료들은 그간의 고생을 보상하고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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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민이 변월룡의 그림을 볼 때까지

사실 변월룡 전시는 10년 전 이뤄질 수 있었다. “유족의 산을 넘으니 더 큰 산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변월룡의 위상을 생각해서 국립미술관은 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2005년 광복 60주년 기념전으로 하고 싶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아갔습니다. 처음엔 훌륭한 화가를 발굴해줘 고맙다던 미술관 측이 추진을 하다 중단해야겠다고 하는 겁니다. 작품도 일부 들어와 있는 상태였는데 유족들 볼 면목도 없고 난감했죠.”

변월룡은 1953년 1년5개월여 북한에 머무르면서 평양미술대의 기초를 닦았다. 북한의 요청에 따라 레핀대에서 파견한 것이었다. 북한 현대미술의 뿌리인 셈이다. 그때 북한을 담은 작품들이 많다. “영구 귀화를 하라”는 북한 당국의 요청을 뿌리치고 잠깐 러시아로 나온 이후 다시는 북한 땅을 밟지 못했다. 북한은 그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민족의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남북관계를 고려한 정치적 이유로 중단이 됐을 것이라는 추측만 하고 그는 모든 것을 접어야 했다. 두루마리 상태로 작품을 들여와 이미 틀까지 짜놓은 상태에서 작품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전시가 무산되고 2~3년 후 부인 제르비조바는 아쉽게 세상을 떠났다. 작품을 끌어안고 아들, 딸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한국에도 초청해 그림을 보여주고 안심을 시켰다.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월북화가인 이쾌대전이 열린 것을 보고 그는 쾌재를 불렀다. 월북화가 전시도 하는데 안 될 이유가 없었다. 11년 만에 전시를 재추진했다. 세르게이와 올랴는 오프닝에 참석하고서야 러시아에서도 열리지 못한 아버지의 첫 전시를 믿었다. 이들은 편지 등 아버지의 자료 50여점은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기로 약속했다.

숱하게 러시아를 오가며 돈도 안 되는 일에 매달려온 그는 전시가 이뤄진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말했다. 경남대 겸임교수를 하다 그만두고 미술평론을 하면서 번 돈은 모두 자신이 움직이는 데 들어갔다. 다행히 맞벌이를 한 부인의 응원이 큰 힘이 됐다고 한다. “숙원이 이뤄졌어요. 저는 변월룡을 민족화가라고 생각합니다. 매년 연해주에 가서 몇 달씩 머물면서 고국을 그리워했습니다. 소나무 등 그림을 보면 그 그리움이 절절하게 담겨 있어요. 눈물겹습니다.” 그의 다음 목표는 전국 순회전이다. 전 국민이 변월룡의 그림을 꼭 봐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주간조선 23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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