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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 風林火山의 문필가 송호근, 서울대 석좌교수 버리고 포스텍으로 간 까닭은



風林火山의 문필가 송호근, 서울대 석좌교수 버리고 포스텍으로 간 까닭은

권재현 기자입력 2018-09-16
[지호영 기자]

사람은 보통 나이가 들면 익숙한 것에 안주하기 마련이다. 학자는 더욱 그러하다. 평생의 연구를 마무리 짓기 위해 한곳에 칩거하고 전공 분야에 더 천착한다. 그러라고 강의 부담을 줄여주면서 석좌교수라는 타이틀도 부여한다.

그런데 그는 많이 다르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이자 신문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던 지난해 불쑥 ‘강화도’라는 장편역사소설을 발표하더니 10개월 만인 올해 2월 ‘다시, 빛 속으로’라는 또 다른 소설을 내놨다. 젊은 시절 문학도의 꿈을 이루고자 한 권 정도 써봤나 했는데, 계속 집필 의지를 불태운다.

그래서 3월부터 소설가로서 그를 인터뷰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세상이 너무 시끄러우니 좀 조용해진 다음에 하자”고 답했다. 그래서 여름방학을 맞아 다시 연락했더니 “너무 더우니 선선한 바람 불 때 하자”고 답했다. 그래서 새 학기가 시작하는 9월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다 이유가 있었다. 3월 서울대 석좌교수가 된 그가 9월부터 포스텍 석좌교수로 옮겨간다는 뉴스가 뜬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그물에 잡히지 않는 바람처럼’ 변신을 거듭하는 송호근 교수를 9월 10일 오후 서울 서대문의 레스토랑 충정각에서 만났다.



“외눈박이 맹수의 한쪽 눈을 채워주고 싶다”
2011년 이후 송호근 교수가 출간한 4권의 책. 둘은 학술서, 둘은 소설이다.

[박해윤 기자]“나보고 ‘먹튀’라고 하더라고.(웃음) 그런데 먹은 게 있어야 먹튀지. 서울대 석좌교수, 가문의 영광이지. 그런데 정작 내가 할 일이 별로 없더라고. 개인 연구와 강의는 맘대로 할 수 있다지만 학생들의 수요와 감각에 부응하려면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는데 자원도 없고 운신의 폭도 적었다. 서울대 전체로 보면 자원이 엄청난 대학이긴 한데, 학교 내에서 석좌교수라는 타이틀만 갖고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노교수로 조용히 늙어가야 하나라는 무기력증이 심각하게 왔다. 그즈음 친분이 있던 김도연 포스텍 총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의기투합했다. 포스텍 인문사회학부를 재설계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 중이라며 상당한 재량권을 약속해줬다. 그래서 다시 신임교수로 돌아간다는 마음으로 모험에 나섰다.”

소설 이야기를 꺼내기 전 먼저 풀어야 할 기삿거리가 많았다. 왜 포스텍으로 갔느냐는 물음에 돌아온 답이다. 그는 포스텍을 ‘외눈박이 맹수’에 비유했다. 엄청난 파워와 에너지를 갖추고 있지만 과학의 눈만 있어 사회적 요청에 부응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문사회학의 소양과 상상력을 지닌 과학전사를 키우자는 마음으로 포스텍행을 택했다고 했다. 그 화두를 그는 ‘응답하라 과학도여’라고 불렀다.


“포스텍은 학부생이 한 학년에 330명이고, 전교생이 1300여 명, 대학원생까지 포함해도 3300명 정도다. 인원만 보면 서울대 사회과학대보다 적다. 하지만 소수정예로 구성돼 있어 탄탄하다. 학교도 정교하게 운영한다. 규칙과 규정이 눈에 다 보인다. 나는 그걸 ‘성공의 위기’라고 봤다. 그런 방식으로 지금의 포스텍의 명성을 꾸려냈지만 앞으로 더 진일보하기 위해선 반대로 리버럴해져야 한다. 인문학적 상상력이 숨 쉴 수 있는 빈틈이 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송 교수의 이런 구상을 도끼 자루 썩는줄 모르고 꺼내 든 추상적 담론이라고 생각할 뻔했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하기엔 새 명함의 석좌교수 아래 적힌 두 개의 직함이 걸렸다. 인문사회학부장과 융합문명연구원 원장.

“명칭은 인문사회학부인데 사실상 교양학부에 불과하다. 학부 과정엔 전공도 없고 대학원 과정도 없다. 그래서 전임교수 15명, 대우 교수 9명이 다다. 다른 대학 학과 수준의 인원이다. (포스텍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KAIST 학부생은 한 학년에 750명으로 포스텍의 2배가 넘다 보니 인문사회학부 교수도 40명이나 되고 대학원도 3개나 된다. 그래서 인문사회학부라는 이름에 걸맞은 역할을 할 수 있게 재편성하려는 거다. 학부 과정에 융합문명, 과학기술, 경제금융 3가지 정도 부전공을 만들 거다. 대학원도 만들어 문화 데이터, 사회조사 데이터, 인터넷 데이터 이런 것을 분석해 사회적 트렌드나 인식구조를 잡아낼 수 있는 데이터사이언스라는 전공 과정을 두려고 한다. 전임교수를 20명 수준까지 늘릴 계획이고 여름방학 동안 이미 연구소도 3개나 만들었다. 소통과 공론 연구소, 인문과 과학을 결합한 융합문명연구원, 통일문제를 연구하는 포스텍평화연구소다. 연구소 인력도 벌써 7명을 뽑았다. 교수 1명, 박사 2명, 석사 4명이다.”

전광석화가 따로 없었다. ‘달릴 땐 바람과 같고, 멈출 땐 숲과 같으며, 공격할 땐 불과 같고, 움직이지 않을 땐 산과 같다’는 손자병법의 구절이 떠올랐다. 일본 전국시대 무장 다케다 신겐은 이 구절의 핵심 단어를 하나씩 취해 ‘풍림화산(風林火山)’을 깃발로 삼아 전장을 누볐다는데, 송 교수는 혹시 ‘학계의 다케다 신겐’을 꿈꾸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3개 연구소 1년 인건비만 3억 원이다. 소사장이 따로 없다. 연구원들과 계약하면서 월급을 깎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정신 차리고 제대로 된 임금을 다 보장해줬다. 학교의 적극적인 뒷받침이 없었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모르니까 용감했던 것 같다. 슬슬 알기 시작하니까 무모한 짓을 벌였다는 생각이 든다. 사재로 하라면 절대 못 했을 거다.(웃음) 앞으로 6개월간 이 프로젝트에 전념하고자 연구와 소설 집필도 중단한 상태다.”

문학 이야기를 하기 전 물어봐야 할 것이 하나 더 남았다. 그는 9월 4일자 ‘8월의 약속’이란 제목의 신문칼럼을 통해 현 정부의 경제실정을 맹비판했다. 이에 대해 그는 지난봄 청와대 사회정책실과 토론모임에서 “8월까지 고용과 소득 지표가 개선되면 반성문을 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격문을 쓰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거 쓰느라 잠 한숨 못 잤다. 격문을 넘어 전쟁 포고문을 쓰는 심정이었다. 장하성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은 아마 잊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날 비가 왔는데 나는 3월 23일인 것까지 기억한다. 현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대해 취지는 맞지만 방식이 틀려 실패할 게 빤하다고 했다. ‘고용주의 지불능력을 건드리면 고용을 안 하니까 적응할 수 있게 (최저임금을) 조금씩 올리고, 모자란 부분은 고용주를 괴롭히지 말고 정부에서 종업원에게 직접 줘라. 그렇지 않으면 망한다. 정권 실패하면 당신들 책임’이라고 했다. 그 사람들은 ‘자본은 언제나 엄살을 부려왔다. 경제는 어떤 식으로든 적응하기 때문에 밀어붙이다 보면 적응할 것’이라며 고집을 안 꺾더라.”


“장하성 실장 내려오지 않으면… ”
[지호영 기자]그는 현 정부의 경제정책이 1999년 의약분업과 닮은꼴이라고 봤다. 당시 개인의원의 한 달 수입의 30~35%가 약값이었는데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며 한꺼번에 의약분업을 밀어붙였다는 것. 그는 당시 첫해 10%, 그다음 해 20%, 셋째 해 30%식의 3년 계획을 세워 의료계가 적응할 시간을 줘야 한다고 고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무시하고 밀어붙이는 바람에 ‘의료계의 붕괴’가 일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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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2001년 3월 국민건강보험 적자가 3조5000억 원 발생하니까 보건복지부 장관부터 담당 실장, 국장, 과장, 사무관까지 5명을 모두 감옥에 보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정작 그걸 밀어붙인 사람은 당시 새천년민주당 이해찬 정책위의장이었으니 엉뚱한 사람들이 욕먹은 거다. 200~300석 규모의 병원은 다 망했고 캐나다와 뉴질랜드로 이민 가는 의사가 속출했다. 성형외과처럼 비급여 진료비를 받을 수 있는 전공의 과목만 돈을 벌고, 다른 데는 다 무너졌다. 현장을 모르고 밀어붙이면 반드시 왜곡이 발생한다. 나는 쭉 현장의 목소리를 들었고 영세상인이 600만, 종업원 30인 미만 영세상공인이 300만, 합쳐서 1000만 명쯤 되는데 생존이 힘겨우니 당연히 고용도 줄 수밖에 없다. 이번 추석 전후해서 바꿔야 한다. 장하성 실장이 내려오지 않으면 한국 경제 거덜 날 수도 있다.”

그는 소득주도성장이나 공공서비스 분야 공무원을 늘려야 한다는 현 정부의 기본 방침에는 동의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것을 시장과 민간기업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풀어가지 않고 너무 성급하게 몰아붙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복지는 소셜 웨이지, 곧 사회적 임금으로 봐야 한다. 그래서 복지를 제공하면 민간기업에 가서 임금 올려달라고 하지 말라고 해야 된다. 그런데 이 정부에선 고용주에게 그 돈을 부담시키니 어떻게 고용이 늘 수 있겠는가. 최저임금 지원금도 고용주를 통해 지급하지 말고 종업원 개인에게 직접 줘야 한다. 안 그러면 고용주의 페이퍼 워크만 늘어난다. 고용주를 힘들게 하면 안 된다. 대안은 유럽처럼 인구 10만 명 고용센터를 하나씩 만들어 관할지역 노동자의 실태에 맞춤형으로, 최저임금 이하로 돈 받는 사람이 있으면 돈을 보태주고, 노동력을 잃으면 그에 상응하는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인구 5000만 명인데 노동사무소가 70개에 불과하니 70만 명당 하나꼴이다. 노동사무소 기능을 확대해 최저임금, 실업급여 복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 이렇게 공공서비스를 담당하는 공무원을 늘리면 고용 창출이 되면서 기업 부담도 덜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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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문학 이야기로 넘어갈 차례다. 줄담배를 피며 심각하던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첫 소설 ‘강화도’는 1876년 강화도조약 당시 전권대신으로 조약을 맺은 유장(儒將) 신헌이 쓴 ‘심행일기’에 기초해 19세기 봉건과 근대의 경계인으로 살았던 지식인의 초상을 그려냈다. ‘다시, 빛 속으로’는 1940년 동경제대 유학생 시절 ‘빛 속으로’라는 일본어 소설로 한국인 최초로 아쿠타가와상 후보 작가에 올랐지만 해방 후 북을 택해 한국문학사에서 지워진 김사량의 내면을 탐구한 작품이다.


“논문으로 쓸 수 없는 걸 소설로 쓴다”
[지호영 기자]두 작품은 사회학자 송 교수가 대표작으로 꼽은 ‘인민의 탄생’ 시민의 탄생’과 조응하는 면이 있다. 

현재 집필 중인 ‘국민의 탄생’과 맞물린 이 3부작은 한국의 근대적 주체가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공론장의 구조 변동을 통해 모색한 학술서다.

1부에 해당하는 ‘인민의 탄생’에서 조선시대 내내 통치의 객체이던 백성이 19세기 들어 언문 공론장을 형성하기 시작한 ‘문해인민’에서 점차 역사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인식해가는 ‘자각인민’으로 성장해갔음을 추적했다.

‘시민의 탄생’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그 자각인민이 근대사회의 진정한 주체인 시민으로 탄생하기 직전 1910년 국가를 잃으면서 잉태는 됐지만 출산이 이뤄지지 않은, 그래서 동굴이라는 상상 속에서 출산된 시민이 빛을 찾아가게 됐다고 설명했다.

3부 ‘국민의 탄생’은 1910~50년대 말까지를 다룰 예정이다. 국가가 사라진 상황에서 정신적 국가와 정신적 국민의 개념은 황국의 충량한 국민으로서 황민(皇民)으로 전락한다. 해방이 찾아온 이후 세탁되지 못한 이 황민들은 북한에선 사회주의 인민이 되고 남한에선 자유민주주의 국민으로 호명되는 과정을 다룬다. ‘강화도’가 ‘인민의 탄생’의 시대에 조응한다면 ‘다시, 빛 속으로’는 ‘시민의 탄생’과 ‘국민의 탄생’에 걸쳐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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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 못했는데 맞는 지적이다. 무의식적으로 연결돼 있던 셈이다. ‘인민의 탄생’을 쓰면서 바깥에서 뭐가 들어오는, 잠자고 있고 억눌려 있는 인민의 의식을 깨우는 외적인 바람의 시작으로 강화도조약을 주목했다. 마침 그때 심행일기가 번역됐는데, 읽어보니 이순신의 ‘난중일기’보다 낫더라. 신헌은 10척이나 되는 중무장한 10척의 일본 함대가 강화도로 밀어닥쳤는데 이를 단기필마로 상대한 장수였다. 그는 만국공법을 알았고 당시 서양의 무력과 이를 받아들인 일본의 군사력을 어느 정도 꿰뚫고 있었다. 한쪽에선 인민이 자라나고 다른 한쪽엔 외세가 있는데, 그 가운데 서서 인민이 깨어나기 전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기 위해 당시 36세이던 해군중장 구로다 기요다카를 상대로 담판을 벌인 거다. 그때 제일 먼저 깨어난 인민은 천주교도였고 그다음이 동학도였다. 신헌의 이력을 보면 천주교도를 잡아 처형하는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천주교도는 아니었지만 천주교도를 지켜보면서 뭔가 깨달은 바가 있었을 거다. 그래서 천주교도 애인을 만들어 서서히 천주교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것으로 묘파했다.”

그는 소설가 김훈에게 ‘강화도’를 한 권 보내면서 ‘선생이 쓴 ‘칼의 노래’ ‘남한산성’ ‘흑산’ 3부작이 다 여기에 있다. 행여 선생이 이걸 작품화할까 봐 노심초사하면서 썼다’는 메시지를 전했다고 했다. ‘칼의 노래’ 속 무장 이야기, ‘남한산성’의 외적 침입, ‘흑산’의 천주교 이야기가 ‘강화도’에 온축돼 있다는 의미인 동시에, 그만큼 김훈의 소설을 의식하면서 작품을 썼다는 소리였다.

“그다음 날 아침 김훈 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강화도 가자고. 그래서 아침 10시에 강화도에 가 같이 술을 마셨는데 밤새 다 읽었더라. 김훈은 언어가 움직이는 그림을 포착하는 순간에 감동을 하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검은 연기를 뿜으면서 화륜선이 나타났습니다. 기러기나 오리처럼 빨랐습니다. 어느 나라 선박인지는 날이 저물어 볼 수 없었습니다. 계속 지켜보겠습니다’나 ‘적함이 포를 쐈는데 하늘이 깨졌습니다’ 같은 문장을 무척 좋아하더라. 그 대부분이 심행일기에 나온 문장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인민, 시민, 국민이 중첩된 역사소설실제 소설 속 디테일한 묘사는 빼어나다. 역병이 돌면 역신이 머물지 못하도록 4대문에 시체를 걸어놨다거나, 마포나루에 시체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는 묘사는 ‘인민의 탄생’에서도 엿볼 수 있다. ‘시민의 탄생’ 말미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동굴 속의 시민은 환한 세상의 빛을 찾아 과감한 외출을 감행해야 했다.’ 소설 ‘다시, 빛 속으로’는 동굴 속 시민으로서 김사량이 어둠에서 나와 빛을 찾기 위한 모험과 방랑을 담았다.

김사량은 1945년 조선 출신 학도병 위문단으로 중국 북경(베이징)으로 파견됐다 홍군이 있던 연안으로 탈출을 감행했다. 사회주의자여서가 아니라 당시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重慶·충칭)은 베이징에서 멀었기 때문이라는 게 송 교수의 추론이다. 그러다 해방 후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 6·25전쟁 종군작가로 남하했고, 1950년 말 인민군을 따라 퇴각하다 원주 근처에서 숨진 것으로 전해진다. 해방 전의 작품 대부분이 일본어로 쓰였고 평양에서 백화점을 운영할 정도로 부유한 기독교 집안 출신이라 북한에서도 주목받지 못했으며, 남한에서는 김일성찬가를 부른 작가로 낙인찍혀 한국문단에 편입되지 못했다.

“김사량의 문학세계와 인생은 식민지 현실이라는 어둠 속에서 나와 빛을 찾아가는 행로였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일본어로 쓰였는데 ‘윤주사댁’ 같은 작품은 ‘토지’ 1부를 떠올릴 정도로 스케일이 웅장하다. ‘태백산맥’이란 작품 역시 갑신정변에 실패한 군장이 사람들을 이끌고 태백산맥으로 들어가 신민촌이라는 유토피아를 세우는 이야기다. ‘노마만리’는 1945년 5~7월 베이징을 탈출해 조선의용대가 있던 태항산에 도착하기까지 여정을 담았다. 모두가 ‘상상 속 시민’이 진정한 주체가 되기 위한 과정을 이야기한다. 김사량은 어떤 주의자도 아니었다. 다만 시민으로서 주체적 자유를 찾아 떠난 길이 우연히 사회주의와 연결됐을 뿐이다. 그래서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남쪽에서 숨을 거뒀는데, 그의 무덤의 이편에선 국민이 태어나고 저편에선 인민이 태어난 것이다.”

현재 집필 중인 ‘국민의 탄생’은 1945년 전까지는 제국주의 일본의 황민으로, 그 후 이승만·박정희 시대엔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에 포획된 국민으로 호명되는 국민을 다룬다. 그럼 김사량의 죽음 이후 국민의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될까. 또 그 시대에 부응하는 소설 차기작은 어떤 형태가 될까.

“남쪽에선 더렵혀진 황민으로부터 전혀 세탁되지 않은 상태의 국민을 이승만이 끌고 간다. 그러다 1950년대 말 드디어 시민 개념이 국민 개념과 싸우기 시작한다. 장용학, 손창섭, 최인훈의 소설 속에 포착된 소시민이 등장하면서부터다. 국가가 나를 보호해주지 않으니 스스로 생존의 테두리를 보호하겠다는 의식이 등장한 거다. 이런 시민의식은 4·19로 폭발했다 5·16으로 얻어맞은 뒤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에 포획된 국민담론에 압도된다. 세 번째 소설은 그에 부응하는 이야기가 될 텐데, 1970년대 대학을 다닌 내 세대의 이야기를 써볼까 한다. 모든 생존과 생활이 국가에 의해 주조되면서 급격한 경제성장의 동원 전략에 휩쓸려 들어가지만 ‘이게 아닌 것 같은데’라며 방황하고 번민하는 세대가 자신의 주체를 찾는 이야기다.”


“문학에 목숨 거는 마지막 세대”두 작품은 역사의 주변부에 감춰진 신헌과 김사량이란 인물을 발굴했고, 경계인으로서 지식인을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참신성이 돋보인다. 김훈의 문체를 연상케 하는 문장도 흡인력이 있다. 하지만 드라마로서 약점을 노출한다. 2가지 차원에서 그러한데, 신헌과 김사량이라는 프로타고니스트(주인공) 중심의 이야기 전개로 그에 맞서는 안티고니스트(적대자)가 눈에 띄지 않아 극의 긴장감이 떨어지는 게 첫째다. 둘째는 두 사람의 사랑이 ‘이뤄질 수 없는’ 혼외사랑이라는 공통점을 지니는데, 둘 다 지고지순하게만 그려진 탓에 현실감이 부족하다.

“정확한 지적이다. 소설가 초짜가 제일 약한 게 번민하는 복선들을 드라마로 어떻게 엮느냐 하는 부분이다. 그게 가능한 건 정말 초짜가 넘볼 수 없는 고수의 경지더라. 갈등과 복선이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켜 드라마 형태로 빚어지는 과정에서 새로운 리얼리티가 만들어진다. 작가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도 새로운 시선에서 볼 수 있는 전망대를 만들어주는 셈인데, 논문을 쓰던 사람에게 그게 제일 어려웠다. 논문엔 복선이 없잖아.(웃음) 두 번째 지적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로, 내 성향이 딱 그 짝이다. 현실적 사랑이 아니라 관념적으로 먼 데서 보고 혼자 쩔쩔매는 사랑, 그렇게 키워진 세대라고. 1960년대 중고교를 다닌 친구들은 플라토닉 러브의 세례를 엄청나게 많이 받아 손만 잡아도 하늘로부터 어마어마한 심판을 받으리라는 두려움을 안고 살았다. 그래서 사랑이 관념 속에 반짝이는 별처럼 보이는, 그런 ‘세대의 아킬레스건’이 그대로 드러난 거다.”

그는 ‘강화도’ 발표 후 “소설은 문사(文士)가 도전할 수 있는 가장 수준 높은 영역”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 역시 두 갈래의 비판이 가능하다. 유교문화권에서 전통적 문사라면 마땅히 소설이 아니라 시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다. 다른 하나는 반대로 일본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언급한 것처럼 소설이 시대정신을 이끌던 시대는 20세기로 끝났다는 반론이다.


“나도 문학의 최고봉은 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시는 아무나 쓰는 게 아니다. 하늘이 점지해준 사람만이 쓸 수 있다. 그런 재주를 타고나지 못한 나같은 평범한 문사가 도전할 수 있는 최고 경지가 소설이다. 정말 안 된 이야기지만, 시와 소설이 문의 최고 경지에서 내려와 저 아래 화단에 널브러져 있다는 데 동의한다. 나 같이 심각한 노스탤지어 병에 걸린 놈들이나 여전히 시와 소설을 붙잡고 있는 거다. 지금까지 ‘강화도’가 1만 부, ‘다시, 빛 속으로’가 6000부가량 팔렸다. 나 같은 아마추어 신인작가로선 언감생심의 부수다. 그런데 신문칼럼은 하루 70만 부를 찍는데 그중 10%만 읽어도 7만 명이 읽는 거다. 영향력을 생각하면 신문칼럼만 써야지. 하지만 소설을 쓸 때 나만이 느끼는 희열 같은 게 있다. 사실 소설 쓸 때가 제일 행복하다. 학문으로 풀리지 않는 것, 말할 수 없는 것을 소설로 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야말로 문학에 목숨을 거는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156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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