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11

알라딘: 신동삼 (지은이) 함흥시와 흥남시의 도시계획

알라딘: 함흥시와 흥남시의 도시계획

함흥시와 흥남시의 도시계획 - 1955~1962년 구동독 도시설계팀의
신동삼 (지은이)논형2019-11-10





































정가
2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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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쪽
152*225mm
책소개
저자 신동삼은 통일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다. 그는 함경남도 정평군에서 태어나 1950년 흥남고급중학교를 졸업하고, 북한의 인재발굴사업인 제1차 동유럽 국비유학생에 선발되었다. 유학 도중에 북한 함흥시와 흥남시 재건 사업의 통역관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다시 동독으로 돌아가 드레스덴 공대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1959년에 서독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인천 출신인 제1차 파독 간호사와 만나 결혼을 하면서 이루지 못한 꿈에도 그리던 통일을 개인적으로나마 이룩했다고 생각한다. 작가 루이제 린저의 도움으로 북한을 2차례 방문하여 고향 땅을 밟고 가족을 만났다. 저자는 독일에서 건축가로 일하다가 정년퇴직하고 '구동독 함흥시 도시계획'에 관한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러면서 함흥시, 흥남시의 도시재건사업의 자료도 정리하였다. 2019년 현재 저자는 90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2013년과 2019년 서울에서 구동독 함흥시 도시설계 사업에 대한 강연과 특강을 하며 북한의 도시 재건사업에 대해 각 전문가와 공유하고 있다. 이 책은 북한의 함흥시와 흥남시의 도시재건 사업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생생한 사료로써 그 가치있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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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감사의 말/ 들어가며/ 책을 펴내며

제1장 함흥시와 흥남시 도시계획과 저자의 연관
1. 연구자료 출처와 제목에 대한 다른 연구 현황 2. 체계적인 접근 방법

제2장 함흥시 프로젝트의 배경과 주변국의 지정학적 조건
1. 국제정치적 긴장 속의 한국 2. 북한과 구동독과의 관계 3. 설계팀장 콘라트 퓟쉘과 동독 건설 아카데미 동료들

제3장 함흥시 프로젝트의 계획
1. 함흥 프로젝트의 위탁과정 
1) 재건과 계획에 관한 현존(現存) 조건 
2) 현재 조건: 자연, 역사 그리고 북한주민의 인간성 
3) 사회주의국가 도시계획 단위의 근린주거지역

2. 함흥시 도시계획 - 도시 기본설계의 연대기록 1955 
1) 1955년의 함흥시 건설의 기본자료 - 함흥시 총계획도. 함흥시 역사 
2) 도시 중앙광장의 변체성(變體性, variant) 
3) 건축공정과 유형 개발
4) 보충적인 건축프로젝트, 메디컬센터

3. 서신 및 일기 항목, 2013 DAG 인터뷰 
1) 함흥에서 부친 공익현 통역사의 편지 
2) 구동독 함흥 재건단 참여와 나의 소감 
3) 2012년 9월 베를린 비스도르프에서 전 동독 재건단(DAG) 단원과 인터뷰 4) 게르하르트 슈틸러의 함흥 일기

4. 함흥시 도시계획 요약

제4장 인접도시 흥남시 도시계획
1. 흥남 공업지대의 형성사 
2. 흥남 공업지대 개요 
3. 흥남 총도시계획안 
4. 흥남 유정리 소지구 계획안 
5. 흥남 용흥리 소구역 - 본궁의 역사 
6. 본궁 및 용흥리 소지구 계획안 - 흥남 용흥리

제5장 계획된 도시의 미래 전망
1. 서울 잠실 설계의 사례 
2. 통일 후의 남북공동경제체계와 한·독 도시계획 경험의 통합 가능성에 대하여 
3. 약 70년 후의 함흥: 지속 가능성에 대한 문제

제6장 도시설계 수출 - 베트남의 사례
1. 건축 - 도시설계 수출의 역사적 현상 
2. 신흥국 베트남으로의 도시계획·설계 수출 
3. 베트남 빈(Vihn)시의 1974 - 로란드 디틀의 설계 설명서 
1) 설계구역과 주민에 대하여
 2) 토지이용설계. 직업구조. 거주. 노동과 건설현황

제7장 맺음말

참고문헌 및 관계 전문가들(Bibliography)/ 색인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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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1955년 4월, 나는 구동독 드레스덴(Dresden) 공대 학생이었다. 어느 날 동독주재 북한대사관에서 나에게 구동독 함흥시 재건단의 통역관으로 함흥에 가라는 연락이 왔다. 당시 나는 마침 북한 국비유학생으로 대학의 건축학과 예과를 졸업했었다.
2002년에 내가 동·서독인들과 함께 한국 관광을 하던 중, 우연히 구동독 함흥시 재건단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구동독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서점을 경영하는 독일인 프란크 뤼디거(Frank Ruediger) 씨가 『동독과 북한 - 1954년부터 1962년까지의 함흥시 재복구』라는 서적을 출간했다는 것이다. 내용은 함흥시 도시설계진의 제1차 팀장인 콘라트 퓟쉘(Konrad Puschel) 씨의 유고집이었다. 이 문건은 현재 동독 바우하우스 데사우(Bauhaus Dessau)재단 문고에 보관되어 있다. 그런데 이 논문의 저자인 프란크 뤼디거 씨의 상관인 레타 렌트너(Prof. Reta Rentner) 교수는 마침 베를린 훔볼트(Humboldt)대학 한국어과의 학장이었다. 이 여성 교수는 50년 전에 동독 라이프치히 종합대학의 예과학생이었으며 1952년에 북한에서 온 우리 국비유학생들에게 독일어를 가르쳐 주었고 또 서양 사교춤도 가르쳐 주곤 했다.
그 후에 그녀의 대학 세미나에서 나의 서독 망명 이야기에 관해 서로 얘기를 나누었다. 이 세미나를 조직했던 프란크 뤼디거 씨는 콘라트 퓟쉘 씨가 일한 함흥 재건 설계자료를 디지털로 정리하여 후일 연구 사업에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조언해 주었다.

그 후에 한국의 한 연구소가 나에게 함흥시 도시계획에 관한 특강을 요청해 왔는데, 박사학위 취득자라야 강연을 할 수 있다는 답변이 왔다. 이를 계기로 옛 함흥재건단의 일원으로 직접 참여했고, 아직 살아 있는 나는 함흥시 도시계획에 관한 설계 자료를 연구하여 박사논문을 쓰기로 결심했다. 다시 말해 함흥재건 프로젝트에 관한 논문을 써서 여러 학계에 소개하는 동시에 후세에게도 기록으로 남겨두려는 의도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여러 구동독 함흥시 재건사업에 관한 자료를 학술적으로 정리하고 해설을 붙이는 작업을 시작했다. 또 이것은 나의 청년시절의 가장 뜻 깊은 회고록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1장 ‘함흥시와 흥남시 도시계획과 저자의 연관’에서> 접기

북한 재건지원 결정은 1954년에 북한 외무부장관이 구동독을 방문했을 때 오토 그로테볼 국무총리가 자발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제의함으로써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김일성은 북한 동해안에 있는 함흥시를 재건해 줄 것을 요청했다.
김일성은 오토 그로테볼 국무총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우리 정부는 우리나라 동해 지방의 중심지인 함흥시를 재건복구 대상으로 우선 결정했습니다. 동해안에 있는 함흥과 흥남은 일제(日帝)가 식민지 때 한국에 형성한 공업 중심지로써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는 데 필요한 다리 역할을 한 도시이기도 합니다. 이 함흥 지방의 공업은 군사적 이용가치가 컸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1950년에 발생했던 한국전쟁 때 비운(悲運)의 대상이 됐습니다. 미군의 폭격과 UN군 철수 때 공업시설과, 주택지의 90% 이상이 파괴되었습니다. 정전 후 북한 정부와 노동당은 함흥과 흥남 지방의 경제와 문화적 의미를 중시하여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재건사업에 매진했습니다.”

<3장 ‘함흥시 프로젝트의 계획’에서> 접기

한국의 자본주의적 네이버후드 유닛(Neighborhood Unit) 원칙에 입각한 최초의 도시계획은 서울의 잠실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서울시는 10만 주민들을 위한 확장구역으로 한강을 가로지르는 서울의 남쪽 690헥타르의 강남지역을 지정했다. 그것은 구독동 재건단에 의해 10년 전에 스탈린주의적으로 이미 북한에서 계획되고 건설된 단지에 대한 아이디어에 서울시의 토지이용 및 개발계획에 따라 1974년 첫 번째 구역의 시공이 시작됐다.
잠실 구역 설계자인 김 교수께 “왜 주차장이 없는가”라고 물으니, “1970년 중반에는 자동차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잠실설계 20년 전의 함흥시 도시설계에서 교통문제가 제기되지 않았으니 이해할 수 있었다. 북한 주민들은 1955년 함흥재건설 당시 의식주 문제해결이 가장 중요한 이슈였으며 함흥도시계획에 장래 발생할 교통 문제, 주차장 시설 등에 대해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4장 ‘인접도시 흥남시 도시계획’에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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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신동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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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함경남도 정평군 주이면 풍양리(후에 신경리)에서 출생했다. 6·25 전쟁 당시인 1950년에 흥남고급중학교를 졸업했고, 그해 북한의 인재발굴사업인 제1차 동유럽 국비유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하여 동독의 드레스덴 공대로 유학길에 올랐다.
1955년 4월, 독일 함흥시 재건단(DAG) 통역관으로 파견되어 활동했으며, 그 후 동독으로 돌아가 1956년부터 드레스덴 공대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1959년 서독으로 망명한 이후, 인천 출신인 제1차 파독 간호사와 결혼하였으니 독일에서 먼저 ‘작은 통일’을 이룬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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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함흥시와 흥남시의 도시계획>,<신동삼 컬렉션>,<동쪽을 넘어 서쪽으로 온 사람 - 上> … 총 3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90세, 산 증인의 생생한 함흥시와 흥남시 도시재건 사업, 최초이자 마지막 이야기
6.25 한국전쟁으로 인한 남북 분단 시대에 그 무엇보다도 통일이 최대 민족적 과제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은 쌍방의 이해관계에 따라 대화의 창구를 일방적으로 폐쇄했다가 교류했다 하는 냉탕과 온탕을 반복하고 있다. 불과 작년만 해도 남북은 서로 다시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실향민을 비롯한 우리 국민은 잠시 통일의 꿈이 당장이라도 이루어질 것 같은 꿈을 꾸게 하였다. 그러나 이내 다시 남북관계는 냉담해졌다.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어젠다는 “독립”이었듯이 분단시대 우리에게 최고의 어젠다는 “통일”이다.

이 책의 저자 신동삼은 우리의 어젠다인 통일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다. 그는 함경남도 정평군에서 태어나 1950년 흥남고급중학교를 졸업하고, 북한의 인재발굴사업인 제1차 동유럽 국비유학생에 선발되었다. 유학 도중에 북한 함흥시와 흥남시 재건 사업의 통역관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다시 동독으로 돌아가 드레스덴 공대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1959년에 서독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인천 출신인 제1차 파독 간호사와 만나 결혼을 하면서 이루지 못한 꿈에도 그리던 통일을 개인적으로나마 이룩했다고 생각한다. 작가 루이제 린저의 도움으로 북한을 2차례 방문하여 고향 땅을 밟고 가족을 만났다. 저자는 독일에서 건축가로 일하다가 정년퇴직하고 <구동독 함흥시 도시계획>에 관한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러면서 함흥시, 흥남시의 도시재건사업의 자료도 정리하였다. 현재 저자는 90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2013년과 2019년 서울에서 구동독 함흥시 도시설계 사업에 대한 강연과 특강을 하며 북한의 도시 재건사업에 대해 각 전문가와 공유하고 있다.
우리는 최근에 ‘일본군 위안부’와 같이 과거 우리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또한 아직 살아있는 사람의 생생한 증언, 기억과 자료를 정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느꼈다. 이 책은 북한의 함흥시와 흥남시의 도시재건 사업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생생한 사료로써 그 가치있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함흥시와 흥남시는 어떻게 복구되었는가
6.25 한국전쟁으로 인해 북한은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국토가 파괴되었다. 한국전쟁시 미국이 한반도 전체에 투하한 폭탄은 무려 635,000톤의 폭탄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태평양 전 지역에 투하한 503,000톤의 폭탄보다도 많은 양을 한반도에 투하하였다. 이는 우리나라보다도 북한 지역에 더 많은 양을 투하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로 인해 이 책의 배경이 된 함흥시는 95%가 파괴되었다.

이에 북한 정부는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파괴된 도시의 재건 사업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를 사회주의 국가들의 도움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에 북한 정부는 1953년 8월 5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6차 회의에서 전후 북한 재건을 위한 3단계 계획을 제시하였다. 1953년은 재건을 위한 준비기간으로, 1954년부터 1956년까지는 1950년 이전 수준으로 경제를 회복시키고, 1957년부터 1961년까지는 국가 전 분야의 사업화를 달성하려는 계획을 제시한 것이다.

동독 정부는 1955년 2월 17일에 북한 함흥시와 흥남시 도시재건사업에 도움을 주기 위한 정령을 발표하였다. 동독 정부는 1955년 4월 <동독함흥시와 흥남시 도시재건단(DGA)>을 파견하였다. 당시 함흥은 북한의 2대 도시였다. 인구수로만 보더라도, 당시 325.5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평양 다음으로 66.9만 명이 함흥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함흥과 흥남에는 질소비료공장, 화학공장 등 대단위 공단이 들어선 신흥도시였다.

동독정부는 독일 도시재건단을 파견하면서, 함흥시와 흥남시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도시건설의 모델 조성을 목적으로 1956년에서 1962년까지 매년 3,500만 루블을 지원하며, 도시재건의 작업 구역은 함흥시 중심지, 반룡산, 회상리, 삽오리, 함주의 5개 구역이며, 기반시설 건설은 도로건설팀, 상수도팀, 다리건설팀, 지하건설팀, 배수 및 관개시설 팀의 5개 팀을 파견하였다. 또한 함흥시 만세교 건설을 위한 정밀설계, 지상공사 작업반과 공동으로 교각의 건축구조를 건설하기 위한 토목공사 작업반을 두고, 주택건설 추진을 위한 지상공사 작업반과 주택건축을 위한 자재생산을 위한 건설운영팀으로 구성하여 파견하였다.






함흥시와 흥남시 도시재건사업의 도시계획가들은 서양 도시건축의 여러 이론들을 활용하여 사회주의 도시 건설을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서양에서는 네이버후드 유닛Neighbourhood Unit 설계기법의 기본 아이디어를 활용하여 근린주거지역Wohnkomplex를 기본 최소 단위로, 북한에서는 소구역이라는 칭하며 응용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사회주의적 도시설계를 구성하여 함흥시와 흥남시 도시재건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또한 동독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널리 퍼진 도시계획의 중요한 기본 패턴인 사회주의 도시계획의 16개 기본조항에 따라 도시재건을 실행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왜 북한의 도시재건사업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함흥은 조선왕조의 발상지이자, 북한지역의 제2의 도시로써 위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북한 정부가 평양 다음으로 재건에 힘을 기울인 곳이다. 특정 도시 전체를 외국의 기술적 원조를 받아 재건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독특하여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사례이다. 함흥시의 재건을 통해 북한 정부 수립 후 동유럽과의 관계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현재 함흥시는 조선시대 유적(함흥읍성 등 유교적 도시경관, 함흥본궁 등)이 파괴되었지만, 일제강점기 시대의 경관, 동독에 의한 재건 유산, 북한 자체 개발에 의한 모습이 혼재되어 있는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어, 남북관계개선을 통한 교류 협력 시 이를 전략적 자원으로 활용할 여지가 있다.
도시 연구 관점에서 함흥의 동독 원조에 의한 도시재건 경험은 북한의 도시 형성과 발전과정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좋은 출발점이다. 특히 북한의 타 도시의 경우에도 전쟁으로 인한 파괴 -> 사회주의 국가의 원조에 의한 재건 -> 북한 자체 사회주의 적 도시건설 -> 개혁개방 등을 위한 도시건설 및 과소투자로 인한 도시쇠퇴 등과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함흥시와 흥남시의 도시재건사업에 활용된 도시건설의 이론적인 배경이 우리나라 잠실지구의 개발과 같은 이론적 배경을 지니고 있어, 그 비교와 우리나라 도시 개발의 연구에도 많은 자료로써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의 최고 어젠다인 “통일”이후의 시대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북한에 대한, 북한 도시에 대한 관심과 연구, 그리고 여러 문화적, 역사적 단절에 따른 사항을 공유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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