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8

알라딘: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



알라딘: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 | 위대한 예술가 1
문영대 (지은이)컬처그라퍼2012-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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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100자평(2)리뷰(3)

404쪽
152*223mm (A5신)
756g
ISBN : 9788970596334


[절판]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




책소개
위대한 예술가 시리즈 1권. 한국인 최초의 예술학 박사이자 이민족 출신이라는 한계를 딛고 무려 35년 동안 러시아 최고 명문 레핀미술대학의 교수직에 있었던 천재화가 변월룡의 위대한 발자취를 조명한다. 냉전 이데올로기로 인해 우리에게 철저히 잊혀진 이름이었던 변월룡의 작품세계를 새롭게, 철저히, 밝혀내고자 한다.

사실주의 화가 변월룡, 그는 러시아 미술계의 거장으로서 존경과 인정을 받았으나 정작 너무나 사랑했던 두 조국으로부터는 버림 받은 존재였다. 귀화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북한에서는 제명되었으며, 남한 미술계에서는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재인 소나무를 즐겨 그렸고, 한국전쟁 후 포로교환의 현장에서 역사의 아픔을 기록화로 남겼으며, 수많은 한국인의 인물화를 그렸던 그의 작품 하나하나에는 한국적인 정서가 가득하고 고국에 대한 향수가 진하게 배어 있다.

북한미술의 초석을 놓는 고문 역할로 1년 3개월 동안 머물렀던 고국을 평생 그리워하며 해마다 수천 킬로미터의 먼 여정을 마다하지 않은 채 연해주를 찾을 정도로 고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변월룡, 그러나 그는 가슴 깊이 품은 고국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그림으로밖에 담아낼 수 없었던 비운의 천재였다.

갈 수 없는 고국을 그리워하며 평생 고국의 풍경, 고국의 인물과 아픈 역사를 화폭에 담아낸 변월룡은, 한국인의 정서를 고스란히 지닌 진정한 민족화가였다. 이 책에 실린 변월룡의 삶과 그림을 통해 그를 알면 알수록 그가 잊혔던 세월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우리에게 이런 거장이 있었다는 자부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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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글을 시작하며_변월룡을 이 땅에 소개하기까지

프롤로그_잊을 수 없는 고국의 추억

1장 교과서 삽화를 그리던 연해주의 조선 소년
유랑촌에서 유복자로 태어나다
천부적 재능, 예고된 화가의 길
주독야화

2장 홀로서기를 배운 스베르들롭스크 미술학교 시절
주변의 도움으로 유학을 떠나다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사건
고난의 세월
유학이 가져온 행운과 기회

3장 소련의 심장부에서 예술가의 길로
거장으로의 첫발
가족 상봉과 레닌그라드 봉쇄
사랑의 결실을 맺다
변월룡이 존경한 교수들
졸업작품 <조선의 어부들>
레핀미술대학의 교수가 되다

4장 꿈에 그리던 고국의 품에 안기다
동경하던 고국으로
평양 시절
평양미술대학 학장 겸 고문으로 추대되다

5장 북한미술계의 거대한 산이 되다
송정리 시절의 평양미술대학
동양화에 관심을 돌리다
모든 학과에 영향을 미치다
데생의 중요성 강조
한.중.일 서양화 도입에 관하여
한국 구상미술의 현주소
변월룡의 위상

6장 지란지교를 나눈 북한의 화가들
세 사람의 벗
화가 문학수
화가 정관철
북한미술계의 삼두마차가 되다
또 한 명의 학장 김주경
과로로 쓰러지다
북한으로 온 아내
고국을 떠나오던 날의 풍경

7장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귀국
의혹
동양화 연구에 몰두하다
소련의 한인 화가 뻰 봐를렌
고국을 생각하며
갈망

8장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꺾인 꿈
북한 당국의 ‘귀화’ 권유
개인 화실을 얻다
레닌그라드에서 다시 만난 정상진
소련 대사 이상조에게 희망을 걸다

9장 그리움을 그림에 담다
그림에 마음을 담다
동판화 제작에 전념하다
해외동포 고국방문단
1960년 새해를 맞다
정체성을 찾아 연해주로
연해주에서 탄생한 그림들

10장 한국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위대한 거장
얻은 것과 잃은 것
해외 여행
사랑하는 가족
교수로서의 일상과 삶
화가로서의 삶
다양한 장르의 인물화
정관철과 북한미술

11장 타국에서 큰 별 지다
삶의 황혼기

글을 마치며_한국미술사에서의 변월룡

변월룡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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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20 나는 국내에 변월룡의 존재를 알리는 일이 이토록 힘들 줄 미처 몰랐다. 그간 유족을 설득했던 일은 산이 아니었고, 정작 큰 산은 국내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을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변월룡의 예술과 삶은 나에게 그만큼 신선한 충격과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따라서 나는 앞으로도 그가 한국미술사에 자리매김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역사는 결코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에…….
- 글을 시작하며_변월룡을 이 땅에 소개하기까지 접기
P. 76 변월룡은 스베르들롭스크에서 자신도 모르게 훌쩍 커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에게 스베르들롭스크에서의 3년은 딱 ‘아픈 만큼 성숙한’ 시간이었다. 연약한 젊은이는 강인하게 성장했고, 피눈물 나는 노력만이 성공을 보장한다는 견고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고, 담당 교수를 통해 인간의 사랑과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인지를 깨달았다. 숱한 곡절과 희열, 추억 등을 가슴에 묻은 채, 변월룡의 스베르들롭스크 시절은 그렇게 저물었다. 그리고 미래의 ‘거장’은 레닌그라드로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네 살이었다.
- 2장_홀로서기를 배운 스베르들롭스크 미술학교 시절 접기
P. 117 1953년은 변월룡에게 역사적인 해였다. 서른일곱에 부교수 칭호를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고국 방문이란 행운까지 주어졌기 때문이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기회는 아주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4월의 어느 날, 변월룡은 소련 당국으로부터 느닷없이 한 통의 파견명령서를 받았다. 내용은 “소?조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당신을 북한으로 파견키로 하였으니 출국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이 3월 5일 수수께끼 속에 사망한 지 한 달 남짓한 시점이었다. 스탈린 시대에 소련 국민이 국외로 나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30여 년을 장기 집권하던 스탈린이 의문 속에 사망하는 바람에 사회적 분위기도 어수선했다. 그런 상황에서 북한으로의 파견명령서가 날아온 것이라 대학 당국조차 의아해할 정도였다. 그래서 변월룡의 북한 출국은 하나의 ‘사건’처럼 여겨졌다.
- 4장_꿈에 그리던 고국의 품에 안기다 접기
P. 225 배운성의 이 글을 보면, 변월룡 부부는 대학 근처인 양시 역에서 떠난 것이 아니라 평양에서 귀국 열차에 올랐던 것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평양에서 개최되는 8?15 9주년 미술전람회 준비와 행정적 절차 때문에 평양에 내려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거기에서 바로 귀국길에 올랐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스쳐갈 뿐인 양시 역에 그를 환송하기 위해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당시 그의 인기가 얼마나 열화와 같았는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김주경 학장은 1954년 9월 28일자 편지에서 “양시 정거장에서 선생님과 사모님이 떠나실 때 찍은 사진을 몇 장 보내드립니다. 이때 양시 정거장에서는 특별히 (우리를 위해서) 발차 시간을 2분 늦추었다고 합니다”라고 썼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환송을 지켜보기 위해 모여들었으면 발차 시간을 2분 늦추었을까. 이 대목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 6장_지란지교를 나눈 북한의 화가들 접기
P. 304 변월룡은 이번 고국방문이 무산된 것뿐만 아니라 앞으로 고국으로 갈 길이 영영 막혀 버렸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일을 겪은 후 변월룡은 거의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깊은 시름에 잠겨 있던 탓이다. 그런 시점에 이팔찬에게서 새해 그림 연하장이 왔던 것이다. 그 연하장이 시름에 잠겨 있던 변월룡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는지, 새해로 접어들면서 그는 조금씩 의욕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곧바로 ‘재일교포 북송’에 관한 동판화를 그렸다.
1960년 새해 무렵에 그려진 다음 장의 동판화는 순전히 변월룡의 상상만으로 창조되었다. 변월룡은 이 동판화에다 당시의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글로 새겨 놓았다. 그는 판화 우측에 한글로 제목과 함께 보다 작은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보고 싶은 청진을 보지 못하고 레닌그라드에서 깊은 생각만 가지고 그렸습니다. 변월룡”
- 9장_그리움을 그림에 담다 접기


추천글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중앙일보
- 중앙일보(조인스닷컴) 2012년 05월 05일 '책꽂이'
동아일보
- 동아일보 2012년 05월 05일 새로나온 책
조선일보
- 조선일보 Books 북Zine 2012년 05월 05일자
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12년 05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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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문영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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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게르첸 국립사범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대백화점 현대미술관 큐레이터와 동아 갤러리 수석 큐레이터를 지냈다. <부르델 조각전>, <모딜리아니와 에콜 드 파리 전>, <카미유 클로델과 로댕 전> 등을 전시 기획했고 경상남도 미술대전 심사위원, 경남대학교 미술교육과 겸임 조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한국 미술협회 회원,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변월룡 미술연구소를 설립하고, 10년 이상 변월룡 연구에 몰두해 왔다.


최근작 :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러시아 한인 화가 변월룡과 북한에서 온 편지> … 총 2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한국인 미술학 박사 1호, 러시아 레핀미술대학 교수였던 서양화의 거장,
평생 조국을 그리워했던 위대한 민족화가 변월룡이 돌아온다!

한국인 최초의 미술학 박사이자 이민족 출신이라는 한계를 딛고 무려 35년 동안 러시아 최고 명문 레핀미술대학의 교수직에 있었던 한국인이 있다. 사실주의 화가 변월룡, 그는 러시아 미술계의 거장으로서 존경과 인정을 받았으나 정작 너무나 사랑했던 두 조국으로부터는 버림 받은 존재였다. 귀화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북한에서는 제명되었으며, 남한 미술계에서는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1916년, 이중섭과 같은 해에 태어나 서로 다른 장르에서 미술계의 신화가 될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머나먼 이국 땅 러시아에서 작품활동을 펼쳤기에 지금껏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천재 화가 변월룡. 그는 이주민의 자손으로 연해주에서 태어나 평생을 냉전 시대의 소련 땅에서 살았지만, 죽을 때까지 한글 이름을 고집했고 자신의 그림마다 한글을 새겨 넣었을 정도로 한국인으로서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재인 소나무를 즐겨 그렸고, 한국전쟁 후 포로교환의 현장에서 역사의 아픔을 기록화로 남겼으며, 수많은 한국인의 인물화를 그렸던 그의 작품 하나하나에는 한국적인 정서가 가득하고 고국에 대한 향수가 진하게 배어 있다. 북한미술의 초석을 놓는 고문 역할로 1년 3개월 동안 머물렀던 고국을 평생 그리워하며, 해마다 수천 킬로미터의 먼 여정을 마다하지 않고 연해주를 찾을 정도로 고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변월룡. 그러나 그는 가슴 깊이 품은 고국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그림으로밖에 담아낼 수 없었던 비운의 천재였다.
장르적으로는 유화, 판화, 데생, 수채화, 포스터에서부터 내용적으로는 인물화, 풍경화, 전쟁화, 역사화에 이르기까지, 또한 동판화와 석판화, 연필화, 파스텔화, 펜화 등 변월룡의 작품은 한 사람이 그린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방대하고 훌륭하다. 그 중에서도 동판화는 변월룡이 가장 존경했던 화가 렘브란트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나서, 가히 한국의 렘브란트라 불려도 과하지 않은 경지에 이르렀다.
서양미술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구상미술이 저물어 가던 20세기 초반에 일본을 통해 일본화된 형태로 받아들였기에 기초가 취약했던 한국 근현대서양미술의 계보에서 변월룡은 든든한 버팀목이 될 존재이다. 그의 존재와 위대한 작품들이 있음으로써 한국의 서양미술은 비로소 완성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냉전 이데올로기로 인해 우리에게 철저히 잊힌 이름이었던 변월룡, 그러나 더 이상은 잊힌 채 있어서는 안 될 위대한 거장의 작품세계를 새롭게, 철저히, 밝혀내고자 한다.

한국 서양미술사의 뿌리를 세우고 기틀을 마련할 위대한 거장의 귀환

서양화의 역사를 나무에 비유하자면 르네상스에서 사실주의까지를 나무의 뿌리로, 인상주의는 줄기로, 후기인상주의 이후를 가지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20세기 초반에야 비로소 서양화가 도입된 데다 그것도 서양이 아닌 일본을 통해 일본화된 서양화를 받아들였다. 즉, 정통 서양화 기법에 대한 단단한 기초와 체계 없이 소위 현대미술이라 일컫는 후기인상주의 이후의 유파부터 받아들인 한국 서양미술은 태생적으로 한계와 취약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변월룡의 존재는 무엇보다 이렇게 허약한 한국 서양화의 뿌리를 튼튼히 해준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또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통해 조국 스페인의 잔혹한 참상에 항거하고, 심지어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작품을 남길 때, 한국전쟁을 우리 땅에서 직접 겪은 우리에게는 마땅히 내세울 만한 인물화나 역사화, 기록화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여기에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는 변월룡이라는 천재 화가의 존재가 있었다. 그간 우리나라에서 이런 장르의 걸작이 나오지 못한 이유는 물론 조국의 현실을 외면한 한국 화가들의 역사 인식도 간과할 수 없겠지만, 실지로 그런 복잡한 구도와 웅대한 규모의 작품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화가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이유라 하겠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변월룡의 발견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샤갈도 입학하지 못했다는 러시아 최고 명문 레핀미술대학에서 학생으로 12년간 수학하고 미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35년간 레핀의 교수를 지낸 이 거장은 그 탁월한 실력을 고국에 관한 기록화와 인물화를 남기는 데 발휘했다. 〈북한에서〉, 〈포로 교환〉, 〈판문점〉, 〈평양 복구〉, 〈남북 분단의 비극〉, 〈남조선의 자유와 통일을 위하여 전진!〉, 〈북조선 해방 기념일 1945년 8월 15일, 평양〉등 작품 수도 엄청날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작품은 변월룡이 지녔던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는 수작들이다. 물론 이 그림들은 북한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지만, 이 또한 우리 역사 속의 엄연한 현실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변월룡은 한국의 역사적 인물들의 초상화도 많이 남겼다.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를 비롯하여 문학가인 벽초 홍명희, 민초 이기영, 화가이자 수필가로 유명한 근원 김용준, 남북의 부자(父子) ‘새박사’로 유명한 원홍구 박사 초상 등 다양한 인물화도 우리 미술계를 풍성하게 해주는 큰 요소가 될 것이다.
변월룡은 냉전 시대를 살며 남한 땅은 밟아 보지도 못한 채 북한과 짧은 시간 교류를 가졌을 뿐이지만, 그의 그림은 정치와 선동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갈 수 없는 고국을 그리워하며 평생 고국의 풍경, 고국의 인물과 아픈 역사를 화폭에 담아낸 변월룡은, 한국인의 정서를 오롯이 지닌 진정한 민족화가였다. 이 책에 실린 변월룡의 삶과 그림을 통해 그를 알면 알수록 그가 잊혔던 세월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우리에게 이런 거장이 있었다는 자부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변월룡은 소수민족 화가라는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타고난 천재적 자질과 부단한 노력으로 거장의 반열에 올랐으며, 러시아 내의 한인사회에서 한국인의 긍지와 자부심 그리고 한국의 얼을 드높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비록 변월룡은 이역만리 타국에서 잠들었지만, 철저하게 한국인으로서 살았던 그의 삶과 위대한 작품을 통해 이제라도 한국미술사에서 그의 존재와 위상은 깊이 있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평생을 한국인으로 살았고 죽어서도 한국인이기를 원했던 진정한 민족화가

변월룡은 1953년 당시 소련과 북한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북한의 초청을 받고 꿈에도 그리던 고국의 땅을 밟았다. 평양미술대학의 기초를 세우고 북한의 화가들을 지도한 스승으로서 북한미술의 발전에 기여했던 그의 이름은 신화이자 전설로 남아야 했지만, 영구 귀화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숙청되었기에 공헌의 기록은 삭제되고 그의 흔적은 잊혀 갔다. 또한 분단으로 경직된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공산국가 소련의 화가인 변월룡의 존재를 또 하나의 조국 남한에서조차 완전히 지워 버렸다.
변월룡은 1990년 5월 25일 뇌졸중으로 타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살아생전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한반도의 나머지 반쪽은 영원히 밟아 보지 못한 채, 더욱이 4개월 후면 한?러 수교가 체결되는 사실조차도 모른 채 영면에 들고 말았다. 죽기 전 남긴 유언대로 무덤 비석에는 그의 이름이 한글로 새겨져 있다. 고국은 그를 버렸을지언정 그는 고국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냉전 시대에 평생 남의 땅에서 한국인의 긍지와 자부심을 지키며 살아가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그를 진정한 ‘민족화가’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마땅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평소 한국의 소나무를 그토록 좋아했고 렘브란트를 존경해마지 않았던 변월룡, 한국인보다 더 철저한 한국인으로 살았던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어언 22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러시아 미술의 심장부인 레핀미술대학에서 인정과 존경을 받았던 위대한 작품세계와 한국미술사에서의 중요한 위치에 비해 변월룡이란 이름은 우리에게 너무도 낯설기만 하다.
변월룡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에게 매료되어 10년 가까이 변월룡을 연구한 필자 문영대는 그간에도 변월룡의 이름과 작품을 알리고자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예술을 예술로 보지 않고 정치적인 시각에서 따지는 행태로 인해 번번이 무산되었다.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오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해 완전히 잊혔던 우리 미술사의 숨은 보배 변월룡, 이제는 정치적인 이념에서 벗어나 예술이 원래대로의 가치로만 평가됨으로써, 그 이름 석자가 한국미술사에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 책을 출간한다. 접기


9.6





지난 주 경향신문에서 기사를 보고 변월룡 화가에 대한 책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작가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도 좋았지만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한국적인 서양화라는 점에서 신선하고 작품 또한 훌륭했습니다.
빛나는 k 2012-05-16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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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대 작가가 오랜 동안 심혈을 기울여 쓴 변월룡을 우리에게 소개하는 평전이다. 해방 이후 북한에서 미술 관련 지식인들의 동향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필독할 만하다. 나아가, 책 편집도 유려하다.
청허 2013-11-13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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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선각자 변 월룡

나는 역사,위인의전기류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 그래서 지인으로부터 이책을 소개받고 반세기동안 금기시되어왔던 북한에 관련되어 잃어버린 우리역사의 한조각을 찾아 맞추는 느낌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책을 읽어가다보니 찾아낸 조각은 지금까지 내가 모르고 지내던 새로운 동굴로 연결되는 통로 였다. 그 새로운 동굴안을 탐사하면서 우리의 선각자 변 월룡이 만들어낸 새로운 세상이 그곳에 펼쳐져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점점 그 놀라움은 커져만 갔다. 미술에 문외한인 내가 저자가 설명한 작품의 감상포인트를 점검하면서 책을 읽어가자니 시간이 좀더 걸리는 것 같았지만 그동안 훌륭한 선각자를 모르고 지냈다는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어내보려는 마음으로 참아낼 수 있었고 , 책을 읽고난 후의 감동이 나의 인내심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음에 많은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이 책이 나오기까지 많은 난관이 있었을 텐데 그것들을 극복하고 책을 완성한데대해 경의를 표하며 계속 변 월룡에대해 연구하겠다는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저자의 다짐을 응원하고 싶다.

우리의 잊혀졌던 현대미술사의 일부를 일깨워주고 우리의 선각자 천재화가 변월룡에대해 알게해준 저자에게 고마운 인사를 드리며, 늦었지만 그 후손들이라도 우리가 품고 교류해야한다고 생각하고 , 우리나라에서 천재화가 변 월룡전이 성대하게 열리기를 간절히 고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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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gsyd 2012-05-17 공감(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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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

책 소개글을 보고 호기심에 책을 손에 들었는데 한, 두페이지 책장을 넘기다 보니 어느 순간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었다.

평소에 미술에 큰 관심이 없어 ‘변월룡’이란 화가가 있었다는 것도 몰랐지만 알았다 하더라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일대기에 무슨 관심이 가겠나? 나 혼자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에

그런데 변월룡은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라고 에둘러 표현할 만한 그런 평범한 인물이 아니란 것을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을 읽으면서 절실히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일제시대에 모진 탄아블 피해 연변으로 이주하였으나 겨우 자리를 잡은 시점에 스탈린의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정책(모든 재산을 뺏기고 맨주먹으로 가축용 기차에 태워져 허허벌판에 굶주린 채로 버려진 참혹한 행위)으로 모든 생활기반이 파괴되는 역사의 무시무시한 격류를 헤치고 뼈를 깎는 무하한 노력과 타고난 재능으로 주위 사람들을 존중하며 한국의 서양화를 반석에 올려놓는 변월룡의 일대기는 너무나 벅찬 감동이었다.



북한의 서양화를 수준에 올려놓았으나 국적을 고치지 않았다고 하여 반역자로 몰려 토사구팽당한 비운의 천재화가, 변월룡! 북에서는 버림받고 남에서는 잊혀진 비운의 천재화가!

한국과 소련의 수교 직전에 타계하여 꿈에도 그리던 대한민국 땅을 밟지 못한 그의 사연에 너무나 마음이 저렸다.

남북의 극한대치시대에 공산국가에 거주하였기에 북한을 주로 그렸던 그이긴 하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대한민국도 조국으로 살아있었을 것이다.



자료수집의 열악한 여건을 극복하고 잊혀진 거장을 한국근대사와 자연스레 연결하여 잔잔하고 감동적으로 그려낸 작가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고 나처럼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편하게 부담없이 읽을 수 있어 책을 읽는 내내 귀한 그림을 눈에 집어넣으며 평소에 접하기 힘든 미술관련용어를 배울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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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ene 2012-05-10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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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거장의 귀환

페이스북에서 변월룡을 소개한 유튜브 동영상 링크를 보고 나서 관심이 생겨 책을 사게 되었다.

이렇게 훌륭한 서양화의 거장이 분단이라는 아픈 역사 때문에 잊혀져 있었다는 사실이 마음이 아팠다.

남과 북의 경직된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비극. 고국을 떠나야만 했던 아픈 민족의 역사 속에서 태어난 이주민 3세대 까레이스끼. 그가 남한에서 태어나 활동했거나 미국 이민 3세대였다면 진즉 우리에게 알려지고 신화적인 존재로 받들어졌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금할 수가 없다.

생전에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이제라도 이 거장의 존재를 알려준 저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러시아에서 우연히 변월룡의 작품을 접하고 10여년에 걸친 끈질긴 연구 끝에 변월룡의 삶과 작품세계를 완전히 되살려낸 저자의 노력과 열정이 새삼 놀랍다.

그림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책에 실린 동판화와 유화로 그려진 인물화들은 세계적인 수준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저자의 바람대로 전시회가 성사되어 변월룡의 작품을 직접 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미술과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기를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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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rlady 2012-05-16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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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 YES마니아 : 로얄 이구역의절대자 | 2017-09-18


원문주소 : http://blog.yes24.com/document/9864479
영국의 케네드 클라크의 말도 참조할 만하다. <명화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그는 "명화란 격이 좀 떨어진다 해도 그 시대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규정지으면서, "만일 한 미술가가 감동할 만한 회화적인 요소가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면 그는 운이 좋은 화가이며, 그 화가에게는 그만큼 명화를 남길 확률도 높다"라고 했다. 그의 말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명화를 남길 확률이 많았는데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한 채 잃어버렸다고 봐야 할 것이다. (385)


변월룡은 시대적 상황을 외면하지 않았고,
그 누구보다 그 시대의 언어로 말을 한 예술가다.
이런 천재적인 화가가 남북분단 상황으로 인해서
환영받지 못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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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도 북한도 기억하지 않은 이름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 YES마니아 : 로얄 리우 | 2017-09-14


원문주소 : http://blog.yes24.com/document/9859007


어느 책 뉴스에서 스치듯 보고 반했다가 잊었던 책이다. 작년 덕수궁미술관에서 기획전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운명처럼 이끌려 찾아가게 되었다. 압도적이었다. 고희동의 어둑함과는 달랐다. 오지호의 밝음과도 달랐다. 렘브란트가 조선사람을 그린 것 같은 충격이었다. 저자는 국립 러시아 미술관에서 한국인의 모습이 그려진 서양화를 발견한다. 작가의 이름은 펜 바를렌. 러시아인일 것이라고 짐작했던 화가는 연해주의 유랑촌에서 태어난 고려인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본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변월룡은 도시 유학길에 오른다. 학업과 그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던 그는 차근차근 성장해 젊은 나이에 국립 대학 교수까지 맡게 된다. 이어 북한-소련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꿈에 그리던 고국을 방문하게 되었고 북한 미술의 발전을 위해 힘썼지만 당국의 귀화를 거절한 이후 다시는 고국 땅을 밟을 수 없었다. 북한은 그의 이름을 지웠고, 남한은 그를 모른 척 했다. 저자는 상처받은 유족들의 마음을 힘들게 돌려 대규모의 전시회를 성사시켰다. 그가 태어난지 백년이 지난 해, 늦었지만 만나게 되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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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리뷰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 - 북한 미술의 근간을 만드신 분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 유성운 | 2016-03-31


원문주소 : http://blog.yes24.com/document/8529710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최근 까레이스키 즉 고려인 화가 변월룡 선생님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누군가 슬쩍 이 분에 대해 얘기를 해줬는데 이 분이 북한미술의 근간을 다지신 분이시다는 말을 해주더군요. 북한 사람도 아닌 고려인이 북한 미술의 근간을 다졌다? 흥미로운 부분이 많아 전시회 가기전에 이 책을 읽고 가는게 좋을것 같아 한번 읽어봤습니다.




변월룡 선생님은 연해주 태생으로 어릴적에 그냥 한번 그린 그림을 그의 할아버지가 소질을 알아보게 하고 미술교육을 시키게 됩니다. 문제가 넉넉하고 유복한 환경이 아니라 정말 어려운 환경속에서 아르바이트를 해가면서 그림을 공부하게 되는데 나중에는 그의 그림실력을 인정받아 교과서 그림까지 그리게 됩니다. 다시말해 같은 또래 학생들이 다시말해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는 교과서의 그림을 그렸다는겁니다. 어린 나이에도 그림 실력이 대단했다고 말할수 밖에 없습니다. 나중에는 출판사 그림 뿐만 아나리 극장 포스터 혹은 영화관의 간판 그리는 일도 하면서 하면서 미술공부를 하게 됩니다.




나중에 대학진학도 당시 러시아에서 내로라 하는 미술학도들이 모인다는 대학에서도 인정받으며 실력을 쌓아가는데 나중에 부교수자리를 제의 받으며 학교에 남아 강의와 그림 그리는데 시간을 보내던중

1953년 소련의 정부에서 북한으로 판견근무를 명합니다. 이는 6.25 전후 국가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실력있는 미술인들이 부족과 교육시스템 미비로 어려운 북한 미술을 체계적으로 갖출 인재를 보내달라는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여져서 변월룡 선생은 북으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15개월동안 북한의 평양미술대학에서 강의주제, 자료, 교과서등 체계적인 미술지도 시스템을 갖추는데 노력합니다. 그의 뛰어난 미술솜씨에 북한의 미술계는 존경의 다하였고, 변월룡선생도 고국에 돌아왔다는 즐거움에 기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나중에 북한으로의 귀화를 권유 받았는데 강한 권유가 아닌 은근 슬쩍 받은 권유였고 또한 뢰핀대학문제, 소련에 있는 가족문제로 거절했었는데 그게 원인이 되어 이질치료를 위해 북을 떠났다가 나중에는 재입국이 영영 못하게 됩니다.




또한 북한 최초의 김일성체제 전복시도인 8월종파사건의 영향으로 소련파들이 숙청 당하면서 그의 입국은 영영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가 배신자라는 소문까지 돌았으니 재입국의 영영 물건너간 셈이죠. 결국 고국을 그리워하면서 매년 연해주를 가서 그림 그리는 일로 자신의 뿌리를 재확인하여 일생을 보내다 1990년 뇌졸증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가 얼마나 고국을 그리워했는지 비석을 보면 그의 이름을 한글로 적어져 있는걸 확인할수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배신자로, 남한에서는 그의 존재조차 몰랐던 위대한 화가.

러시아에서 가장 알아주는 화가중의 한명이며, 어떤 이들은 그를 러시아의 램브란트라는 칭호까지 부여하기도 합니다. 변월룡 선생님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면 북한의 미술을 조금이나마 엿볼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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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오랜기간의 열정이 빛을 발하다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 YES마니아 : 골드 jerry772 | 2016-03-27


원문주소 : http://blog.yes24.com/document/8522391
책 제목처럼 우리가 '잃어버린' 화가 변월룡선생님의 여러 귀한 작품들과 사연들로 인한 작가의 고뇌를 느끼게 해주는 소중한 책을 따뜻한 봄날에 만났습니다. 덕수궁 미술관에서 하던 이쾌대 선생님 전시에 뒤이어 변월룡 선생님 전시도 여러번 봤고요. 전시를 본 분들은 알겠지만 오픈날짜에도 웬지 뭉클해졌습니다. 시기별로 잘 짜여진 구성과 전시도록을 능가할만한 어마어마한 수의 작품들이 눈에 확 들어와서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이렇게까지 꼼꼼하게 여러 작품을 엮어둔 작가의 지난 오랜 시간속 고군분투에 충분히 놀랄즈음 알기쉽게도 시간의 흐름을 따라 화가의 상황을 그릴수 있게되었습니다. 또한, 발견된 지인들과의 수많은 편지들과 가족의 인터뷰를 통한 증언들이 힘을 실어 화가를 더 이해할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화가의 능력을 넘어 그를 평가하는 내용이 풍부하기에 웬지 너무 미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과연 이런 인물이 존재 가능한가에 의심도 송구스럽게도 해봤습니다. 에칭의 섬세함과 사연이 있는 각각의 초상화에서 품어내는 온화함 그리고 늘 정착하지 못한 국제적 미아로서 고국에대한 애매한 그리움등이 책을 읽으면서 변선생님이 더 처연하게 다가왔습니다. 시간이 더 늦지않게 전시를 비롯하여 이 책이 알려져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듭니다. 잃어버린 그분을 찾으러 햇살이 한껏 뽐내는 봄날에 변월룡 선생님전시와 함께 이 책이 동행을 해준다면 더할나위없이 좋을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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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문화리뷰(화가)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변월룡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 YES마니아 : 로얄 스타블로거 : 골드스타 woojukaki | 2016-03-08


원문주소 : http://blog.yes24.com/document/8480880


전시의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화가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2009년 정도 인듯 하다.그런데 화가의 이름 보다 그림 속 인물들의 이름이 익숙했기 때문에 그림을 본 후 화가의 이름으로 다시 관심을 돌렸던 것 같다. 바로 '근원 김용준'과 '민촌 이기영' 이란 인물화였는데 두 작품을 모두 본 것인지는 기억이 가물하다.다만 <러시아 한인 화가 변월룡과 북한에서 온 편지>라는 책을 2009년에 찾아 보았다는 메모가 전시를 보고 난 후 화가에 대해 검색을 해 본 것이 아니었나 싶다.그리고 시간이 흘러 2012년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출간 소식을 접했다.반가운 마음에 강연까지도 참석했었는데 ,어쩐일인지 메모해 둔 것을 찾을 수 가 없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읽을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 잘 넘어가지가 않았다.앞서 절판된 책을 안타까워했던 기억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그런데 '변월룡의 국내 최초 회고전'이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오랫동안 묵혀 두고 읽지 못했던,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변월룡>를 드디어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온 거다.



이 책은 '변월룡'을 잘 모르는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접근방식을 지녔다는 생각이 든다. 생애부터 시작해서,작품을 이해하고 화가가 함께 활동했던 이들의 편지 그리고 가족들의 인터뷰와 자료를 통해 저자가 자연스럽게 풀어가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역시 가장 큰 힘이라면 예술가로서의 변월룡을 만나기 보다 인간 변월룡으로 먼저 만날수 있었던 것이 화가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 같다.변월룡 역시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받으며 살았던 사람이었던 거다.가난과 아버지의 부재는 차지하고라도 고려인이라는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고통,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 등이 그렇다.어디 그뿐인가 화가로서 어느 정도 위치에 올랐을 때는 북한에서 권유한 귀화 거부로인해 배신자라는 멍에를 지게 되지 않던가.누구보다도 한민족의 미술발전을 위해 애쓰고 노력했지만 물거품이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역사에 만약이란 가정이란 무의미하지만 북으로부터 귀화를 권유 받지 않고 그곳에서 후배들을 더 양성했다면 우리가 만나보게 될 그림은 더 무궁무진 하지 않았을까? 물론 화가의 가르침 아래 훌륭한 화가들도 더 나왔을 테고.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화가가 주로 그린 분야 가운데 '인물화' 때문에 더욱 그렇다.여전히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보니 월북예술가들에 대한 평가가 인색하기도 하고,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을 텐데,변월룡 화가 덕분에 그림으로라도 만날수 있는 예술인들이 있다는 것이 반가울 따름이다.김용준,이기영,최승희 한설야 등등 그런가 하면 역사적으로 기록될 장소들 역시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사진의 역활을 그야말로 톡톡히 한 샘인거다.그러나 한민족 어디로 부터도 바르게 평가되지 못한 화가였기에 소실된 작품도 많을 뿐더러 북으로 보낸 편지들은 어느 정도 남아 있을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며 행운이라고 생각할 만한 점들이 많았는데 특히 선생이 생각한 미술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에 대한 이야기였다.그림에 관심을 두고 있거나 그려 볼까 하는 마음이 있다거나 혹은 왜 잘 그려지지 않을까? 라는 고민을 하는 이들에게 그야말로 본질적인 질문으로 접근할 수 있는 텍스트가 작품 사이사이 에피소드 사이사이 소개된다.레핀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니 미술에 대한 해박함이야 당연하겠지만 설명이 어렵지도 않을 뿐더러 전혀 시대와 동떨어진 느낌이 들지 않아 놀라웠다.



화가에 대해 가졌던 처음의 관심은 어쩌면 단순한 호기심정였는지도 모르겠다.근원김용준 선생을 그렸다는 사실이 그저 궁금했을 정도였으까.그런데 책을 읽어가면서 인물화를 유독 많이 그린 이유가 혹 그리움 때문은 아니었을까? 에 대해 자연스럽게 물음이 따라온다.소위 말하는 성공도 했고 단란란 가족을 꾸렸지만 늘 소수민족으로 살아야 하는 설움.동시에 귀화를 거부 당한 이후 우정을 나누고 예술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나누던 이들을 만날수 없었으니까 말이다.그래서였을까? 책을 다 읽어 갈 즈음 가장 눈에 들어 온 건 연해주 시절 그린 소나무 연작 시리즈였다.화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했다.일그러진 소나무가 분단의 아픔을 그린 것이라는 설명도 있지만 벗들을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는 화가의 절규가 내게는 더 크게 느껴졌다. 그래서 렘브란트 영향으로 동판화 작업을 했다는 사실 보다 소나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온몸으로 그려냈을 화가의 마음을 나는 더 깊이 기억하고 싶다.










연해주 나훗카의 소나무 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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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숙

6 December 2019 ·



친구 부탁으로 미술책 떠오르면 <미로화방>에 올려요. 가끔 페이지 좋아요, 부탁해요가 뜨더라도 넘 뭐라 마셔요^^;

사진마다 설명 붙이고 싶은데 페이지에선 그게 잘 안되네요 ㅋㅎ

https://www.facebook.com/108303193961739/posts/125121278946597/


+5

미로화방
6 December 2019 ·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

만약 지금 집을 떠나서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데, 딱 한 권만 들고 나올 수 있다면 어떤 책을 고를래, 라고 누군가 제게 묻는다면. 단연코 저의 한 권은 문영대샘이 쓰신 <변월룡>(2012, 컬처그라퍼)입니다.

7년 전(7년이나 흘렀구나), 이 책을 읽었을 때는 국내에서 변월룡 전시회가 어떻게 거부됐는지 토로하는 저자의 말에 가슴이 아팠는데요.

그 동안 2016년, 2018년 덕수궁에서 두 번 만났고, 올해는 학고재에서도 전시회를 했네요. 2019년 학고재 전시회는 제목마저 <우리가 되찾은 천재화가, 변월룡>. 책도 초판을 다시 내면서 제목이 바뀝니다.^^

책에는 구한말 신한촌부터 고려인들의 강제이주, 2차 세계대전을 거친 후 해방과 분단을 배경으로 명민하고 강인했던 한 소년이 어떻게 소비에뜨 화가로 성장하는지가 당시의 교육제도, 미술학교, 의식주 여건, 주요 인물들, 정치적 분위기까지 빠트리지 않고 챙기면서 나타납니다.

인용되는 그림과 편지 자료들도 귀하고요.

한 문장, 한 문장이 정보로 가득하지만, 제가 유난히 집착했던 대목은 당연히 화구와 물감, 미술교재에 관한 대목이었죠.^^

먼저, 1953년 4월 북조선의 초청으로 평양에 가는 레삔미술대학 변교수님. 태어나 처음으로 그리던 고국 산천을 봅니다. 1달 걸려 기차 타고 도착해서 2달 일정 마치고 1달 걸려 기차 타고 돌아오는 게 4달 출장의 여정이었는데, 더 머물러달라는 북조선 예술계의 강력한 요청과 열렬한 환영으로 3년을 더 머물기로 하고 평양미술대학 설립을 돕습니다.

“변월룡은 동양화학과를 새로 개설했고, 잘못된 미술교육 프로그램 및 학년별 커리큘럼을 전면적으로 재수립했다. 심지어 사물을 비추는 각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림 그리는 데 적합한 조명 설치에서 물감을 포함한 간단한 화구들을 스스로 만드는 방법까지 전수해주었다.>”(140쪽)

흠. 조명설치와 화구는 그렇다 치고 물감은 어떻게 직접 만들었을까요? 여튼 그랬다는데, 그러다 건강도 나빠지고 부인과 가족들의 부탁으로 일단 소련으로 돌아갑니다. 사실 소련으로 돌아가서 준비해 올 것도 많았습니다.

“<변월룡은 미술 교재를 비롯하여 수업에 필요한 각종 자료들이 절실했다. 그가 만든 미술 교재는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으로 만든 것일 뿐이었다. 완벽한 교재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가져올 참고자료들이 너무 많았다.> 또 변월룡 자신을 위한 그림 재료들도 챙겨야 했으며, 오랫동안 못 본 자식들 또한 눈앞에 아른거렸다.”(223쪽)

“다시 러시아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변월룡은 고국으로 가지고 돌아갈 자료 수집에 열성을 쏟았다. 서점에서 구할 수 없는 중요한 책들은 지인이나 대학도서관 등에서 빌려다가 열심히 옮겨 적었고, <미술 재료를 사기 위해 분주히 화방을 들락거렸다. 그래도 구할 수 없는 자료나 재료는 암시장을 뒤지거나 먼 모스끄바까지 가서 구입해 왔다.> 당시 레닌그라드는 ‘레닌그라드 봉쇄’의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생필품 외에는 부족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스끄바에 다녀오는 사람이 있으면 필요한 물품을 구입해 오도록 부탁했다고 한다.”(229쪽)

“한편으로는 한설야에게 레핀 화집을, 문학수 정관철 배운성 등을 위해 벨리라(백색안료), 목각칼, 마스치힌(페인팅 나이프) 등 그림 도구와 재료들을 보내 주었다. 조각가 김정수에게는 조각 수업에 참고가 될 만한 <조각실기강좌 교수 요강>을 보냈다. 변월룡이 북한의 지인들에게 자신의 사비를 털어 가면서까지 선물을 사 보낸 이유는 물론 고국을 사랑했기 때문이지만, 그것 외에도 당시 고국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부인 제르비조바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북한에서는 무엇 하나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북한의 그러한 현실을 직접 목격한 터인지라 남편은 자신의 월급을 털어서 북한 화가들 개개인에게 필요한 미술재료와 미술서적을 사서 선물로 보냈죠. 본인이 일일이 뛰어다니며 구입해서 포장을 했기 때문에 몹시 바빴지만, 남편은 그렇게 하는 것을 전혀 귀찮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큰 보람으로 여기며 기뻐했었죠.>”(256쪽)

소비에뜨라고 해서 당시 미술재료 구하는 게 넉넉하거나 쉽지 않았을 텐데요. 시장경제가 아니니 돈 준다고 마음대로 살 수도 없었을 테고. 참 대단한 정성이었습니다.

변월룡은 동양화도 깊이 연구했다고 해요. 소련에서 전해줄 재료들도 있었지만 북조선 지인들에게 선물로 받는 재료도 있었습니다.(절대 저의 속 좁은 반도 자존심 때문에 언급하는 건 아닙니다^^)

“초청장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변월룡은 북한을 떠나올 때 가지고 온 벼루와 먹, 붓, 화선지 등을 화실에 펼쳐 놓고 동양화 연구에 여념이 없었다. 그 당시 변월룡은 평양미술대학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으려는 꿈 외에도 김용준과 함께 동양화를 민족 고유의 예술로 승화 발전시키려는 열망을 품고 있었다.(생략)

"변월룡의 동양화 연구는 북한의 화가들에게도 동양화에 대한 큰 관심과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한설야는 1955년 5월 29일자 편지에서 <정관철 동지의 말을 들으면 여기서 가지고 가신 동양화 용지를 벌써 거의 다 쓰신 것 같다 하오니 만일 그 종이가 없사오면 나에게 편지로 알려 주십시오. 중국에 가는 길에 꼭 사 보내겠습니다.>라고 썼으며, 문학수는 동양화를 자신이 직접 그려 볼 생각까지 갖는다.”(240쪽)

기다리던 초청장은 끝내 오지 않습니다. 올해는 보낼게, 몇 달 후에 보낼 게, 하다가. . .어느 덧 1960년. 그 사이 변월룡과 가깝던 예술인들은 숙청으로 후두둑 사라지고 변월룡은 귀화거부로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초청장이 오지 않았던 것을 알게 됩니다. 북조선 귀화보다는 소련인으로 남아서 왕래교류하며 북한미술의 폭을 넓히려 했던 변월룡의 계획이 좌절된 거죠.

연해주 신한촌에서 호랑이 잡던 포수 할아버지가 사주신 종이와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할아버지가 데려다주신 서당에서 서예를 배우면서 공부를 시작했던 변월룡, 아르바이트로 신한촌 극장에서 나운규 영화의 간판그림을 그리고 조선어 교과서 삽화를 그렸던 변월룡. . . 평양미술대학을 설립하고 교수진과 학생들을 가르치며 조선 미술을 기르고 싶었던 변월룡은 그리워했던 고국에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됩니다.

북조선 영구입국금지...일종의 숙청이었죠.-_-;

이후 변월룡은 신한촌을 자주 방문하며 풍경 동판화를 남기고 나중에는 사할린까지 가서 인물화를 그리는데요.

“한편 변월룡은 답답한 화실을 떠나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아서인지 캔버스나 카르통을 편하면서도 많이 넣어 다닐 수 있도록 자신이 직접 고안해서 만들어 사용했다. 그것을 본 북한의 화가들도 똑같이 만들어 썼음을 아래의 편지에서 읽을 수 있다.

"<저는 내일 밤 주을온천에 휴양 갑니다. 20일 기간인데 거기서 박달 선생의 에츄드를 해가지고 올 생각입니다. 이번 저도 변 선생이 에츄드 쓸 때 평양에 가지고 나오시곤 하던 캔버스 넣는 것을 만들었지요. 큰 것, 작은 것 12장 들어가게 만들었는데 아주 좋은 것이 되었습니다. -정관철, 1955년 5월 8일>

"그 외에도 변월룡은 자신에게 필요한 용구는 스스로 만들어 썼다고 한다. (아들) 세르게이는 “아버지는 손재주가 유난히 뛰어나 주위 화가들이 부러워하면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습니다.(생략)”라고 덧붙인다.”(348쪽)

어떤 걸 직접 만드셨던 걸까요?? 우리 건축과나 미대 학생들이 메고 다니는 그 동그란 통을 말하는 걸까요? 캔버스를 담아서 들고다니는 통? 화판?

누군가 그때 변샘에게 배운 화구제작은 이러한 거였다, 하고 기록을 남겼기를 바라봅니다. 그 자료가 북조선 어딘가에 있기를.

변샘은 1990년에 돌아가셨어요. 한소수교 4개월 전. 조금만 더 사시고 남한에 오셔서 환영 한 번 받고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윤동주 시인도 그렇고. 이런 분들은 아무래도 돌아가시면서 온 힘을 다해 마지막 기운을 뿌려. . . 화해도 이루고 해방도 이루셨던 걸까요.

**************

미로화방 주인장 말로는

1. “물감은 우리나라 미대생들도 80년대 초반까지는 종종 직접 만들어 썼어요. 공업용 안료를 잘게 빻아서 린시드 오일에 개면 질이 좋지는 않지만, 유화물감이 됩니다. 화이트는 아연판을 산화시켜서 나온 백색 부산물을 떨어서 쓰기도 해요. 물론 질은 안 좋지만.^^;”

2. “캔버스는 틀에다가 천을 씌우는 일반적인 캔버스만 있는 게 아니라 부피를 줄이기 위해 두꺼운 합판에 천을 붙여서 쓰기도 한답니다. 그걸 <카르통>이라고 부르는데, 카르통은 얇아서 가방을 잘 만들면 몇 개씩 꽂아 넣고 다닐 수가 있어요. 요새는 그러는 사람 없지만 십 년 전만 해도 그거 만들어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간혹 있었어요.”

그랬다고 합니다.^^

#문영대
#변월룡
#뻰바를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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