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7

김원봉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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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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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방부 심벌
국방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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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인민공화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김원봉
金元鳳 | Kim Won-bong
IE002494971 STD
출생
경상남도 밀양군
(現 경상남도 밀양시)
사망
1958년 11월 (60세)
본관
아호
약산(若山)
학력
신체
163cm[1]
직업
독립운동가, 군인, 정치인
경력
의열단[2]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중앙위원
민족혁명당 총서기
조선의용대
한국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
북한 지역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인민공화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북한 내각 국가검열상
북한 내각 로동상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정당
조선공산당재건동맹
→ 조선민족혁명당
→ 인민공화당
→ 조선인민공화당[3]
정치 노선
이념

1. 개요2. 일생
2.1. 출생2.2. 유년 및 청년 시절2.3. 항일무장투쟁
2.3.1의열단 활동
2.3.1.1. 1925년 동아일보 신문 기사 전문
2.3.2. 황포군관학교 입교2.3.3. 중국에서의 본격적인 활동2.3.4민족혁명당 결성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폐지 운동2.3.5조선의용대 창설 및 분열2.3.6대한민국 임시정부 합류와 갈등
2.4. 광복 후 남한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 지도자로서의 행적2.5. 월북 후 북한에서의 행적
2.5.1. 북한 정권 수립 참여2.5.2. 6.25 전쟁 참여2.5.3. 전쟁 후 활동 및 숙청
3. 평가
3.1. 긍정적 평가3.2. 부정적 평가
4. 서훈 및 독립유공자 지정 논란
4.1. 긍정4.2. 부정
5. 오해와 사실들6. 가족7. 여담8. 어록9. 인물 연표10. 대중매체에서11. 참고 문헌 및 저자 소개12.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약산img2
△ 가장 유명한 사진. 해방 이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좌익 계열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이자 북한의 정치인이다. 독립운동가로서는 의열단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어 박재혁김익상김상옥김지섭나석주 등 많은 단원들의 일제 요인 암살과 식민통치기관 파괴 활동을 이끌었고, 중국 관내에서 독립운동진영 통합 운동으로 결성된 민족혁명당의 총서기로 활동하였으며, 군사조직으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총대장이 되어 중국 국민당 정부와 협력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하였다. 이후 일부 대원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여 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부사령관 등으로 활동하였다.

독립운동 노선에 있어서 그는 무장투쟁 이외의 다른 방식의 독립운동을 비판하면서 독립운동의 주류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폐지를 앞장서서 주장했고 때문에 우익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많은 갈등을 빚었다.[4] 또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혁명가 최창익김두봉 등과 치열한 헤게모니 다툼을 벌였다. 초기에는 좌익 독립운동 단체에서 의열단의 활동을 한 김원봉이 압도적인 위세를 과시했으나 1940년 이후 공산주의자 최창익과 김두봉이 주도권을 잡으며 연안파가 탄생했고, 김원봉은 연안파에 의해 철저히 배제되고 말았다.

연안파에서 배제된 김원봉은 한때 반목했던 임시정부에 합류하고 광복 때까지 그곳에서 활동하다가 광복 후 결국 북한이 아닌 남한에서 좌익 계열의 인민공화당을 이끄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남한 내의 좌익 계열 인사들과 단체들이 미군정과 우익 세력에 의해 와해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1948년에 월북했다. 이후 북한 정권 수립 과정에서 북로당 계열로 부터 '남조선 출신 비공산주의자'라는 지분으로 배려를 받아 국가검열상이 되었으며 6.25 전쟁 때는 전시 로동상 등을 역임하였으며, 전쟁에서의 공훈을 인정받아 노력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고 또다시 로력훈장을 수여받았으나, 1958년 숙청되어 정치범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추정된다.

2. 일생[편집]

2.1. 출생[편집]

김원봉은 1898년 9월 28일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밀양읍 내이리 901에서 태어났다.[5] 독립운동 활동 내내 함께했던 윤세주 생가는 바로 10m 거리에 있어 바로 옆 집 이웃사촌 관계였다. 그 외에도 의열단 창단멤버 중 5명이 같은 밀양 동화중학교 출신으로 태어날 적부터 바로 옆 집 친구였던 사람들끼리 합심해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뛰었던 셈이다.

어머니 이경념은 김원봉이 4살 되던 해에 동생 김경봉을 출산하다가 사망했다. 아버지 김주익은 영양 천씨와 재혼하여 8남 2녀를 두었다. 일찍부터 개화 세례를 받은 중인 집안으로 부농이었다.

2.2. 유년 및 청년 시절[편집]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소학교(초등학교)를 다녔고, 민족주의자 을강(乙江) 전홍표(全鴻杓, 1870년 1월 3일 ~ 1929년 8월 11일2018년 건국포장 추서.)가 사재를 털어 세운 동화중학 2학년에 편입하였다. 전홍표를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한 일제에 의해 동화중학이 폐쇄되자 50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표충사에 들어가 한 1년 동안 손자병법오자병법 등 병서를 읽었다.

경성부로 가서 중앙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중국으로 무전여행을 떠나니, 17~18세 때였다. 이때 자신의 스승이자 고모부였던 백민(白民) 황상규(黃尙奎, 1891년 4월 19일 ~ 1931년 9월 2일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가 창설자 중에 하나였던 대한광복회의 항일무장투쟁을 지켜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 대한광복회의 강령은 이후 의열단으로 이어지게 된다.

김원봉이 톈진으로 건너가 독일인이 운영하는 덕화학당에 들어간 것은 19살 때인 1916년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진행 중이었는데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있었다. 독일로 갈 생각을 하고 덕화학당에 들어갔던 것이니, 독일에 협력하면 독립을 할 수 있으리라는(...) 대한광복회 회원들의 정세관에 따른 것이었다. 독일어를 배우기 전 우선 중국어를 배우다가 1917년 여름방학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동안의 광복회 회원들의 희망과 다르게 중국이 일본 측에 가담하여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는 바람에 덕화학당은 폐쇄되고 김원봉은 1년여 고국에 머물게 되는데, 그때에 사귀게 되는 사람이 김두전과 이명건이었다. 황상규가 세 사람에게 의형제를 맺게 하고 각각의 호를 지어주었는데, 그렇게 김원봉은 '약산(若山)', 김두전은 '약수(若水)', 이명건은 '여성(如星)'이라는 호를 갖게 되었다.

1918년 9월, 이 세 사람은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에 있는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였다. 미국인이 운영하는 기독계 계통 학교로, 세 사람이 함께 들어간 곳도 영어과였다. 1919년이 되자 김원봉은 여운형이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한국 대표로 보내어 한국의 독립을 세상에 호소하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이 한국 같은 약소민족을 위해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일본 제국주의와 싸워주지 않으리라 생각하여 김약수, 이여성과 만나 독립군 양성을 상의하고자 길림으로 갔다.

2.3. 항일무장투쟁[편집]

2.3.1. 의열단 활동[편집]

길림을 거쳐 봉천에서 김약수, 이여성과 만나 3.1 운동 소식을 들었고, 국내에서 사람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하겠다며 국내로 돌아간 이들과 다르게 무장력을 갖추었을 때만이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김원봉은 1919년 2월 22세의 나이에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 및 폭탄제조법 등을 수료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체계적인 지휘관을 양성하여 조직화된 광복군을 양성하고자 했는데, 그렇게 준비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요구된다고 판단한 김원봉은 9월 학교에서 자퇴했고 새로운 개념의 부대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밀양, 대구 일원에서 3.1 운동을 하다가 만주로 망명해온 사람들이 만나 1919년 11월 9일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반 씨 집에 김원봉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모였다. 양건호, 한봉근, 곽재기, 김옥 등과 회합하여 일본의 침략본거를 파괴할 것을 결의하였고 의열단을 조직하여 황상규가 단장 의백(義伯)에 취임하였다. 단원은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 곽경,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으로 모두 13명이었다.(자세한 내용은 의열단 문서 참고.) 의열단의 이름은 공약 제1조에 '천하의 정의의 사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에서 '정의'의 '의'와 '맹렬'의 '열'을 따온 것이었다.

암살 대상으로 정한 것이 7가지 부류였으니, 이른바 칠가살(七可殺)로 다음과 같다.
① 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주조선 일본군 주둔군 수뇌
③ 대만 총독[6]
④ 매국적(賣國賊)
⑤ 친일파 거두
⑥ 적의 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7]
다음은 파괴 대상이다.
① 조선총독부
② 동양척식주식회사
③ 매일신보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주요 기관

만주 길림에서 창단된 의열단은 본부를 북경으로 옮긴다. 1920년 늦봄에서 초여름쯤이다. 중국의 중심지인 북경에는 한인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당시 이승만이 주도했던 상해 임시정부의 외교독립 노선을 반대하는 한인들한테서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열단장 김원봉
의열단과 의백(義伯) 김원봉을 다룬 신문기사이다. 단장으로 추대되었을 때 당시 나이가 23세였다.
의열단이 거행한 제1차 거사는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려는 일명 '밀양 폭파 사건'이다. 하지만 곽재기, 이성우, 신철휴, 김수득, 한봉근, 윤세주 6명이 서울 인사동 어떤 중국 요릿집에 모여 있다가 독립운동자 검거로 악명을 떨치던 김태석 경부와 그 부하들에게 체포됨으로써 실패로 끝나게 된다. 1920년 6월 16일 모두 16명이 검거되어 황상규, 이성우 같은 선배들이 붙잡혀 들어감으로써 김원봉이 단장을 맡게 된다. 이후 김원봉은 박재혁최수봉김익상을 지휘하며 각각 부산경찰서, 밀양경찰서,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하도록 했다. 그 이후에도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으로 하여금 일본군 대장을 저격하도록 했다.

이후 단재 신채호가 지어준 『조선혁명선언』을 의열단 근본철학으로 한 김원봉은 최종덕, 이종암을 국내에 들여보내어 사회주의자 김한과 암살, 파괴공작을 하려다 김한이 검거된다. 다시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김시현과 김시현이 포섭한 경기도 경찰부 경부 황옥에게 폭탄과 조선혁명선언문과 단원들을 보낸다.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는데 의열단 안으로 파고든 밀정 김재진의 밀고로 좌절되고 만다. 압수된 물품만 건물 파괴용 폭탄 6개, 방화용 17개, 암살용 13개 등 36개, 뇌관 6개, 도화선 6개, 도화선과 연결되는 시계 6개, 권총 6자루, 실탄 155발, 조선혁명선언 361부, '조선총독부 소속 관공리에게'라는 협박문 548장이었다. 이것이 황옥 경부 폭탄사건이다.

1923년 1월 5일, 김지섭이 도쿄로 갔다. 황궁 정문 앞에 있는 이중교 다리에 폭탄을 던져 소란을 일으키고 그 틈을 타 황궁으로 들어가 왜왕을 죽이려고 이중교에 폭탄을 던지기는 하였으나 곧 붙잡히고 말았다. 무기징역에서 20년으로 감형되었으나 일본 경찰한테 당한 살인적 고문과 단식투쟁으로 몸이 약해져 한 달 보름 만에 옥사하고 말았다. 김지섭의 동경 거사 뒤에도 여러 차례 의열단원에 의한 암살, 파괴 사건이 일어났다. 의열단의 활동으로 단원들이 처형될수록 김원봉의 명성은 높아졌다. 님 웨일즈에 따르면 의열단이 해체되던 1927년까지 체포돼 처형당한 의열단원이 무려 700명에 달한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의열단은 동경 거사 실패와 일제의 강경한 탄압으로 활동하기 어려워졌으며, 1924년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대중 운동이 급격히 성장하는 추세에 편승하여 상하이에서 '청년동맹회'를 결성한 윤자영[8]에게 많은 젊은이들이 찾아갔고, 이들은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의 투쟁 노선을 비판하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의열단원의 이탈과 함께 자금이 부족해져 생활마저 궁핍한 지경에 다달아 의열단의 무장투쟁은 사실상 막을 내린다.
합치되는 두 운동 - 민족운동...
김원봉이 동아일보를 통해 기고한 '합치되는 두 운동' 신문기사이다.

그래서 1925년 김원봉은 2월 20일과 21일 동아일보를 통해 "민족운동이 곧 사회운동이 되어야 할 것이며 사회운동자가 곧 민족운동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우파 계열의 민족주의 운동과 좌파 계열의 사회주의 운동이 합치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2.3.1.1. 1925년 동아일보 신문 기사 전문[편집]
합치合致되는 두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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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황포군관학교 입교[편집]

당시 상황은 3.1 운동과 함께 들불처럼 번져나가던 국내외 독립운동이 하강기로 접어들고 있을 때였다. 무장투쟁 노선을 추구하며 일본군과 맞붙었던 만주 독립군은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과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을 마지막으로 자유시 참변을 겪고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고,[9] 외교독립 노선을 추구하던 상해 임정은 서양 열강들의 외면과 함께 위임통치 청원 사건과 계파 갈등으로 인한 지도자들의 내분으로 간판만 남았으며, 국내 지역에 있는 이광수 등이 벌이던 실력 양성 운동은 민족해방을 포기하는 이른바 민족개량주의 운동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김원봉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더욱 활발한 독립운동을 위해 1926년 1월 '최림'이라는 가명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가 설립한 광저우 황포군관학교 제4기생으로 들어갔다.[10] 신악, 이영준, 김종, 이인홍, 왕자량, 양검, 이병희 같은 의열단 동지들과 함께 한 투쟁 노선 변경에 따른 것이니, 결사적인 항일 군대를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김원봉은 그곳에서보병과에 배치된다. 의열단 단장 대신 일개 사관생도를 자청한 데에는 보다 효과적인 항일운동의 방법을 찾겠다는 굳은 결심이 있었고, 중국 측도 이를 환영했다.

그곳에서 김원봉은 삼민주의를 주창한 설립자 쑨원의 영향으로 중국의 혁명사상을 학습했고, 장제스가 북벌에 출정한 당시에는 좌파 계열의 교관과 학생들을 통해 공산주의도 접하게 된다. 당시 중국은 국공합작 중이었기 때문에 황포군관학교에도 일부 공산당 출신의 교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원봉이 다닐 당시 저우언라이도 황포군관학교의 교관으로 있었다.

폭력과 암살을 포함한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추구했던 김원봉은 중국에서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이나 상해의 민족주의 우파들의 온건하고 소극적인 항일 노선에 실망했던 것 같으며, 폭력에 의한 혁명투쟁에 매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황포군관학교에서 얻은 군사 지식 및 진보 성향을 바탕으로 후일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는데 바탕이 되었다.

김원봉은 이후 황포군관학교를 4기로 졸업하고, 국민혁명군 장교로 임관하여 군관학교의 교관으로 근무했다.

2.3.3. 중국에서의 본격적인 활동[편집]

김원봉은 1927년 8월에 일어난 난창 폭동 당시 하룡의 공산군에 가담했다가[11] 포로가 된 뒤, 그해 말 상하이로 탈출했다고 전해진다.[12] 김원봉과 그를 따르던 의열단원들은 난창 폭동에 깊이 관여했다. 황포군관학교에서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의열단 활동을 통해 실전 경험까지 가지고 있었던 베테랑들이었던 만큼 이들은 난창 폭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원봉과 윤세주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전멸하는 참담한 결과를 맞았다. 이로써 의열단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김원봉은 중국공산당이 자신과 의열단을 이용해 먹었다고 생각하여 깊은 배신감을 느꼈던 듯 하다. 이후 김원봉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중국공산당과 연계할 것을 요구할 때마다 번번히 이를 거절했고, 중국공산당 역시 한인 사회주의 단체에게 김원봉을 배제할 것을 종용하게 된다.

상하이로 탈출한 김원봉은 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였던 안광천과 연계하여 와해된 의열단을 재정비하면서 《조선의열단 제3차 전국대의대회선언》을 발표하여 사회주의 정책을 중심으로 의회주의 민주국 건설을 구상하였다. 또한 조선의 절대독립을 위해서는 이념간의 대립, 붕당에 의한 분열을 극복한 협동통일이 절실하다고 주장하면서 각 세력에 손을 내밀었다.

이후 김원봉은 1929년 소련공산당과 접촉하여 코민테른으로부터 지원을 받으면서 '레닌주의' 창간호를 발간한다. 그러나 얼마 후 곧 김원봉은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코민테른과의 협력 관계를 청산했다. 이후 김원봉은 중국공산당이나 소련과 거리를 두고 그들과 절대로 연계하지 않으면서 독립적인 조직 운영을 추구했다. 하지만 김원봉의 이러한 독자적인 사회주의-민족주의 노선추구는 코른테른에 의해 통제를 받거나, 아니면 중국 공산당과 연계하던 당시 국제적인 공산주의 조직 운영 형태와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김원봉이 코민테른 및 중국 공산당과의 협력을 거부하며 독자 노선을 추구했던 점은 김원봉과 주도권 싸움을 벌이던 다른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들이 그를 공격하는 좋은 빌미가 되었고 결국 나중에 김원봉이 공산주의 주류인 연안파에서 배제된 주원인이 된다.

김원봉은 1929년 봄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북경에서 김원봉은 1929년 10월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창설에 참여했다. 좌파협동전선의 대표적인 인사인 안광천의 주도로 창설된 이 조직은 이름 그대로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목표로 창설된 조직이었다. 이 조직에서 김원봉은 중앙부 의원이 되어 안광천과 더불어 핵심 인사가 될 수 있었다.

1930년 4월 안광천과 김원봉은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중앙부 직속으로 레닌주의정치학교[13]를 세워 운영에 개입했는데, 여기서 교육생을 대상으로 6개월 기한으로 공산주의 이론', '조직 및 투쟁', '조선혁명사' 등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1930년 8월 의열단을 무산자전위동맹으로 개편하고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계속하였다. 김원봉은 레닌주의정치학교 졸업생을 국내로 들여보내어 노동자, 농민, 학생과 대중운동을 벌이게 하였다.

조선공산당재건동맹 및 레닌주의정치학교는 소련의 코민테른과는 전혀 관련 없는 독자적인 좌익 계열의 단체였다. 앞서 서술되었듯이 김원봉은 1927년과 1929년 중국 공산당 및 소련 코민테른과 각각 연계했다가 쓴 잔을 마신 후 다시는 이들과 절대 합작하지 않았다. 대신 김원봉은 1931년 9월 만주사변 이후 황포군관학교 시절 은사였던 중국 국민당의 총수 장제스에게 접촉하여 이듬해 국민당의 정보기구 삼민주의역행사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14]를 창립하여 한인 군사장교들을 양성했다. 김원봉에게 장제스의 국민당은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간섭하던 코민테른이나 중국 공산당과는 달랐다. 김원봉과 장제스와의 협력 작업은 모두 김원봉이 스스로 기획한 것들이었다. 김원봉이 장제스를 직접 찾아가 자신의 구상을 이야기하면, 장제스는 마음에 들면 OK하고 지원해 줬고, 마음에 안들면 지원을 거절했을 뿐이다. 장제스는 일단 OK하면 구체적인 내용은 대체로 김원봉 마음대로 하도록 놔뒀고 본인은 세세한 것은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심지어 장제스는 조선의용대가 좌익 스펙트럼의 단체라는 것을 진작부터 파악했지만 지도부가 사회주의 성향의 표어를 자제하기도 했고 딱히 태클을 걸지는 않았다. 다만 김원봉은 장제스와 합작을 추진하였으나 장제스의 소극적 항일 노선으로 인하여 좌절되었다.
① 일본 제국·만주국 요인 암살, 중요 기관 파괴
② 장래의 혁명조직 준비 공작
③ 만주국 내 반일단체와 제휴, 일본 제국 타도
④ 위조지폐 남발, 만주국 경제 혼란

2.3.4. 민족혁명당 결성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폐지 운동[편집]

1932년 11월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을 목적으로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한국혁명당, 한국광복단동지회 등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자, 김원봉은 의열단원들과 함께 여기에 참여하기도 했다.

1934년 3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제2차 대표대회에서 "종래와 같은 중앙간부만의 기관에 국한시키지 않고, 가맹단체 소속 '다수투사'를 집결시켜 적극적인 공작을 전개한다. 가맹단체를 포함한 모든 혁명단체를 해산하고 그 단원을 통일동맹에 귀속시켜 일원화한다.[15] 그리고 이를 위해 임시정부도 해체한다."라는 의견이 제안되었고, 김원봉과 의열단은 이 주장에 대해 찬성하였다.

그 결과, 1935년 7월 4일 김원봉은 독립운동 단체 9개를 묶어 출현한 민족혁명당의 총서기가 됐다. 김원봉을 중심으로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거기에서 조소앙은 정강, 정책 기초 위원으로 참가하여 삼균주의를 민족혁명당의 지도 이념으로 채택하도록 하였다. 김원봉이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공감했던 것과는 별개로, 김원봉 본인이 삼균주의자였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조소앙은 3개월 뒤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계가 민족혁명당의 중심이 된 데 불만을 품고 당을 탈당하여 다시 한국독립당으로 입당했으며,[16] 삼균주의가 공산주의나 무정부주의와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민족혁명당에는 사회주의 계열뿐만 아니라 초기에는 민족주의 계열도 일부 참여했다. 민족혁명당 창당 멤버 중에는 조소앙신익희김규식지청천 등도 우파 민족주의 계열도 상당수 있었다.하지만 제정된 당의 강령은 사회주의적인 성향이 짙었는데, 독립 이후 토지와 중요 산업의 국유화를 내걸었다. 아울러 인민이 무장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기도 했다.

여러 계열이 모인 민족혁명당은 창당 초기부터 내부에서 치열한 주도권 경쟁이 벌어졌는데 특히 고려 공산당 출신의 상해파와 시베리아파, 중국 공산당 출신, 의열단 내 민족주의파들이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결국 민족혁명당은 김원봉과 김두봉을 중심한 의열단계,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이 중심이 되었다. 김원봉과 김두봉은 각각 서기장과 조직부장이 되어 당의 1,2인자가 되었다. 민족혁명당은 단일과 통합을 기치로 창당되었지만 결국 의열단계와 사회주의 계열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심지어 새로 제정된 당기 대신 의열단기가 게재되기도 했다. 지청천이 이를 지적하자 김원봉의 의열단계와 지청천계가 반목하게 되었다. 이어 사회주의계와 지청천계간에 이념 논쟁과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에 주류인 의열단계와 사회주의계는 지청천을 강제 제명했다. 그러자 조소앙을 비롯한 우파 계열은 이에 반발하여 창단 두 달만인 9월 민족혁명당을 집단 탈당했다. 민혁당에 크게 실망한 조소앙은 탈당 후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다. 지청천계와 조소앙계가 집단 탈당함으로써 민족혁명당은 사회주의 계열만 남게 되었고, 얼마 후 당명을 민족혁명당에서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바꾸었다.

한편 이 당시 민족혁명당 결성을 구실로 임정폐지운동을 가장 극렬하게 벌인 사람이 김두봉과 김원봉이었다. 이미 김원봉은 1920년대초 박용만을 중심으로 한 창조파가 임시정부 해체를 주장할 때, 박용만의 행동대장 격으로 활동한 바 있었다. 당시 일제 고등경찰 기록에 따르면, 1921년 박용만이 북경파를 이끌고 상해를 방문하여 임시정부 재직자들의 총사퇴를 요구하는 연설회를 개최했는데, 이 때 비상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폭탄·권총까지 휴대했다는 설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거물이 된 김원봉은 김두봉과 더불어 1935년 창단된 민혁당의 주도권을 장악한 후, 민혁당을 제외한 모든 단체를 해산할 것을 주장하면서 임시정부에 그 총구를 겨누었다. 이때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또다시 존폐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임정폐지를 둘러 싼 논전은 임정 여당 역할을 자임해 온 한국독립당 내부의 분열을 야기했다. 송병조차이석조완구 등 일부 세력을 제외한 대다수가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였고, 임정도 국무위원 7인 중 양기탁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유동열이 민족혁명당에 참여할 만큼 대세는 민족혁명당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한인 독립운동 진영은 임정지지 세력과 임정폐지 세력으로 양분된 형세를 띠었다. 임정지지 세력은 송병조차이석조완구만 남을 정도로 수세에 몰렸지만, 그들은 여기서 임시정부가 문을 닫으면, 1919년에 만들어진 대한민국이 다시 망하는 것이라며, 임시정부를 끝까지 사수할 것임을 천명했다. 김구와 조소앙, 이동녕 역시 임정 고수 결의를 표명했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해체 위기를 넘기며 점차 상황이 호전되어 갔다. #

2.3.5. 조선의용대 창설 및 분열[편집]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김원봉 확대사진
1938년 10월 10일에 찍은 조선의용대 성립기념 사진. 깃발 가운데가 김원봉.
왼쪽 사진을 확대한 김원봉.

1938년 10월 1일, 김원봉은 83명의 한인을 모집하여 장제스의 중국국민당의 지원 하에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에서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를 결성하고 본인이 조선의용대 대장이 되었다. 장제스는 김원봉과 그가 모집한 청년들이 사회주의-민족주의 성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당시 국공합작 중이었고, 친분이 있었던 김원봉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번에도 조선의용대를 지원했다.

조선의용대가 창설된 중국 우한은 우창, 한양, 한커우 3개 지구를 아우르는 지명으로, 화중 지방과 장강 중류 일대의 중요한 교통요지에 위치하여 상업이 발달했으며, 중경(충칭)에 수도를 둔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방어하는 핵심 군사 요충지였다. 조선의용대의 기간요원들은 장제스의 도움으로 중국육군군관학교에 입소하여 6개월간 특별 훈련을 받았다. 조선의용대는 대원들이 일본어와 중국어, 한국어에 모두 능하다는 특성을 살려 국민당으로부터 후방의 교란 임무 및 포로 취조 등의 업무가 주로 주어졌다. 하지만 조선의용대 대원들, 특히 기간(간부)들이 주로 사회주의 계열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을 지원해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진보적 민족주의 성향을 띄는 김원봉이 국민당 장제스와 연계한 것을 빌미로 김원봉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자신이 장제스과 연개하는 것은 그를 이용하는 것일 뿐이라고 반문했으며, 장제스 또한 조선의용대를 이용하는 것이므로, 자신이 장제스를 이용하는 것이 하등 문제될 것은 없다고 말했다. 일부 사회주의 요인들은 김원봉에게 장제스를 암살하라고 요구했지만, 김원봉은 장제스를 이용함으로써 얻는 것이 더 많다는 이유를 이를 거절했다. 실제로 조선의용대는 장제스의 국민당의 지원금이 조직 운영의 원천이 되었다.

1938년 우한이 일본군에게 포위 공격당하여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조선의용대는 국민당과 함께 퇴각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포위를 뚫고 퇴각하는 과정에서 조선의용대 4개 지대(구대)는 각기 분산되어 사실상 각 지대 지휘관들이 독자적으로 지휘권을 행사하면서 부대를 전개하게 되었다. 김원봉은 우한에서 퇴각한 후 자신이 이끌던 조선의용대 본대 94명 병력과 함께 국민당의 수도 충칭에서 머물고 있었다. 나머지 3개 지대는 국민당의 수도인 충칭으로 퇴각하지 않고 중간지대에 머물렀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김원봉 자신이 직접 이끄는 본대를 제외한 나머지 3개 지대에 대한 통제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39년 제2지대가 허베이성 제5전구에서 활동한 것을 계기로 조선청년전위동맹을 필두로 한 제2지대 안에 중국공산당 신스군(新四軍)의 지하조직이 세워진 뒤부터 일부 대원들이 공산당원이 되었고,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 내에서 김원봉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위원장 최창익은 중국 공산당과 결탁하여 김원봉과 국민당의 허가없이 병력을 이끌고 무단으로 이탈하여 중국공산당의 본거지인 화북의 연안(옌안)으로 가서 중국공산당과 그 휘하의 팔로군과 연계했다. 최창익은 김두봉김무정, 한빈 등 연안에 있던 한인 공산-사회주의들과 규합한 후, 이들과 함께 다른 조선의용대 지대도 연안으로 합류할 것을 설득, 종용했다. 이에 다른 병력도 동요, 이탈하여 화북으로 합류하기 시작했다. 연안 합류 여부를 놓고 1940년 11월 조선의용대 확대간부회의가 열렸고 여기서 김원봉의 의견에 반(反)하여 조선의용대의 연안 합류가 의결되었다. 김원봉의 본대 병력 90여 명은 충칭에 잔류하였으나, 나머지 지대는 모두 화북으로 떠나 1941년초까지 연안 합류를 완료했다.[17]

김원봉이 연안에 있는 중국 공산당과의 합작을 거부한 것은 상기되어 있듯이 난창 폭동 때 중국 공산당에 토사구팽당한 후 중국이나 소련 공산당과 절대 연계하지 않고, 좌우 독립운동가들과 합작하며 독자적인 조직을 유지하겠다는 그의 강한 신조 때문이었다. 또한 누구에게도 지시받는 것을 싫어하고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어 스스로 명령할 수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김원봉의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장제스는 돈만 대줄 뿐 크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았고, 장제스와는 뜻이 맞지 않으면 더이상 돈 안받는 대신 서로 헤어질 수 있었지만, 공산당은 전혀 다른 차원의 조직이었다. 당시 전세계 공산당 조직은 모두 각지의 독맂혁명을 위해 코민테른에 종속되어 그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것이 원칙이었다. 때문에 코민테른 그 자체나 다름없는 소련 공산당이나 그에 못지 않은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중국공산당과 연계한다면 공산당 조직의 특성상 철저하게 종속될 것이 뻔했다. 김원봉은 이러한 상황은 원치 않았던 것이다.

한편 최창익이 연안으로 이탈한데 이어 다른 지대도 최창익을 따라 연안으로 이탈하자 다급해진 김원봉은 이탈한 조선의용대의 통제권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직접 연안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통제권을 장악한 최창익과 김두봉, 김무정 등이 이를 필사적으로 반대했고, 난창 폭동 이래 김원봉과 관계가 틀어진 중국공산당 역시 김원봉의 합류를 반대했다. 결국 신변 안전 및 지휘권 회복이 어렵다고 판단한 김원봉은 연안 방문을 포기했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아래에 나와 있는 김원봉의 유명한 영상물은 조선의용대의 주력이 그를 배신하고 화북으로 이탈하고 있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촬영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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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에 촬영된 조선의용대 선무공작 영상 속 조선의용대장 김원봉

1941년 4월, 윤세주와 박효삼이 끝내 김원봉과 결별하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떠났다. 윤세주와 박효삼은 김원봉의 최측근이었다. 윤세주는 김원봉과 같은 밀양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동네에서 함께 자랐고, 이후 의열단, 황포군관학교, 난창 폭동, 조선혁명간부학교, 조선의용대에 이르기까지 이때까지 평생에 걸쳐 김원봉과 생사를 함께 해왔던 아우이자 동지였다. 황포군관학교 시절 알게 된 박효삼은 김원봉의 최측근이 되었고, 김원봉은 그에게 조선의용대 제1지대(본대)의 지대장을 맡겼었다. 이 둘의 이탈은 김원봉에게 커다란 충격과 상처를 주기에 충분했다.

한편 김원봉의 통제를 떠나 연안에 모인 조선의용대 3개 지대 병력[18]은 합류가 완료된 1941년 봄 의용대원 전체가 참여하는 대토론을 거쳐 스스로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華北支隊)'라 칭했다. 연안에서 최창익, 김두봉김무정 등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무력을 바탕으로 1941년 1월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조직했고 얼마 후 이를 확대하여 '조선독립동맹'을 창설했다. 이는 해방 후 북한 연안파의 모체가 된다. 1942년 7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조선 독립 동맹 예하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었고, 중국공산당의 절대 신임을 받던 조선인 중공당원 김무정이 지휘관이 되었다. 얼마 후인 1943년 1월에는 아예 중국공산당산하의 팔로군 소속으로 편입되었다. 매체나 교과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업적으로 소개되는 내용의 상당부분은 사실은 팔로군 시절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팔로군 시절에도 기본적으로 이들은 전투부대는 아니었고, 국민당 시절과 거의 동일한 업무를 했다. 대부분의 대원들이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에 모두 능통했기 때문에 국민당이나 공산당이나 모두 이들을 전투 병력보다 비전투 병력으로 쓰는 것이 더 요긴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 전투에도 참여했고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이들은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공식적으로 전투부대로 전환되었다. 이후 해방되자 압록강을 건너 북한으로 이동하여 북한 '조선인민군'의 주력이 된다.

2.3.6. 대한민국 임시정부 합류와 갈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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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제34회 임시의정원 일동. 앉은 줄 맨 오른쪽이 김원봉, 앉은 줄 다섯 번째가 김구.
김원봉이 조선의용대의 화북 이탈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던 시기인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장제스의 국민당의 지원을 받으며 충칭으로 이전해 왔다. 이로써 싫던좋던 간에 김원봉은 30년대에도 종종 협력했던 임시정부 요인들은 대면하게 되었다. 곧이어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중국국민당의 지원 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자 김원봉과 함께 남은 조선의용대 잔여 병력의 존재 이유가 무척 애매해졌다. 장제스는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잔여 병력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예하 한국광복군에 합류하도록 요구했다.

장제스는 이미 1930년대부터 자신이 지원해 주고 있던 한인 독립운동가들에게 단체 통합을 주문해 왔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잔여 병력이 충칭에 모이게 되자 장제스는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 잔여 인원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합류하도록 요구했다. 불과 몇년전 김원봉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해체를 강력하게 주장했고, 또 민혁당 창당 당시 지청천 등과 갈등 끝에 그를 강제로 제명시키고 이에 반발한 우익계 인사들이 집단 탈당하는 등 김원봉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사이의 관계는 매우 껄끄로운 상황이었다. 김원봉은 임시정부 합류를 원치 않았다. 임시정부 역시 김원봉의 합류를 원하지는 않았지만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는 처지였으므로 장제스의 요구를 거부하지 않았다. 장제스는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잔여 병력에 대한 지원을 끊으면서 김원봉이 임시정부에 합류하도록 압박했다. 김원봉은 임시정부에 합류하지 않고 한동안 버텼다. 하지만 갑자기 돈줄이 끊기면서 완전히 벼랑 끝에 몰렸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고 결국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고개를 숙이고 합류하게 된다. 이때 김원봉은 중국 공산당,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연안파에 이어 장제스에게 다시 한번 배신당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결국 1941년 6월 조선민족혁명당 제6회 전당대표대회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가가 의결되었고, 1942년 약 100명의 조선의용대 잔여 대원들은 정식으로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 대원들은 임시정부 및 광복군에 합류하길 거부하고 연안으로 이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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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3월 1일, 충칭에서 열린 3.1절 22주년 기념식. 왼쪽부터 김구조소앙신익희, 김원봉.

김원봉은 결국 필연에 따라 임시정부에 들어가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지만, 예전부터 반목하던 사이였던 임시정부 요인들과 갈등을 계속 이어나갔다. 예전부터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주도권 싸움에서 진적이 없었던 김원봉은 임시정부에 들어가서도 주도권 싸움을 벌이며 임시정부 요인들과 반목했다.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출신 병력은 광복군 내에서 적지 않은 인원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김원봉은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임정 요인들 사이에서 자기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 김원봉은 과거부터 껄끄러웠던 사이였던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의 지휘를 받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예하 부대에 독자적으로 지휘권을 행사하려 하며 광복군 내에서 주도권 싸움을 벌였다. 결국 지청천은 김원봉 예하 부대에 대한 통제를 포기하고 김원봉이 자기 마음대로 부대를 운용하도록 놔둘 수 밖에 없었다. 김원봉의 이러한 항명 행위로 인해 지청천은 광복군을 온전히 운용할 수 없었고, 지청천과 광복군이 수행한 대부분의 작전은 김원봉의 예하 병력이 제외된 채 전개되었다. 지청천과 한국광복군이 세운 업적의 대부분은 김원봉 예하 병력이 제외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김원봉은 한국광복군 내에서 독자 세력화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지청천과 함께 한국광복군 조직과 운영에 관여하고 있던 조소앙신익희의 존재 등으로 인해 결국 광복군 전체의 주도권을 가져오는 데는 실패했다.

김원봉은 총사령관 지청천하고만 갈등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민필호는 '김원봉은 사사건건 김구에게 대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 내무부장 신익희와도 진작부터 불편한 관계였다.[19] 장준하는 김원봉이 일본군 출신 한인들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조장한다고 비판했다. 한편 김원봉은 자신에게서 이탈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와 연안파들과 껄끄러운 사이가 되었지만 그들과 접촉을 끊지는 않았다. 한국광복군 참모장 이범석은 '김원봉 일파는 자기세력 확충에만 혈안이 되어 연안파와 내통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김원봉이 임정에서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연안파를 끌어들이거나, 반대로 여차하면 임정을 떠나 연안파에 합류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원봉이 연안파에 합류하는 것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연안파의 핵심 인물 중 다수가 김원봉의 합류를 반대했고, 그들의 배후에 있던 중국공산당 역시 김원봉을 반대했다. 결국 김원봉은 임시정부에서 트러블 메이커로 계속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김원봉은 광복 때까지 임시정부에 남아 있게 되었다. 여러 일이 있었지만 1944년 4월 22일에는 임시정부 군무부장이 되었다.

김원봉은 임시정부 합류 후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상기된 바와 같이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배신으로 인해 불과 90여 명의 병력만 남게 되어 낙동강 오리알 처지가 되었고, 결국 장제스의 압박으로 어쩔 수 없이 임시정부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에서 김원봉은 핵심 인사들과 계속 갈등했고, 명목상 부사령관이었지만 지청천이 이끄는 광복군의 주요 작전을 보이콧하면서 자신의 병력을 거의 참여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을 배신한 정적 최창익과 김두봉이 주도하고 있던 연안파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임시정부를 떠나지도 못하고 그렇게 머물러 있었다.

1945년 1월 최동선과 세번째로 결혼을 했다.[20]

2.4. 광복 후 남한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 지도자로서의 행적[편집]

1945년 10월 10일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은 충칭에서 제9차 전당대회를 거행하고, 국내외 각 민주당파와 민주영수를 단합하여 전국 통일적 임시연합정부건립을 주장하는 당면 강령 및 정책을 제정하였다. 그 해 12월 김규식, 김원봉, 성주식,[21] 김상덕은 중앙대표단의 명의로 환국하는 동시에 당 중앙부도 서울로 옮기게 되었다.
임시정부 요인들과 김원봉
1945년 12월 3일에 찍은 임시정부 요인 귀국기념 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에 서있는 사람이 김원봉.

1945년 12월 중순, 소련의 모스크바에서는 패망한 일제의 점령지역에 대한 관리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미국영국소련 3개국의 외무장관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다. 이것이 이른바 모스크바 3상회의이다. 열흘간의 회의 끝에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문이 발표되었는데, 일제의 통치를 결산하고 한국의 본토를 독립국가로 재건하는 데 있어 한반도의 남쪽은 미국이, 북쪽은 소련이 임시로 신탁통치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직후 신탁통치 오보사건[22]으로 인해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우익과 찬성하는 좌익의 거센 충돌이 지속되었다. 김구 중심의 임시정부 계열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12월 30일에 포고령을 내려 전 국민 파업을 지시하는 등 대대적인 반탁운동을 벌였다.[23][24]

반면 좌익 계열이 중심이 된 신탁통치 찬성파들은 1946년 1월 3일 서울에서 ‘조선자주독립 민족통일전선결성촉성 시민대회’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신탁통치를 결정한 3상 회의의 합의문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여기에 참여한 김원봉도 신탁통치에 적극적인 찬성을 표명했다. 김원봉은 신탁을 반대하는 것을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비유(...)하면서까지 비판했다. 김원봉은 임시정부를 탈퇴하였다.
민주주의민족전선 회의장에서 연...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회의장에서 연설하는 김원봉
1946년 2월 14일 남한 내의 사회주의 계열 단체들이 연합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결성했다. 김원봉은 민전의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이어 김원봉은 박헌영백남운여운형허헌과 함께 민전의 공동의장으로 추대되었다.

김원봉 자신이 창설하여 이끌던 좌익 계열의 단체인 조선민족혁명당은 1946년 6월말, 인민공화당으로 개칭했고, 김원봉이 위원장[25]에 올랐다. 인민공화당은 신탁통치 지지, 각지 인민위원회 조직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토지의 무상몰수·무상분배노동자·농민에 대한 선전활동 강화민전에 대한 지지 표명을 정치노선으로 삼았다.

민전과 인민공화당의 지도자가 된 김원봉은 민전의 공동의장이자 조선인민당 당수로 좌우합작을 주장하던 여운형과 연계하기도 했다. 1946년 6월 27일 김원봉은 김규식과 만나 좌우합작에 관해 이야기하기도 했으며, 7월 중순 인민공화당에서 '좌우합작에 관한 4원칙'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좌우합작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민전과 인민공화당 내부에서 좌우합작에 대한 반대가 컸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깊은 친분이 있었던 여운형[26]과의 인간 관계가 크게 작용했고, 좌우합작 그 자체보다는 여운형, 김규식 등 중도파 거물들과 연계하려는 의도가 크지 않았나 하는 시각이 있다.

1946년 대구 10.1 사건이 발발하자, 김원봉은 민전 조사단 단장 자격으로 대구부산 등 경상도를 방문했다. 이로 인해 사건의 배후로 몰려 10월 21일 성주식과 함께 성북경찰서에 연행 구금되기도 했다. #

1947년 3월 22일 김원봉은 미군정청 경찰이었던 노덕술[27]에게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총파업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28] 노덕술은 김원봉을 '빨갱이 두목'이라고 부르며 모욕을 주고 그의 뺨을 때렸다고 한다. 그렇게 김원봉은 중부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29][30] 김원봉이 체포되자 좌익 및 좌우합장을 주창하던 일부 중도 단체들에서 애국지사에 대한 모독이라는 여론을 형성했다. 4월 5일 조선건민회의 이극로는 자유신문에 '혁명 애국투사 천대는 우려사(憂慮事)'라는 제목의 글을 실기도 했다.#

민족자주연맹 대표였던 송남헌[31]이 쓴 『해방 3년사』에 그때 상황이 나온다.
김원봉을 붙잡아 간 사람은 노덕술이었다. 일제 때 종로경찰서 형사로 있으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여 악랄한 고문을 하던 악질 친일경찰로, 김원봉 장군이 거느리던 항일결사 의열단 칠가살 명단에 올라 있던 자였다. ''김원봉이를 반드시 잡아오라"고 특명을 내린 사람은 수도경찰청장인 장택상이었다. 장택상의 아버지 장승원이 군자금을 모집하던 광복회원에게 불응하다 살해됐는데 장택상은 이 원한 때문에 '진보적 해외 지도자' 김원봉을 수도청에 구금하였다는 설이 있다.

노덕술이 김원봉을 묶어 장택상 앞으로 끌고 갔을 때였다. 두둑한 포상금을 받고 일계급 특진까지 할 꿈에 부풀어 있던 노덕술은 "하이!" 하고 입에 밴 왜말을 뱉으며 차렷 자세를 취하였다. 하늘 같은 청장님이 꽥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이 바보 같은 자야! 정중히 모셔오랬지 이렇게 불경스럽게 하라고 했나?" 그러면서 짐짓 송구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손수 묶인 것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정정화[32]는 자신의 책 『장강일기』에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이 증언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언젠가 약산이 중부경찰서에 잡혀 들어가 왜정 때부터 악명이 높았던 노덕술로부터 모욕적인 처우를 받았다는 말을 듣고 몹시 분개했던 일이 기억난다. 평생을 조국 광복에 헌신했으며 의열단의 의백이었고 민혁당의 서기장을 거쳐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을 지낸 사람이 악질 왜경 출신자로부터 조사를 받고 모욕을 당했다는 소리를 듣자 세상이 아무래도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4월 9일 미군정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십여 일만에 김원봉을 석방했다.[33] 김원봉은 의열단 활동을 같이 했던 유석현의 집에 찾아가 꼬박 사흘 동안 울며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고 한다.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몰라." 그의 독백은 울분으로 이어진다.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 놈과 싸울 때도 한 번도 이런 수모를 당한 일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의해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소?"

- 『역사에 다시 묻는다』 (길진현, 삼민사, 1984)

1947년 7월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했던 여운형이 암살되자, 김원봉은 "정치적 주장이 다르다 하여 그것을 구실 삼아 자기 민족의 지도자를 학살하는 이런 죄악은 천추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규탄했고, 그의 죽음을 "민족국가의 부흥 발전에 큰 상처를 남기는 것"으로 규정하며 여운형의 죽음에 대해 애통해 했다. 이어 김원봉은 '노력인민'과 '광명일보' 등 좌익 계열의 신문들에 '여운형의 유지를 받들어 미소공위를 성공시키자'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좌우 대립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급기야 8월 2일, 미군정은 제5호 행정명령을 발동, 민전의 8.15 기념 시민대회를 금지시키고, 8월 11일에는 민전을 비롯한 좌익 단체에 대한 폐쇄령과 좌익 인물에 대한 일제 검거를 단행했다. 이에 8월 12일에는 자택이 습격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민전과 인민공화당의 사무실도 폐쇄해야만 했다.

명목상으로는 중도파를 아우른다 하였으나 실상은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였던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공동의장이자, 진보적 민족주의 단체인 인민공화당의 위원장이었던 김원봉은 미군정 하에서 더이상의 활동이 어려워졌다. 김원봉과 함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공동의장이었던 박헌영백남운허헌은 1947년 말에 모두 월북했다. 하지만 김원봉은 남한에 더 머물렀다.

당시 극심한 좌우 대립으로 혼란하던 서울에서 사회주의 핵심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었던 김원봉은 다른 거물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공공연한 협박에 백색테러 위협을 받기도 했다. 남한에서 점차 공개적인 활동이 어려워지자 김원봉은 중국에서 그랬던처럼 거처를 수시로 옮기고 잠행을 했다. 강준만에 의하면 한곳에 2시간 이상 머무르지 않았다고 한다.

1948년 1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김원봉과 면담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남한 내 좌익 세력의 최대 거물이었던 김원봉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민전이 와해되면서 김원봉의 권력도 크게 약화되었다. 김원봉은 사마로(司馬路)[34]에게 월북 이전에 보낸 편지에서 '북조선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쪽의 정세가 너무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다'고 쓰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되자 월북을 결심한다. 1948년 4월 김원봉은 남북에서 정부가 수립되기 전 마지막 회담인 평양의 '남북한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북한에 그대로 남아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다.

2.5. 월북 후 북한에서의 행적[편집]

2.5.1. 북한 정권 수립 참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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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서 단선 단정[35] 반대 대책에 관한 결정서 초안을 낭독하는 인민공화당 대표 김원봉

1948년 4월 김원봉은 김구김규식박헌영이극로 등과 함께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에 남측 정치단체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참가하였다. 이때 평양에 간 김원봉은 죽을 때까지 북한에서 머물며 활동했고 더이상 남한에 내려오지 않았다.[36] 이때 남북연석회의에서 김원봉은 주석단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인민공화당 대표 자격으로 축사를 하기도 하였고, 연석회의 전체의 사회를 맡기도 하였다.

1948년 6월 29일부터 일주일 동안 진행된 '제2차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가했다.

1948년 8월 북조선인민위원회 최고인민회의에서 제1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김원봉은 '남조선 출신 비공산주의자'라는 지분을 통해 북한 정권 수립에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배려를 받았다. 김원봉은 북한 헌법 제정에 위원으로 참여했다. 여기서 제정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1948년 헌법)은 1948년 9월 8일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1차 회의에서 승인되었다.

다음날인 9월 9일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 김원봉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검찰총장 및 감사원장에 해당하는 장관급 직책이었다. 김원봉은 수상 김일성, 부수상 박헌영홍명희 등에 이어 북한 정권 서열 7위로 명시되고 있다.
국가검열상 김원봉
북한 정권 요인 사진.
사진 가운데가 수상 김일성, 왼쪽에 선글라스 낀 인물이 국가검열상 김원봉

1948년 11월에는 "미군은 물러가라"는 규탄 성명에 참여하였다.

정권 수립 후 북한은 남침 준비에 들어간다. 당시 대한민국은 미군의 거부로 탱크가 한 대도 없었고 군사력도 부족했지만, 북한에는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실전경험을 쌓은 팔로군 출신들이 수두룩했으며, 소련이 지원해준 T-34 탱크도 240여 대나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1949년 김일성은 한반도 전역을 공산화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찾아가서 전쟁승인을 수차례 요청했다.

1950년 4월 하순에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으로부터 남침전쟁에 대해 동의를 얻었고, 5월 13일에는 중국을 방문하여 마오쩌둥에게도 남침에 대해 동의를 얻었다. 김일성은 애치슨 라인을 근거로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보았고, 설령 미국이 전쟁에 개입한다 하더라도 미국이 참전하기 전 최대 2개월 안에 적화통일을 달성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김일성에게 김원봉은 두 달의 짧은 기간 만에 남쪽을 점령할 병력이 충분치 않아 세력이 약한 대한민국을 도와 미국이 참전할 것이고, 그러고 나면 오랜 전쟁으로 남북이 서로 이득 없이 많은 희생자들이 나올 것이라며 전쟁을 반대하였다는 증언이 있다.[37][38]

2.5.2. 6.25 전쟁 참여[편집]

전쟁에 반대하였다는 일부 주장이 있지만 어쨌든 김원봉은 남침을 목숨 걸고 막지 않았고 결국 김일성의 남침 명령에 순응하였다. 전쟁 발발 이후에는 북한의 전쟁 수행 노력에 적극 협력하였다.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 위원회에서 '공화국 남반부 해방 지역 군면리 인민위원회 선거 중앙 선거 지도부'가 구성되었는데, 김원봉은 9명의 지도부 중 첫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이 '공화국 남반부 해방 지역 군면리 인민위원회 중앙 선거 지도부'가 하는 일은 북한이 점령한 남한 영토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행정 기관을 철폐하고 북한 통치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39]

김원봉은 국가 검열상의 지위로 6.25 전쟁 중에 남파 간첩을 훈련하고 파견하는 것을 직접 지휘했다. 1954년 1월 26일 경향신문은 "평양에 본적을 둔 간첩 김춘옥 외 4명을 체포해 이들을 취조한 결과, 김춘옥은 '6.25 전쟁 당시 김원봉의 직접 지휘하에 대한민국의 경제 혼란, 선거 방해, 모 정당 와해를 목적으로 남파되었다'고 진술"한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에 따르면 6.25 전쟁 발발 이전부터 김원봉으로부터 간첩 훈련을 받았다고 진술되어 있다.

또 전쟁 기간 동안 김원봉은 '군사위원회 평안북도 전권 대표'로서 평안북도에서 북한군의 군량미를 생산하는 일을 책임졌다.

1952년 3월 19일 김원봉은 북한이 6.25전쟁 공훈자에게 수여하기 위해 만든 훈장인 '로력훈장'의 첫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 당시 로동신문은 "조국의 통일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미제의 약탈자들과 그 주구들을 반대하는 정의의 조국 해방 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정권 기관 및 당 단체 지도일군들에게 공화국 훈장을 다음과 같이 수여한다"고 했다. #

1952년 5월 김원봉은 로동상(노동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전시(戰時) 로동상으로서 김원봉은 노동력의 전시 동원과 무기 생산 등을 관장했다.

2.5.3. 전쟁 후 활동 및 숙청[편집]

6.25 전쟁이 휴전된 후, 1953년 11월 김원봉은 납북된 안재홍엄항섭조소앙조완구 등 중도파 인사들을 만났다. 김원봉은 이들과 함께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민족의 단결과 통일을 이루어내자는 '중립화 통일방안'을 주장했다.

1954년 6월 이들의 대표로서 조소앙은 김일성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립화 통일방안은 우리 조선의 장구한 역사적 경험과 교훈, 그리고 오늘 우리 조선이 처해있는 상황으로 보아 외부세력의 침략과 간섭을 배제하고 잔정한 자주적 평화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이 된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중립화만 보장되면 외부세계의 침략과 간섭은 없어지고 나라의 평화도 보장되며, 민족의 통일과 단결을 이룩하고 통일위업 달성을 더 앞당길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조소앙.

1956년 7월 19일에 박헌영이 총살형에 처해지고 북한에서 8월 종파사건으로 그해 8월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최창익 부수상 등 연안파가 '반(反) 조선로동당·반혁명 분파'로 몰려 숙청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숙청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김원봉은 1957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에도 선출되었다. 김원봉은 1957년 9월까지 북한 내각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고, 1957년 9월 20일에는 상임위원회 부위원장(국회 부의장 격)으로 선출되며 승승장구했다.[40]

당시 김원봉은 조선로동당에 가입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군소정당 조선인민공화당의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확인되었다. # 동명이인 김원봉과 혼동된 것으로 보인다.[41]

1958년 3월에 조선로동당 대표자회의에서 김일성종합대학 초대총장,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이었던 김두봉도 숙청당하였지만 김원봉은 당시에도 건재함을 드러냈다. 1958년 또 한 번의 '노력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 1958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직에서 해임되면서 모든 정치적 지위를 상실했다. 해임 직후 김원봉은 도주하고자 온갖 방법을 사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체포되었다. 오마이뉴스는 김원봉이 남한으로 귀순하려 했다고 보도했으나, 김원봉이 결국 비밀리에 숙청되었기 때문에 어디로 귀순하려 했는지 정확한 진실은 사실상 규명이 불가능하다.

1958년 11월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 장제스의 사주를 받은 국제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숙청당했다.[42][43] 조선의용대 출신 김학철의 증언에 따르면 김원봉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후 청산가리를 먹고 자결했다고 한다. 김원봉의 아내인 최동선과 두 아들 김중근, 김철근도 함께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김원봉의 최후에 대해 북한 정권은 극비에 붙이고 있어서 자세한 내막은 아직도 불투명하다.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이므로, 당시 교장이던 장제스와 사제관계였다. 무엇보다 김원봉이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인 만큼, 국민당군 장교로 임관한 이력까지 있었다. 그것도 군관학교 교관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이끌던 조선민족혁명당도 중국 내 백색테러를 주도하던 국민당 남의사의 지원을 받던 단체였는데... 그 남의사의 총수 등걸이 김원봉의 군관학교 동기였다. 등걸은 국부천대 이후 대만으로 건너가 고위직을 역임했다. 등걸의 증언에 따르면 김원봉과 군관학교 동기생이었기 때문에, 지원은 물론이고 잦은 연락을 가졌다고 한다. 김일성으로선 국민당 간첩으로 몰아붙여 뒤집어 씌우기 너무나 좋은 이력을 가졌던 것이다.[44]

김원봉의 마지막 생은 숙청으로 사라졌지만, 평양 주재 소련 대사였던 알렉산드르 푸자노프의 일기에는 그의 죽음에 관해 다른 이설도 내려져 온다.

북한에서는 김원봉이 나쁜놈 끝판왕으로 영화에 자주 등장했다는 북한 전문기자 주성하의 증언이 있다. 김일성이 꽤나 껄끄러워했던 상대라고 한다. 후술하지만 황용주의 말에 따르면 김일성을 부정적으로 보고 김일성이 한 활동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3. 평가[편집]

3.1. 긍정적 평가[편집]

"일제 경찰이 백범 김구 선생보다 더 높은 현상금을 내걸 정도로[주의] 항일 투쟁의 치열함에 있어서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분. (중략) 일제시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대로 평가하고, 해방 후의 사회주의 활동은 별도로 평가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중략) 광복 70주년을 맞아 약산 김원봉 선생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드리고, 술 한 잔 바치고 싶다."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김원봉은 항일무장투쟁 노선으로는 절대 빼놓으려야 뺄 수 없을 만큼 굵직굵직한 여러 사건을 도맡았다. 다시 말하면 김원봉의 거취에 따라 무장투쟁세력들의 판도가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무장투쟁활동 활약상에 비해 남북한 양쪽의 평가는 낮은 편이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에게 숙청되어 묻혀버렸고, 대한민국에서는 북한 정권에 공헌한 공산주의자로 인식되어 독립운동 경력까지 도매금으로 넘어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감이 있다.

독립운동을 했던 적이 있어서, 역사 교과서에도 실린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 의열단과 조선의용대의 활동 내용이 출제가 되면서 입시를 위해서라도 김원봉을 기억한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 그리고 영화 암살과 밀정 등 대중 매체에서 조금씩 다뤄지기 시작하면서 김원봉의 사건이 재조명 받고 있다.

참고로 김원봉이 항일무장투쟁을 할 당시 일제가 김원봉에게 100만 원이라는 현상금을 걸었다는 얘기가 널리 퍼져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현상금 100만원에 대한 객관적 사료가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도 하나의 '신화'에 불과할 뿐 근거 없는 주장이라 밝혔다.[46] 또한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역시 김구보다 김원봉의 현상금이 높았다는 얘기는 가짜뉴스라고 반박했다.[47]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김삼웅은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일제와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독립투사로, 김원봉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김원봉은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남에서는 사회주의자로 평가했지만, 그는 사회주의자와 입장을 달리한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라고 말했다. 이어 "해방 후 친일파들로부터 신변에 위협을 느껴 망명하듯 월북했는데, 이를 이유로 독립운동 서훈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덧붙였다. 사실 김원봉이 활동한 의열단은 무정부주의적 성향이 더 강한데, 김원봉이 공산주의자에 무정부주의자였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진 바는 없다.

무장투쟁 분야의 대표적 인물이라는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했을 뿐 일본 그 자체에 대한 극단적인 반일주의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의용대 창설부터 일본의 반전운동가가 참여한 것도 있고 이후 조선의용대는 일본반전동지회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본반전동지회는 1941년 10월 3일 조선의용대 성립 3주년을 맞아 타카하시 신지 등 4인 명의로 김원봉에게 축사를 보내기도 했다.

3.2. 부정적 평가[편집]

"교활한 공산주의자."

민필호, 『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동아시아, 2006년, 142p)에서.

김구의 측근이었던 임시정부 내 보수세력인 민필호는 '김원봉은 사사건건 김구에게 대들었다'며 그를 '교활한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장준하 역시 '비록 그가 김규식 박사를 당수로 업고 이끌고 있는 조선민족혁명당의 부당수로 있기는 했으나 이미 판에 박힌 공산분자의 한 사람이었다'며 김원봉을 공산주의자로 지목, 비난했다.

장준하는 김원봉의 영입 노력 역시 비판했다. 일본군을 처음 탈출한 장준하 일행이 김원봉과의 연대를 거절하자 김원봉은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때 장준하는 김원봉이 동지들을 이간질하려고 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김원봉은 계속 사람을 보내 이들을 설득하려 했는데, 여기에서 장준하는 또다시 김원봉이 일본군 탈영병, 학도병 무리 사이에 이간질을 획책했다고 증언했다. 장준하는 '김약산의 부하로 파견된 분견대장의 설득 공작이 실패한 것을 알아차린 그들은 곧 우리에게 이간 공작을 시작했다'고 그의 저서 돌베개에 기록했다.

장준하는 1945년 광복 직후에도 김원봉이 이간질을 획책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광복군 대원들의 무지와 행패가 계속될 때 김원봉이 이를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일본군 출신 부대로 하여금 임정이나 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부채질하면서 그 어부지리를 노리는 김원봉의 계산이었다'며, 광복군 편입을 거절하고 버티던 일본군 출신 부대의 책임자 격으로 있던 황모에게 김원봉이 직접 이소민을 파견, 광복군 제1지대로 끌어들일 공작을 했다는 것이다.

김원봉은 자원입대 또는 강제징집으로 일본군으로 입대, 일본군에서 탈출한 한인을 적극 영입하려 하였는데, 장준하는 그의 책 돌베개에서 '김원봉이 일본군 출신 한인들에게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이소민 등을 파견하여 인척인 일본군 소위 출신 황용주 등을 끌어들이려 한다'고 보았다. 장준하는 그가 계략을 써서 일본군 출신 한인에게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임을 조장한다 하여 이소민 등에 대한 자료를 지청천에게 보고했다.[48]

게다가 월북 후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였고,[49] 북한 정권에 부역하여 대한민국에 직접적 피해를 준 '전범'이었는데, 국가검열상에 있을 때 6.25 전쟁 도중 간첩단을 파견한 것이다. 실제로 1954년 1월 26일 경향신문은 '우리 당국이 평양에 본적을 둔 간첩 김춘옥 외 4명을 체포해 이들을 취조한 결과, 김춘옥은 6.25 전쟁 당시 김원봉의 직접 지휘 하에 대한민국의 경제 혼란, 선거 방해, 모 정당 와해를 목적으로 남파되었다고 진술했다'는 내용의 신문기사를 내놓기도 했다.

4. 서훈 및 독립유공자 지정 논란[편집]

북한 최고위직을 지낸 김원봉의 독립유공자 서훈 수여에 대해 찬반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린 것으로 나타났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알앤써치에 의뢰해 실시한 2019년 4월 정기 주간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39.5%는 김원봉의 독립유공자 서훈 수여에 대해 찬성했고, 39.2%는 반대했다. 찬성과 반대 의견은 오차범위(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0%p) 안에서 팽팽하게 맞섰다. '잘모르겠다'고 의견을 유보한 응답자는 21.3%였다.#

이런 논란은 2019년 6월 6일 현충일, 문재인 대통령이 제64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했던 추념사 내용 중, 한국독립운동의 무장항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김원봉에 대해 언급한 것을 언론과 야당에서 지적하며 재점화되었다.

문 대통령은 추념사 중 일제 말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좌우합작을 언급하면서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돼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다"고 하였으며,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쟁의지,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적 역량은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동맹의 토대가 됐다"고 언급했다.* 당시 광복군이 구성을 보면 좌익 진영과 우익 진영이 합쳐저서 결성된 합작군임에는 틀림 없다. 다만 해당 부분이 논란이 있는데 해당 부분은 아래 참조

다만 청와대 측에서는 6월 10일, "김원봉의 서훈이나 독립유공자 지정은 현행법상 불가능하다"고 선을 그었다. 해당일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만나 "군의 뿌리가 김원봉이라라고 하여 안타깝다."는 말을 하였다. 그런데 정작 백선엽은 비록 6.25 전쟁이나 그외 대한민국 국군 창건 당시 공이 크긴 하지만 독립군과 간도에서 맞서 싸운 만주국 간도특설대 소속이어서 이 문제를 논의할 사람으로 적절하지 않다.

김원봉 서훈 논란이 의도치 않게 북한의 역린을 건드렸다는 주장이 있다. 지상욱 "北, 국정원에 '김원봉 거론말라' 요구⋯서훈 원장, 사실 밝혀야"

4.1. 긍정[편집]

2019년,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은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자는 서훈을 받을 수 없다' 라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항일 독립운동에 기여한 것 덕분에 독립유공자 선정이 가능할수도 있다고 밝혔다.#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948년 11월 11일에 남로당에 연루돼서 14연대 반란사건 을 일으킨 죄로 사형 구형을 받고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던 사람이 있다. 누군지 아시냐?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그러고 나서 박 전 대통령이 선거에 나섰을 때 상대방 윤보선 후보 측이 이 문제를 거론하며 빨갱이라고 공격하니까, 매카시즘 안 되고 종북몰이 색깔론 하지 말라고 그랬다."라며 "지금 현재의 김원봉도 마찬가지다. 광복 정국에서 이념이 뭐가 중요하냐. 일제로부터 우리나라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 모든 사람들은 독립유공자고 애국지사가 아니냐."라고 말했다.# 다만 박정희는 어쨌든 전향서를 제출하고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사면받은 반면 김원봉은 죽을 때까지 전향했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에 적절한 비유는 아니다.

역사학자 전우용은 6월 6일 약산 김원봉 선생의 평가에 대해 황장엽과 김원봉을 두 사람을 비교해 김원봉이 훈장을 받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 자신의 SNS에서 주장을 했다. "황장엽은 주체사상을 정립하여 김일성 세습 독재체제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까지 지냈다. 그는 독립운동에 전혀 기여한 바 없었으나, 북한 정권의 숙청을 피하여 월남하는 데 성공한 공적으로 2010년 이명박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라고 설명하며, "김원봉은 의열단 단장, 조선의용대 대장, 광복군 부사령,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지내면서 독립운동에 혁혁한 공적을 세웠다. 해방 후 귀국한 그는 노덕술 등 친일 경찰에게 모욕받은 데다가 정치적 동지였던 여운형이 암살당하는 것을 본 뒤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남북협상에 참석했다가 북한에 눌러앉았다라며 전국적 명성을 지닌 그는 북한에서 국가검열상과 로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지만, 김일성과는 소원한 관계에 있었다."라고 두 사람을 비교해 설명하며 "그(김원봉) 역시 황장엽과 마찬가지로 김일성 일파의 숙청을 피하여 탈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처형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통령이 현충일에 김원봉을 언급한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펄펄 뛰는 사람들, 북한 주민들을 '주체사상의 포로'로 만든 최악의 사상범 황장엽이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는데, 김일성 일파에게 숙청당해 남한에서 '반공 교육 자료'로 활용돼 온 김원봉이 훈장을 받지 못할 이유는 뭔가요"라고 주장했다.# 다만 이 역시 황장엽은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에 귀순하며 전향했고, 국내 정보기관에 여러 협조를 한 공도 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죽을 때까지 북한 정권의 고위 인사였던 김원봉과 비교할 수 있는 사례는 아니다.

김원봉의 조카 김태영씨는 "김원봉을 공산주의자로 몰기 전에 자유한국당의 뿌리인 박정희 전 대통령부터 보라"며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일제에 충성 혈서를 쓰고, 광복 후엔 남로당에 입당한 박 전 대통령이야말로 뼛속까지 친일파이자 공산주의자라는 비판을 들을 수 있지 않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일성은 소련 스탈린이 찍어서 내려 보냈고 6.25 전쟁에 책임이 있는 사람 아닌가. 독립운동 경력도 김원봉에 견줄 바가 못 된다."라며 "김원봉을 김일성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덧붙였다.#[50]

현충일 추도사 논란이 일어나자, 진보 측에서는 보수층이 옹호하는 만주군 장교 출신 군사 반란 총책임자가 남로당 이력이 있다는 것이나 주체사상의 아버지가 1등급 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되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거나,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새누리당의 김무성김을동 등 대표 의원들이 2015년 광복절을 앞두고 김원봉을 다룬 영화 암살을 보고 만세삼창을 했던 전력이 알려져 친문 성향이 강한 커뮤니티에서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또한 해당 당 소속의 밀양시 시장이 약산 김원봉이 밀양 출신인 것을 들어 의열기념관을 세운 사실이 있다. 당연히 해당 기념관은 "김원봉 장군"이라고 표기했다. 또한 박근혜 정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 당시 국정교과서에선 김원봉의 이름을 12번 넘게 언급하며 김원봉의 업적을 찬양했다는 것, 새누리당 기관지 새누리비전 2015년 8월호 14페이지에서 약산 김원봉을 독립투사로 묘사한 것이 밝혀지며, 좌우를 떠나 독립운동에서 부정할 수 없는 김원봉의 활약을 문재인 정부 쪽에서도 인정한 한 마디를 가지고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기 위해 과도한 공격을 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했다.

4.2. 부정[편집]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김원봉의 독립유공자 선정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내놓자 자유한국당 의원이 김일성부터 첫 훈장을 줘서 연금 받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대한민국재향군인회는 "김원봉이 북한 정권수립에 기여했던 만큼 자유 대한민국의 국가 유공자가 돼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2019 3월 27일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표-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 "좌파 독버섯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갉아먹고 있다"라면서 "피우진 보훈처장이 드디어 정부의 본심을 드러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갑윤 의원 역시 김원봉을 "북한 정권의 공신이자 남침에 기여한" 인물로 규정했다. 정 의원은 "대한민국에서 북한 독재자에 대해 해괴한 칭송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영웅에 대한 모멸감이 높아가고 있다"라면서 "그 역사전쟁 중심에 문재인 정부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 역시 문재인 대통령이 김원봉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페이스북을 언급하며 "문재인 대통령이 공산주의를 흠모하는 게 아닌가 싶다"라면서 "대한민국이 급속도로 물들어가고 있다. 나라의 앞날이 지극히 우려스럽다."라고 지적했다.#

반면 김원봉을 비롯해 월북한 인사들은 애초에 북한의 입장에 동조하며 대한민국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사람들이다. 즉, 민족주의의 입장에서는 "일제강점기에는 한민족을 대표해서 일본인에게 맞서 싸웠으나, 광복 후에는 비록 국가는 다르지만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다른 하나의 국가에 충성을 바치며 민족 통일을 이루려 했던 불운한 사람" 정도로 이해해줄 여지가 있지만, 국방의 관점에서는 적성 세력인 북한의 편을 들어 남한을 공격하려한 반역자인 셈이다. 즉, 앞서 말한 "광복 정국에서 이념이 중요하지 않았을" 수는 있지만, 이는 오히려 박정희처럼 일찌감치 재전향한 인물들에게나 적용해볼 법한 논리이다. 침략전쟁을 지지한 시점에서 이런 변명은 설득력을 잃는 것이고, 그건 좌우논리를 떠나 남한이 선제공격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현충일 추도사 역시, 광복절이나 3.1절도 아닌 호국영령을 기리는 현충일에, 호국영령이 잠든 현충원에서, 6.25 참전자 등 북한과 싸운 사람들이 추념사를 다 듣고 있는 상황에서 김원봉을 옹호하는 언행은 듣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고 소모적인 갈등만 부추길 위험이 있는 부적절한 발언이라는 것이 일부 학자들의 시각이다. 남성욱 고려대 교수, 예비역 육군대령인 윤형호 건양대 교수, 김근식 경남대 교수 등은 각각 "역대 현충일 추념사중 가장 이상한 추념사", "대통령이 공식 추념사에서 김원봉을 건국과 연결한 것은 부적절하다", "오히려 진보·보수간 소모적인 이념갈등만 야기할 위험이 있다"며 비판하였다. 박휘락 국민대 정치대학원 교수 또한 천안함ㆍ연평도 희생 장병까지 모두 껴안아야 할 대통령이, 이는 언급조차 못 하고 되레 논쟁적 인물을 띄우는 것은 결과적으로 남남갈등을 부추기는 꼴”이라고 지적하였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등의 야당 또한 비판적인 반응을 보였다. 전희경 자유한국당 대변인은 "6·25 전쟁에서 세운 공훈으로 북한의 훈장까지 받고 북의 노동상까지 지낸 김원봉이 졸지에 국군 창설의 뿌리, 한미동맹 토대의 위치에 함께 오르게 됐다"고 비판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일국의 대통령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도리마저 저버린 것은 아닌지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6.25 참전 용사의 가족들의 마음에 대못을 박은 것입니다. 현충일의 의미를 외면한 것입니다"라고 비판하였으며, * 지상욱 바른미래당 의원은 "북한 정권의 수립과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우고자 한 김원봉에 지금 건국훈장을 수여하려는 국가는 대한민국이라고 할 수 없다"며 "대한민국 국회 정무위원으로 또 국민의 한 사람으로 끝까지 막을 것"이라고 하였다. *

김원봉이 독립운동을 했던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며,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공산주의나 무정부주의를 선택했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그가 월북했다 하더라도 거기까지는 개인의 자유라 볼 수 있다. 실제로 당시 우익테러 세력들이 김원봉의 자택을 습격하거나 정치적 동료인 여운형이 암살되는 등 남한에서 있다가는 자칫 목숨마저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 김원봉이 북한의 침략전쟁을 도와 대한민국을 파괴한데 참여한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물론 그가 아니였어도 다른 누군가가 그의 자리를 대신했으리라 변명해볼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한국전쟁의 개전을 적극적으로 막지 못하고 심지어는 전시 내각의 일원으로서 한국민들을 희생시킨 데 일조하는 길을 걸었던 것은 김원봉 본인의 선택이 낳은 결과였다. 김원봉이 대한민국의 체제를 파괴하는데 앞장서고 반국가단체인 북한에서 고위직을 맡았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51] 만일 김원봉이 월북하지 않고 남아있다가 여운형처럼 극우세력한테 암살당하거나, 아니면 6.25때 납북된 것이라면 아마 좌우를 막론하고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서훈을 수여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설령 월북을 했다해도 북한 정권에 참여하지 않고 조용히 살았다면, 최근에 나오는 김원봉 재평가 여론에 맞추어 민주당이 집권했을 시기에 당시 목숨을 위협받던 상황을 참작하고 훈장을 수여했을 수도 있다.

이에 보수권에서는 80~90년전 독립운동을 한 북한의 6.25 남침을 지원한 북한 정부의 인물을 끄집어내서 여권에 반대하는 사람은 친일파로 모는 여론을 형성시킨다고 반발하고 있다.

보훈처에선 서훈 근거가 영화 암살 관객 수가 1200만이라는걸 근거로 내세워서 논란이 됐다. 그래서 현실과 자유롭게 창작한 영화를 구분 못 한다고 보훈처가 비판받았다.

5. 오해와 사실들[편집]

[김원봉 서훈 논란②] 약산 김원봉은 北노동당 핵심 권력자?…오해와 사실들

김원봉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며 서훈 논란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선 김원봉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했던 공로들이 분명히 컸지만, 김원봉이 월북하여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고 6.25 전쟁 이후 로력훈장을 받은 인물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네이버 뉴스 등지에서 김원봉이 6.25 전쟁의 '주범'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김원봉이 처음부터 김일성에게 부정적이었다는 증언과 남침에 반대했다는 증언을 보면 전쟁에 관여한 것은 사실이더라도 주범이라는 말은 약간 무리가 있을 수 있다.

김원봉은 조선로동당원이라고 인식하지만 사실 이것은 오해로 김원봉은 조선로동당원이 아니였다.[52]

이처럼 공과 과, 둘다가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 김원봉이라는 인물의 생애이기 때문에 김원봉에 대해 찬반 의견이 갈라지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가 2015년 영화 암살로 부각된 이후 현 여권(민주당)에 의해 지속적으로 띄워지고 있는 이유는 그의 화려한[53] 독립운동 경력도 있지만, 해방 정국에서 노덕술에게 고문받았다는 일화의 영향도 컸다.[54] 대한민국은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고 오히려 친일파가 권력을 장악해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다는 역사관 및 컴플렉스를 갖고 있는 진보 측이 제일 먼저 재평가해야할 인물 중 하나로 꼽혔기 때문이다. 즉, 북한이 좋아서 김원봉을 띄운다는건 오해고 진보세력의 친일파 청산 실패 컴플렉스를 자극하는 대표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진보측 입장에서는 비틀어진 역사를 바로잡는 과거사 청산 작업 중 하나가 김원봉 복권 및 서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김원봉이 노덕술에게 고문을 받았다는 주장은 논란이 많고 아직 진위여부가 불분명하다. 또한 친일파가 권력을 장악해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다는 주장 또한 과장된 감이 없지 않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당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정부 수립에 관여했고 주요 요직에 올랐기 때문이다.

6. 가족[편집]

김원봉의 가족
김원봉이 국외에서 항일무장투쟁 중일 때 국내 가족들을 보고 싶다고 하여 그의 가족과 국내에 잠입했던 의열단원이 같이 찍은 사진이다.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원봉의 부친이며 그 옆이 김원봉의 계모다. 앞줄 중앙이 김원봉의 막내 동생 김학봉이다. 뒷줄 오른쪽 양복을 입은 사람이 의열단 단원이다.
첫아들 중근을 안고 있는 김원...
1946년 여름, 김원봉이 첫아들 '중근'을 안고 밀양의 표충사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다.

김원봉은 총 3명의 여인과 결혼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원봉이 가장 처음 결혼한 여인은 평안도 출신의 '최석진'이라는 사람의 딸이었다.[55] 하지만 최씨 성을 가진 여인이라는 사실 이외에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본처와 사별 후 박차정[56]에게 새장가를 든다. 박차정은 김두봉의 5촌 조카뻘인데, 박차정의 외당숙이 바로 김두봉이다. 박차정의 어머니가 김두봉의 사촌동생이라고. 김원봉과 박차정은 1931년에 결혼하였다. 박차정은 1939년 장시 성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총상을 입어 후유증이 생겼고, 성병에 감염되어 1944년 충칭에서 병사했다. 정화암은 김원봉의 본처인 최씨와 박차정이 모두 화류계에 밥먹듯이 드나들었던 김원봉으로부터 성병에 감염되어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세 번째 부인 역시 조선의용대 출신의 최동선이다. 최동선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김중근이고 둘째는 김철근이다. 연구자들은 김원봉이 김일성에 의해 숙청될 때 부인은 물론 아들들도 모두 피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거물급 월북/납북인사들의 소식은 냉전 시기에도 판문점 채널[57]이나 조총련 계열 재일교포들을 통해 알음알음 전해졌고, 특히 국가통제가 일시적으로 붕괴했던 고난의 행군 시기 외부로 알려진 바가 많았는데, 김원봉 일가의 소식은 감감무소식이다. 이는 50년대 중후반 김일성의 숙청작업으로 숙청된 인사들의 공통점인데, 숙청 후 시간이 오래 지나서 숙청된 인사들의 가족이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 남은 가족들 중 동생들은 한때 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모두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남동생 김봉철과 여동생 김학봉은 생존했다. 김봉철은 4.19 혁명 당시 동생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밀양피학살자조사대책위원회에 참여했는데, 이후 이를 근거로 박정희 정권 하에서 옥살이를 하다 1986년 사망하였고, 2010년 유족들의 노력으로 인해 대법원에서 재심 결정 및 무죄를 선고받았다.# 여동생 김학봉은 고향 밀양에서 살다가 2019년 2월 24일 사망했다.#

7. 여담[편집]

  • 어릴 때부터 강한 반일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김원봉이 밀양 보통학교에 다니던 1911년,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때 학교에서 나눠준 일장기를 화장실 변소에 처박고 자퇴했다고 한다. 이게 단순히 자퇴로 끝났기에 다행인 거지 시대가 어느 시대인지를 감안하면 정말 대단한 패기가 아닐 수가 없다.
  • 항상 무표정으로 상당히 과묵했다고 한다. 임시정부에서 그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냈던 김구마저도 그가 웃는 모습은 거의 못 봤다고. 하지만 웅변 때문에 한 번 말했다 하면 상대방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 밀양의 절에 자주 들려서 주지스님과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고 하는데 주지스님이 회고하길 '인생에서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완벽한 인간'이었다고.
  •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여성 독립운동가였던 박차정 여사와 결혼하고, 신접살림까지 차려서 살았다. 나중에 부인이 1939년 곤륜산 전투에서 어깨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을 때, 손수 밀양에 돌아와 묻어주었다고 한다. 김원봉이 손수 만든 무덤은 아직도 밀양에 보존되어 있다. 다만 관리가 잘 되지 않아서 풀숲이 무성하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박차정 여사의 모교인 동래여고 동문회에서 주기적으로 묘소 관리를 하러 들른다고 한다.
  • 의열단의 단장답게 항상 인물을 만나면 의심과 경계를 했다고 하며, 아무에게나 쉽게 정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장소에서 2시간 이상 머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잠은 제대로 잤을까 싶을 정도. 그의 정신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의열단 창립 때부터 얼마나 잘 피해 다녔는지 일제 패망 때까지 잡히지 않았다.[58]
  • 미국의 기자였던 님 웨일스는 그녀의 저서 『아리랑(Song of Arirang)』에서 김원봉에 대해 "그는 고전적 유형의 테러리스트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몰랐다. (중략)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중략)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가씨들은 그를 멀리서 동경했다. (중략) 미남으로 로맨틱한 용모를 가졌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 김원봉은 같은 좌익 계열이었지만 김일성을 매우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1945년 8월 해방 직후, 귀국 전에 중국 상하이에서 체류할 기간 동안 일본군으로 강제징집 당했던 황용주[60]는 김원봉과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황용주에 따르면 '김원봉은 김일성의 무장항일투쟁을 매우 좋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김일성의 활동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하기도 했다.#
  • 밀양시 내이동의 김원봉, 윤세주 생가터 부근에 의열단 전체를 다루는 의열기념관이 있다.#
  • 한국 광복군의 장준하에 따르면 김원봉은 미인계 사용에 능숙했다고 한다.[61] 실제로 돈과 여자는 첩보계에서 자주 쓰이는 도구이며, 특히 체계적인 정부 조직이 없던 당시 상황에서 미모와 말빨만 교육하면 되는 미인계는 포섭에 가장 동원하기 쉬운 방법이었을 것이다.
  • 한편 정화암은 "영웅호색이라고, 김원봉이가 원래 호색을 했거든요. 그래서 화류병에 만신창이였지요. 그래서 그 부인(첫 번째 아내)이 완전히 성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김두봉의 조카딸(박차정)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말하며, 김원봉이 본인도 화류계에 자주 출입했고 이때 얻은 성병 때문에 본처 최 씨와 두 번째 부인인 박차정이 성병에 전염되어 죽었다고 증언했다.

8. 어록[편집]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선 민중은 능히 적과 싸워 이길 힘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구자가 되어 민중을 각성시켜야 한다."
"우리가 광복운동을 시작한 이래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혹은 군대를 조직하고, 혹은 공산당과 제휴하고 혹은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는 등 여러 가지 실책(實策)을 강구해보았으나 무슨 얻은 바가 있었는가? 우리 단원이 노리는 곳은 도쿄와 경성의 2개 소로서 조선총독을 죽이기를 5~6명에 이르면 후계자가 되려는 자가 없을 것이고, 도쿄에 폭탄을 터뜨려 해마다 2번 이상 놀라게 하면 조선 독립 문제는 반드시 그들 사이에서 제창되어 그들 스스로 조선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서 말하기를 "과거 일절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계급 투쟁이 있기 전에 종족적 투쟁이 있었으며 또 금일까지도 의연히 종족의 투쟁이 계속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일본의 민중이 조선의 민중을 침탈하였고 일본 무산자가 조선의 무산자를 침탈하는 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조선 내 연년히 이주하는 이민이 일본에서는 무산자가 아니었던 것이 없지마는 조선에 와서는 이삼 년만 지나면 유산 계급이 되기 쉽습니다."

동아일보를 통해 기고한 '합치(合致)되는 두 운동(運動) - 민족 운동과 사회 운동' 내용 일부.#
"중국의 형제들, 길이 악수합시다. 공고히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참으로 우리의 진정한 동아의 행복의 국가를 건설합시다."

조선의용대의 선무 공작 내용 일부.

9. 인물 연표[편집]

연도
행적
1898년
경남 밀양 출생
1916년
중국 망명
1919년
신흥무관학교 재학 (6~9월)
의열단 창설 (11월)
1920년
부산·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의열단원 박재혁·최수봉)
1921년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의열단원 김익상)
1922년
일본군 대장 저격 미수 (의열단원 김익상·오성륜·이종암)
1923년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및 도심 총격전 (의열단원 김상옥)
신채호 <조선혁명선언> 집필
1924년
도쿄 궁성 폭탄 공격 미수 (의열단원 김지섭)
1926년
황포군관학교 입학
- 동양척식(주)·식산은행 폭탄 투척 (의열단원 나석주)
1927년
중국 공산당 봉기 참여, 의열단 조직 위기
1929년
'레닌주의' 창간호 발간, 조선공산당 재건설동맹 결성
1932년
'조선혁명간부학교' 설립 (교장 취임)
1935년
난징에서 의열단 등 5개 단체 '민족혁명당' 결성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 (독립운동단체 연합) 결성
1938년
'조선의용대' (군사조직) 결성
1941년
조선민족혁명당, 임시정부 참여 선언
1942년
조선의용대 광복군 편입 (부사령관 취임)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 취임
1945년
광복 후 귀국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 취임
1947년
노덕술에게 체포, 십여 일후 석방
1948년
월북
북한 정부 국가검열상(북한 정부 서열 7위)
1952년
북 '로력훈장' 수상
북 로동상
1957년
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
1958년
숙청, 사망 (향년 60세)
출처. 자세한 내용은 이곳을 참조.

10. 대중매체에서[편집]

『아리랑(Song of Arirang)』(님 웨일스 지음, 조우화 옮김, 동녘)과 『김산 평전』(이원규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에 주인공 장지락이 만난 주요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김원봉이다.
그 반동놈의 자식...!
우리 국군 준비대를 해산하라, 이런 말이오?

1985년작 KBS1 국군의 날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배우 이춘식, 1989년작 MBC 특집드라마 <백범일지>에선 나영진, 1995년 KBS1 광복 50주년 기획드라마 <김구>에선 백준기가 각각 맡았고, 2003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심영의 소개와 함께 등장하여 남한 지역의 적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 묘사된다. 배우는 맹봉학.[62]

팟캐스트 방송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 중에서 2013년 2월 20일에 업로드된 29화에서 김원봉 특집을 다루어 매체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전혀 몰랐던 독립운동가를 알게 됐다는 평이 많았다. 다만 해당 방송은 김원봉에 대한 낭만적인 인식이 강하다. 이런 비판에 대해서는 팟캐스트 다시또역시 25화를 참고하면 된다.

위의 팟캐스트 다시또역시 25화에서도 김원봉에 대해 방송하였다. 다시또역시는 학위를 가지고 있거나 준비하고 있는 역사학 전공자들이 진행하는 방송이니, 김원봉에 대해 좀 더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내용을 듣고 싶다면 이 방송을 추천한다.

2011년 MBC 광복절 특집극 절정에서 김원봉 단장이 등장한다. 윤세주의 천거로 이육사를 의열단에 받아들이게 된다.

2000년작 영화 아나키스트에서 정원중이 연기한 '윤 선생'은 그를 모티브로 삼은 인물이다. 작중 의열단 멤버들의 수장으로 암살을 사주하고 자금관리, 계획등을 지시하며 상당한 카리스마를 지녔다. 하지만 '정의로운 독립운동가'의 이미지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고, 오히려 조직을 배반한 동료는 가차없이 죽이거나 후반부에는 아나키스트인 주인공들에게 사회주의로 전향 할 것을 권유하는 등, 순수한 이념보다는 권력과 정치적 목표를 우선시하는 냉혈한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후 에필로그에서 상구(김인권) 회고를 통해 과거 라이벌이었던 이승만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고문을 당하자, 3일간 대성통곡을 하곤 월북을 해버렸다고 언급된다.

2015년작 영화 암살에서 비중있는 조역으로 등장한다. 사실상 한국 내 영화, 드라마 내에서 김원봉에 대한 의미있는 조명은 이 영화가 처음이라고 봐도 좋다. 한국사회가 70년 동안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알게 해주는 부분. 배우는 조승우. 여담으로 암살의 흥행과 김원봉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면서 2013년 초에 업로드했던 이이제이 김원봉 특집 편의 순위와 구독수가 급상승했다고 자신들의 방송에서 언급하면서 이 영화에 대해서도 응원 메세지를 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의원들도 이 영화를 보고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외치면서 환호했었다.기사

암살에 이어 2016년 9월 개봉된 영화 밀정에서 이병헌이 맡은 역할인 정채산이 김원봉을 모티브로 한 의열단 단장으로 나왔다.[63]

2018년 7월 공영방송국 KBS에서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3년 만에 다시 부활하는 KBS 대하드라마의 주인공으로 김원봉이 선정되었다.# 다만 보수세력과 그 지지자들이 김원봉의 월북과 북한 정권 수립 참여 행보를 두고 반발하고 있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정책위부의장은 김원봉의 남파 간첩단 파견을 근거로 드라마 제작을 맹비난하기도 했다.# 이후 KBS에서 방송은 무산되었다. 2019년 MBC에서 첫방송된 드라마 이몽의 주인공으로 김원봉이 선정되었고, 유지태가 역을 맡기도 했다.

2018년 8월 공영방송국 EBS에서 지식채널ⓔ를 통하여 김원봉에 대해 처음으로 방송하기도 했다.#

2019년 1월 MBC에서 기억·록, 100년을 탐험하다를 통하여 김원봉에 대해 방송하기도 했다.#

11. 참고 문헌 및 저자 소개[편집]

※ 참고 문헌은 연도별로, 저자 소개는 간단한 약력으로 작성되었으며, 공산주의 계열 정당과 친일반민족행위자와 연관된 저자는 독자가 참고 바랍니다.
  • 『지도자군상(指導者群像)』[64], 대성출판사, 1946년, 김오성 - 한국의 공산주의 이론가, 문학평론가이다. 광복 이후 조선인민당 선전부장,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47년 월북하였다. 김승학이 작성한 원고에 기재된 263명의 친일인사 명단에 수록된 인사이다.
  • 『약산과 의열단(若山과 義烈團)』[65], 백양당, 1947년, 박태원 - 한국의 작가, 시인, 소설가이다.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문화예술행정특임위원이었고, 광복 이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6.25 전쟁 기간에 월북하였다. 일제에 소극적으로 협력한 적이 있어서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예비 명단을 정리했을 때 포함되었으나, 최종 명단에서는 제외된 인물이다.
  • 『북한인물록(北韓人物錄)』, 국회도서관, 1979년
  • 『항전별곡』, 거름, 1986년, 이정식, 한홍구 -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대학교수이며, 역사학자이다.
  • 金元鳳의 生涯와 抗日歷程국사편찬위원회, 1990년, 한상도 - 교육자, 대학 교수이다.
  • 『김원봉 연구』, 창작과비평사, 1993년, 염인호 - 서울시립대학교 인문대 국사학과 교수이며, 역사학자이다.
  • 『대륙에 남긴 꿈 김원봉의 항일역정과 삶』, 역사공간, 2006년, 한상도
  • 『약산 김원봉 평전』, 시대의창, 2008년, 김삼웅 - 성균관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 언론인, 학자, 작가, 과거 독립기념관장이었다.
  •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무부위원장 김원봉의 숙청[66]자유아시아방송, 2018년, 김주원 - 북한이탈주민 출신의 기자이다.

12. 관련 문서[편집]

[1] 작은키로 보이지만 당시 평균키였다. #[2] 1930년 8월에 의열단은 무산자전위동맹으로 개편되었다.[3] 조선로동당에 가입한 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4] 그러나 중국에서의 한인 군관 육성에 있어서 김구와 김원봉은 지속적으로 만남을 가지며 협력했다. #1#2[5] 여담으로 내이동에는 김원봉의 호를 딴 약산로가 있다. 다만 약산로와 생가터는 약간 떨어져 있다.[6] 당시 대만도 일제 치하였다.[7] 친일행위로 귀족 및 대지주가 된 자. 여기서 신(紳)이란 한자는 '권세가'란 뜻이다.[8] 이전에 의열단 고위 간부 출신으로서 국내 서울청년회의 유력한 성원이었다.[9] 결국 이 사건으로 김구, 김좌진, 이범석장준하지청천 등의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더욱 반공주의를 고수하게 되어서 소련 공산당과 협력하자는 입장을 보인 김원봉, 여운형 등과의 연대를 거부하게 된다. 이러한 공산당 자체의 분열과 민족 지도자의 반공 정서는 훗날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10] 정규군을 양성하는 군사학교인 만큼, 체계적인 교육을 이수할 수 있었다. 당시 교장은 다름 아닌 장제스. 한때 중화민국과 (국민혁명군 출신의) 대한민국 군부 요인 가운데는 이 황포군관학교 동문들이 존재했다.[11] 공산권에 가담했다고 해서 공산주의자로 단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 자체는 광범위한 메세지를 던지며 공산주의자가 아니더라도 공산권에 가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독일 사회민주당원이라고 전부 사민주의자가 아니다[12] 난창 폭동을 주도한 이는 항포군관학교 때 스승이었던 저우언라이였다. 이 난창 폭동은 중국공산당이 최초로 무장하여 싸운 날로 나중에 중국 인민해방군의 창립기념일이 되었다.[13] 레닌주의정치학교의 명칭은 모스크바의 마르크스학원을 모방한 것이었다. 『한국 공산주의운동사』(스칼라피노, 이정식, 돌베개, 2015) p.238 참고.[14] 정식 명칭은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로, 시인으로 유명한 이육사가 조선혁명간부학교 제1기 졸업생이다.[15] 단일대당(單一大黨) 조직을 설명한 부분이다.[16] 그래서 한국독립당에도 조소앙의 흔적이 있다.[17] 다만 이흐에도 조선독립동맹과 의용군 화북지대 공산당원의 수는 50여 명에 불과했다.[18] 약 200여 명[19] 과거 민족혁명당이 창당되었을 때 김원봉이 서기장이 되어 사실상 당권을 독점한 후 지청천을 제명하는 등 우파 인사들을 탄압하자 조소앙을 필두로한 우파 인사들이 이에 반발하여 집단 탈당했다. 이후 조소앙, 신익희는 임시정부 해체를 주장하는 김원봉에 맞서 김구를 도와 임시정부의 재건 및 유지를 위해 노력했으며, 내부부장 및 외부부장 등 주요 직책을 두루 맡았다. 또 조소앙과 신익희는 지청천을 도와 한국광복군 창설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42년 김원봉이 합류한 후 지청천과 주도권 싸움을 벌였지만 김원봉이 광복군에서 주도권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조소앙과 신익희의 견제도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20] 사사건건 갈등하던 사이였지만 임정 주석이었던 김구가 주례를 섰다. 김원봉은 최동선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 김중근과 김철근을 얻었다. 그러나 최동선과 두 아들 모두 1958년 김원봉과 함께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21] 아래 임시정부 요인 귀국기념 사진 속에 두 번째 줄 맨 오른쪽에 있는 인물이다.[22]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 대한 동아일보의 오보사건으로, 동아일보는 한반도의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보장한다는 3국의 합의 내용에 중심을 두지 않고 새로운 식민통치가 시작되는 것처럼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이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는 내용의 신문을 내놓는다. 하지만 오히려 미국이 '한반도 신탁통치 30년안'을 제안했고, 이와 반대로 소련은 '즉시 독립'을 주장하며 회의를 시작했다. 물론 소련이 정의로운 국가라거나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보면 1945년 말 당시 한반도는 좌익세력이 우익세력보다 상대적으로 우세했고, 지리적으로 봐도 한반도로부터 바다 건너 있는 미국과 달리 소련은 대륙으로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 자국의 영향력을 최대화하는 데 딱히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소련은 한반도보다 중국의 공산화에 더욱 신경쓰고 있었다.[23] 당시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은 미군정에 의해 부정된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반탁운동을 명분으로 되찾고 싶어 했다.[24] 이 과정에서 미군정에 의해 기용된 친일파들은 신탁통치 찬성파들이 소련에 나라를 팔아먹는 세력이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반공투사', '애국자'임을 자처하면서 우익세력의 뒤에 숨어들었다. 당시 미군정은 군정 고문 대부분을 친일파 출신이 많은 한국민주당에서 충원하였는데, 특히 일제 하에서 경찰로서 동족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데 앞장섰던 자들 중 80% 이상이 미군정 경찰에 다시 기용되었다. 소련과 냉전 중인 미국에게는 효율적인 한반도 통치가 근본 목적이었고, 한국을 잘 알지 못하던 그들은 친일행위자들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앞장서며 익힌 행정경험을 권력행위의 말단을 구성하는 데 동원한 것이었다.[25] 부위원장은 성주식[26] 김원봉은 여운형과 친분이 깊었다. 여운형은 김원봉이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으며, 김원봉은 광복 후 여운형의 환갑잔치에 참석하기도 했다.[27] 1920년대 말 동래경찰서에서 근무하면서 당시 광주학생운동과 연관된 부산 학생들을 물고문하고 구타해서 '고문 귀신'이라 불리던 악질 친일경찰이었다. 이후 평양경찰서 서장으로 근무하던 당시 해방을 맞았는데, 당시 평양을 점령한 소련군에 의해 구금되었다가 수개월만에 탈출하여 남한으로 내려왔다. 이후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1946년 1946년에 장택상에 의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 되었고, 서울에서 '좌익분자' 검거 등을 주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됐다. 그러나 이승만은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을 불러 노덕술을 풀어주라고 했으며, 심지어 노덕술을 체포한 반민특위 위원들을 의법조치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결국 반민특위를 주도하던 소장파 국회의원들은 프락치로 몰렸고, 반민특위는 해산되어 노덕술은 풀려났다. 이후 노덕술은 육군본부 제1사단 헌병대장이 되어 6.25 전쟁 당시 서울지역 부역자 처벌 책임자가 되어 양민학살에 관여한다.[28] 언론인 송건호에 의하면 김원봉은 체포당했을 당시 화장실에서 용변을 다 마치기도 전에 끌려갔다고 한다.[29] 이에 대해 2015년 동아일보의 송평인은 노덕술이 김원봉을 체포한 것은 사실이나 노덕술이 그의 뺨을 때리고 고문했다는 사료는 찾을 수 없었다는 칼럼을 내기도 했다.# 거기에 후술할 장강일기 속 정정화의 증언은 순전히 전해 들은 것이어서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말하기도 했다.[30] 본문: 노덕술이 고문 경찰관인 것은 분명하지만 설마 김원봉 같은 인물을 고문까지 했겠냐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근거를 찾아봤으나 찾을 수 없었다. / 김원봉 연구서는 염인호 서울시립대 교수의 ‘김원봉 연구’(1993년)가 가장 상세하다. 어디에도 김원봉이 노덕술에게 뺨을 맞고 고문을 당했다는 말은 없다. 다만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의 회고록 중 “김원봉이 노덕술로부터 모욕적인 처우를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정정화의 회고록은 부정확한 데가 많은 데다 이 말은 전해 들었다는 것이어서 신뢰도에 문제가 있다. 그것을 믿는다 하더라도 모욕적인 처우가 고문이었다면 고문이라고 하지 모욕적인 처우라고 에둘러 말했겠느냐는 의문이 남는다.[31] 김규식의 비서실장으로, 일제강점기 때 단파방송 밀청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룬 적이 있다.[32] 임시정부 계열[33] 김원봉이 석방되던 당일' 둘째 아들이 태어났는데, 자신이 철창에 있을 때 태어났다 하여 이름을 '철근'이라고 지었다. 김철근은 1958년 김원봉이 숙청당했을 때 다른 일가족과 함께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34] 중경 시절 비서를 지냈다[35] 단독 선거 및 단독 정부 수립.[36] 주한 유엔 유격군이 작성한 1953년 3월 19일 자 보고서에 따르면 김원봉의 월북 경위에 대해 '스스로를 좌파(leftist)로 인식했고, 삼촌(uncle·실제론 인척)인 김두봉과의 관계 때문에 서울을 떠나 1946년(실제론 1948년) 월북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 보고서는 국회도서관에서 소장 중.[37] 『약산 김원봉 평전』 (김삼웅, 시대의창, 2008) p584와 북한이탈주민의 증언 참고.[38] 가족이 대한민국에 버젓이 있었던 김원봉으로서는 남침에 반대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39] 1948년 4월까지 남한에서 활동하면서 남한의 사정에 밝고, 남한 내 좌익 세력과 가장 깊게 연계되어 있던 김원봉이 이 자리에 오른 것은 당연했다.[40]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면서 내각에서는 나오게 되었다.[41] 이 사람도 1959년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42] 『김일성 전집 제5권』 (평양:조선로동당출판사, 1960) p310에 따르면, 김일성은 "의병대라든지, 조선독립군이라든지, 의열단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있었지만 이것은 순전히 민족주의적인 군대였으며 지주, 자산 계급의 리익을 옹호하는 군대였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43] 다만 소련 평양대사를 지냈던 프자노프의 일지는 김원봉이 대한민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미국인과 연결되어 있는 김달현과 교류한 것이 그가 숙청된 이유라고 보았다.#[44] 그러나 김일성은 똑같은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에 국민당군 대령이었던 최덕신이 훗날 월북했을 때는 좋다고 넙죽 받아주며 김일성 훈장까지 수여했는데, 단독정부 수립 전에 월북한 김원봉보다 단독정부 수립 이후 월북한 최덕신이 체제 선전에 있어서 더욱 유용했기 때문에 그러한 것으로 짐작된다.[주의] 명백한 거짓이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에서 직접 김원봉의 현상금은 대표적인 가짜뉴스라고 밝힌적이 있으며, 무엇보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도 김원봉의 현상금은 어떠한 근거도 없는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고 결론내린바 있다.[46] https://www.minjok.or.kr/archives/104051[47] https://news.joins.com/article/23552759[48] 다만 민필호와 마찬가지로 장준하 역시 우익 민족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였으므로 좌익인 김원봉에 대한 그의 평가는 좋지 않을 수가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49] 국가보훈처 내부규정에 의하면 북한 정권 수립에 관여한 사람은 건국훈장 수여 명단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김원봉은 건국훈장을 받지 못하였고, 앞으로도 받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50] 사실 보수계의 역린이기도 한데, 독립운동은 물론이요, 공산주의 활동을 했던 사람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점이다. 애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은 대한민국에 엄청난 기여를 한 독립운동가나 애국자들 또는 대한민국사에게 긍정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자에게 주는 훈장인데, 남조선로동당은 제주 4.3 사건 책임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거니와, 김일성과도 큰 연관이 있다. 남로당 당수 박헌영의 이미지를 생각해보라. 오죽하면 민정당에서 "TK에는 빨갱이가 많다. 김일성 오면 만세 부른다."는 네거티브까지 해대기도 했었다.[51] 전쟁 이후에도 북한의 군사도발과 북한 정권의 영향으로 징병제를 아직도 시행 하고 있어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 물론 중국이 건재한 한 북한이 없다고 징병제를 안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여하튼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눌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청년들의 2년을 날려보내게 만든 건 사실이다. 게다가 북한 청년들 입장에서는 굳이 적대할 이유도 없는 우리나라를 두고 부정적인 세뇌 교육을 받느라 인생의 10년 가까이를 허비해야 한다.[52] 북한 권력의 핵심인 조선로동당이 아닌 군소정당인 '조선인민공화당'의 중앙위원회 위원장이다. 이런 혼란이 온 이유는 이름이 같은 조선로동당의 김원봉이 동명이인으로 있고, 게다가 이 인물도 김원봉과 같은 시기 숙청당해서 더욱 혼선을 주었다.[53] 일제가 가장 위험시한 독립운동가였으며, 김구와 함께 독립운동의 선봉장이었기 때문이다.[54] 그러나 해당 일화는 진위가 불확실하다[55]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김학준, 민음사, 2005)에서.[56] 여성 독립운동가.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을 지냈다.[57] 북한 기관지나 언론인을 통한 북한의 공식 입장이다.[58] 실제로 일제는 김원봉에 대해 "보기엔 우유부단한 것 같지만 성질이 극히 사납고 치밀하다. 오안부적(傲岸不敵)(: 거만해서 대적할 자가 없음)의 기백과 신출귀몰하는 특기도 가졌다."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59] 현재의 북한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60] 뒷날 MBC 사장이 되는 인물이다.[61] "몇 사람씩 따로 불러다가 술을 사 먹인다든가 혹은 금품으로 매수하는가 하면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 계열에서는 심지어 미인계를 쓰기도 하였다." - 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박경수, 돌베개, 2003년 8월 5일)에서.[62] 생년월일은 1963년 5월 25일생이며, 1부에서는 번개에게 소매치기 당한 전차 승객으로, 이후 106회에서 법무부 장관 역을 맡았다.[63] 재미있는 건 내부자들에서 같이 출연한 조승우, 이병헌이 한 번씩 김원봉 역할을 하게 되었다.[64] 광복 직후 김오성이 좌익계 인물들의 생애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대해 서술한 평론집이다.[65] 광복 이후 박태원이 조선문학가동맹 집행위원, 조선문학건설본부 소설부 중앙위원회 조직 임원으로 선정되었을 때 서술한 책이다.[66] 월북 이후 내용은 기사를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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