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5

[특집/전문공개] 평화는 사람이다 : 미리보기 : 평화저널 플랜P

[특집/전문공개] 평화는 사람이다 : 미리보기 : 평화저널 플랜P

[창간호/ 2020.09][특집/전문공개] 평화는 사람이다
플랜P
2021-03-16




ⓒ 평화저널 플랜P 창간호



  김상덕 편집위원이 쓴 창간호 특집 <평화는 사람이다> 를 전문 공개합니다. 



평화는 모호하고 폭력은 분명하다 

평화란 무엇일까? 진정한 평화가 현실 속에 가능한 일인가? 평화란 무지개 너머에 존재하는 막연하고 이상적인 개념과도 같다. 평화에 대한 정의도 구체적인 설명도 쉽지 않다. 누군가 당신에게 가장 최근에 목격한 평화에 대해 묻는다면 어떤 모습이 떠오를까? ‘비둘기? 한적함? 도대체 평화가 뭐지?’ 반면에, 폭력은 우리 주변에 쉽게 발견되고 구체적이다. 우리의 내면에서, 가족과 이웃에서 발생하는 폭력들부터 언론을 통해 목격되는 수많은 폭력의 이야기들이 쉽게 떠오른다. 어쩌면 평화에 대한 갈망이란 폭력에 대한 저항과 비례하는 것일지 모른다. 

과거 종교는 평화의 당위와 실천에 대해 주로 관념적인 논의와 개인적 실천에 대해 강조했다. 근대 이후, 특별히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이후부터 시작된 근대 평화학과 평화운동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그 시작을 폭력에서부터 찾는다. 폭력이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평화를 깨뜨리며 사람과 사회 그리고 자연에 해를 가한다. 특별히 ‘폭력의 부재’로서의 ‘소극적 평화’가 아닌 모든 폭력의 잠재적 원인을 찾아 해결하는 ‘적극적 평화’를 추구한다. 이런 맥락에서, 평화란 폭력을 줄여가는 과정으로 이해되며, 폭력에 대한 이해는 물리적 폭력을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적·문화적 영역으로 확장된다. 

평화에 대한 이해는 모호하고 다양하다. 이찬수는 <평화와 평화들>(모시는 사람들, 2016)이란 책에서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개념으로서의 ‘평화’(대문자 Peace)와 개별적이고 실천적인 이해로서의 ‘평화’(소문자 peace)를 구분한다.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원하지만 개개인의 평화의 이해와 실천 방식은 다양하다는 것이다. 다양하다는 말은 상이하다는 뜻을 내포하는데, 우리 사회의 많은 갈등이 ‘다름’에서 비롯되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심지어 평화에 대한 인식의 다름이어도 말이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야.’ 이제는 일종의 클리셰가 되어버린 이 표현은 진부할 수는 있으나 그 필요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름’과 ‘그름’의 구분의 필요성이 여전한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다름’을 쉽사리 포용하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한국 사회를 돌아보면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혐오와 폭력적 갈등으로 이어져 가는 것을 발견한다. 성과 성역할의 인식의 간극이 벌어지고, 세대 간의 차이는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느 사회나 존재하던 정치적 진보와 보수는 극단적 형태의 표현만이 광장에 난무하다. 성숙한 대화와 토론으로서의 광장은 어느새 서로를 향해 비난을 쏟아내기 위한 화풀이 장소로 전락했다. ‘나와 조금 다를 뿐, 그들도 존엄한 사람이야.’ 초등학생들은 알지만 어른이 되면 잊어버린다. 사람됨보다 더 현실적인 이유들을 걱정한다. 집값이 떨어지거나 범죄율이 오를 것을 두려워한다. 그렇다고 분명한 근거나 상관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막연한 두려움에 기인하여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느끼는 대상에게 갖는 부정적이고 폭력적 감정을 일컬어 ‘혐오’라고 한다. 장애인, 외국인, 다문화, 탈북민, 성소수자, 난민 등에 이르러 ‘혐오’와 ‘배제’는 오늘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윤리적 이슈가 되었다. 

지난해 화제를 모았던 KBS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아직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주인공 동백이공효진가 첫사랑이었던 강종렬김지석과 어떻게 헤어지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회상 장면이었다. 동백이는 종렬과 결혼을 약속하고 예비 시어머니를 만나게 되지만, 종렬의 엄마는 동백이가 아들의 결혼상대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촉망받는 야구선수인 ‘아들’종렬에게는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줄 소위 ‘현모양처’가 필요한데, 동백이는 부모도 없고 어딘가 어두워 보이는 구석이 있어 싫다고 한다. 사실 동백이는 친부모에게 한번 버려진 후, 양부모에게서도 파양되어 다시 버려진다. 동백이가 무엇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동백이가 부모가 없고 그래서인지 왠지 어두워 보인다는 이유로 버려진다. 그런 과거를 가진 동백이를 향해 종렬의 엄마가 말한다. “난 네가 싫어. 그냥 네가 병균덩어리 같아.” 어떤 사람이 상대방을 앞에 두고 ‘병균’ 취급을 할까? 평소에 사람을 향해 ‘병균덩어리’ 같다는 표현을 쓰는 경우도 드물다. 이 어색한 대사는 작가의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는 <동백꽃 필 무렵>의 전체 주제와도 일맥상통한다. 동백이가 옹산에 내려가 ‘카멜리아’라는 식당을 차렸을 때, 그녀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외지인, 미혼모, 술집여자와 같은 사회적 편견들이었다. 누구도 그녀를 있는 모습 그대로 보지 않았다. 옹산의 직진남, 황용식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드라마는 동백이가 사회적 편견과 싸우는 과정 속에서 사랑, 가족애, 마을 주민들과의 화해를 담고 있다.➊ 

➊ 동백이를 있는 그대로 포용한 사례를 황용식(로맨스) 과 친모(모성애)를 중심으로 그려낸 점은 아쉬운 지점이 기도 하다. 동백이가 맞서 싸우는 사회적 편견과 차별은 도리어 ‘전통적 가족’ 바깥에 위치한 사람들에게 더 빈번 히 일어날지도 모른다.  



단절의 역사와 모호한 혐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혐오란 나에게 해를 끼칠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에 기인하여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로 상대방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심리적 활동을 말한다. 혐오에는 단계가 있다. 두려움과 분노가 집단화되고 구체화되면 끔찍한 폭력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폭력적 갈등의 원인도 혐오의 문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나와 다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리는 왜 그렇게 이질적인 것에 대해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된 것일까?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알지만, 해결의 실마리 중 하나는 한국 사회가 경험한 ‘분단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6·25전쟁과 분단의 역사는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갈라놓았다. 수많은 사람이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거나 다쳤고 가족을 잃고 고아로 살아가야 했다. 실향민들은 일평생 가족과 생이별을 한 채 기다리거나 미안해하는 마음으로 살게 되었다. 같은 민족이지만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눈 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군사적 위협과 긴장 속에서 살아간다. 분단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도 엄청나다. 막대한 예산이 군사 및 안보를 위해 사용되고 있으며,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작전지휘권은 아직도 한미연합사령부에 예속되어 있다. 정말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나라의 운명이 아직도 우리 스스로에게 없다는 사실은 6·25전쟁 이후 분단된 조국의 설움이다. 이를 빌미로 미국은 우리 정부에 상당한 금액의 방위비 분담금을 요구하고 있다. 한미 동맹은 처음부터 동등하지 않았다. 전쟁 후 폐허가 된 국가를 일으키는 데 큰 도움이 된 우방국이었지만, 많은 경우 미국의 편의를 따라야 했던 힘없는 국가의 설움도 있었다. 무엇보다 남과 북의 문제를 ‘우리끼리’의 문제로 해결할 수 없고, ‘북미’ 대화의 중재자 역할 정도의 제한적 현실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물리적이거나 외형적인 어려움들에 불과하다. 분단의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사회 내면에도 영향을 끼쳤다. 마치 트라우마와 같이 말이다. 소위 ‘분단 트라우마’는 전쟁과 분단의 경험이 과거에 일시적으로 발생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특별히 우리의 의식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적어도 내게는 ‘국경’border에 대한 개념이 그렇다. 

1) 내 안의 분단 트라우마를 마주하다 

서른 살 즈음 중국 간도 지역을 여행한 적이 있다. 그때 방문한 곳 중 하나가 중국 지린성吉林省 남단에 위치한 훈춘琿春이라는 도시다. 조선족 자치주에 속한 이곳은 중국, 북한, 러시아의 세 국경이 모여 있는 접경 지역이자 한족, 조선족, 만주족 및 다양한 소수민족과 북한과 러시아에서 넘어온 사람들로 다양한 문화와 경제 활동이 일어나는 곳이다. 방천 전망대는 이 세 나라의 국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관광지다. 그래서 충격이었다.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에서 유일한 국경이란 서로 총을 겨누며 경계해야 하는 군사적 긴장의 장소이어야 했다. 그런데 훈춘에서 만난 국경은 질서와 평온한 일상의 공간, 아니 관광지 중 하나였다. 더구나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이지 않은가! 그날의 평화로움이 내게는 30년의 고정관념이 완전히 깨어지는 해체의 경험이었다. 그렇게 나는 분단의 어그러진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경계를 넘어서는 독특한 경험이었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기회는 아니다. 

이 왜곡된 기억은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일까? 한국의 거의 모든 남자들이 군대에 간다. 전 세계 어디에 이 정도로 집단적이고 동일한 문화적 형성의 경험이 있을까? 한국의 ‘군사문화’가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가 진지하게 이뤄지고 더 큰 조명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생각해보라. 한국의 남성이 나처럼 군대에서 ‘국경’의 기억을 갖게 되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적’과 ‘허가된 살인’을 교육받고, 군대 안에서는 허가된 통제와 폭력의 문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 문화적 기억은 군을 제대할 때 같이 제대하지 못하고 사회로 가져온다. 그곳은 더 이상 군대가 아니지만, 그들은 가정에서, 회사에서, 여성에게, 약자에게 일방적으로 ‘군사문화’를 전수한다. 



ⓒ 평화저널 플랜P 창간호

2) 배제와 차별, 혐오의 문화 

분단은 남과 북을 지리적으로 가르고 서로를 적(원수)으로 만들어놓았다.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빨갱이’, ‘레드 콤플렉스’와 같은 혐오 집단이 생겨났으며, ‘반공’의 기치 아래 자행된 잔인한 폭력의 상흔이 역사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남과 북’은 곧 ‘선과 악’처럼 모든 것을 이분법적 나누었고 ‘아군’과 ‘적군’으로 구분하고 배제하고 차별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분단 트라우마’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새로운 집단 정체성과 혐오의 대상을 찾는 데 전용되기도 한다. 특히 ‘종북 게이’와 같은 표현은 한국의 독특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만 발견되는 ‘단절의 상처’이다. 나와 다름을 이해하거나 포용하기보다 그 차이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분노를 쏟아내는 일종의 ‘희생양’이나 ‘마녀사냥’ 문화가 자리한다. 특히 오늘날 청년 실업이나 여성 혐오 범죄 등의 문제는 여러 갈래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구조적 문제이지만, 그것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기는 쉽지 않다. 자신이 처한 어려움이 나의 해결 능력보다 크다고 느낄 때 우리는 종종 좌절하고 그 분노와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을 찾게 된다. 최근 혐오와 차별의 문제가 사회적인 현상으로 표출되는 사례들이 늘어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구조적으로 병들어 가고 있다는 일종의 병리학적 증상symptom이다. 따라서 한국 사회의 평화는 폭력의 환부를 도려내는 것과 평화의 근력을 회복하는 게 필요하다. ‘단절’이 아니라 ‘소통’과 ‘연결’의 시대가 되었다. 이질적인 집단들 간의 대화가 끊기는 순간, 갈등의 정도는 급속도로 악화된다. ‘다름’이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다양성의 일부이며 공존과 상생의 가능성이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분단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집합기억collective memory 이론➋에 따르면, 기억은 한 집단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핵심이다. 전쟁과 가난, 분단과 독재 등의 집합기억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미셀 푸코는 한 사회의 고정된 방식의 편견과 선입견이 통제된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에는 반대하면서, 사회적 고정관념으로서 ‘대중기억’popular memory과 이에 맞서 ‘대항기억’counter memory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 말은 우리의 ‘기억함’remembering이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을 재구성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즉, 우리는 분단을 넘어서는 새로운 상상이 필요하다.➌ 그리고 그 상상(기억)은 나의 이야기일 때 큰 힘을 발휘한다.

➋ 프랑스 사회학자인 모리스 알박스Maurice Halbwachs의 이 론으로, 그는 기억 연구의 대 표적인 학자이다.
➌ 상상과 기억은 언뜻 미래 와 과거를 다루는 다른 이야 기 같지만, 결국 본다는 의미 에서 같은 행위이다.



스펙터클보다 우리의 이야기가 필요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의 역사적 만남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모두가 놀랐고 감격했다. 이전까지 냉랭했던 남북 관계가 2018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이렇게 급속도로 달라질 수 있다니,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 적절해 보였다. 어안이 벙벙했다. 그도 그럴 것이 통일 및 남북 관계에 대해서 국민의 대다수는 ‘관객’audience이거나 ‘구경꾼’(spectator)인 경우가 많다. 특히 북한 관련 정보나 외교 정책 등은 소위 ‘그들만의 리그’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고, ‘통제’된 정보만이 언론을 통해 전해지기 때문이다. 판문점의 파란색 도보다리를 남북의 정상이 함께 걷는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 아니라 마치 영화 속 ‘상상’처럼 느껴진 것은 나뿐일까? 

국내외 언론들이 생중계로 보여주고 있음에도 ‘보고도 믿기 힘든’ 화면 속 현실은 일종의 스펙터클spectacle이다. ‘스펙터클’이란 매우 인상적인 ‘장관’이나 ‘구경거리’를 뜻한다. 도보다리 위 두 정상의 만남이 마치 한편의 영화 속 장면처럼 느껴졌던 이유는 그 순간이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 일상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구경거리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나의 (조금은 까칠한) 시선은 통일 및 한반도 평화의 이슈가 내 삶의 영역과는 괴리된 또 다른 세상의 이야기인 경우이기 때문이다. 사실 남북 정상회담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노력들이 물밑에서 이뤄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감춰지고 알려지지 않은 세상의 이야기다. 판문점 회담이라는 역사적 순간이 미디어를 통해 목격되고 있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이 이야기의 ‘과정’은 알지 못한 채 ‘결론’만 구경하게 된다. 이 스펙터클이 나의 삶에 의미로 다가오려면 나에게 충분한 공감을 주어야 한다. 어떤 영화는 웅장한 스케일에 화려한 시각효과를 자랑해도 관객에게 충분한 공감을 일으키지 못하는 반면, 어떤 영화는 소박하고 평범해 보이지만 커다란 감동을 주기도 한다.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영화 속 이야기가 나의 삶에 의미로 다가올 때 관객은 ‘구경꾼’에서 ‘참여자’가 된다. 2020년 한반도는 그리고 세계는 여러 의미로 역사적 전환기에 놓여 있다. 4·27 판문점 정상회담은 한반도 평화체제로의 전환의 가능성을 보여준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특히 남북한 두 정상이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을 넘는 사진은 ‘peace together’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상징이 저 세상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즉, 평화에 대한 거대 담론에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평화의 물은 아래에서 위로도 흐른다 

판문점 정상회담이 정부 및 외교적 노력의 중요성을 보여준 사례라면, 2019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은 그 한계를 보여준 사례이다. 오랫동안 실질적인 대립 및 이해 당사자였던 북미 정상이 실제로 만난다는 것은 남북 정상회담의 역사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임기 후에 대북 특사로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으며, 그의 외교적 노력이 양국 간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시켰다는 이야기는 익히 알려진 사례이기도 하다. 따라서 북미 두 정상의 만남에 큰 기대를 했던 것도 당연하다. 두 국가수반이 얼굴을 맞대지 말아야 할 이유는 차고도 넘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실제로 하노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난 장면이 전 세계로 생중계되었을 때의 놀라움과 흥분은 상당했다. 국내에서는 평창올림픽 이후로 발전되어 온 한반도 평화의 무드가 드디어 결실을 맺을지도 모른다는 낙관론이 언론의 큰 관심을 받았다. 양국의 협상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남과 북의 오랜 숙원사업인 종전이 선언되고 평화협정이 이어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 기대와는 달랐다. 오랫동안 적대적 국가였던 양국 간의 조율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팽팽한 긴장 속에서 진행되었다. 누구도 먼저 양보하거나 손해 볼 수 없는 게임, 국제무대란 신뢰나 양보는 능력이 아니라 무능으로 여겨지게 마련이다. 특히, 미국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의 요구는 끝내 관철되지 못했다. 

전통적으로, 국제관계에 있어서 국가 정상 및 외교관을 통한 공식적 외교를 가리켜 ‘트랙 1 외교’Track One Diplomacy로 지칭한다. 반면, 민간 및 NGO, 다국적 기업 등의 비공식적 외교 통로를 통틀어서 ‘트랙 2 외교’Tract Two Diplomacy로 분류해 왔다.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정부 주도의 공식적 외교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탑-다운topdown 방식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반대로 ‘아래에서 위로’bottom-up 평화의 노력들이 꾸준히 이뤄져야만 가능하다. 아무리 정상회담이 이뤄지고 마침내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이 체결된다 하여도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평화는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단지 ‘전쟁의 부재’가 아닌 ‘모든 폭력과 갈등의 잠재적 원인’들을 줄여가는 과정으로서 보다 적극적이고 새로운 현실에 대한 인식과 생활 방식 등의 대전환이 필수적이다. 

법과 구조만으로도 한계가 있다. 그 법 자체가 사람의 인식과 행위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이 식민통치와 독재정권으로부터 마침내 자유를 얻고 자유민주주의 제도로 국가를 재건하고자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독재자가 심판을 받고 정의가 이뤄졌으며 새로운 세상이 열렸지만, 그 사회 구성원과 시민의식이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정치적 공백은 다시 과거의 권력이나 심지어 더 악한 세력에 넘어가는 경우들도 발견된다. 결국은 사람이다. 평화의 이해와 인식의 문제도, 폭력에 대한 감수성과 폭력을 줄여가는 주체도,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며 ‘단절’의 기억을 절연하게 끊어내고 ‘소통’의 기억을 선택하고 살아내는 것도 사람이다. 평화는 결국 사람이며 사람이어야 한다. 평화를 관념이나 당위, 제도나 정책 등으로 접근할 때 우리는 본질을 놓치게 마련이다. 그래서 평화는 사람이 중심이고, 관계가 중심이며, 피해자가 중심이어야 한다. ‘당신 주변의 평화는 어떤 모습인가?’ 그것은 바로 사람이다. 나와 내 이웃이 행복하면 그것이 바로 평화이다. 누군가 폭력이나 위험에 노출된 채 소외와 차별 속에서 살아간다면, 아직 평화의 길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정부나 정책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없다. 평화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여야 한다. 2020년 오늘 우리에게 평화는 여전히 모호하고 멀게 느껴지지만, 폭력은 우리의 일상에 또렷하게 목격된다. 



ⓒ 평화저널 플랜P 창간호

누군가에게 미래였던 2020년은 

혹시 만화영화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KBS, 1989를 재밌게 봤던 기억이 있다면, 당신은 아마도 필자와 같은 시대를 살아온 ‘X세대’(요즘도 이런 말을 쓰는지는 모르겠다)일지도 모른다. 1989년에 방송된 이 만화영화는 ‘88 서울올림픽’ 개최를 기념하며 KBS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야심차게 제작한 작품이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미래 사회에는 인구 증가와 환경오염 등의 문제로 인류가 지구에서 살기 어려워짐에 따라 새로운 터전을 찾아 우주로 여행을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래가 되면 날아다니는 자동차는 물론, 자유로운 우주여행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던 만화적 상상이 담겨 있다.➍ 

갑자기 웬 만화영화 타령인가 싶겠지만, 30년 전 사회에서는 ‘2020’이란 숫자가 머나먼 미래 사회를 상징하는 연도였다는 점을 상기해보고자 한다. 그 먼 미래가 2020년이다. 그 미래를 우리가 오늘로 살고 있다. 그 당시 상상했던 날아다니는 자동차는 아직 없지만, 그때의 상상보다 더 다양하고 많은 기술의 발전을 경험하고 있다. 분명 30년 전보다 세상은 바뀌었지만 크게 바뀌지 않은 것들도 있다. 여전히 전쟁과 갈등은 지속되고 있다. 미국 내 인종차별은 과거의 일로만 생각했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폭력과 차별과 혐오의 역사들이 다시금 그 흉측한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세계 평화를 노래하지만 매년 각국마다 군비를 증가시키고 있다. 식량 생산량이 세계 인구를 먹이고도 남지만 여전히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다. 또, 병에 걸려 죽거나 평생 제대로 된 환경에서 교육다운 교육도 받지 못한 채 노동에 치여 사는 어린이들도 있다. 심각한 환경오염과 기후 변화로 인해 생태계가 파괴되면서 최악의 예측 시나리오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30년 전의 누군가가 타임머신을 타고 2020년 미래로 온다면, 그에게 한국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설마 아직까지 남과 북의 종전 및 평화협정이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상상했을까? 광주항쟁 이후 40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책임자에 대한 진상 조사와 진정한 사죄 그리고 용서가 이뤄지지 않았음을 믿을 수 있을까? 그는 과연 광화문에서 ‘종북 게이’를 외치며 혐오의 표현을 서슴지 않는 오늘의 광장을 상상이나 했을까? 

➍ 비슷한 예를 들면, SF영 화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블 레이드 러너>(1982)의 배경 은 2019년이고, 한국에서는 <서기 2019년>이란 제목으 로 번안되어 소개되기도 했 다. 블레이드 러너는 인류의 유전자를 이용하여 만든 복 제인간 ‘레플리칸트’를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되묻는 영화이다.



평화의 얼굴은 우리 주변에 있다 

2020년은 여러모로 역사적인 해로 기억될 것이다. ‘코로나 19’COVID-19라는 초유의 팬데믹 상황은 현재 진행형이고 얼마나 지속될지 예측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도쿄올림픽도 1년 연기되었는데, 이는 124년 올림픽 역사 중 전쟁이 아닌 이유로는 취소 혹은 연기된 첫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전염병의 세계 대유행은 환경 및 기후 문제와의 관계를 돌아보게 한다. 비슷한 이유일지 모르겠으나 국내에선 50일 이상 비가 내려 최장(最長)의 장마를 기록했으며, 이로 인하여 중부 지역에 심각한 비 피해를 입기도 했다. 

미래의 우리는 오늘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2020년의 한국 사회는 과거의 역사를 정리하고 기억하는 사회로 접어들었다. 근현대사의 아픔과 상처들이 너무도 많지만 그것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따라 앞으로의 한국 사회 모습이 달라질 것이다. 그 모습에 평화를 상상하려면, 우리는 사람에 집중해야 한다. 역사적 갈등의 주체는 사람이다. 한국 사회는 지나치게 정치화되어 바로 주변의 사람을 보지 못하게 한다. 관념이나 정치색이 아니라, 피해자의 아픔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또한 그런 아픔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가해자의 회복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평화를 말하고 실천하는 활동가들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 일상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더더욱 자주 평화를 상상하고 목격할 수 있어야 한다. 판문점 도보다리의 환상적 스펙터클도 좋지만, 우리 모두는 관객이 아니라 평화의 부분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일상에서 평화는 모호하고 폭력은 또렷하지만, 사람을 우선으로 하는 사회가 된다면 폭력은 줄어들고 평화는 조금 더 또렷하게 우리 곁으로 다가올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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