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24

[정의길 칼럼] 탈레반이 승리했고, 인정해야 한다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정의길 칼럼] 탈레반이 승리했고, 인정해야 한다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정의길 칼럼] 탈레반이 승리했고, 인정해야 한다

등록 :2021-08-23 

지금 아프간 주민에게 필요한 것은 전쟁의 완전한 종식이다. 포용적인 정부를 구성해, 전후 재건에 나서도록 국제사회가 지원을 아끼지 않는 관여를 해야 한다. 탈레반을 부정하고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아프가니스탄 남부 자불주 주도 칼라트에서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 대원들이 제복을 갖춰 입고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 지난 19일 SNS에 공개된 영상을 캡처한 사진. 로이터/연합뉴스




정의길 선임기자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의 철군이 종료되기도 전에 탈레반이 카불을 장악했다. 몇가지 현실들이 명백해졌다.


첫째, 미국과의 20년 전쟁 끝에 탈레반이 승리했다. 둘째, 군사력이 열세인 탈레반의 승리는 아프간 주민 다수가 수동적으로나마 지지했기에 가능했다. 셋째, 1979년 소련의 침공 이후 계속된 40년 이상 된 아프간 전쟁 수습이 탈레반의 어깨 위에 놓였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이 탈레반이 아프간 주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거나, 바람직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탈레반은 아프간 주민에게 차선도 아니고 차악에 불과하다. 탈레반이라는 차악의 선택을 한 것이 아프간의 현실이다. 이를 부정하면 다시 전쟁이라는 답 밖에 없다.

아프간은 40년 이상의 전란 속에서 사회주의 정권→무자헤딘 임시정권→탈레반 정권→친미 정부를 거쳐 다시 탈레반 체제로 5번이나 체제가 바뀌며 서로를 죽이는 살육전을 벌여왔다. 지금의 혼란과 우려는 누가 집권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전란의 파장이 아닐 수 없다. 2001년 미군 침공 때 탈레반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선도에 섰던 북부동맹 세력이 마자르-이-샤리프에서 탈레반 대원 3천여명을 집단학살하기도 했다.

탈레반의 카불 입성 뒤 국제사회에서 가장 의제화되는 것이 여성 인권 문제이다. 아프간에서 여성의 수난은 역설적이게도 탈레반이 세력을 얻게 된 문제이다. 소련 철군 뒤 군벌들이 자행한 여성에 대한 성폭행과 납치는 탈레반 운동의 주요 동기였다. 창시자 물라 오마르가 소녀를 성폭행한 군벌 지도자를 처형함으로써 탈레반 신화는 시작됐다. 주민들이 탈레반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법보다는 악법이라도 질서를 희구한 상황에서 기인한다.

탈레반은 아프간 부족사회의 전통 마을에서 이슬람법에 따라서 분쟁을 중재하던 이슬람 하위 성직자나 신학생들이었다. 탈레반의 득세는 아프간의 부족사회에서 그들의 전통적 자치뿐만 아니라 나름대로의 사법체계를 의미했다. 탈레반이 극단적인 보수적 이슬람 율법을 강제한 것은 전란의 무질서에서 기인한 극단적인 반동 현상일 수 있다. 미 국무부는 당시 보고서에서 “탈레반은 조악한 형태의 법과 질서를 회복했다. 이는 잔혹한 사법체계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버넌스였다”고 평가했다. 캐나다 정보분석도 주민들은 탈레반의 가혹한 샤리아 법 강제를 평화와 안정의 대가로 받아들였다고 지적했다.

25년 전 탈레반이 카불에 입성했을 때 아프간은 소련과의 전쟁에 이은 내전으로 모든 사회기반 시설이 파괴된 사회였다. 그런 여건에서 탈레반은 카세트테이프와 치약 사용 금지 같은 반근대적 공포 통치를 실시했다. 그 이후로 한세대 이상이 교체된 탈레반은 이제 카불에 입성해 소셜미디어를 통해 선전·선동을 하고 있다. 미국 등이 수조달러를 쏟아부어 재건한 사회기반시설을 마주하고 있다. 탈레반이 여성의 공직을 허용하겠다고 밝힌 것이 단순한 쇼라고 해도, 그들의 달라진 상황 인식을 반영한다.

탈레반의 원자료들을 수집한 <탈레반 읽기>(The Taliban Reader)라는 기념비적인 연구자료를 펴낸 펠릭스 쿠언 등 연구자들은 “2001년 이후 탈레반이 원하는 것을 그들이 2001년 이전에 원했던 것에 기반해 추론하는 것은 그 운동과 목적에 극히 잘못된 시각으로 이끌 것”이라며, 탈레반은 진화 중인 운동이라고 지적했다.

베트남전을 종료시킨 1975년 사이공 함락 이후 베트남을 탈출하려는 ‘보트 피플’ 사태가 벌어졌다. 보트피플의 다수는 화교들이었다. 종전 뒤 베트남과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돼 1979년 중-월 전쟁까지 치닫자, 베트남에서 상권을 쥐고 있던 화교들이 대량 탈출했다. 극히 규탄할 인도적 비극이나, 이 사태로 베트남에서 미군 철수와 종전의 정당성이 부정될 수는 없는 현실이었다. 베트남전이 지속됐다면, 더 큰 비극이 초래됐을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에서 아프간 특사로 임명돼 탈레반과의 평화협상을 추진한 리처드 홀브룩은 “우리는 엉뚱한 나라에서 엉뚱한 적들과 싸우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카불 공항으로 탈출하려는 아프간 주민들의 아비규환, 탈레반이 20년 전 집권 때 보여준 여성 등 소수자에 대한 봉건적 억압 등에 대한 우려는 정당하다. 하지만, 모든 책임을 탈레반에게 물어서 악마화하고, 바이든 대통령의 철군 결정 정당성을 부정하고, 또다시 ‘반탈레반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것은 아프간을 벗어나려거나, 남으려는 사람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건 전쟁을 다시 하자는 얘기이다.

지금 아프간 주민에게 필요한 것은 전쟁의 완전한 종식이다. 포용적인 정부를 구성해, 전후 재건에 나서도록 국제사회가 지원을 아끼지 않는 관여를 해야 한다. 탈레반을 부정하고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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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08747.html?fbclid=IwAR2JTguNynyeeX-E-qkPFQ1xed3Us3K6uIGvWwSG_ndKx93hGYndyPxW_Ek#csidxae5ad710427a3ca84cfc919b13bd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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