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사] 이영훈 교수의 역사관 한국사회관에 대한 논쟁: 김왕근 VS 장호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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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논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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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교수의 말씀은 장호두님이 연결해 주어서 이번에 처음 접하게 됐습니다. 시중에 이영훈이라는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고, 도서관에 비치된 그의 책은 예약 대기가 길어서 빌릴 수가 없습니다. 요즘 핫한 논객인 듯합니다.
링크된 동영상을 요약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이 동영상을 띄엄띄엄 봤는데, 이 사람이 한민족에 대해서 “사회적 갈등 수준이 높다.” “사회적 신뢰 수준이 낮다.”, “거짓말에 박근혜가 쓰러졌다.” “거짓말하는 악습이 나라를 망쳤다.” 등의 자극적인 언어로 말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아 동영상 전체를 보고싶지 않았습니다. 요즘 핫한 논객의 논리가 이렇게 뻔한, 시정잡배의 논리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 서글퍼지기까지 했습니다.
한민족이 사회적 갈등 수준이 높은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게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일본은 갈등 수준이 낮은데, 사회 전체가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여성은 남성의 노리개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공영방송에서 그런 장면이 넘쳐납니다. 우리의 사회적 갈등 수준이 높은 것은,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 자체를 수치스럽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갈등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역동적임을 뜻하기도 합니다.
한국이 사회적 신뢰 수준이 낮다는 이교수의 말에도 찬성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정전이 됐다고 해서 마트가 약탈되거나 하지 않습니다. ‘문명국’으로 인식되는 미국에서는 이런 일이 일상인데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택배도 “문앞에 놔두고 가세요”라고 합니다. 사회적 신뢰 수준이 높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이런 현실에 외국인들은 놀랍니다.
“거짓말에 박근혜가 쓰러졌다” 이 말도 거짓말입니다. 박근혜는 공식 정부에서 공무원들하고 일하라고 국민이 뽑아줬습니다. 그런데 박근혜는 청와대를 무력화하고 최순실의 아바타 역할을 했습니다. 박근혜 최순실이 무능했고 부도덕했다는 것은, 헌법재판소의 판결 과정을 보면 명확히 드러납니다. 유튜브에 그 동영상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교수라는 사람이 어떻게 “박근혜는 거짓말에 쓰러졌다”라고 말하는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박근혜는 자신의 무능 때문에 쓰러진 겁니다. 그가 거짓말에 쓰러졌다면, 그 거짓말을 박근혜 자신의 거짓말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거짓말하는 악습이 나라를 망쳤다”라면서 이영훈 교수는 ‘세월호’를 언급합니다. 이건 진영논리로 보면 ‘촛불’ 정권을 부정하기 위한 말로 보입니다. 그러나 나라를 망친 건 ‘촛불’이 아니라 ‘세월호’라는 사태를 만나서 대국민 소통에 서툴렀고, 특히 세월호의 진상을 조사하려는 노력을, 정부를 동원해서 불법적으로 막았던 박근혜 대통령과 그 정권이었습니다.
청구권자금 3억달러로 개인청구권까지 다 청산됐다는 말도, 일면적인 주장입니다. 대법관들이 거짓말에 기초한 판결을 내렸다, 라는 말도 일방적인 주장입니다. 상황은 이렇게 한마디로 할 만큼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영훈 교수의 주장 중에 생각해볼 만한 내용은 “이번 재판의 원고들은 시기적으로 보아 모집과 알선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노예로 끌려갔다니요. 말이 되지 않습니다.”라는 부분입니다.
이영훈 교수의 주장은 구체적인 사항에서 생각해볼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는 시각은 심각하게 왜곡돼 있습니다. 이영훈 교수는 “조선인은 일제 강점기 때 근대화됐다”라고 말합니다. 아마 이 말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가 일본이 근대화되는 시기였고 조선반도에도 그런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정에 빠지면 안 됩니다.
우리가 ‘근대’라는 말을 할 때는, 그 이전에 봉건 시대든 무엇이든, 서구가 갔던 올바른 진화의 길을 다른 주체들은 가지 못했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에는 어떤 가치판단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근대’라는 프리즘으로 세상을 볼 때는 서구는 우수하고 동양은 열등하다, 라는 결론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한민족이 서구인보다 열등한가요? 한국은 짧은 시간에 산업화 민주화를 이뤘고 문화적으로도 ‘한류’로 세계를 호령하고 있습니다.
이영훈이 “조선인은 일제 강점기 때 근대화됐다”라는 말을 받아들이면 바로 “그러니 조선은 일본의 은혜를 입었다”라는 결론으로 갈 위험성이 높아집니다. 그러나 생각해봅시다. 일본이 근대화 되어서, 그 다음에 일본은 올바른 길로 갔나요? 군국주의로 가서 패망의 길로 갔습니다. 일본은 단순히 서구의 아류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일궜습니다. 이 민주주의는 홍콩 시민들이 중국에 항의할 때 모범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본에 의해서 근대화됐다면, 우리는 어떤 힘이 있기에 이런 새로운 길을 개척했을까요?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영훈 교수는 생각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땅의 보수 세력들이 이런 측면에 눈을 감으려 합니다. 왜냐? 지금 정권이 싫으니까.
저는 틈만 나면 현 정권을 비판했습니다. 왜? 그래도 이 정권이, 나라를 망친 박근혜의 잔당 자유한국당보다는 나으리라고 생각하고 싶으니까. 애정이 없는 대상에 대해 비판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런데 현 정부는 경제도 외교도, 그리고 안보도 무슨 책임감 없이 그저 “이게 옳은 길이야”라고 하면서 무턱대고 달리기만 하는 것 같아서 위태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한일 갈등을 부추기는 것은 하나의 예입니다. 과거 남한과 북한의 정권이 ‘적대적 공존관계’에 있었던 것처럼 문재인 정부와 아베 정부는 ‘적대적 공존관계’에 있으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듭니다. 한일간의 싸움이 나라는 둘 다 거덜내지만, 민족주의 감정에 의해서 정권의 인기에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냐는 말입니다. 일본 정부도 무논리이기는 한국 정부보다도 더한 것 같습니다.
한국 정부나 일본 정부나, 현실에 대한 성찰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성찰의 가능성이 있는 측은 상처를 입은 측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처를 준 사람은 상처를 준지도 모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성찰할 기회도 적습니다. 그러나 상처를 입은 사람은 그 상처가 성찰의 기회가 됩니다. 암에 걸린 사람이 “내가 암에 걸리지 않았다면 내가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지 아득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하나의 예입니다. 경제전쟁으로 한판 붙고 나서 일본 정부는 너무 안일한 대응책을 냈다고 반성하는 듯도 보입니다. 그러나 “징용 문제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일본 정부의 속마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부의 입장에서는, 자국 기업이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상황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일본 정부가 그런 입장에 처하게 됐다는 것은, 한국 법원이 보통은 취하지 않는 ‘사법적극주의’적 판결을 내린 것을 생각하면 이해될 수도 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국은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한다”라는 역사를 써낸 민족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역사를 국제적으로 확장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국제사회에서 받아들여질지는 단정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한일간에 역사에 관한 진정한 화해로 귀결지어져야 하는 어떤 것이 될 것이지만, 그러나 전두환을 민중의 힘으로 몰아낸 것처럼, 한국이 힘으로 일본을 제압해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저는 느낍니다. 오히려 차분한 논리와 설득으로 일본의 양심 세력들의 목소리를 더 크게 낼 수 있게 하는 외교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일본의 체면도 살려주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청구권자금을 받아서,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징용피해자나 위안부 피해자를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전체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 쓴 것에 대해서 뼈저리게 반성하는 것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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