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14

북으로 간 천재 언어학자 김수경 1, 2 - 오마이뉴스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 27화

김일성대학으로 간 아버지, 남한에 남은 가족의 선택[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김일성대학 초대 도서관장 김수경 ①
21.09.19 
글: 백창민(bookhunter)
이혜숙(sugi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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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이후 남북한 도서관에서 일한 수많은 '도서관인'이 있다. 남한뿐 아니라 북한에도 많은 도서관이 있고, 북녘 도서관에서 일한 사람 역시 적지 않다. 많은 인재가 남과 북의 도서관에서 일했다. 그 중 가장 뛰어난 석학(碩學)은 누구일까?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가장 유력한 사람은 '천재 언어학자' 김수경(金壽卿)이다.

김수경은 1918년 5월 1일 강원도 통천군 통천면 서리 13번지에서 태어났다. 통천은 함경남도 안변군의 남쪽, 강원도 고성군 북쪽에 위치한 땅이다. 그의 아버지 김선득(金瑄得)은 평안북도 신의주(新義州)에서 판사로 일하다 사직하고, 전라북도 군산(群山)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1925년 8월 7일 김수경의 가족은 아버지를 따라 군산으로 이주했다.

1930년 김수경은 군산제일보통학교(지금의 군산중앙초등학교)에 이어, 1934년 군산중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군산중학교는 일본 학생을 위한 학교였고, 전라북도에서 유일한 중학교였다. 김수경이 다닐 무렵, 군산중학교 전체 학생 중 조선인은 10% 내외였다.

경성제대를 거쳐 도쿄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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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산중학교 시절 1933년 3월 4일 촬영한 군산중학교 송별 기념사진이다. 당시 군산중학교는 전북에서 하나뿐인 중학교였다. 제일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수경이다. 군산중학교 졸업 후 김수경은 경성제국대학에 진학했다.
ⓒ 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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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제 중학교 과정을 4년 만에 졸업한 김수경은, 1934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예과를 거쳐 1937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한 그는, 언어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경성제대 시절 김수경에게 언어학을 가르친 스승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英夫)다.


당시 고뱌야시 히데오는, 저명한 언어학자로 주목받고 있었다. 훗날 고바야시는 경성제대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로 김수경을 꼽았다. 고바야시는 김수경과 인연을 <敎え子>(오시에고, 제자)라는 수필로 쓰기도 했다.

1940년 3월 31일 경성제대를 졸업한 김수경은, 그해 4월 30일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대학원 언어학 강좌에 진학했다. 도쿄제대에서 김수경은 비교언어학 관점에서 조선어를 연구했다. 지도교수는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였다. 오구라 신페이는 1926년 문을 연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의 초대 관장을 지낸 사람이다.

일본 유학 중이었던 김수경은 윤동주와 송몽규 사례처럼, 창씨개명을 피할 수 없었던 걸로 보인다. 1943년 3월 1일 김수경은 도쿄제대 문학부에 야마카와 데스(山川哲)라는 이름을 새롭게 기재했다. 김수경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군산의 '산'(山)과 통천의 '천'(川)을 따서 성으로 삼고, 철학을 전공했다는 의미로 이름을 '철'(哲)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김수경은 군산이 배출한 가장 뛰어난 '석학'이자 '도서관인'일 것이다.

1943년 3월 17일 김수경은 이화여전 문과를 졸업한 이남재(李南載)와 경성 부민관에서 결혼했다. 같은 해 여름 경성으로 돌아온 김수경은, 혜화정 74번지에 신혼집을 마련했다. 1944년 그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어학 연구실 촉탁이 되었다.

해방이 되자 김수경은 경성대학 자치위원회 법문학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해 12월에는 경성경제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1922년 경성고등상업학교로 출발한 경성경제전문학교는, 국립 서울대학교가 출범하면서 서울대 상과대학으로 편입된다. 이즈음 그는 진단학회 재건에도 관여했다.

김석형, 박시형과 함께한 '북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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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 시절 뒷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김수경이다. 김수경은 국립도서관 초대 관장 이재욱과 몇 가지 접점을 가지고 있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선후배 관계이고, 이재욱 관장과 절친한 이희승과 도쿄제대에서 함께 공부했다. 해방 후 김수경은 진단학회 재건에 관여했다. 이재욱은 진단학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한 바 있다.
ⓒ 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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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5월 6일 김수경은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학구적으로 보이는 김수경은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을까? 경성제대 법문학부 시절 김수경은, 도서관에서 러시아 신문을 탐독했다. "(부속)도서관에 비치된 소련 신문 <이스베스티야>(Izvestiya)와 <프라우다>(Pravda) 지는 김수경(金壽卿 철학과 12기생)의 독차지나 마찬가지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와 절친했던 경성제대 동문 김석형(金錫亨), 박시형(朴時亨), 신구현(申龜鉉)이 모두 월북한 점을 고려할 때, 학창 시절부터 김수경은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945년 일본 패전 이전에 '김수경은 이미 공산당원이었다'라는 소문이 있었다.

1946년 5월 10일 김수경은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의 <조선서지>(朝鮮書誌) 서론 부분을 우리말로 번역해서 <조선문화사서설>(朝鮮文化史序說)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이 책의 번역 작업을 김수경에게 권한 사람 중 하나가, 전 카프(KAPF) 서기장 임화(林和)다.

김수경이 1946년 북으로 향하면서, 우리는 그의 저작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조선문화사서설> 외에 <세 나라 시기 언어 력사에 관한 남조선 학계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 고찰>(평양출판사 1989년)이 <고구려.백제.신라 언어 연구>(한국문화사)라는 제목으로 영인 출간되었을 뿐이다.

1946년 8월 23일 미군정은 경성대학을 비롯한 10여 개 관립학교를 하나로 합쳐, 국립 서울대학교를 출범하는 안을 발표했다. 미군정이 서울대 설립을 추진하자, 1946년 9월부터 '국립 서울대학교 안 반대 투쟁'이 일어났다. 이즈음인 1946년 8월 17일, 김수경은 등산모와 반바지 차림으로 삼팔선을 넘었다. 훗날 북한을 대표하는 역사학자가 되는 김석형, 박시형과 함께 떠난 '북행길'이었다.

1946년 5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조선종합대학 창설준비위원회를 만들고, 대학 설립에 박차를 가했다. 해방 직후 경성대학(옛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주요 고등 교육기관은 서울에 자리했다. 이 때문에 북조선종합대학(지금의 김일성종합대학)은 교원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북조선종합대학 창설준비위원회는 남조선 대학교수를 대상으로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교수 인력 확보에 대대적으로 나섰다.

교수 위촉장을 받고 평양으로 간 김수경은, 8월 20일부터 김일성종합대학(김대) 문학부 교원이 되었다. 1946년 김수경과 함께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발령받은 사람은 도상록, 김지정, 박극채, 전평수, 이재곤, 김한주, 황영식, 유연락, 우형주, 곽대홍, 계응상, 한필하, 홍성해, 최용달, 조영식, 강대창, 도유호, 김종희, 최응석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제국대학 출신으로, 서울대 전신인 경성대학 교수였다.

14개 언어를 익힌 '언어의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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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도쿄제국대학 도서관 앞에서 이희승과 함께 도쿄제국대학 유학 시절 김수경은 정해진, 이희승, 김계숙과 교류했다. 이희승의 회고에 따르면, 조선인 유학생은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도쿄제대에서 김수경과 함께 공부한 김계숙(金桂淑)은, 훗날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1962~1968년)을 지낸다. 사진 왼쪽이 김수경이다.
ⓒ 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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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1일 개교한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총장은 김두봉이다. 1949년 9월 시점에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에는 조선어학과, 조선문학과, 신문학과 3개 학과가 있었다. 김수경은 조선어학과 창립 멤버로 '강좌장' 자리에 올랐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강좌장'은 부장급으로 월 급여가 2500원이었다. 북조선 임시인민위원장이던 김일성의 급여가 4천 원이던 시절이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이 김수경 같은 뛰어난 인재를 교수로 모시기 위해, 얼마나 파격적인 대우를 했는지 알 수 있다.

1949년 11월 김수경은 북한에서 처음으로 '부교수' 자리에 올랐다. 당시 그의 나이 서른하나였다. 북한 학계에서 그가 얼마나 촉망받았는지 알 수 있다. 1947년 김수경이 발표한 <용비어천가 삽입자음고>(龍飛御天歌 揷入子音攷)는 '지금도 이 논문을 뛰어넘는 연구가 없다'라는 평가가 남한 국어학계에서 나오고 있다.

북한은 '노동'(勞動)을 '로동'으로 표기한다. 두음법칙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음법칙 폐기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김수경이다. 1947년 6월 그가 <로동신문>에 기고한 논문은, 두음법칙 폐지에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해방 이후 북한은 '세로쓰기'를 '가로쓰기'로, 한자를 배제하고 한글을 전용으로 쓰는 문자개혁 과정을 거쳤다. 김두봉과 함께 김수경은 북한의 문자개혁을 이끌었다. 조선어문연구회를 이끌면서, 1949년 발간한 <조선어 문법> 편찬을 주도한 사람도 김수경이다.

김수경은 언어학자답게, 여러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한 걸로 알려져 있다. 1945년 해방 무렵까지 김수경이 익힌 언어는 14개(그리스어, 라틴어, 산스크리트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조선어, 일본어, 중국어, 몽골어)에 이른다. 이 중 7개 언어는 '직독직해직강'(直讀直解直講)이 가능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언어의 천재'였다.

경성제대 시절 김수경의 스승이었던 고바야시 히데오도 "그의 끝을 모르는 어학 실력에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라는 회고를 남긴 바 있다. 언어에 대한 자질도 뛰어났지만, 김수경은 누구보다 언어 습득에 노력했다. 신혼 시절 아내 이남재가 이발을 해줄 때도 김수경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남북으로 나뉜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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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로 신혼여행을 떠난 김수경 이남재 부부 김수경과 이남재는 1942년 친구 결혼식에서 들러리로 만났다. 이남재는 이화여대 도서관장으로 30년 재직한 이봉순과 이화여전 문과 동기동창이다. 1943년 결혼한 김수경과 이남재는,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생활은 소박하게 생각은 고상하게”(Plain Living and High Thinking)라는 문구를 생활신조로 삼았다고 한다.
ⓒ 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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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 미군이 노획해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보관 중인 <김일성대학 교원 서류철>에는, 김수경의 자필 이력서와 그에 대한 조사서(평정서)가 담겨 있다. 조사서는 김수경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어학 방면에 가장 우수한 자질이 있고, 선진 각국어에 능통. 언어학 분야에 독보적 존재​."

마르(Nikolai Yakovlevich Marr)와 스탈린(Joseph Stalin)의 논문을 비롯한 소련 언어학의 최신 동향을 북한에 적극적으로 소개한 것도 김수경이다. 1954년에 그는 초급중학교용 <조선어 문법> 교과서를 썼다. 이 교과서는 1954년 11월에 1-2학년용만 24만 5천 부를 발행했다. 그가 쓴 이 책은 북한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조선인 사회에서 널리 읽혔다.

1955년 옌벤교육출판사(延邊敎育出版社)는 김수경의 <조선어 문법> 두 권을 합본해서 출간했다. 김수경의 책은 옌벤에서 만 권 단위로 발행했고, 옌벤 조선족의 교과서로 쓰였다. 일본 도쿄에 있는 조총련계 출판사 학우서방(學友書房) 역시 김수경의 <조선어 문법>을 영인해서 출판했다.

1961년과 1962년에 3권으로 출간한 <현대 조선어>는 북한 대학에서 교과서로 쓰였고, 북한 국어학의 기초가 되었다. 북한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까지, 모국어로 조선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김수경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언어학자는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4년 그가 쓴 <조선어 문체론>은 북한 최초로 '문체론'을 체계화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은 인민군에 입대했다. 교수와 직원도 전쟁에 동원되기 시작했다. 김수경도 인민군 진격과 함께, 남한 점령지에 선무공작대로 파견됐다. 전남 광주를 거쳐 화순·진도에서 활동하던 그는, 유엔군의 반격이 있자 퇴각했다.

이 과정에서 평양에 있던 김수경의 가족은 그를 찾아 월남했다. 인민군과 후퇴하던 김수경은 가족을 만나지 못한 채 북으로 돌아갔다. '이산가족'이 된 김수경 가족의 '긴 이별'은 이렇게 시작됐다. 전쟁 과정에서 김수경은 가족뿐 아니라 아버지도 잃었다. 그의 아버지 김선득은 1950년 9월 25일 인민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북한 언어 분야에 그가 남긴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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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무렵 김수경 그는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도쿄제국대학 대학원에서 유학했다. 도쿄 유학 시절인 1942년 촬영한 사진이다. 원광대 최경봉 교수는 14개 언어를 구사한 천재 언어학자 김수경을 국어학 분야 "최초의 구조주의자"로 평가했다.
ⓒ 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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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이 설립되자, 김수경은 연구사를 겸임했다. 북한 최고 두뇌를 모았다는 과학원 초대 원장은 홍명희가, 2대 원장은 백남운이 맡았다. 과학원은 사회과학 분야에 '조선어 및 조선문학연구소'를 설치했고, 김수경은 연구실장을 맡았다.

한국전쟁 기간 중에 평안도를 떠돌던 김일성종합대학은 1953년 9월 평양으로 돌아왔다. 김수경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다시 교편을 잡으며 연구에 매진했다. 한국전쟁 이후 김수경은 ​북한의 철자법 제정과 문자개혁을 주도하고, 이 과정에서 '표음주의'가 아닌 '형태주의' 원칙을 강조했다.

1955년 김수경은 북한의 문자개혁을 조사하러 방북한 중국 문화대표단과 교류했다. 1956년 그는 중국과학원 초청을 받아, 홀로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북한뿐 아니라 중국 언어학계에까지 떨친 김수경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 김수경은, 경성제국대학 시절 스승 고바야시 히데오와 다시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고바야시는, 한국의 제자 이숭녕(李崇寧)에게 김수경의 소식을 전했다.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에 살던 김수경 가족은, 이숭녕을 통해 아버지와 남편의 생존 소식을 확인했다.

남북 대치 상황에서 '월북'한 아버지의 존재는 가족에게 부담이었다. 정보기관에서 나온 사람이 김수경의 생사와 행방을 계속 캐묻자, 가족은 결국 그를 '사망'으로 처리했다. 김수경의 생존 소식이 가족에게 전해진 건, 그 이후인 1959년 무렵이다. 1970년대 김수경의 가족은 캐나다로 이주했다. 가족의 캐나다 이민 결정에는, 북한에 있는 김수경의 존재가 영향을 미쳤다.

- 북으로 간 천재 언어학자 김수경, 왜 이곳을 택했나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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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간 천재 언어학자 김수경, 왜 이곳을 택했나 - 오마이뉴스

북으로 간 천재 언어학자 김수경, 왜 이곳을 택했나[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김일성대학 초대 도서관장 김수경 ②
21.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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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후반까지 북한 언어 분야에서 맹활약한 김수경에게 시련이 닥쳤다. 1956년 '8월 종파 사건'과 1958년 '반종파 투쟁'을 거치면서, '연안파'의 거두 김두봉이 실각했다.

김수경 역시 김두봉 세력의 일원으로 비판의 중심에 섰다. 김두봉처럼 정치적 숙청을 당하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이전처럼 학계 최일선에서 활약할 수 없었다. 김수경이 숙청을 면한 건, 많은 제자의 탄원 덕분이었다고 한다. 천재였던 그는 까탈스럽기보다 소탈했다고 한다. 제자들은 겸손하고 친절한 그를 "수경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따르곤 했다.


1960년대 중반 학계에서 밀려나면서, 김수경이 새롭게 자리 잡은 곳이 바로 '도서관'이다. 이전부터 그는 도서관과 범상치 않은 인연을 이어왔다. 앞서 김수경이 경성제국대학 시절, 도서관에서 러시아 신문을 끼고 살았다는 기록을 언급했다. 김수경은 신문뿐 아니라 도서관 장서도 많이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경성제대 부속도서관은, 식민지 조선에서 장서가 가장 많은 도서관이었다.

학구적인 그는 도쿄제국대학 유학 시절에도 도서관을 많이 이용했을 것이다. 김수경과 국어학자 이희승(李熙昇)이 도쿄제국대학 도서관 앞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에서 촉탁으로 일했다. 도서관은 김수경이라는 천재 언어학자가 탄생한 '요람'이었다.

김일성대학 초대 도서관장


▲ 김수경 자필 이력서 1946년 12월 28일 김수경이 김일성대학에 제출한 자필 이력서다. 두 페이지로 작성한 김수경의 이력서 중 뒷면이다. 김수경은 "김일성대학 문학부 교원(교수)과 부속도서관장을 겸임"한다는 내용을 최근 경력으로 써넣었다.
ⓒ NARA 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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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 조선어학과 교원 시절 그는, 김일성대학 '초대 도서관장'을 겸했다. 김수경이 김일성대에 제출한 자필 이력서에는, 그가 1946년 10월 1일부터 "북조선 김일성대학 부속도서관장"을 겸임했다고 적혀 있다. 1946년 10월 1일 김일성대학이 개교할 때, 김수경이 초대 도서관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스물여덟 나이에 북한 최고 대학의 도서관장을 맡을 정도로, 그는 학식과 능력을 겸비했다. 김수경이 28세에 대학 도서관장이 된 것은, 남북을 통틀어 '최연소'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 남북한 최고 대학으로 한정하면, 전무후무한 기록일 것이다.

1947년 3월 시점 <김일성대학 직원 봉급표>를 보면, '도서관장'과 '부관장'이 있다. '도서관장'을 '도서부장'으로 칭하기도 했다. '부관장', '부부장'이라는 직급이 도서관과 편집부(출판부)에 있다. 북한 당국이 그만큼 도서관을 중시했을 수 있고, 부부장을 통해 당이 도서관과 출판부 통제를 강화했을 수도 있다.

도서관장 급여(2,500원)가 교무부장, 교양부장, 학부장, 강좌장과 같다. 김일성대학에서 도서관장보다 높은 급여를 받은 사람은 총장과 부총장, 교육주임, 경리주임, 서기장 5명뿐이었다. 급여로 짐작건대, 도서관장의 위상이 낮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김일성종합대학 10년사>는 개교 초기 도서관의 장서 상황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대학 도서관은 대학의 무기고이다. (중략) 한 권의 책도 없는 상태로부터 출발하면서 도서관 사업은 무엇보다도 먼저 도서들을 광범히 수집하는 사업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하였다."

김수경은 '책 한 권 없는 도서관'을 맡아 단기간에 장서를 확보했다. 김일성대학 도서관은 대학 경비 중 도서 구입비 비중을 크게 늘려, 대량으로 책을 구입했다. 초대 총장 김두봉을 비롯한 개인과 소련군 사령부, 소련 레닌그라드 아카데미야 도서관과 중국으로부터 책을 기증받았다.


김일성종합대학 vs 서울대학교 도서관


▲ 김일성대학 직원 봉급표 한국전쟁 때 미군이 노획한 김일성대학 서류다. 1947년 3월 26일 작성한 문서다. 당시 김일성대학 총장은 김두봉, 부총장은 박일, 교육국장은 한설야였다. 도서관장(2,500원)과 부관장(1,800원)의 직급과 급여가 눈에 띈다.
ⓒ NARA 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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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은 1948년 9만 8천여 권, 1950년에는 13만 5천여 권을 확보해 장서를 크게 늘렸다. 대학 본관 지하층에 있던 도서관은 600만 원의 공사비를 확보해, 1950년 3월부터 건물 신축 공사를 시작했다. 도서관 건물은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2층 규모 콘크리트 건물로 계획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김일성종합대학은 도서관 공사를 중단하고, 10만여 권에 달하는 도서관 장서를 평양시 북동쪽에 있는 강동군 원탄면 원흥리로 옮겼다. 전쟁이 끝나자 김일성종합대학은 도서관 공사를 재개해서, 1954년 9월 도서관 건물을 준공했다.

1956년 9월 시점에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은 29만 권의 장서를 갖췄다. 비슷한 시기인 1957년 서울대 중앙도서관의 장서는 59만 481권이었다. 이중 상당수는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 시절 장서였다.

1948년 시점에 서울대 중앙도서관 장서는, 규장각 귀중본과 고서를 제외하고 45만 8천378권이었다. 서울대 도서관이 1948년부터 1957년까지 장서를 13만 권 정도 늘릴 때, 김일성종합대학은 장서를 29만 권 늘렸다. 이 시기만 비교하면,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이 서울대보다 장서량을 2배 이상 늘렸음을 알 수 있다.

앞서 한국전쟁 중인 1952년 북한이 최고의 두뇌를 모아 '과학원'을 설립하고, 김수경이 연구실장으로 일했음을 언급한 바 있다. 1952년 12월 1일 모란봉 지하극장에서 출범한 북한의 '과학원'은, 소련 과학원(The Academy of Sciences of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을 모델로 설립했다.

북한은 과학원에도 부속도서관을 설치했다. 학술 연구를 위한 과학 전문 도서관으로 출범한 과학원 도서관은, 짧은 기간에 장서량을 빠르게 늘렸다. 1953년 장서량이 1만 9천 권에 불과했던 과학원 도서관은, 1957년 25만 권이 넘는 장서를 확보했다. 4년 만에 장서량이 13배 이상 늘었다.

당시 과학원 도서관은 평양 국립중앙도서관(지금의 인민대학습당)과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과 함께 '북한의 3대 도서관'으로 꼽힌 곳이다. 설립 초기에 '과학원 도서관'은 모란봉 중앙역사박물관 청사에 있었다.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도서관장이자 여러 언어에 뛰어난 김수경은, 과학원 도서관 장서와 자료 수집에도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랬다면 김수경은 훗날 그가 몸담은 중앙도서관을 포함해, 북한의 3대 도서관에 모두 관여한 셈이다.

북한의 국가도서관 사서


▲ 1986년 무렵 김수경 1968년 김수경은 북한의 국가도서관인 중앙도서관(지금의 인민대학습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사진을 촬영할 무렵 김수경은, 인민대학습당 운영방법 연구실장으로 일했다. 그가 일한 인민대학습당 안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추정된다.
ⓒ 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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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0월 김수경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중앙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중앙도서관에서 그는 '사서'(司書)로 일했다. 남한은 사서 자격을 1급 정사서, 2급 정사서, 준사서로 구분하지만, 북한은 1급부터 6급까지 여섯 등급으로 사서 자격을 구분한다. 북한에서는 3개국 이상 언어를 습득해서, 박사와 교수급 전문가에게 참고 봉사할 실력을 갖춰야 '1급 사서'로 일할 수 있다.

중앙도서관은 북한의 국가도서관으로, 남한으로 치면 국립중앙도서관이다. 중앙도서관은 1982년 4월 1일 '인민대학습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한반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인 인민대학습당에서 김수경은, 1998년까지 운영방법 연구실장으로 일했다.

북한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언어학자 김수경은, 남북을 통틀어 도서관에 가장 오래 몸담은 '석학'일 것이다. 중앙도서관으로 옮긴 1968년부터 헤아려도 30년이나 북한의 국가도서관에서 일했다. 그가 김일성종합대학을 떠나 도서관에 머문 시간은 그에게 '유배'된 기간이었을까? 또 다른 '성장'의 시간이었을까? 탁월한 언어학자였던 그가 도서관에 남긴 발자취는 그래서 더 궁금증을 자아낸다.

남과 북이 갈라진 후 우리는 북녘의 도서관이 어떻게 운영됐는지 소상히 알지 못한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납북된 이재욱, 박봉석, 김진섭, 손진태 같은 도서관 전문가의 소식도 끊겼다. 전쟁과 분단이 우리 도서관에 남긴 상처는 깊고 컸다. 건물은 파괴되고, 장서는 사라지고, 조직(조선도서관협회)은 와해되고, 무엇보다 수많은 인재를 잃었다.

분단과 전쟁은 땅과 체제, 사람을 나누고, 도서관도 둘로 갈랐다. 북녘땅에도 도서관을 일군 수많은 '도서관인'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도서관에서 인민에게 어떻게 봉사하고 도서관을 꾸려왔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김수경뿐 아니라 북녘 도서관에서 일한 수많은 '김수경들'의 이야기가 궁금한 이유다.

김기석 교수의 표현처럼, 남과 북은 하나에서 갈라져 나온 '일란성 쌍생아'다. 다르게 살아온 시간이 있지만, 함께 한 시간이 더 길었다. 서로 '다르게' 살아왔지만, 각자 '틀리게' 살아오진 않았을 것이다.

도서관의 분단


▲ 이타가키 류타 교수의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 1918~2000> 이타가키 류타 교수가 2021년 7월 일본 인문서원 출판사를 통해 발간한 책이다. 이타가키 교수는 방대한 자료 수집과 연구를 통해, 남한에서 잊힌 언어학자 김수경을 복원했다. 이 책은 출판사 푸른역사를 통해 국내 출간이 준비 중이다.
ⓒ 인문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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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상당 부분은,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이타가키 류타(板垣竜太) 교수가 쓴 논문 <김수경의 조선어 연구와 일본 – 식민지, 해방, 월북>(金壽卿の朝鮮語研究と日本 - 植民地, 解放, 越北)에 기대어 썼다. 갈라진 '또 다른 우리'의 이야기를 제3국 학자 연구를 통해 알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김수경을 '재평가'하는 행사도 남한과 북한이 아닌, 일본에서 열렸다. 2013년 11월 9일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의 재조명'이라는 국제 심포지엄이 일본 도시샤대학에서 열렸다.

'비정상의 정상화'(abnormal normalization)라고 해야 할까. '비정상'이 '정상'이 되다 보니, 이젠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젠 하나에서 갈라져 둘로 나뉜 남과 북이 다름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비정상을 정상으로 되돌릴 시간이 아닐까.

김수경은 중앙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긴 후 논문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연구를 재개했다. 1990년대에는 교수 직위를 다시 얻고,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북한에서 김수경의 존재감은 적지 않다.

1996년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장편 실화소설 <삶의 메부리>가 출간됐다. 2004년에는 잡지 <문화어학습>에 <이름난 언어학자 김수경>이라는 글이 실렸다. <긍지>라는 제목의 TV 프로그램이 방영됐고, 김정일은 그를 '반일애국렬사'로 칭송했다. 김수경은 2000년 평양에서 세상을 떠났다. 김수경과 동갑인 한글학회 허웅 이사장은 그에 대해 이런 평을 남겼다.

"아마 월북하지 않고 남한에 남아 연구에만 매진했더라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위대한 언어학자가 됐을 것이다."

가족마저 갈라놓은 이념과 체제란


▲ 김수경과 인민대학습당 김수경 뒤편, 대동강 건너 보이는 건물이 인민대학습당이다. 주체사상탑 근처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보인다. 김수경은 북한의 국가도서관에서 30년이나 일했다. 천재이자 석학이었던 그는 북한 도서관에 어떤 발자취를 남겼을까.
ⓒ 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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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김수경이 북한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접한 그의 가족은 1970년대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1985년 그의 가족은 옌벤대학 고영일 교수를 통해 김수경에게 편지를 띄웠다. 가족과 편지를 주고받던 김수경은, 1988년 8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둘째 딸 김혜영과 상봉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헤어진 후 38년 만의 만남이었다.

그사이 서른두 살의 아버지는 일흔의 노인으로 변했고, 둘째 딸은 훌쩍 자라 아버지처럼 언어학도가 되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91년 김수경의 첫째 딸 김혜자는, 아버지를 만나지 못한 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94년 7월 둘째 딸 김혜영의 두 아이가 평양으로 가서, 외할아버지 김수경을 만났다. 한국 국적이 아닌 캐나다 국적자였기에 가능한 만남이었다.

1996년 7월 장남 김태정이 평양을 방문해서 그를 만났고, 1998년 7월에는 평양을 찾은 아내 이남재와 48년 만에 만났다. 아내를 만나고 일 년여 후인 2000년 3월 1일, 김수경은 세상을 떠났다. 김수경과 그의 가족은 소식을 전하고 만나기도 했지만, 끝내 '함께' 살지는 못했다.

김수경의 가족은 조국을 떠난 후에야 서로 만날 수 있었다. 조국을 등지고 나서야 아버지와 남편을 만날 수 있는 '비극'은 이제 끝나야 한다. 김수경 가족뿐 아니라 여러 도서관인이 '이산가족'으로 생사도 모른 채 살아야 했다. 분단과 전쟁, 다른 이념과 체제 때문이었다. 가족마저 갈라놓는, 가족보다 앞서는 이념과 체제란 대체 무엇일까?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利害)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釋迦)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孔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主義)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한 조선은 있어도, 조선을 위한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哭)하려 한다."

1925년 단재 신채호가 남긴 통렬한 꾸짖음이다.
이념과 체제도 결국 '사람'을 위한 것 아닐까? 어떤 이념과 체제도 사람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념'과 '주의'의 시대를 언제쯤이나 끝낼 수 있을까.

* 김수경 선생에 관해 선구적 연구와 저작을 출간하고, 유족과 연결해주신 도시샤대학 이타가키 류타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김수경 선생 정보를 알려주시고, 사진 사용을 허락해주신 유족 김혜영(金惠英)·김태성(金泰成) 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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