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14

Chee-Kwan Kim [북으로 건너간 언어학자] 김수경은 과연 왜 월북을 했을까

Facebook

[북으로 건너간 언어학자]
1.
해방공간 북에서 남으로 월남한 사람은 약 95만, 역으로 남에서 북으로 월북한 인구는 약 30만 남짓 되었다고 한다.
월북한 사람들 중 김수경이라는 젊은 언어학자가 있었다. 해방 전까지 14개 언어를 익히고, 이 중 7개는 유창하게, 나머지 7개는 ‘직독직해직강'(直讀直解直講)’이 가능한 수준이었다고 하는 김수경은, 월북 후 새로 설립된 평양 김일성대학에 교수로 취임하고, 이후 북조선 조선어학의 토대를 마련한다.
김수경의 삶을 다룬 책 [北に渡った言語学者 (북으로 건너간 언어학자) – 板垣竜太 (이타가키 류타)]을 읽었다. 언어에 남다른 관심을 보인 어린 시절부터, 월북, 한국전쟁으로 인해 이산가족이 되고, 30년이 지나 처자식과 상봉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서술한 책이다.
책을 읽으며 해소되지 않았던 궁금증 하나는, 김수경은 과연 왜 월북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당시 많은 인텔리 젊은이들이 그랬듯이 김수경 주위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많았던 반면 그 자신 사상적 경도의 흔적은 없고, 그의 삶의 터전은 남쪽에 있었다. 김수경은 그러나 46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고, 같은 해 8월 반바지 등산모 차림으로 홀연히 북으로 넘어가 버린다.
2.
김수경의 삶의 기록을 읽으며 나는 자연스럽게 나의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할아버지는 김수경의 거울 이미지로, 함경북도 출신으로 만주에서 대학교를 나오고 해방공간 남으로 내려왔다. 어려서 왜 삶의 터전인 북을 등지고 남으로 오셨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김일성이가 싫어서” 그랬다는 피상적인 대답만 들은 기억이 있다.
어차피 해방공간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제한적이었다. 긴 안목으로 결정하고, 행동에 옮긴 경우보다는, 즉흥적으로 결정하고, 행동에 옮긴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끊임없는 선택을 강요당했고, 머뭇거림의 순간들은 길 수 없었다. 크고 작은 결정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 그들은 알 길이 없었다.
3.
홍상수의 영화 “해변의 여인”에는 옛 여자친구와 몇 년 만에 해후한 남자가 그녀가 자신과 헤어진 후 다른 남자들과 성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알고 잠든 그녀를 향해 “왜 그 자식들과 잤어?”라고 술에 취해 주절거리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한국남자의 비루함을 묘사한 이 장면을 나는 그러나 한국인의 역사인식을 풍자한 것으로 바꾸어 읽는다. 본인들이 살아보지 않은 - 철저히 단절된 - 공간에 갇혀 있었던 타인의 삶을 단죄, 청산, 파묘하겠다는 의지는 그 자체 넌센스이자 망자에 대한 비겁한 폭력일 뿐이다.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타인에 대한 연민에 눈뜨고, 종국에는 어떤 종류의 이해 혹은 슬픔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일 것이다.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결국 나든 그 누구든 주어진 시대라는 테두리 안에서 발버둥치다 갈 뿐이다.
May be an image of 1 person and text
박정미, Eun Ha Chang and 93 others
23 comments
4 shares
Like
Comment
Share

23 comments

Most relevant

  • Jaewon Chey
    망자에 대한 비겁한 폭력일 뿐이라는 말씀에 정말 깊이 공감합니다.
    저는 우리 조상들 선조들, 개화가 뭔지 근대가 뭔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방황하고 가슴 졸였을 선조들을 포용하고 싶습니다. 현재의 우리들을 위해서
    10
  • 동원박
    역사는 단죄와 청산이 아닌 극복의 대상이지요. 극복도 좀 웃기긴 하지만^^
    3
  • Hoan Sang Chung
    옳으신 말씀, 제한된 선택지속에서의 삶, 또한 엄격한 조선의 신분제, 수탈, 사회적 억압등이...공산주의가 뿌리내린 토대였다고 봅니다
  • Nah-Mee Shin
    말이없는 죽은자들에 대한 횡포일뿐이죠. 비겁한 폭력이구요.
  • 김용우 
    Follow
    백석시인처럼 집안사람들이 북에 터전이 있으니 그들을 위해 남은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당시는 지금과 비교할수 없을정도로 가족적 문화가 강했으니까요
    4
  • Michie Yoshida
    감명을 받았습니다. 좋은 글에...
    본문 곳곳에 ...
    2
  • 홍승기
    강렬한 서평 ...
    3
  • Jaewook Jeong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미국에서 만난 한 의사 분은 서울공대 다니다가 월북한 형님을 찾아서 만났다고 했어요. 김책공과대학 학장으로 있었다던데 그렇게 가족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미국행 결정의 한 원인인 분들이 있었지요
    2
    • Doobo Shim
      정재욱 저도 그런 비슷한 얘기 들은 적 있습니다. 아이러니하면서 흥미로운 디아스포라 사례지요.
    • Jaewook Jeong
      Doobo Shim 제가 온 90년대 초에 가족찾기 고향방문이 열려서 사연들이 많았지요
    • Doobo Shim
      정재욱 저도 그 즈음에 미국 살던 일가형님께 들었으니 비슷한 시기네요.
    • Chee-Kwan Kim
      정재욱 김수경선생 따님은 현재 토론토에 살고 계신데, 마찬가지로 해외에 나가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이민결정에 큰 부분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 Jaewook Jeong
      Chee-Kwan Kim 당시 캐나다가 가족찾기 고향방문의 주된 창구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태권도의 최홍의 장군. 문제는 그게 이권처럼 되고 친북활동의 댓가처럼 이용된 것도 사실이지요
  • Do-Eon Kim
    이타가키 류타라는 저자도 참 대단한 사람이고 이런 평전을 낸 일본의 출판도 참 경이롭습니다.
    3
  • 박정미
    김수경의 해명되지 않은 월북동기를 생각해보다 닥터지바고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라라를 너무나 사랑했던 남편 파벨이 결혼식 당일날 라라의 혼전고백을 통해 고통스러운 탈각의 과정을 거치고 끝내 가정생활을 견디지 못해 입대해버리지요.
    단지 멀리 떠나기위해, 라라를 떠나기 위해 파벨은 입대해서 스뜨렐리니꼬프가 됩니다.
    김수경의 월북동기도 그런 내밀한 마음의 갈등이 아니었을까요. 이데올로기나 사상은 뜻밖에도 개인의 깊은 마음 속 갈등에 뿌리를 두고 자라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 이주원
    순간의 선택 그 자신의 선택이
    당시에는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겠지요.
    북이 고향인 저희 부모님들은 조부모님들, 자식들과 헤어질수 없어 북에 계시다 1.4후퇴때 잠시 이남으로 내려왔으나 다시 북으로 갈수 없게되버리자 가족들과 헤어짐을 늘 후회하고 사셨지요.
    2
  • 이서윤
    남한 사회를 등지고 월북한 비극적인 지식인 가족인 저로서 남다른 소회가 드는 글입니다.
    감사히 잘 읽었어요.
  • Youngbae B Kim
    고맙습니다.
    • Chee-Kwan Kim
      아이고 형, 무슨 말씀을요. 지나고 나니 할아버지랑 더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같단 생각을 많이 해요. 할아버지 뿐 아니라 형제분들 이야기도 궁금하고…큰 할아버지께서는 만주어와 러시아어도 하셨다고 들었는데, 그 분들이 어쩌면 저희 세대보다 더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보셨을지도…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