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29

Jeong-Woo Lee 오늘 아침은 윤평중 교수님의 글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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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ong-Woo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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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은 윤평중 교수님의 글로 시작한다.

그의 <푸코와 하버마스를 넘어서>를 감동적으로 읽은 이래 교수님의 글에서 늘 많은 것을 배운다. 이번 글에서 메를로 퐁티와 사르트르가 625전쟁을 일으킨 소련 중국 북한을 옹호했고 그것이 과연 진보인가 묻고 있다. 나는 한때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했었고 625전쟁을 미제국주의에 맞선 민족해방전쟁이라 생각했었지만 소련 붕괴 이후 사회주의 국가들 안에서 일어난 반인륜적 참상에 눈뜨고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일체의 동경과 결별했다. 사회의 진보적 가치를 탐구하는 하나의 사상적 자양분일뿐. 80년대 대한민국을 휩쓴 좌경화 열풍은 518비극에서 비롯된 기형적 현상. 대한민국의 선진화와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은 사회주의적 기획에 내재된 전체주의적 성향과 폭력성을 직시하고 개인의 인권과 가치에서 출발하는 자유주의적 비폭력적 진보노선을 발전시켜야 할것이다.
넷플릭스에서 전쟁영화를 가끔 본다. 며칠전 <디보션>이라는 미국 영화가 감동적이었다. 미해군 소속 전투기 조종사들의 한국전쟁 참여이야기. 소련, 중국, 북한의 총공세 속에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지켜내기 위해 산화한 수많은 영혼들, 특히 이름도 모르는 작은 나라의 전쟁에 참여해 목숨을 잃은 유엔군들의 희생 위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념을 절대시하지 않고 끊임없이 현실과 대면하는 실천적 태도다. 이념과 팩트가 충돌할 때 팩트에 비추어 자신의 이념의 유효성을 끈기 있게 성찰하는 태도야말로 지성의 실체다.
그게 바로 비판적 사유(思惟)의 힘일 것이다."



















Pyung-joong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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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폭력"은 과연 진보적인가?
~ '6-25전쟁에 대한 철학적 논쟁'이 보여주는 것

6-25전쟁(한국전쟁)에 대한 프랑스 철학자들의 논쟁은 매우 중요하다. 6-25 전쟁 논쟁이 이념과 현실의 관계를 근원적으로 성찰하게 하면서 '진정한 진보란 무엇인가'를 생각케 만들기 때문이다.
사르트르(1905~1980)와 함께 실존주의적 현상학으로 전후 세계를 풍미한 메를로 퐁티(1908~1961)는 ‘휴머니즘과 테러’에서 “진보적 폭력”을 화두삼아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을 호되게 비판한다. 하지만 진보적 폭력의 정당성이라는 신화는 6-25전쟁 해석에서 철저히 붕괴되고 만다. 아래 글은 그 붕괴의 과정을 추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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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모스크바 재판'과 부하린]

메를로 퐁티는 1938년 모스크바 재판에서의 부하린의 자백을 스탈린 정권의 날조로 여긴 자유주의자들의 해석을 거부한다. 동시에 메를로 퐁티는 부하린이 시종일관 공산당과 소련을 무너트리려 했다는 스탈린주의자들의 논고도 반박한다.
메를로 퐁티 논변의 핵심은 스탈린의 급속 산업화와 농촌 집산화에 반대한 부하린이 ‘결과적으로’ 소련을 위태롭게 했다는 데 있다. 스탈린의 생산력 확대 정책이 없었다면 1941년 나치의 전격 침공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므로 부하린이 “반역죄를 범했다”는 ‘객관적 판단’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부하린을 포함한 그 누구도 거대한 역사의 전개를 미리 알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맑스주의 혁명가로서 그의 책임이 면제되진 않는다는 게 메를로 퐁티의 입장이다. 히틀러는 1941년 6월 독소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을 전격 침공한다. 허를 찔린 소련은 국가소멸의 위기 직전까지 치닫는다. ‘대(大)조국전쟁’의 시작이었다.
 
스탈린에 의한 강제적 산업화와 농촌 집산화가 소련을 백척간두 위기에서 건져 낸 결정적 동력이었고, 부하린은 이 정책에 반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반역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부하린 스스로 공개적으로 유죄를 인정한 사상적 이유와 직결된다고 메를로 퐁티는 역설한다.
결국 메를로 퐁티는 억압과 착취를 끝내기 위한 폭력은 진보적이라고 강변한다. 진보적 폭력은 폭력을 없애려는 폭력이므로 정당하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폭력은 자본주의의 억압을 끝장내고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므로 ‘결과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옳다는 주장이다.
나는 메를로 퐁티에 동의하지 않는다.
정치에서 성공적 결과가 모든 수단을 정당화한다면 정의와 인륜성이 설 자리는 없다. 나아가 결과 지상주의의 관점에서도 소련 보위와 공산혁명 수호라는 대의명분 자체가 거대한 허위의 성채였고 인륜적 비극을 양산했다는 ‘사실적 결과’를 감출 순 없다.
스탈린의 폭압적 농업 집산화 정책은 ‘유럽의 곡창’ 우크라이나의 홀로도모르(대기근)를 초래했다. 그것은 명백한 인위적 기근이었다. 5백만명의 우크라이나인이 아사하고 농촌 지역에선 식인 행위가 횡행했다. 영화 ‘미스터 존스’의 홀로도모르 묘사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우크라이나인들 일부가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나치의 우크라이나 진주(進走)를 ‘러시아로부터의 해방’으로 받아들인 배경이 여기에 있다. 현재진행형인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푸틴 러시아의 선전선동도 있지만 오늘날까지 진보지식인 집단에서 ‘우크라이나 나치’ 논쟁이 운위되는 데는 스탈린의 원죄라는 ‘결과’가 자리한다.

체제경쟁의 부작용도 있었고 생산력 낙후도 작용했지만 현실 사회주의 체제는 무엇보다도 자체 모순의 심화로 붕괴됐다. 혁명의 대의를 앞세워 수천만명의 무고한 인명을 앗아간 공산주의의 실험을 ‘결과적으로, 객관적으로’ 정당화하는 진보사상은 성립하기 어렵다.

스탈린 치하에서 2천만명 이상의 소련인, 마오쩌뚱 치하에서 5천만명 이상의 중국인이 정치적 이유로 사망(처형, 아사, 자살)한 것을 사회주의 혁명의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현실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진보좌파 지식인들의 향수(鄕愁)는 지성의 자기 배반이 아닌지 나는 오랫동안 의심해 왔다. 메를로 퐁티는 강제수용소의 존재를 인지한 후에도 소련을 사상적 이유로 옹호했다. ‘소련을 비판하는 것은 소련의 기획을 받아들임으로써만, 그리고 그 기획의 이름으로만 허용될 수 있다’고 그는 강변한다.
메를로 퐁티는 소련이나 구 동독 같은 현실사회주의 체제의 현실은 사회주의 내부 논리로써만 접근 가능하다는 ‘내재적 비판론’을 1940년대에 선취한 셈이다. 반세기도 더 지나 한반도에서 송두율 교수는 북한에 대한 내재적 접근을 선도해 한국 진보좌파의 존숭(尊崇)을 받게 된다.

[프랑스 철학자들의 6-25전쟁 해석논쟁]

하지만 진보적 폭력론을 역설한 메를로 퐁티조차도 6·25전쟁의 대량 살육을 보고선 자신의 주장을 거두어들일 수 밖에 없었다. 스탈린의 침략적 팽창주의가 초래한 인륜적 비극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메를로 퐁티는 자본주의에 반대했지만 6·25전쟁 이후엔 더 이상 스탈린이나 소련을 변호하지 않았다.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교황’으로 불렸으며 메를로 퐁티보다 훨씬 유명했던 사르트르는 정반대의 길을 갔다. 사르트르는 미국과 남한이 북한을 선제공격했다고 주장하면서 6·25전쟁을 미 제국주의자들에 의한 북침전쟁이라고 선전한 소련 공산당 편에 섰다.

북한의 전면 남침이라는 팩트를 도저히 부인할 수 없게 되자 사르트르는 다시 입장을 바꾼다. 그는 미국과 남한이 북한의 선제공격을 유도해 북한을 “함정에 빠트렸다”는 수정주의적 해석으로 6·25전쟁에 대한 좌파 해석투쟁의 선봉에 선다. 사르트르는 “남한의 봉건지주들과 미국의 제국주의자들이 전쟁의 범법자라는 사실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고 확언했다.
전후 실존주의 사상으로 세계를 휩쓸었고 노벨문학상(수상은 거부) 지명까지 받았으며 오늘날까지 많은 한국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문호(文豪) 사르트르의 참혹한 두 얼굴이 아닐 수 없다.
사르트르는 ‘실존의 자유’를 설파한 20세기 최대의 사상가이자 문학가 가운데 한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6·25전쟁관과 소련 옹호는 인간 실존의 자유가 서있는 토대 자체를 파괴하고 만다. 사르트르의 지적 파산은 일급의 지성조차도 팩트를 압살(壓殺)한 이념 앞에서 맹목(盲目)이 된다는 교훈을 웅변한다.
6·25전쟁은 한국과 한국인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행사함과 동시에 프랑스 지식인 사회를 치명적으로 균열시켰다. 사르트르, 메를로 퐁티, 레이몽 아롱, 카뮈의 우정은 6·25전쟁으로 파탄을 맞는다. 사르트르와 파리고등사범 동창이자 동갑내기 친구였던 레이몽 아롱(1905~1983)은 전후 프랑스 지식인사회에선 보기 드문 보수적 자유주의자였는데 사르트르가 집착한 남한 북침설을 일축했다.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이 남한을 전면 남침한 게 팩트라고 본 레이몽 아롱에게 6·25전쟁은 공산주의가 유럽을 넘보는 불길한 조짐에 다름 아니었다. 자신의 자유주의적 반공주의 때문에 프랑스 지식사회에서 왕따로 전락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념보다 중요한 건 팩트였고 우정보다 중요한 건 진리였기 때문이다. 좌파가 지배한 프랑스 지식계에서 완전히 고립된 아롱은 소르본느대 교수로 임용되는 과정에서도 엄청난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모든 반공주의자는 개다”고 외친 사르트르가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생애 마지막까지 자본주의 사회의 명성과 부를 향유한 것과는 정반대였다. 1980년 4월 19일 사르트르의 장례식에는 5만명의 군중이 운집해 '사상의 교황'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진보좌파에 오랫동안 ‘중독’된 프랑스에서도 21세기 들어 자유주의의 중요성이 ‘재발견’되고 있다. 사상적으로는 레이몽 아롱의 부활, 정치사회적으로는 마크롱 대통령의 혜성 같은 등장이 이런 거대한 변화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르트르가 창립을 주도한 진보지 리베라시옹(해방일보)은 2017년 7월 2일자 지면에서 “오호라! 레이몽 아롱이 옳았다!”고 선언한다. 이데올로기 논쟁에서 '사르트르가 패배했고 레이몽 아롱이 승리했다'고 프랑스 좌파들 자신이 인정한 것이다.
급변하는 세계에서 특정 사상가의 승리와 패배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사상들 사이의 인정투쟁 과정은 역동적이므로 얼마든지 흐름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념을 절대시하지 않고 끊임없이 현실과 대면하는 실천적 태도다. 이념과 팩트가 충돌할 때 팩트에 비추어 자신의 이념의 유효성을 끈기 있게 성찰하는 태도야말로 지성의 실체다.
그게 바로 비판적 사유(思惟)의 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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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평중
최근 수정 시각: 2022-06-24 


대한민국의 철학자
대한민국의 교수
인문과학 교수
1956년 출생
고려대학교 출신


1. 개요2. 상세

1. 개요[편집]
칼럼니스트. 현 한신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1]

2. 상세[편집]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남일리노이 주립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뉴저지 럿거스대학 정치학과 시니어 풀브라이트 연구교수, 미시간 주립대 철학과 객원교수, 캘리포니아 주립대 버클리캠퍼스 역사학과 방문학자를 지냈고 한신대학교 대학원장 및 학술원장을 역임했다.

『철학』, 『철학연구』, 『비평』, 『당대비평』의 편집위원을 지냈고 현재 『철학과 현실』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대표저서로는
『국가의 철학: 한반도 현대사의 철학적 성찰』(세창출판사, 2018), 
『시장의 철학』(나남, 2016), 
『급진자유주의 정치철학』(아카넷, 2009), 
『극단의 시대에 중심잡기: 지식인과 실천』(생각의 나무, 2008), 
『윤평중 사회평론집: 이성만이 우리를 구원한다』(생각의 나무, 2004), 
『논쟁과 담론』(생각의 나무, 2001), 
『담론이론의 사회철학』(문예출판사, 1998), 
『푸코와 하버마스를 넘어서』(교보문고, 개정증보판, 1997),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과 포스트마르크스주의』(서광사, 1992)등이 있고 
다수의 공저가 있다.

‘합리적 보수 지식인’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전형적 보수’ 성향으로 보인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1990년대 중반에는 한겨레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1994년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쓰기 시작해 동아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등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썼으며 
2012년부터는 조선일보에 「윤평중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2014~2021년까지 KBS 객원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 2021년 8월에 정년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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