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02

책 이야기:사회학자 조은의 노트가 있는 칼럼> 기자명 이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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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사회학자 조은의 노트가 있는 칼럼>
기자명 이재봉
주주
입력 2022.12.31

저는 주문해서 사든 선물로 받든 무슨 책이라도 손에 잡으면 앞뒤 표지부터 훑어보고 차례와 머리말 그리고 끝말을 읽어본 뒤 놓아둘 장소와 독서 순서를 정합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눠 책상 위엔 밑줄 쳐가며 읽을 책, 침대 맡엔 가볍게 볼 책, 대여섯 권씩 쌓아놓습니다. 이제 막 받은 책은 대개 맨 밑에 놓기 마련이지만 어떤 때는 맨 위에 올려놓기도 하지요.
사진 출처 : http://www.yes24.com/Product/Goods/115536467



며칠 전 선물로 받은 조은 교수의 ≪일상은 얼마나 가볍고 또 무거운가: 사회학자 조은의 노트가 있는 칼럼≫ (파이돈, 2022)은 받자마자 몇 쪽 읽고 침대 맡 맨 위에 놓았습니다. 우선 제 전공분야 전문서적이 아니라 침실로 향했고, 저명한 사회학 원로교수로만 알고 있었는데, 기록영화 감독 및 제작자 그리고 소설가라는 독특한 이력이 덧붙여져 관심과 흥미가 커진 바람에 맨 윗자리를 차지한 거죠.

조은 선생은 아직 한 번도 뵙지 못했습니다. 제 이메일 받아보며 몇 달 전 통일TV 출자금과 남이랑북이랑 교실 기부금을 보내주시고 이번 주엔 책까지 선물해주신 겁니다. 감사하는 맘으로 책을 펼쳤습니다. 대개 유명 학자들은 필자 소개에 학사-석사-박사로 이어지는 학력 몇 줄 넣기 마련인데,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하고 미국 유학했다는 화려한 학력도 생략한 채 ‘전남 영광 출생’을 맨 먼저 밝히고, 1장에 ‘50년만의 고향 방문’을 실은 게 특이하더군요. 7대조와 6대조 할아버지들부터 문집을 남기신 그야말로 빵빵한 유학자·선비 집안 출신이라는 것을 은근히 뽐내면서요.

이어지는 글을 읽어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전남 영광을 원불교 성지, 핵발전소, 굴비, 백수 해안도로, 불갑사 상사화 등으로만 알아왔지, “한국전쟁 민간인 피해가 인구 당 가장 높은” 역사적 장소라고는 전혀 들어보지도 못했거든요. 6.25가 터졌을 때 할아버지부터 큰집 장손까지 스무 살 이상 남자 여섯 가운데 둘만 살아남고, 아버지는 한줌 흙으로도 돌아오지 못한 기막히게 애통한 가족사가 끔찍하게 잔혹한 한국 현대사와 얽혀 있습니다. 스물여섯에 혼자되어 2년 전 아흔여섯에 가실 때까지 ”한반도 ‘전쟁’과 ‘평화’라는 단어만 나와도 마음 졸이며 혹여나 종전 소식이 없을까 뉴스에 채널을 맞추셨던“ 어머니 이야기는 너무 한스럽고요.

가벼운 제목의 묵직한 내용을 읽으며 비참한 가족사와 서글픈 사회현상 등 소설 같은 이야기를 소설 같이 써내려간 사회학자의 글 솜씨 덕에 모처럼 밤을 꼬박 새워버렸습니다. 저는 지난날 밀린 공부가 있으면 밤새우는 게 특기였지만, 20여 년 전 입이 비뚤어지고 눈이 찌그러지는 병으로 한 달 입원하면서 아무리 급한 글이 있어도 자정 전에 잠자리에 드는 습관을 길렀는데, 읽던 책을 도저히 놓을 수 없더군요. 쓰던 글도 다음날 끝내야 했고 진지하게 읽던 책도 밀렸는데 말이죠. 먼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타고난 필력에 대학에서 문학도로 다진 실력까지 덧붙여져 한탄도 분노도 꾹 누르고 담담하게 풀어내는 글에 푹 빠져버린 겁니다.

<한겨레> 신문에 4년간 칼럼을 연재하며, 찾기 어려운 여성의 항일운동, 분단과 전쟁의 폐해, 가진 자들의 탐욕과 사당동 빈민의 고달픈 현실을 비롯한 사회계층과 불평등, 주택이 ‘사람 사는 집’에서 ‘사고파는 부동산’으로 소유와 재산 증식 수단이 돼버린 서글픈 현실, 5월광주의 ‘우리 선생님’,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에 관한 다른 견해, ≪녹색평론≫을 이끌었던 김종철 선생과 ‘평양 만경대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강정구 교수와의 일화 등을 담고, 칼럼에 노트를 붙이게 된 사연까지 묶어 펴낸 책, 꼭 읽어보시지 않겠어요?

덧붙이는 글: 밤새 읽은 280여쪽 책에 아쉬운 대목도 있다는 점을 밝힙니다. ‘프롤로그’부터 ‘에필로그’ 사이에 ‘아이클라우드’, ‘필로티식’, ‘알레고리’, ‘젠트리피케이션’ 등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을 영어·외래어가 꽤 많이 나오는군요. 출판 후 오탈자를 바로잡아 정오표를 만들어 보내주며 2쇄 찍으면 고치시겠다는 꼼꼼하고 섬세한 민족 사회학자가 ‘휴대폰’과 ‘백미러’를 서너 번 연거푸 쓴 건 눈에 좀 거슬립니다. 오래 전부터 표준어 같은 일상어가 된지 오래 됐지만요.

15년 전 제가 쓴 글을 그대로 옮깁니다. “‘휴대폰’이라고 우리말과 영어를 어색하게 섞어 쓰지 말고, ‘cellular phone’이나 ‘mobile phone’으로 영어를 제대로 사용하든지 우리말 ‘휴대전화’로 쉽게 쓰는 게 좋다..... ‘백미러’ 같은 일본어투 엉터리 외래어를 쓰는 것보다 ‘rear-view mirror’라는 영어를 올바로 쓰든지 ‘후사경 (後寫鏡)’이란 표준어를 쓰는 게 바람직하다. 어차피 우리말은 아무리 적어도 절반 이상 한자어다.”

조정래 선생이 2013년 중국의 급성장을 다룬 ≪정글만리≫를 보내주셨는데, 세 권짜리 소설에 나오는 ‘G1’이나 ‘풀장’이란 단어가 못마땅하더군요. “‘G7’이나 ‘G20’ 등의 ‘G’는 ‘그룹 (group)’을 가리키지 서열을 뜻하는 게 아니기에, ‘G2’까지는 괜찮지만 ‘G1’은 말이 안 됩니다. 하나가 어떻게 그룹을 만듭니까? ‘pool’이 ‘수영장’이란 뜻이니 ‘풀’만 써도 족한데 ‘풀장’으로 묶어 쓰면 ‘해변가’처럼 어휘 중복으로 잘못 쓰는 것 아닙니까“고 천하의 소설가에게 대든 적도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10년 공부하며 살았어도 아름답고 순수하며 정겨운 우리말이 영어·외래어 남용과 오용에 훼손되는 걸 안타깝게 여기거든요.

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평화학 명예교수)이재봉 주주 pbp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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