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24

보수와 진보, 어디에서 만나는가 이찬수

보수와 진보, 어디에서 만나는가

보수와 진보, 어디에서 만나는가
[보훈문화의 표층과 심층] 메타적 보훈의 길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 
 기사입력 2022.01.24. 

보훈교육연구원에서 <보훈문화총서>가 총 14권으로 발행됐다. 그간 보훈은 '보수의 전유물' 처럼 인식돼 왔던 게 사실이다. 보훈은 낡은 것도 아니고, 특정 세력의 전유물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 공동체가 일궈온 가치와 마땅히 지켜가야 할 가치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태도를 말한다. <보훈문화총서>의 발간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 있는 연구 결과들이다. <보훈문화총서>의 내용을 시민들이 이해하기 쉽게 글로 소개하는 지면을 마련했다. 특히 보훈에 대한 보수적 이념을 탈피해 평화, 통일, 민주 등을 지향하며 두루 다루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총 10회에 걸쳐 격주로 연재한다. 편집자

"보훈에도 '다원적'이고 '메타적'인 관점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메타적 보훈'은 독립, 호국, 민주의 정체성을 살리면서도 그 저변에서 상통하는 가치를 합의하고 발굴해 이 세 가치를 긍정하며 포괄하는 심층적 보훈 행위를 의미한다."(이찬수 "삼각뿔 보훈", <보훈, 평화로의 길>, 모시는사람들, 2021, 57쪽)

바야흐로 대선철이다. 수십 년 반복되는 문제이거니와 한국의 대선은 언제나 보수와 진보, 진보와 보수 간의 싸움이다. 다당제의 필요성을 외치는 사람도 많지만, 보수와 진보의 대립, 보수당과 진보당의 양강 구도는 바뀌지 않는다.

그 근간에는 전쟁과 분단이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피식민지 경험이 있다.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상처, 거기서 이어지는 이념 대립, 일본·미국·중국과의 관계를 둘러싼 이원론적 대립의 관점들은 우리 정치와 사회 거의 전 영역에 걸쳐 뿌리 깊게 작동한다. 비교적 이념성이 덜한 과학이나 순수 예술 혹은 예능의 영역 등을 제외하면, 보수와 진보 간 갈등이 없던 적이 없고, 작용하지 않는 곳이 없다.

이런 갈등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도 벌어진다. 분배와 성장, 사회와 개인, 공화와 자유 등은 민주주의에서 두루 추구해야 하는 가치이면서도, 무엇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이 가치들이 서로 대립한다. 한 예로 '민주공화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갈등을 들 수 있다.

이 둘은 모두 대한민국헌법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가령 헌법 제1조1항에서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 규정하면서, 전문과 제4조에서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한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는 표현도 같이 두고 있다. '민주공화국'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가치이다. 만일 이 둘이 대립되는 말이라면 헌법부터 당장 뜯어고쳐야 할 것이다.

민주공화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대립되는 말이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서로 달리 사용되곤 한다. 흔히 진보는 민주공화주의를 내세우고, 보수는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 자유주의자에게 공화는 무언가 통제나 제한의 어감으로 다가오고, 공화주의자에게 자유는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시키거나 가속화시키는 무한 경쟁의 이념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실제로 보수가 말하는 자유는 마이클 샌델이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비판적으로 말한 능력주의의 다른 언어로 사용될 때가 많다.

그러나 자유는 방임이 아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공정이나 평등과 조화하면서 사회 공동체를 구성하는 원리이다. 당연히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가치이면서도 공적 질서를 위해 통제되는 대상이기도 하다. 국가유공자의 상징과도 같은 백범 김구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국가 생활을 하는 인류에게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 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이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느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백범은 여기서 국민적 자유의 원칙에 대해 말하고 있다. 국민 전체의 자유로운 의사를 보장하고 존중하는 국가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자유라는 것이 어떤 자유인지, 무엇을 지향하는 자유인지 물어야 한다. 백범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모두를 위해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는 각자도생의 자유가 아니라 상생을 위한 자유이다. 가능한 모두의 상생을 위해 스스로 제한해야 하는 자유이다. 그것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민주주의도 법적 통제와 공공성에 기반한 민주공화주의와 다르지 않다. 때로는 사회민주주의의 모습으로도 드러난다. 이것이 민주의 진짜 모습이다. 혐오와 차별을 담은 '아무말대잔치' - 엄밀하게는 자신을 위한 –까지 무차별 용납하는 민주가 아니다. 민주의 이름으로 타자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그것은 민주가 아니다. 민주는 자신에게 유리한 자유가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자유여야 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더 기울이는 자유가 아니라, 평평한 운동장을 만들기 위한 자유이다. 그러려면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제한할 수 있어야 하고, 공정한 법에 의해 어느 정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라는 원칙에 동의한다면, 자유에 대한 이러한 공감대를 두루 확보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구축하려면, 설령 오래 걸리더라도, 이러한 가치와 지향을 잃지 않으면서 지속적 대화로 공감대를 널리 확보하는 길 밖에 없다. 공동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대화가 민주를 이루며 더 넓고 깊은 민주로 가는 과정이다.

일제강점기에 좌파 민족주의자 김원봉과 우파 민족주의자 김구가 민족의 이름으로 독립운동을 함께 하기도 했듯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좌·우파의 합작으로 통합정부를 구성했듯이, 진정한 민주는 사회민주주의든 자유민주주의든 모두 끌어안을 수 있는 그런 포용성을 근간으로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가야 한다. 그럴 때 '민주공화국'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조화를 이룬다. 그것이 진짜 진보와 합리적 보수가 만나는 지점일 것이다.

폴 슈메이커가 좌파 '민주사회주의'와 우파 '시장자유주의'가 대화를 통해 접점을 찾을 수 있다면서, '다원적 공공 철학'의 아이디어를 제시한 바 있다(『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 이것은 한국의 정치와 이념적 지형에도 적절히 적용된다. 그에 의하면, 다원적 공공 철학은 "각자의 이념적 입장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모든 정치 이념들의 저변을 이루는 합의를 모색하는 일종의 메타정치이론"이다.

보훈에도 다원적이고 메타적인 관점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보훈은 대한민국의 독립, 호국, 민주를 위한 희생과 공헌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보답이자 그 정신을 선양하는 행위이다. 보답과 선양으로 국민 통합과 국가 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이 보훈의 기본 이념이자 근본 목적이라는 법적 규정도 두고 있다.(국가보훈기본법 1.2.3조)

그런데 이러한 보훈에 대한 일반 국민의 이미지는 피상적인 데 머물거나 그 정치적 성격은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분단에 입각한 대립을 연상시키고 전쟁의 참상 등과 연결되는 탓이 크다.

그러나 보훈이 대립적 보수성에 머물게 둔다면, 대한민국 보훈의 기본 이념인 국민통합을 저해할 가능성이 크다. 희생적으로 민주화에 기여한 이를 국가유공자로 수용하고 있는 마당에, 민주의 이름으로 대립을 이어가서는 안 된다. 전쟁의 상처는 기억하고 치유해야 하되, 대립적 사건의 상처는 빨리 극복할수록 좋다. 이것이 보훈의 진정한 목적인 국민통합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러려면 '메타적 관점'이 꼭 필요하다.

서두에 적었듯이, '메타적 보훈'은 독립, 호국, 민주의 정체성을 살리면서도 그 저변에서 상통하는 가치를 합의하고 발굴해 이 세 가치를 긍정하며 포괄하는 심층적 보훈 행위를 의미한다. 이런 관점을 가져야 진보와 보수가 표층적 '적'에 머물지 않고 심층에서 '친구'로 만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민주의 이름으로 대립적 '분단폭력'을 극복해나가는 일이 진보와 보수 모두의 몫이라는 사실도 자명해진다. 슈메이커의 입장을 다시 빌려오면, '다원적 공공철학에 입각한 진보주의'(가령 건전한 진보), '다원적 공공철학에 입각한 보수주의'(가령 합리적 보수)가 가능하고, 또 그래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포용적 민주유공자와 적대적 호국유공자 간 대화가 가능하고 또 가능해야 하는 논리적 이유이기도 하다. 그 심층에 진보와 보수가 합의해낼 수 있을 공공성의 영역, 민주의 영역이 놓여있다. 대립에서 조화로 나아가는 데 기여하는 보훈이 되도록 그 깊이와 넓이를 두루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차기 정부가 이러한 통합적 보훈의 세계를 더 열어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보훈교육연구원에서 보훈문화의 표층과 심층을 정리한 보훈문화총서 전14권 ⓒ이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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