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12

손민석 · 김기란의 [극장국가 대한제국] 현실문화,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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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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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란의 <극장국가 대한제국>(현실문화, 2020)은 방법론적으로 상당한 긴장, 대립을 응축하고 있는 저작이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론적 긴장 혹은 대립은 저자 자신의 문제도 없잖아 있다고 생각되지만 대한제국 자체의 이중적 성격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말하는 방법론적 대립이란 크게 보자면 저자가 "극장국가" 대한제국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근대성과 봉건성(봉건성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지는 않지만)의 모순적인 혼합관계를 의미한다. 크게 보자면 김기란의 논의는 정치사적/문화사적 차원에서의 대한제국의 역사적 위치가 무엇이었는지를 축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클리퍼드 기어츠의 <극장국가 느가라>와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된 공동체>, 그리고 다카시 후지타니의 <화려한 군주> 등을 반복적으로 인용하여 대한제국이라는 '극장국가'의 '연극 상연'이 근대적인 내셔널리즘의 형성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주요한 축으로 나타난다. 
 기어츠의 논의가 19세기 발리 국가의 상징적인 의례를 단순히 권력에 부대하는 현상이 아니라 권력 그 자체가 기능하는 방식이면서 동시에 국가의 통치행위라는 점을 밝혀냈다면, 다카시의 논의는 일본 메이지 유신기의 천황의 이미지와 황실의례가 어떤 식으로 일본인의 국민화에 기여했는가를 고찰한다. 그는 마루야마 마사오 등이 견지했던 천황제를 봉건적 잔재로 파악하는 강좌파적인 논의를 논박하며 천황제야말로 내셔널리즘 형성에 크게 기여한 "근대성"을 지닌 제도라는 점을 잘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앤더슨은 기어츠의 논의와 겹치는데 기어츠가 전근대적인 국가권력이 의례 등을 활용하여 어떻게 구심력을 만들어내는지를 다뤘다면 앤더슨은 그것이 근대적으로 어떻게 이뤄지는가를 다루었다. 너무 많이 인용되면서 동시에 너무 많이 오해를 받기에 축약해 제시하는 것조차도 우려스럽지만 앤더스은 '종족성' 자체를 부정했다기보다는 그러한 종족성, 종교 등의 여러 요소들이 '인쇄자본주의'라는 물적 토대에 의해 활용되면서 다양한 문화적 인공물을 주조해낸다고 본다. 기어츠를 제외하면 나머지 두 논의는 "근대성"을 강조한 논의들이다.
 문제는 대한제국이 '인쇄자본주의'를 활용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물적 토대를 갖추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저자가 활용하는 또다른 방법론이 바로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이다. 하버마스는 근대 부르주아가 공론장에서 형성해낸 민주적 공공성을, 전근대 봉건 영주 및 군주들이 농민을 대상으로 자신의 권력의 신성함과 그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해 행한 각종 궁정의례 등에서 나타난 "과시적 공공성"과 대비시켜 파악한다. 김기란은 이 '과시적 공공성'을 대한제국에 적용시킨다. 기어츠와 하버마스가 대한제국의 봉건성을, 앤더슨과 다카시가 근대성을 각각 증명하는 방법론으로 활용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즉, 대한제국은 그 취약한 정치적, 경제적 토대를 단기간에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여 대외적으로는 주권국가의 지위를 보장받기 위해, 대내적으로는 황제의 안정적인 권력기반을 창출하기 위해 여러 국가 의례 등을 활용해 "화려한 군주" 고종황제를 연출하고, 그를 통해 봉건적인 '과시적 공공성'과 '상상된 공동체'를 형성하려 했던 "극장국가"였던 것이다. 백성들은 고종황제가 연출하는 '극장'의 관객이면서 동시에 극에 참여하는 조연배우들이기도 했다. 김기란은 대한제국이 "서구 전제군주들의 방식을 모방하면서도 동아시아의 전통을 포기하지 않는 방향"(김기란, 2020 : 26-27)에서 서울이라는 무대를 근대적 도시로 탈바꿈시키고 백성을 "황제의 신민"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황제가 직접 다양한 연출을 행했지만, 그것이 사회 체제 자체를 근대적으로 변혁시켜 '극장국가'를 "현실극장"으로 바꾸는데는 실패했다고 평가내린다. 
 신분적 위계에 기초한 극장국가의 기획은 이미 내부로부터 붕괴하고 있었는데, 김기란에 따르면 독립협회 등의 여러 애국계몽적인 토론회, 연설회 등은 그 자체로 대한제국이 연출하고자 했던 신분제적 위계를 무시하고 내셔널리즘적인 '평등성'에 기초한 새로운 "극"을 상연하고 있는 "극장"이었다. 황제권력을 정점으로 한 신분제적인 '극'은 계몽이 가져온 민족주의적인 '극'을 애당초 초월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저자가 하버마스의 '민주적 공공성'과 '과시적 공공성'을 대립적으로 파악한 데는 이런 맥락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근대국가의 관료제적 합리성을 체현할 수 없던 인민에게 "살아있는 신체"로 현현하는 황제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국가권력을 체감할 수 있는 중요한 장치였을 것이다. '과시적 공공성'이 내부로부터 형성되는 계몽의 '민주적 공공성'에 의해 내파된다는 저자의 암시는 이 저작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김기란의 저작을 읽고 경제사적인 한계가 보완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영훈, 김재호, 이태진 등이 참여한 <고종논쟁> 이후 이영훈, 이우연 등의 뉴라이트 계열은 대한제국을 막스 베버적 의미의 가산제(家産制) 국가로 파악한다. 개인적으로 이들이 이 개념을 사용할 때 경제학적인 의미의 가산제라고 한 것인지, 아니면 베버를 읽고 이런 말을 하는건지 좀 궁금하기는 했다. 전자가 맞을 것이다. 조악하게도 민주적 법치국가에 대비되는 약탈적 국가 개념에 상응하는 것으로 가산제 국가를 파악하고 있다. 대한제국과 관련된 이들의 연구는 고종논쟁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그 결과 최근에 이우연은 신조 미치히코의 <조선왕공족>(백년동안, 2022) 후기에서 대한제국은 가산제 국가였기에 황제가 자기 재산을 남에게 판 것인데 어떻게 비판할 수 있는가, 라는 다소 과격한 주장까지 서슴지 않고 하기에 이르렀다. 이영훈이 한동안 집착적으로 대한제국 왕실재정을 연구했던 것도 정부재정마저 잠식한 왕실재정의 상당부분이 국가의례 등의 허례허식에 "낭비"되었지, 근대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함이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영훈은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이 토지소유구조상 기존의 사적 소유의 발전 과정에 역행하여 인민들의 실질적 토지소유를 박탈하고 왕토사상을 무리하게 구현하려 한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신용하의 조선토지조사사업에 대한 비판이다. 토지조사사업이 인민들의 실질적인 토지소유를 박탈한 게 아니라 반대로 이미 대한제국이 그렇게 박탈했던 것이고, 그로 인해서 멸망했다는 말이다. 근대화를 추진해야 할 시급한 상황에서 대한제국은 왕실재정이 정부재정을 잠식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화 사업에 필요한 여러 재정을 모두 왕실 의례에 사용하며 낭비해버렸다는 게 경제사학 쪽의 입장이다. 그 정점이 이우연이 번역한 신조의 <조선왕공족>이다. 국가를 가산(家産), 가문의 재산으로 만들어버리더니 그 소유권을 천황에게 팔아먹고 자신들은 호의호식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이런 한심한 이씨집안을 어떻게 긍정할 수 있는가? 그들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성리학의 세계에 머물고 있었다.
 여기에는 근대국가의 재정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더 나아가서 본질적으로 근대국가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나름 자리하고 있다. 조선왕조의 재정구조는 손병규가 매력적으로 제시한 것처럼 중앙의 재정과 지방 재정 간의 이중화 과정이 점차 심화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지방의 분산적이고 자율적인 재정운영이 강화되어 가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적어도 근대적 재정국가의 탄생에 역행하는 방향이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갑오개혁 과정에서도 드러났지만 실상 1906년 통감부가 실질적으로 기능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장 먼저 했던 것이 중앙에서는 왕실재정과 정부재정을 구별시켜 전자를 후자에 종속시키는 것이었고, 지방에서는 이서층을 배제하며 재정을 일원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전국에 걸친 통합적 일원화 과정은 근대 재정국가의 기초로 이에 근거하여 화폐통합, 국채발행, 정부의 시장주체화, 관료제 확립, 상비군의 조성 등이 가능해진다. 내가 화두로 잡고 있는 아시아에서의 공사분리의 출현은 이런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이러한 방향에 역행하는 과정이 극단적으로 진행되어 왕실재정이 비대화 되며 황제의 전제적인 권력행사가 제도화된 '대한제국'으로 귀결되었다는 게 경제사학쪽의 이해다.
 김기란은 이에 대한 적절한 비판점을 제시해준다. 무엇 때문에 대한제국은 그리도 많은 왕실재정을 국가의례 등에 '낭비'했는가? 극장국가로서의 대한제국의 상연을 통해 위축된 왕실의 권위와 정치적 영향력, 그리고 대내외적인 국가권력의 체감을 달성하려 했던 것이다. 노쇠한 농업국가인 대한제국의 관료제를 재편하고 개혁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권력이 중심점이 되어서 체제를 이끌어갈 수 있는 역량을 보여줄 수 있어야 했는데 현실적으로 왕실을 이끄는 고종의 입장에서는 극장국가의 상연을 통해 권위와 권력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장기적으로 제도적인 변화와 근대화 사업을 위한 투자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기란의 연구를 참고해보면 고종황제 또한 나름 대내외적 위기 상황에서 비록 봉건적인 성격을 지녔지만 적극적으로 대응하려 했으며 그러한 대응의 귀결로 새롭게 나타나는 계몽의 '극'이 상연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대한제국의 책임으로만 돌리기보다는 근대화 사업의 수행에 있어 필요한 조건들을 갖춰나가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이 훨씬 더 객관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일 것이다. 왕실재정의 비대화를 가산제 국가로의 이행으로만 보지 않고 대한제국이 하나의 통합적인 공동체로서 기능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경주하는 과정으로 새롭게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학계의 이태진, 서영희 등과 같이 이것을 절대주의 단계로 파악하여 긍정할 것도 없다. 그것은 봉건적인 한계를 지녔기에 계몽의 극이 올라갈 때쯤 내려와야만 하는, 유행이 지난 상영극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책은 이태진, 서영희 등의 절대주의 왕권론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혹은 그 반대편에서 왕토사상에 입각한 가산제 국가론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근대국가로 향하는 연속적인 과정이자 과도기적인 과정으로 대한제국을 바라볼 수 있다. 역사학계와 경제사학계의 대립을 지양하면서도 대한제국의 한계와 모순을 직시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비판할 지점도 많은데 음.. 이건 나중에.. 네이버에 올려볼까 생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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