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4-25

재일동포 소설가 김석범씨

한겨레 21
재일동포 소설가 김석범씨 
준통일 국적, 그걸 주시오

귀국할 때마다 존재가 흔들리는 몸살… 그는 왜 50년간 ‘조선’ 국적을 고집했는가


그는 세번째 조국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해방 전 어린 시절에 드나들던 고향 제주도로 가는 길이 이리 멀었던가 싶다. 한번 올 때마다 그의 존재 전체가 흔들리는 몸살을 앓았다. 두 동강으로 찢어진 조국처럼 그의 몸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겪었다. 희끗한 머리카락을 날리며 공항 출국장을 나서는 그의 얼굴 위로 공익광고 한마디가 흘러갔다. ‘남북이 함께 발전해야 통일이 빨라집니다.’


드라마처럼 성공한 입국


재일동포 소설가 김석범(73)씨는 국적이 없다.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그는 제주도가 고향인 부친의 피를 따라 조선인임을 자랑스레 여기지만 ‘남’이나 ‘북’ 어느 한쪽을 선택하길 거부했다. 그에겐 48년 이전, 남과 북이 하나였던 조선만이 있다. 조총련(이하 총련)계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흔히 ‘북’을 국적으로 한 사람들로 오해받는 ‘조선적’은 그에게 하나의 기호일 뿐이다. 그래서 조선은 ‘국적’이 아니라 그냥 ‘적’이다.
“48년에 처음 외국인등록법이 생겼을 때는 남북한을 통틀어 ‘조선’이라 했어요. 그때가 차라리 나았던 것 같아요. 통일되기 전까지는 그 어느 쪽도 내 조국은 아니니까.”
남들이 생활의 불편 때문에 쉽게 포기하는 걸 그는 끝까지 고집했다. 88년 11월, 4·3을 소재로 한 그의 장편소설집 <화산도>와 단편집 <까마귀의 죽음> 한국어판이 나온 몇달 뒤 40년 만에 처음 한국에 들어올 때도 그랬고, 96년 한민족작가대회에 참석할 때도 힘들었지만 이번 세번째 한국 입국은 말 그대로 한편의 드라마였다. 지난 8월21∼24일 제주시 제주그랜드호텔에서 열린 ‘21세기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을 주제로 한 제주 4·3 50돌 기념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하려던 그는 도쿄 주재 한국총영사관으로부터 ‘국적문제’로 여권 발급을 거부당했다. 이 소식은 곧바로 회의장에 전해졌고 한국을 비롯한 일본과 대만 참석자들은 권력의 횡포라며 분노했다. 개막회의에서 이에 항의하는 긴급문건을 쓴 이가 서승씨였다. 모국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긴 옥살이를 하고 지금은 일본 리쓰메이칸대학 교수로 있는 그는 ‘4·3을 논하는 학술회의에 김석범 선생이 빠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정부당국에 엄중하게 따져물었다. 그렇게 해서 대회 마지막날에야 칠십여 평생을 그 국적문제로 싸워온 노 투사가 참석자들의 열렬한 기립박수를 받으며 회의장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재일동포 수가 한 67만 됩니다. 그 가운데 15만쯤이 ‘조선’적을 가지고 있어요. 1년에 5천쯤이 한국 국적으로 돌아서고, 일본에 귀화하는 사람이 또 1만명씩 되니 자꾸 감소하는 추세죠. 그러나 가령 3∼4년 뒤 일본이 북한과 국교를 트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나같이 남한이나 북한 어느 쪽 국적도 갖지 않겠다는 사람들은 무국적자가 될 운명에 놓입니다. 통일된 나라의 국적이 아니면 싫다고 온갖 불편을 견디며 50년을 버텨온 우리는 어찌합니까. 나라없는 신세로 일본에 들어와 큰 고통을 겪으며 살아왔는데 또다시 나라없는 구렁텅이로 우리를 밀어넣지 마십시오.”
그는 통일을 전제로 한 ‘준통일 국적’을 제안했다. 어느 쪽 국적도 선택하지 않겠다는 이들에게 ‘준국가적 국적’을 주는 것이다. 이들이 남과 북을 자유로 왕래하게 되면 두 정부를 잇는 완충지대이자 통일로 가는 다리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 구상을 한국 특집을 마련한 잡지 <세계>(이와나미 서점) 다음호에 정식으로 제안하겠다고 했다.
“이제껏 한국 정부가 재일동포들에 대해 펴온 건 안기부에 의한 정보정치뿐이었어요. ‘고향방문단’ 활동 등을 통해 총련을 와해시키는 데만 주력했지요. 그건 냉전시대의 추악한 유물일 뿐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민주정부가 들어선 오늘까지 구태의연하게 박정희 독재정권식 대책을 펴서야 되겠습니까. 바뀌어야 합니다. 무국적자로서 세번씩이나 한국에 들어온 걸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소설 좀 쓴다고 특권 누리는 건 싫어요. 제 선배나 또래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이 고향을 그리며 눈물 짓고 있는지 아십니까. 이 정부가 진정한 민주정부라면 그들을 오게 해야 합니다.”
또 한가지, 그가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건 제주공항 활주로 밑에 묻혀 있는 4·3사건 희생자들의 유골이다. ‘정뜨르’라 불리는 이곳엔 48년 4·3 반미 민주항쟁 때 학살당한 수천구 주검이 누워 있다.


제주공항 시멘트를 깨부숴라


“하루종일 코끼리 같은 비행기들이 그 육중한 동체를 비벼대며 오르내리고 굉음을 내지르니 원혼들이 깜짝 놀라 혼비백산하지 않겠습니까. 죽어서도 그 고통을 당한다고 상상해 보세요.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그들을 거기 묻어두곤 민주주의 국가 실현 못합니다. 지금 당장은 어렵더라도 뒷날 공항이 이전하게 되면 시멘트를 깨부숴 싹 걷어내고 그 백골들을 거둬 편히 잠들도록 모셔야 합니다.”
그는 이럴 땐 미국이나 일본 정부가 부럽다고 했다. 한국전쟁 때 전사한 군인들 유골을 아직도 거둬가는 미군이나, 2차대전 때 죽은 일본군을 찾아 지금까지도 남양군도 바닷속 깊은 곳을 뒤지고 있는 일본 사람들의 집요함이 우리에게도 있었으면 싶다는 것이다.
지난해 9월 그는 평생을 쏟아부은 <화산도> 1, 2부 전 7권을 일본 문예춘추사에서 펴냈다. 76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해 거의 20여년 만에 마침표를 찍었으니 그의 일생이 이 소설에 다 녹아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 문단에서 그를 노벨문학상 후보로 미는 건 이 작품이 4·3이란 역사적 사건을 통해 한시대를 뛰어넘는 인류사의 보편적 문제를 응축해냈기 때문이다.
“지난 5월에 담낭 제거 수술을 받고 나서 술도 못마시고 음식도 조심해왔는데 고향에 오니 ‘한라’ 소주 맛이 기막혀 한잔 안 할 수가 없네요. 냄새날까 일본에선 자제하던 생마늘도 원없이 먹었어요. 결국 탈이 나서 고생은 좀 했지만 참 유쾌합디다. 4·3을 주제로 한 국제적 학술대회를 바로 그 땅에서 멋있게 치른 걸 보니 오래 산 보람도 있고요.”
그는 ‘조선’ 사람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조선’ 사람으로 돌아갔다. 영원히 ‘조선’ 사람이기를 고집하는 그가 그 뜻을 귀히 여긴 고향 땅에 네번째 귀국할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사진 이용호 기자



한겨레21 1998년 09월 10일 제2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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