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9

18 왜 ‘위대한 영도자’는 쌀밥에 고깃국 못 먹일까



중앙시사매거진



201810호 (2018.09.17) [54]목차보기
기사 제보|편집장에게 한마디


[집중분석] 70년간 지속된 北 식량부족 실태
왜 ‘위대한 영도자’는 쌀밥에 고깃국 못 먹일까
남성욱 고려대 행정전문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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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과 미사일 가진 나라가 농업 생산성과 추수 효율은 떨어져…
김정은, 재정 확보 차원서 농업개혁 접근하면 중국 모델 난망




▎평양 교외의 농촌 풍경. 국제식량정책연구소에 따르면 북한의 토지생산성은 남한의 25% 수준이다.

백로가 지나가자 북한 들녘에도 누렇게 벼가 익어가고 있다. 북한 평야지대는 남한보다 평균 3도 정도 기온이 낮은 만큼 시베리아 북서풍이 일찍 불어닥친다. 특히 일교차가 심하다. 벼를 베고 탈곡하는 가을걷이는 남한과 비교해 보름 정도 서두르지 않으면 서리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콤바인 등 농기계가 부족해 매년 10월 북한 농촌지역에선 벼를 수확하는 ‘가을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된다. 들판 곳곳엔 ‘당은 부른다. 모두 다 백일 전투에로’란 가을걷이를 강조하는 입간판이 노적가리 사이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선군정치를 강조하는 통치체제라 농사도 전투적인 용어로 농민들을 독려하고 있다. 9월부터 11월까지 100일 동안 대학생은 물론 직장인들도 공부와 업무를 중단하고 벼 베기 노력 봉사에 나선다, 북한의 최고 명문 김일성종합대 학생조차 예외 없이 최소 2주 이상 휴업하고 농촌 지원에 나선다. 일반적으로 가을 수확기엔 평균 20일 동안 애국 노동과 농촌 지원 명목으로 무보수 노력 동원이 전국적으로 이뤄진다. 북한 대학생들은 남한의 농활 MT와 유사하게 지방으로 내려가 단체 영농 지원을 하게 된다. 일부 학생은 일하다가 휴식시간에 노래를 부르는 등, 놀면서 학생들끼리 혹은 지방의 농촌 처녀들과 연애도 한다.

북한 2대 지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물론 김정은 국무위원장까지 내놓는 “볏단 운반과 낟알 털기를 제때 마쳐야 한다”는 현지지도 지시는 10월 이후 노동신문 단골 보도 사항이다. 특히 “다 지어놓은 낟알을 한 알도 허실함이 없이 제때에 거두어들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라는 최고 지도자의 발언은 가을걷이 전투의 금과옥조다. 핵과 미사일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6개국만이 성공했다는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SLBM) 기술인 콜드 론치(Cold launch)를 성공시킨 북한 지도자가 낟알 털기를 제때 마쳐야 한다는 지시를 남발하는 것은 북한 농업이 당면한 딜레마다. 북한은 지난해 SLBM의 두 차례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고 주장하고 김정은 위원장이 기술 개발자를 포옹하는 사진을 전격 공개했다. 정책적 관심만 있으면 핵과 미사일 기술 개발 노력의 100분의 1만 투입해도 해결할 수 있는 볏단 운반을 지도자가 연일 노동신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불가사의다. 대형 장거리미사일을 1만㎞ 이상 떨어진 미국 LA에 투하할 수 있다고 선전하는 기술력을 보유한 사회주의 정치체제가 들판의 노적가리를 적기에 이동시키지 못하는 것은 정책의 오류가 아니고선 설명이 어렵다.

사실 북한의 가을걷이 전투처럼 노동력을 단기에 집중 투입하는 추수 행태는 남한에선 1990년대 이전에 마감했다. 남한 농촌지역은 1991년 충남 당진군과 경북 의성군에서 RPC(Rice processing center)라는 미곡종합처리장를 건립하는 사업을 시작해 1990대년 말까지 전국적으로 사실상 벼 수확의 기계화가 완료됐다. 벼의 수집·건조·저장·가공·포장·판매의 전 과정을 일괄 처리함으로써 농가 노동력 부족을 해소하고 관리비용을 줄여 미곡의 품질 향상과 유통구조를 개선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북한의 경우엔 이러한 일관 처리 시설이 없기 때문에 가을철만 되면 학생 및 직장인 등 비농업 노동력을 일시에 대거 동원해 수작업으로 벼 수확에 나선다. 심지어 벼를 수집해 건조하기 위해 들판에 늘어놓으면 쥐 같은 들짐승들이 곡식을 훔쳐 먹는 양이 전체 생산량의 2~3%에 이른다는 추정 통계도 있다.

“쌀은 공산주의다”의 허구




▎북한 협동농장원들. 통일이 되면 북한의 협동농장은 규모 면에서 국제경쟁력을 가질 것이란 예상이다. / 사진:통일문화연구소

필자는 정부 협상대표단의 일환으로 2000년 가을 평양을 방문했다. 순안공항에서 평양으로 가는 약 40㎞ 구간의 농촌 지역 도로는 온통 벼 베는 풍경으로 분주했다. 멀리 협동농장 앞 논두렁에 덩그러니 서 있는 ‘쌀은 공산주의다’란 입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빨강 글씨의 7개 입간판에 한 글자씩 표기되어 있는 모습은 북한이 사회주의 계획경제 농업체제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했다. ‘백일전투’ ‘풀판을 고기로 바꾸자’ 등 각종 노력 동원을 강조하는 전투적 구호에 적응하는 일은 10여 차례 방북하면서 차츰 무뎌졌다. 그러나 노동력 투입으로 식량 증산을 강조하는 구호가 2018년에도 건재한 것은 북한 식량난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평양사범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를 역임했고, 남한 망명 후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메이슨 대학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김현식식량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체제 유지에 필수적이라며 이를 ‘북한의 식량정치(food politics)’라고 표현했다. 식량 확보가 최고지도자의 최우선 과업이란 의미다. 남한은 의식주라고 하지만 북한에선 식의주라고 표현된다. 몸에 걸치는 옷이나 사는 집보다 먹고사는 문제, 즉 식량이 가장 중요하다는 인식은 김일성의 사고에서 비롯됐다. 김일성은 일찍이 ‘쌀은 사회주의다’라고 강조했다. 사회주의 농업을 통해서 먹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인지 사회주의를 해야만 먹는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인지 그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지만 김일성 주석이 ‘먹는 문제’ 해결에 총력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김일성의 식량문제 해결의 꿈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남한에서 실현됐다. 쌀 등 주곡을 증산하고 밀과 콩, 옥수수 등 부족한 곡물은 자동차와 스마트폰을 수출해서 획득한 외화로 수입함으로써 식량문제 해결에 성공했다. 식량을 완전 자급하는 국가는 미국, 러시아, 베트남 등 일부 국가 외엔 찾아보기 힘들다. 비교우위 원리에 의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곡물을 수입한다. 남한의 경우 쌀 재고량이 적정 수준을 넘어 보관 비용만 연간 300억원을 넘어서고 있으니 김일성의 ‘쌀은 공산주의’란 담론은 허구였으며 쌀은 자본주의이며 민주주의란 명제가 타당할 것이다.

북한은 지난해 11월 화성 14호 등을 통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에 두 차례 성공했다고 주장한다. 첨단 전자 기술을 보유한 북한이 왜 먹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지난 70년 동안 경미한 자연재해에도 외부 세계에 식량지원을 요청하는 걸까? 특히 3세대 젊은 지도자 김정은 시대에 들어서도 식량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 노동당 주체사상 비서이자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역임한 황장엽은 1997년 탈북해 필자가 소장으로 근무한 국가안보전략연구소 고문으로 일했다. 황장엽이 탈북을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는 최고층에게만 전달된 북한 내부의 식량 통계였다. 그는 저서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에 극심한 식량난을 설명했다.

“1996년 가을이 되면서 북한의 경제사정은 더욱 악화됐으며, 인민들의 고통과 불행은 실로 처참한 지경이었다. 비서들이 모여 1996년도 알곡 생산량을 종합해 봤더니 210만t밖에 안됐다. 물론 여름에 식량이 떨어져 미리 따다먹은 강냉이는 계산에 넣지 않았다. 210만t의 식량을 가지곤 군량미도 모자랄 형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연말이 되자 군량미가 떨어졌다고 해 농민들은 정말 어렵사리 남겨놓은 3개월 분의 식량을 군대에 무조건 내줘야 했고, 우리 비서들도 장에 나가 200kg씩 쌀을 사다가 군대에 바쳤다. 식량난이 심해지면서 사람들이 무더기로 굶어죽어 갔다. 평양의 경우도 중심가만 조금 벗어나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사람들이 배낭을 멘 채 식량을 구하러 나서는 바람에, 교외 장마당으로 가는 길이 사람으로 가득 찼다. 가정에선 부모들이 아이들을 먹여 살릴 수 없어지자, 그저 얻어먹기라도 하라고 밖으로 내보내는 집이 속출했다. 이 얘기는 내 셋째 딸이 들려준 것인데, 어느 날 아침에 누가 문을 두드려서 나가보니 어린 학생 두 명이 새까만 손을 내밀더니 밥 좀 달라고 했단다. 그래서 우선 손부터 씻게 하곤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더니 “어머니, 아버지가 다 굶어 누워서 우리만이라도 나가 얻어먹으라고 해서 남포에서 걸어왔어요”라고 대답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딸한테 그 말을 듣곤 (비서) 김덕홍에게 아사자들의 통계를 김정일에게 보고하는 조직부 일꾼을 만나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라고 했다. ‘조직부 일꾼에 의하면 지난 95년에 당원 5만 명을 포함해서 50만 명이 굶어죽었고, 올해(그때는 11월 중순이었다)엔 벌써 100만 명가량이 굶어죽어 간다고 합니다.’”

황장엽은 주체사상 비서로서 핵과 미사일에 관한 특급 군사정보 이외에 어떤 통계도 받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가 받아 본 식량생산량 통계는 김정일 위원장에게만 올라가는 수치를 포함했다. 황장엽은 계속된 식량난으로 북한체제가 존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탈북을 결심했다. 하지만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측의 대규모 식량 지원으로 황장엽의 예측과 달리 북한체제는 붕괴되지 않았다.

북한이 식량 자급자족 안 되는 이유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절, 유엔아동기금(UNICEF) 요원들이 평안북도 박천군에서 긴급구호 활동을 진행하던 중 촬영한 농촌. 북한의 어려움을 함축하고 있다.

1996년 북한 인구는 북한 중앙통계국, 남한 통계청 및 유엔 통계 기준으로 2200만 명 수준이었다. 국제식량농업기구(FAO)가 북한 현지를 방문해 작성한 1996년 11월 특별보고서에 따르면 1996년 11월 1일~1997년 10월 31일 식량 수요는 조곡기준으로 645만t, 정곡기준으로는 426만t이 필요했는데, 실제 생산량은 황장엽이 언급한 250만t에 옥수수까지 포함해 299만t으로 추계됐다. 결국 조곡기준으로 236만t, 정곡기준으로 126만t이 부족하며 50만t을 상업적으로 전량 수입한다면 약속된 인도적 지원량 3만t을 합산해도, 실제 조곡기준으로 73만t이 모자란다. 결국 부족 비율은 30%선으로 연간 기준 3개월 동안은 식량 배급이 불가능하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특히 당시 대규모 아사자가 발생한 이유는 1995년 홍수와 우박, 1996년 100년 만의 가뭄, 1997년 낮은 기온과 홍수 및 1998년 가뭄 등 4년 연속 자연재해가 빈발했기 때문이다. 2010년대 들어 생산량이 450만t대로 회복되면서 부족 비율은 15%선으로 축소됐다. 매년 중국으로부터 50만t 내외의 식량지원이 이뤄지고 자연재해가 빈발하지 않자 당국이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회복됐다. 하지만 여전히 최소 소요량 기준이며 식량의 자급자족은 요원한 실정이다. 특히 북한은 효율적인 물 관리체계가 미비해 지구 온난화 시대에 가뭄과 홍수에 매우 취약하다.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식량 생산체계가 순식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관개시설 및 저수지 등 물 관리를 위한 농업기반 대책이 중요한 이유다.

북한이 식량을 자급자족 못하는 이유는 생산량 부진 탓이다. 논 200평 기준으로 남한은 평균 80kg 들이 가마 4~5개 분량의 쌀이 생산된다. 반면 북한은 2∼3가마가 생산된다. 북한 인구의 37%가 농업에 종사하지만 자급생산에 실패했다. 남한은 6%의 농민이 주곡인 쌀을 생산한다. 북한의 경지 면적 역시 남한과 비교하여 크게 작지 않다. 낮은 생산성이 원인이다.

북한은 일제가 건설한 동양 최대의 명성을 자랑하던 흥남비료공장 등이 노후화되면서 비료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남한은 1999년 처음으로 화학비료 15만5000t을 북한에 지원했다. 이후 2007년까지 북한에 총 255만t을 지원했고 2008년 보수 정부 출범 이후 민간차원의 소규모 지원을 제외한 대규모 비료 지원은 중단됐다. 북한의 2000년대 이후 비료 생산량이 평균 성분량 기준으로 20만t 수준임을 감안할 때, 당시 남한이 북한에 지원한 비료는 북한 생산량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양으로써 북한 식량난 해소에 크게 기여했다. 최근 북한은 화학비료 생산의 한계를 절감하고 유기질 비료 생산을 늘리면서 유기농업에 주력하고 있다. 조선신보는 2013년 2월 ‘북한에서 유기농업은 국내의 긴장한 식량문제를 해결하며 농업의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방도의 하나로 정부가 관련 시책들을 일관하게 실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 역시 ‘2013년 7월 21~23일 평양에서 국제유기농업강습이 열렸으며 국내외 유기농업 전문가들이 과학적 문제들을 논의하는 좋은 계기였다’고 선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8월 말 “중국이 북한에 자금과 물자, 비료를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비료 지원으로 북한 식량 생산이 정상화되는 측면을 지적한 것이다. 특히 화학비료가 화학무기 생산 소재로 사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반영됐다. 4·27 판문점 선언 이후 남해화학, 경농, 농우바이오 등 비료 관련 주식이 대북지원 기대감으로 상승하는 것은 북한의 강력한 요청을 예상한 주식시장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비료, 농기계, 농약 등 중화학 공업은 사실상 농업 외부요인에 좌우된다. 따라서 일반경제의 발전 없이 농업이 발전할 수 없다. 결국 선진국치고 농업이 약한 나라가 없고, 농업이 발전해야 선진국이 될 수 있다.

집단농장의 문제점 해소한 중국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왼쪽)가 1997년 4월 20일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해 측근인 김덕홍씨와 함께 감개무량해하고 있다. 황 전 비서는 북한의 식량난에 절망해 망명을 감행했다. / 사진:연합뉴스

다음은 소프트웨어 분야다. 벼는 쌀 미(米) 글자에서 보는 것처럼 88번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한다. 효율적인 노동력이 중요하다. 개별 농민들이 어떤 자세로 농사에 임하는지는 생산에 매우 중요한 과제다.

북한 농업은 1946년 토지개혁과 1958년 농업협동화를 통해서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토지개혁은 북한 사회주의의 사회경제적 토대를 형성한 기본정책이다. 북한은 1946년 3월 토지개혁을 단행해 4%의 부농이 60%의 토지를 편중 소유한 문제점을 해결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마자 김일성은 토지개혁으로 받은 땅의 소유권 등기 잉크도 마르기 전인 1954년부터 5년에 걸쳐 집단화 영농인 협동농장 제도를 정착시켰다. 현재 북한의 농업 생산은 1000여 개의 국영 농장·목장과 3000개의 협동농장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텃밭이나 뙈기밭을 제외하면 협동농장이 북한 농업을 책임지고 있는 생산단위다. 협동농장은 리(里) 단위 기본 생산조직으로 전국에 3000여 개가 있으며 북한 전체 경지면적의 90%인 180만㏊, 농업 생산의 90%를 담당하고 있다. 반면에 국영농장은 지역단위에 제한되지 않은 생산단위로 육묘와 축산 등 국가 소요 농·축산물의 생산을 담당하고 있다. 결국 협동농장은 텃밭이나 뙈기밭 등을 제외하곤 사실상 북한 농업을 책임지고 있는 생산단위다. 북한 농민들은 1946년의 토지개혁과 1954년의 협동화 조치에 의해 협동농장 소속으로 농사에 참여하고 있다. 개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으며, 집 앞 30평 정도의 텃밭 생산물만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다. 문제는 집단생산이 개인의 영농 의욕을 심각하게 저하시킨다는 점이다.

집단농업의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해 중국의 1978년 농가 청부 생산책임제 개혁을 살펴보자. 중국은 대륙의 공산혁명과 1950년 토지개혁으로 토지를 소유한 자가 농사를 직접 짓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실현했다. 하지만 1958년부터 불어닥친 집단영농 제도인 인민공사는 농민들의 생산 의욕을 꺾었다. 중국은 1960년대 10년 동안 식량 생산량 부족으로 3000만 명이 아사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자신의 과오를 은폐하기 위해 1966년부터 홍위병을 조직해 자신을 비판한 지식인과 관료들을 압박하는 문화대혁명을 단행하여 중국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마오쩌둥이 1976년 사망하면서 인민공사가 와해되는 것을 덩샤오핑(鄧小平)이 묵인하고 사실상 개인영농제로 전환을 추진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6월 중국을 방문했을 때, 농업과학원을 참관했다. 김 위원장은 북한 농업개혁을 줄곧 강조하고 있지만 성과는 미흡하다. /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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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1월 24일 안후이성 펑양현 샤오강촌의 지방 농민 18명은 전년도 식량 부족으로 마을 주민의 30%가 기근에 시달리자 공동생산‧공동분배라는 인민공사체제를 거부하기로 했다. 대신 농지를 가구별로 나눠 경작하자는 농가청부 생산책임제를 도입했다. 즉 농민 수대로 토지를 분배받아 경작한 후 일정 양의 양식을 국가에 납부하고 잔여량은 자신이 마음대로 처분하는 제도다. 제도 위반은 공안당국의 강력한 단속을 받았으나 굶어죽는 것보단 좋다는 농민들의 저항을 덩샤오핑은 기꺼이 허용했다. 덩샤오핑의 묵인 아래 시작된 새로운 제도로 그해부터 샤오강촌의 곡물생산량은 매년 20% 이상 급증했다. 1978년의 3만2500㎏에서 1997년에 60만㎏으로 18배가 증가했다. 개인이 강렬한 의욕을 갖고 노력한 만큼 자기 것이 될 수 있다는 소박한 이기심은 어떤 정책보다 증산에 효과적인 무기였다. 샤오강촌의 성공은 덩샤오핑이 주창한 개혁과 개방의 시발점이 되었다. 중국의 개혁적 지도자들은 1980년 들어 생산력 향상을 앞세워 전국적으로 인민공사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인민공사가 해체되며 2억5000만 명이었던 농촌의 절대빈곤 인구는 1998년 4200만 명으로 줄었다. 1978년 3억744만t이던 중국의 식량 생산은 1997년 4억9417만t으로 증가했다. 중국의 높은 인구증가율을 감안할 때 식량 증산이 없었다면 대량 기아는 불가피했다.

북한 역시 중국이 경험한 집단영농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작업단위를 축소하고 개인의 영농 인센티브를 늘리는 조치를 수차례 검토했다. 2011년 12월 김정은 정권 출범 후 북한 경제 및 농업 부문에서 가장 큰 변화 요인으로 주목할 만한 것은 ‘6·28 방침’이다. 북한은 2012년 6월 28일 ‘우리식의 새로운 경제관리체계를 확립한데 대하여’라는 방침을 발표했다. 이른바 6·28 방침의 농업 관련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협동농장과 공장의 생산에 필요한 초기 비용을 국가가 보장한다. 둘째, 국가와 협동농장이 7대3으로 생산물을 분배한다. 셋째, 농산물 가격 책정은 시장가격으로 한다. 넷째, 개인 소유 몫의 처분은 자유로 한다. 다섯째, 협동농장 내 작업분조의 규모를 4~6명으로 줄인다.

김정은의 ‘6·28 방침’은 무늬만 농업개혁




▎함흥에 있는 흥남비료공장 전경. 일제가 건설한 동양 최대시설이었지만 노후화됐다.

하지만 6·28 방침은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 등 선전매체를 통해 개혁적 조치로 소개됐으나 자강도 일부를 제외하곤 전국단위에선 실제로 시행되지 않았다. 우선 비용의 국가부담은 사회주의 경제관리체제의 전형이다. 국가가 생산비를 보장하겠다는 것은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바로 세우겠단 발상이다. 둘째, 토지·노동·자본 등 생산의 3요소에서 국가가 협동농장에 공급할 수 있는 것은 자본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 국가의 몫이 70%나 된다는 것은 적절한 분배라 할 수 없다. 셋째, 북한 산업부문(비농업부문)의 가동율은 30% 이하로 알려져 있다.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인 비료의 공급도 필요량의 30%를 밑돌고 있다. 이 상황에서 국가가 초기비용을 보장하는 방법은 농자재 가격을 시장가격으로 지불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북한은 이미 초(超)인플레이션 국면에 있기 때문에 시장가격으로 농자재를 보장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넷째, 개인소유분의 처분을 자유화한다는 것은 곡물의 시장거래를 공식적으로 허용한다는 의미다. 시장으로 유출되는 곡물의 양은 더 많아질 것이다. 이러면 곡물의 국가 수매는 더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작업분조의 규모 축소는 새로운 분조관리제(1996년)와 7·1 경제관리개선조치(2002년)에서도 제시된 바 있다. 그 후 실제 작업분조 규모가 축소됐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6·28 방침을 개혁적 조치로 해석하기엔 내용이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이 방침은 붕괴된 정부 수매·조달체계를 보완해 국가가 농장과 공장기업소의 생산물을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정책수단으로 보인다. 6·28 방침의 목적대로 단기적으로 정부재정이 확보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통화 증발이 불가피하며 인플레이션은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2014년 5월 30일 김정은 위원장은 담화를 통해 ‘현실 발전의 요구에 맞게 우리식 경제관리방법을 확립한데 대하여’를 발표했다. 이른바 5·30 조치의 주요 내용은 협동농장과 공장기업소에서 자율경영제 도입, 협동농장 내 작업분조 폐지와 가족영농 도입, 농장 노동력 1인당 농지 1000평 할당, 분배 비율은 국가와 개인이 4대6 등이 거론됐다. 농업에서 사적 경영을 허용하고 정부 설정 목표 초과생산분에 대해 자유처분을 허용한다는 내용이지만 전국단위 시행은 이뤄지지 않았다. 실제 시행 시, 협동농장 제도의 근간을 흔들 위험이 있다는 정치적 지적을 북한 최고지도부가 무시하지 못했다. 농업개혁은 최고지도자의 톱다운(top-down) 방식이 필수적이다. 북한의 새 농업 조치들은 최고지도자가 직접 나서 시행을 독려한 중국, 베트남 수준까지 이르지 못한 탁상공론 수준이었다. 식량 보급에서 시장의 역할은 확대됐으나, 여전히 목표생산량이 할당되고 농자재 공급 역시 국가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 협동농장의 통일 후 미래경쟁력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은 실질적인 개인영농제를 허용했다. 중국 개혁·개방의 단초였다.

북한은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전형적인 집단생산에서 2∼3 가족 중심의 개인생산 형태로 영농 단위구조를 변화시키는데 주력하고 있다. 이로 인해 ‘집단농의 형태를 띤 혼합개인농’ 이란 변형된 영농구조가 일부 지역에서 부분적으로 시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중앙정부 차원에서 사회주의 특성상 개인농 구조를 전국단위에서 선언하긴 어렵고 지방의 협동농장 차원에서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행위를 중앙에서 부분적으로 묵인하는 행위가 증가할 것이다. 김정은 체제에서 전국 협동농장들도 이러한 경향을 부분적으로 추종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다만 본격적인 개인영농제를 도입하는 것은 여전히 불투명하고 시범적 성격의 혼합농은 단순히 증산을 위한 잠정적인 개혁 조치로 이해된다. 노동당이 주도하는 농업개혁은 여전히 본질적 측면의 개인영농제(individual farming)를 도입하지 못하고 피상적이고 제한적인 증산 실험에 골몰하고 있다. 개인의 영농 의욕을 고취하는 각종 제도를 본격적으로 도입하지 못한다면 농업생산은 근본적으로 증가하기 어렵다.

매년 초 신년사에서 김정은은 농업문제 해결을 강조한다. 농업 부문에서 물 절약 농법을 비롯한 과학농법들을 적극 개발할 것, 영농물자를 원만히 보장하며, 생산조직 및 지도를 실정에 맞게 추진할 것, 알곡 생산목표를 초과 달성할 것, 전국의 축산·양어·버섯생산기지를 정상화할 것, 강원도 세포지구 축산기지 건설을 적극 추진할 것 등이 단골 강조 사항이다. 하지만 곡물생산의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농업생산량은 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미국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가 발표한 2015년 세계식량정책보고서에서 북한의 토지생산성은 2012년 1ha에 1450달러로 남한의 25%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했다. IFPRI는 보고서에서 식량문제를 겪는 지역들의 정책을 평가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쌀 생산성 증대, 곡물 유실 방지, 수자원 확보 등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결국 북한이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들이다.

1990년 이후 북한의 토지생산성은 지속적인 감소세에 있다. 연간 농민 1인당 노동생산성의 경우 1961년 남북한 모두 500달러 수준으로 비슷했지만, 2012년 북한은 남한(9063달러)의 7분의 1 수준에 불과한 1233달러를 기록했다. 특히 북한 농민 비율은 37% 이상이다. 북한이 빈곤국가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요약하면 북한 농업은 비농업적 요인인 일반경제와 연관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원유·원자재 생산 및 도입이 증가해 비료, 농약, 농기계 등 농자재의 정상적인 공급이 가능해지면 증산이 가능할 것이다. 농업 내부 요인에선 영농시스템 개편 및 농업기술 개선, 주체농법의 탄력적 적용, 작부체계 개선을 통한 효율성 제고, 농산물 가격체계를 바꿔 생산 인센티브를 실효적으로 보장하는 것 등이 중요하다.

다만 통일 이후 집단농의 문제점을 감안해 협동농장을 해체해 남한의 소농체제로 전환시키는 것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평균 500ha 넓이의 협동농장은 ‘규모의 경제’ 측면에서 바람직한 면적이다. 평균 3000평인 남한 소농 규모로는 국제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 통일 후 남한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예외로 검토해야 할 부분이 협동농장이 보유한 규모의 경제란 장점이다.

北 석탄 받느라 南 쌀값 올라갔다?




▎북한으로 가기 위해 쌀이 선적을 기다리고 있다. 북한 석탄 반입의 대가로 한국 쌀값이 오른다는 흉흉한 소문이 최근 나돌고 있다.

북한 식량난은 통일 이후 한국농업의 부담이 될 것이다. 우선 이들에게 긴급 식량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2015년 6월 한국식량안보재단이 발간한 ‘선진국의 조건: 식량자급 보고서’에서 북한 식량난에 대비해 통일미 120만t의 상시 비축을 제안했다. 통일을 고려한 남한 농정이 한반도 전체의 식량수급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매우 타당한 논의다. 농업부문의 성장률은 빈곤을 감소시키는데 있어 비농업부문의 성장률에 비해 2배 이상의 효과가 있다고 2008년 세계은행이 발표한 바 있다.

최근 들어 남한 쌀값이 80kg당 20만원선으로 급등하면서 확인되지 않은 뉴스가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까지 12만 원선이었던 쌀값이 1년 만에 거의 60% 이상 상승한 것은 시중에 쌀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이는 북한산 석탄을 싣고 온 선박에 엄청난 양의 쌀을 선적해 북한으로 보낸 결과란 것이 학교 주변에서 주로 학생·교직원을 대상으로 식당을 경영하는 주인 아주머니의 항변이었다. 필자는 과거 남한 정부가 매년 30만t의 쌀을 북한에 보내던 시절 직접 모니터링 차원에서 선적과 하역 현장을 방문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1만t의 쌀이 얼마나 많은 양인지 추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만t은 8t 대형트럭 1200대를 동원해야 수송이 가능하고 배에서 하역할 때 쌀이 산더미처럼 보였다. 따라서 정부가 대량의 쌀을 언론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북한행 선박에 선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정부가 농민들의 소득증대를 위해서 정부 보관 양곡을 시중에 방출시키지 않은 결과라고 얘기했으나 아주머니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최근 최저임금 인상 및 물가 상승으로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또한 정부가 지나치게 북한 친화적인 정책들을 추진하면서 확산된 여론이라고 해석했지만 마음은 개운치 않았다. 이처럼 쌀은 남과 북 모두에 예민하고, 생활필수품이기 때문에 생산과 소비 모두 정부가 세심하게 관리해야 할 품목임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깊어가는 가을밤, 남과 북 모두 먹는 문제를 해결해 한반도에서 굶는 사람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 남성욱 고려대 행정전문대학원장·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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