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6

알라딘: 진보의 재구성 - 어느 실천가의 반성과 전망



알라딘: 진보의 재구성 - 어느 실천가의 반성과 전망



[eBook] 진보의 재구성 - 어느 실천가의 반성과 전망

민경우 (지은이) | 시대의창 | 2013-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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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 사회과학 > 사회학 > 사회학 일반



지금 ‘진보의 위기’라는데 의문을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근거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하게는 사람들의 진보진영에 대한 기대가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대중의 신뢰와 지지를 생명으로 하는 것이 ‘운동권’인데 그것이 사라져간다는 것은 죽음을 선고받는 것이나 다름없다. 언제부턴가 대중은 운동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이제 진보는 진부한 게 돼버렸다. 왜 이렇게 됐을까?

저자는 그 이유를 진보진영이 1987년 6월항쟁에만 매달려 현실과 미래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운동이론, 사고방식, 활동방식 등 거의 대부분이 1980년대 386세대가 만들어놓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령 IT 산업과 공공, 교육, 보건 등 사회서비스 산업 종사자가 전통적 의미의 제조업 종사자보다 많으며 비정규직 비율이 정규직을 압도하는 지금도 민주노총은 여전히 현대자동차 등 대규모 제조업 현장의 정규직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어 대부분의 노동자들을 보호해주지 못하고 있다. 시대의 변화를 쫓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 책은 지난 활동에 대한 저자의 뼈아픈 반성과 함께 ‘진보의 재구성’을 이야기한다. 그동안 ‘미국에 대한 종속성’‘식민지반자본주의론’ 등 주류 운동권(주로 NL계)에서 절대로 건드릴 수 없는 대명제처럼 되어 있던 개념들을 아직까지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데에 대해서 비판한다.





1장 왜 문제를 제기하는가
통일운동을 둘러싼 한계
2007년 대선 그리고 청계천 촛불
2008년 경제위기와 미네르바 열풍

2장 한국사회의 종속성을 둘러싼 문제
달라진 한미관계
20년간의 통일운동
경제적 종속성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한국사회를 질적으로 바꾼 IMF
일국적 관점으로는 세상이 바로 보이지 않는다

3장 자본주의의 고도화가 가져오는 문제
봉건 잔재를 둘러싼 논쟁
민간 대자본의 성장과 보수엘리트 체제
과거에만 얽매인 학생운동
시대의 과제가 너무 버거운 농민운동
고도 자본주의에 포섭되거나 배재되는 노동자

4장 전통적인 계급적 시야의 한계
민족과 국가 그리고 집단과 개인
새로운 주체로 등장한 소수자문제
전통적 관점으로는 보이지 않는 자영업자와 중소기업

5장 새로운 이론의 구상이 필요하다
종속성의 재구성
새로운 파워의 진원지는 어디인가
대중운동의 혁신

보론 - 한국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2008년 촛불시위의 역사적 맥락
향후 예견되는 정치적 변수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및 북핵정세와 우리의 과제







지은이 : 민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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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새로운 보수의 아이콘>,<대한민국은 안철수에게 무엇을 바라는가>,<한국경제와 진보운동> … 총 9종 (모두보기)
소개 :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3년 서울대학교 의예과에 합격한 후 중퇴하고, 1984년 국사학과에 재입학했다.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학생운동에 합류하여 1987년 인문대 학생회장으로 6월 항쟁에 참여했다. 1995~2005년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을 지냈다. 2005년 이후 NL 노선에 거리를 두며 새로운 사회운동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책을 썼고 세대별 노동조합인 ‘청년유니온’과 간접적인 관계를 맺었다. 이 과정에서 ‘안철수 현상‘을 지지했고 이와 관련된 책, <대한민국은 안철수...





지금 ‘진보의 위기’라는데 의문을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근거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하게는 사람들의 진보진영에 대한 기대가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대중의 신뢰와 지지를 생명으로 하는 것이 ‘운동권’인데 그것이 사라져간다는 것은 죽음을 선고받는 것이나 다름없다. 언제부턴가 대중은 운동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이제 진보는 진부한 게 돼버렸다. 왜 이렇게 됐을까?
저자는 그 이유를 진보진영이 1987년 6월항쟁에만 매달려 현실과 미래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운동이론, 사고방식, 활동방식 등 거의 대부분이 1980년대 386세대가 만들어놓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령 IT 산업과 공공, 교육, 보건 등 사회서비스 산업 종사자가 전통적 의미의 제조업 종사자보다 많으며 비정규직 비율이 정규직을 압도하는 지금도 민주노총은 여전히 현대자동차 등 대규모 제조업 현장의 정규직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어 대부분의 노동자들을 보호해주지 못하고 있다. 시대의 변화를 쫓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저자는 대학생 시절 이른바 ‘운동’을 시작했던 386세대이고, 2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운동권’이다. 우리 사회 진보진영에서 주류를 차지한다는 NL계(자주파 또는 자주계열)의 핵심 활동가이면서 폭넓게 활동했기 때문에 운동권, 적어도 NL계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켜볼 수 있었다. 언제부턴가 무언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저자는 그 정체를 2007년 대선에서의 진보진영의 패배와 2008년 촛불에서의 충격, 그리고 미국발 경제위기에 대한 진보진영의 철저한 무능력에서 뼈아프게 확인했다.
이 책은 지난 활동에 대한 저자의 뼈아픈 반성과 함께 ‘진보의 재구성’을 이야기한다. 그동안 ‘미국에 대한 종속성’‘식민지반자본주의론’ 등 주류 운동권(주로 NL계)에서 절대로 건드릴 수 없는 대명제처럼 되어 있던 개념들을 아직까지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데에 대해서 비판한다. 세계는 미국 일극지배체제에서 다극화체제로 변화하고 있으며 정치군사적인 하드파워보다 경제, 기술, 정보화 등 소프트파워가 지배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한국을 단순히 ‘미국의 식민지’라고 평가하기에도 세상이 달라졌다. 보수엘리트층과 대기업들이 충분히 성장해 있고, 국민들의 의식도 달라졌다. 이렇게 달라진 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상황에 1980년대식 사고방식과 활동방식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가.

저자는 우리의 인터넷 문화, 광장문화를 대안이라고 말한다. 우리 국민의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민주주의적인 역동성과 창의성에 적극적으로 공감해야 한다. 진보의 주요 동력을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들이라고 도식화하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다. 이제 수도권에 집중된 20~30대 청년들과 고학력 386세대가 진보진영의 주력이 될 수 있으며 여기에 예전에는 등한시됐던 자영업자와 중소기업 자본가 등도 포함된다. 의제도 달라져야 한다. 예전처럼 민주화, 저임금, 저곡가 등이 아니다. 이제는 고용, 교육, 의료 등으로 의제를 확장해야 한다. 그리고 그 활동의 장은 온라인과 오프라인과의 적절한 배합이다.
물론 이 내용들은 저자가 적극적으로 원하듯 소통과 논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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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중-도시서민속으로 연대연합으로 새판을 짜야 할 때다(가시장미님 생일선물)
무해한모리군 2009-08-10



대표적인 민족민주진영의 활동가중 한사람인 민경우씨가 많은 민족민주진영 활동가들에게 그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토론해보자고 손을 내밀었다.

저자는 현재 민족민주운동진영내의 이론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점을 지적하고, 전통적인 제조업 중심의 제국주의하의 식민지반자본주의 논리는 금융자본의 시대, 서비스업 중심, 국내 대기업의 출현, 친미적 엘리트의 성장 등을 근거로 들며 수정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운동은 과학이여야 한다. 과학이란 어제까지는 이를 아래위로 닦는게 좋다더니 또 요즘은 옆으로 닦는게 좋다는 식으로 수시로 변하는 법니다. 우리가 운동을 하는 이유는 민중이 주인되는, 인간다운 삶을 꿈꾸기 때문이지 이런저런 이론을 실행해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운동은 대중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지, 활동가가 대신 해주는 어떤 것이 아니다. 몸대주기식 사업 작품에서 벗어나, 열심히 학습하고, 대중의 감성에 맞게 그것을 풀 줄 알아야 한다. 언제까지 대학에서 어쩌다 만난 선배한테 배운 걸 우려먹으며 지내려고 하는가. 이제 맑은 물 밖에 거기서 더 나올 것이 없다.


다른 나라, 다른 시대의 이론을 차용할 때는 한국 사회와의 관련 속에서 주체적인 관점을 가지고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사회를 보면 주류는 너무 친미적이고 비주류 지식인 중 다수는 너무 유럽적이다.(p66)



참 나도 귀 얇은 인간이지만 이 말은 사실인거 같다. 공부를 하되 외우지 말고 더불어 생각도 하고, 그렇게 믿어마지않는 대중과 이야기도 나누어 보아야 한다. 내 옆의 한사람을 설득할 자신이 없는 설익은 이야기로 이리저리 나뉘고 싸울일이 아니다.

반미라는 일국적 관점에서 다자간의 국제 관계를 기초로 한 분석

주류 운동진영이 실천에서는 주도적이고 적극적이면서도 대도시 생활인의 인식을 바꾸어낼 수 없었던 점은 현실을 양국관계로 국한하는 관점의 협소함 때문이다.(p85)

언제까지 식민지반자본주의만 붙잡고 있을텐가?

이론과 이론이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과학과 종교가 토론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적지 않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p93)

학생운동을 중시한 점, 노농동맹에 기초한 통일전선, 정치군사적인 차원의 자주통일 운동 중시, 학습과 대중운동 중시, 지사적인 풍모와 금욕적인 생활태도의 강조 등은 모두 식민지 반자본주의론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하위 범주다. 문제는 자본주의가 고도화한 조건에서 이론을 그에 맞게 수정하거나 해당시기에 맞게 탄력적으로 조정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한 점이다. 그로 인해 시대에 부합하지 않는 억지스러운 실천이 거듭되어 대중의 공감과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이로 인해 김대중-노무현 집권 10년간 운동진영은 정체와 퇴보를 거듭하게 된다. 다음에서는 이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p96)

민족은 과연 폐기해야 할 낡은 패러다임인가

농민과 학생이 주력군이라고?

1987~97년 민주주의의 확장과 내수 팽창으로 이 시기 대학을 졸업한 청년세대는 좋은 직장과 안정적인 보수를 누릴 수 있었지만 1998년 IMF 이후에는 그러한 가능성이 빠르게 닫히고 있었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자면 1987년 6월 항쟁에서 승리하여 민주주의와 좋은 직장을 얻은 386세대가 민주주의를 보다 심화시켜 고용문제를 해결하자고 아랫세대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하는 게 올바른 방향이다. 즉 학생에서 시민이 아니라 386세대에서 학생으로가 올바른 연대의 방향인 것이다. 그런데 왜 특별한 지적자원도 가지고 있지 않고, 사회적 경험도 별반 없는 대학생들이 정작 자신과 동료들의 처지는 돌아보지 않고 한사코 거리로 나오려고 했을까? 이는 자신들이 '선봉대'라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p109~110)

숫자의 많고 적음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시대와의 호흡이다. 시대에 맞지 않는 집단은 도태되게 마련이다. 2008년의 촛불세대가 20년 전 386세대와 명확히 다른 것은 의제의 중심이 고용과 등록금과 같은 경제적 문제라는 점, 개인주의와 집단적 활력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 질서정연한 일방향의 조직문화가 아니라 수평적이고 쌍방향의 문화를 갖고 있는 점 등이다.

(중략)

등록금 투쟁 등 학내투쟁도 하고 촛불집회 등 사회 참여도 하는 비운동권 총학생회와 기존 운동권의 유일한 차이는 '족보'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고, 비운동권 총학생회도 '이제 매년 자신들을 계승하는 총학생회 후보를 당선시켜 노선을 계속 유지한다'고 쓰고 있다.

(p114)

동시대의 과제는 이를 체현한 집단에 의해 제기되고 그들 자신의 각고의 노력과 투쟁에 의해 해결되는 것이다. 실업과 등록금으로 고통받는 이 땅의 20대 또한 마땅히 그 길을 걸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시대적 과제를 정면에서 받아 안고 이를 돌파하고자 하는 포부와 통찰력이다. 이것이 있다면 적어도 사는 것이고 족보나 들이대며 숫자를 과시하는 집단은 버림받을 것이다.(p115)

1년 넘게 줄기차게 진행되었던 농민들의 싸움은 여론을 흔들지 못한 반면 도시민의 시위는 이명박 집권 초기 정권기반을 뒤흔들 정도로 위력적이었다.(p117)

대도시 여론이 한미 FTA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농민들의 저항에 연민(?) 이상의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P118)

도시민에게 농의 중요성을 그들의 이해와 정서에 맞게 해설하지 못했다.

이제 도시 중소상인(도시빈민)에게 관심을 가질때다.

어제의 농민이 오늘의 자영업이라는 지적은 대단히 타당한 분석이다.(p122)

정규직 노동자들이 잘못한 것은 없다. 노동조합의 기본 임무는 고용과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의 기본 임무는 고용과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귀족 운운하며 정규직 노동자, 민주노총의 역할을 폄하하는 것은 정권과 대자본의 모략공세일 뿐이다. 그러나 해당 집단의 사회역사적 평가는 자신의 요구에 충실했느냐 여부와 함께 시대적 역할에 복무했는가에 의해서도 규정되는 것이다.

19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이 노동조합 건설과 근로조건 개선을 통해 민주주의를 심화하고 저임금구조를 혁파하는 역할을 했다면 1995년 이후의 정규직 노동조합은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중서민 대중에 대한 분할지배 전략에 무력했다. (p128)

이명박 정부에서 이 땅의 노동운동은 두 가지 차원에서 심각한 지점에 섰다. 하나는 이명박 정부의 강도높은 탄압이고 다른 하나는 금융위기 이후 본격화될 경기침체와 구조조정이다.(p133)

경제파국이 코앞이다. 2010 선거 전략은 어떻게 가져가야 하나?

상당히 발전된 보수엘리트 세력이라면 의회를 무대로 하여 전문가, 특권집단 내에서 벌어지는 제한적인 수준의 민주주의는 권력을 안정적으로 재편하는데 큰 문제가 없다. 박세일 등 보수세력의 이데올로그들이 자유주의, 법치, 엘리트정치, 대의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략)

촛불은 선거와 무관한 1970~80년대식의 전민항쟁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아무 때라도 국민의 의사에 다라 보수 엘리트 집단을 국민의 의사에 복종시킬 수 있는 제도화된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한 것이다.(p164)

한국에서는 수도권에 고도로 집중된 고학력 청년층이 첨단 자본주의 사회에 도전하는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될 것이다. 따라서 대도시 빈민층을 중시하되 청년세대, 고학력 386세대를 중심에 두고 사고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p176)

운동진영은 세 가지 점에서 중대한 한계에 봉착했다. 첫째는 조직역량과 대중적 동력 사이의 괴리, 둘째는 대중적 동력과 정치적 권위 사이의 괴리, 셋째 급변하는 정세와 전통적인 인식구조 사이의 괴리이다.(p180)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대중의 자발성이 극대화된 조건에서는 정보와 의사결정의 상당 부분을 해당 단위 또는 대중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중층화된 의사결정기구를 간소화해야 한다.(p183)

이를 위해서 주류 운동진영은 과도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낮추고 고용, 교육, 주거 등 대도시 중서민 대중의 이해를 전면적으로 옹호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주정해야 한다.(중략)

또 주류 운동진영 외에 여타 진영은 한국사회에서 통일과 민족문제, 중소기업과 자영업 등이 갖고 있는 중요성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유럽에서 들여온 관념과 이론이 아니라 2008년 격동하는 투쟁의 현장에서 이 땅의 젊은이들이 보여준 집단적 열정에 호흡을 맞춰야 하며, 노자관계라는 도식을 넘어 고통 받는 중소기업과 자영업에 응당한 시선을 돌려야 한다.(p187)

셋째, 신자유주의 양극화에 아래쪽에 속하는 비정규직, 자영업, 농민, 20대 대학생들의 저항은 대부분 소수화되거나 고립되었다.(p192)

넷째 절박한 생활위협에 직면한 서민대중의 목소리와 참여가 적었다.(p194, 촛불의 특징)

대중적이면서 간명한 기치를 내걸고 국민대중과 호흡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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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재구성
비밀의정원 2009-09-09




진보의 재구성 - 민경우


mb정권은 집권한지 1년도 안되어, 그들이 행한 굴욕적인 쇠고기 협상에 분노한 시민들의 촛불항쟁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국민들과 소통하라는 비판을 호되게 받았다. 물론 지금도 mb정부는 소통하고 거리가 먼 정부다. ‘소통’은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람과 설왕설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의 적극적 설득과 타협의 과정이다. 소통, 과연 그들만이 문제인가?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에게 어쩌면 소통의 문제는 더 절실하다. 세상을 바꾸는 명분과 헌신적 삶이 그 것을 모두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어느 실천가의 반성과 전망에서 나는 첫 번째로 운동진영의 소통의 문제를 읽었다.






무엇이 진보인지 시대와 세상을 보는 눈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진보는 한마디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의 변화와 발전이다. 저자 민경우는 그 동안 주류운동진영에서 바라본 정세인식의 오류, 그리고 핵심적인 한국사회성격규정에 따른 실천적 오류로 인해 우리는 지난 10년의 열린, 확대된 정치사회지형에서 운동진영의 몰락을 가져왔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천착하지 못한, 제대로 꿰뚫지 못한 경제<?>의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연구하지 못하는 게으름과 대안부재에 대한 운동진영의 겸허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386으로 전 국민의 민주주의 항쟁에서 싸우고, 그리고 자신의 젊음을 바쳐 헌신한 통일운동에 대한 자기반성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 처절한 자기반성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한 이 책을 나는 경제심화학습과 그에 따른 제대로 된 한국사회성격규정이라 읽지 않았다. 본질적인 것은 ‘낡은 것과의 투쟁’에 우리가 자신부터 그 기준에 나침반처럼 긴장감 있게 서 있는냐 는 것이다. 그 낡은 것과의 투쟁에서 난 저자 민경우가 한 모든 이야기가 재고할 가치가 많은 부분 존재한다고 본다.






작년 우리는 대중지성에 의한 ‘희망’을 경험하였다. 그 경험에서 우리가 얻은 교훈은 우리의 경험적 운동이 성과든 실패든 다시 선험적 판단으로 작용하여 자신부터의 새로운 변화의 패러다임과, 방식을 수용하지 않는 것의 경계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많은 내용들의 처절한 자기반성적내용과 젊음 바쳐 일해 왔던 자신의 운동에 관한 상당한 실패를 말하는 용기와 식견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하지만 변화하지 못하는 주류운동진영의 모습중 도덕성과 헌신, 그리고 대중노선에 대한 창조적 발전방안에 대한 의견이 조금은 아쉽다. 세상의 모든 혁명과 개혁은 대중노선, 대중노선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도덕성과 헌신을 기본으로 하지 않았나






두 전직대통령이 서거했다. 우리가 열려진 공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난 10년간이었다. 우리는 다시 진보를 논하게 되었다.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 그리고 말하려고 하는 진보, 그것이 한 순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의 진보에 대한 논쟁은 다시 출발점에 섰다.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우리는 다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며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나의 경험이 만들어 선험적 판단기준으로 변해버린 자신에 대한 ‘의심’의 시작을 할 수 있어야한다.



여전히 우리 맘속에 ‘성역’과 ‘금기’로 경계 지워진 부분에 대한 처절한 자기성찰적 칼질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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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절름발이.. 미스터 '진보'
내꺼 2009-10-26







진보란 무엇인가.
아니, 대한민국의 진보란 무엇인가.
나는 대한민국의 진보는 곧 태생의 비극이라고 말하고 싶다.

일찍이 친미주의, 아니 숭미주의와 반공주의는 한국에서 '종교'였다.
해방 후 미군정은 공산주의에 대한 히스테리로 인해,
또한 인민들의 '동질화'를 위해 '반공'을 국교로 채택했고,
이는 한국에서 그 어떤 신앙보다도 더 절실하고 절대적인 종교가 되었다.
반공이 아니면 살아남지 못했고 친미는 자신의 개인적 소신 및 성향이 아닌
곧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미군정 3년 동안 그 어떤 국정 철학도 없이 끌려다녔던 남한은
지독한 숭미주의자인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미국조차 놀랄 정도로 '빨갱이 때려잡기'에 혈안이 되어
미국 숭배를 몸소 실현하는 '반공의 교육장'이 되었다.
빨갱이는 반역이다. 한국전쟁 후 '평화통일'을 부르짖는 것 역시 반역이 되었다.
우리에게 통일이란 없으며, 만에 하나 그 가능성이
단 1%라도 열려있다면 그것은 평화통일이 아닌 '북진통일'이었다.

태초부터 피를 철철 흘리며 우리 앞에 다가온 대한민국 이 땅에서
진보란 결국 민족주의로 귀결되었다. 진보는 곧 빨갱이로 귀결되었다.
이땅에서 보수란 곧 친미주의로 귀결되었다. 극우는 곧 친일파와 동의어였다.
'민족평화'를 이야기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이 땅에서 진보는 심장을 내놓고 살아야 했다.

그리고 이는 '병영국가'를 꿈꾸며, 걸핏하면 '목숨을 걸고' 운운하던
위대하신 가카 덕택에 수십 년 간 이 같은 '국가 고유의 개념'이
이어져 올 수 있었고, 유신의 칼날 아래에서 진보는 '범죄'가 되었다.

그들은 대한민국 역사상 단 한 번 성공한다.
이 서슬 퍼런 땅에서 단 한 번 주류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잠시나마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87년 6월의 기억은 그래서 '거룩하다'.

돌이켜보건대 대한민국 역사에서 '진보'가
사회의 전면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그때가 유일했다.
87년 이후 이뤄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다시 한 번
진보 세력이 수면 위로 올라와 전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모두가 진보를 가장한, 혹은 진보를 이용한 극우, 보수 세력이었을 뿐이다.

이 책은 제목부터가 [진보의 재구성]이다.
제목이 너무 지겹고 고리타분하다.
진보는 언제나 재구성된다. 그것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들의 문제는 너무 '똑똑해서' 탈이다.
극우세력들처럼 한 곳으로 모아지는 '뚜렷한' 선이 없다는 것이다.









보수세력은 '동질화'를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세력은 하나의 주제로 재빠르게 결집되며
그들이 정권을 잡고 정권의 주체가 극우세력으로 '진화'하면
전 인민의 동일화, 즉 전체주의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때 인민들은 '다양성의 표출'과 그에 따른 '갈등의 심화'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요소를 '전체'와 '국가'라는 이름 아래 억압당한다.
대신 민중들이 보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잘하고 있다.
당신네들이 굳이 신경 안 써도 된다."
라고 외치는 집권 세력의 이벤트성 포퓰리즘이다.

반면 진보는 다양성을 존중한다. 소수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진보가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요소'이기 때문이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 보수 세력이 위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꼭 '민주주의를 유린해야 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민주주의를 표면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지만 보수의 철학 속에는
민주주의의 기본 방향과 엇갈리는 부분이 상당히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그들은 세력의 결집부터가 어렵다. 서로서로 한 마디 씩의 말들을
그들은 보수처럼 '동질화'라는 이름으로 통일할 수가 없다.
애초에 그럴 수 없는 가치 체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커다란 바운더리 내에서 끝없는 가지치기를 한다.
이들이 뭉칠 수 있는 것은 진보 세력의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커다란 목표'가 있을 때이다.

그것이 우리나라에는 87년의 '민주화' 였다.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진보라는 세력이 한 번 집결하면 충분히 나라를 흔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일시적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목표의 달성' 이후에 이어지는 여러 의견들을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만족감을 줄만한 방법으로 조화를 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의 재구성]이란 제목은 진부하다.
87년 체제 이후 우리나라의 진보 세력이
한번이라도 '재구성'을 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문제는 '재구성'이 아니라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닐까?

작가 소개를 살펴보았다.
87년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으로 6월 항쟁의 중심이었고
졸업 후 구로, 영등포, 관악 등지에서 청년운동과 노동운동에 몸담았다.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 통일 연대 사무처장,
한미 FTA 저지 국민대책위원회 정책팀장 등 경력이 화려하다.
이정도면 기회주의가 판치는 한국에서 보기 드문 전형적인 좌파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더욱 신뢰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좌파의 입장에서 보는 자신들의 성찰이야 뻔할 것 아닌가.
지금껏 진보진영의 자기성찰이 없었던 까닭에
이나라 진보가 이렇게 맥을 못 추는 것이 아니다.

궁시렁궁시렁.. 이런 삐딱한 시각으로 책을 접했다.
진보에 대한 환멸과 회의감이 어제 오늘 일도 아닐진데
단순히 '장삿속'으로 책 제목에 '진보'란 단어를 떡하니 넣어놓고
(나같은) 어중이 떠중이나 현혹하는 그저그런 책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면서도
(나처럼)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책을 집어들고 나서
'또 상술에 낚였구나' 하고 후회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보기 전부터 내 시각은 삐딱했다.
이것은 책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진보를 향해 느끼는 '냉소주의'에 가깝다.





책의 처음은 역시나 촛불로 시작한다.
촛불은 내가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사회 광범위한 분야에 영향을 끼친 것인가 보다.
역사가 알아서 판단해 주겠지만 촛불은 참 대단한 것이면서도 편한 것이다.
은근슬쩍 촛불을 핑계삼아 자신들의 '반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이지 않은가.

촛불은 이제 일종의 '면죄부'이다.
진보는 자신들의 잘못과 성찰을 촛불에 대입한다.
"나는 진정 6월의 촛불에 감동받았다" 라고 시작하는
진보세력의 참회는 촛불세대를 하늘로 두둥실 띄워주는 역할을 해서
그들에게 일종의 심리적 만족감을 주면서 '위'에서 '아래',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는 시각으로 지금껏 진보가 했던 수많은 한심한 짓들을
'현자'의 눈으로 너그럽게 용서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것뿐인가.
동시에 진보는 촛불세대에게 '적'을 규정하면서 그들의 결속력을 한층 강화시킨다.
진보세력과 촛불세대들의 표면적인 적은 MB정부이겠지만
진보가 내세우는 실질적인 적은 그들이 아니다. 그것은 20대이다.

촛불시위의 촉발은 비록 10대의 고사리같은 손이었지만
(그것이 단 두 달에 불과하다 하더라도)지속될 수 있기까지는
20대, 30대 그리고 일부 40~50대의 참여가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진보는 지금의 10대를 '촛불세대'로 규정해놓고
취업에 눈이 먼 20대와 니들은 다르다며 일종의 우월감을 부여한다.

여기서 20대는 실로 한심한 존재로 부각된다.
취업에 쩔쩔 매는 찌질이들이 자신의 동생들이 촛불을 들고 나오니까
뭔지도 모르고 어쩔 수 없이 끌려 나간
한심한 찐따가 되는 것이 진보가 바라보는 촛불정국의 20대다.

촛불을 빗대며 자신들을 반성함과 동시에
촛불세대를 신격화하고 (최장집의 말처럼)촛불은 '촛불주의'가 된다.
자신들의 참회에 대한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은 세대 간 적을 규정한다.
촛불정국의 20대. 진보가 생각하는 그들의 역할이란 촛불세대들에게 심리적 우월감을
부여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그간 잘못을 희석화시켜주는 편리한 도구이다.
(쟤네들이 의욕감도 없고 능력도 없는 세대들인데 그게 꼭 우리만의 잘못이야? 라는 따위)


그래도 이 책에서의 촛불에 대한 부분은 최소한 특정 세대를 거들먹거리며
눈물 질질 짜는듯한 역겨운 태도를 보이지는 않는다.
"5~6월의 촛불대오는 소통과 네트워크로 무장한 수평적 민주주의로 단련되어 있었다.
이들은 토론과 논쟁을 즐겼으며 가는 곳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계관을 표현했다.
이는 지도와, 대중, 민주집중제를 주장하며
일사분란한 단결을 강조했던 운동진영의 조직문화와 다른 것이었다."
작가의 경력도 그렇거니와 이 정도면 허무맹랑한
헛소리를 할 것 같지는 않았기에 책장을 계속 넘기기로 한다.

이 책은 진보의 반성과 앞으로의 전망을 위해
민주화 전후의 역사적 사건을 살펴보는 방식을 취한다.
6월 항쟁의 근본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86년 10월의 '건국대 사건'이나
한국 학생운동사 최악의 비극이 되어버린 1996년 '연세대 사건',
2001년 '강정구 교수 사건' 등이 그것이다.

한총련과 학생운동에 대해 그는 "한국의 학생운동이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1984~87년 학생운동의 활성기와 1987년 6월 항쟁의 승리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위장된 민선정부 아래에서 반 독재투쟁은 여전히
대중적 공감대를 갖고 있었기에 전대협과 한총련은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같은 사실은 '연대사건'이 왜 민중과
철저하게 고립될 수 밖에 없었는지 말해준다고 한다.
"1990년대 초중반, 학생들의 통일운동의 진정한 동력은 통일에 대한 열정 그 자체에
있었다기 보다는 1987년 6월에 기초한 강력한 반 독재투쟁이 있었다.
반 독재투쟁이라는 동력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다소 생경한 통일 구호도
용인되는 구조였던 것이다. 1996년 연대 사건의 학생들이 철저히
고립된 것은 반 독재투쟁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다. 학생운동이 연대사건 이후로 몰락해버린 것은 '현실과의 괴리감'에 있었다.
'연대사건'이 그 자체가 학생 운동 몰락의 근본적 계기가 된 것이 아니라
언젠가 무너져버릴 것 같은 허약한 모래성에 물결이 살짝 친 것 뿐이었다.
민주화 이후 학생운동은 그 목적을 잃어버렸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 학생운동의 근본적 동력은 '민주화'였기 때문이다.
민경우의 말처럼 모든 이들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던 '민주화'라는 대승적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다소 생경하고 과격하기까지 한 강경한 통일구호도 용인이 되었던 것이다.

반공이 이승만과 박정희의 종교적 믿음이었다면
그 시절 학생들에게 있어서 종교적 믿음이 되었던 것은 '민주주의'였다.
그만큼 절대적이었으리라.

학생운동은 민주화'이후 목적과 당위성을 잃어버렸다.
목적은 충분히 존재할 수 있었다.
계급간 불평등의 해소라던지 더 나은 복지정책의 추구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제 갓 민주주의에 돌입한 사회에서 그같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목표는
비록 이론상으론 존재했을지언정 그들을 '민주주의'라는 종교와 같이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로 움직이게 하기에는 동력 추진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87년 이후 근 10년 간 학생운동이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아직까지도 완전한 '민주화'가 되지 않았던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다.
신군부의 잔재는 노태우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이어졌고
전교조의 결성과 분신정국 속에서 그들은 또 다른 세상을 꿈꾸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처럼 추상적인 '반독재' 투쟁에
의존하고 있었던 그들의 자멸은 예견되어 있던 것이다.

그래서 민경우가 말하는 해결책은 무엇인가?
해결책의 제시에 앞서 그는 최소한 '책임회피'는 하지 않는다.
진보진영의 무너짐과 무능력함을 신자유주의라는
시대의 조류 탓을 하는 편하고 당연한 방법을 선택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설령 그것이 맞다고 하더라도, 아니 분명히 그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겠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한심하게 시대 탓이나 하면서 나약한 소리나 하는 것이
언제부터 '진보'란 이름으로 불리워졌단 말인가)

"2008년 주류 운동진영은 세 가지 점에서 중대한 한계에 봉착했다.
첫째는 조직 역량과 대중적 동력 사이의 괴리, 둘째는 대중적 동력과
정치적 권위 사이의 괴리, 셋째는 급변하는 정세와 전통적인 인식 구조 사이의 괴리다.
87년 6월의 승리는 86년 건대 사건과 같은 좌경맹동주의를 청산하고
참다운 대중 노선의 길을 개척하는 과정 속에서 가능했다"

핵심은 언제나 원론적일 수 밖에 없다. 민경우의 해결책 역시 원론적이다. 그는
"진보진영의 핵심적인 과제는 정책과 노선, 문화와 감수성에서 2008년 촛불,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된 대중의 분출 등 국민 대중,
특히 수도권의 청장년층과 호흡을 같이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지금 현재 우리 사회에서 민중들과 진보 세력 사이에는
너무나도 큰 거리가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 어떤 세력들보다 더욱 더 민중들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는 가치체계를 추구하는 진보가
이토록 현실과의 괴리감이 느껴진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2010~12년 진보진영의 최소 목표는 '현대적, 대중적, 진보적이며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진보정당을 만드는 것이고
최대 목표는 민주당의 '좌파'와 함께 연립정권을 세우는 것이다"

한국 정치판 특유의 보수(민주당)와 극우(한나라당)의 싸움터 속에서
보수 속 '좌파'와 진보세력이 연립정권을 세운다는 것은 매우 현실성이 없는 소리이다.
어디까지나 최대목표이겠지만. 또한 진보정당의 새로운 창당이 국민들에게
'프레시함'으로 다가올 지는 미지수이다.

그동안 그 얼마나 많은 정당들이 창당되고 공중분해되었는가.
또 '신선함'을 위시해서 얼마나 많은 진보를 표방한 정당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는가. 개인적으로 창당보다는 현재의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개선과 발전이 일차적인 과제라고 생각하지만
그 어느 방향이 정확한 답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품고 있는 반 정부 성향은 결코 '진보의 지지'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진보를 추구해서 현 정부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이 불가능하고 기본적인 의식주에 대한 개선이라는 측면에서
전혀 정책적으로 반영하지 않는 행태에 불만인 것이다.
지금처럼 진보 진영에게 유리한 시대는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다음 대선까지 진보가 확실하게 민심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진보가 주류를 차지하기까지는 십수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MB정권의 뼈아픈 실책을 경험했던 보수 진영에서 이 위기의 시기가 지나면
포퓰리즘조차 조소의 극치가 되는 MB처럼
멍청한 인간을 내세우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의 현재 행태는 실망적이기 그지 없다.
그럼에도 나는 한국 사회의 밝은 미래는 진보진영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끝까지 나는 진보 진영을 비판할 것이다.
진보 진영의 생명력은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는 아부와 고립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 없는 자기 비판과 혹독한 말들 속에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가는 '현재진행형 생동감'이기 때문이다.

이 한 권의 책은 그런 면에서 '진보의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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