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01

알라딘: 베트남 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알라딘: 베트남 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베트남 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지은이)한겨레출판2015-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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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미국은 왜 베트남전쟁에 개입했을까? 그리고 자신의 안보도 지키지 못하고 있었던 한국은 왜 베트남으로 전투부대를 보냈을까? 미국의 적극적 개입에 의해 시작된 베트남전쟁에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을 거부했음에도, 왜 한국 정부는 파병을 결정했을까? 우리에게 기억되는 베트남전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2005년 <한국전쟁>으로 주목받았던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가 베트남전쟁을 일괄하는 신간을 내놓았다. 국내외 관련 도서와 논문은 물론 외교문서까지 방대한 자료를 분석하고 10여 년간의 조사 끝에 이 책을 내놓았다.




1964년 한국이 베트남전쟁에 처음으로 파병한 이래 1973년 3월 철수할 때까지 32만이 넘는 한국군이 베트남으로 갔다. 그들 가운데 5천 여 명은 전사했으며, 1만 명 이상은 전후에 고엽제로 고통 받았다. 그리고 죄 없는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죽었다.




베트남전쟁 파병은 최초이자 최대의 해외 파병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했고, 한국의 경제 성장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전쟁 특수에 가려 파병 전사들과 민간인 학살 문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20세기 또 하나의 전쟁, 베트남전쟁이 한국과 세계에 남긴 발자국을 살펴본다.

목차


여는 글 _파병 50돌, 전쟁의 의미를 묻다

1부 그들은 왜 베트남으로 갔는가
· 자유세계를 지키기 위한 선택? |파병의 진짜 이유
· 한반도에서 벌어진 또 하나의 전쟁 |북한의 도발
· 파병군은 박정희에게 ‘알라딘의 램프’였나 |한국과 미국의 동상이몽
· 이데올로기에 대한 집착 |미국이 늪에 빠진 이유
· 토끼가 죽기를 기다리기만 한 미국 |중국 개입의 트라우마

2부 베트남 그리고 베트남전쟁
· 도미노 이론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북베트남과 중국의 갈등
· 이데올로기는 눈을 가렸다 |남베트남 대통령의 최후
· 그들은 왜 베트콩이 됐는가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분열
· 죽은 자와 죽인 자의 이야기 |민간인 학살
· 그것은 미친 살인의 축제였다 |1968년 밀라이 학살

3부 병사들의 기록
· 지옥의 정글에서 우리를 구출해다오 |군의 붕괴
· 노동 계층의 전쟁 |참전 미군들은 누구인가
· 한국군은 개·돼지인가 |미군이 한국군을 대하는 방식
· “잘 싸우지만 지나치게 잔인하다” |초기 한국군의 명암
· “돈과 백 있는 사람들은 다 빠졌다” |누가 베트남에 갔는가

4부 미국은 베트남에서 어떻게 패배했는가
· 북베트남의 어뢰 공격은 없었다 |통킹만 사건의 진실
· 베트콩을 격퇴하고도 패닉에 빠지다 |구정공세와 반전 운동
·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닉슨 철군 정책의 이면
· 평화를 위한 폭격? |한국전쟁의 빗나간 교훈
· 새로운 시대의 디딤돌 |미국의 반전 운동

5부 한강의 기적과 감춰진 진실
·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전 국민적 동원
· 쏟아지는 외화와 신흥 재벌기업 |전쟁 특수
· 죽음의 전선에서 번 돈은 어디로 |파월 군인과 노동자에 대한 보상
· 미국, 박정희의 뒤통수를 치다 |닉슨 독트린

6부 미군 철수 이후의 세계
· 미군이 없어도 남는다? |1972년 한국의 베트남전쟁
· 돈이 장병들의 목숨보다 중요했나 |정부의 미련과 안케패스 전투
· 암흑을 향해 가는 아시아의 민주주의 |닉슨 독트린이 부른 위기
· ‘제2의 한국전쟁’ 풍문의 진위 |남베트남 패망과 한반도

7부 기억되는 것과 기억되지 않는 것
· 1970년대를 말하다 |전쟁 특수, 땅 투기, 통기타
· 베트남 파병 장병이 평양에 나타나다 |포로와 실종자
· 지킬 가치가 있는 정부인가 |남베트남 패망의 교훈
· 그리하여, 다시 이라크로 |반쪽의 기억

닫는 글 _끝나지 않은 베트남전쟁

참고문헌
연표
지도


접기




책속에서





첫문장


몇 해 전 중동에서 온 전문가들 앞에서 한국의 경제 성장에 대해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다.










P. 40 처음 미국이 한국군의 파병을 요청했을 때 한국 정부의 결정은 한·미 동맹에 대한 고려와 주한미군 감축 또는 베트남으로의 이동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 정부는 또 다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미국이 더 많은 한국군을 시급하게 원하고 있는 만큼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1966년 초 브라운 각서는 그 대표적인 예였다. 브라운 각서는 한국 전투부대 파병의 대가로 미국이 한국에 대한 군사 원조뿐만 아니라 경제 원조를 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 쪽에서는 브라운 각서를 한국 정부에 대한 마지막 보상으로 생각했던 반면, 한국은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신호로 생각했다. 접기


P. 84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베트남전쟁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철수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첫째, 미국이 명분도 없는 전쟁에 개입하여 잘못된 전략으로 전쟁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둘째, 민간인 학살을 비롯한 부도덕한 문제로 인해 세계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미국과 그 동맹국에 맞서서 베트남 사람들이 잘 싸웠다는 점이다. 세 가지 문제가 모두 중요하지만, 베트남전쟁이 확전되는 데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됐던 것은 미국의 정책적·전략적 오류였다. 그리고 잘못된 미국의 전략은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오판 때문이었다. 미국과 동맹국들은 베트남에서 전쟁이 일어난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주적이 북베트남인가, 아니면 베트콩인가? 베트콩을 지지하는 남베트남의 대다수 사람들은 적인가, 아군인가?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중국이 동남아 전체를 자기 영향권 아래에 둘 수 있는가? 접기


P. 122-123 전쟁에 나가 무엇인가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나’에게 목숨보다도 더 중요한 무엇.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했던 시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던 냉전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했다. (…) 국가는 그들에게 싸워야 할 이유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 개개인의 안보도 지켜주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안보를 위협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그들 자신과 싸워야 했다. 전 세계적으로 반전 운동이 확산됐다. ‘개인의 안보를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의 안보가 왜 중요한가? 반전 운동은 사회적으로뿐만 아니라 군대 내에서도 일어났다. 접기


P. 179 구정공세를 TV를 통해 지켜본 국민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동네 청년, 옆집 총각, 친척 조카,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이 구정공세 시기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던 시민들은 더 이상 늪 속에 젊은이들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반전 운동은 더 힘을 받았고, 깊숙한 개입을 결정한 지도자들은 이제 무대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존슨 대통령은 1968년 4월 15일 호찌민에게 협상을 요청했다. 역사적인 날이었다. 북베트남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한 것이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을 만들어낼 때 베트콩과 그들을 돕는 북베트남은 단지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대상이었지만, 이제 그들이 대화의 상대가 된 것이다. (…) 협상을 제안하면서도 존슨이 잊지 않았던 것이 있다. 만약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엄청난 보복이 있을 것이라는 협박. 그러나 물러선 것은 호찌민이 아니라 존슨이었다. 접기


P. 218 징병제의 강화와 주민등록제도의 본격적 실행을 통해 사회적 동원과 통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1월 16일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뜬금없이 ‘제2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물질적인 ‘제1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그에 걸맞은 정신적 측면에서 ‘제2경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정신면의 후진성’을 제거하는 ‘정신 개조 작업’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그 맥락이 유사했다. 국민들의 정신을 개조하겠다는 제2경제론은 1968년 광화문에 충무공 동상을 세우고,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제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는”모든 국민을 성공적으로 동원하고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접기

박태균 (지은이)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부터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서 2007년과 2017년 ‘한국현대사’와 ‘한미관계사’로 학부와 대학원 강의를 했으며 계간 역사비평 주간과 서울대 대학신문 주간으로 일하고 있다. 쓴 책으로는 《조봉암 연구》,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원형과 변용: 한국경제개발계획의 기원》, 《베트남 전쟁》,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 《박태균의 이슈 한국사》,... 더보기


최근작 : <논쟁으로 읽는 한국 현대사>,<현대 한미관계의 이해>,<한국현대사 2> … 총 49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한국전쟁>에 이은 박태균의 또 하나의 역작!
미국은 왜 베트남전쟁에 개입했을까? 그리고 자신의 안보도 지키지 못하고 있었던 한국은 왜 베트남으로 전투부대를 보냈을까? 미국의 적극적 개입에 의해 시작된 베트남전쟁에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을 거부했음에도, 왜 한국 정부는 파병을 결정했을까? 우리에게 기억되는 베트남전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2005년 <한국전쟁>으로 주목받았던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가 베트남전쟁을 일괄하는 신간을 내놓았다. 국내외 관련 도서와 논문은 물론 외교문서까지 방대한 자료를 분석하고 10여 년간의 조사 끝에 이 책을 내놓았다.
1964년 한국이 베트남전쟁에 처음으로 파병한 이래 1973년 3월 철수할 때까지 32만이 넘는 한국군이 베트남으로 갔다. 그들 가운데 5천 여 명은 전사했으며, 1만 명 이상은 전후에 고엽제로 고통 받았다. 그리고 죄 없는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죽었다. 베트남전쟁 파병은 최초이자 최대의 해외 파병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했고, 한국의 경제 성장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전쟁 특수에 가려 파병 전사들과 민간인 학살 문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20세기 또 하나의 전쟁, 베트남전쟁이 한국과 세계에 남긴 발자국을 살펴본다.

파병 50돌, 전쟁을 생각하다
이 책은 총 7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그들은 왜 베트남으로 갔는가’에서는 한국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이유를 살펴본다. 한국의 역사교과서에는 베트남 남북 사이의 이념 갈등, 공산주의의 확산을 파병 원인으로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1961년 5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한국의 군부와 그 대표자인 박정희가 정권 승인을 받기 위한 조건 중 하나로 한국군 파병을 먼저 제시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여기서는 한국군 파병의 진실과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베트남전쟁의 모습을 비교해본다.
‘제2부 베트남 그리고 베트남전쟁’에서는 베트남의 내부 상황과 서로 죽여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던 베트남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특히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도 주목한다. 미국은 베트남 내부의 상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적이 북베트남인지 혹은 베트콩인지, 아니면 베트콩을 지지하는 남베트남의 사람들인지. 명분 없이 시작한 전쟁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무고한 사람들만 죽어갔다.
‘제3부 병사들의 기록’에서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병사들의 생생한 증언과 함께 당시 참전 군인들의 출신 성분과 징병 과정 등을 파헤친다. 목숨을 걸고 전쟁에 나간 사람들에게는 베트남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막으면 국가의 안보를 지킬 수 있다는 사명감, 혹은 적절한 보상이 필요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국가는 그들에게 싸워야 할 이유를 제시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가난한 집안 출신의 군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보상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따가운 시선뿐이었다.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였던 군인들의 전후의 삶도 함께 살펴본다.
‘제4부 미국은 베트남에서 어떻게 패배하는가’에서는 미군의 철수 과정을 살펴본다. 통킹만으로 본격화된 전쟁은 3년이 되지 않아 반전 운동의 벽에 부딪힌다. 결정적 계기는 1968년의 구정공세였다. 전쟁에 지친 것은 군인들뿐이 아니었다. 베트콩은 남베트남 사람들의 인심이 점차 멀어지자 고민 끝에 총공세를 펼쳤으나 결과는 대패였다. 구정공세의 결과가 베트콩의 의도와 반대로 미군의 승리를 가져왔지만, 미국에서는 오히려 구정공세를 계기로 반전운동이 더욱 확산되었다. 결국 닉슨은 베트남에서 미군의 철수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5부 한강의 기적과 감춰진 진실’에는 죽음을 넘나드는 전선에서 한국군과 한국 기술자들의 삶을 담았다. 전쟁 특수로 안정적 집권이 가능해진 박정희는 곧 유신을 선포하며 독재를 굳건히 한다. 또한 전쟁 특수로 수혜 받은 재벌들의 부동산 투기가 시작됐다. 1970년대 한국은 베트남 파병 한국군과 기술자들로 갑작스레 풍요로워진 시대였지만 동시에 자유와 권리가 가장 제한되던 시대이기도 했다.
‘제6부 미군 철수 이후의 세계’에서는 베트남전쟁으로 미국의 헤게모니가 흔들린 후 미국의 그늘 아래 있던 주변부 국가들의 변화를 살펴본다. 닉슨 독트린은 베트남전쟁으로 파탄이 난 미국 경제를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베트남에 파병한 동맹국에는 의도하지 않은 정치적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 타이, 필리핀은 거의 동일한 시기에 독재를 겪어야만 했다. 베트남전쟁은 한국과 세계를 흔들어놓았다. 그렇다면 그 시대의 변화는 어떻게 기억될까?
‘제7부 기억되는 것과 기억되지 않는 것’에서는 전쟁포로와 실종자 문제, 참전 군인과 베트남 피해자에 대한 보상, 이를 둘러싼 역사 인식에 대해 다룬다. 저자는 베트남전쟁을 다룬 영화나 소설, 드라마를 살펴보면 우리가 베트남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여실히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영화와 드라마에 나타나는 베트남전쟁의 모습은 전쟁의 본질을 제대로 그리고 있지 못하다.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전쟁은 반쪽만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반쪽의 기억이 2003년 한국 정부가 이라크에 파병하는 데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 역사는 기억과의 싸움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올바른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베트남전쟁은 우리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베트남전쟁은 미국인들에게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참패와 경제적.정신적 공황을 안겨주었다. 미국은 베트남전쟁을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전술로 싸운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패배한 전쟁으로 기억한다. 한국에서는 베트남전쟁 참전으로 인한 전쟁 특수만을 강조할 뿐, 베트남 사람들의 고통은 안중에 두지 않는다. 또 베트남 참전 병사들에 대한 평가도 엇갈린다. 참전 병사들은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가해자였지만, 한편으로 전후에 고엽제 후유증과 트라우마로 시달려야 했던 전쟁의 피해자였다. 그러나 참전 군인들은 어느 곳에서도 주역으로 평가받지 못했고, 피해자로 보상받지도 못했다.
저자는 이 글을 쓰는 이유로 다음의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밝히”기 위함이다. 왜곡.은폐된 사실이 특정 기억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베트남전쟁의 역사적 기억이 “특정 방향으로 남아” 있어 현재 한국 사회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베트남전쟁에 대해 전쟁 특수만을 강조해왔다. 참전 이유와 군인들에 대한 객관적 평가, 그리고 베트남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외면되어 왔다. 마치 일본이 전쟁 범죄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일본이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한국정쟁에 대해 전쟁 특수만을 강조해 서술하는 것처럼. 그리하여 셋째, “한국 사회가 진정으로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인지를 밝혀 베트남전쟁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기 위함이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이제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베트남전쟁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 한국에는 “지나간 역사에 대해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성찰하는 시민사회”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알려줄 의무가 있다.
전쟁은 끝났지만 민간인 학살,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참전 병사들에 대한 보상 문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로 남았다.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 이러한 노력이 있다면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역사를 바로 쓸 수는 있을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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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교수님의 한국전쟁 책 보고 반해서, 이 책도 구매했습니다.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시각으로 베트남 전쟁을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아요. 


pkm1277 2016-04-19 공감 (2) 댓글 (0)

베트남 전쟁 자체에 대한 전쟁사라기 보다는 베트남 전쟁을 정치사회적으로 접근하였다. 순수하게 전쟁의 경과나 전략, 전술, 무기 등을 알고 싶어하시는 분께는 조금 실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Palaiologos 2015-12-01 공감 (1) 댓글 (0)


박태균 교수의 10년간의 노력. 그리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베트남 전쟁의 이면. 
초록민들레 2016-04-05 공감 (1) 댓글 (0)

베트남 파병 50년이 지났지만 파병 이유가 무엇때문인지 그리고 파병의 공과가 알고싶었다
50년동안 베트남 전쟁이 누구하고 벌인 전쟁인지 조차 몰랐다 


gredyk59 2015-11-19 공감 (0) 댓글 (0)
신간 출간마다 꾸준히 사보는 교수님.....전자책 편집도 고해상도 자료사진 편집도 잘 되어있다
구매 고민인 분은 https://www.youtube.com/watch?v=D9Dt-nCny6g 이 강의 들어보시길
딴지라디오 벙커1 도서전 - 박태균 [인문학적으로 현대사 읽기]도 있어요 


스노우볼 2015-12-07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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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베트남 전쟁 




다음 달에 베트남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베트남이라는 곳을 단지 관광지로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사는 곳과는 다른 배경을 보고, 내가 먹던 것과는 다른 음식을 먹는 것으로만 그곳을 다녀왔다고, 그곳이 좋았더라고 혹은 나빴더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수천 년의 역사를 모두 알 순 없겠지만 내가 걷고 맛보고 즐기고 고생할 땅에 살아왔던 사람들이 어떤 역사적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그래서 지금 어떤 문화와 어떤 습성과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림잡아보고 싶었다. 어떠한 지리적 환경을 극복해오며 살아왔는지, 그렇게 자연을 극복하고 순응하며 어떤 종교와 문화와 관습을 키워오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더 나아가 우리나라와는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지 궁금했다.

과거사는 거시적으로, 근현대사는 미시적으로 봐야 한다는 말마따나 <베트남 문화의 오디세이>라는 책을 통해 베트남의 과거사와 지역적 특징, 지역별 문화, 전통을 가볍게 훑어보고 있다. 그렇다면 근현대사는? 그중에서도 특히 우리나라와 관련이 있는 근현대의 역사적 사건이 무엇이 있었을까. 물을 것도 없이 베트남 전쟁이다. <최병욱 교수와 함께 읽는 베트남 근현대사>를 통해 베트남 근현대사의 전반을 가볍게 읽어보겠지만 베트남 전쟁만큼은 가볍게 알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 행위와 일제강점기 시기의 역사적 사실에 무지한 일본인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노근리를 기억하자면서 퐁니, 퐁넛에 대해 모를 수 없었고 다낭의 해변을 즐기면서 그곳으로 들어왔다 돌아가지 못한 5,000여 명의 국군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베트남 여행을 떠나기 전에 베트남의 역사, 그 중에서도 최소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최소한의 공부는 하고 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고 이 책을 읽었다.

<우리는 왜 전쟁을 했을까?>라는 책을 읽으면서도 느꼈던 점이지만

전쟁은 오해와 욕망으로 발발하고
전후엔 오해와 욕망만을 기억한다

전쟁은 단지 전쟁 참여 인원, 사망자, 부상자, 손해, 전쟁 특수 수익 따위의 수치로만 표현될 수 없으며 숫자에 다 담지 못한 고통과 슬픔, 증오와 복수, 상실과 후회로 점철되어 있다.

전쟁에 승리자는 없으며 피해자만 존재할 뿐이며 베트남 전쟁의 승리자를 굳이 뽑아보자면 전쟁을 통해 특수를 누린 기업과 안보 위기를 조장하고 강화된 군 병력을 통해 자국에서 독재 정치를 일삼은 정치가들뿐이다. 그 외엔 모두가 피해자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성장해야만 하기 때문에 인류는 앞으로도 끊임 없이 전쟁을 해나갈 것이다. 그 전에 치른 무수한 전쟁의 교훈은 기억 못한 채. 오해와 욕망에 준동되어 서로 죽고 죽이는 짓을 종말이 오기 전까지 해댈 것이다.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생명의 가치와 인권에 우선할 수 없고 수억 달러의 전쟁특수도 한 사람의 목숨보다 소중할 수 없음에도.

베트남 전쟁 발발 원인, 경과, 결과, 영향까지 일목요연하고 읽기 쉽게 쓰인 책이다. 즐거움에 앞서 한 번은 읽어볼 책이며 분노에 앞서서도 일독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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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ㅅㅈ 2017-09-18 공감(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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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베트남 전쟁에 대한 기억과 지식은 매우 단편적이고 편협되어 있다.국민학교가 끝나갈 무렵 봄(1975년 4월 30일) 베트남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중학교에 들어가 반공.도덕 시간에 배운 강재구 소령이 보여준 살신성인의 정신과 베트남 상이 용사들의 고엽제 후유증 등에 관한 것이 전부인 것이다.왜 베트남 전쟁이 일어났고 한국은 왜 이 전쟁에 참여했으며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은 무엇을 남겼는가에 대해서는 관심 사항이 아니었던 터라 잊고 지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전쟁 당사국도 아닌 한국 입장에서 베트남 전쟁에 한국의 젊은이들을 파병시키고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전쟁에 대한 의미를 되살리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 즉 1950년대 이후 베트남 정세 및 미국과의 충돌 등(통킹 만 사건) 그리고 한국군 파병,베트남 전쟁에서 얻은 교훈 등을 정치,군사,경제,사회학적 관점에서 잘 서술한 이 도서는 베트남 파병 50돌(2014년)을 맞아 기획.출간된 것으로 정치.군사.경제.사회적 관점에서 한국과 베트남 전쟁과의 관계를 되짚어 보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1964년 9월 22일 한국군 제1이동외과병원 및 태권도 교관단을 필두로 1973년 3월 철수할 때까지 네 차례의 파병이 이루어졌다.총 32만 5,000여 명이 파병됐고,5,000여 명이 전사했다.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5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고엽제로 인한 질병 판정을 받은 장병들은 먼 이국에서 죽어가고,전쟁의 후유증으로 아직도 몸서리나는 고생을 하고 있다.베트남과 한국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지만 미국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베트남 파병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또한 유사 이래 한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에 파병된 첫 번째 사례다.미국의 우방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가 베트남 참전을 거부했음에도 한국은 파병을 결정했다.그것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 사회가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한 시기로 경제 성장을 위한 특수(特需)효과를 기대했던 까닭이다.

베트남 전쟁은 통킹 만(Gulf of Tongkin)에서 북베트남 경비정과 미군 구축함의 해상 전투 사건으로 미군이 전쟁을 시작한 것이 베트남 전쟁의 발단이다.베트남 전쟁 파병을 결정한 당시 박정희 정권은 존슨 미 대통령의 환대를 받으면서 베트남 전쟁 특수에 크게 의존했다.유지비가 싸고 전투력이 뛰어나며 베트남인과 비슷한 용모를 지닌 한국인이 미국 정부가 궁극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을 요청한 이유였다.네 차례에 걸쳐 베트남 파병을 진행하게 된 한국 병사들은 기상 악조건 속에서도 미군보다 더 맹활약을 했음에도 미국 정부의 농락에 의해 한국군의 이미지가 저울질되기도 했다.즉 한국군이 필요로 할 때는 효율적이라고 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비효율적이라고 평가받았다.한국 병사들만 정치적 이유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결국 미국은 지나친 전비 지출로 달러가 세계 유일의 기축통화 자리를 지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고,조기에 베트남 전쟁에서 손을 들어야 했다.존슨 후임인 닉슨 대통령은 실사구시 정책을 쓰면서 비수교국이었던 중국과 핑퐁 외교를 구사하면서 미.중 수교(1972년)를 성사시켰다.













베트남 전쟁에 파병했던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한국은 커다란 경제 성장을 이룩한 반면,정치적으로 남북관계는 더욱 악화 일로를 걸었다.베트남 파병과 관련이 있는 1968년 청와대 습격 사건이나 푸에블로호 사건은 북한이 국방.경제 병진노선을 펼치면서 국방비가 급증하면서 북한 사회가 경제적인 문제를 노정(露呈)하게 되었다.사회.문화적으로는 미니스커트가 등장하고 통기타 가수들이 인기를 얻었으며,베트남을 통해 미국과 일본의 전자제품이 국내에 유입되었던 시기다.나아가 중산층이라는 낱말과 부동산 투기가 시작되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대치상태가 이어졌는데,미국에 의존하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남베트남과 베트콩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으면서 베트남 통일을 달성하려던 북베트남,그리고 남베트남 정부를 지키려는 미군들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놓여 있었다.또한 베트남은 1950년대 말 남베트남의 게릴라들(베트콩)이 응오딘지엠 정권에 반대하여 무장 투쟁을 시작하면서 베트남 전역의 정세가 불안정했다.미국은 통킹 만(미 어뢰정이 북베트남에 의해 침공당함) 사건으로 전쟁의 구실을 삼았다고 하지만,미국 사회는 베트남 전쟁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미군만의 제한적 전쟁으로 비쳐졌던 베트남 전쟁은 결국 북베트남에 의해 사이공이 함락된다.1976년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건설되었다.전쟁 특수 효과를 기대하고 젊은 한국 병사들을 베트남 전쟁에 동원하다시피하고 베트남 전쟁에서 죽었거나 전쟁 후유증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 상이용사들에 대한 트라우마를 풀어주어야 마땅하다.또한 베트남 전쟁에서 희생된 밀라이 학살 사건은 한국군이 개입된 것으로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기도 하다.이들은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했다.


베트남 파병 이후 악화된 남북관계 해결,파월 장병들과 돈을 벌기 위해 떠난 근로자와 민간들의 무사 귀국 시키는 일도 난제였다.닉슨 정부가 들어서면서 주한 미군의 감축,철수 문제도 한반도 안보 공백을 우려해야만 했다.설상가상으로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하더라도 한국군이 베트남에 주둔해야 할 당위성이 있다는 것을 제기했다.당시 한국 국방부는 안절부절하는 상황이었다.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남베트남 피난민들은 보트 피플이 되면서 세계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베트남 전쟁 특수는 한국 경제를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경부고속도로 건설,부동산 투기 바람이 일어났다.전쟁 특수로 돈 재벌들이 탄생하기도 했다.박정희 정부는 파월을 통해 아시아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군사 동맹국의 위치에 서려고 했다.이제 베트남 전쟁을 기억하려고 하는 사람도 없고 굳이 베트남 전쟁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하지만 전쟁 특수를 통해 반사 이익을 크게 얻었다.그 안에는 반드시 애꿎은 희생이 뒤따랐음은 부인할 수가 없다.나라의 경제 이익을 위해 동원된 파월 장병들의 트라우마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우보 2016-03-30 공감(5) 댓글(0)


베트남 전쟁 / 박태균 

냉전을 뜨겁게 달군 베트남전쟁은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었으며, 미국의 제1목표는 "남베트남 정부를 지키는 것"이었다. 케네디의 뒤를 이어 베트남의 운명을 떠안은 존슨 대통령은 "미국이 중국 대륙을 잃었을 때 불었던 매카시 선풍"(58)이 국내 정치를 유린했던 사실을 떠올리면서, 베트남에서 철수하면 공산주의가 "중동과 유럽,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51)고 우려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제한전 전략을 채택하여 베트콩을 지원하는 "북베트남을 폭격"했지만, 전면전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59)

미국이 "제한전을 고려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중국의 참전 가능성" 때문이다. 한국전쟁에서 38선 이북으로 전선을 확대했던 미국은 중국의 참전에 밀려 "한반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데 일조"하고 말았다.(61) 전선의 확대를 막는다는 명분은 타당했지만, "진격할 목표가 없다는 사실"은 목숨 걸고 싸우는 최전선의 병사들이 전투의 승패보다 살아남는 것에 집착하게 만들었다.(60) 베트남전쟁은 이데올로기 수호라는 지상목표 외에도 "경제를 위한 전쟁"(53)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공산주의의 확대는 "미국의 가장 믿음직한 파트너였던 일본 경제의 부흥을 위한 가장 중요한 배후지"로 떠오르고 있던 동남아시아 시장의 축소를 의미했다.(54)

"한국 정부는 1964년 봄이 가기 전에 파병을 결정했다."(23) 박정희 정부가 파병의 근거로 내세운 표면적인 이유는 주한미군 감축 저지와 한미 동맹 고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수호였지만, 한일 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사회 분위기를 일신하고, 군축에 따른 군부의 지지기반 붕괴를 막겠다는 속내가 들어 있었다. 여기에 존슨 대통령이 '더 많은 깃발more flag' 정책을 표방하면서, "더 많은 한국군을 시급하게 요청"(40)하자 박정희 정부는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얻어내기 위해 체제를 적극 동원했다.

북한은 이에 맞서 북베트남과 베트콩을 측면 지원하기 위해 한반도 안보 위기를 조장했다. 1968년 1월 21일에 청와대 습격 사건, 23일에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이 벌어졌다. 1965년과 1966년에 30~40건에 불과했던 비무장지대의 남북간 교전이 "1968년에는 500건으로 급증했다."(30) 박정희 정부는 북한의 공세에 대응하는 수준을 넘어 적극적으로 선제공격을 펼치면서, 한국군 추가 파병이 "북한의 도발을 막기 위한 군사 장비가 [한반도에] 얼마나 제공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44)는 말로 미국을 압박했다.

베트남에 가는 이유는 다양했지만, "금전적인 요소"는 군대와 기업 모두에게 가장 큰 유혹이었다.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 사병의 전투 수당(이병의 경우 51.11달러)"은 당시 국내 이병 월급 1달러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많은 돈이었다.(154)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파병 군인들이 국내로 송금한 돈은 "전체 수당의 83퍼센트"에 달했고, 정부는 높은 송금 및 환전 수수료를 통해 일부를 거둬들였다. 1975년 10대 재벌에 새롭게 진입한 "현대, 한진, 효성, 쌍용, 대우, 동양맥주, 동아건설, 신동아 등"은 "베트남전쟁 당시 용역과 건설, 무역 등으로 성장한 기업이었다.(224)






한국 정부는 전투부대 파병으로 인한 공백을 채우기 위해 1968년 예비군을 창설하여, "병역의무를 마친 예비역들을 지속적으로 통제, 동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주민등록제도도 196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국민들의 정신을 개조하겠다는 제2경제론은, 광화문에 충무공 동상을 세우고,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하는 것으로 이어졌다."(217-8) 전쟁 특수는 한국의 산업구조도 바꾸어놓았다. 박정희 정부는 "중화학공업과 종합 기계 산업 건설이라는 애초의 계획을 다시 부활"시켰으며, 독자적으로 "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받았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전쟁 특수"이다.(227-8)

그러나 미국이 아무리 국력을 쏟아부어도 정글의 늪은 깊어만 갔다. 1968년 베트콩의 구정공세는 비록 실패한 전투였지만, 성공을 자신하던 워싱턴을 충격에 빠뜨렸고, 반전 여론의 기폭제가 되었다. 파병국들이 높은 경제성장을 구가할수록, 미국은 과다한 국방비 지출로 재정적자에 시달렸다. '브레튼우즈' 체제를 주도하던 미국은 "1968년 3월 금의 이중가격제"를 시행했고, "달러의 가치 하락은 전 세계에 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마침내 닉슨 대통령은 "1971년 8월 15일 달러의 금태환이 정지됐음을 선언했다."(186-7)

미국은 반전 여론과 악화된 재정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베트남에서 철군을 결정했다. 언론과 의회는 "남베트남 정부가 더 이상 지켜야 할 가치가 없"다는 점을 집중 부각시키면서 철군을 지지했다.(318) 닉슨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베트남 주둔 미군의 철수를 결정하자, 전쟁특수가 실종된 아시아의 파병국들은 쿠데타와 계엄령의 포연에 잠겼다. 자유체제 수호라는 임무를 스스로 저버린 미국이 그들의 반란 앞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관망'뿐이었다. "1971년 11월 18일 타이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 10개월이 지난 1972년 9월 22일 필리핀에서 계엄령이 선포됐다. 그리고 "한달이 채 되지 않아 한국에서 유신이 선포됐다."(271-2)

nana35 2016-04-15 공감(3) 댓글(0)

잊혀진 전쟁,반쪽의 기억 

베트남전쟁을 한국인의 시각에서 전후좌우로 조망한 책이다."한국전쟁"의 저자이기도 한 박태균교수는 현 역사학자중 믿고 볼수 있는 사람중 하나이다.그동안 베트남전쟁에 관련된 책이 외국인이 시각에서 또는 전투중심으로 기술되었다면 이책은 한국군의 파병동기와 원인,당시 박정희정권과 미국과의 관계,현지전투과정,민간인학살,베트남특수,전사자처우,포로문제까지 우리의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

나는 베트남 전쟁을 프랑스와 일본의 오랜 식민지 지배하에 신음하던 베트남사람들이 2차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찾아온 독립의 열망을 짓밟은 미국에 대한 정의로운 전쟁이었고,우리는 그 더러운 전쟁에 용병으로 팔려가 같은 처지의 베트남 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그 피의 댓가로 돈을 챙긴 떳떳치 못한 전쟁참여였다고 정리하고 싶다.


우리와 베트남의 처지는 매우 유사했다.북위 17도 와 38도 갈라진 남북,식민지지배와 독립에 대한 열망,남반부에 세워진 부패하고 무능하고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베트콩(Veit Cong,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빨치산의 투쟁또한 비슷한 형태였고,다만 베트남은 게릴라활동에 훨씬 적합한 정글이라는 자연조건이 있었고 우린 산악지대라고 하지만 몸숨길데가 없었다.베트남은 통일되었고,우린 여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냉전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분단국가다.


베트남전쟁을 교훈삼아 앞으로도 문제될 해외파병과 전쟁특수에 대한 관점,통일후 발생할 후유증등에 대한 문제도 깊이 새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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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2015-11-04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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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베트남 전쟁 




1

한겨레 신문 광고를 통해 알게 된 책. ‘베트남 전쟁,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이라는 제목만으로도 강한 호기심을 불어일으키고, 가슴 한쪽을 아리게 한다.


2

[16.01.19 / p6~76]

전쟁에 접근하는 방식이 아주 마음에 든다. 동네 친구끼리 하는 주먹다짐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존재하는데, 하물며. / 단락마다 의문을 던지고, 다음 단락에서 설명을 한다. 뭔가 약올리는 것 같기도 한데... 마음에 든다.^^;


[16.01.20 / p77~109]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개소리다. 전쟁은 그저 잔인한 살육일 뿐이었다. 한국과 많이 닮았으면서도 달랐던 베트남의 모습들에서...


[p102 중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생존이었다. 남베트남 사람들이 베트콩을 지지하게 된 것은 그들의 이념 때문이 아니었다.


[16.01.25 / p110~212]

민간인 학살. 나도 참 이상한건지... 한편으로는 이해를 하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거라고...;; / 늘 그래왔듯, 결국 돈 없고 힘 없는 이들만 끌려나간 전쟁. / 참전 병사들의 증언들이 너무 처절하다. / 전쟁은 상황이 아니라 누군가의 결정에 의해 일어난다.


[16.01.26 / p213~319]

영화 ‘고지전’이 떠오른다. 늘 그들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 똥으로 세운 나라. 그 이상의 표현은 떠오르지 않는다.


[16.01.27 / p320~406(완)]

강대국의 더러운 이면은 늘 역겹다. / 너무 빠르게 변화해온 우리나라. 그 중 70년대를 기억하면 더더욱이 그렇다. / 지킬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 훔. 아프게 다가온다. /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표현이 이책을 가장 잘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화나고, 짜증나고, 역겹고, 슬픈 이야기.


[p384 중에서]

베트남전쟁에 대한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바로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베트남전쟁에 대한 기억의 내용과 그 특징을 잘 보여준다. 한국사회에서 베트남전쟁은 그 반쪽만이 기억되고 있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전체가 아닌 사건의 일부분에 대한 기억은 그 사건 자체를 왜곡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역사 교과서를 보면 이 점이 잘 드러난다.


[p389 중에서]

기억은 그냥 개개인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집단적 기억은 현재와 미래의 정책에 결정적 구실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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