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29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에게 독립유공자 서훈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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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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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에게 독립유공자 서훈해야"
https://m.news1.kr/articles/?4380732
반일적 성격이 있으면 모두 다 독립유공자가 되나?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의병들 후손한테는 왜 독립유공자 서훈을 안 해주나? 합의되지도 않은 황당한 논리로 특정한 정치집단의 역사관에 따라 국가 재정과 법제도를 사용하려고 한다. 동학을 시초로 계보를 써내려가는 친민주당 계열의 진보적 역사학자들의 입장은 이해가 가지만 그것을 국가의 공적인 기억으로 삼으려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 아래의 내용은 전에 공부한 것들을 다시금 내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기에 상당히 길다. 맨 아래의 결론으로 점프해도 무방하다.
먼저 동학의 특수성에 대해 논해보자. 다른 의병전쟁과 달리 취급해야 하나? 오영섭의 연구 <고종황제와 한말의병>이 실증했듯이 항일 의병활동에 참여한 구한말 의병들 중 상당수가 고종황제로부터 돈을 지원받아 생계를 위해 고용된 이들이다. 자발적으로 의병활동이 이뤄졌다는 '신화'를 오영섭은 엄격한 실증을 통해 논파하고 있다. 나는 오영섭과 정치적 견해라든지 이런 것이 달라 그의 입장에 온전히 동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연구는 기존의 동학부터 이어지는 의병집단의 연속성, 계승성 등을 훌륭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들의 경우에도 동학과 동일한 대우를 해줘야 하는가?
다음으로 친일파와의 연계성에 대해 말해보자. 동학농민봉기에 참여한 이들이 만든 진보회가 나중에 친일단체인 일진회로 이어진 점도 중요하다. 반일적 성격을 지녔다는 동학의 후예들이 친일단체가 되었다는 점은 왜 고려하지 않나? 김종준의 <일진회의 문명화론과 친일활동>만 보더라도 이들이 민권을 중시하며 지방관들의 탄압과 중앙 정부의 방조를 집중적으로 비난했다는 점이 잘 드러나 있다. 김종준의 지적대로 그 점을 높게 평가해야 함은 맞지만 결과적으로 합방론 등으로 친일단체가 되었다는 점도 무시하면 곤란하다고 본다. 다른 친일파들에 대해서는 말년의 행위로 그들을 단죄하기 바쁘면서 왜 동학의 경우에는 일부의 일탈로만 치부하나?
동학농민봉기의 성격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자체가 동학이 "전근대적인 조선왕조의 지배체제를 무장봉기를 통해 개혁하려 했다"는 점을 이유로 입안되었기 때문이다. 유영익의 입론을 전부 다 수용하지 않더라도 진보적 성격을 지닌 계급전쟁, 체제변혁 전쟁이라 보기 어렵다. 예컨대 병작제에서의 토지소유주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거의 없다.
재일사학자 조경달은 이 지점을 알고 있었기에 계급투쟁론을 택하지 않고 "특정 영주 혹은 전체 국가기구에 대항하는" 것을 농민전쟁론의 근거로 삼았다. 특정영주는 지주계급을 의미하고, 전체 국가기구는 조선왕조에서의 국가 같은 것을 의미한다. 수탈기구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인데 엄밀하게 말해 사회적 계급구성 문제를 살짝 도외시하여 농민전쟁론을 유지하려 한 것이다. 사회적 계급들 간의 저항이라는 의미에서 진보성을 갖고 있지 않다. 유영익은 전봉준이 근왕사상에 입각해 대원군을 복귀시키려 했다고 주장한다. 1930년대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계승한 입론이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동학의 혁명성, 진보성을 부정할 수는 있다고 본다. 실제 흥선은 동학군 진압에 반대했으며 갑오정부 내에서 정치투쟁이 격화되는데 한몫을 했다.
동학도를 학살한 주체가 일본군인가 아니면 조선군인가 이 지점도 중요하다. 박노자는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에서 여러 학자들을 인용해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군이 16만 7,000여명, 일본군 9개 중대에 1,900여명 정도라 추산한다. 조경달의 입론을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오해의 소지가 있다. 농민군 진압 전체를 총괄하기 위해 투입된 일본군이 1,900여명이기 때문에 우금치 전투에만 투입된 일본군과는 규모가 다르다. 아래에서 보다 자세하게 논하겠다.
갑오정부는 도순무영을 설치해 그 군사들로 동학도를 진압했는데 이들의 총규모는 2,974명으로 왕현종은 추계하고 있다. 이에 비해 동학을 진압하기 위해 주력부대로 편성된 후비보병 제19대대 3중대는 총 627명으로 계산되지만 이도 정확한 건 아니다. 대략 600~700명 수준으로 보인다. 이후 서울 이남에서 대규모 토벌을 진행할 때 동원된 일본군은 2,708명으로 추계되지만(강효숙은 3,371명이라 추산한다) 적어도 초기 동학군과 격돌할 때 파견된 일본군은 600여명정도로 이들이 셋으로 나눠져 파견되었다. 이것이 앞서 말했듯이 1,900여명, 또는 2,708명, 또는 3,371명으로 늘어난다. 이것은 청일전쟁의 전개에 따라 일본군의 투입 정도가 달라 생겨나는 일이다.
문제의 우금치 전투에 투입된 일본군은 어느정도 규모였을까? 각지의 진압에 일본군이 파견되는 바람에 공주전투가 벌어질 당시의 공주감영에는 일본군이 고작 175명정도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 공주를 향해 전봉준이 이끄는 1만의 동학군이 진군하고 있었다. 농민군 자체의 규모도 전투에 따라 다르다. 공주전투를 3단계로 나누는 신영우의 주장에 따르면 이인전투에는 1만명이, 그뒤의 공주성 전투에는 4만명이 동원되면서 큰 격돌이 일어났다. 대략적으로 관군, 민보군 등의 조선측이 2~3천여명, 일본군이 200여명으로 추산된다. 관군의 주도로 우금치 전투가 수행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학군 진압에서 관군, 민보군 등의 조선측 군대 또한 주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빼놓고 논의를 하면 곤란하다. 물론 한국사 전공자들은 관군의 지휘체계를 운운하며 이들이 조선인 군대이기는 하나 일본군의 지휘 체계에 강하게 포섭된 집단이기에 친일적 성격이 강한 군대라 평가하며 반박할 것이다. 왕현종의 연구 <조선 정부의 농민군 진압 지휘체계와 진압과정>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는 갑오개화파 정부의 역할을 지나치게 평가절하하는 주장이라 생각된다. 당시 개화파 정부의 주도세력이었던 개혁관료는 왕현종 본인의 <한국근대국가의 형성과 갑오개혁>이 주장하고 있듯이 분명히 독자적인 영역을 지니고 있는 집단이었다. 일본의 내정개혁 요구와 간섭정책은 분명한 한계가 있는 실패한 정책이라는 점을 왕현종 본인이 증명해내고 있지 않나. 갑오개혁을 주도한 정부가 농민봉기를 진압하게 된 내적 논리와 자율성을 강하게 주장했던 그가 농민군 진압에서만 일본군에의 종속을 주장하는 건 논리적 모순으로 보인다. 즉 왕현종의 주장에 따르더라도 조선정부 자체가 동학을 난민亂民으로 규정하고 토벌대상으로 인식했으며 주도적으로 진압에 나섰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갑오개혁을 주도한 조선의 개혁관료집단의 인식이 그러했다면 동학을 진압하는 현상을 단순히 반일 대 애국으로 볼 수는 없다. 왕현종에 따르면 친일정부라 볼 수 없는 갑오정부가, 근대화를 주도한 개혁관료들이 동학군을 반란군이라 규정하고 폭력적으로 진압하려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면 성격이 보다 복잡해진다. 앞의 동학농민봉기의 성격에 대한 평가와 엮어서 결론을 내리자면 군주 중심의 유교적 질서를 지키려 했던 대규모 농민봉기와 그것에 대항해 근대적 입헌군주제를 실시하려 했던 근대화 세력 간의 대격돌이 동학농민봉기의 한 축이고, 그 과정에서 청일전쟁이라는 지정학적 전쟁이 낳은 일본제국주의의 침입이 또다른 한 축이다. 이 두 축을 동시에 사유하지 않고 한쪽을 일방적으로 긍정하며 민주화로 이어지는 역사적 계보로 평가하는 건 역사를 단순화하고 신화화하는 일이다. 동의할 수 없다. 우리의 공적 기억 속에서 동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학술의 영역에 아직은 머무를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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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에게 독립유공자 서훈해야"
(전북=뉴스1) 박제철 기자 | "반일 항쟁을 지향한 동학농민군의 독립유공자 서훈은 정당하다."동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에게 독립유공자 서훈해야"

2021-07-22 18:11 송고(전북=뉴스1) 박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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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재단, 동학농민혁명 127주년 기념 학술대회 개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사장 이형규)은 동학농민혁명 127주년을 맞아 21일 기념재단 교육관에서 ‘반일항쟁을 지향한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와 농민군 서훈’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 뉴스1


"반일 항쟁을 지향한 동학농민군의 독립유공자 서훈은 정당하다."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에 참여한 농민군에 대한 국가적 서훈과 함께 국립묘지 조성 등 현충사업들이 이뤄져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사장 이형규)은 동학농민혁명 127주년을 맞아 지난 21일 기념재단 교육관에서 ‘반일항쟁을 지향한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와 농민군 서훈’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번 대회는 그동안 전봉준, 최시형 등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및 서훈의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의 반일항쟁 성격을 깊이 있게 다루고 이에 참여한 농민군의 독립유공자 서훈 문제를 집중 논의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날 학술대회는 신영우 명예교수(충북대)의 ‘동학농민군 독립유공자 서훈의 정당성’주제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조재곤 연구교수(서강대)의 ‘청일전쟁과 일본의 조선정책 보호국 구상과 그 실현', 배항섭 교수(성균관대)의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의 반일항쟁 성격’, 김양식 교수(청주대)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예우방안’, 유바다 교수(고려대)의 ‘역사교과서의 동학농민혁명 서술 검토’가 발표됐다.

특히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른 국가보훈 독립유공자 서훈 공적 심사 기준인 ‘일제의 국권침탈’의 기점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됐다. 

신영우 교수는 1894년 6월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을 주목해야 하며,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동학농민군이 전국적으로 봉기했으므로 국가보훈이라는 면에서 동학농민군의 독립유공자 서훈은 정당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조재곤 교수는 "일본은 청일전쟁 때부터 조선을 ‘보호국’화 하고 궁극적으로 식민지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일본의 조선침략은 1894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며 일제의 조선 강탈 정책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배항섭 교수는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는 반일항쟁의 시작점이며 민족적 대연합을 추구했다는 점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이 가지는 세계사적 보편성을 확장해 나가야 한다"며 고 밝혔다.

또 김양식 교수는 "독립운동의 개념을 확장해 한국독립운동사의 진정한 시작점을 동학농민혁명으로 보아야 한다"며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예우 방안으로 동학농민혁명 명예회복 및 예우에 관한 법률 제정, 국립묘지 조성, 동학농민 현충사업 지원 등이 하루빨리 추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념재단 관계자는“이번 대회를 통해 반일항쟁을 지향했던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의 성격이 재조명되고 동학농민군의 독립유공자 서훈과 관련된 다양한 논의가 펼쳐지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jcpark@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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