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30

‘한명숙 사건’ 조작이라면서 정작 재심청구 못 하는 이유는 - 조선일보

‘한명숙 사건’ 조작이라면서 정작 재심청구 못 하는 이유는 - 조선일보



‘한명숙 사건’ 조작이라면서 정작 재심청구 못 하는 이유는

[박국희의 뉴스 저격]
박국희 기자
입력 2021.07.30 03:00

건설업자로부터 불법 정치자금 9억원을 받은 혐의로 유죄가 확정돼 징역 2년을 복역하고 2017년 만기 출소한 한명숙 전 국무총리는 지난달 ‘한명숙의 진실’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는 책에서 “이명박 정권은 노무현 대통령 다음의 사냥감을 찾았고, 그게 노 대통령의 장례위원장이자 참여정부 국무총리였던 한명숙”이라며 “내가 과녁이 된 셈”이라고 했다. 사실상 자신이 이명박 정부 시절 검찰의 조작 수사 피해자라는 것이다.

한명숙(왼쪽에서 둘째) 전 국무총리가 2015년 8월 20일 대법원에서 9억원의 불법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징역 2년 실형이 확정된 후 국회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실을 찾아“법리에 따른 판결이 아닌 정치 권력이 개입된 불공정한 판결”이라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당시 새정치연합 대표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대법원 선고 직후“검찰의 정치화에 이어 법원까지 정치화됐다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고 했다. /이태경 기자

형사소송법상 잘못된 재판으로 피해를 본 국민은 법원에 재심(再審)을 청구할 수 있다. 과거사 사건 피해자들도 재심을 청구해 무죄 판결을 받아내고 있다. 그런데 한 전 총리는 법원 판결을 부정하고, ‘결백’과 ‘진실’을 주장하는 책까지 내면서도 재심은 청구하지 않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총선 압승 뒤 시작된 ‘한명숙 구하기’

한 전 총리는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경선을 앞두고 한만호(2018년 사망) 한신건영 대표로부터 3차례에 걸쳐 9억원을 받은 혐의로 2015년 대법원에서 유죄를 확정 받았다. 침묵하던 그가 출소 4년 만에 다시 무죄를 주장하고 나선 것은 작년 5월 친여 성향의 인터넷 매체 ‘뉴스타파’가 자신의 사건과 관련해 ‘모해위증교사 의혹’을 제기한 이후였다. 작년 민주당이 총선에서 압승한 뒤 벌어진 일이었다.

‘뉴스타파’는 한만호씨의 ‘옥중 비망록’을 입수했다면서, 한씨가 “한 전 총리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며 검찰 조사 때 했던 진술을 1심 법정에서 번복하자 검찰이 한씨의 구치소 동료 2명에게 증언 연습을 시켜 “한만호가 한명숙에게 돈을 줬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증언을 하도록 시켰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여권은 즉시 “검찰 조작 수사가 드러났다”며 ‘한명숙 무죄’를 주장하고 나섰다. 당시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는 “한 전 총리는 검찰의 강압수사, 사법 농단의 피해자”라며 재조사를 주장했다. 형사소송법상 재심은 증거나 증언 등이 위조되거나 허위라는 것이 증명됐을 때 청구할 수 있다. 이 의혹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재심 사유가 된다.

‘한명숙 사건’ 관련 여권 인사 발언

◇실체 없는 걸로 드러난 사건 조작 의혹

하지만 여권이 ‘무죄’의 결정적 증거가 처음 발견된 것처럼 주장하는 비망록은 2011년 1심 재판 때부터 이미 검찰이 법원에 제출해 사실무근으로 결론난 것이다. 한 전 총리 사건은 1심 무죄, 2·3심 유죄가 나왔는데 판결문 어디에도 비망록은 언급되지 않는다. 한 법조인은 “검찰의 회유·협박으로 한 전 총리에게 돈을 줬다고 진술했다는 비망록 내용이 사실이라면 재판은 할 필요도 없다. 재판부가 언급조차 않은 것은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했다.

실제 검찰은 이후 한씨를 위증죄로 기소했고, 2016~2017년 1·2·3심 법원 모두 한씨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검찰에서 9억원 제공 사실을 먼저 밝혔던 한씨가 “한 전 총리에게 돈을 안 줬다”고 법정에서 말한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한씨는 위증죄로 징역 2년 실형을 살고 나와 2018년 사망했다.

법원은 통상 검찰에서의 진술보다 법정 증언에 신빙성을 더 두는 편이다. 그런데도 한씨에게 위증죄를 확정한 것은 다른 증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가 2009년 6월 한씨가 구치소로 면회 온 모친에게 한 말이다. 한씨는 검찰이 이 수사를 시작하기 전부터 다른 사건으로 수감돼 있었다. 당시 사업 실패로 돈에 쪼들리던 그는 모친에게 “내가 (한 전 총리 측에) 3억원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3억 얘기했는데 답이 오긴 올 거예요. 한명숙이 서울시장 나오는 것 같던데 될지 안 될지 모르니까”라고 했다. 수감 시설에서의 면회는 녹화·녹취하게 돼 있는데 검찰이 그 내용을 법원에 증거로 낸 것이다. 한씨가 이 말을 한 시점은 검찰이 불법 정치자금 수사에 착수하기 10개월 전이다. 주지도 않은 돈을 돌려달라고 할 상황도 아니고, 모친에게 없는 말을 지어낼 이유도 없을 때였다.

검찰이 ‘증언 연습’을 시켰다는 의혹도 실체가 허물어졌다. 의혹에 등장하는 한씨의 동료 죄수는 3명이다. 1명은 줄곧 위증 교사는 없었다고 했다. 위증 교사가 있었다고 폭로한 죄수 1명은 중간에 진술을 번복했다. 위증 교사를 주장하는 나머지 죄수는 2006년 사기 혐의로 구속돼 지금도 복역 중이다. 그는 나머지 2명과는 달리 정작 법정에 증인으로 서지도 않은 인물이다.


◇”제기된 의혹으론 재심 청구 어렵다”

이 때문에 올 초 대검은 최종 무혐의 결정을 내렸지만, 박범계 법무장관이 수사지휘권을 발동해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지난 3월 전국 고검장들까지 모인 대검 부장회의 결론 역시 무혐의였다. 그러자 박 장관은 ‘한명숙 수사팀’ 감찰을 지시했고, 지난 14일 “참고인들이 검찰에 100회 이상 소환돼 조사받은 사실이 확인됐다. 부적절한 ‘증언 연습’”이라는 결과를 발표했다. 취재진이 “수사팀의 모해위증교사를 확인한 것이냐”고 묻자 박 장관은 “실체적 혐의 유무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았다”며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했다. 절차상의 문제만 제기했을 뿐 사건 실체는 건드리지도 못한 것이다.

이 때문에 법조계에서는 이미 법원 판단이 끝난 비망록이나, 무혐의 결론이 난 ‘모해위증교사 의혹’을 가지고 재심 청구는 불가능하다는 게 중론이다. 재심 청구 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전 총리에 대한 유죄의 증거가 너무 명백해 쉽게 재심을 청구하지 못한다는 관측도 있다. 9억원 제공 사실은 검찰이 추궁한 게 아니라 한만호씨가 먼저 검찰에 털어놓고 검찰이 사실관계를 확인한 것이다. 한씨는 2007년 3~8월 3차례에 걸쳐 대선 경선 자금 명목으로 현금과 달러를 섞어 3억여원씩 담긴 여행용 캐리어를 한 전 총리 일산 아파트 인근 도로와 집에서 전달했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이후 현금 인출 내역, 달러 환전 내역 등 금융 자료와 돈 다발을 담은 여행용 캐리어 구매 내역을 찾아냈다. 회사 장부와 채권 회수 목록에는 ‘의원’ ‘한’ 등으로 기재돼 있었다.

한 전 총리에게는 당시 미국 유학 중인 아들이 있었다. 한 전 총리 남편 계좌에 2007~2008년 출처 불명 현금 2억4000만원이 입금됐고, 한 전 총리 동생 두 명은 2007년 12월 각각 환전도 없이 5000달러를 은행에 들고 가 미국에 있는 한 전 총리 아들에게 송금했다. 동생 계좌에는 2007년 6월, 11월 각각 500달러, 2200달러가 입금됐지만 한 전 총리와 동생은 자금 출처를 묻는 검찰 질문에 충분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한만호씨는 회사 부도 후 2008년 2월 입원했다. 한 전 총리가 당일 병문안을 왔고, 한씨는 자금 사정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다음 날 한 전 총리 여비서가 한씨 운전기사에게 2억원을 줬다. 한 전 총리 동생은 2009년 1억원짜리 수표를 아파트 전세 자금으로 사용했는데, 해당 수표는 한씨가 발행한 것이었다. 대법원은 이런 것들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했다.

한 전 총리는 책에서 “수표는 여동생이 비서로부터 전세 자금으로 빌려 쓴 돈”이라며 “비서는 평소 알고 지내던 한만호로부터 1억원짜리 수표를 빌려 보관하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왜 비서가 한씨의 1억원 수표를 보관했는지 설명은 없었다.

◇의혹 제기는 사면 명분 쌓기?

한 전 총리는 친노(親盧) 세력의 대모(代母)로 불리는 사람이다. 문재인 대통령 스스로 ‘한빠(한명숙 열렬한 지지자)’라고 했다. 이 때문에 여권의 집요한 ‘한명숙 구하기’ 시도는 한 전 총리를 특별사면하기 위한 명분 쌓기라는 시각이 많다. 법조인들은 “한 전 총리가 정말 무죄라면 책을 쓸 게 아니라 재심을 청구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한 전 총리가 법정 밖에서만 ‘진실’을 외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남은 문제가 있다. 한 전 총리는 책에서 “추징금 8억8000만원의 족쇄는 지금 이 순간에도 가족의 일상을 옥죄고 있다”고 했다. 사면이 돼도 추징금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 전 총리는 추징금 대부분을 내지 않고 있다. 더욱이 문재인 정부는 “벌금·추징금 미납자는 사면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기준 아래 사면을 실시해 왔다. 현 정권이 한 전 총리를 사면한다면 원칙을 또 깨는 것이 된다.

☞한명숙 사건

한 전 총리가 2007년 대선 경선 비용 명목으로 건설업자 한만호씨로부터 9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사건. 2015년 대법원은 한 전 총리에게 징역 2년 실형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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