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25

[책과 삶]일본 운동권 세대가 돌아본 과학과 권력의 유착 - 경향신문

[책과 삶]일본 운동권 세대가 돌아본 과학과 권력의 유착 - 경향신문

일본 운동권 세대가 돌아본 과학과 권력의 유착
백승찬 기자2017.07.07 21:36 입력
나의 1960년대야마모토 요시타카 지음·임경화 옮김 |돌베개 | 428쪽 |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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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도쿄대 물리학과에 입학한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물리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1980년대 한국 대학이 그랬던 것처럼, 1960년대 일본 대학도 공부만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입학하자마자 미·일 안보조약 개정 반대 투쟁, 대학관리법 투쟁, 베트남전 반전 투쟁에 참여한 야마모토는 물리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1968년 도쿄대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 대표로까지 선출됐다. 그는 경찰 기동대가 야스다 강당의 학생들을 해산시킨 1969년 1월 잠적했다가 9월 체포돼 수감됐다. 1970년 10월 석방됐지만 학교로 돌아가지 않은 채 재야의 연구자로 남았고, 이후 입시학원 강사로 일하며 수많은 물리학, 과학사 저서를 남겼다. <과학의 탄생> <16세기 문화혁명> 등 그의 역저는 국내에도 소개돼 있다.


어느덧 70대 중반에 이른 야마모토가 격동의 1960년대를 돌아본다. “그 시절 좋았다”는 운동권의 낭만적 회고가 아니다. “내가 뭘 몰랐다”는 민망한 자기부정도 아니다. 1960년대 일본 청년들은 구체제를 격렬히 공격했고, 권위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꿈틀댔으며, 민주주의를 열망했다. 물론 전략상의 실수가 있었고, 파국적 결말로 치닫은 사례도 있다. 하지만 그 시절의 열망과 행동을 모조리 부정할 수는 없다. 세상엔 여전히 그때 해소되지 않은 모순이 겹으로 쌓여 있기 때문이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당시 상황에 대한 내부자의 생생한 회고다. 당시 도쿄대는 정치에 거의 무관심했던 신입생마저 몇 차례의 논쟁 끝에 운동에 뛰어들 정도로 격정적인 곳이었다. 특히 기숙사에서 정치 토론을 하는 일이 잦았는데, 저녁에 토론하고 밤에 책 읽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면 금세 학생운동의 핵심에 진입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의 학생운동은 미시적 정책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거시적 사회 변화를 요구하는 식으로 확장되곤 했다. 예를 들어 미·일 안보조약 개정 저지 투쟁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투쟁으로 바뀌었다.


도쿄대 야스다 강당은 학생운동의 상징적 공간이 됐다. 원래 이곳은 패전 이전 도쿄대에 거액을 기부한 재벌의 이름을 따 지어진 건물로, 천황 맞이 행사가 열릴 정도로 도쿄대의 상징적 공간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는 입학식이나 졸업식을 빼곤 찾아갈 일이 없는, 형식적인 공간이기도 했다.


학생들은 이 권위주의적이고 형식주의적인 공간을 점거해 ‘해방’시켰다. 학생들이 조직한 다양한 세미나가 열렸고, 고등학생 집회의 장으로도 활용됐으며, 산리즈카 공항 건설 반대 투쟁을 했던 농민들이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기도 했다. 그때 야스다 강당은 일종의 ‘코뮌’이었다. 경찰 기동대가 야스다 강당을 ‘함락’한 1969년 1월부터 일본 학생운동은 대학에서 패퇴했고, 대학 바깥으로 나가 과격해지기 시작했다.


야마모토의 전공이 과학이었다는 사실은 이 책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인문학에 비해 가치중립적이라 평가받는 과학이 얼마나 국가권력·자본주의와 밀착했는지, 학문의 자율성을 지켜야 할 대학은 어떻게 군국주의를 도왔는지 저자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를 위해선 서구와 일본의 과학기술사를 대략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데, 이 부분이 대단히 흥미롭다. 적어도 근대 이후의 일본은 운이 좋은 나라였다. 19세기 서구에선 과학과 이를 뒷받침하는 과학기술이 시너지를 내며 문명의 흐름을 바꾸고 있었다. 과학의 언어는 명쾌해지고, 과학적 개념을 현실에 구현할 기술도 개발됐다. 19세기 중반 개항, 메이지 유신과 함께 일본은 서구의 과학과 기술을 맹렬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일본의 개국이 반세기 빨랐다면 정제되지 않은 과학 개념으로 혼란에 빠졌을 것이고, 반세기 느렸다면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 등 완전히 새로운 과학 개념을 이해하기 벅찼을 것이다. 민간 중심으로 발달한 서구의 과학기술과 달리, 일본은 국가의 강력한 이니셔티브에 의해 과학기술을 빠르게 흡수했다.

서구의 과학기술은 곧 그들 힘의 원천으로 여겨졌다. 근대 일본인에게 과학기술은 총, 대포, 증기선이었다. 덕분에 공학자, 이학자들은 전시에도 더 많은 자유를 누렸다. 여기서의 ‘자유’란 다름 아닌 연구비를 마음껏 쓸 수 있는 자유다. 특히 국가의 핵심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도쿄대는 그 정도가 더했다. 전쟁이 절정으로 흐르던 1940년대 이후, 선박공학과에는 군함구조 강좌가, 조병(造兵)학과에는 총기·화학병기(독가스)·어뢰 강좌가 개설됐다.

그러나 이토록 많은 과학기술자들이 전쟁에 헌신했음에도, 패전 이후 누구 하나 책임지거나 반성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전쟁 중 축적된 연구가 전후 기술적 발전으로 이어졌다. “제로센(전투기)과 전함 야마토로 패배한 해군이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워크맨으로 복수”했다는 인식이 있었고, “메이지 이후의 ‘식산흥업, 부국강병’ 슬로건이 전후에는 ‘경제성장, 국제경쟁’으로 치환되었을 뿐”이다. 어제 파시즘에 봉사했던 과학자들이 오늘 민주국가의 중심임을 선언했다.

특히 저자는 원자력발전의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한다. 특히 자신들의 세대가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막지 못했음을 자책하고, 이는 과학기술계가 잘못된 목표를 위해 복무했음에도 반성하지 않은 전력 때문이라고 본다. 도쿄대는 1960년대에 발빠르게 원자력공학과를 신설했고, 이 학과는 오랜 기간 원전 기업으로부터 거액의 기부를 받아왔다. 저자는 판사가 기업으로부터 판례 연구를 위한 연구비를 받는다면 문제가 되는데, 왜 학자는 ‘산학협동’이란 명목으로 연구비를 받을 수 있는지 묻는다. 게다가 원전 기업으로부터 받는 연구비는 원전의 안전성을 강조하는 데 쓰일 것이 뻔하다. 하지만 원전은 한 번의 실수만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낳는다.

이 책은 옛 학생운동의 폭력성을 비판하거나 낭만적으로 회고하는 대신, 태동의 연원과 의의를 차분히 돌아본다. 아울러 후쿠시마의 재앙을 구체제의 모순과 연관시키는 식견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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