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07

[나카츠카 아키라] 일본인은 ‘일본근대사’를 어떻게 보아 왔는가? - 성산기획

[나카츠카 아키라] 일본인은 ‘일본근대사’를 어떻게 보아 왔는가? - 성산기획

[나카츠카 아키라] 일본인은 ‘일본근대사’를 어떻게 보아 왔는가?
일본인은 ‘일본근대사’를 어떻게 보아 왔는가?
– 나의 역사 연구의 도달점 –
 

나카츠카 아키라(中塚 明) (나라여자대학(奈良女子大學)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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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역사 공부를 시작한 지 70여 년이 지났습니다. 처음부터 연구의 목표를 ‘이것’이라고 정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1945년 8월 15일, 국내외로 역사상 전례없는 참화(慘禍)를 초래하고 끝난 일본의 대패배의 원인을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이 글에서는 “패전 후에 일본인은 패전에 이르는 일본 근대의 역사를 어떻게 보아 왔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일본인은 패전에 이르는 일본근대사를 어떻게 보아 왔는가?

패전 후에 도죠 히데키(東条英機)를 비롯하여 중일전쟁・태평양전쟁 지도자들의 전쟁 범죄를 밝히기 위한 ‘극동국제군사재판’(동경재판)이 열렸던 것은 알고 계시지요? 1948년 11월에 그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은 저명한 작가,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郎)에게 판결 참관기를 의뢰했습니다. 오사라기의 참관기는 《아사히평론(朝日評論)》 1948년 12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400자 원고지로 약 24매에 달하는 장문의 글입니다. 그 중 극히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재판은 살아서 미래에 남을 일본인에게 강하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대들의 나라의 과거였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 그러나 슬프게도 일본 국민은 지금까지 이토록 이면(裏面)까지 파고 들어간 「일본근대사」의 요약을 읽은 적이 없었다. (…)

들으면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일본군의 잔학 행위 대목이었다. 이 민족적 오점을 세계의 눈으로부터 씻어 내는데 앞으로 몇 십 년의 세월이 걸릴지 나는 알지 못한다. 실로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듣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일본인은 문명인이라고 우쭐해 왔다. 그러나 이 사실을 보고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왜일까? 어디에서 그런 행위를 저지를 수 있는 피가 끓어 오른 걸까? (…)

할 말이 없다. 우리가 쉽게 쓰는 소설이 몹시 부끄럽다. 우리가 신뢰해 온 일본 문명의 힘이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뼈저리게 절감한다. (…)

재판받은 것은 저 일련의 피고인들뿐만 아니라 일본 근대의 과거이자 일본인이라는 인상을 떨치기 어렵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일본인의 못된 행위였던 것이다. (…)

오사라기 지로는 어떤 사람인가요? 구라마 텐구(鞍馬天狗) 등의 작가로 유명하다고 말해도 지금의 젊은이들은 잘 모르실 겁니다. 잠깐 소개해 드리면, 동경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에 한때 외무성에 근무하였고, 프랑스 문화의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작가가 되었습니다. 일본문학 사전(事典) 등에서는 자유로운 시민적 정신, 지성, 도덕적 청결 등으로 폭넓은 독자를 매료시켰다고 나와 있습니다. 패전 후에는 1960년에 예술원 회원, 1964년에는 문화훈장을 수상했습니다. 만주사변 이후에도 군부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패전 당시 일본에서는 최고의 지성을 갖춘 작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심각한 반성’에 ‘메이지(明治)’는 들어 있었는가?

오사라기 지로는 동경재판의 판결을 듣고 “일본근대사에 대한 심각한 반성”을 말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이 생각하셨으면 하는 것은, 오사라기가 참관기에서 말하고 있는 ‘일본근대사’에는 ‘메이지(明治)’가 들어 있었는가? 라는 점입니다.

패전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오사라기 작품으로 무네카타 자매(宗方姉妹)가 있습니다(1949년, 쇼와 24년 6월 25일부터 12월 31일까지 《아사히신문》에 연재된 소설입니다). 조선의 북단, 압록강 하구의 마을, 신의주 강 건너 “만주 지역의 마을 안동(安東. 지금의 단동)”의 부시장(副市長)이었던 무네카타 타다치카(宗方忠親). 패전 후에 고국으로 돌아온 두 딸의 신구(新舊) 세대의 삶의 방식, 그것을 조용히 지켜보는 노경(老境)의 타다치카의 전후(戰後)를 쓴 소설입니다.

이 소설에서는 무네카타 타다치카가 압록강 하구에 대규모 항만도시 건설을 꿈꾸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40년을 만주에서 일하면서 살아왔다. 일대(一代)가 그것으로 끝났다고 해도 될 정도인데, 우리가 힘들여 쌓아 올린 사업이 군인들이 시작한 이 전쟁으로 송두리째 뒤집혀졌다. 일생을 바친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大佛次郎自選集現代小說 5 朝日新聞社, 1968, 64-65쪽). 자신들을 신대륙에 건너가서 아메리카를 건설한 영국인에 빗대고 있는 문장도 있습니다. “만주의 근대적 개발에 헌신해 왔는데 그것을 망가뜨렸다.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태평양전쟁의 패배로 끝난 ‘군의 소행’이었다.” 무네카타 자매(宗方姉妹)에 나타난 오사라기의 이러한 생각은 일본 정부의 제2차 세계대전의 총괄과 완전히 판박이입니다. 일본 외무성이 작성한 「일본 외교의 과오」(1951년 4월 완성. 2003년 4월부터 공개)라는 기록에서도 ‘과오’는 ‘만주사변 이후’의 일로 되어 있습니다.

오사라기가 동경재판의 판결을 듣고 “이토록 이면(裏面)까지 파고 들어간 「일본근대사」의 요약을 읽은 적이 없었다”라고 썼습니다만, 이때 오사라기의 머릿속에는 메이지의 전쟁, 즉 청일전쟁도 러일전쟁도 ‘성공 이야기’로 각인되었던 것 같습니다. 동경재판에서는 메이지(明治)의 전쟁은 재판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사라기도, 그리고 대다수의 일본인도 쇼와(昭和)의 패전이 메이지(明治)의 전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채 전후(戰後)의 일본을 살아온 것은 아닐까요?

 

‘메이지의 전쟁’은 조선 침략의 전쟁이었다

‘메이지의 전쟁’을 말하지 않는 것은 일본의 조선 침략을 모르는 상태에서 일본근대사를 보는 것이 됩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한도 가즈토시(半藤一利)는 쇼와사(昭和史)(平凡社, 2003. 문고판, 2009)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섬나라 (…) 적국이 공격해 오면 막을 길이 없다. (…) 일본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조선 반도에 일본 군대를 주둔시켜 굳건히 지키려 하게 된다. 조선 반도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육지로 연결된 만주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 메이지 40년(1907) 무렵에 만주 경영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그 사이에 있는 조선 반도 – 당시의 이씨 조선은 퇴폐하여 외국 세력이 제멋대로 하는, 정치도 군대도 위태로운 상태였습니다. – 에 대한 압박도 강해지고, 마침내 메이지 43년(1910)에 병합해 버리는 강경 수단으로 나온 것입니다. 단, 국제적으로는 인정받고 있었습니다만. (문고판, 9-10쪽)

‘메이지의 영광’을 줄기차게 설파했던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도 말했습니다. “이씨 왕조(조선왕조)는 이미 500년이나 지속되어, 그 질서는 노화될 대로 되어서 (…) 한국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능력은 전무하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언덕 위의 구름(坂の上の雲)) 라고 – .

전후(戰後) 일본의 문필 업계에서 저명한 이 두 사람의 조선관(朝鮮觀)은 패전 후의 일본, 그리고 현재의 일본인 사이에서도 널리 침투해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수천 년의 역사가 있는 나라입니다. ‘코리아’의 어원이 되었다고 하는 고려왕조(918~) 이후에는 현재의 남북조선의 영역을 차지하는 하나의 국가였습니다. 유럽의 국민국가인 독일이나 프랑스 등보다도 훨씬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를, 그것도 이웃 나라를 통째로 식민지화한 역사는, 일본에 의한 조선 지배 이외에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습니다. 자국을 방어할 힘이 없는 나라가 침략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말투는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러일전쟁 전후 시기부터 조선 낙오론・정체론 같은 언설이 강화되었습니다. 한도 가즈토시도 시바 료타로도 그것을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선의 자주, 자립의 싸움과 오늘의 세계

그러나 당연하게도 일본의 불합리한 침략에 대해 청일전쟁 때부터 일본은 조선에서 잇달아 일어나는 항일 투쟁에 직면했습니다. 청일전쟁은 일본군에 의한 서울의 왕궁, 경복궁 점령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일본의 폭거에 대해 광범위한 항일 투쟁이 전개됩니다.

봄에 일어난 동학농민의 봉기는 국내의 혹정(酷政)에 항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에 의한 왕궁 점령에 항의하는 가을부터 이듬해에 걸친 조선 인민의 항일 투쟁은 “목숨을 건 무력 봉기를 지탱하는 지역 농민까지 포함하면 수백만의 일제 봉기”였습니다(井上勝生, 明治日本の植民地, 岩波書店, 2013; 이노우에 가쓰오 저, 동선희 역, 메이지 일본의 식민지 지배 – 홋카이도에서 조선까지, 어문학사, 2014).

오늘날에는 이 조선 인민의 항일 투쟁, 그것을 몰살시킨 일본군의 폭학(暴虐), 포로로 잡은 농민을 논 위에 일렬로 세워 놓고 산 채로 총검으로 찔러 죽이고, 이후의 중일(中日) 전면 전쟁 때에도 중국 각지에서 저질렀던 일본군의 행위가, 청일전쟁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다름 아닌 종군 일본군 병사의 기록으로 밝혀졌습니다(「東學党討伐兵士の従軍日誌 「日清交戦従軍日誌」 徳島県阿波郡」, 京都大学人文科学研究所, 人文学報 111号, 2018年).

한도 가즈토시의 쇼와사(昭和史)에는 중국의 5・4운동(1919년)에 대해서는 4페이지에 걸친 서술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앞서 5・4운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 조선의 민족운동 3・1운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습니다.

이러한 역사 이해와 서술은 일본 정부 관방장관의 칭찬(注)은 받을 수 있어도, 지금과 같은 21세기에는 도저히 통용되지 않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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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 가토 가스노부(加藤勝信) 관방장관은 2021년 1월 13일의 기자회관에서, 한도 가즈토시의 서거에 대해 “대단히 유감이다. (…) 역사의 탐정(歴史の探偵)이라 자칭하며 쇼와(昭和)의 역사를 검증하여, 일반인들에게 알기 쉬운 형태로 후세에 전달하는데 온 힘을 다하셨다. 자신도 역사에 남을 공적을 남기셨다”고 기렸습니다.

* 나카츠카 아키라 : 1929년 오사카(大阪) 출생. 나라여자대학(奈良女子大學) 명예교수. 전공은 일본근대사, 청일전쟁, 한일 관계사. 국내에 번역된 저서로는 김승일 옮김 근대 한국과 일본(범우사, 1995), 박맹수 옮김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2002), 성해준 옮김 근대 일본의 조선 인식(청어람미디어, 2005), 이용수 옮김 「건건록」 : 일본의 청일전쟁 외교 비록(祕錄)(논형, 2021) 등이 있다.

* 출전: 文化センター・アリラン, 《아리랑 アリラン通信》 No. 66, 2021.05.20.

* 번역: 조성환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 이 글은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에서 발행하는 동북아로路 vol.6 (2022년 봄) 24-27쪽에 실린 것을 다시 수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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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佛次郞(오사라기 지로)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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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라 지로( 오사라기
지로우)
Jiro Osaragi 1925.jpg
오부지로(1925년)
펜네임유이 하마
토 한사카 고로
야스사토 레지로 유
야마 류타로
야기 하루 지 하쿠바테이
가래
스다 몬타 로 나니
츠바키 아오
모토노 요시아 미야 테이
테이 하쿠바
키요모토 키타스
다무라
히로

나미
키타로
요시오
탄생1897년 10월 9일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에이 마치
일본 국기
사망1973년 4월 30일 (75세몰) 일본도쿄도 주오구 츠키지
일본 국기
묘지슈후쿠지
직업소설가 · 논픽션 작가
언어일본어
국적일본 국기 일본
교육학사 ( 법학 )
최종학력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
활동 기간1924년 -1973 
장르소설
논픽션
주제일본 의 근대화
대표작쿠라마 텐구1924년 - 1965년) 
아카 호 나오 사  ( 1929 년) (1964년, 논픽션) 천황의 세기』(1969년~1973년, 논픽션)




주요 수상 경력일본 예술원상 (1950년)
문화 훈장 (1964년)
아사히 문화상 (1965년)
데뷔작『일고 로맨스』
친족노지리 포영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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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佛次郞(오사라기 지로, 1897년 ( 메이지 30년) 10월 9일 - 1973년 ( 1973 년) 4월 30일 )은 일본 의 소설가· 작가 . 대불지로(신자체)라고도 쓴다. 가나가와현 출신, 본명은 노지리 키요히코(노지리 키요히코) [1] . 쿠라마 텐구』 시리즈 등 대중문학 의 작자로 유명한 외, 역사 소설 , 현대 소설, 논픽션 , 신작 가부키 [주석 1] 나 동화 등까지 폭넓게 다룬다. 작가의 노지리 포영 (정영)은 형.

평생 편집 ]

태어난다 편집 ]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에이마치(현·요코하마시 나카구 )에 태어났다. 도성사의 산문의 재건이나 본당의 수복 등을 다룬 미야다이 코·인베이의 후손에 해당한다. 부정조는 1850년(가나가 3 년) 5월 27일, 기이쿠니 히다카군 후지이무라(현 와카야마현 고보시 후지타마치)에서 겐베에의 장남으로서 태어나, 19세 때에 메이지 유신 을 경험해 “ 좁은 고향을 나와 넓은 세계에서 활약하고 싶다"고 와카야마시 의 쿠라타 학원(후키가미 신사의 신주·쿠라다 히로시의 가문)에 들어가, 그 후 일본 우선 에 입사, 근면실직한 사람이었다. [2] [3] 기요히코가 태어났을 때는 단신 부임으로 미야기현 이 시노마키 지점에 근무하고 있어 그 후 욧카이치로 옮겼다. 문예 클럽 '에 광가 를 투서해 입선하는 등 문예 취미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요코하마 시립 오타 심상 초등학교에 입학 후, 두 명의 형이 도쿄의 대학에 다니기 위해, 수개월 만에 도쿄에 이사하여 신주쿠의 쓰쿠도 심상 초등학교 에 전학. 소년세계 '에 '두 개의 씨앗'이라는 제목의 작문을 투서하고 '소년 걸작집'(1908년)에 게재되었다. 1909년에 아버지가 정년 퇴직해 함께 살게 되어, 시바시로금 에 전거해, 백금 심상 초등학교 에 전학. 도쿄 부립 이치나카 시대인 1912년에 형정영이 언어학자인 오오시마 마사토시 의 딸과 결혼하여 그 친척 사귀고 이토 이치타카 의 아이들과도 친해졌다. 외교관 을 목표로 한 중에서 일고 의 불법 과에 입학했다. 기숙 기숙사 에 들어가, 야구나 수영 에 열중해, 역사와 연극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쇼우치 사 에에 동양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지우가 있던 히로부미칸 의 다케쓰나카 미즈가 잡지 「중학 세계」의 주필 이 된 인연으로, 1916년에 일고의 기숙사 생활을 르포르타주 풍에 정리한 소설 「이치카 로맨스」를 연재해 1917년 에 간행. 또 교우회 잡지에 소설의 습작 을 발표.

아버지의 강한 희망으로 도쿄 제국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입학. 재학 중에는 동대교수 요시노 작조 가 우익단체 나인  와 대결한 '나나이회 사건'으로 요시노의 응원에 달려갔다. 또 아리시마 타케 로의 휘트먼 의 시를 읽는 '풀의 엽회 '에 참석하거나 '중앙 미술'지에 번역을 기고하기도 했다. 본대의 짐작에 궁금해, 형 포영이 편집장이 되고 있던 연구사의 잡지 「중학생」에, 해외의 전기 소설의 초역이나, 야구 소설의 창작을 게재했다. 동료와 극단 「테아토르 데 비쥬우」를 결성, 하타나카 타츠미 에 의한 민중자의 공연 「푸른 새」에도 협력・참가해, 이것에 빛의 정역으로 출연하고 있던 아즈마 히카루 (본명・하라다 유우 아이)와, 1921년 2월에 학생 결혼한다. 같은 해에는 로만 로랑 '선구자'를 번역하여 출판, 또 스가 타다오 등과 동인지 '잠재' 결성.

시대소설 작가 데뷔 편집 ]

1921년에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스가 타다오의 소개로 가마쿠라 고등여학교(현· 가마쿠라 여학원 고등학교) 교사가 되어 국어와 역사를 가르친다. 1922년에 외무성 조약국 촉탁이 되어 [4] , 번역의 일에 취한다. 박문관 스즈키 도쿠타로 의 지우를 얻어 ' 신취미 '잡지에 사바티니 , 고그 등 해외 대중소설 의 번역·번안소설을 썼다.

1923년에 가마쿠라 고등 여학교를 퇴직하지만, 관동 대지진 의 영향으로 『신취미』도 폐간이 되어, 오락 잡지 『포켓』잡지로 옮겨진 스즈키 도쿠타로로부터 시대 소설 의 의뢰를 받아,  의 「윌리엄· 윌슨 에서 힌트를 얻은 '하야의 겐지'를 발표. 이때 처음으로, 당시 가마쿠라시 하세 의 대불 의 뒷편에 살았던 것에 유래하는 「오오지로」의 펜네임 을 사용해, 이후 이것이 그의 주된 펜네임이 되었다. 이어 고그 「밤의 공포」의 무대를 막부 말기로 옮긴 「귀면의 노녀」를 게재해 평가를 받아, 이것에 등장하는 쿠라마 ​​텐구라고 하는 괴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속의 「마쿠에세 비사 쾌걸 쿠라마 텐구」 시리즈를 쓰기. [5] 『포켓』에는 스즈키 토쿠타로가 편집장이었던 3년간에, 오와지로에서 쿠라마 텐구 외에 「텐구 소동기」 「겨자 세트」등의 유신물의 장편, 유야마 류타로에서 「환상 '의적' 등의 전기소설 , 산나미 키타로에서 돌보기 , 사카시타 고로에서 '사카모토 료마', '카츠라 코고로' 등 사전과 약 20개의 펜네임으로 100편 가까운 시대 소설을 썼다. 1927년(쇼와 2년)에는 소년을 위한 쿠라마 텐구의 『각병위 사자』를 발표. 이후 1959년 발표의 '후카가와 이야기' '니카이도 중기', 1965년의 '신·쿠라마 텐구 지옥 태평기'까지 장단 47편이 그려졌다. 쿠라마 텐구는 오가미 마츠노스케 와 아라시 히로시로등의 주연으로 수많은 영화화되어 시대극의 단골 히어로로서도 인기를 얻는다.

1926년에 오사카 아사히 신문 에서 첫 신문 소설 '빛나는 날 밤' 연재. 1927년 도쿄 일일신문 에 연재한 ' 아카호 나미시 '는 허무적인 검객 호리타 하야토라는 가상의 인물의 눈을 통해 원록 시대 와 집필 당시의 세상과 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시점을 가져온 것으로 획기적인 것으로 알려져 [6] , 단행본화되어 수개월 만에 60판을 거듭하는 인기가 되었다 [7] . 이 '아카호 나미시'로 1928년에 문예가 협회에서 와타나베상을 수상. 사와다 마사지로에 의해 신국극 에서 상연되고, 이후 많이 무대화되었다. 1931년에 연재한 '사이코 츠지로 길'도 강담 등으로 유명한 캐릭터에 인간성을 담아 대중문학화한 효야라고 할 수 있다.

논픽션과 전후 편집 ]

1930년에는 프랑스 제3공화정 을 소재로 한 논픽션 『드레퓨스 사건』을 발표. 1931년부터 요코하마의 호텔 뉴 그랜드 를 일장으로 하고, 「하얀 누나」, 요코하마를 무대로 한 「기리피리」등의 현대 소설을 발표. 1933년에 쓴 러시아 테러리스트 카랴예프에 의한 세르게이 대공 암살 사건을 그린 ‘시인’은 일본에서의 테러리즘 비판의 자세를 나타내고 있었지만, 검열에 의해 크게 삭제되어 ‘ 개조 ’에 게재되었다. 카메라에 집중, 오모리 요시타로 , 사와즈로 , 시미즈 야스오 등과 가마쿠라 사토모회를 결성. 1935년에 아쿠타가와상 , 나오키상이 창설되면, 나오키상 전형위원이 된다. 1938년에 일본문학진흥회 가 창설되면 평의원으로 취임. 1940년에는 문예춘추사 의 보도반원으로 중국 이창전선에 가서 문예총 후 운동 강사로 만주 , 조선 으로 건너갔다. 1943년 말부터 44년 초까지 동맹통신사 의 촉탁으로 남방 말레이 , 수마트라등 동남아시아 각지를 방문했다 [8] [9] . 그 후는 전중 일기를 붙이기 시작하고, 또 아사히 신문 연재의 고토 마타 에의 일대기 '거지 대장'(1945년에 용지 부족 때문에 낙태), ' 소년 클럽 ' 연재의 '쿠스키 마사나리'의 집필을 계속했다. [8] . 1942년에 대정익찬회의 지부인 가마쿠라 문화 연맹이 결성되면 쿠메 마사오 의 의뢰로 문학부장으로 취임. 1945년에 설립된 가마쿠라 문고 에도 협력했다.

전후 8월 19일에 타마네 방송 의 감상 「영령에 사과한다」의 제1회를 아사히 신문에 게재(제2회 이후는 시노쿠라 항상, 요시카와 에이지 , 나카무라 나오카츠 ). 이어 히가시히사구 미야카쿠 의 참여에 초빙되어, 「신문명 건설」이라고 하는 역할을 주어져, 부흥을 위한 강한 의욕을 가지고 준비를 시작해, 치안 유지법  폐지, 여론 조사소의 설치, 스포츠의 진흥 등을 제언하지만 내각은 1개월 반에 총사직해 버린다. 1946년에, 전전 기고하고 있어 애독자이기도 한 잡지 「고락」을 복간시켜, 인기가 되지만, 전후의 용지 할당에 얽힌 출판 불황의 대로로 경영은 악화해, 자신의 원고료도 운영에 채웠지만 1949년에 폐간했다. 1946년에는 연구사의 『학생』의 주필이 되어, 1949년까지 「가마쿠라 통신」을 연재한다.

1948년에 발표한 『귀향』에서 일본 예술원상 수상. 1951년에 첫 희곡 '양귀비'를 쓰고, 오가미 키쿠고로 극단 에 의해 가부키자 에서 상연, 1952년부터는 이치카와 에비조(11세 굿주로) 를 위한 희곡 '젊은 날의 노부나가' 등을 집필, 자주 연출도 다뤘다.

만년 편집 ]

1954년에 위궤양으로 입원, 수술, 또 고야마서점『세계대중소설전집』의 편집에 참가. 1956년에는 후두암의 의심으로 수술해, 이것을 계기에 금연한다. 1960년부터 일본 예술원 회원. 1961년 가나가와 문화상 수상, 또 1961년에 프랑스에 건너 파리·코뮌 조사를 실시해, “파리 연소” 집필 개시. 1962년 제1회 과학자 교토회의 에 참석, 유카와 히데키 등과 핵실험 정지, 군축, 평화운동에 합류했다. 1964년 가을에 문화훈장 , 1965년 아사히 문화상 을 수상했다.
1967년에 메이지 100년을 기념한 아사히 신문의 기획으로, 아사히 신문 에 「천황의 세기」[10] 가 연재 개시되었다.

오와지로 기념관(요코하마시)

문단에 있어서는, 마츠모토 키요하리 가 『주간 아사히』의 경품에 「서향표」로 입선했을 때에는 격려의 편지를 보내, 나오키상에도 추천했다. 1951년에는 다른 위원을 설득하여 구생십란 을 수상시켰다. 나가이 로코 가 '아오이키'로 후보가 되었을 때도 이를 추구했다. 1936년에 「선데이 매일」의 치바 카메오상의 전형 위원을 맡았지만, 이때의 입선자 이노우에 야스시 가 전후 1948년에 「인간」잡지에 응모한 「사냥총」을 사토 하루오 가 읽고, 다이후 지로에게 추천했지만, 다이부는 이것을 『고락』에 올리기 보다는 『문학계』가 향하고 있다고 생각해, '사냥총', '투우'가 '문학계'에 게재되어 이노우에의 아쿠타가와 수상으로 이어졌다. 1950, 51년의 나오키상에서는, 유머·샐러리맨 소설이라고도 할 겐지 치타 를 강하게 추천했다. 1964년에는 나가이 노코와 안자이 아츠코 를 추천하고 있다.

1968년 메이지 100년 기념 예술제 특별공연으로 '삼자매'가 상연된다. 1969년에 극작 활동에 의해 기쿠치 관상 수상, 「모라에스 전집」에 의해 포르투갈 문화 훈장 수상.

1972년 5월에 중앙구 츠키지의 국립암센터 병원에 입원. 병상에서도 「천황의 세기」 집필을 계속했지만, 1973년 4월 25일에 연재 1555회를 가지고 휴재. 이것이 절필이 되어, 같은 해 4월 30일에 전이성 간암 에 의해, 국립암 센터 병원에서 사망. 가마쿠라 오기가야 의 슈후 쿠지 에 묻혔다. 계명은 다이후지로 거사 [11] . 같은 해 실적을 기념해 아사히신문사가 ' 오오이지로상 '을 창설, 다음 74년 가을에 제1회 수여식이 열렸다.
가와모리 호조 는 추도 회상으로, 1950년의 ' 문학계 '에서 다이부와 대담한 것을 바탕으로 '천황의 세기'는 '막부 말기, 메이지, 다이쇼, 쇼와의 어느 시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 를 통한 타이가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 대작에는 소설가 다이후지로의 전재능이 동원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12] . 장형 포영의 딸 마사코를 스스로의 양녀로 하고 있다.

몰후, 희망에 따라 약 3만 5천권의 장서와 애장품이 요코하마시에 기증되었고, 1978년 항구가 보이는 언덕공원 에 오부지로 기념관이 개관되었다. 오오지지로 기념관에서는 자료의 보존, 정리, 공개 외에 관계 문헌의 수집도 실시해, 1986년부터 「오사라기 선서」로서 목록을 간행하고 있다. 기증자료 중에서, 다이부지로 연구회(회장 무라카미 미츠히코 ), 다이부지로 기념관 연구원 후쿠시마 행일등에 의해, 전중 1944년부터 다음 45년 10월까지 쓰여진 일기가 정리되어 「패전 일기」가 간행 했다. 또한 가마쿠라의 저택은 주말에만 '대불차랑' [13] [14] 에서 2019년 8월까지 일반 공개됐다.

2001년 ( 헤이세이 13년)에는 평론을 대상으로 한 「 다이쓰지로 논단상」이 신설되었다.

인물 편집 ]

호텔 뉴 그랜드 의 옥상에서(쇼와 초기)

책을 좋아하는 부피가 작가에게 편집 ]

일고시대에 쓴 '이치타카 로맨스'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원고료 50엔을 받았다. 이후 학생 시절부터 각 잡지에 소문을 쓰게 되지만, 대부분은 본대로 사라졌다고 한다. 일학기분의 식비를 받으면, 마루젠 으로 수당하는 대로 원하는 책을 사서, 책장에 가득 늘어놓고, 1월도 하지 않는 사이에 다 써버린다는 시말이었다. 그 때문에 책을 옛 서점에 팔거나 잡지에 소문이나 번역, 끝은 시사해설까지 실어 생활을 이어간다고 한다. 읽기 위해 구입하는 것 외에 희소책이나 호화책을 벌집하는 것을 취미로 하고 있는 측면도 있었다. 나중에 "마루젠에게 지불하기 위해 나는 원고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내 이력서 ")라고 회상하고 있다.

고양이 좋아 편집 ]

고양이 를 평생의 반려라고 말할 정도로 큰 고양이를 좋아했다 [15] . 고양이를 소재로 한 많은 에세이와 소설, 동화를 남기고 있어 '아카호 나미시'에 등장하는 우에스기 가가 치사카 병부 도 고양이를 좋아하는 설정으로 하고 있다. 동화 '스위토고코'는 '드물게(다른 사람으로부터 의뢰받아) 쓴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태어난 것이었다' '나의 일대의 걸작'이라고 말하고 있다 [16] . 노라 고양이를 포함해 귀찮은 것을 보았던 고양이의 수는 500마리를 내리지 않는다고 한다. 고양이를 5마리까지 하는 것이나, 고양이에 대해 사치스럽게 하지 않는 것을 유언으로 남겼지만, 남겨진 부인도 남편의 영향으로 고양이를 좋아하게 되어 있어,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부인이 죽은 후, 남겨진 고양이들은 큰 고양이를 좋아하는 도우미에 의해 받았다고 한다.

가마쿠라를 사랑한다 편집 ]

가마쿠라 문사 라고 불린 작가 중에서는 일찍부터 가마쿠라에 살기 시작했고 , 가마쿠라를 각별히 사랑했다. 1933년에는 거주하는 오모리 요시타로 , 사와즈로 , 기하라 키요 , 시미즈 야스오 등과 가마쿠라 아마추어 사우카이를 결성. 전쟁 전에서는, 소설가 동료의 구메 마사오 등과 가마쿠라 카니발 의 기획에도 종사하고 있다 [18] . 택지 개발 붐이 가마쿠라에 밀려, 1964년(쇼와 39년)에는 가마쿠라의 성역인 쓰루오카 하치만 미야 뒤산·통칭 미타니까지가 개발될 것 같게 되었을 때, 현지의 주민과 함께, 고도로서의 경관 와 자연을 지키려는 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전국적인 운동을 전개하고, 고바야시 히데오 , 오늘 출해 , 나가이 류오 , 스즈키 오오조 , 나카무라 미츠오 , 가와바타 야스나리 , 요코야마 류이치 , 이토 심수 , 츠즈키 키요카타등 문화인과 폭넓은 시민의 협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가운데, 가마쿠라의 귀중한 자연과 역사적 환경은 시민 스스로의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기운이 태어나 재단법인 가마쿠라 풍치 보존회가 1964년(쇼와 39년) 12월에 탄생했다. 그 설립 발기인 및 초대 이사가 되어, 풍치 보존회의 설립에 큰 공헌을 했다. 가마쿠라 풍치 보존회의 정신적 모체가 된 영국의 내셔널 트러스트 의 일본에의 소개자가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1966년(쇼와 41년)에 초당파의 의원 입법에 의해 고도 보존법이 제정되어 같은 해 6월에 오타니야마 하야시 1.5 헥타르의 인수에 성공. 이것으로, 가마쿠라 풍치 보존회는 일본의 내셔널 트러스트 제1호라고 불리게 되었다.

즈이센지 의 재흥에도 전후는 노력해, 1949년에 개조 꿈창 소석의 꿈창 기육 백년 축제를 계기로, 오모테 가사 사범의 부인이 여기에서 다회를 열고, 그 후 매년 항례로 개최되었다 [19] .

2019년 11월 시점에서, 가마쿠라시 유키노시타에 있는, 과거에 다이아키가 소유해 다정으로서 사용되고 있던 초가 지붕의 건물이, 1억 5천만엔으로 판매되고 있다. 1,043㎡의 토지에 서 있는 이 건물은 가마쿠라시의 경관 중요 건축물이다.

작품 편집 ]

1956년

쿠라마 텐구와 시대 소설 편집 ]

「쿠라마 텐구」는 당초는 근황 측에 정의를 요구하는 스타일이었지만, 1927년 소년을 대상으로 『각병위 사자』를 쓰는 무렵부터는 페어플레이의 정신에 의한 사회가 지향되게 된다. 또 「각병위 사자」에서는, 소년 독자의 시점을 도입하기 위해서 스기작 소년을 등장시켜, 쿠라마 텐구는 소년들에게도 히어로가 되어 갔다. 쿠라마 텐구의 연작을 계속 쓰는 것에 곧 고통을 느끼게 되어 미토의 텐구당 을 소재로 한 「텐구 소동」(1925)의 「서」에서는 「작자는 「쿠라마 텐구」에 대해 안고 하는 불만을 풀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고 말해도 차이가 없습니다.”라고도 썼다.

1945년에 연재된 『쿠라마 텐구 패하지 않음』에서는 오카노 신스케를 자칭하는 쿠라마 ​​텐구는 생밀 사건 에 대한 대응으로 영국에 대한 저항을 주장해 막부에 포박되어 형사한 것처럼 보였지만 패전 나중에 발표된 최종회에서는 살아나며, 이후는 전후의 공간을 살게 된다. '신도쿄 그림'(1947-48년)에서는 메이지 유신 후의 도쿄에서 카미노 유키치와 자칭해 숨어 살고 있는 쿠라마 ​​텐구는 구막신들의 삶을 둘러싸고 신정부와도 대립해 간다. 마지막 시리즈 작품 '지옥 태평기'(1965년) 이후 1967년부터 쿠라마 텐구와 같은 시대를 소재로 한 '천황의 세기'의 연재를 시작한다. 여기에서는 攘夷은 시대의 광기였다고 하는 역사관, 사쓰마·초슈에 의한 메이지 정부에의 비판적인 시점이 반영되고 있다 [20] .

영화에서의 쿠라마 텐구 역은 아라시 히로시로가 대인기로 수많은 제작 공개되었지만, 1953년에 원작자로서 일본 문예가 협회 를 통해, 영화 회사 측에 「저작권 무시」 「원작을 마음대로 재작성하고 있다」 '영화의 쿠라마 텐구는 사람을 너무 베고 있다'는 문제로 상영 중지를 제기했다. 다이가 자신이 「텐구 푸로다 쿠슌」을 시작해 토호 와 계약해, 각본에도 참가해 , 코호리 아키오 주연으로 신쿠라마 텐구 3개를 찍었지만 평판은 좋지 않고, 다시 아라시 히로시로 주연으로 해 2개 를 만들고 종료 [21] . 그 후는 토에이 에서 히가시치요노스케 , 다이에이 에서 이치카와 뇌조 등에 의해 제작되었다.

『빛나는 날 쓰는 날』은, 이것도 사바티니의 『스카라루슈』를 밑바닥으로 한 작품으로, 이것을 읽은 기쿠치 히로시 는 「그것은, 너, 대중문학의 손을 전부 사용하고 있지 않을까.그만큼 쓰여져서는, 나중의 자가 쓸 수 없게 될거야」라고 말했을 정도로, 연재가 시작된다고 평판이 되어 3사 경작으로 영화화되고, 또 오다 토미야 삽화의 축의봉투나 멘코 등도 판출되는 등, 같은 시기에 ' 오사카 매일 신문 '에 연재되어 있던 요시카와 에이지 ' 나루토 비첩 '과 인기를 2분 했다 .

『아카호 나미사』에서는 사십 칠사 를 기존의 「의사」가 아닌 「나나」로 파악해, 전 록기 에서 의 야나기사와 요시호 등 새로운 세력과 손을 잡은 관료 정치에의 구래의 무사도로부터의 반항으로서 그린 곳이 획기적이었고, 그 후의 충신장의 이야기에도 영향을 주었다 [23] . 전후 1952년이 되어, 아카호 나미의 「불의사」의 한사람인 오야마다 쇼자에몬 을 주인공으로, 오오시 내장 조조 의 조형은 그대로, 토벌에 의문을 안고 의사를 탈락해 나가는 나사를 그린다. 1954년 신작 가부키 ‘겨울의 숙소’에서도 쇼자에몬을 소재로 했다. 쿠스키 마사 나리 전사 600년에 해당하는 1935년, 오쿠스공 600년 기념사업의 일단으로서 아사히신문에서 『오쿠스쿠공』을 연재해, 후쿠오 천황 의 오키 탈출까지를 연재 100회로 단락으로 종료. 이어서 1943년에 정성전 사후를 그리는 「미쿠마리 이야기」, 마사나리와 야마토에 관련된 기행문 「근왕사정행각 구의 엽음」을 집필.

1928년에 「대중문예의 전환기」를 발표해, 러브 레이 , 디포, 리라단 , 아폴리네르 등의 공상 풍부한 신문예를 목표로 내걸고, 동년에는 해양 모험 소설 「고 로츠 키선 」을 연재, 다음 1월부터 는 제목을 '바다의 하야오'로 바꿔 무대도 시베리아 에서 베트남 까지 펼친 규모의 큰 이야기를 전개했다. 니치렌 650년 대원기사를 2년 후에 앞둔 1930년에는 '니치렌'의 연재를 의뢰받아 전설도 도입하면서 인간으로서의 니치렌상을 그렸다. 1933-34년에 「시사 신보」에 「안정의 대옥」을 연재. 당시의 고바야시 타키 지옥사나 교토대학 의 타키가와 사건 등의 언론탄압에 대한 항의의식이 담겨져 미토번사 히하부 이사지 와 이이 나오히로 가신 나가노 주젠 들을 중심으로 그린 ​​것이지만, 전반부까지 연재 종료해, 사쿠라다몬 밖의 이상 까지 이르는 후반부는 1975년의 「오오지지로 시대 소설 전집」에 수록되었다 [24] . 또 안정의 대옥에 대해서는 『천황의 세기』에서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사쓰마 비각」은, 다이불은 3번 집필하고 있다. 1번째는 1932년에 「」(코단샤)에 연재되어 사쓰마 에서 돌아온 막부 은밀이, 행방불명이 된 동료를 위해 갈등과 대결을 반복하면서 다시 사쓰마를 목표로 하지만, <오사카의 권> 를 끝낸 곳에서 연재가 낙태. 미완인 채 영화화도 됐다. 1946년에는 자신이 주필을 맡는 '학생'( 연구사 )에 연재되어 행방불명이 된 막부 은밀한 아이의 형제가 아버지를 찾아 사쓰마로 향한다는 청춘 소설이 되고 있다. 3번째는 1955년에 홋카이도 신문・중부신문・니시니혼신문 에 연재되어, 1번째와 같은 근립으로, 행방불명의 은밀한 아내와 동생이나 다양한 인물이 주인공과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로, 다음 해 단행본으로서 간행되었다. 사쓰마 비각이라는 말은 사쓰마로 향한 은밀이 에도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드문 일이기 때문에, 외출한 채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유로서 사용되었지만, 대불은 1955년의 연재 예고로 「재미있는 말이고, 소설이 되는 사정이다」 「굳이 같은 제목을 사용해, 새롭게 쓰는 것은, 자신이, 정도로 이 말을 좋아하기 때문이다.」라고 자세를 말했지만, 전작에 비해 인물의 동기나 남녀의 연애심리가 치밀하게 묘사된 작품이 되고 있다.

전쟁 말기가 되면 고토 마타베이라는 강권에 굴하지 않는 순수한 무장의 모습을 그리는 시대물 '거지 대장'으로 그 자리를 옮긴다. 1950년에 '오보로타마'를 신문 연재할 때는 "오랜만에 깃발 명백한 대중소설을 쓰려고 생각했다"고 말하며, 타누마 시대 를 무대로 권력의 벽에 닿은 젊은 깃발의 모습을 통해 , 사람들의 자립 정신의 각성을 그리고 있다 [25] .

1967년에 NHK로부터 메이지 100년 기념 에 연관된 역사 드라마의 집필을 의뢰받아 소설 작품에서는 미간이지만 『아마의 츠지』를 중심으로 『그 사람』『장미의 기사』 등을 짜넣어 유신의 시대에 사는 기모토 3명의 자매의 생애를 그린 타이가 드라마 ' 삼자매 '가 방영되었다( 스즈키 나오유키 각본). 1968년 11월에 같은 구상을 바탕으로 희곡을 집필해, 신작 가부키가 국립극장 에서 상연되었다. 치야 미치오 는 극평에서 "이 희곡의 주역은 역사이다" "세 명의 여동생들의 운명을 통해 그 배후에 사람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큰 역사의 흐름이 그려져 있다"고 했다 . 26] . 대불의 시대 소설은 빅토르 유고 나 조제프 콘래드 와 같이 정치로부터 눈을 떼지 않고 동시에 역사상의 성인의 존재감을 능가하는 '세계성이 있는 로맨스'로 펼쳐지는 특징이 있다 . ] .

현대소설 등 편집 ]

1933년의 「기리 피리」이래, 태어난 고향 요코하마의 막부 말기 개화기를 무대로 한 작품에, 「불꽃의 거리」 「환등」 「장미의 기사」 「그 사람」등이 있다. 「기리 피리」에 대해서는 나중에 「나는 요코하마 출생이고, 메이지 시대의 낡은 요코하마에 향수의 야한 것을 느끼고 성장해 왔다.지진 재해 후에 전재로, 원래의 모습이 흔들리지 않고 사라진다 라고 말해 보면.『기리피리』를 써 두고 좋다고 생각해 온다」(『오오지지로 작품집』1951년 뒤로)라고 쓰고 있다. 1936년에 아사히 신문에 연재한 '하얀 언니'에서 현대 소설도 쓰기 시작, 계속되는 '후란스 인형'에서는 댄스홀에서 일할 당시에는 드문 댄서 자매를 그려 '눈붕괴'에서는 사회 불안을 느끼기 시작해 온 쇼와 초기 의 젊은이들을 그렸다. 요즘 하룻장으로 하고 있던 호텔 뉴 그랜드를 우울해 맑음으로 자주 빠져 나와, 요코하마 중화가 의 술집이나 중화 요리점에서의 교제나 인물 관찰로부터, 「기리 피리」등의 작품이 태어났다 [28] .

『하얀 언니』(1932)에 등장하는 모던 걸 사보코가 고백하는, 소유물로부터 느끼는 답답함은, 살틀구토』에 그려지는 실존의 불안과 동질인 것이며, 인간이 소지품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점 에서 마르크스 초기의 소외론에 가까운 것, 또 『쿠로시오』(1948)에서는 피에르 조제프 프루돈 의 「재산은 훔친다」라는 명제를 바탕으로 한 대사가 있는 것을, 무라카미 미츠히코 는 지적 하고 있다 [29] . 이노우에 야스시 는 일본의 문단에는 하나의 특별석이 있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작가로서 이즈미 카미카 , 이어서 타니자키 준이치로 , 그리고 다이에지로라고 말하고 있다. 쓰즈키 미치오 는 오오쓰지로의 문체 모사에 힘쓰고, 자신의 초기 시대 소설은 「카쿠다 키히사오가 쓰는 듯한 전기 소설을 오오쓰지로의 문체로 쓴 것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30] .

전후 곧 발표한 '귀향'에 대해 다이가는 "전후에 마음에 걸린 한 분노에서 태어났다"고 말하고, 패전 직후 일본의 혼란에 탔던 사람들이 전 군인의 니히리스트와 대비하여 그려져 있습니다. 또 이어서 쓰여진 『종방자매』 『여로』 『풍선』 등의 작품과 함께, 야마모토 켄요시 는 「씨의 시대 소설에 있던 로마네스크인 요소는, 여기에서는 점차 그림자를 비틀어 와, 심경 소설적 한 요소가 빡빡하게 더해지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31] '귀향'은 1955년에 영어 번역되었으며, 이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노르웨이어, 핀란드어로 간행되었다. 『여로』도 1961년에 영어 번역, 이어 스웨덴, 핀란드어로 번역된다. '귀향'에 대해 '네이션'잡지에서는 "전후 일본 외에 유례없는 생활 풍경 묘사 속에서 이 소설은 인간의 숙련, 애정, 공포, 탐욕의 보편성을 다룬다."라고 평가했다 [32] .

논픽션 편집 ]

군국주의 가 높아진 시대가 되면 '토이 고인의 편지' 등 에세이, 현대소설, 서양논픽션 등을 통해 시대 비판을 시도했다. 해방」잡지에 사카이 리히코 , 아라하타 한촌 , 시라야나기 히데코 에 의한 사회 운동 사상의 사건을 「사회 강담」이라고 명명해 게재하고 있었는데 촉발되어, 1930년에 「개조」잡지에서 「드레퓨스 사건」을 소재 로 한 논픽션 작품을 연재. 이에 대해 자신도 「일본의 군부가 독재적인 경향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미약하면서도 저항하는 숨겨진 의도로, 굳이 쓴 것」 「국가에 있어서의 군부의 특수한 지위가 위험을 태우는 성질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말했다. 부랑 제 장군 과 부랑지스무 에 대해 쓴 『부우랑제 장군의 비극』에서는 나카노 마사타카 가, 그것이 아라키 장군 을 쓰고 있는 것이라고 오모리 요시타로 에게 말했다고 한다 . 1933년에는 혁명 전 러시아의 세르게이 대공암살 사건을 그린 '시인'을 '개조' 게재. 이어서 니콜라이 2세 암살을 시도한 에브노 아제프에이타는 "달콤한 휴머니스트였던 나는 아제프와 같은 괴물이 인간 속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놀라움의 눈을 엿볼 수 있었다. 이 괴물을 출생시킨 사회적 조건에 주의해 , 일본이 몹시 그것과 비슷한 것을 알았다”가, “시인”에서는 일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검열로 크게 삭제되고 있어, 이미 그러한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시대가 없어져 있었기 때문에, 전후 1946년에 이어 '아사히 평론'에 '지령'으로 연재되었다. [34] 또 「시인」에 대해서는, 「같은 소재를, 후년이 되어 알베르·카뮤 가 연극 [주석 2] 에 그려, 일본에서도 민예 가 상연했다.그러나 카랴에프에 대해서는 먼저 출발한 나 쪽 가 잘 쓴 것 같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33] .

파나마 사건』도 원래는 『부우랑제 장군의 비극』에 이어 쓸 예정이었지만, 일본의 의회가 대정익찬화 를 향한 시기였기 때문에, 프랑스 의회의 「부패 타락, 턱턱」을 쓰는 것은 「 현 상황에 불편함으로 독재세력의 치마를 타도록 기억하고  을 접었다. 를 모아달라고 했다 [33] .

소설(쿠라마 텐구) 편집 ]

  • 『막부 말비사 쿠라마 텐구』 히로부미칸 1925년(단편집)
  • 『쿠라마 텐구 어용 도비문』 히로부미칸 1925년
  • 『쿠라마 텐구 코토리를 키우무사』 히로부미칸 1927년
  • 『각병위 사자』 혼대방 서방 1927년
  • 『쿠라마 텐구 여랑(상하)』 아사히 신문사 1928년
  • 『쿠라마 텐구 야마옥 당 기담(상하)』 선진사 1931년
  • 『텐구 복장』 신시오샤 1932년
  • 『쿠라마 텐구 청동귀』 선진사 1932년
  • 「쿠라마 텐구 지옥의 문」신소설사 1935년
  • “쿠라마 텐구 에도 일기” 히로부미칸 1936년
  • 『오존치 쿠라마 텐구』 야후라사 스기야마 서점 1943년
  • 『쿠라마 텐구 사쓰마의 사자』 야후사 스기야마 서점 1943년
  • 『텐구 쓰러뜨려』 야후사 사 스기야마 서점 1944년
  • 「안마의 불 축제」호쿠코 서방 1944년
  • 『쿠라마 텐구 신도쿄 그림』 코단샤 1948년
  • 『쿠라마 텐구 청면야샤의 권』 매일 신문사 1953년
  • 『쿠라마 텐구 참새의 소식』 매일 신문사 1953년
  • 『쿠라마 텐구 유타리의 사무라이』 매일 신문사 1955년
  • 『쿠라마 텐구 그림자처럼』 매일 신문사 1956년
  • 『쿠라마 텐구 여로 거미』 매일 신문사 1957년
  • 『신・쿠라마 텐구 지옥 태평기』광풍사 서점 1966년
작품집
  • 『결정판 쿠라마 텐구(전 10권)』 중앙공론사 1951년, 신판 1969년 - 「각병위사자・야마타케당 기담」 「텐구회장・안마의 불 축제・바람과 함께」 「에도 일기, 에도의 유에이, 요도의 강배」, 「청면 야차, 소토로 두건, 눈의 운모자카」・고존치 쿠라마 텐구・검은 손형」「그림자와 같이・후카가와 이야기・니카이도 중기」「귀면의 노녀・어용 도이문・코토리를 키우는 무사」
  • 『쓰루미 슌스케가 선택하는 쿠라마 ​​텐구(전 5권)』 쇼가쿠칸 문고 2000년 쇼가쿠칸(신판) 「지옥 태평기」
  • 『시대 소설 영웅 열전 쿠라마 텐구』죠다 카즈오 편 : 중공 문고 2002년(「귀면의 노녀」 「검은 손형」 「서국도 중기」 「밤의 공포 김선」 「쿠라마 텐구와 30년」
  • 『쿠라마 텐구걸 작선(전 3권)』 문예 춘추 2007년
    • 별권 “쿠라마 텐구 독본” 오오지지로 기념관편 2008년

소설 편집 ]

  • 『이치타카 로맨스』 도아도 서방 1917년(노지리 쿠사오 명의)
  • 『포물綺談 환상의 의적』 히로부미칸 1926년(유야마 류타로 명의)
  • 『에도기담 춘연화상기연』 히로부미칸 1926년
  • 빛나는 날 구름하는 날』 혼대방 서방 1927년(『오사카 아사히 신문』1926년 8월-1927년 6월)
  • 『가미카제 검도진』 히로부미칸 1927년(유야마 류타로 명의)
  • 아카호 나미사』1929년(『도쿄 일일신문』1927년 5월~1928년 11월)
  • 겨자조』 개조사 1929년(『국민신문』 1929년 1-12월)
  • 『유령선 전기』 선진사 1929년(『일본 소년』 1927년 7월~1928년 5월)
  • 『고로츠키선』 개조사 1929년(『오사카 매일신문』
  • 『카게라후 사토시』 선진사 1930년(『코단 클럽』1929년 11월-1930년 5월)
  • 『괴담 기타』 텐닌샤 1930년
  • 『유비 마유키』 개조사 1930년(『도쿄 일일 신문』『오사카 매일 신문』1929년 6월~1930년 5월에 중단, 속편 『경안 이변』-『문예 춘추 올 사물호』1931년 5월~ 1932년 9월)
  • 『군사탐정편』 텐닌샤 1930년
  • “수선 지옥” 텐닌샤 1930년
  • 『닛렌』 선진사 1931년(『요미우리 신문』 1930년 4월~1931년 3월) 후 도쿠마 문고
  • 『하얀 누나』 개조사 1932년(『도쿄 아사히 신문』 1931년 3-7월)
  • 『일본인 오인』 하네시 코시에 코단샤 1932년
  • 『鼠小僧次郎吉』新潮社1932년(『코단 클럽』1931년 1월~1932년 6월)
  • 『후란스 인형』 신시오샤 1932년(『시사 신보』 1932년 3-8월)
  • 『소노의 과조풍권』 비범각 1933년
  • 『산을 지키는 형제』 개조사 1933년
  • 『기리피리』신시오사
  • 『밤의 진주』오카쿠라 서방 1934년(『주간 아사히』1934년 1-4월)
  • 「안정의 대옥」개조사 1935년(『시사 신보』
  • 『수빙』 신소설사 1935년(『부인 공론』 1934년 1-12월)
  • 『이풍 흑백기』쇼와나가편 소설 ​​전집:신시오샤 1935년
  • 『편지의 여자』타케무라 서방 1935년(『중앙 공론』 1933년 1월)
  • “미토 황문” 중앙 공론사 1935년(“도쿄 아사히 신문” 1934년 4-11월) 후 토쿠마 문고
  • 「텐구 소동」유신 역사 소설 전집 제4권 개조사 1936년
  • 『오쿠스공』 개조사 1936년(『아사히 신문』1935년 4-8월)
  • 『오쿠보히코 사에몬』 히로부미칸 1936년(『도쿄 일일신문』 1935년 8월~1936년 5월)
  • 『바다의 여자』신시오샤 1937년(『일출』1936년 1-12월)
  • 설붕』 신시오샤 1937년(『도쿄 아사히 신문』 1936년 8-12월)
  • 『아마의 츠지』 신시오샤 1938년(『도쿄・오사카 아사히 신문』1937년 5-12월)
  • 『일본의 호시노스케』 다이니혼 유후코 코단샤 1938년
  • 『불꽃의 거리』 아오키 서점 1938년
  • 『꽃무늬』 실업지 일본사 1939년(『신녀원』1938년 1월~1939년 4월)
  • 『장미의 기사』 중앙 공론사 1939년(『부인 공론』 1938년 1-11월)
  • 『열풍』鱒書房コバルト叢書 1940년
  • “석양 후지” 히로부미칸 1940년
  • 『수정산의 모험』 흥아서방 1940년
  • 『겐구로 요시츠네』 흥아서방 1940년
  • 『바다의 아이들』 글리코 주식회사 1940년
  • 『살아있는 히데요리・회랑』 비범각 1940년(『주간 아사히』1937년 1-5월)
  • 『미녀 벚꽃』 히로부미칸 1940년
  • 『그 사람』 히로부미칸, 1941년 이후 「그 사람 마지막 깃발」 토쿠마 문고
  • 『운작은 하늘에』 하쿠분칸 1941년
  • 『얼음의 계단』 중앙공론사 1941년(『도신문』1939년 12월~1949년 6월)
  • 『아편 전쟁』 모던 일본사 1942년
  • 「밝은 동료」스기야마 서점 1942년
  • 『일하는 유키짱』 타이코도 1942년
  • 『겨울의 태양』 스기야마 서점 1942년
  • 『鴎』八紘社杉山書店 1943년
  • 『죽음보다 강해 소설』 야쇼사 스기야마 서점 1944년
  • 『미쿠마리 이야기』 백림 서방 1944년(『매일 신문』 1943년 10-11월)
  • 「종주로 두건」실업지 일본사 1945년
  • 『원실 아침』 육흥 출판사 1946년(『부인 공론』 1943년 1-11월, 속편 『카라후네 이야기』-『신녀원』 1945년 1월~1946년 3월) 후 도쿠마 문고
  • 『바다의 남자』상문관 1947년. 사이토 500 화
  • 거지 대장』고라쿠샤 1947년(『아사히 신문』 1944년 10월 25일~1945년 3월 6일, 『신태양』 1945년 12월호, 『모던 일본』 1946년 1・2월~3월 호)의 네카도카와 분고, “거지 대장 고토 마타베에” 도쿠마 문고
  • 『한여름의 밤의 꿈』 단정 서방 1947년(『주간 아사히』 1946년 8-11월)
  • 『나체』 대나무 서방 1947년
  • 『환등』 이하라 분고 1948년(『신오사카』 1947년 9월~1948년 1월)
  • 『해적선 전기』 도코 출판사 1948년
  • 『쿠로시오』 매일 신문사 1948년(『선데이 매일』 1948년 1-4월)
  • 「얼음의 계단」만리각 1948년
  • 『춘우의 코토』 도와사 1949년
  • 「하루우의 방울」도와사 1949년
  • 귀향』고락사 1949년(『매일 신문』1948년 4-11월) 이후 매일 신문사 , 신시오 문고 외. 일본예술원상 수상
  • 『신키』고라쿠샤 1949년
  • 종방자매』 아사히신문사 1950년(『아사히신문』 1949년 6-12월)
  • 『첫사랑』도와샤 1950년
  • 『겨울의 신사』신시오샤 1951년(『선데이 매일』1951년 1-4월) 후 코단샤 문고(대중문학관)
  • 오보로 타마타」 중앙 공론사 1951년(『석간 매일 신문』
  • 『탄젠 병풍』 계명사 1951년(『매일 신문』 1945년 9-11월) 이후 광풍사 서점
  • 『격류』 문예춘추신사 1953년(『일본경제신문』 1951년 10-1952년 2월) 이후 도쿠마 문고, 아사히 문고. 젊은 날의 시부 자와 에이 이치
  • 『여로』 아사히 신문사 1953년(『아사히 신문』 1952년 7월~1953년 2월)
  • 『48번째 남자』 가와데 신서 1955년(『요미우리 신문』 1951년 4-11월) 나중에 도쿠마 문고
  • 『아마의 츠지』 가와데 신서 1955년
  • 『풍선』신시오샤 1955년 이후 신시오 문고, 카도카와 문고
  • 『마보로시 고개』 동광사 1955년(『집의 빛』1954년 1월~1955년 4월)
  • 유레이선』 아사히 신문사 1956년
  • 사쓰마 비각』 동광사 1956년(『학생』 1946년 1-5월) 후 도쿠마 문고
  • 『아사츠마 후나』광풍사 1957년
  • 「재미있는 녀석」광풍사 1957년
  • 『다리』 매일 신문사 1958년
  • 「겨울 따뜻한」광풍사 1959년
  • 『사쿠라코』신시오샤
  • 「공작 나가야」광풍사 1960년
  • 「무지개 다리」광풍사 1961년
  • 『그 사람』광풍사 1961년(1941간의 동제와는 별서)
  • 『유령기책』광풍사 1962년
  • 「꽃이 피는 집」광풍사 1962년
  • 『불꽃 기둥』 매일 신문사 1962년 이후 「불꽃 기둥 오다 노부나가」 도쿠마 문고
  • 『달의 사람』 신시오샤 1964년 이후 『달의 사람 도요토미 히데요리』
  • 「아카야시키의 여자」아사히 신문사 1967년
  • 「도화사」광풍사 서점 1967년
  • 『사람미해』일본문화사・문화신서 소설선집 1967년(『석간중외신문』1950년 1-6월)
  • 「석양 코지」매일 신문사 1967년

희곡 편집 ]

  • 『양귀비』 1951년
  • 『젊은 날의 노부나가』 1952년
  • 『젊은 날 노부나가 희곡집』 아사히 신문사 1953년 아사히 문화 수첩
  • 『츠키야마 덴 시말』 1953년(『올사물』 1953년 11월)
  • 『에도의 석양』 1953년
  • 「기리 피리」1956년
  • 『마계의 길진』 1957년
  • 『대불염상』 1960년
  • 삼자매』 1968년(1967년 대하 드라마 원작)
  • 『전국의 사람들』 1971년

아동 문학 편집 ]

  • 『늑대의 소년』 유카와 히로후미사 1936년 선발 소년 소녀 독물 문고
  • 『아카호 의사』 히로부미칸 1940년
  • 『하나마루 코토리마루』[35] 중앙공론사 1941년
  • 『쿠스키 마사나리』 코단샤 1943년
  • 『야마모토 56원 효』 아리오카 이치로 그림
  • 『사쓰에이 전쟁』 가사마쓰 시로나미 북광서방 1944년
  • 『아버지를 물어봐』 오치아이 등화 중앙 공론사 1952년
  • 『스위치고코』아사쿠라 섭화 코단샤 1971년(『아이 아사히』 1946년 10월), 신판 1979년
  • 『다이쓰지로 치쿠마 일본 문학 전집 38』 쓰쿠마 서방 1992년(「종주로 두건」 「환등」 「토이 고인의 편지」 「토이 고인의 대화」)

논픽션 편집 ]

  • 『드레퓨스 사건』 텐닌샤 1930년, 아사히 선서 1970년(『개조』 1930년 4-10월)
  • 『부우랑제 장군의 비극』 개조사 1936년(『개조』 1935년 1-10월)
  • 『시인』 고락사 1946년(『개조』 1933년 5월) 병록 「지령」(『아사히 평론』 1946년 3-9월) 카도카와 문고 1956
  • 『파나마 사건』 아사히 신문사 1960년
  • 『파리 연소』 아사히 신문사(전 3권) 1964년, 신판 2008년, 아사히 선서(전 4권) 1975년
    • 이상은 『대불지로 논픽션 전집』(전 5권), 아사히 문고 <대불지로 논픽션 문고>(전 9권)로 재간.
  • 천황의 세기」( 유작 ·미완) 아사히 신문사 1969-73년, 신판 2006년. 아사히 문고 1977-78년. 분춘 문고 2010년

번역 편집 ]

수필·일기·평론 편집 ]

  • 「명상 화가 아만 장」일본 예술 학원 1923년(노지리 키요히코 명의)
  • 『얼음꽃』 육흥상회 출판부 1942년
  • 「가마쿠라 통신 젊은이들에게」연구사 출판 1949년
  • 「일부가 있는 문장」창원사 1951년
  • 『물에 쓰는 수필』 신시오샤 1959년
  • 「모래 위에」광풍사 1964년
  • 내 이력서 23』 일본 경제 신문사 1965년
  • 「돌의 말 수필집」광풍사 서점 1966년
  • 『 요시츠네의 주위』 아사히 신문사 1966년 후 토쿠마 문고
  • 「오늘의 눈 수필집」광풍사 서점 1970년
  • “도 소다치 오오지지로 수필집” 매일 신문사 1972년, 한정책
  • 「겨울의 꽃」광풍사 서점 1973년
  • 『고양이 있는 날들』 육흥 출판 1978년 후 토쿠마 문고(신장판)
  • 『지붕의 꽃 오오지지로 수필집』 로쿠흥 출판 1980년
  • 『오오지지로 패전 일기』 쿠사시샤 1995년
  • 『15대 장군의 고양이 오오지지로 수필집』 후쿠시마 행 1편, 5월 서방 1996년
  • 『여행의 권유 오오지지로 수필집』코단샤 문예 문고 2002년. 『지붕의 꽃』+『요시츠네의 주위』(초)
  • 「「치이사이 구석」의 사계 오오지지로의 에세」가나가와 신문사 2016년

작품집 편집 ]

  • 『오오지지로 작품집』전 7권 문예춘추신사 1951년
  • 「오오지로 시대 소설 선집」전 10권 동광사 이소베 서방 1952년
  • 『다이쓰지로 집 현대장편 소설 전집 18』 코단샤 1959년
  • 『대불지로집 일본문학전집 42』 신시오샤 1963년, 신판 1967년. 가와모리 호조 편
  • 『오오지지로 소년 소녀를 위한 작품집』전 6권 코단샤 1967년
  • 『다이쓰지로 국민의 문학 5』가와데 서방 신사 1967년
  • 『다이쓰지로집 일본문학전집 54』슈에이샤 , 1968년, 신판 1982년
  • 『다이쓰지로 시대 소설 자선집』 전 15권 요미우리 신문사 1969년
  • 『오오지지로 논픽션 전집』전 5권 아사히 신문사 1971년
  • 『오오지지로 자선집 현대 소설』전 10권 아사히 신문사 1972-73년
  • 『다이쓰지로집 신시오 일본문학 25』 신시오샤 1972년(「거지 대장」 「귀향」 「기리피스」 「드레퓨스 사건」 「시인」 「지령」
  • 「오오지지로 수필 전집」전 4권 아사히 신문사 1973년
  • 『다이쓰지로 집 쇼와 국민 문학 전집』쓰쿠마 서방 1973년, 신판 1978년(「고로츠키선」)
  • 『오오지지로 시대 소설 전집』전 24권 아사히 신문사 1975년, 온디맨드판 2005년
  • 『대불지로 희곡 전집 전국의 사람들』 아사히 신문사 1977년
  • 『오오지지로 논픽션 문고』전 9권 아사히 문고 1983년
  • 『대불지로집 소년소설대계 제4권』삼일서방 1986년. 후쿠시마 행 일편
  • 『다이쓰지로 일본 역사 문학관 18』 코단샤 1986년(「아카호 나미시」)
  • 『오오지지로 에세이 셀렉션』전 3권 쇼가쿠칸 1996년
  • 『대불지로 셀렉션』전 18권 미치야 2007-09  . 무라카미 미츠 히코 

영화화 작품 편집 ]

(『쿠라마 텐구』에 대해서는 「쿠라마 텐구(소설)」, 『아카호 랑사』에 대해서는 『아카호 랑사(소설)』을 참조.)

각주 편집 ]

각주 사용법 ]

주석 편집 ]

  1. ^ 신작 가부키란, 전후 만들어진 가부키 광언을 말한다. 메이지기~전전에 만들어진 신가부키 와는 구별된다.
  2.  알베르 카뮤 '정의의 사람들'

출처 편집 ]

  1. 오오지지로 기념관(2013), 리플릿 「오오지지로 기념관」(중면)
  2.  오무라 히코지로 『시대 소설 성쇠사』 쓰쿠마 서방
  3. 고보 유카리의 선인들 오부지로
  4. ↑ 스즈키, 토시히로『요코하마 문학 산책』 문토사 종합 출판, 1989년, 10-14페이지. ISBN  4-89561-097-7 .
  5. ^ 야기오시 『대중문예관』 시라카와 서원 1978년
  6. 죠다 카즈오 , 나가타 테츠로 『도설 시대 소설의 히어로들』 가와데 서방 신사 2000년
  7. 오자키 히데키『살인의 미학 찬바라 검 호전』
  8. ↑ b 오자키 히데키 『대중문학 50년』 코단샤 1969년
  9.  오무라 히코지로 『시대 소설 성쇠사』
  10. ^ 담당 기자의 한사람·구시다 카츠미의 회상에 「대불 지로와 「천황의 세기」라고―어떤 학예 기자의 기록」(사회주의 협회, 1980년), 속편 「인・심・여행―어떤 학예 기자의 기록 '(호세이대학 출판국, 1983년)이 있다. 저자의 아버지는 사회주의자의 구시다 민조 .
  11. ↑ 이와이 히로시 “작가의 임종·묘비 사전”(도쿄도 출판, 1997년) 79페이지
  12.  도쿄신문』 1973년 5월 1일
  13. ↑ http://www.1938.jp/osaragi/
  14.  미키타쿠 “가마쿠라 일기” 가마쿠라 춘추사 2002년 p.215-219
  15.  『오오지지로와 고양이 500마리로 살았던 문호』에 익숙하다
  16.  「우리 소설-스위쵸 고양이」(1962년, 「고양이 있는 나날」소수)
  17. 타카미순「파리의 다이부씨」
  18. “ “가마쿠라 분사무라”가 생긴 것(8) ”. e- 자카쿠라·IT타운. 2019년 12월 24일 열람.
  19.  무라카미 미츠히코 『오오지지로 셀렉션 누나』
  20.  가와니시 마사아키 「쿠라마 텐구」 이와나미 신서, 2003년
  21. 타케나카노 “쿠라마 텐구의 삼촌은 문서 아라칸 일대”치쿠마 문고 1992년
  22. ^ 후쿠시마 행일(『빛나는 날 구름하는 날』 도쿠마 문고 1989년)
  23.  죠다 카즈오 「해설」(『아카호 나미사』신시오샤 1964년)
  24.  후쿠시마 행일 「해설」(『안정의 대옥』 도쿠마 문고 1990년)
  25. ^ 후쿠시마 행일 “해설”(『오보로 가마타』 도쿠마 문고 1988년)
  26. ^ 후쿠시마 행일 “해설”(『아마의 츠지(아래)』도쿠마 문고 1991년)
  27. 쓰루미 슌스케「「쿠라마 텐구」오보가키」(『쓰루미 슌스케가 선택하는 쿠라마 ​​텐구』초등학교 2000년)
  28.  무라카미 미츠히코 『오오지지로 셀렉션 하얀 밤』
  29. ^ 『오오지지로 셀렉션 하얀 언니』
  30. ^ 쓰즈키 미치오 「권말 에세이 오사라기 나라 요코하마」
  31. ^ 가와모리 호조
  32. 후쿠하라 료타로「소금, 참을 수 없다」(『오오지지로 자선집 현대 소설 1』월보)
  33. ↑ c 『드레퓌스 사건・시인・지령 대불지로 논픽션 문고7』
  34. 후지타 케이오 해설(『오오이지로 집 신시오 일본 문학 25』)
  35. ↑ 마크 트웨인왕자와 거지』를 바탕으로 한 작품. 1899년 에 야타니 코바 등에 의해 '거지 왕자'(분무당)가, 1927년 에 무라오카 하나코 에 의해 '왕자와 거지' ( 히라 하쿠사 , 노치 이와나미 문고 )가 번역 출판되었지만, 본 작품은 이와나미의 문고 보급판의 7년 후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와타나베 리오「미국 문학에 촉발된 일본의 소설」연구사 , 2014년) pp.79-102.
  36.  오빠의 노지리 포영역 판 「다카라지마·지킬 박사와 하이드씨」가 있다(초간은 개조사, 치쿠마 문고, 1990년)

전기 연구 편집 ]

참고 문헌 편집 ]

관련 항목 편집 ]

외부 링크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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