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09

김지하 - search results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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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광현

김지하..
“반성을 하되 좀스럽게 하지 말고 똑 이렇게 하럈다”
내 젊은 날에 그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는 언제 읽어도 절창이였다..
그의 장편 시 “오적” 또한 가사,판소리,타령과 같은 형식을 빌렸고 한문을 이용한 언어유희까지..
도대체 30살 밖에 되지 않는 젊은 나이에 이런 언어를 그것도 끊어진 한국식 고유시가를 빌려서 파격적으로 표현을 한 그는 누구일까? 
도대체 그 깊이는 어디까지 이길래 그 서슬 퍼런 시절에 세상에 이런 시를 발표할 정도의 패기와 결기는 어디에서 온 걸까?
늘 나는 궁금했다..
오늘 그 파란만장 했던 생을 마감했다는 뉴스가 나온다..그동안의 행적으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걸까? 1년여를 암투병을 하다가 끝내는 저세상으로 갔다는데..
그러나 이젠 내게 잊혀진 사람이 되어 담담하다..
강경대를 생각하고 분신정국에 “죽음의 굿판”을 떠올린다..세월호 아이들과 박근혜를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반성을 하되 좀스럽게 하지 말고 똑 이렇게 하럈다” 는 효시를 보여주고 그가 갔다.. 나이들어 세상보는 눈이 밝아졌다고 수구세력들이 말한다고 한다..
며칠만 더 살고 가시지..그렇게 해학과 조롱을 보여주던 오적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다시 온다는데..그들이 궁전을 짓고 기고만장하는 세상이 시작된다는데..
오적을 욕하던 분이
오적 처럼 살지 못해 애타던 말년을 보내다가 허탈한 생을 마무리 하셨군요..
그렇게 제게는 당신의 그 싯귀처럼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오래..내 발길은 너를 잊은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되었습니다..
그래도 마지못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Donghwak Lim

  · 
한 시대의 정신(Geist) 김지하 시인을  애도하며
박사학위 1차 심사 때의 일이다. 김지하 문학의 핵심으로 ‘생성의 사유’를 지적하자 그 날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한 교수가 맨 처음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것이 김지하 시인의 시에 어떻게 관철되어 있지요?” 주저 없이 나는 김지하 시인의 초기 대표작의 하나인 「황톳길」의 한 구절을 그 예로 들었다. 그의 시 속에는 “부줏머리 갯가”에 뛰는 “숭어”로 대변되는 ‘생명’과 “가마니 속”에 버려진 ‘죽음’과 같은 두 대립적인 사태가 자연스레 공존하고 있으며, 바로 이것이 서로 다른 사물이나 사건 사이의  상호침투적이며 상보적 관계에 주목하는 ‘생성적 사유’를 대표한다고. 
  그런 김지하 시인을 대상으로 후일 석사학위에 이어 박사학위로 택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꾼 거대한 어둠이랄 수밖에 없는 80년대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 전사(前史)로서 70년대 연구가 필수적이며,  그걸  대표하는 시인이 바로 김지하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 김지하 시인은 적어도 내게 한낱 리얼리스트나 저항시인이 아니었다. 특히 그저 그런 민중문학 내지 민족 문학론의 제창자이자 실천자가 아니다.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하기 전에 발표한 ‘현실동일 제1선언’이 보여주듯이 그는 현상과 본질의 통일성에 주목한 일원론자였다. 특히 그는 처음부터 다양하게 변화하는 현상 속에서 고정되고 안정된 법칙이나 도식을 찾기보다 현실세계 또는 우주 전제를 하나의 커다란 사건이자 과정으로 보고자 했던 생성론자였다.
 김지하는 그런 점에서 가장 널리, 많이 알려진 작가 중의 한 명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가장 몰이해되거나 오독되고 있는 작가 중의 한명이다. 설령 그의 문학에 대한 일방적인 찬사를 보내거나 무조건적인 비난을 퍼붓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의 문학과 사유에 관통하는 이러한 생성론적 사유방식을 보지 못하는 한,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일정한 한계를 노출할 수밖에 없다. 본의 아니게 기존의 단선적이고 왜곡된 이해와 오해를 반복할 뿐이다. 
예컨대 그의 시에서 상극을 배제한 상생, 전쟁이나 불화를 배제한 평화나 화합을 보려는 자는 반쪽짜리 눈을 가진 자에 불과하다. 오히려 그 둘 사이의 팽팽한 긴장 관계에 주목하면서 그 사이의 균형을 취하는 자가 참된 생성론자이자 그의 문학세계에 가장 근접한 자이다.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은 상생과 상극의 관계를 동시에 갖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그것들이 서로 의지하고 협력한 채로 혼재하면서 공존하기 때문이다.
  나는 김지하 시인이 목동에 살던 시절, 문학평론가 임우기형과 함께 처음으로 얼굴을 대면한 바 있다. 하지만 그보다 내게 중요한 것은, 어쩌면 나의 운명을 바꿨다고 할 수 있는 김지하 문학에 대한 이해나 공감 혹은 비판이 아니다. 이미 부분적으로 밝힌 바 있지만, 그를 통해 내가 ‘생성’의 세계와 조우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나는 그것을 통해 세상과 화해할 수 있었으며, 남루한 생의 길이나마 긍정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갈피를 잡지 못하던 문학과 학문의 길에 새로운 좌표를 얻었다는 점이다. 거의 반세기가 넘은 시점에서야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었던 「황톳길」에서 내가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한국문학은, 한국 민주주의는 그런 김지하에게 빚진 바가 적지 않다. 아, 그러나 한 시대의 정신이 저녁노을처럼  붉게 타올랐다가 이내 저물어가고 있다. 그의 명복을 엎드려 빌어본다.
(아래 사진은 2002년 7월22일 시인학교에서 열린 '시+화전'에서 격려사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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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un Reu
 · 
7,80년대 그 피바람 부는 시대에 그의 시는 그대로 구원이고 위안이었습니다. 고딩 때 금서로 묶여있던 시집 <황토>와 <타는 목마름으로>를 숨어서 읽었고, 치기에 일렁이던 청춘의 골방에서 깡술을 마시며 그 노래를 불렀습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진영 논리 따위 저는 모르겠습니다. 영욕과 애증. 탁월한 서정시인으로 기억합니다. 지구가 자꾸 가벼워지는 봄입니다. 눈물겹습니다. 시인 김지하 선생님의 평화로운 안식을 기원합니다.
최열
· 
김지하 시인이 지병으로 1년간 투병생활을 하다가 81세로 하늘의 별이 되셨다.
박정희 독재정권때 저항,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詩로 저항 지식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감형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 80년에 석방되었다.
 나는 75년 서울구치소에서 교도관을 통해 김지하시인과 연락하면서 지냈다.
 김지하시인은 석방후 생명운동과 한살림운동에 참여했고 환경운동에도 깊이 참여했다.
 99년 영월 동강댐 백지화운동과 기후위기에 대한 적극적인 활동를 했다. 새만금 간척사업 반대에도 참여했다.
 81년 백기완 선생님이 전두환 보안사에서 심한 고문을 받아 눈동자가 풀려 생명이 위독했었다.
 내가 백기완 선생님을 모시고  강원도 추곡약수터에서 요양생활을 할때 김지하 시인이 오셨다.
 비가 주룩 내리는데 백기완 선생을 위로한다고 밤새도록 노래를 불렀는데 아마 100곡도 넘게 불렀을거다.
 김지하 시인은 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전화가 오면 중앙정보부에서 또 잡으로 온다고 부들부들 떨었다.
 나중에 박근혜 정권을 지지해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나만보면 공부하면서 환경운동을 하라고 주의를 줬다.
 40년전 치악산 아래에서 장일순 선생과 김지하 선배, 이부영 선배와 함께 런닝만 입고 막걸리를 마시며 열띤 토론을 한때가 좋았다.
 한 많은 삶을 사신 김지하선배님, 이제 편안하게 잠드세요.  장일순 선생님도 백기완 선생님도 하늘의 별이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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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 
김지하 시인이 오늘 오후 4시쯤 강원도 원주시 자택에서 향년 81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타는 목마름으로·오적' 김지하 시인 별세
M.YTN.CO.KR
'타는 목마름으로·오적' 김지하 시인 별세
’타는 목마름으로·오적’ 김지하 시인 별세…향년 81세 / 최근 1년여 동안 암 투병 생활…연세대 원주병원에 빈소 / 고인, ’토지’ 작가 박경리 선생의 사위


강상태

김지하
남들이 뭐라든
타는 목마름으로
내 갈망 내 욕망
타는 목마름으로 
제대로 뵙지 못했지만
간혹 스치듯 뵈었지만
타는 목마름으로 그대 속울음을 닮고 싶었습니다.
말글이 유별 나더라도
울림이 온통 지배해 버렸던 그대
죽음에 굿판을 걷어 치워라
슬픔을 분노를 의심을 담아 소리칠때도
분노했지만 당신에 시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버리려 하였지만
내 머리는 당신을 잊지 못하였습니다
풍진 세상 그대 오르소서
삼가 고인에 명복을 빕니다.
[시 읽어주는 여자/감성시낭송]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항쟁/ 좋은시/ 유명시/ 편안한 시낭송/ 듣기좋은 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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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여자/감성시낭송]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항쟁/ 좋은시/ 유명시/ 편안한 시낭송/ 듣기좋은 낭송
#좋은시 #민주항쟁 #김지하이제 곧 5월입니다.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이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들의 핏빛 노래를 유행가처럼 부르던 때가 있었지요. 지금 20대들에겐 생소한 노래지만, 민...


김민웅
 · 
김지하(金芝河) 
한때 시대의 뜨거움이었고 돌파구였으며 모두가 우러른 시(詩)의 산맥이었다.
그러다 한때는 난데없는 부끄러움이 되어 아프게 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황폐하게 으스러져가는 마음과 몸을 지켜보는 것이
못내 힘들었다. 
생명철학을 깃발로 들었던 그의 얼굴은 뭔가 생명의 기력과 거리가 멀어보였고, 그의 늙음은 그의 젊은 시절을 기억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영욕(榮辱)의 세월,  
홀로 외롭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이제는 평안히 가시옵소서. 
우리에게 김지하가 있어서 고마웠던 시간만 기억하렵니다. 
- 신(新) 오적(五賊)들이 횡행하는 시대에


Ju Young Kim
3 h  · 
20년 1월 김지하 선생님을 찾아뵜었다
누가뭐라든 한 때 많은 이들의 등대였던 선생님을 뵙고 싶었다
세상의 어떤 평가와 상관없이 병색이 짙은..대소변 가방을 들고 다니는..정신이 오락가락한  그분을 본 그날.. 그냥 힘들었었다
편안해지시길


주동식
 
당신은 현대 민중문학, 저항문학의 비조였지만
이후 당신을 흉내내면서 택도 없는 그만그만한 글 끄적거림을 작품이랍시고 붕어빵처럼 찍어내는
어딜 가나 넘쳐나는, 썩어빠진 쓰레기들과는 차원이 다른 분이셨습니다.
당신은 진짜 고민을 했고, 나머지는 대부분 당신의 고민을 흉내내는 자들이었습니다.
편히 쉬소서. 명복을 빕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독재 저항 시인 김지하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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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독재 저항 시인 김지하 별세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독재 저항 시인 김지하 별세
전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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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이 세상을 떠났다. ㅠ..ㅠ
이번 주 강의가 마침 김지하 시인의 “오적”인 터라 어제 강의안 만들고 좀전에 강의 녹음 끝내고 동영상 변환하고 내려왔더니 돌아가셨다는 속보가 떴다. 
그의 삶에 여러 사건이 있었다만, 우리 역사가 1970년대 한 개인에 불과한 그에게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한다. 강의를 준비하며 다시금 그 시대를 살피고 생각해보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또한 우리 시대가 그를 오해한 것들도 많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버리시다니. 애석하고 슬픈 일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Chee-Kwa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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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지하 – ‘척분 (滌焚)’]
‘스물이면/혹/나 또한 잘못 갔으리/품안에 와 있으라/옛 휘파람 불어주리니, 모란 위 사경(四更)
첫이슬 받으라/수이/삼도천(三途川) 건너라.'
1.
대학시절 한국시를 많이 읽었다. 한국어에 가까워지고 싶다는 욕심이 그 당시 마음 한 켠에 자리잡고 있었고, 시를 읽는 것이 하나의 지름길이라고 내 나름 생각했던 것 같다.
세월이 지나 그 시절 읽은 시들 대부분 기억에서 지워진지 오래이지만, 아직도 꺼내 읽는 시집중 김지하의 “애린”이 있다. “애린”에는, 서슬 퍼런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던 칼날 선 시들은 온데간데 없고, 대신 5년이라는 긴 세월을 옥중에서 보내고 몸과 마음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 더 이상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기를 거부하는 – 김지하 개인의 회한과 연민이 자기 혐오의 구토물과 범벅이 되어 남겨져 있다.
나는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김지하보다, 자신의 상처와 치부를 날 것으로 드러내는 – 낼 수 있었던 – 김지하에 매료된다. 나 자신 하자투성이 인간이어서, 확신보다는 의심과 불안함을 표준상태로 받아들이고 살고 있어서, 그럴 지도 모르겠다.
2.
그리고 그러한 회환과 자기성찰, 그리고 연민이 김지하로 하여금 91년 대학생들의 연쇄분신사태를 보고 “척분”과 같은 시를 쓸 수 있게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 조선일보에 소위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발표된 기고문과 동시대에 발표된 시에서 김지하는, 분신을 한 젊은이들을 저주하거나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또한 스물이었다면 그들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세월과 함께 바뀔 수 있다, 고 망자들을 기리며 나즈막히 노래한다.
내 주위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하는 이들을 경험하고, 나의 이십대를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생각해볼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 이 시를 떠올리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고 오늘 김시인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금 떠올렸다.
시인이 수이 삼도천을 건너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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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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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서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오적'· '타는 목마름으로' 시대와 맞선 김지하 시인 별세
UPINEWS.KR
'오적'· '타는 목마름으로' 시대와 맞선 김지하 시인 별세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를 외치고, '오적(五賊)'으로 부패세력을 신랄하게 풍자했던 김지하 시인이 8일 별세했다. 향년 81세. 유족에 따르면 고인은 최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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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는 목마름으로’의 김지하 시인이 별세했다. 
그는 최근 1년여 동안 투병 생활을 한 끝에 이날 오후 원주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토지문화재단 관계자가 전했다.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시인 별세
HANI.CO.KR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시인 별세
1년여 투병 끝에 원주 자택서 사망…향년 81반독재 투쟁하다 옥살이…훗날 ‘변절’ 논란도
최덕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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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 


▶◀김지하 시인(81) 별세
그는 군부 독재정권에 맞선 詩 "타는 목마름으로"와 구 운동권 엔엘파쇼를 질타한 칼럼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등을 남겼다.
격동의 시대, 우여곡절이 많았던 김 시인의 명복을 빈다.
김창규
6 h  · 



김지하 시인 별세가 뜬다.
슬픈 저녁이다.
한 많은 세월 속의 외롭던 시인도
작은 별이 되었구나.
아시반보은취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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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 김지하 시인 별세 -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1970년대 '저항시인' 김지하 별세
NEWS.V.DAUM.NET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1970년대 '저항시인' 김지하 별세
[경향신문] 1970년대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등의 저항시를 남긴 시인 김지하(본명 김영일)가 8일 별세했다. 향년 81세. 고인은 최근 1년간 투병생활을 한 끝에 이날 오후 강원도 원주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토지문화재단 관...


고종석

시인의 명복을 빈다
그의 젊음은 치열하고 정의로웠으며, 
젊은이들이 불타오르던 시절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그의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고, 
그의 노년에 대하여 나는 감히 어떠한 말을 얹을 수 없다.
중심의 괴로움
김지하
봄에
가만 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 밑으로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 피어
퍼지려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이재무
43 m  · 
김지하 시인 타계 소식을 핑계로 또 혼술중이다. 한때 선생께 과분한 사랑( 내 졸시를 서화로 남기기도 하였다)을 받았으나 선생의 말년의 정치적 선택 때문에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 살았다. 이 점 너무 애석하다. 두고두고 회한으로 남을 것같다. 
나는 선생의 (서울길)이란 시를 한국 최고의 시로 뽑는다. 이 시는 읽을 때마다 전율을 일으킨다. 한국 근대의 근원적 상실과 아픔이 생동하는 운율을 타고 고스란히 독자의 가슴에 전이되는 감동이라니!
지난날 사석에서 선생으로부터 문자로 기록되지 못한 내밀한 이야기(비화)를 많이 들었다. 
선생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내 졸시들에 과람된 상찬을 글로 남기기도 하셨다. 고맙게 생각한다.
영욕의 세월을 살다가신 선생의 명복을 빈다.
췌언, 
나도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나이를 살고 있는 중이다. 솔직히 죽음은 두렵지 않다. 깜냥것 열심히 살아왔다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명색이 시인으로서 반세기 가까이 시를 써오면서 변변찮게 이렇다 할 대표작 하나 남기지 못하고 있다는 그것 하나가 목에 가시처럼 걸린다.
공과가 있지만 그래도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고인께 욕된 표현은 삼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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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범
  · 
5월 8일은 어버이날이지만 아버지의 기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버이날이 늘 어정쩡했다. 아버지는 말수가 적으면서도 가족에게는 따뜻했지만, 기본적으로 매우 시니컬했던 사람이다. 일찌감치 세상을 떠나면서도 이런 아이러니를 던져주고 가셨다. 우리가 심심할까봐. 지난 해에 어머니도 가시고 나서는 방전된 배터리를 손에 들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
올해는 한국에 들어가 아버지 분묘를 정리해서 어머니 계신 곳으로 모시고 올 생각이었는데, 닥치고보니 작은 놈 대학 보낼 준비만으로도 경황이 없다. 망한 집안답게 일 순서가 거꾸로인데, 우리 집은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삼대째 망한 상태이므로 나름대로 전통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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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이 타계했다고. 
부인이 몇 해 전에 먼저 떠났지 아마. 자식이 있나 모르겠다.
그의 몰락은 관념이 승하던 시대의 몰락과 관련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후배 시인들의 상당수는, 묘하게도, 그의 리듬과 서정성을 자기연민 쪽으로만 예민하게 발전시켰다. 역시 관념의 힘이 사라진 결과(이걸 '문학의 종언'이라고 말한 이도 있었던 거 같다)가 아닌가 생각하는데, 같은 이유로 김지하의 시와 그의 생각은 앞으로도 오래 제대로 읽히기 어려울 거 같다. 읽는다는 건 결국은 동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시를 읽던 사람들은 다 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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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가 있는 큰애가 지 엄마에게 꽃다발을 보내왔다. 처음 있는 일.
Shared with Only me
[한국의 양심수가 말한다: <새로운 백년의 문턱에 서서>]
저는 이제야 이 책을 받아 봤습니다. 요즘 코로나로 인해서 한국에서 노르웨이까지의 항공편이 매우 드물어, 옛날에 1주일만에 가던 소포들은 이제 한 달 이상 갑니다. 이 책의 우송에도 한 달 정도 걸렸습니다. 감옥에 갇힌 이석기 전 의원이 낸 <새로운 백년의 문턱에 서서>입니다. 이석기 전 의원이 감옥에 갇혀 있는 한, 저는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에 심각한 문제가 존재한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면 양심수를 가둘 리가 없으니까요. 양심수를 극우 정권이 가두고 자유주의 정권이 사면해 주지도 못했다면, 이거야말로 한국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한국 자유주의 세력의 한계라고 봐야겠죠. 그래도 옥에 갇힌 양심수가 책이라도 낼 수 있으니 위안이 되긴 합니다. 1970년대 김지하, 1980년대 김남주가 감옥에 있었을 때에 그 시들이 혹은 국외에서 번역, 출간되고 (저는 양심수 김지하 시의 그 당시 스웨덴어 번역도 확인한 적이 있습니다) 혹은 국내에서 지하에서 유통되었는데, 이젠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민중의 소리' 방송국에서 이처럼 정식으로 양심수의 옥중 수상록을 내니...그래도 역사가 천천히나마 진보하는 모양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한국 진보 운동의 역사와 현재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석기 전 의원 같은 분들은 이 운동의 흐름 속에서 소위 'NL' 계열, 즉 좌파 민족주의 계열에 속했습니다. 굳이 그렇게 이야기하자면 고전적인 민족주의적 사고의 일부 편린들을, 이 책의 텍스트에서도 찾으려면 찾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이석기 전 의원은 - 1930년대 이후 대부분의 민족주의 사상가들이 그래 왔듯이 -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낭가 사상' 내지 어떤 자주적 입장의 표현으로 해석한 신채호의 유명한 글을 비중 있게 인용하기도 합니다 (118-119면). 그런데 이와 같은 극히 일부의 부분을 제외하면 이 전 의원의 수상록에서 보통 진보 운동 진영에서 '보편적 진보 가치'라고 생각하는 주요 좌표와 다른 그 어떤 내용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이 책이 현재 'NL'계열의 정치 사상의 표현이라면 그들과 'PD', 즉 계급론적 진보 사이의 차이란 어디까지나 '늬앙스'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표현의 방법, 강조하는 점 등에는 차이가 있지만, 크게 보면 양쪽이 추구하는 가치나 목표는 동일하다고 볼 여지 역시 큽니다.
예컨대 북핵 문제를 논하는 데에 있어서는 이석기 전 의원은 곤란 속에서도 핵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북조선 사회의 '힘', 즉 저력 등을 보다 강조하고, 핵에 의해서 나름대로 강화된 북조선의 국제적 입장을 지적합니다 (89-96면). 저와 같은, 고전적 'PD'에 더 가까운 입장에서는, 핵 무장은 당연히 북조선으로서는 '자위', 즉 스스로 방어 차원의 정책이었으며 불가피한 면이 강했지만, '핵' 자체의 문제성을 차치하더라도 북핵 문제로 인한 북조선 경제 성장의 상대적 둔화, 그리고 그 속에서 추가적 고통을 받게 되는 북조선 민중의 아픔부터 먼저,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 인식될 것입니다. 물론 북핵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만큼 여태까지 국가 주도의 개발 속에서 군수 공업, 그리고 기초 과학이 북에서 착실히 발전돼온 것도 사실이고 이를 '저력'이라고 불러도 과언은 아닐 터인데...'PD'의 입장이라면 아마도 일단 북조선 민중이 이 개발을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들부터 먼저 인지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강조', 내지 '해석'의 늬앙스적 차이가 있더라도, 이석기 전 의원이나 저나 북핵 문제가 원만한 북미, 북일 수교로 완결되어 북조선이 남한과의 경협 속에서 지속적으로 발전돼 그 민중의 삶이 하루 빨리 여러 면에서 개선되길 원하는 것입니다. 즉, '강조'를 좀 다르게 하더라도 정책적으로는 결론은 어차피 같을 것입니다.
좌파 민족주의 계열의 출신이지만, 계급 문제에 대한 이석기 전 의원의 입장은 계급론적 진보의 보편적 관점과 그다지 차이를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예컨대 한국 사회의 능력주의가 특권 세습의 합리화 메커니즘으로 전락된 점을 지적해 이 타파책으로 대학 평준화를 언급하고 (174면), 최상위 부유층에 대한 90% 세율의 상속세를 부과함으로서 부 세습의 사슬을 끊는 걸 주장하고 (186-187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이야말로 진보 정당의 튼튼한 토대가 돼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64면). 제가 봐도 이 부분들이야말로 계급론적 진보의 핵심 의제로 선정돼야 합니다. 한미 동맹의 문제에 있어서 그는 '탈동맹', 즉 미-러 사이에서 나름대로 자국 중심의, 등거리적 외교를 펼치는 나토 국가 터키와 같은 실리 위주의 등거리 행보를 벤치마킹해서 한국형 등거리 외교의 모색을 제안합니다 (109-115면). 대외 팽창 정책을 추진하는 터키보다 아마도 핀란드나 오스트리아 같은 영세 중립국들이 더 적절한 사례가 되겠지만, 궁극적으로 한반도에서의 평화, 탈군사화가 중립화 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수 많은 진보 사상가들이 동의하는 점입니다. 즉, 이석기 전 의원의 '탈동맹'은 어떤 '민족주의' 발로라기보다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매우 절실한 급진적 정책 제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매우 흥미로운 이 책을 읽는 동안, 제 머리를 떠나지 않는 질문을 딱 둘이었습니다. 도대체 이 책을 통해 저와 대화를 나누는 이 분은 왜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하느냐는 질문하고, 왜 한국의 진보계가 양심수 석방의 운동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이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컨대 국회 의원 6명이나 가진 정의당이 이 전 의원의 석방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과연 '정의'인가요? 위에서 언급된 중요한 정책적 제안을 하신 분은, 감옥이 아닌 국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부의 재분배를 위해 활약해야 하지 않을까요? 한반도 평화와 보다 평등한 사회 만들기에 대한 토론을, 그가 왜 감방으로부터 해야 할까요? 그리고 그를 사면해 주지 못한 현 정권에 대해 과연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까요? 역사가 과연 자유민주주의와 인권 정신에 대한 이 배반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요?
한국의 양심수가 말한다: <새로운 백년의 문턱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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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양심수가 말한다: <새로운 백년의 문턱에 서서>
저는 이제야 이 책을 받아 봤습니다. 요즘 코로나로 인해서 한국에서 노르웨이까지의 항공편이 매우 드물어...
강기봉
4 h  · 
지하시인에게 박성현 선생을 통해 글을 받아 제가 조선일보로 토스한 역사적인 칼럼입니다.
그때 조선일보도 이 글을 싣는데 고민이 많았지요.
담당인 이선민 당시 오피니언 부장님이 고생했죠.
백낙청 문재인 등 쑥부쟁이들 조지는 글
[ 김지하 특별기고] 한류-르네상스 가로막는 '쑥부쟁이' - 조선일보 -
[특별기고] 한류-르네상스 가로막는 '쑥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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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한류-르네상스 가로막는 '쑥부쟁이'
특별기고 한류-르네상스 가로막는 쑥부쟁이 우리 문화의 에너지 韓流로 분출, 그 핵은 詩·문학의 참다운 모심 자칭 원로 백낙청은 이해 못해 詩도 모른 채 문화사 심판관 행세 바른 정치관 없는데 무슨 정치 평 참된 문학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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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생활] 이기상의 <글로벌 생명학> - “개벽과 생명운동” 韓国の「生命思想」
- 지난 주에 호주의 평통 모임에 참석하러 시드니에 여행하면서 전자책을 귀로 들었다. 이책에서는 다석과 함석헌의 생명사상도 각각 한 장으로 다루었지만 가장 중요하고 길게 다룬 것은 김지하의 생명사상이었다… See more


박정미
김지하 시인
시인이 돌아가셨다. '목련은 피어 흰빛만 외롭게 하늘로 오르고 꽃잎은 져서 도로 흙으로 가데'의 싯귀처럼 시인은 먼 본향으로 회귀하셨다.
시인의 부음을 듣고 책꽂이를 찾아보았더니 아직도 그 시집이 있었다.1982년판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 아무래도 전남대생인 셋째오빠랑 자취하던 고교시절, 오빠의 책장에서 훔쳐 간직해온 것 같다. 대학시절 샀거니, 했는데 오늘 보니 그러기에는 판본이 너무 오래됐다. 책 뒷장에는 오빠의 싸인도 보인다.
이 시집을 몇십번 몇백번 읽었는지 모른다. 젊은시절 좋아하던 노래도 김지하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가 대부분이었다. 그의 시를 읽고 그의 노래를 부르면서 역사와 민중을 생각했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 애썼다.
그런 나였기에 91년도에 맞닥뜨린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조선일보 기고문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때부터 대학 선후배 친구들은 모두 김시인을 노망자로 변절자로 취급하고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계속 그의 글들을 찾아 읽었다. 시인이 생명사상, 동학사상, 단학사상의 사상적 변천을 겪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어린 나로서는 도저히 그 큰 사람을 다 이해할 수 없었기에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버리고 모른체하기에는 그의 시가 너무 아름다웠다.
오늘 오래된 시선집의 책장을 넘겨보니 깨알같이 여백에 쓴 낙서가 보인다. 그 중 <어름>이라는 시에 쓴 소감문은 김지하시인과 대결하던 젊은날의 내 결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더 이상 깊어질 곳이 없어서, 남아 주체할 길 없는 힘은 죽음과 초월의 세계로 건너가는가.
아니, 한 인간이 살아 생전 물질의 궁극에까지, 현실의 심층부까지 속속들이 파고들 수 있다고 보는가.
(김지하는) 힘이 있어서 초월로 건너뛸 수 있는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현실을 견딜 힘이 없어서 막연한 구름다리 너머 초월로 비약해버리는 것이다. 
힘이 없어서."
그 밑에는 필기구를 달리해서 앞의 낙서를 비판한 다른 낙서가 보인다.
"내 한 때 가졌던 삶과 죽음, 현실과 초월, 순간과 영원의 이분법. 섞임과 일치를 모르고."
앞의 낙서는 아무래도 이십대초중반 공장지대를 떠돌 때 쓴 것 같고 뒤의 낙서는 이십대후반 고시공부하던 시절에 쓴 것 같다.
이처럼 김지하시인은 젊은 날의 나와 우리시대의 우상이었고 푯대였고 밟고지나갈지언정 반드시 맞닥뜨려야만하는 큰 산맥이셨다.
김지하시인이 오늘 저녁에 돌아가셨다. 먼발치에서 한번 뵌 것이 전부인 가느다란 인연이지만 그의 죽음은 너무나 큰 울림을 준다.
한세상 겪어낸 고통과 슬픔과 고독이 너무 컸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시는 그 고통과 슬픔과 고독만큼이나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우리민족의 가슴에 남아있을 겁니다. 
시인이여. 이제 편히 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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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에 돌아보는 한국 민주주의 역사>
ㅡ주대환선생, 지난 5월 22일 광주 금남로 YMCA 강연전문 
영광입니다. 저는 2013년 4월,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면서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백년전쟁>이라는 동영상을 비판했다가, 젊은 시절의 동지들로부터 ‘제 2의 김지하’라는 말을 들은 사람입니다. 
저로서야 그렇게 불러주면 영광이지만, 그 사람들에겐 그 말은 변절자, 곱게 늙지 못하는 사람, 심지어 아픈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저를 5.18을 기념하는 뜻 깊은 행사에 불러주신, 호남대안포럼 회원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하는 말에는 틀린 말도 있을 겁니다. 저의 공부가 부족하고 견문이 좁아서 잘못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으니, 지적하고 고쳐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저가 보고 느낀 그대로 정직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고 외친 1991년 5월의 김지하를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분이야말로 그 해 봄에 미치지 않았던 사람이고, 누군가는 해야 할 말을 그가 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도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주일에 한 명 꼴로 멀쩡한 젊은이들이 분신을 하고 높은 건물에서 떨어져 아까운 생명을 버리는데, 그 이유가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죽음, 저는 당시의 학생운동의 행태를 집단 정신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선배들이 그들을 ‘열사’라 부르면서 사실상 부추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저는 김지하를 제명한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단체로서나 그 단체에 속했던 어떤 개인이 반성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성찰이 없고, 철들기를 단체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또 잠시 다른 이야기이지만, 사실은 ‘변절’, ‘변절자’같은 전근대적 언어를 즐겨 사용하는 사람은 근대인이 아니고, 민주공화국의 시민이 아닙니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 나와 다른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민주주의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없습니다. 
민주화운동이란 무엇인가? 
본론으로 들어가서 여기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1987년부터 97년까지 10년 동안의 학생운동을 ‘민주화운동’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해방이 된 후에 독립운동을 할 수가 있습니까? 민주화 이후에 하는 민주화운동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요? 
주사파의 친북 민족주의운동, 통일운동은 민주화운동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1987년 이후 사회주의운동, 노동운동을 했었지만 이를 민주화운동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통일운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학생운동의 일탈은 민주화의 진전,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방해가 되면 되었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시에 저희들의 활동에 소액 후원을 하시는 분들이나 친구들에게 변명하기 바빴습니다. 
“학생들이 곧 철이 들 것”이라고, “조만간 학생들이 선배들의 말을 들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온갖 난동을 부리고, 임종석이나 임수경이가 통일놀이를 하고, 이에 맞장구쳐서 문익환 목사님까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이 움직이실 때, 정말 난처했습니다. 
그 날, 당시 한겨레신문은 여덟 면 정도 냈던 것 같은데요, 그 여덟 면의 거의 대부분을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으로 가득 채운 신문을 들고, 아침에 저희 집으로 달려온 친구 박석운의 당황한 얼굴을 잊을 수 없습니다. 
철산리 이웃에 살던 우리는 학생 시절부터 동지인지라 활동 공간은 달라도 자주 의논을 했고, 며칠 전에 노동자들을 식칼로 테러한 사건에 대하여 정주영 현대중공업 회장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심각하게 의논하기도 했었습니다. 
주사파가 학생운동에 퍼지기 시작한 것은 1987년 민주화 이전이지만, 주사파가 학생운동의 주류가 되고, 또 학생운동이 모든 대학 캠퍼스를 장악한 것은 민주화 이후였습니다. 즉 주사파의 전성기는 민주화 이후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은 민주주의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87년의 승리에 취한 학생운동이 열정과 에너지를 쏟을 가상현실이 필요하고, 간이 배 밖으로 나와서 독립운동가나 혁명가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청년들이 뛰어놀 관념의 놀이터가 필요했고, 그것이 이른바 통일운동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래서 저는 1992년 즈음 되던 시절 저를 도와주시던 어떤 대선배에게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을 가래로도 못 막습니다. 그러니 학생운동의 물꼬를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도록 신경을 써야 합니다.” 
사실 한 해 수만 명씩 사회로 쏟아져 나가는 NL 주사파, 친북 민족주의자들이 나중에 한국 사회에 어떤 문제를 일으킬 것인지 저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어른들은, 특히 당시 집권 초기에 지지율이 90%를 넘나들던 YS계는 물론이고, 절치부심(切齒腐心), 다음에는 우리가 잡는다는 생각에만 골몰하던 DJ계도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분들은 제가 골치 아파하는 후배 학생들을 이뻐 했습니다. 젊은이들이 저러다 나이 들고 사회생활하면 곧 철들 것이라며 별로 걱정하지 않았고, 심지어 어떤 지도자는 그들에게 국회의원 공천을 줘버리기도 하였습니다. 
그 분들은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읽지 않았고, 청년들의 머리를 지배한 사상과 세계관, 역사관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권노갑이 1930년생이고, 최형우가 1935년생이니, 해방 당시 10대 소년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깊은 고민이 없는 분들이었습니다. 
아마 1997년 즈음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한 74년생 글쟁이 곽대중, 필명 봉달호는 신동아, 조선일보 등에다 “그 많던 주사파는 다 어디로 갔을까”라는 글을 썼지만, 우리는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주사파 가운데 소수가 1997년 이른바 전향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보수진영과, 심지어 안기부와 손을 잡고 ‘북한민주화운동’이란 걸 시작하였습니다. 다른 주사파 청년들이 전향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숭배의 대상 김일성 주석을 김구 주석으로 바꾸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철들기를 그토록 오래 기다려 온 우리는 ‘닭 쫓던 개’가 되어 지붕 위를 쳐다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기다려온 그들은 아무 의논도 없이 보수진영으로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 녀석들이 철들면 의논을 해서 왜곡된 대한민국관, 현대사관, 이념 지형을 함께 정상화시켜 나가려던 기대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당시에 참 ‘무식하고 건방진 놈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즘은 그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만, “한국 농촌에 지주와 소작인이 있냐? 가보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식민지 반봉건 사회론’을 고집하던 그들의 모습, 한국사회에 대한 선배들의 연구를 전혀 읽지 않고, 오직 대남 방송만 듣고 따르던 그들의 행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의 큰 적은, 한국 민주정이 위기에 처했던 15년간에 민주화운동을 한 적이 없는 사람, 혹은 민주화 이후에 다른 일을 해놓고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중의 대다수가 ‘전향할 기회를 놓친 주사파’입니다. 그들이 이른바 ‘대깨문’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압니다. 다만 모른 척 할뿐입니다. 간혹 이석기나 윤미향 같은 이가 나타나면 “아직도 저런 사람들이 있었어?”하면서 무척 놀란 척합니다. 
그들의 패거리가 선동정치, 중우정치, 금권정치로 민주주의를 타락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민주주의에 적응하지도 못하지만, 민주주의를 이용하는 데는 천재입니다. 
그들의 패거리 짓기, 독선과 오만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더 웃기는 건, 아니 웃지 못할 일은 그들이,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이른바 ‘민주시민교육’의 강사로 전국에서 활약하면서 국가 예산을 축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민주화가 이미 된 이후에, 민주주의 나라에 태어나서 민주주의를 잘 아는 선진국 사람들을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후진국 사람들이 가르치는 이상한 일이 벌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주 이야기합니다. “후진국 사람이 선진국 사람을 가르치려 하지마라!” 
이제 민주화운동은 엄격하게 개념 규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민주화운동의 개념이 애매모호하다보니, 동학농민운동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그러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다시 김지하로 돌아가겠습니다. 1975년의 김지하는 젊은 시절 우리가 즐겨 부르던 노래가 된 시를 썼습니다.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로 끝나는 이 시에서 민주주의는 꿈이 됩니다. 
이렇게 민주화운동의 시기, 민주주의는 현실에서 사라진 대신 꿈과 이상의 세계에 되살아났습니다. democracy가 민주주의로 애초에 잘못 번역된 사정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이상이 된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으며, 오직 아름답기만 한 그 무엇이, 단테에게 베아트리체와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나 자유주의와 달리 하나의 사상이거나 이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에서 존재한 여러 가지 정치체제, 군주정이나 귀족정, 과두정, 혼합정 같은 정치 체제들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사실 부끄럽게도 저가 이런 사실을 깨달은 것도 민주화운동의 시기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실제로 경험하면서였습니다. 민주화된 지 15년쯤 지났을 때야 비로소 저는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민주화운동 할 때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몰랐다는, 기가 막힌 사실을 말입니다. 
1987년 민주화가 된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알게 될수록 점점 소크라테스를 이해하게 되는 저 자신을 발견하고, 속으로 깜짝 놀라면서, 큰 비밀을 안고 살게 되었습니다. “늙으면 보수화된다더니 내가 바로 그런 것인가”라고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스승은 민주주의에 반대하다 목숨을 잃고, 그 스승의 죽음을 본 제자가 대를 이어서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지독하게 비판하다가 마침내 철인정치론이라는 위대한 정치철학을 내놓은 플라톤에게 정서적으로 공감을 한다는 사실은 친구들에게 숨겨야 할 저만의 비밀이었습니다. 
저는 1987년 백기완 대통령 선거운동을 시작으로 1988년 민중의당, 1990년 민중당 창당에 관여하였고, 1988년에는 인천 부평에서 대우자동차 노동조합의 송경평을 후보로 내세워 선거운동을 하였습니다. 송경평 선거운동을 하러 갔더니 웬 덩치가 황소만한 친구가 있었는데 송영길 택시노조 사무국장이라고 소개하더군요. 그 사람이 지금 민주당 대표 송영길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송경평의 고향 고흥에서 종친회 어른들이 오셨는데, 모두들 20대인 시절에 저가 그래도 35살이라고 나이 많다고 그 분들 접대를 하는데, 상상 이상의 많은 후원금을 가지고 오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한국 정치의 혈연, 지연, 학연을 처음 경험하였지요. 송영길 대표의 고향도 고흥인데, 아마 같은 문중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담이었습니다. 
그 후로 1989년 6월의 천안문 사태, 가을에 동유럽 혁명을 보면서, 이런 사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우리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인가를 절감하고 황광우를 비롯한 저희 동료들은 다시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소련의 해체라는 사태를 맞이하여 이른바 ‘신노선’이라는 이름으로 맑스-레닌주의를 버리고 사회민주주의, 페이비안 사회주의의 방향으로 전향하여 한국노동당이라는 당을 창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저희들은 유로-꼬뮤니즘 비슷한 생각으로 사회주의운동, 노동운동을 하고 있다가 1991년 가을에 노선을 전환하였는데, 같은 해에 역사 깊은 서유럽 최대의 이탈리아 공산당이 스스로 깃발을 내리고 당을 해체하고, 좌파민주당으로 재창당하였다는 소식을 나중에 듣고, 안도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후 전개는 저희들이 워낙 소규모이고, 약세다 보니 민중당과 합당하여 충선에 참여하여 대패하고, 이재오, 김문수 등이 신한국당에 입당하고, 남은 동지들의 절반 이상이 경실련으로 가버리는 등으로 좌절하고 고립되었습니다. 
대다수 운동권에서는 당시에 우리를 합사개(합법주의, 사민주의, 개량주의)라고 욕하고 변절자 취급을 했지만, 아마 그렇게 욕한 분들은 그 사실을 다 잊어버렸을 겁니다. 
그 후로 여러 해 암중모색하다가 1997년 권영길 대통령 선거운동과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에 참여하고, 저 자신도 마산에서 지구당을 만들고 국회의원 후보로 세 번 출마하여 낙선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저런 경험은 저로서는 민주주의에 대하여, 특히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공부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저는 선동정치, 중우정치, 금권정치가 민주정치와 별도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바로 민주정치의 다른 얼굴이라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현대 민주주의 선진국의 정치 제도가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철인정치적 요소를 가미하고 있다고 봅니다. 특히 선진국에서 발전한 정당은 민주주의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라 철인정치적 요소라고 저는 봅니다. 정당은 인텔리겐챠, 철학자의 집단이고, 그람시의 표현에 따르면 현대의 군주(君主)입니다. 
몇 년 전 독일의 정당들의 통계를 누군가 전해주는데, 사민당, 기민련, 기사당, 좌파당, 녹색당 등 모든 정당들의 당원 수를 합하니 전 독일 국민의 2~3%쯤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 2~3%의 국민은 나머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큰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고 또 책임과 의무를 지는 셈입니다. 
우리나라 정치가 유럽 선진국들의 정치와 비교하여 덜 발달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정당의 발달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 광주에서 주동식 위원장께서 진성 당원이 있는 정당을 만들자는 평당원 운동을 제창하고 있는데, 저는 한국정치를 바꿀 가장 근본적인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주영이라고 권영길의 경쟁 상대였던 창원 출신 국회의원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위원장으로 있는 지구당에 부위원장이 48명인지 49명인지 이주영 위원장이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대부분 동네에서 가게 하면서 사소한 일로 파출소 불려 다니는 분들이나, 자동차나 보험 영업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니 7선을 하신 이해찬 전 총리는 당선되실 때마다 정당 이름이 바뀌어서 본인이 그 이름을 순서대로 다 기억하지 못하는 일도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민주화운동 시절의 우리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잘 몰랐고, 민주주의의 뒷면을 흡사 달의 뒷면처럼 본 적이 없었고,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추상적이고 이념적인 민주주의를 관념 속에서 아무데나 갖다 붙이고, 민족주의와 혼합시키다보니 현대 세계에서 가장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북한의 신정체제(神政體制)를 숭배하는 어이없는 일도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 
이제 우리가 분명히 할 것은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해서 민주주의를 잘 아는 것도 아니고, 민주주의에 익숙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또 민주주의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하늘에 있는 이데아가 아니라, 땅에 있는 구체적 실체였습니다. 1948년 8월 15일 성립한 Republic of Korea이 바로 우리의 민주정이고, 살아 움직이는 역사적 존재로서 한국 민주주의입니다. 
이래서 우리 조상들이 오래 설계하고, UN이 직접 개입하고 도와주어서 만든 나라, 성공한 민주공화국 Republic of Korea를 부정하는 <해방 전후사의 인식>은 역사학이 아니고 관념적 지식인의 망상이며, 그 바탕을 이루는 정서로서 민족주의를 저는 ‘지성을 마비시키는 독약’이라고 부릅니다. 
Republic of Korea를 직영하면 고려공화국이죠, 그래서 인촌 김성수는 고려공화국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보성전문의 이름을 급히 고려대학교로 바꾸시고, 좋은 이름 선점했다고 미소를 지은 것입니다. 
또 죽산 조봉암은 제헌국회에 상정된 헌법 초안 토론에서 첫 발언자로 나서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던 자신의 위상을 과시하려는 이승만 박사의 정치적 의도에서 결국 대한민국이라는 촌스런,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국호를 다시 채택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 민주정의 역사를 말하기 전에, 저는 항상 김홍집을 말씀드리고 싶어 합니다. 왜 김홍집인가? 우리 조상들이 1860년 북경 함락 이후에 고민한 문제는 “번속국(藩屬國) 군주정 조선이냐, 독립국(獨立國) 민주정 대한민국이냐”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의 서론은 김홍집이 조선에 소개한 <조선책략>으로부터 일어난 논쟁, 영남만인소와 위정척사파, 그리고 문명개화파의 성립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1884년의 무모한 갑신정변과 이후 10년의 위안스카이 간섭 하에서 보낸 잃어버린 10년을 거친 후에 비로소 1894년에 가서 온갖 오해와 중상모략을 무릅쓰고 갑오경장을 관철시키고, 결국에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장엄한 죽음을 맞이한 김홍집이야말로 진정한 혁명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분은 김옥균, 박영효 등 철없는 도련님 후배들이 일을 벌여놓으면 수습을 도맡아하고, 고종의 간청에 마지막 영의정과 첫 총리를 맡아서 때늦은 개혁을 하여 조선의 신분질서를 해체하였습니다. 
김홍집이야말로 실질적으로 인민을 위해 헌신한 정치가로서 우리나라 민주정의 역사에서 가장 먼저 이야기해야 할 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전근대적 신분질서의 해체가 좋은 민주정의 가장 중요한 전제이기 때문입니다. 
김홍집의 헌신 후에 비로소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보성에서 태어나신 서재필과 충청도 촌놈 이상재는 아펜젤러, 언더우드, 애비슨, 게일 등 마국과 캐나다에서 온 젊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독립협회를 만들고,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신문을 만들고, 만민공동회를 열었습니다. 
거기서 백정에서 면천된 박성춘이 연설을 하고 열아홉 소년 안창호가 연설을 하고, 그 연설을 통해서 지도자로 등장합니다. 무엇보다도 만민공동회에서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기본 노선이 성립되니 바로 친미 민주공화국을 세우자는 큰 방향입니다. 
한반도에 영토적 야심이 없고, 동아시아에 기독교 나라 하나를 세우고 싶다는 젊은 선교사들의 열정을 거들 뿐인 무심한 미국을 끌어들여서 그 미국을 닮은 민주공화국을 세우면 독립할 수 있다는 소박한 생각, 바로 그것이 이상재와 서재필의 생각이고, 그들이 키운 아들, 또는 아우들인 이승만과 주시경과 안창호의 생각이었습니다. 민주공화국의 구상이 한반도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와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뿌리는 하나이고, 이를 공부하는 사람은 가장 먼저 <조선책략>부터 읽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 가보아야 한다고 말씀드립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 안내 책자 영문판에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선교사들은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움으로써 한국 사회에 크고 깊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변화시켜 낡은 한국의 신분질서를 해체하는데 기여하였다.” (The missionaries profoundly influenced Korean society, not only by establishing hospitals and schools, but by affecting its intangible values, thus contributing to the abolition of the class hierarchy in old Korea.) 
맞는 말 아닙니까? 저는 크리스챤이 아니지만,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갈 때마다 깊은 감동을 느낍니다. 광주의 양림동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도 가서 참배를 했습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다음으로 우리가 공부해야 하는 것은 3.1운동과 거기서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독립된 민주공화국의 구상은 임시정부로 구체화됩니다. 
저는 임시정부를 공부하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1873년생 이동휘, 1875년 생 이승만, 1878년생 안창호라는 세 지도자는 모두 평민의 아들이었습니다. 이승만이 유일하게 몰락 양반의 아들로서 과거를 준비하던 유생이었지만, 명문거족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으니 평민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특히 함경도 북청의 아전의 아들인 이동휘가 이승만과 나란히 최고 지도자로 떠올랐다는 사실은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감동을 줍니다.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출세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아전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국가 원수로 추대되었습니다. 
이승만과 이동휘는 여러 임시정부 구성안에서 집정관 총재, 대통령, 국무총리 등 국가를 대외적으로 대표하는 자리와 국정을 총괄하는 자리에 교차 추대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상하이에서 통합 임시정부를 만들어내고 이끌었던 안창호는 그야말로 평안도 시골의 상놈의 자식이었습니다. 이동휘와 이승만과 안창호, 세 지도자가 이끌고 대표하는 임시정부는 민주공화국의 그림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한때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기본노선은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그것은 독립운동에 3•1운동의 아이들이라는 새로운 세대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나타난 위기였습니다. 그것은 민주화운동에 386세대라는 5•18의 아이들이 등장한 것과 비슷합니다. 이들이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친소 공산주의 노선을 끌고 들어온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일이 벌어진 세계사적 배경도 있고, 이해할 만 하기도 하지만, 자기 세대에서 대세라고 할 만큼 다수가 되면 불을 보듯 뻔한 사실에도 눈감는, 반지성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주시경 선생이 1914년 요절하고, 종로 YMCA 회관에 앉아 아들, 손자 세대의 청년들을 달래면서 너무 극단으로 가지 않도록 가르치던 이상재 선생이 좌우합작의 신간회 회장으로 추대된 지 한 달 만에 1927년 돌아가시고, 이동휘 선생이 1935년, 안창호 선생이 1938년 돌아가셨지만, 이승만 박사가 해방 후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인촌 김성수 선생과 한독당을 탈출한 해공 신익희, 공산당을 탈출한 죽산 조봉암과 함께, 그리고 고당 조만식을 정신적 지주로 하는 월남민들의 도움으로 ‘3.1운동의 아이들’의 친소노선이 초래한 혼란을 극복하고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기본 노선을 지켜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마침내 UN이 1947년 11월 14일 총회에서 한국에 민주정부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을 파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게 바로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주고, 글자를 모르는 문맹자도 투표할 수 있도록 기호를 막대기 숫자로 표시하였습니다. 가장 진보적인 선거법으로 총선을 치른 것입니다. 
최근에 저는 5•10총선의 선거법을 만드는 데 기여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법률고문 마르크 슈라이버(Marc Schreiber), 그리고 미군정 법률고문 프랭켈(Ernst Frankel)과 퍼글러(Charles Pergelr) 등이 모두 공산주의 또는 파시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로서는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2차 세계대전을 치뤄내고, 전쟁 후에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든 것은 ‘영미의 진보’라는 사실을 저는 강조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는 바로 2차 세계대전 직후라는 시대 분위기와 영미 진보의 유전자가, 그들의 꿈과 이상. 그들의 헌신이 깊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중심이 되었던 미국의 지도자는 민주당의 루스벨트였습니다. 그는 미국식 사회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 뉴딜정책을 밀고나간 지도자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영국에서는 노동당이 거국내각에 참여하였으며, 전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동당의 애틀리 수상이 단독 집권하였습니다. 
1948년 12월 12일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에서 주민의 자유의지가 표현된 유일 합법 정부로 승인했습니다. 마침내 우리 조상들이 꿈꾸던 민주공화국을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 민주정의 역사는 1948년 5월 10일부터 시작한다고 믿습니다. 
또 대한민국이 탄생하자마자 겪은 홍역과도 같은 위기, 유아사망의 위기에서 구해준 것도 영미의 진보 세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3일 만에 군대를 파견하고, 즉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열어서 유엔군의 깃발 아래 16개 나라 군대가 대한민국을 위해서 싸우게 한 당시의 미국 정부는 공화당 정부가 아니라 루스벨트를 이어 받은 트루먼의 민주당 정부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영국 정부는 보수당 정부가 아니라 애틀리 수상이 이끄는 노동당 정부였습니다. 저는 보수진영 사람들에게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처음 생각해보는 눈치입니다. “노동당(!) 정부가 군대를 보내서 대한민국을 구해주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힘은 물론 막강했지만, 영국은 영연방의 종주국으로서 국제정치에 나름대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에 군대를 보낸 16개 나라들의 절반은 영연방 나라들입니다. 
한국 민주주의를 보다 넓은 세계사의 시야에서, 또 긍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 전에는 보이지 않던 여러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보게 됩니다.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과 발췌 개헌이나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 이런 무리한 일들을 거듭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권위는 추락해갔는데, 역설적으로 그것은 아무리 권위가 높아도 헌법을 지키고, 전쟁 중에도 임기를 지키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암울한 혼란기라고만 생각하는 50년대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1948년 건국부터 1960년 3•15 부정선거까지 전국 선거를 열 한 번이나 치릅니다. 국민들이 부지런히 투표를 한 것입니다. 
1956년 대선에서는 유명한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도 나왔고, 신익희 후보의 30만 한강 백사장 유세 장면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조봉암 후보의 30% 득표라는 이변에 더하여 야당의 장면 후보가 부통령에 당선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이제 그만 두기를 바라는 국민의 마음이 선거 결과로 표현되었습니다. 
또 보릿고개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60년대에도 한국 민주주의는 만만하지 않게 작동합니다. 1963년에 윤보선과 박정희가 맞붙은 대통령 선거 같은 경우도 매우 재미있습니다. 경쟁 상대를 빨갱이로 모는 색깔론은 윤보선이 펼칩니다. 그리고 그 전략은 상당히 먹혀 들어가서 월남민이 많아 사는 서울과 경기, 강원 등에서 윤보선은 압승합니다. 부산에서도 비등합니다. 
그럼에도 근소하게라도 박정희가 이긴 것은 경남, 전남, 경북, 전북의 순서대로 남부의 빈농들이 박정희를 지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경북 출신이지만, 정작 가장 많은 표를 받은 건 경남과 전남이라는 사실도 재미있는 사실입니다. 
지난 73년 대한민국은 민주정의 독립국으로 자리를 잡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부산정치파동을 취재한 영국 기자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말했지만, 한국은 쓰레기더미가 아니라 기름진 토양이었습니다. 
그 기름진 토양은 바로 농지개혁이 성공한 사회경제적 기초를 말하는 것입니다. 라틴 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이나, 필리핀 등과 우리나라의 차이를 젊은 시절의 우리는 잘 몰랐습니다. 한국도 그런 나라들 중의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식민지 종속국에서 해방된 평범한 후진국이 아니었습니다. 유라시아 구대륙의 끝에 붙어있지만 신대륙과도 같은 나라였습니다. 
저는 노인이 되어서야 깨닫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한 친구들도, 중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도 그의 아버지가 누군지 잘 모르고 묻지도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조선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친구를 사귀면서 그의 아버지는 물론이고, 조부, 증조부, 외조부까지 알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우리는 참으로 좋은 나라에 태어난 것입니다. 
5•18은 민주화운동의 꽃이다! 
지난 73년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진정한 위기는 1972년 10월 성립한 유신체제로부터 1987년까지 15~6년 동안 지속된 군부독재로 인해 초래된 민주헌정(民主憲政)의 중단이었습니다. 당연히 이에 항의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잘 아는 민주화운동입니다. 
그 15년의 민주화운동 한가운데, 정중앙(正中央)에 꽃처럼 피어난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잘 압니다. 5•18은 한국 민주주의가 유아기에 겪었던 4•19혁명과 함께 앞으로 미래 한국의 민주주의에는, 대문에서부터 외적과 악귀를 막는 수호신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하필 1973년에 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나이 스무 살부터 서른네 살까지 15년 동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민주화운동에 바쳤습니다. 이 시기에 저는 세 번의 감옥살이를 경험하였지만, 가장 중요한 경험은 부마항쟁이었습니다. 
부모님이야 걱정을 많이 했지만, 젊은 저는 대단한 일을 한다는 자부심에 즐거운 나날이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유치한 생각과 행동에 스스로 부끄러움도 느끼지만, 좋은 친구들과 재미있는 추억도 많고,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1979년 10월 16일, 17일 부산에서, 그리고 10월 18일, 19일 마산에서 시민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출소한지 얼마 되지 않는 저는 마산 본가에서 낡은 지붕을 수리하느라고 운동복 차림으로 일하고 있다가 동네 사람이 “시내에 난리가 났다”고 하는 말을 듣고 마산 중심가 창동 거리로 달려 나갔습니다. 
그 날 밤 저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파출소 유리창이 박살나더니 곧 파출소가 불타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몽둥이를 들고 파출소 유리창을 깨부수는 청년들은 저보다 한참 어린 10대 소년들이었습니다. 저는 구경꾼에 불과했습니다. 
부산에서 1000명 마산에서 500명 쯤 잡혀 들어갔는데요, 분류를 해서 결국 군법회의에 각각 50명 정도를 넘긴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방화범으로 지목된 10대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나중에 저와 같은 날 부산 주례교도소에서 풀려나왔습니다. 
그 날 마산 오는 버스 안에서 그 친구는 저에게 “형님, 형님, 저 사실은 파출소에 불을 질렀소! 오토바이 기름을 빼가지고 끼얹고 불을 지르니까 확 붙던데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가 물었습니다. “불을 지르니까 기분이 어떻던가?”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시종 오리발을 내던 그 친구는, 풀려나오자마자 저에게 그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구경꾼인 저가 부마항쟁의 주역이라고 관련자 1호 증서도 보내주고, 기념일이 되면 기자가 전화합니다. 구경꾼더러 주역이라고 해서 저는 번번이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사실 왜곡은 항쟁의 다음날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경찰은 저를 부산의 어느 주택가에 자리 잡은 보안대 합동수사본부로 데리고 가더니 저와 비슷한 학생들을 더 잡아들여서 남민전(南民戰,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라는 지하 단체의 기획과 지령으로 부마항쟁이 일어났다는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일주일 동안 강도 높은 수사를 했습니다. 그 수사는 10월 26일에 갑자기 중단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진실은 왜곡되기 시작하더니 이제 당시의 지식인, 학생들이 기념사업회를 구성하고 부마항쟁의 이야기를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간혹 제가 보았던 부마항쟁의 실제 주역, 시민들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럴수록 저는 그들에게 불편한 사람입니다. 
20년 전, 저가 마산에 살 때, 부마항쟁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윤한봉 선배를 모셔다가 마산항에서 밀항선을 타고 미국으로 망명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그 분이 5•18 단체들에 대하여 못마땅해 하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 분이 남긴 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운동의 탈을 쓰고 5월을 팔고 조국과 민족을 파는 일부 위선자들이 재단 설립 과정에서 자신들의 주도권과 영향력과 명예와 권위가 훼손되었다고 판단되자마자 대뜸 그런 중상(中傷)을 시작한 것이다... 나는 환멸을 느껴 5•18 기념 행사장에는 귀국 후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도청 앞에도 망월동에도 행사 때는 가지 않았다. 또 중상을 한 모 운동 세력들이 설쳐대는 행사장에도 아예 가지 않았다.” 
마산에서 저도 이렇게 격렬한 감정은 아니라도 씁쓸한 감정을 느낀 적이 많습니다. 기념사업의 주도권을 두고 정치성향이 다른 사람들끼리 싸우기를 반복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부마항쟁의 진정한 주역은 아니었습니다. 부마항쟁이 이러한데 5•18 광주민주화운동이야 이루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늘이 자리에서 감히 털어놓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그저 제 속마음으로 갖고 있던 생각입니다. 아마 누군가로부터 욕을 먹을지 모르겠습니다. 
“386세대는 5•18의 아이들이다. 그래서 386세대는 5•18을 모른다. 3•1운동의 아이들이 3•1운동을 아는가? 3•1운동의 아이들은 3•1운동을 모른다. 3•1운동의 시위대가 미국 공사관, 프랑스 공사관으로 간 이유를 아는가? 3•1운동이 지향하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독립국을 버리고 전체주의 소련을 이상향으로 받아들인 것이 3•1운동의 아이들이고, 이들이 중년이 되었을 때 해방이 되고, 그들의 힘이 자칫 나라를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갈 뻔 하지 않았던가?” 
저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5•18이 지키고자 한 것은 민주주의인데 거기에 (반미•반일) 민족주의가 왜 나옵니까? 미국 항공모함 이야기는 왜 합니까? 미국을 끌어들이려는 억지 논리가 아닙니까? 
이제 제 말씀을 끝맺고자 합니다. 
친중•중북 민족주의자들이 아무리 머릿수가 많아도 그들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에 나타난 세력이며, 그들은 5•18과 관련이 없습니다. 5•18을 원래의 주인인 시민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 주인들이 피로서 지키고자 했던 것, 민주주의 이외에 엉뚱한 이야기들을 함부로 뒤섞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저의 두서없는 말씀을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말씀을 요약하고 약간의 보충을 곁들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한국 민주주의는 1972년부터 1987년까지 15년 동안 헌정이 중단되는 기간이 있었지만, 이 진통을 잘 극복하고, 발전하여 지금도 잘 작동하고 있습니다. 특히 1987년 이후 두 번씩이나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대단한 성취라고 생각합니다. 
2. 그런 점에서 이탈리아나 일본보다 나은 점이 있습니다. 일반 국민, 시민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정치인 머슴들이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십년 정도 부려먹고 가차 없이 해고를 하니 충성 경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한국 민주주의가 이렇게 잘 작동하는 가장 근원에는 사회경제적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농지개혁으로 평등지수가 높은 나라가 되었기 때문에 구대륙의 역사가 오래 된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민주주의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4. 한국 민주주의의 약점은 민주주의 자체가 작동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철인정치적 요소라고 볼 수 있는 정당이 발달하지 않은 데 있고, 공화주의나 자유주의, 공과 사의 구분 등이 아직 민주주의에 접목을 잘 하고 있지 못한 데 있습니다. 
5. 민주주의는 democracy의 오역입니다. 민주주의를 민주정(民主政)으로 보아야 비로소 현실 속에 존재하고, 살아 움직이는 역사적 존재로서 한국 민주정이 보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오래 설계하고, UN이 만든 나라, Republic of Korea(직역하면 고려공화국)이 바로 한국 민주정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살아있는 현실적 존재로서 한국 민주정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6. 그래야만 1948년 5•10총선의 의미가 되살아납니다. 1948년 건국된 대한민국이야말로 유엔이 2차 대전 이후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고자 할 때의 이상(理想) 그대로 만들어진 진보적 민주주의 나라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7. 지난 73년의 한반도 역사는 바로 민주정과 군주정의 차이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자유주의 민주정이 시끄러운 것 같고 불안정한 것 같지만, 발전하고, 전체주의 군주정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 같지만 조만간 그 역동성이 사라지고 모두가 수동적인 사회가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반도는 세계사의 실험장이었습니다. 
8. 법치가 얼마나 중요한 지, 삼권분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언론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지, 선출직 공직에 대하여 임기가 규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 지 남북한을 비교하면서 새삼 깨닫게 됩니다. 
9. 민주주의를 몽환 속의 꿈이 아니라 현실로 보면,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열어서 백정 박성춘도 연설을 하고 열아홉 소년 안창호도 연설을 하고 그 연설을 통해서 새로운 지도자로 떠오른 일의 큰 의미가 되살아납니다. 
10. 김홍집이 가지고 온 조선책략을 다시 읽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와 헐버트, 애비슨과 게일 등의 선교사들과 이상재와 유길준과 서재필, 그리고 그 아우들 이승만과 주시경, 이동휘, 안창호 등이 확립한 독립운동의 기본노선, 친미노선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11. 세계 최대의 나라 중국 바로 옆에 위치하는 지정학적 숙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독립된 민주정의 나라인가, 번속국 군주정의 나라인가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냉정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시민이 군인이라는 아테네도 상기하고, 전국토를 요새화한 스위스도 본받아야 합니다. 
12.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잘 모릅니다. 설사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머리로 알지라도 몸으로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자부심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독선을 키웠습니다. 
13. 그 중에서 특히 ‘전향할 기회를 놓친 주사파’는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재교육 대상입니다. 이들은 민주주의는 하늘나라로 보내버리고, 판타스틱한 민족주의 정서에 빠져들어 민주공화국의 안정을 해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린 학생들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교육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14. 수천 만 인류의 희생으로 전체주의 파시즘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자 세운 UN을 주도한 것은 루스벨트-트루먼의 미국 민주당과 애틀리의 영국 노동당 정부였습니다.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3일 만에 군대를 보내서 대한민국을 구해준 것도 그들이었습니다. 
15. 그들 영미의 진보와 맥을 같이 했던 조봉암의 길을 되살려, 한국적 보수와 짝을 이룰 때 비로소 한국 민주주의는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보수도 영미 진보를 인정하고 공존할 자세를 가질 때 비로소 선진국 보수가 될 수 있습니다. 
16. 5•18은 4•19와 함께 한국 민주주의의 안전장치, 대문의 수문장과 같습니다. 하지만 5•18을, 그 상징 자산을 엉뚱한 자들이 독점하고 있는 이상 5•18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사파, 친북 민족주의자의 5•18’을 ‘시민의 5•18’로 되돌려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Eun-Gwi Chung
내게 김지하 시인의 절창은 여전히 <황톳길>이다. 여러 사념은 접고 이 시로 시인의 명복을 빈다.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밤마다 오포산에 불이 오를 때
울타리 탱자도 서슬 푸른 속이파리
뻗시디뻗신 성장처럼 억세인
황토에 대낮 빛나던 그날
그날의 만세라도 부르랴
노래라도 부르랴
대숲에 대가 성긴 동그만 화당골
우물마다 십 년마다 피가 솟아도
아아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총칼 아래 쓰러져 간 나의 애비야
어이 죽순에 괴는 물방울
수정처럼 맑은 오월을 모르리 모르리마는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길고 잔인한 여름
하늘도 없는 폭정의 뜨거운 여름이었다
끝끝내
조국의 모든 세월은 황톳길은
우리들의 희망은
낡은 짝배들 햇볕에 바스라진
뻘길을 지나면 다시 모밀밭
희디흰 고랑 너머
청천 드높은 하늘에 갈리든
아아 그날의 만세는 십 년을 지나
철삿줄 파고드는 살결에 숨결 속에
너의 목소리를 느끼며 흐느끼며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 1969년의 이 시가 아직도 현재형으로 읽히는 이 부조리한 세계.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가마니가 컨베이어 벨트로 바뀌었을 뿐...


오길영
  · 
* 착잡
김지하 시인이 소천했다.(관련 기사는 댓글) 시인으로서 그의 행보에 대해서는 단순치 않은 생각이 든다. 특히 1990년대 이후에 그가 보여준  어지러운 행적에 대해서는 나는 지금도 매우 비판적인 입장이다. 한국사회에서 존경할 만한 원로가 드물다는 판단을 하게 된 하나의 사례다. 그래서 시인을 생각하면 착잡한 마음이 여전하다. 
하지만 1970~80년대 한국사회는 그에게 적지 않은 빚을 졌다. 나도 그의 시를 읽으며 많은 걸 느꼈다. 그건 인정해야 한다. 이제 그가 남긴 시,  삶의 영욕은 문학사의 엄정한 평가로 남겨졌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종구
제목 : 간첩으로 조작된 재일동포의 기록 : “장동일지” -
일본에 있는 지인이 6월 말에 도보출판(東方出版)에서 간행된 “장동(長東)일지 – 재일 한국인 정치범 이철(李哲)의 옥중기-”를 보내 왔다. 1948년생이며 고려대학에 유학 중이던 재일동포 청년 이철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5년 11월에 영문도 모르고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고문과 폭행에 시달리다가 자살도 실패하고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다. 그는 시키는 대로 조서를 작성하면 풀어준다는 수사관의 말에 속아 북한을 두 번이나 왕래했다고 허위 자백을 했으나 사형수가 되었다. 심지어 한 달 후에 결혼할 예정이었던 약혼자도 간첩에게 포섭된 공작원으로 만들어져 실형을 선고받았다. 매일 죽음의 공포에 시다리던 이철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13년을 복역하고 제도적 민주화가 진행되기 시작한 1988년에 석방되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주례로 명동성당에서 늦은 결혼식을 올린 신혼부부는 친지들에게 인사하러 방일하였으나 한국 정부는 귀국을 저지했다. 과거사 청산 절차가  시작되어 2015년 11월에는 대법원에서 이철의 재심을 마무리하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일본에서 태어난 이철의 부친은 자녀들에게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보여주고 애국가를 가르치는 민족의식이 투철한 민단 간부였다. 그러나 아들이 본국에서 간첩으로 체포되자 충격을 받아 급사했으며,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면회를 다니던 모친도 석방을 기다리다가 병사했다.  일본의 지인들은 전국 각지에서 “구출하는 모임”을 조직하고 구명운동을 전개했다. 먼저 석방된 약혼자와 그녀의 모친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의 투사로 변신하여 경찰과 몸싸움을 하며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섰다. 카톨릭과 개신교의 성직자들은 구속자 석방과 교도소 내부의 인권 상황 개선을 요구하는 가족들을 격려하고 지원했다. “장동일지”에 수록된 암울한 상황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버티는 가족들의 이야기는 민주화 운동의 진짜 역사이기도 하다. 
- 군사정권 시절의 재소자는 인권이 없었다.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카터가 인권 외교를 강조하고 있으니 국내 양심수들에게도 좋은 일이라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서울구치소 교도관들은 사형수 이철을  묶어놓고 몇시간 동안 집중 구타했다. 대구교도소는 좁은 방에 재소자를 꾸역꾸역 밀어 넣어 고생시키는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는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들을 구타해 몇차례 기절시키고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만든 가혹 행위를 저질렀다. 대전교도소에서는 목욕을 오래 하지 못하게 만드느라 펄펄 끓는 물을 담아 놓은 욕조에 빠진 재소자가 전신 화상을 입고 즉사하는 사건도 있었다. 겨울에도 난방은 없었다. 외부로 나가는 서신은 검열을 받았다. 어느 사상범이 미국에 있는 누나에게 보내는 “가마니를 지급받아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게 되었다”는 편지를 검열한 교도관은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내용으로 판단하고 통과시켰다. 그 편지를 받은 누나는 실태를 깨닫고 통곡했다. 
- 유신정권 타도 운동을 하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된 대학생들도 처음에는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을 피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양자는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단식투쟁도 같이 하는 동지가 되었다. 구속 수감된 시인 김지하, 언론학자 이영희,  경제학자 박현채, 서예가 신영복 등을 비롯한 명사들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또한 이철이 만난 미전향 장기수와 각종 좌익수의 얘기는 분단과 전쟁이 남긴 비극을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장동일지”에는 양심수만이 아니라 잡범도 많이 등장한다. 이철은 사회의 밑바닥에서 힘들게 살아가며 전과 기록을 쌓아가는 누범자들을 보며 민중의 상태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진짜 한국인이 되어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국어와 국사를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철은 석방된 이후에도 일본에서 통일운동에 참가하며 “재일 한국 양심수 동우회”를 만들어 사건의 진상을 알리고 재심을 통해 권리를 회복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제는 서대문 독립공원이 된 옛 서울구치소 건물에 마련된 역사관에는 사형수 이철이 광주교도소로 이감되는 약혼자와 교환한 묵주가 전시되어 있다. “장동일지”는 박정희 정권에게 날벼락을 맞은 억울한 청년의 생애사이며 일반인이 모르는 교도소 내부의 참혹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중요한 사회사적 자료이다. 2019년 6월에 일본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 피해자들에게 정식으로 사과했다.


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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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 방문기] 내가 다른 책을 쓸 수 있도록 다시 <다르게> 방문해야겠다.  
- 그룹으로 원조 프로젝트하는 것은 너무 여러 요인이 작용해서 기대하는데로 잘 되지 않는다.
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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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방문기]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황석영 (지은이) | 자음과모음(이룸) |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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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 …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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