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12

Dongseok Tschoe | Facebook 위안부

(14) Dongseok Tschoe | Facebook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 분야를 잘 알지 못하고 있던 내가 보더라도, 젊은 시절 일본군 성노예로 고통을 받았던 이용수 할머니가 그동안 윤미향 선생과 함께 반인도적인 일제시대의 행태를 고발하고 일본의 만행과 그 실태를 세계적인 이슈로 부각시켜 온 것에 대해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 이용수 할머니가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언론에다 정의기억연대와 윤미향을 비판하는 인터뷰를 자꾸 해서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할머니판 진중권이 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 하며, 누가 누구에게 사죄해야 하는가?
시민단체는 시민들의 힘으로 바로잡으면 된다. 문제가 있다면 감독관청에서 충분히 조사하여 바로잡으면 된다. 바로잡을 수 없을 정도의 부정부패가 심했다면, 감독관청이 수사를 의뢰하면 된다. 벌써부터 검찰이 나서는 것은 옳지 않다. 썩어빠지 검찰이 도대체 누구를 수사하며, 누구에게 침을 뱉을 수 있단 말인가? 윤석열의 처와 장모부터 수사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아래는 페친 정대화 선생의 글이다. 공감한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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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식민지 시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한 이후 지금까지 지속해온 단체가 정대협이고 지금의 정의기억연대다. 이 운동이 있었기에 김복동 할머니도 이용수 할머니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 운동을 했던 윤미향 이사장이 국회로 가고 이용수 할머니가 기자회견으로 비판적 문제제기를 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여러 의견이 있지만 검찰이 정의기억연대 등 여러 곳을 압수수색하면서 본격적으로 개입했기 때문에 회계 문제는 검찰 수사를 기다려야 하게 생겼다. 그러나 검찰 수사와 무관하게 이 운동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된 사람들에게 몇 가지 곤란한 문제가 생겨버렸다.
첫째, 윤미향 씨가 국회로 간 것에 대해서 이용수 할머니가 문제를 제기한 것은 무리한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과거 할머니 자신이 문제 해결의 방법으로 국회 가는 것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윤미향 씨가 국회 간 것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 할머니들의 과거의 고통과 지금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이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할머니들에게 죄진 것은 아닌데 왜 배신자라고 말하고 용서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도대체 왜 배신자인지, 무엇 때문에 용서를 못한다고 말하는지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정의기억연대의 활동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단체가 새롭게 거듭나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할머니들이 이런 방식으로 하는 것에 대해서는 납득할 수 없다는 의견이 있다.
넷째, 정의기억연대가 위기에 처했다. 문제가 없다면 결국 오해가 풀리고 이 사태가 해결되겠지만,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정의기억연대가 그대로 존속되고 과거처럼 활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해서 지난 30년간 지속되어온 정의기억연대의 활동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잃은 것은 미래요 얻은 것은 상처뿐이다.
다섯째, 의도했던 아니든 일본 극우파와 친일파와 토착왜구와 반민족주의자와 일부 보수 계열의 언론과 사람들은 뜻하지 않게 어부지리의 일확천금을 하게 되었다.
여섯째, 이용수 할머니의 삶의 궤적을 생각해보면 하고 싶은 말씀이 많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할머니가 무엇을 이루려고 언론에 자꾸 노출되는지 의아스럽다는 의견이 많다. 할머니가 위안부 운동이 어떻게 시작되고 전개되었는지를 모르지 않을텐데, 지금 하고 있는 언론 접촉이 위안부 운동에 어떤 치명상을 주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이 부족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
잠시 짬을 내서 윤미향, 이용수를 제목으로 몇 뉴스를 검색하면서 기사에 딸린 댓글을 일별해 보았는데 의외로 할머니의 행동에 대한 비판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윤미향 씨에 대해서는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사회적 쟁점이 되어버린 이상 수사 결과에 따라 책임질 일이 있으면 누구든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Hyuk Bom Kwon and 712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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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페친인 Chan Un Park (박찬운)교수의 글입니다. 나는 한일간의 위안부 (더 정확히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문제를 몰상식한 수준에서 합의했다는 사실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박 교수는 국제법적으로 상당한 문제가 있어서 그 동안 여러 차례 지적해왔습니다. 국내에도 저명한 국제법 학자들이 꽤 있을 텐데, 아무도 나서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쓴 글입니다. 아래와 같이 공유하니 페친 여러분의 일독을 권합니다. 널리널리 알렸으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박 교수의 글에 대한 나의 댓글도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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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궁금하다, 우리 국제법 학자들이 입을 다무는 이유가
지식인 사회에서 동료를 비판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비판하는 사람은 완전한가? 그도 불완전하긴 마찬가지인데 누가 누굴 비판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세상사, 완벽한 사람이 나올 때가지 기다릴 수는 없다. 내가 부족해도, 나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하는 게 내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 나는 그런 심정으로 하기 힘든 말을 여기에 쓴다.
구랍 28일 한일양국 정부가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합의를 한 뒤 나는 분에 넘치는 역할을 했다. 나는 대학교수 중 처음으로 그 합의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나는 6번에 걸쳐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부분 언론으로 퍼져나갔다.
내 입장의 골자는 간단한 것이다. 이번 합의는, 형식적으론 양국을 법적으로 구속할 수 있는 조약이 아닌 단순한 정치적 합의(선언)에 불과하고, 내용적으론 국제범죄로서의 전시 성노예 문제를 해결하는 국가 간 합의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의 견해는 학자적 양심으로 보면 정치한 연구를 토대로 발표한 게 아니었다. 그저 국제법을 공부한 사람으로서(나는 국제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기초적 지식을 활용해 입장을 적시에 개진한 것에 불과하다.
나는 이런 입장을 내놓으면서 내심 이 견해가 우리 국제법 학자들을 추동해 본격적인 학문적 비판으로 연결되길 바랐다. 나는 원래 실무자 출신으로 국제법 이론에 일가를 이룬 사람이 아니다. 인권을 국제법적 시각으로 연구하는 교수일 뿐, 스스로 생각해 봐도, 연구역량이 많이 떨어지는 사람이다. 우리나라엔 국제법의 이론적 깊이에서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기라성 같은 연구자가 즐비하다. 그들은 국제법을 본무대인 하버드에서, 옥스퍼드에서, 케임브리지에서, 파리에서 공부한 사람들이다.
나는 이분들이 이번 위안부 건에 대해 제대로 된 입장을 내놓아 주길 바랐다. 하지만 연말이 다가도록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몇 사람이 이 대열에 뛰어들었는데, 거명하면, 이용중 교수(동국대)가 한겨레신문에 내 의견과 유사한 칼럼을 썼고, 조시현 교수(전 건국대)가 어느 토론회에서 역시 유사한 발표를 했을 뿐이다. 이분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애석하게도 국제법 학자들 사이에서, 이 두 사람이 우리나라 국제법 학계를 대표하는 분이라고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도 했다. 연말연시라 기자들도 휴가에 들어갔고, 교수들도 대부분 휴식을 취할 테니, 전문가들의 입장을 담은 기사가 쉽게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연초가 지나길 기다렸다. 이제 보름이 지난 오늘, 나는 이런 생각을 접어야겠다.
국제법 교수들이 바빠서 입장을 못낸 게 아니라 입장 내기를 포기했다고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합의가 있은 지 보름이 넘었지만 우리나라 국제법 학회를 움직이는 교수들의 입장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부 교수가 외교부 소속의 국립외교원 주최 토론회에서 매우 실망스런 입장을 냈을 뿐이다.
국제법을 공부하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는 학자라면 이번 합의의 형식과 내용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문제를 심도 있게 비판할 수 있는 학자가 바로 국제법 학자들이다. 나의 설익은 입장에 그들이 나서 살을 붙여 준다면 뭔가 국제법적으로 정치한 입장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행동하고 그들은 뒤에서 이론을 만들고... 얼마나 좋은 역할분담인가?
그럼에도 왜 그들은 입을 다물고 있을까? 무슨 어려움이 있어서 그토록 말을 아끼고 있는 것일까? 국제법 학회에서 인정도 받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이 그렇게도 열심히 글을 쓰고 인터뷰를 하는 데, 그것을 지원하든, 아니면 논리적 비약이 있다고 비판을 하든, 뭔가를 해야 할 텐데, 왜 그들은 그것을 하지 않을까?
그들에겐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관심이 없다는 것인가? 이런 문제에 끼어드는 건 학자적 품위에 어긋난다는 것인가? 아니면 이 합의를 비판하면 정부와 껄끄러운 사이가 되니 그게 부담스럽다는 것인가?
법을 함께 공부해 온 나와 그들 사이에 이렇게 큰 의식의 차이가 있다는 게 놀랍다.
그래도 정말 궁금하다. 우리의 석학들이 입을 다무는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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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응원합니다.... 법학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경영학계는 더욱 심하지요... 재벌의 비리에 대해 경영학자들 중 나서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시민단체가 나서서 비판하곤 하죠. 최근에 벌어진 SK 최태원만 보더라도 우리나라 재벌의 비리와 불법 문제는 매우 심각한 수준인데도 그렇게 많은 경영학자들 중에 비판적인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인문학 전공자들이 더 나서는 형국입니다. 경영학계도 썩을 때로 썩은 것이지요...아마도 재벌에게서 떨어지는 떡고물 때문에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떡고물이래야 사실 몇 푼되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Chung Ok Chung and 12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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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핑크당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곽상도가 누구인가?
검사시절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박근혜의 민정수석으로 부정선거의혹 수사를 중단시킨 의혹, 김학의 사건 축소무마의혹, 신천지와의 연계와 재산증식의혹 등으로 수사를 받아야 할 사람이다.
핑크당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의 아베정부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정당이다. 이런 정당에서 위안부 문제의 진상을 규명하겠다고? 얘들아, 아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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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kin Moo-Young and 432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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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 그리고 제국주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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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아일랜드에서 여름휴가를 보낸 것은 2001년이었다. 20년 근무했던 한국은행을 떠나 인사조직분야에서 컨설팅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휴가지를 아일랜드로 정했다. 유학시절 유럽대륙 국가들 대부분 다녀보았지만, 차를 가지고 가기에는 부담돼서 영국과 아일랜드는 남겨놓았다. 그전에 박지향 교수가 쓴 《슬픈 아일랜드》라는 책을 보았는데, 영국에게 수백 년간 괴롭힘을 당했던 나라였고, 왠지 아일랜드가 마음에 끌리기도 했다. 더구나 친구인 김중구 (Jung Goo Kim) 교수(현 우송대학교, 당시 외환은행 리스크관리부장)가 적극 추천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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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를 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우리나라와 전혀 다른 이국적 풍광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것이다. 당시에는 아시아의 네 마리 용에 이어 유럽의 ‘켈틱 타이거’(Celtic Tiger)라는 슬로건으로 경제잡지 표지를 장식할 정도로 경제성장이 눈부실 때였다. 운전대가 오른쪽에 있는 차가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곧 익숙해졌다. 우리는 여러 도시를 돌았다. 전형적인 가톨릭국가인데다 순박하기 짝이 없는 시골사람들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친절함, 소박함, 특별한 산업이 없이도 여유로움과 자신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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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여름, 아일랜드의 어느 시골 B&B 주인과 함께 기네스를 마시고 있을 때, 기억은 분명하지 않은데, 누군가 800년간이나 영국인이 자신들을 괴롭혔으니 이제는 더욱 경제를 성장시켜서 영국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Angela’s Ashes》라는 책을 꼭 읽어보라고 했다. 아일랜드 출신 미국인 영어교사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자서전이었다. 이 책은 당시 아일랜드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였다. 이 책을 사들고 귀국했지만, 읽지는 못하고 있다가 한국번역판이 《안젤라의 재》라는 이름으로 나왔다길래 단숨에 읽었다. 어린 시절 생활상의 자세한 묘사는 정말 탁월했다. 퓰리처상을 받기에 충분했다.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혼자 킬킬대다가 때로는 그들의 참혹한 삶에 눈물을 흘렸다. 여기서도 8백년간 영국이 지배했다는 얘기가 끊임없이 나온다. 빈민구호소에 가서 몇 푼을 얻어 기네스 몇 잔 들이킨 서민들은 늘 독립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얘기를 찬송가 후렴처럼 반복한다. “슬픈 아일랜드”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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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역사를 간단히 요약해야겠다. 19세기 중엽이었다. 아일랜드는 감자마름병이라는 기근과 역병에 시달려야 했다. 몇 년 사이에 8백만의 인구 중 2백만 명이 사라졌다고 한다. 기아로 죽고 이민을 떠났다. 당시 인류 최악의 재앙이었다. 케네디 가문도 이때 아일랜드를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영국은 자신들이 지배하고 있던 아일랜드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 참상에 눈감고 있었다. 오히려 식량을 긁어모아 본국으로 운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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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대규모 원조를 약속했다. 영국 정부는 오스만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요청했다. 대영제국의 도덕성은 여기서 끝났다고 말한 사람들이 있지만, 제국엔 본시 도덕성이란 없다. 그뿐이 아니었다. 심지어 식량을 실은 술탄의 배가 아일랜드 땅에 대지 못하도록 방해하자 배들은 영국관리들의 눈을 피해 몰래 정박해야 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아일랜드인들의 민족주의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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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영국인들이 쳐들어와 자신들이 왕을 겸하기도 했는데, 이 시기부터 아일랜드인들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러다 17세기부터 아일랜드는 명실상부한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이 대거 아일랜드의 얼스터지방(지금의 영국령 북아일랜드 지역)으로 넘어와 가난한 가톨릭교도들을 몰아내고 중요한 지위와 재산을 차지해버린 것이다. 지주계급에 있던 가톨릭교인들 중에는 장로교로 개종해서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도 했다. 그렇게 되자 아일랜드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하여 가톨릭교도가 되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인들에게 차별과 억압을 받아왔다. 신·구교간의 갈등은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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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들어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말았다. 1916년 부활절, 차별과 억압을 참다못한 젊은이들이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일주일만에 중무장한 영국군에 의해 무참히 진압되었다. 77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15명이 처형되었다. 가혹한 처벌에 아일랜드인들은 분노했다. 이어서 1919년~1921년 3년간의 영국과 아일랜드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게릴라전이었다. 월등한 화력을 가진 영국군의 잔혹성과 만행이 알려졌지만,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 사상도 전달되어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양측은 협상테이블에 앉았다. 결국 남부의 26개주는 독립을 허용하고, 북부 개신교 지역인 얼스터 6개주는 영국령으로 남을 수 있도록 협정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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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아일랜드인들은 이 협정을 받아들였을까?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또 싸움이 벌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1949년에 가서야 아일랜드공화국으로 완전히 독립하고 영연방에서 탈퇴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영국에 편입하기로 한 북아일랜드 역시 두 파로 갈렸다. 영국에 연합해야 한다는 개신교파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는 가톨릭교도 중심의 공화국파로 나뉘어 싸움이 시작됐다. 이 정치적 갈등이 종교분쟁으로 표면화되면서 많은 사상자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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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보수당 출신의 대처 총리 시절이었다.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공화국군(Irish Republican Army, IRA)의 요원들 40여명은 벨파스트 감옥에서 일반 잡범들과 같은 취급을 당했다. 그들은 정치범 대우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였다. 그 투쟁의 중심에는 바비 샌즈(Bobby Sands, 1954~1981)가 있었다. 그녀는 옥중에서 출마하여 영국 하원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처 총리는 대화를 거부했다. 샌즈는 66일간의 단식투쟁 끝에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1981년 여름에만 단식투쟁으로 10명이 사망했다. 영국 보수당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샌즈의 죽음은 IRA 신병모집에 아일랜드 젊은이들이 대거 참여하도록 했고, 무장폭동도 크게 증가했다. 아일랜드 지식인들은 대처 총리를 향하여 “우리가 아는 최악의 쌍년(bastard)!”이라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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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노동당 출신 토니 블레어가 1997년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로 총리가 되자, 북아일랜드 양측 지도자들간의 “벨파스트 선언”을 이끌어냄으로써 폭력투쟁을 종식시켰다. 이때부터 아일랜드인들은 본격적으로 경제부흥의 길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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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일랜드 인구는 영국의 10분의 1도 안 된데다가 가난했고, 1949년 아일랜드공화국을 세운 후에도 영국으로부터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슬픈 아일랜드”였다. 영국은 자신들이 아일랜드에서 저지른 만행에 대해 사과한 적이 있는가? 없다. 제국주의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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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1세기 들어서면서 “켈틱 타이거(Celtic Tiger)”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영국의 생산성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내가 아일랜드를 처음 갔던 2001년이 바로 그런 때였다. 아일랜드는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아일랜드를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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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이 돼서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공식적으로 아일랜드를 방문해서 과거에 잘못한 것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를 했다. 아일랜드인들은 그런 사과를 쿨하게 받아들였다. 영국은 왜 그제서야 사과를 했을까? 갑자기 영국인들이 개과천선했을까? 국가 간에 그런 경우란 일어나지 않는다. 더 이상 아일랜드를 어떤 식으로도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과 이웃과의 좋은 파트너관계를 맺지 않으면 오히려 자신들이 손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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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하게 영국의 사과를 받아들인 아일랜드의 경제는 일취월장했다. 지금 영국과 아일랜드 간의 생산성 지표인 인당 GDP를 비교해보자.(OECD Data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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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45,504 US$ vs. 아일랜드 83,081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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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 수치만 비교해도 현재 아일랜드는 영국보다 1.8배 더 잘 살고 있다. 나는 작년(2018년 여름) 북아일랜드 여행을 통해 남•북아일랜드인들의 삶의 질적 수준을 비교할 수 있었다. 아일랜드는 이제 영국의 ‘넘사벽’이 되었다. 다시 묻는다. 영국은 과거의 만행에 대해 아일랜드에 사과했는가? 했다. 제국주의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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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국인들은 아직도 과거 대영제국의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브렉시트(Brexit)가 그것이다. 주변국들과 세계인들은 비웃고 있는데, 영국인들만 그걸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착각은 자유다. 이것이 어리석은 자들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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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들은 과거 그들이 경영했던 식민지에 대해 사과했는가? 배·보상은 했는가? 그런 적은 없다. 제국주의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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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독일인들은 왜 주변국들에게 주구장창 사과하고 있는가? 그들이 전쟁 후에 갑자기 선량한 사람이 됐기 때문에? 천만의 말씀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더 큰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소위 전략적 로키(low-key)를 선택한 것이다. (독일인들이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기서 생략한다.)독일제국도 뒤늦게 식민지 개척에 뛰어들어 짧은 기간이지만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경영했다. 그들 나라에는 사과하지도 배상하지도 않고 있다. 제국주의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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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어떤가? 사과한 적이 있는가? 없다. 주변국들이 너무나 약체였기 때문이다. 조약이나 협정문서 몇 장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제국주의란 그런 것이다. 누누이 강조했거니와, 일본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내는 유일한 길은, 일본이 더 이상 깔보지 못하도록 인당 GDP를 올리는 것뿐이다. 우리기업이 높은 생산성과 창의성을 발휘하는 국가로 발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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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구성원들을 쥐어짜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생산성을 높일 수 없다.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아베와 그 일당이 제국주의 망상에 사로잡혀 일본국민을 대상으로 허튼 수작을 꾸미고 있을 때, 우리는 경영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여 높은 생산성과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이것만이 우리가 일본의 도전을 극복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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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와 그 일당이 100년 전 아시아를 휩쓸었던 일본제국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착각은 자유다. 이것이 어리석은 자들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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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생산성 지표로 가장 많이 쓰이는 현재의 인당 GDP차이를 보자.(OECD Data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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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42,823 US$ vs. 한국 40,096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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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OECD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라. 한일관계가 어디까지 왔는지 보이는가? 간발의 차이다. 겁낼 필요 없다. 100년 전 또는 50년 전 한일관계가 아니다. 지금 일본의 도전에 응전하지 않으면 한국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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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u Bae and 84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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