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15

일본 경제, 잃어버린 30년이 아니라 20년이다

관정일본리뷰 -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관정일본리뷰 제60호 
박상준 와세다대학 국제학술원 교수의 "일본 경제, 잃어버린 30년이 아니라 20년이다"가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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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제, 잃어버린 30년이 아니라 20년이다

  지난해 말과 올해 초, 일본인 경제학자 노구치 유키오(野口悠紀雄) 교수의 여러 칼럼이 한국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일본이 선진국에서 탈락할 위기에 처해 있으며 한국이 그 자 리를 대신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거나, 한국 기업이 기술개발을 추구하는 동안 일본 기 업은 값싼 통화에 의존하는 전략을 추구함으로써 국제적 경쟁력을 상실했다는 그의 질타 는 일본을 위한 쓴소리였지만, 일본보다 오히려 한국에서 화제가 되었다. 

  전직 대장성 관료이자 히토쓰바시대학 명예교수인 저명 일본인 경제학자가 한국을 일 본보다 높이 평가한다. 한국에서 그의 칼럼에 대한 한두 매체의 보도가 뉴스 포털의 메인 을 장식하자 뒤이어 수많은 매체가 연달아 거의 비슷한 기사를 냈고 일본의 실패를 조롱 하는 댓글이 이어졌다.   일본의 버블 경제가 붕괴된 후, 한국 경제는 일본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1990년에는 일본의 명목 GDP가 한국의 11배였지만 2021년에는 2.7배에 불과하다. 2021 년 일본의 1인당 명목 GDP는 한국보다 13%가 많을 뿐이다. 만일 지금과 같은 환율과 실 질 GDP 증가율이 유지된다면, 불과 3~4년 후에 한국은 1인당 GDP에서도 일본을 넘어설 것이다. 그리고 사실 구매력을 기준으로 하면 이미 한국의 1인당 소득이 일본 이상이다.1)   각종 경제 지표에서 한국이 일본을 추월하거나 추월 직전에 있는 것은 일본 경제를 더 욱 초라해 보이게 한다. 2000년대 초 일본에서는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2000년대 중반 경기가 좋아지자 아베 수상은 2006년 소신표명연설에서 “긴 터널을 지 나고 드디어 빛이 보인다”고 선언했지만, 세계 금융 위기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겹치 자 일본 경제는 다시 추락했다. 잃어버린 10년이 20년이 되었다. 

  2013년부터 경기가 회복되다가 2019년 이후 미중마찰과 코로나19로 다시 경기가 꺾였 다. 그래서 이제는 “잃어버린 30년”이라는 탄식도 나온다. 노구치 교수의 칼럼을 대대적 으로 소개한 한국의 언론도 일본 경제를 잃어버린 30년으로 묘사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러나 일본의 사회지표는 지난 10년이 그 이전의 20년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 은 잃어버린 20년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고 그 교훈이 지난 10년 사회지표를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 그래서 일본 경제를 종합적으로 보면 잃어버린 30년이 아니라 20년이다. 그 20 년 동안 일본이 얻은 교훈을 분석하면 한국 사회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01 1) World Bank의 World Development Indicators 데이터를 참조하였다.

  우선, 범죄율과 자살률이 급감했다. 1990년 일본의 천 명당 범죄율(형사 사건 건수)은  13.2였다. 이후 꾸준히 증가해 2002년에 22.4로 정점을 찍고 그 후로 하락한다. 2014년 이후 10으로 떨어졌고 2020년에는 4.9까지 떨어졌다. 10만 명당 자살률 역시 비슷한 추 세를 보인다. 1990년대 후반 범죄율이 급속히 상승할 때 자살률도 상승했다. 1990년 17.3 에서 1998년에는 26, 2003년에는 27로 늘었다가 하락하기 시작해, 2015년에 20 이하로 떨어졌고 2021년에는 16.8을 기록했다. 지난 30년 중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2) 이제는 범 죄율과 자살률 모두 한국보다 낮다. ) 특히 자살률은 OECD 최고 수준에서 평균 수준으로 떨어졌다. 반면 한국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일본보다 자살률이 높은 나라가 되었다. ) 최 근에는 OECD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다. )   일본에서 범죄율과 자살률이 가장 높을 때는 실업률이 가장 높을 때였고, 실업률이 가장 높을 때는 기업 도산 건수가 가장 많을 때였다. 즉, 기업이 어렵고 고용이 불안할 때 사회 지표가 악화되었다. 버블 붕괴 후 치솟기 시작한 일본의 기업 도산 건수는 2000년대 초 반에 정점을 찍고 2009년에 다시 악화되었지만, 지난 5~6년에는 버블 붕괴 이전 수준으 로 내려갔다. )   지난 10년간 취업자 수도 증가했다. 2013년부터 2021년까지 15세 이상 인구는 63만 명 감소했지만 취업자 수는 정규직 취업자와 비정규직 취업자가 각각 264만 명, 158만 명 증 가했다. 20대 초반(20~24세) 인구는 21만 명 증가했는데, 정규직은 38만 명, 비정규직은 15만 명 증가했다. ) 인구가 감소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취업자는 증가할 수 있었을까? 바 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 노령의 퇴직자, 취업을 포기한 청장년, 취업난으로 학업을 연장하 거나 부모에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청년 등의 소위 비경제활동인구가 감소했기 때문이다.   한편, 노동시간은 계속해서 단축되었다. 일본은 더 이상 노동 시간이 긴 나라가 아니다. 2020년 연간 노동시간은 1598시간으로 OECD 평균 1687시간을 하회한다. 한국은 1908 시간으로 OECD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긴 나라 중 하나다. )   반면 임금 근로자의 평균 급여는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 급여 소득자의 월평균 급여는 1997년의 467만 엔을 정점으로 하락하기 시작해 2009년에는 406만 엔까지 떨어졌다. 2010년대 비교적 꾸준히 증가했지만 아직 약 430만 엔 정도로 1990년대 수준을 회복하 지 못하고 있다. ) OECD 자료를 보면 최근에는 한국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 
 
   즉, 일본은 임금을 동결하고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대신 고용을 늘리는 선택을 했다. 그 리고 이 선택은 잃어버린 20년 동안의 경험에 바탕하고 있다. 인구가 감소하고 고령화가 진행되는 나라에서 고용마저 불안해지자, 노령인구의 부양 부담을 정부가 고스란히 떠안 아야 했다. 그리고 이는 정부 재정 악화의 가장 큰 요인이 된다. 1990년부터 2022년까지 일본 정부의 보통국채잔고는 약 855조 엔이 증가했는데, 일본 재무성은 그 중 거의 절반 에 해당하는 411조 엔이 사회보장관계비 지출 때문이라고 추산한다.11)   그리고 고용의 불안은 노후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지고 소비를 악화시킨다. 고령화 사회 에서 소비의 부진은 내수 시장을 더욱 위축시키고 기업의 투자의욕을 떨어뜨린다. 일본 은 예기치 않은 충격이 올 때마다 급격히 소비와 투자가 위축되는 나라다. 일본의 실질 GDP는 2009년 -5.7%,  2020년 -4.5% 증가율을 보였는데, 마이너스 성장의 주된 원인 은 소비 혹은 투자의 부진에 있었다. )   현재 일본의 고용률은 70대 이상을 제외하면 모든 연령대에서 남녀 모두 한국보다 높 다. 특히 일본에서는 여성 고용률이 20대 후반 83.6%에서 30대 후반에 75.8%로 떨어지 는 데 비해, 한국에서는 70.9%에서 57.5%로 떨어진다. ) 일본에서 여성의 고용률을 특히 중요시한 것도 잃어버린 20년의 교훈 때문이다. 여성의 경력단절은 연금에 대한 정부의 부담을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출산율 하락의 원인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유 럽의 경험을 보면 여성의 경력단절이 없는 나라에서 출산율이 회복되었다. 

  고용이 안정되자 현재 일본의 화두는 임금 상승이 되었다. 낮은 임금 역시 소비를 위축 시키고 미래를 불안하게 하는 요인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기업과 노동단체 사이에 큰 이견이 없다. 지난 30년간 노동조합의 목표는 임금의 상승이 아니라 고용의 안정이었
다. 노동자들은 기업에 협조해 임금 동결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기업의 실적이 회복되자 일본 사회는 이제 임금 인상도 요구한다. 2021년 시가총액에서 일본 1~2위인 도요타와 소 니가 사상 최대의 영업이익을 발표하는 등, 지난 10년간 일본 기업의 실적은 꾸준히 회복 되었다. 그리고 이제 실적이 회복된 기업은 임금 인상에 협조하는 분위기다. 기시다 수상 이 내건 ‘새로운 자본주의’에 임금을 인상하는 기업에 세제혜택을 주는 방안이 포함된 것 은 이런 변화를 배경으로 한다. 
  마지막으로 부동산의 안정도 사회지표를 개선하는 데 기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부동 산 버블은 1991년을 정점으로 붕괴되었고, 2005년까지 1년의 예외도 없이 부동산 가격이 하락했다. 2005년 도쿄의 지가는 버블의 시작점인 1984년 수준까지 하락했다. 집값이 끝 없이 오르던 버블기에는 아이를 가진 3~40대 인구가 도쿄를 떠났다. 집값이 충분히 안정 되고 나서야 그 인구가 도쿄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그 후에야 도쿄의 집값이 반등을 시작 했다.14) 그리고 반등한 후에는 경기에 따라 등락을 거듭할 뿐 과거처럼 폭등하거나 폭락하지 않는다. 현재 도쿄의 집값은 중견 기업 사원에게 그리 부담스러운 수준이 아니다. 일 본에서는 주택이 주거의 대상일 뿐 투자나 투기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고용, 임금, 노동시간, 부동산 세제 등에서 상당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는 아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최저임금 상승을 둘러싼 갈등의 정도만 비교해도 그 차이가 명확히 보인다. 일본은 20년을 잃으면서, 일본을 위한 길을 하나씩 깨달아 갔다. 그래서 지난 10년 동안 사회지표가 개선되었고, 그래서 잃어버린 30 년이 아니라 20년이 된다. 일본이 뒤늦게 깨달은 것들을 이해한다면 한국은 5년이든 10 년이든 잃지 않고 한국을 위한 길을 더 빨리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일본보다 부유하게 된 한국이지만 거기에 머문다면 지금 한국이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일본의 석 학이 일본을 위해 발하는 쓴소리에 취하는 대신 일본이 20년을 잃으며 얻은 교훈을 우리 사회에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할 때다.
 
박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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