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10

金坑「平和、天皇そして韓半島」2017, 손민석의 김항 비판

金坑「平和、天皇そして韓半島」.pdf

東方學志 제179집(2017년 6월), 29∼56쪽 DOI 2017. 179. 0. 002
평화, 천황 그리고 한반도: 와다 하루키와 전후 일본 평화주의의 함정1)
김 항**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교수, 사회학.

<국문요약>
이 논문은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의 한반도
연구와 전후 일본 평화주의론 사이의 내적 연관
을 비판적으로 규명하는 것을 주된 논점으로 삼
는다. 와다는 1950년대 다케우치 요시미(竹内
好)와 이시모타 쇼(石母田正)의 영향 아래 식민
지 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비판적 자기성찰을
전후 일본 재생을 위한 시금석이라 간주했다. 그
리고 이런 관점 속에서 연구자로서의 자기 관점
을 확립해나간다. 근대 러시아 사회경제사를 주
전공으로 삼아 학계에 자리 잡은 와다는 1970년
대 유신정권 하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깊은 관
심을 표명하면서 한반도 문제를 논하기 시작한
다. 특히 김대중 납치사건과 뒤이은 반독재 투쟁
및 12․12 쿠데타와 5․18 광주 민주항쟁에 이
르는 한국의 정세는 와다로 하여금 단순한 운동
차원이 아니라 비판적 연구대상으로서 한반도
를 자리매김 하게끔 했다. 이후 와다는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전쟁과 북한 연구에 착수하여 냉
전붕괴라는 정세 하에서 새로이 등장한 한반도
연구의 세계적 패러다임 속에서 굵직한 연구를
제시한다. 이러한 와다의 한반도 연구를 지탱하
던 기본 관점은 1950년대부터 견지해온 탈식민
과 침략비판이라는 관점이었다. 그러나 1990년
대 후반의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공방 속에서
와다는 스스로의 두 가지 원칙에서 멀어지게 된
다. 특히 2000년대에 들어 일본 내에서 개헌이
현실화되자 전후 평화주의를 적극적으로 옹호
하며 호헌의 입장을 취하게 되는데, 이 때 일본
의 전후 평화주의가 쇼와 천황 히로히토와 현재
의 천황 아키히토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논점
을 취하면서 뿌리깊은 보수주의적 문화관으로
관점을 이동시킨다. 이는 탈식민과 침략비판이
라는 원칙과 한반도 연구에서 동아시아론에 이르는 자기 언설을 동시에 뒤집는 귀결로 이어진
다. 이런 와다의 입장변경은 결국 메이지 유신 이래 꾸준히 존속해온 뿌리 깊은 문화적 보수주
의의 발로로 평가될 수 있다.

핵심어: 와다 하루키, 전후 평화주의, 식민주의와 침략전쟁 비판, 한반도 연구, 천황


<차 례>
1. 문제의 소재
2. 한반도에 대한 시선과 동아시아 담론
3.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 식민주의와 보편주의의 착종
4. 제자리걸음의 역사를 움직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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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의 소재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1938~ )는 널리 알려진 일본의 이른바 ‘양심적 지식인’이다. 그가 한국에 널리 알려진 계기는 1990년대 초중반의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와 1990년대 후반부터의 위안부 문제였다. 그런데 이미 그는 1980년대 수많은 ‘운동권’들에게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지하고 군부독재를 비판하는 ‘화전춘수’라는 논객으로 알려졌었고, 한국에서는
금기시되었던 북한연구를 위해 일본을 택했던 유학생들이 그의 연구에 큰 영향을 받은 바
있었다.1) 그런 까닭에 와다는 일본의 ‘양심적인’ 한반도 역사 전문가로 인식되어왔다.2)
그러나 와다가 학계에 첫발을 내딛은 것은 한반도 연구자로서가 아니었다. 와다는 1960
년 도쿄대학 서양사학과를 졸업한 뒤 사회과학연구소 조교로 부임하여 1968년 조교수로
임용되는데, 이 때 그의 전공분야는 러시아 근현대 사회경제사였다. 그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첫 논문은 “‘토지와 자유’주의 혁명이론 – 1870년대의 혁명적 나르도니키주의의 이론과 파토스”(歴史学研究 241호, 1960)로, 러시아 연구로서는 문학 아니면 레닌 밖에 몰랐던 당시 일본 학계에서 새로운 분야의 개척자로 인정받았다. 이후 와다는 1968년에 “근대 러시아 사회의 성립”을 조수 논문3)으로 제출하고 사회과학연구소의 조교수로 취임하

1) 하종문, 무라오 지로, 세지마 류조, 와다 하루키 , 역사비평 84호, 2008 참조.
2)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 모 일간지에 칼럼을 정기적으로 연재했던 와다는 대중적으로도 익숙한 인물이다. 최근에도 위안부 합의나 87년 6월항쟁 30주년 기념 등과 관련해 한국 언론에 자주 거론된다. 이 때 그를 따라붙는 수식어는 예외없이 일본 내 ‘양심적’ 지식인이라는 수사이다. 일례로 “복귀한 日 대사, 소녀상 이전 강력요구 시사”, 매일경제 2017.4.4 ; “강경화 외교장관이 기대되는 이유”, 한국일보 2017.5.27 ; “'6월 항쟁' 30주년… 다음달부터 행사 쏟아진다”, 머니투데이2017. 5.31 등 참조.
3) 석사나 박사 학위논문은 아니지만 전임교수로 취임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자격 논문이라 할 수 있다. 내용이나 분량은 박사학위 논문에 준한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真男)의 출세작 일본정치사상사 연구도 조수 논문을 수정/보완한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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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데, 이 논문에서 와다는 당시 학계에서는 선행연구가 없었던 러시아 혁명 전 시기의 러시아 사회체제를 연구한다. 이 논문은 ‘러시아 자본주의의 성립’을 주제로 한 러시아 혁명의 물질적 토대에 대한 심층적 분석이었다. 스탈린주의 비판과 신좌파(new left)의 난립
등 급진운동이 최정점을 맞이했던 당대의 정세에서 와다는 사회주의 혁명의 물질적 토대를 ‘학문적으로’ 탐구하던 러시아 연구자였던 것이다. 그러던 그가 한반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떤 계기에서였을까?
와다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공산당 세포조직에서 활동하며 일본뿐만 아니라 국제 정세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청년 운동가였다. 중학교 시절에는 1954년 비키니섬에서의 수소폭탄 실험과 ‘다이고후쿠류마루(第五福竜丸)’의 피폭 소식을 접하면서 평화를 위협하는 국제정세 전반에 눈을 뜬다.4) 이후 고등학생이 되어 두 명의 동시대 연구자/사상가에게 큰 영향을 받는다. 바로 중국문학 연구자 다케우치 요시미(竹内好)와 맑스주의 역사학자 이시모타 쇼(石母田正)이다. 때는 일본정부가 소련 및 중국을 제외하고 서방 측 연합국과 ‘단독강화’에 나선 시기였다. 다케우치는 일본이데올로기(1952)라는 저서에서 중국을 무시하고 미국을 추종하는 당대의 흐름을 비판하면서, 정치가와 관료들이 결정을 주도하여 독재체제가 다시 회귀하고 있다는 점, 중국혁명이 일본의 근대화와 달리 인민 주도의 진정한 혁명이라는 점, 그리고 중국에 대한 일본인의 뿌리 깊은 멸시가 결국 일본의 전후 개혁을 망칠 것이라는 점 등을 주장한다. 와다는 이 저서를 통해 미국 중심으로 흘러가는 당대의 흐름에 비판적 인식을 획득할 수 있었고, 혁명에 성공한 중국에 대한 인식이 일본의 자기 인식과 개혁을 위해 중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다케우치는 와다에게 “가장 기본적인 참조 기준”이었으며 “신”이었다.5)
그런 신이 자신의 저작에서 한 명의 역사가를 추천했다. 바로 이시모타 쇼였다. 이시모타는 저명한 일본중세사가로 전후 일본사 연구에서 맑스주의적 관점을 근대를 넘어 중세사로까지 확장시킨 인물이었다. 이시모타는 역사와 민족의 발견(1952)에서 일본의 근대적 발전이 조선이나 중국의 희생으로 이뤄진 것을 강조하면서,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역사학의 임무로서 전면에 내세웠다. 맑스-레닌주의에 충실한 이 저서에서 와다는 제국주의 비판에 입각한 조선인식을 획득한다. “이시모타는 전후 일본의 현실은 미국에 대한 종속이라고 규정하면서 이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민족의식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독자성은 일본민족의 독립을 희구하면서도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 지배한 역사를 깊게 생각함과 동시에 타민족 억압의 경험이 일본인의 정신을 왜곡함을 지적하면

4) 和田春樹, ある戦後精神の形成, 岩波書店, 2016, 101~138쪽.
5) 위의 책, 129쪽 및 142~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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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그 왜곡은 단순히 식민지 지배를 그만두었다고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친 정신혁명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데에 있었다. 다케우치의 글에서 배운 뒤 이시모타의 이 문장을 읽고 조선문제에 관한 나의 입장이 성립한 것이다.”6)
물론 이는 한반도 문제에 관여하면서 일가를 이룬 노대가의 회상이라는 점에서 소급적
정리일 수 있다. 그러나 50년 뒤의 회상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와다의 조선/한반도에
대한 관심은 이른 시기부터 싹튼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1953년도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제3차 회담의 결과를 접하고 와다는 다음과 같이 일기에 적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정부 대표는 ‘일본의 조선통치는 조선인을 위해 큰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일본정부는
36년간 많은 돈을 조선을 위해 지출하여 조선인의 이익을 도모했다’고 말했다. (…) 이것은 다년 간 일본제국주의로부터 독립하려 투쟁해온 전 조선인민이 절대로 승복할 수 없는
발언일 것이다. (…) 한국 측의 주장은 독재자 이승만의 의지가 아니다. 조선반도 전체에서 다년 간 일본의 침략에 저항해온 조선민중의 목소리이다.”7) 이렇듯 이미 와다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조선/한반도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다케우치와 이시모타의 관점을
통해 반제국주의적 입장에서 식민지 지배 문제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 러시아 경제사 연구자 와다가 1970년대 이후 한반도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여러 지면에 적극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발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본령인 러시아 경제사 연구가 다케우치와 이시모타로부터 배운 제국주의 비판의 영향 아래에서 이뤄진 것이라 평가될 수 있다. 그는 러시아라는 연구대상에서 한반도로 관심을 확대시켰다기보다는, 제국주의 비판이라는 넓은 관점 하에서 러시아 연구와 한반도 연구를
전개했던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극복 없이는 제국일본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전제한다. 즉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와
평화주의는 철저하게 제국주의 비판과 식민주의 극복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기본 전제가
와다 하루키의 지적 영위를 관통하는 원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군대가 다른 나라로 나가 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 자기 나라가 공습을 받아 초토화되었다. 그럼에도 요격하는 항공기도 없고 고사포의 응사도 없었다. 군대가 우리를 지켜준다는 감각을 결국에 갖지
못했던 전시의 본토 일본인으로서는 군대 부정은 매우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그것은 누군가 타인으로부터 강요된 것도 아니고 패전의 과정에서 스스로 납득하여 획득한 입장이다. 확실히 여기에는 일본국가가 조선인을 ‘황국신민’화시키고, 만주국을 건국하고, 중국본

6) 위의 책, 149쪽.
7) 위의 책, 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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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에 대한 침략을 확대하고, ‘대동아공영권’ 건립을 위해 동남아시아를 침공했다는 사실에
대한 책임 의식, 가해 의식은 없다. 그런 한계를 포함하면서도 이 자연스러운 군대부정의
감정이 전후 일본인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8)
여기서 되풀이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나 감각이란 무엇인가? 와다는 군대나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가 공습을 겪은 ‘일본인’으로서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병렬적으로 조선, 중국, 동남아에 대한 지배와 침략에 대한 반성을 거론한다. 즉 평화주의와 지배/침략 반성은 별개의 것으로 병치되어 있는 것이다. 마치 평화주의는 자연스럽게 획득되었고 지배/침략에 대한 반성은 이후에 배워야 하는 것인 양 말이다. 여기에는
‘일본인’의 전후 민주주의와 평화주의가 식민지 지배나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 없이도 성립
가능하다는 인식이 있다. 그런 한에서 이는 와다의 자기배반이다. 스스로의 일생에 대한
회상에서 반제국주의와 탈식민주의가 지적영위의 출발점이었음을 회상하면서 동시에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와 평화주의가 ‘일본인’의 자연스러운 감각이라 평가하는 이 자기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다케우치와 이시모타라면 결코 일본인의 ‘자연스러운’ 감각과 같은 표현을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메이지 이래 형성된 일본인의 폐쇄적 동질성을 아시아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경유하여 비판하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와다도 그런 입장에 서왔다. 그러나
그런 오랜 시간에 걸친 노력에도 불구하고 위의 문장에는 명백히 ‘자연스러운’ 일본인의
정신 혹은 감각이 ‘자연스레’ 서술되어 있다. 단순한 실수일까 아니면 무의식의 소산일까?
이하의 논의는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와다의 자기모순이 어떻게 하나의 정신 안에서 갈등
없이 공존할 수 있는지 추적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인 셈이다. 우선 와다의 한반도에 대한
시선과 동아시아 담론을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2. 한반도에 대한 시선과 동아시아 담론
와다 하루키가 한반도 문제에 관해 처음으로 글을 공표한 것은 1974년도의 일이었다.
한국의 민중을 응시하기(韓国の民衆を見つめること) 라는 글에서 그는 1910년 한국병합
당시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를 비롯한 소수의 지식인을 빼고는 일본이 “얼마나 끔찍한 죄의 길로 진입하는지”를 아무도 몰랐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와다는 “일본인이 이
침략과 수탈의 역사를 부정하고 조선반도의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창조할 기회”가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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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위의 책, 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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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있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1945년의 패전이고 두 번째는 1965년의 한일조약 체결이었는데 두 차례 모두 일본인은 조선민중을 이해하지 못한 채 연대의 기회를 놓쳤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세 번째로 1973년의 김대중 납치와 뒤이은 한국 민주화 운동을 거론하면서, 이 기회를 통해 일본과 조선 사이의 역사를 전면적으로 반성하고 관계를 근저에서 다시 만들자고 제안했다.9)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와다는 당대의 상황을 계기로 한일 관계를
새로이 수립하자고 주장한다. 이는 단순히 한일관계의 개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반식민지 저항운동의 맥락에서 파악했으며, 이는 제국일본의 유산이 여전히 반도와 열도를 지배한다는 인식 위에서 이뤄진 사고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연대하는 것은 한국을 돕는 차원이 아니라 일본의 자기 개혁을 위한
실천이란 관점이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와다에게 조선 문제에 관한 전문적 식견을 준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다. 가지무라는 미국 제국주의는 ‘일본/조선/중국’ 인민의 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부활하려 하는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지배하려는’ 흐름을 놓쳐서는
안된다고 지적했고 와다는 그 관점을 받아들인다.10) 이런 관점 하에 와다는 한일조약을
일본의 조선 재침략으로 간주했고, 베트남 전쟁에 시민운동의 역량이 집중되던 당시 한일조약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그 노력은 1965년 9월 11일에 발표된 “한일조약에 반대하는 역사가 모임”의 성명으로 결실을 맺었다. 와다가 기초한 이 성명은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지배가 한일조약으로 해결되지 못함을 역사적 경위를 좇아 논증하면서, 결론적으로 “한일조약은 일본이 아시아의 동북 끝에서 아시아 민중의 억압과 수탈의
길로 다시 걸어 들어가기 위한 것이며, 이 길이 일본국민의 퇴폐와 비참을 강화시켜 베트남에서의 미국의 만행으로 이어짐은 자명한 사실”이라고 규탄했다. 이렇듯 1974년의 논문
이전에 와다는 이미 반제국주의라는 큰 틀 안에서 한일조약 및 조선지배 문제를 포착하고
문제제기했다. 이런 관점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시선에서도 일관되게 유지된다.
1975년 김지하의 일본시민에게 보내는 편지가 발표되면서 와다를 비롯한 몇몇 활동가들은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고 연이은 동아일보 광고 중단사태를 맞아 모금운동을 벌인다. 이후 와다는 조선사 연구자들과 함께 해적판 창작과 비평이나 리영희의 저서들을 읽으면서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비판담론을 적극적으로 학습한다. 그 학습의 결과물이 분단시대의 민족문화—한국 <창작과 비평> 논문집(分斷時代の民族文化—韓国<創作と批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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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和田春樹, 韓国の民衆をみつめること─歴史の中からの反省 , 展望 1974.12.
10) ある戦後精神の形成, 337~3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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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文集)(社會思想社, 1979)으로 간행되는데, 와다는 이 책에 백낙청의 창작과 비평 창간사(1966)를 번역하여 게재한다. 한국의 동시대 지식인이 한반도의 역사와 세계정세를
분석하는 시각에 깊은 공감을 느꼈기 때문이다.11) 이 시기 와다와 동료 활동가들에게 창작과 비평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지적 운동은 일본의 식민지배 역사와 미국 제국주의의
패권을 분단이라는 하나의 문제로 엮어 비판하는 ‘총체적’ 관점을 제시해주는 것으로 보였고, 이는 와다가 오랜 동안 간직해온 식민주의 극복과 제국주의 비판이라는 원칙을 체현하는 담론이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박정희 총살, 12․12 쿠데타, 그리고 광주학살로 이어지는 일련의 대격변이 일어났다. 일본의 미디어는 연일 대서특필로 한국의 정세를 다루었고, 와다와 동료들은
한국의 정세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특히 광주항쟁과 김대중 사형선고와 관련해서 그는 날카로운 필봉을 세운다. 1980년 1월, 이른바 서울의 봄이 쿠데타로 인해 다시 겨울을 맞이한 시기에 그는 한국의 정세를 희망어린 관측 속에서 혁명 전야로 규정한다. “파시즘과 더불어 볼셰비즘과 스탈린주의에도 반대하면서 의회민주주의와 산업민주주의를 목표로 한다 – 이 주장은 제3세계 혁명으로서의 민주주의적 사회주의를 목표로 한다는 노선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세계에서 전례가 없는 노선이며 가장 근원적인 변혁의 길입니다. 그야말로 혁명의 길입니다.”12) 이는 한국의 한 잡지에 실린 민주화운동 진영의 성명에 대한 해설인데, 와다는 한국의 상황을 제3세계 혁명이란 전망 아래에서 파악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와다에게 동시대 한국의 정세는 냉전질서를 극복하여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혁명으로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물론 희망어린 관측이었으며 스스로의 관점을 과도하게
투영한 결과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제국주의 비판과 식민주의 극복은 흔들리지 않는 와다의 세계관적 기초였음을 알 수 있다.
1980년 광주학살은 이런 희망적 관측을 산산조각 내기에 충분한 참극이었다. 그러나 와다는 광주를 ‘자유 광주’로 명명하면서 이 “자유의 공간은 혁명이 승리하기만 하면 전국에
실현될 새로운 질서의 모범이었다”13)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하루 빨리 안정을 되찾기를
바란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일본정부의 대응을 “진실을 회피하고 허구와 낡은 사고 틀에
사로잡힌” 입장이라 비판하며 광주민주화운동이야말로 일본을 낡은 사고, 즉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벗어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에 세우는 계기라고 말한다.14) 그 뒤 와다는 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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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김항, 동아시아 속의 <창작과 비평> , 한결같되 날로 새롭게: 창비 50년사, 창비, 2016 참조.
12) 和田春樹, 私たちも、ともに (1980), 韓国からの問いかけ, 思想の科学社, 1982, 10쪽.
13) 和田春樹, 自由光州の制圧に思う (1980), 世界> 1980.7(위의 책, 24쪽에서 재인용).
14) 위의 책, 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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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재판과 광주항쟁 투사들의 재판을 일본에 실시간으로 소개했다. 이 일련의 과정이 어떻게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나아가 세계의 새로운 질서를 위한 중요한 계기인지를 적극적으로 설파한 것이다.
이런 주장은 김대중을 잃는 일은 “일본국민을 포함하여 평화와 민주주의와 인간다운 삶을 희구하는 전 동아시아의 인간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타격”15)이라든가, 일본 정부가 경직된 한반도 정세 속에서 북한에 사절을 보내 “36년 간 방치해온 36년간의 식민 지배 청산에 나서 과거를 깨끗이 정리함과 동시에 조선반도의 긴장을 완화하여 동북아시아의 평화에 공헌”16)해야 한다는 데에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모두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것이란 인식에 바탕을 둔 주장이었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전진은 미국과 일본에서의 변화와 공시화되어야 하는데, 미국과 일본이 바뀌지 않는 한 다시
한국인의 운동이 벽에 부딪힐 것이기 때문이며 그 반대로 한국인의 운동이 벽에 부딪히면
미국과 일본도 변화하지 못할 것”17)이란 데서 알 수 있듯, 그 배경에는 연동하는 세계상이 전제되어 있었다. 와다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일국적 변화가 아니라 세계질서의 변화를 추동하는 계기로 파악했던 셈이다.
1980년대 그는 이런 기본입장에 입각해서 한국의 현안을 역사/정치 의제로 삼아 적극적으로 발신한다. 이런 관심과 실천은 1987년의 6월항쟁과 대통령 직선제로 일단락되는데,
이후 와다의 한반도에 대한 시선은 보다 역사적인 테마로 전환된다. 바로 ‘북한’과 ‘한국전쟁’이 주된 연구대상으로 부상한 것이다. 와다의 북한연구와 한국전쟁 연구가 기존 연구와의 비판적 대화 속에서 이뤄진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료와 기본적 관점의 측면에서 와다의 연구는 한국, 일본 및 국제 학계에서 다양한 논쟁 구도 속에 자리 매김 되었다. 특히
이른바 한국전쟁에 대한 ‘수정주의’적 연구가 대두되는 시점에서 와다의 연구는 그 한 축을
담당하기도 했다. 물론 이는 북한연구사 및 한국전쟁 연구사에서 매우 중요한 논점일 터이지만 여기서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18) 두 분야의 전문적 학설사나 논쟁사보다 여기서의
관심사는 북한과 한국전쟁이 와다의 지적영위에서 어떤 동기와 목적에 따라 도출된 주제였느냐이기 때문이다.
그가 북한과 한국전쟁 연구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은 1990년대 이후의 일로, 그 결과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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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위의 책, 88쪽.
16) 위의 책, 240쪽.
17) 위의 책, 274쪽.
18) 기존 북한연구의 구도 속에서 와다 스스로가 자신의 연구를 어떻게 위치 지우는지에 대해서는, 和
田春樹, 北朝鮮ー遊撃隊国家の現在, 岩波書店, 1998, 1~23쪽 참조. 또한 한국전쟁연구에서 동일
한 자기위상 규정에 대해서는, 和田春樹, 朝鮮戦争全史, 岩波書店, 2002, 17~35쪽 참조.
평화, 천황 그리고 한반도: 와다 하루키와 전후 일본 평화주의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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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출간된 것이 김일성과 만주항일투쟁(金日成と満州抗日闘争)(1992) 및 조선전쟁(朝鮮戦争)(1995)이었다. 이 두 저작은 1980년대 후반 이래 착수한 북한 및 한국전쟁에 관한
일련의 연구를 정리한 것으로, 이미 논문 형태로 지면에 발표되었을 때 많은 논쟁을 야기한
바 있다. 김일성을 역사적 실존인물로 확정하여 그가 벌인 항일투쟁이 북한의 정통성을 형성했다는 주장이나, 남침이 아니라 북침을 역사적 사실로서 확정하면서도 남북이 공통으로
무력통일을 지향한 결과가 한국전쟁이었다는 해석은 기존의 연구자들, 특히 한국과 일본의
‘우익’ 연구자들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다.19) 이데올로기적 공격에는 이유가 없지 않았다.
와다가 북한과 한국전쟁 연구를 통해 지향했던 실천적 방향은 “변화하해야 함에도 변화할
수 없어 길을 찾지 못하는 오늘날의 북한”을 변화시키는 일이었으며, 그 변화는 “20세기의
역사를 정리하여 남겨진 전후-식민지 후 문제의 처리를 이번 세기 안에 마무리”해야 하는
“일본국가 및 일본국민의 의무”임을 명확히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20) 즉 한반도 연구를
통해 다시 한 번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의 책임을 제기한 셈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한국전쟁도 베트남전쟁으로 이어지는 ‘20세기 동아시아의 30년 전쟁’
으로 자리 매김 된다. 한국전쟁은 남북의 무력통일 지향이 낳은 냉전 항의 내전이었지만,
그것은 미국과 소련의 전후 동아시아 질서를 둘러싼 보다 포괄적 전략의 경합이 낳은 결과물이다. 와다의 관점은 한국전쟁을 단순히 냉전의 산물로 보는 것이 아니었다. ‘동아시아
30년 전쟁’은 극복되지 못한 식민주의와 그 위에서 새로이 지속된 제국주의가 낳은 것이었기에, 제2차 세계대전으로부터의 단절이라기보다는 그 연속선상 위에 있는 무력충돌이었다. 일본에 국한해서 보자면 한국전쟁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에 대한 청산 없이 국제무대에 복귀할 길을 열어주었다. 스스로의 한국전쟁 연구를 집대성한 저작을 마무리하면서
와다는 말한다.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한국에 대해서도 조선민족에 대해서도 동정심을 발휘할 수 없었
다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물론 타이완이나 한국에 대한 동정이나 연대의 의를 표하면 반
공군사동맹으로의 방향성이 강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정부와 국민에게
는 그런 경향으로부터 눈을 돌리려는 마음이 강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필연적으로 일본
19) 일본에서 발표된 이데올로기적 비판의 대표적인 것으로, 萩原遼, 朝鮮戦争 金日成とマッカーサー
の陰謀, 文藝春秋, 1993 참조. 이 책에서 저자 오기와라는 와다의 한국어 독해 능력까지를 폄하하
면서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난을 일삼는다. 물론 이런 이데올로기적인 공격뿐만 아니라 그의 사료
비판이나 활용한 사료의 한계 등에 관한 ‘학적’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는데, 이는 북한 및 한국전쟁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학계 고유의 전문적 토론으로 평가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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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北朝鮮ー遊撃隊国家の現在, 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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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에게는 자기들만 평화로우면 된다는 의식, 지역의 운명에 대한 무관심, 지역주의의
부정이 강화되었다. 그것은 요코타기지에서 B29가 이륙하여 북한을 마지막까지 공습, 폭
격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끝나버린 정신 구조였다. 그렇게 하여 동북아시아의 국제구조
가 한국전쟁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21)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와다가 볼 때 한국전쟁은 일본으로 하여금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을 청산하지 못하게 한 커다란 계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과 후를 단절시킴과 동시에 연결시키는 이중의 결절점이었다. 한 편에서 한국전쟁은 이전과 다른 지역질서를 창출했지만, 다른 한 편에서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의 상처를 지역
내 역사적 주체들이 공동으로 청산하지 못한 채 잔존시켰다. 와다가 보기에 이는 일본인이
처한 필연적인 이중구속이었다. 당시의 수상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는 미국의 전쟁협력 요청을 거절하면서 “정신적으로 협력”22)한다고 답변한다. 요시다로서는 전쟁의 참화로 인해
군대와 전쟁에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던 일본국민의 감정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요시다 정부는 미국이 일본을 한국전쟁을 위한 ‘기지국가’로 변모시키는 것을 방관했다.23)
한 편에서 군대와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와 다른 한 편에서 지역 내에서 벌어지는 참극에 무감한 고립주의가 동시에 자리 잡는다. 와다의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은 이런 이중구속으로부터의 탈피를 목표로 주창된 것이었다.
전후 일본의 사상은 전쟁과 군대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형성된 사상이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은 희박하지만 군국주의와 침략주의에 대한 반성은 존재했다. 그런
전후 일본의 사상이 오늘날 여러 각도에서 재검토되고 있는데, 그 사상 안에서 살아온
나로서 되돌아보면 금기시되었던 것이 국가에 대한 책임 의식과 지역주의였음이 통절하
게 실감된다. 한 편에서는 자기가 속한 국가가 해온 일, 지금부터 해나갈 일에 대한 책임,
다른 한 편에선 자기들의 국가가 속한 지역에 관한 확고한 구상으로 그 지역의 평화와
협력 관계의 구축, 이 두 가지는 불가분의 관계로 묶여 있을 터이다. 그러나 이렇게 결합
된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일을 전후 일본인은 오랜 동안 회피해온 것이다.24)
‘동북아 공동의 집’ 구상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냉전 붕괴 이후의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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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朝鮮戦争全史, 489쪽.
22) 第八回国会衆議院会議録, 1950.7.14.
23) 이에 대한 상세 과정은, 남기정, 기지국가의 탄생: 일본이 치른 한국전쟁,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참조.
24) 和田春樹, 東北アジア共同の家, 平凡社, 2003, 9쪽.
평화, 천황 그리고 한반도: 와다 하루키와 전후 일본 평화주의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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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를 미국 일극주의에 기대어 구상하는 것이 아니라, 동북아 지역 내에서 자주적으로 협력체제를 지향하며 모색하자는 주장을 내포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구상은 한국전쟁 이래
지속된 ‘동아시아 30년 전쟁’이 종식되었음을, 그런 한에서 전후 일본의 이중구속을 벗어던질 수 있는 국면이 도래했음을 전제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정세 판단이 옳은 것인지 어떤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와다가 1990년 중반
이후에 하나의 새로운 국면이 도래했음을 희망을 갖고 실감했다는 점이다. 그 국면의 중심에는 한국의 민주화를 겪은 한반도가 있었고, 여기에 냉전체제의 붕괴라는 국제 정세가 중첩되어 분단체제가 변화한다는 전망을 낳게 했던 것이다.25) 북한의 핵실험과 국제금융위기가 이 지역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지만, 김대중정권과 노무현정권 하에서 이뤄진 남북정상회담은 그런 그림자를 빛으로 밀어내기에 충분한 것으로 와다는 기대했다. 또한 동남아시아 협력체를 중심으로 한 지역 내 협력체제(ASEAN과 APEC)가 가세하여 그에게 전망은 한없이 밝아 보였다. 그래서 와다는 한껏 들뜬 톤으로 ‘유토피아’를 언급한다.
사회주의 체제와 자본주의의 전지구화를 넘어선 “현대사의 제3기”를 여는 것으로 동북아
공동의 집을 위치지우며 와다는 그에 걸 맞는 “새로운 유토피아” 건설을 주창한다.
새로운 유토피아는 새로운 타입의 유토피아여야 한다. 개방적이어야지 통제적인 것이
어서는 안된다. 전통적인 유토피아의 내용이었던 닫힌 공간에서의 이상 실현과는 달라야
한다. / ‘동북아 공동의 집’은 그런 새로운 유토피아라고 생각한다. 동북아시아는 그토록
오랜 동안 전쟁을 경험한 지역이며, 아직도 중동과 함께 위기의 초점을 이루는 지역이다.
불신과 증오가 마음 깊은 곳을 찢고 있다. 그 지역에서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을 겪은 사
람들이 국경을 넘어서 만나 서로의 경험을 교류시켜 격렬하게 토론하면서, 그러나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협력하여 바뀌어간다. 여기서 함께 사는 길, 공동의 집을 모색하여 만
들어간다. 그 과정을 세계의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다른 지역의 경험으로부터도 배우면
서 인류에게 어울리는 새로운 집짓기를 자기 지역에서 실험해나갈 기개를 가지고 나아간
다. 이것은 훌륭한 유토피아이다. /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이 가능하다면 인류의 공동의
집, 지구공동의 집이 가능해지리라.26)
냉전이 분단시켰던 동북아시아는 이제 서로의 역사경험을 대질시키고 대화함으로써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고통을 서로 이해할 수 있다. 와다는 그것이 가능하다면 일본이 빠져들었던 이중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전망을 가졌다. 자신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25) 와다는 1990년대 초반 처음으로 방한했을 때의 일을 회상하며 이 시기에 세상이 바뀌었다는 실감을
가졌다고 술회한다. 김항, 앞의 글 참조.
26) 東北アジア共同の家, 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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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지역 내 이웃들의 고통에 눈감아야 했던 것이 전후 일본의 조건이었다면, 냉전의 종식으로 이제 평화는 미국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역 내 주체들과 주체적으로
협력하여 미래지향적으로 구축해나가는 과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1990년대 중반부터 위안부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것도 이런 전망 속에서였다.
그는 위안부 문제가 일본이 처했던 이중구속(그것은 동아시아가 겪은 30년 전쟁이기도 했다)을 벗어나는 시금석이 되는 안건이라 간주했다. 또한 이 뿐만이 아니라 일본과 주변국
사이에 상존해온 역사인식의 차이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15여년에 이르는 그 과정과 실천의 목록을 여기서 일일이 다룰 수는 없다. 다만 여기서의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와다는 확실히 냉전 붕괴 이후 일본이 처한 이중구속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다는
전망을 획득했다는 사실이며,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역사인식의 차이와 갈등이 해소 가능하다고 봤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이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비판과 극복보다는, 미래를 향한 지역 내 주체들의 대화가 과제가 되는 역사 단계로 이행했다는 인식이었던 셈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외교도 중요하지만 시민들 사이의 이해가 관건이었다.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와 평화주의가 주변의 위험과 상처를 되돌아보지 않는 심성의 발로였다면, 이제 요청되는 태도나 심성은 주변이 겪어온 아픔에 관심을 기울이고 보듬어 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와다는 1995년 7월에 설립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에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여러모로 비난이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오로지 국민이 기금에 보내온 사죄, 속죄하는
마음을 꼭 한국 사람들이 받아주었으면 하고 바라마지 않습니다. 이것이 거부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27)
이 기금의 성립과 이후 한일 간에서 전개된 사태의 전말은 2016년 12월의 정부 간 합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위안부 문제에 초점을 맞췄을 때 와다는 사태 전개에 관여한 유력한 지식인 중 한 사람일 뿐이지만, 와다의 입장에서 보자면 위안부 문제는
‘새로운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기초공사의 관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사태의 전개는 와다의 희망어린 전망을 어둡게 만드는 것이었다. 기금은 수많은 논란을 남긴 채 사업을 종료했고, 그 뒤 위안부 문제는 정부 간 합의를 통해 해결되기는커녕 다양한 관여 주체 사이의
앙금만을 남긴 채 현재진행형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전개과정과 그 안에서의 앙금을 일일이 살펴보고 가늠할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는 확인해두어야 한다. 위안부문제를
거치면서 새로운 유토피아 전망이 어두워져 감에 따라 와다의 초점이 동아시아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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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와다 하루키 외 공편, 이원웅 옮김, 군대위안부 문제와 일본의 시민운동, 오름, 2001,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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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의 평화주의로 옮겨갔다는 사실이다. 이제 그 초점의 이동이 내포하는 함의를 살펴볼 차례이다.

3.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 식민주의와 보편주의의 착종

아시아여성기금 이후 위안부 문제의 전개와 관련한 와다 비판은 서경식에 의해 종합적으로 제기된 바 있다. 서경식은 아시아여성기금을 주도한 와다의 언행이 스스로의 출발점이었던 다케우치 요시미와 이시모타 쇼의 사상을 배신한 것이라 지적한다. 와다는 조선 지배와 아시아 침략에 대한 처절한 반성이 전후 일본 갱생의 조건이라는 출발점을 저버리고,
식민주의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을 생략하고 어느 새 성립한 일본의 입장에서 위안부 문제에 접근했다는 것이다. 고노 담화를 일본 국가의 공식입장으로 평가하면서 민간 주도의
아시아여성기금이 일본의 ‘성의’라는 와다의 입장에는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을
찾아 볼 수 없다고 서경식은 지적한다. 와다의 지적 영위의 출발점을 감안한다면 역사 반성을 생략한 일본 국가의 ‘입장’이란 애초에 위안부 문제를 마주할 조건을 결여한 셈이고, 그런 국가의 입장을 수긍하고 민간의 양심과 선의를 피해자에게 받아들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비판이었던 셈이다.28)
서경식의 비판에 대한 와다의 응수는 곧바로 공표되었다.29) 여기서 그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비판에서 멀어졌다는 서경식의 비판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면서 반비판을 시도한다. 그는 2016년 12월의 양국 정부 간 합의를 백지화하자는 서경식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합의가 단순한 야합이 아니라 20여년에 걸쳐 험난한 여정을 겪어온 양국
정부 및 운동단체의 일정한 성과라는 것이다. 물론 와다가 무조건 합의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백지화한 후 새로이 해결책을 만들어나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라고 지적하면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염원해온 일본인으로서는 금번 한일합의의 개조, 개선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합의는 합의대로 존중하고, 이제 남겨진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자는 제언인 셈이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온 와다의 입장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여기서의 문제는 그 입장의 타당성 여부를 묻고 가늠하는 일이 아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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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서경식, “초심은 어디가고 왜 반동의 물결에 발을 담그십니까”, 한겨레신문 2016.3.1.
http://www.hani.co.kr/arti/politics/diplomacy/734569.html (2017.5.30. 방문)
29) http://japan.hani.co.kr/arti/international/23708.html (2017.6.10.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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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려 중요한 것은 와다가 서경식의 비판에 답하면서 보여준 기본 전제이다. 여기서 와다는
‘일본인으로서’ ‘해결’을 염원해왔다고 한다. 과연 ‘일본인으로서’의 위안부 문제 ‘해결’이란
무엇일까? 물론 일차적으로는 가해자로서의 책임의식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으로서’라는 한정에는 더 중요한 함의가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와 평화주의가
자리하는 정치적이고 사상적인 전제와 연관된다. 2015년 말에 출간된 와다의 저서는 그 전제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준다. 그것은 바로 식민주의와 보편주의의 착종이라 할 수 있다. 전후 평화주의를 다룬 이 책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이 책에서 그는 전후 일본이 ‘평화주의’를 근간으로 출발했으며, 천황과 주변 지식인의
주도 하에 ‘자발적’으로 형성된 것이라 주장한다. 이미 이 기본 주장 자체가 와다의 입장
변화를 여실히 드러내준다.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의 결여라는 흠이 있을지언정
전후 일본은 일관되게 평화주의를 고수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와다는 동아시아의 역사 주체 상호 간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유토피아를 모색하는 데에서,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를 지렛대로 삼아 동아시아 및 전 세계 차원의 평화와 공존을
모색하는 데로 초점을 이동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다.
‘평화국가’를 종결시킨다, ‘평화국가’를 전환시킨다, 진행 중인 커다란 기도에 맞서기 위
해서는 새삼스레 전후일본의 평화주의, 천황과 국민과 지식인이 만들어낸 ‘평화국가’론의
진정한 모습을 확인하는 일이 필요하다. 게다가 새로이 시작된 신아시아 전쟁 속에서 ‘평
화국가’로 살아남기 위한 길을 모색한 노력을 알아야만 한다. 그 위에서 오늘날의 세계와
동아시아, 동북아시아의 위기적 상황 속에서 ‘평화국가’로서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일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평화국가’는 지금도
건설 중에 있다. ‘평화국가’는 건설되어야만 한다.30)
우선 확인해야 할 것은 이 주장이 현재 일본의 정세에 대한 발언이라는 사실이다. 주지하다시피 아베 정권은 ‘전후 레짐으로부터의 탈피’를 슬로건으로 내걸어 집권한 세력이고,
일련의 안보 및 정보통제 법안의 성립을 통해 노골적으로 국가주의 노선을 강화시키고 있다. 이런 흐름 위에서 최종 목표인 개헌을 성사시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와다가 말하는 진행 중인 평화국가의 종결과 전환 기도란 아베 정권의 개헌 드라이브를 지칭하는 것이며,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그가 전략적으로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전후 일본의
‘자주적 평화국가’인 셈이다. 그는 평화국가가 현행 헌법 9조의 비무장 및 전쟁금지 조항으로 시작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려 노력함과 동시에, 평화국가를 지키기 위해 전후 일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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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和田春樹,  平和国家 の誕生: 戦後日本の原点と変容, 岩波書店, 2015, 226쪽.
평화, 천황 그리고 한반도: 와다 하루키와 전후 일본 평화주의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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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30년 전쟁’에서 어떻게 헌법과 제도와 사상을 변용시켜가며 버텨왔는지를 그려낸다. 전후 일본은 급변하는 동아시아 및 국제 정세 속에서 주체적으로 평화국가를 지키려
노력해온 것이지, 미점령군으로부터 강요된 헌법 아래 무장해제 당해 굴욕을 경험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후 평화국가는 어떻게 일본 ‘스스로의’ 결단으로 평가되는 것일까? 바로 패전 직후 천황으로부터 평화국가의 이념이 비롯되었음을 확인함에 의해서이다. 이는 이른바 ‘강요받은 헌법론(押し付け憲法論)’에 대한 강력한 이의제기임에 틀림없다. 현재 일본의 개헌파가 9조뿐만 아니라 천황제를 포함하여 광범위한 영역에서 국가주의적 규범의 확립을 기획하고 있다. 특히 천황제와 관련해서 개헌파는 상징천황제를 폐기하고 일본 전통을 육화하는 존재로서 천황을 옹립하려 한다. 그런 개헌파에게 폐기의 대상인 평화국가가
천황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뼈아픈 주장임에 틀림없기에 그렇다. 그리고 와다는 천황뿐만
아니라 국민과 지식인들이 모두 한 목소리로 평화국가를 주창한 것이 전후 평화국가의 세
가지 기본 요소31)라 지적하면서 평화국가 구상을 옹호한다. 이는 강력한 호헌 주장이다.
현행 헌법에서 천황이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규정되어 있음을 상기한다면, 천황과 국민과
사상(지식인)이 모두 평화국가를 주창했다는 주장은 결국 전후 일본 국가의 통합이념이
평화국가라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와다는 현재 일본의 정세에 맞선다. 그리고 그런 정세가 비롯된 9․11 이후의
국제적인 정치국면(글로벌한 수준과 동아시아 수준의 체제 변화)에 대응하고자 한다. 이는 1990년대 중반 이후의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이나 새로운 유토피아와는 전혀 다른 담론이라 할 수 있다. 그 담론에서는 전후 일본의 이중구속을 지역 내 주체들과의 대화와 교류와 화해로 풀려 했다면, 이제 초점은 평화국가 일본의 발자취와 존속에 맞춰진다. 이는 서경식이 지적한대로 스스로의 지적영위의 출발점을 철저하게 배신하는 방향전환으로 평가될 수 있다.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을 경유하지 않은 평화국가란 다케우치와 이시모타를 염두에 둔다면 있을 수 없는 구상이자 이념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이를 자기배반으로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면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전략적으로 천황 중심의 국민통합을 내세워야 할 정도로 일본의 정세가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정권 차원이 아니라 이른바 ‘풀뿌리 우익(草の根右翼)’
은 1970년대부터 꾸준히 영향력을 키워 이제는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민간운동집단으로
떠올랐고32) 시민들의 대대적인 저항에도 아랑곳없이 정권은 자위대의 작전 전개를 가능31) 위의 책,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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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菅野完, 日本会議の研究, 扶桑社, 201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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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 하는 안보 법제와 시민들의 언론/사상/학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법률을 차례로
성립시키고 있기 때문이다.33)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와다의 평화국가 담론은 절박함에서
비롯된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스스로의 지적영위의 출발점을 배신하면서까지 평화국가라는 일국적 관점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천황제 옹호나 식민지배/침략전쟁 경시라기보다는 현재 정세를 어떻게든 돌파하려는 시도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물어야 될 것은 와다의 평화국가 담론이 과연 현재의 정세를 돌파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는지의 여부이다. 만약 그런 가능성이 있다면 평화국가 담론은 위에서 언급한 전후 일본의 이중구속을 돌파하는 새로운 시좌가 될 수도 있다. 개헌과 국가주의 드라이브가 폭풍처럼 불고 있는 현재 일본의 상황에 유효한 비판의 거점을 마련할 수 있다면,
평화국가 담론은 다시 한 번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성찰과 결합하여 동아시아의 평화체제와 공생질서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쉽게도 와다의 평화국가 담론은 치명적인 사상사적이고 역사적인 공백을 내장한 것이다. 와다에 따르면 평화국가 담론은 패전을 겪은 일본국민의 ‘자연스런’ 감각과 그것을 통합하는 천황의 말씀에서 비롯되어 지식인들의 사상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러나 전후의 천황은 일본 국민의 자연스러운
감각을 통합하는 상징이라기보다는 미국이 주조한 전후 질서의 일본판 광고판에 불과했고, 지식인들의 평화주의 사상은 식민주의가 내장한 20세기 보편주의의 변주에 지나지 않았기에 그렇다. 그런 한에서 와다의 평화국가 담론은 역사적이고 사상사적인 성찰을 결여한 ‘일본적 자연주의’34)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우선 천황제가 미국이 만들어낸 전후 계획의 광고판임을 간략하게 짚어보자.
와다는 전후의 천황제 성립을 아무런 역사적 음미 없이 절대적인 전제로 삼아 논의를 시작한다. 그는 패전 직후 천황과 주변인물들이 연합국의 항복권고를 무겁게 받아들였고, 천황의 항복선언(이른바 옥음방송인 ‘종전의 칙어’)에 대한 국내외의 반응에 신경을 섰음에
주목했다. 그리하여 “앞으로 평화를 목표로 하는 천황의 결의를 보다 명확하게 표명”35)하려 의도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이런 맥락에서 패전 직후인 9월 4일 개원한 제국의회 연설에서 ‘평화국가’를 새로운 천황의 의지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제국일본이 지금까지 ‘전쟁33) 이른바 11가지 안보 관련 법률은 2015년 여름에 성립됐고, 언론/사상/학문 등 제반 자유권을 침해
할 소지가 있는 공모죄(共謀罪) 법안은 2017년 6월 국회를 통과했다.
34) 마루야마 마사오가 적출한 근대 일본의 병리적 심성으로, ‘일본’이라는 규범과 질서의 총체가 사람
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자연적으로 존재하여 불변함을 믿는 지적 태도를 말한다. 와
다는 일본이 일본일 수 있는 것이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통해서라는 지적영위의 출발점을 저버리
고, 일본은 원래 일본이라는 지독한 자연주의에 빠진 것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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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 平和国家 の誕生: 戦後日本の原点と変容, 35쪽.
평화, 천황 그리고 한반도: 와다 하루키와 전후 일본 평화주의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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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였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일본은 군국주의자에 잘못 이끌려 세계정복의 길로 들어선
탓에 무책임한 군국주의를 실천하여 전쟁을 수행했다”는 “부정의 인식”의 산물이라고 와다는 주장한다.36)
이런 전제에서 출발하는 와다는 패전 직후의 평화국가 구상을 천황과 주변 인물들의 자발적이고 자주적인 이념으로 자리 매김한다. 그러나 아무리 자발적인 것이었다 하더라도
이를 아무런 유보 없이 전제하는 와다의 태도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군국주의자가
잘못 이끈 전쟁과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가련한 천황과 국민이라는 서사는 이미 1942년
시점에서 미국에 의해 고안된 심리전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1942년 6월 미국의 전시 정보기관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CIA의 전신)에서는 이른바 ‘일본계획’이 입안되었다. 이 기밀문서에는 적국 일본을 상대로 한 심리전의 기본 전략이 입안되어 있었고, 전쟁 후 일본을 어떻게 개조할 것인지에 대한 기본계획까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천황을 평화의 상징으로 삼아 전후 일본을 비무장 국가로 만든다는 계획이 최초로 명기된 것은 이 기밀문서였다.37)
물론 지금까지 발견된 미국 기밀문서 중에 상징천황제와 가장 가까운 구상이 발견된 것이기는 하지만, 천황을 평화의 상징으로 삼아 일본국민이 원래 평화로운 민족이고 군부로
인해 비참한 전쟁에 동원되었다는 서사는 미국이 이미 심리전의 기본전략으로 삼은 것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를 감안할 때 천황과 주변 인물들이 자발적으로 평화국가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어떤 구상을 가졌더라도 미점령군의 승인 없이는 전후 일본의 기본 노선으로 채택될 수 없었기에 그렇다. 따라서 평화국가 구상을 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의 천황에 귀속시키는 와다의 관점은 너무나도 안이한 것이다. 비무장
평화국가를 천황의 자발성으로 귀속시키더라도, 전후의 평화를 사랑하는 천황이란 존재
규정 자체가 미국산이라면 평화국가 구상은 결국 미국에 의한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터이기에 그렇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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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위의 책, 36쪽.
37) 加藤一郎, 象徴天皇制の起源: アメリカ心理戦 日本計画 , 平凡社, 2005, 24~46쪽. 존 다워(John
Dower)가 지적한 ‘천황제 민주주의’는 미점령군이 천황을 내세워 민주개혁을 이끌었다는 주장이었
는데(존 다워, 최은석 옮김, 패배를 껴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일본과 일본인, 민음사, 2009
참조), 맥아더가 그런 개혁을 추진한 것은 본문에서 언급한 OSS의 일본계획을 참조한 결과이다.
38) 이미 1960년대부터 헌법뿐만이 아니라 평화국가라는 이념 자체가 미국으로부터 강요된 ‘남의 것’이
라는 비판은 열거하기 힘들만큼 제기된 바 있다. 와다가 그런 비판의 계보를 알면서도 전략적으로
천황과 평화국가를 호헌의 역사-이념적 기초로 삼은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대표적인 논저로는,
江藤淳, 1946年の憲法ーその拘束(1980), 文春学芸ライブラリー, 2015 참조. ‘강요된 헌법과 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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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와다의 평화국가 담론이 등장하기 10년도 이전에 이 사실은 밝혀졌고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그가 상징천황제가 미국의 고안물임을 몰랐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그것을 알면서도 ‘전략적으로’ 천황으로 평화국가의 창안을 귀속시킨 것인데 이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를 내포한다. 다시 한 번 1942년 미국의 ‘일본계획’으로 돌아가면, 이 기밀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심리전 원칙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인들에게 현재 그들의 군사적 지도자들이 메이지 천황이 길을 개척한 방향에서 멀리 일탈하여 현재의 천황이 의도와 정반대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지적하라. 메이지 천황의 자만심이나 확장주의가 아니라, 그의 준입헌주의(quasi-constitutionalism), 그의 친영(pro England) 감정에 기초한 여러 정책들이 강조되어야 한다.”39) 이는 패전 후 일본의 주류 보수파가 설파한 서사와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은 원래 친미/친영이었는데 1930년대 이후 군부 파시스트가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는 서사 말이다. 일례로 패전 후 일본 정치를 이끈 요시다 시게루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만주사변부터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일본의 대영미 관계의 어긋남은 큰 흐름에서 보자
면 일본 본연의 모습이 아니라 한순간의 변조였음을 알 수 있다. (…) 일본의 외교적 진
로는 영미에 대한 친선을 중심으로 하는 메이지 이래의 큰길에 따라야 하며, 이런 과거의
귀중한 경험은 일본 국민으로서는 특히 명심해야 하는 일이다. (…) 일본 외교의 근본기
초를 대민 친선에 두어야 한다는 대원칙은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이며 바꾸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단순히 종전 후의 일시적 상태의 타성이 아니라 메이지 이래 일본 외교의
큰 흐름을 지키는 일이다.40)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요시다와 ‘일본계획’의 관점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일치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와다가 아무리 평화국가의 이념이 국민, 천황, 지식인 사이의
공감으로 비롯되었다고 강변하더라도, 이미 평화국가는 미국과 일본 보수파의 서사 속에서
메이지 이래 일본의 ‘정상적’ 경로로 자리 잡으려 하고 있었다. 물론 와다는 그런 주류적
서사로부터 평화국가의 이념을 구출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러나 평화국가의 이념을 국민과 천황이 함께 체험한 패전 경험에서 도출하려는 와다의 시도는 자가당착에 빠진다. 쇼와 천황이 평화국가를 내세운 것은 패전 경험 때문이라기보다는 패전을 초래한 비정상적인
주의/평화주의’를 주장하는 이 대표적 논저가 2015년도에 재출간된 것은 현재 일본의 헌법개정을
둘러싼 논의지형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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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加藤一郎, 앞의 책, 41쪽.
40) 吉田茂, 日本外交の歩んできた道 (1957), 北岡伸一編, 戦後日本外交論集, 中央公論社, 1995,
106~108쪽.
평화, 천황 그리고 한반도: 와다 하루키와 전후 일본 평화주의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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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가 메이지 이래 근대 일본의 국시를 어겼다는 서사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와다의 시도는 결국 메이지 이후 근대 일본이 평화를 사랑하고 미영이 주도하는 보편적 세계질서를 옹호했다는 서사로 귀결된다. 침략전쟁은 결국이 질서를 어지럽힌 일탈
행위였고 말이다. 이 지점에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과 비판은 피식민지(인)와
피침략 지역(인민)으로 향하기보다는 인류의 정의라는 보편주의적 규범을 향하게 된다. 즉
피해자에게 폭력을 가했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인류의 질서를 어지럽힌 것이 책임을 져야
할 과오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런 보편주의에 대한 맹목적 추종은 와다가 평화국가의 이념이 정점에 달한 사상으로 난바라 시게루(南原繁)의 언설을 평가하는 대목에서 식민주의와의 착종이라는 사상적 문제를 드러낸다.
와다는 전후 평화국가의 이념에 내재한 치명적 약점으로 전쟁 책임 문제를 지적한다. 천황의 전쟁 책임 문제를 회피하면서 평화국가 이념이 출발했다는 것이다. 이런 약점을 의식적으로 지적하면서 이념을 설파한 이가 와다에 따르면 난바라이다. 난바라 시게루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교수로서 패전 직전에 천황의 주변인물과 몇몇 지식인과 더불어 ‘종전공작(終戦工作)’을 기도했던 인물이다. 패전 후에는 신생 도쿄대학의 총장으로 전후의 교육개혁을 주도했다. 그런 난바라가 평화국가 이념에서 “돋보이는(際立った)” 까닭은 천황의
전쟁책임을 명시적으로 거론했기 때문이다.
천황의 ‘聖斷(성단)’으로 전쟁을 끝낸다고 생각한 사람은 많았지만 구상의 체계성과 일
관성 면에서 난바라의 구상은 돋보이며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평가된다. 난바라의
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점은 천황의 전쟁책임을 논하면서 전후에 퇴위할 것을 ‘성단’에 의
한 종전과 결합시킨 점이다. 난바라는 천황이 패전 시에 ‘평화국가’를 제안하리라고는 예
상하지 못했겠지만, 평화국가를 고려한다면 천황 퇴의의 도의적 필요성은 난바라에게 더
욱 절실한 문제였을 것이다. 전쟁은 천황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고 그 천황이 ‘전쟁국가’
에서 ‘평화국가’로의 전환을 주도한다면 스스로의 전쟁책임을 질 수밖에 없으며, 그렇지
않다면 ‘평화국가’의 정신적이 권위와 힘은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41)
와다의 해석은 논리적 일관성이 돋보인다. 전쟁수행의 최종 결정자 천황이 평화국가를
주장한다면 퇴위해야 마땅함은 자명한 사실이기에 그렇다. 실제로 난바라는 패전 후 기회
있을 때마다 천황의 퇴위를 암시하는 연설을 했고, 그 때마다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는 ‘도의’에 기초해야 함을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기에 난바라는 평화의 이념과 더불어
전쟁책임 문제까지를 아우르는 평화국가 담론의 정점에 자리한 사상가로 평가된다.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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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平和国家 の誕生: 戦後日本の原点と変容, 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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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난바라의 패전 직후 언설을 살펴보는 것은 와다가 말하는 평화국가 이념의 정점이 어떤 것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그의 논의를 잠시 들여다봄으로써 와다가 의지해 마지않는 전후의 평화국가 담론이 식민주의를 뿌리 깊게 내장한 것임이 드러날
것이다. 다음 인용문을 보자.
일본국가권위 최고의 표현,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천황제는 (…) 군민일체의
일본 민족공동체 자체의 불변의 본질입니다. 외지이종족(外地異種族)
̇ ̇ ̇ ̇ ̇ ̇ ̇ ̇ ̇ ̇ ̇ 이 ̇ 떨어져나가 순수
일본으로 되돌아온 지금, 이것을 상실한다면 일본민족의 역사적 개성과 정신 독립은 소멸
할 것입니다(강조는 인용자).42)
여기서 난바라는 전후 일본을 ‘순수 일본’으로 표현한다. 그 순수성은 ‘외지이종족’ 즉
조선과 타이완을 비롯한 제국일본의 피식민지민의 추방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 순수성을 지탱하는 것이 바로 천황이다. 순수 일본의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의 천황, 이 천황이 본질이 되어 역사적 개성과 정신의 독립을 지켜나가는 일, 이것이 난바라의 전후 일본이었다. 그의 평화국가 구상은 이런 전제 위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물론 난바라를 인종주의로 무장한 난폭한 식민주의자로 규탄할 수는 없을 것이다. 43) 위에서 말한 외지이종족과 순수일본이라는 규정도 식민주의의 혐의가 짙은 개념들이지만 확신범적인 인종주의의
발로는 아니다. 오히려 두 개념은 난바라가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몰두했던 피히테 철학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난바라는 피히테 연구를 통해 ‘개인인류’라는 칸트적 프레임을 ‘개인-국민-인류’로 재정식화한다. 이는 단순히 개인과 인류 사이에 국민이라는 매개를 삽입한 것이 아니다. 난바라의 피히테 해석은 보다 적극적인 것으로 국민 없이 개인과 인류도 없다는 테제를 제시하기 때문이다.44) 난바라는 이런 피히테
해석에 힘입어 다음과 같이 전후 일본 민주주의를 정식화한다.
국민공동체는 (…) ‘주권재국민’의 사상과 원래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
다. (…) 그것은 우리 역사에서 군주주권과 민주주권의 대립을 넘어선 이른바 ‘군민동치
(君民同治)’라는 일본 민족공체의 본질이다. 다른 한 편에서 민주주의는 원리적으로 개인
과 다수에 통치의 기초를 두지만, 국민공동체는 국가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한 새로운 세계
관적 기초를 제공할 수 있다. 이는 마치 18~19세기의 이른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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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南原繁, 祖国を興すもの (1946), 南原繁著作集 7, 岩波書店, 58쪽.
43) 그는 투철한 칸트주의자 우치무라 간조(内村監三)의 제자로서 무교회주의 계열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수많은 제자들과 학자들로부터 인격자로 칭송받던 인물이다.
44) 南原繁, 南原繁著作集 2: フィヒテの政治哲学, 岩波書店, 386~409쪽 참조.
평화, 천황 그리고 한반도: 와다 하루키와 전후 일본 평화주의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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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민주주의’로의 발전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국민통합을 근원에
서 지탱해온 것이 황실이라는 사실은 새로운 민주주의에 고유의 의의를 부여한다고 본다.
(…) 이 새로운 국민공동체의 사상은 (…) 인간 천황을 중핵으로 하여 국민 통합을 사람
과 사람의 상호 신뢰와 존경의 관계 속에서 찾는, 그런 새로운 윤리적 문화적 공동체를
의미해야만 한다.45)
여기서 난바라는 새로이 재건될 일본국가는 개개인이 기초가 되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천황과 국민의 통합체로 성립해온 국민공동체를 민주주의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일본 국민의 역사적 고유성을 발현할 때만이 전후
일본이 국가로서 거듭날 수 있음을 역설한 것이다. 이런 난바라의 주장은 전쟁 시기를 지배했던 파시즘적 ‘일본주의’와 차이가 없는 듯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국민공동체는 개인과 인류를 분화시키는 원천 역할을 하는 역사적 실체이다. 그는 개인이 인류로 곧장 보편화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국민들 중 하나에 속하는 한에서 인류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인류란 개인의 집합체라기보다는 국민들의 집합체인 셈이다. 따라서 외지이종족이 떨어져나간 순수일본이란 전후 일본이 인류라는 보편적 규범에 따라 재생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공동체이다. 조선과 타이완은 저마다의 땅에서 저마다의 역사적
고유성에 따라 국민을 구성하여 인류로 통합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난바라의 국민을 경유한 인류 보편이념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난바라가 이런 사상을 설파하면서 전후 일본의 국민통합과 인류 보편규범을 평화국가의 이념으로 내세웠을 때 조선과 타이완은 어떤 상태에 있었을까? 그것이 1945년에서 1950년대 초반임을 생각할 때 조선과 타이완에서 국민 구성과는 거리가 먼 상태가
자리잡고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두 구식민지 지역 모두 식민지배로 인한 역사적 분열(친일파)과 냉전 구도 하의 이데올로기적 분열(빨갱이)로 신음하고 있었다. 1950년에
이르면 한반도에서는 내전이 발발했고, 타이완은 국민당 독재 체제의 폭력이 인민들의 삶을 유린했다. 즉 두 지역 모두 국민 구성을 빌미로 한 분열과 폭력에 삶을 내맡긴 채였던
셈이다. 그런 한에서 한반도와 타이완에서 국민은 없었고 따라서 인류도 없었다. 왜냐하면 난바라가 말하는 국민은 그런 분열과 폭력이 없는 ‘매끈한(immune)’ 통일체여야 했기 때문이다.
[전후 일본의 재출발을 위해] 필요한 것은 각 정당 간의 세계관적 분열과 대립을 넘어
서는 일이다. 새로운 헌법 아래 모든 국민이 가져야 할 국민적 세계관 혹은 정치관을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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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南原繁, 貴族院本会議での質疑 (1946), 南原繁著作集 9, 岩波書店, 25~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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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 고양시켜야 한다. 그것은 근대 민주주의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반
국민의 정치교육은 새롭게 중요한 역할을 떠맡아야 할 것이다.46)
분열과 대립을 넘어 국민적 통합으로 나아가자는 난바라의 호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미 국민통합에 바탕을
둔 정치교육은 ‘외지이종족’에 대한 인위적 배제를 통해 가능했었기에 그렇다. 또한 그렇게 배제된 외지이종족들은 국민이 될 수 없었기에 인류도 될 수 없었던 존재들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이 됨으로써 인류가 될 수 있는 한에서, 한반도와 타이완에서(또한 오키나와에서) 국민통합, 민주주의, 인류의 보편규범인 평화를 위한 터전은 없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이미 식민주의적 배제를 통해 스스로를 성립시킨 국민공동체 일본은 이후 한반도, 타이완, 오키나와 그리고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수많은 지역의 인민들을 국민으로의, 따라서 인류로의 ‘도상’에 있는 민족들로 간주하게 된다. 일본은 이미 국민이 되어
인류에 속해 있는 반면, 저 지역들에서는 여전히 갈등과 분열과 폭력이 난무하는 비국민/
비인류의 무법지대가 펼쳐져 있다는 시선이 잠재적으로 내장되는 순간이 여기에 있다. 이것이 식민주의와 보편주의의 착종으로 이뤄진 전후 일본 평화국가의 근원적 한계이다. 이제 와다의 언설이 어떻게 이런 근원적 한계를 공유하며 그 함의가 무엇인지를 음미하면서
논의를 마무리해보자.

4. 제자리걸음의 역사를 움직이기

와다의 지적 영위에서 출발을 수놓았던 원리를 다시 확인해보자. 그것은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 없이 전후 일본이 온전한 국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난바라를 정점으로 하는 평화국가 논의는 이미 와다의 출발점과 섞일 수 없었다. 그것은 식민주의와 보편주의의 착종을 통해 1945년 이전과는 또 다른 식민주의적 시선을 내장한 채
출발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미국과 영국 등이 주도하는 서방 국민들이 속한 인류 클럽에
속한 ‘민주주의의 선진국’이고,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민족해방으로 신음하는 국가들은 인류에 속할 수 없는 분열된 ‘과소 국민’이 거주하는 ‘민주주의의 도상국’이라는 식민주의를
말이다. 그래서 서두에 인용한 와다의 말은 자기 배반이 아닐 수 없다. 즉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의 결여라는 흠은 있지만 공습경험에서 비롯된 전쟁 반대의 사상은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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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南原繁, 貴族院本会議での質疑 (1946), 南原繁著作集 9, 岩波書店,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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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럽게’ 일본인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 말이다. 다시 한 번 확인하지만 반성의 결여와 평화주의가 분리되는 순간 전후의 새로운 식민주의는 고개를 든다. 와다가 아무리 전략적으로 평화국가를 개헌논의에 맞서 세운다 해도, 그 안에 근원적으로 내장된 이 새로운 식민주의를 청산할 수는 없다. 저들은 선진국들이 구가하는 민주주의를 아직 달성하지 못하여
여전히 갈등과 분열 속에 있고 화해와 용서를 모른 채 정치적 의도만을 내세운다는 서사는 이런 맥락에서 가능해진다. 위안부 문제의 전개 과정에서 와다와 긴밀하게 연대했던 한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한국의 민족주의적 운동의] 지원자들은 정치가나 관료의 대부분이 ‘전후민주주의’ 교
육을 받았고 천황제를 부정하지는 않아도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필요한 만큼은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반성의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경시했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이 20년 동안의 강경한 주장과 한국에 대한 지원이 결과적으로 위
안부 문제 해결에 나섰던 관료들과 ‘선량’한 일본인들까지 자포자기적 무관심과 혐한으로
몰았다는 점이다
위안부 문제 해결운동의 일본 비난은 ‘한국’으로서의 비난이라기보다는 과거에 ‘제국’
에 저항했고 여전히 일본 제국과 미국 제국에 저항하고 있는 ‘좌파’로서의 비난이기도 했
다. 그러나 문제는 ‘위안부 문제’가 ‘국가’ 간 문제이니만큼 우파든 좌파든 ‘함께’ 내놓는
해결안이 필요했다는 점이다.47)
여기에는 일본 전후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신뢰가 표명되어 있다. 아시아여성기금을 기꺼이 지원하고 위안부 문제의 도의적 책임을 주장했던 ‘일본인’들은 전후 민주주의에 입각한 ‘교육’을 받은 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선량’한 이들의 마음을 ‘강경한 주장’으로 내친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이 무관심과 혐한으로 사태를 이끌었다. 그것은 ‘한국’과 ‘일본’이라는 ‘국가’ 사이의 화해가 아니라 ‘좌파’로서의 비난 탓이었다. 즉 국가 간의 문제를
국민으로서 풀어나가기보다는 좌파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접근한 탓에 문제를 망쳐버렸다는 비판인 셈이다. 여기서의 논리에 따르면 국가 사이의 문제는 결코 ‘정치’로 해결될
수 없다. 다시 말해 국가 사이에는 제국에 대한 저항이라는 ‘과거’의 정치문제가 개입할 수
없다. 위에서의 논의를 참조하자면, 국가 사이, 즉 국민 사이에는 제국과 피식민자라는 구도의 자리는 없고 스스로의 과거를 반성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보편적 인류의 규범만이 통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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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이상의 인용은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뿌리와 이파리, 2013, 199, 203, 3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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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1945년 이후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와 평화국가 이념에 내장된 식민주의는 한반도에서 발현되고 있다. 식민주의의 문제를 피식민자의 빙의로 문제화한 이는 프란츠 파농이었다. 빙의한 피식민자는 검은 피부를 망각하고 하얀 가면이 자기 고유의 얼굴인줄 철썩
같이 믿는다. 그리하여 검은 피부들의 거칠고 뒤쳐진 삶을 비난하기에 이른다. 검은 피부는
불가능할지라도 하얀 가면으로 탈색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아마도 저 한반도의 빙의한 피식민자와 와다 하루키가 오랜 동안 연대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들이 인종주의적 식민주의를 휘두른 적은 없다. 그러나 평화라는 미명의 보편주의로 검은 피부들에게 보낸 측은한 시선은 더욱 음산한 식민주의를 산종(散種)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자.
패전 후 60년 이상, 미국과 한국은 징병제를 유지했고 타국에 군대를 보내기도 했지만,
일본은 그런 적이 없다. 물론 그건 일본이 이른바 ‘평화헌법’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지금은
헌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도 있지만, 한국이나 북한은 오래전부터 늘 일본의 ‘군국주의화’
를 사실화하고 비난해왔다. 그러나 군국주의를 비난한다면 북한부터 비판받아야 할 일이
아닐까. 그러나 위안부 문제에 적극적인 한국의 진보가 북한의 군사주의를 큰 목소리로
비난하는 일은 없다.48)
와다와 빙의한 피식민자가 보기에 일본의 평화주의는 이런 북한의 도발을 꾹 참고 견뎌왔다. 여전히 인류 클럽의 일원인 ‘국민’이 되지 못한 채 자가당착적 민족해방을 휘두르는
인류의 적 북한 말이다. 그러나 북한의 군사주의를 물리적으로 제압하겠다는 발상만큼이나 인류평화의 이름으로 멸시하는 것도 군사주의만큼 폭력적이다. 그것은 타자를 향한 수평적 시선이 아니라 수직적 판결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와다의 출발점으로 돌아가보자. 그것은 식민주의와 침략전쟁 비판을 통한 일본의 재생으로 요약될 수 있다. 다케우치와 이시모타에서 비롯된 이 출발점은 분명히 수평적 지평에서 타자와 만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어느 새 와다는 수평적 지평에서 수직전 판결의 법정으로 이행한 듯하다. 물론
오랜 동안 한일관계만이 아니라 동북아의 평화롭고 민주적인 공생질서를 위해 힘써온 노(老) 대가의 내면을 쉽게 재단할 수는 없다. 다만 와다의 평화주의 담론은 한 가지 사실을 지시하는 듯하다. 1945년 이후 와다의 출발점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즉
그 숱한 우여곡절에도 식민주의와 침략전쟁에서 전후 개혁을 시작하자던 와다의 발은 출발점에 묶인 채로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빙의한 피식민자의 방언(放言)은
70년 동안이나 출발을 가로막아온 망령된 식민주의자의 목소리이다. 과연 이 망령의 목소리를 헤치고 전후 일본 및 동아시아 재건은 출발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와다의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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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위의 책, 300쪽.
평화, 천황 그리고 한반도: 와다 하루키와 전후 일본 평화주의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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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주의 담론은 제자리걸음의 역사를 움직이라는 반어적 실천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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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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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의 와다 하루키 비판론

 김항 교수의 와다 하루키 비판논문, “평화, 천황 그리고 한반도”라는 글을 읽는데 동의하기가 어렵다. 정치사상사를 전공하는 김항의 와다 하루키 비평은 한 학자가 다른 학자에 대해 이렇게까지 심하게 말해도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은 차치하더라도 정치사상가로서의 김항의 능력에 의문이 들게 만들 정도이다. 

요컨대 그의 해석 능력에 의문이 들고 글 전체에서 박유하와 와다 하루키를 비판하고자 하는 강한 편향이 느껴진다. 김항의 와다 하루키 비판은 아래의 와다 하루키의 글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시작한다.

“군대가 다른 나라로 나가 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 자기 나라가 공습을 받아 초토화되었다. 그럼에도 요격하는 항공기도 없고 고사포의 응사도 없었다. 군대가 우리를 지켜준다는 감각을 결국에 갖지못했던 전시의 본토 일본인으로서는 군대 부정은 매우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그것은 누군가 타인으로부터 강요된 것도 아니고 패전의 과정에서 스스로 납득하여 획득한 입장이다. 확실히 여기에는 일본국가가 조선인을 ‘황국신민’화시키고, 만주국을 건국하고, 중국본토에 대한 침략을 확대하고, ‘ 대동아공영권’ 건립을 위해 동남아시아를 침공했다는 사실에 대한 책임 의식, 가해 의식은 없다. 그런 한계를 포함하면서도 이 자연스러운 군대부정의 감정이 전후 일본인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김항은 “여기서 되풀이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나 감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의 질문은 ‘한국인으로서’ 충분히 던질만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와다는 군대나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가 공습을 겪은 ‘일본인’으로서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라 하는데,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면 “조선, 중국, 동남아에 대한 지배와 침략에 대한 반성”은 그 속에서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평화주의 내에 일본제국의 지배와 침략에 대한 반성이 ‘자연스럽게’ 내장해 있지 않다면, 일본의 민주주의와 평화주의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 없이도 성립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김항은 이러한 와다의 인식을 “자기배반”이라고까지 한다. 그의 비판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이미 여기서부터 김항의 와다 비판은 의문을 자아낸다. 과연 “자연스럽다”는 말이 김항이 말하는 그런 의미를 지닌 것인가? 와다가 말하는 ‘자연스럽다’의 수식대상은 민주주의와 평화주의의 형성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민주주의와 평화주의의 형성이라 한다면 김항의 비판은 의문의 여지 없이 타당한 것이지만 김항의 인용문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의 수식대상은 “군대부정”이다. “군대가 우리를 지켜준다는 감각을 결국에 갖지 못했던 전시의 본토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군대의 효용성에 회의를 느끼고 군대를 부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이것은 일본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일반의 합리성을 지닌 모든 인간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김항이 인용을 잘못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김항이 직접 인용한 저 문단 속에서의 자연스럽다는 말의 의미는 군대 부정의 감정을 수식하는 것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이 자연스럽다는 말에서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와 평화주의를 와다가 정당화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그는 “지배나 침략에 대한 반성”을 망각한 “자기배반”을 범하고 있다는 김항의 주장은 과도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논리적인 비약에서 시작한 글은 와다의 사상에서의 어떠한 “단절”이 존재한다는 또다른 비약으로 연결된다.

 김항은 와다 하루키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비판 및 극복에서부터 그의 사상적 여정을 시작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와다의 한반도 문제에 대한 관심과 실천적 개입은 단순히 한국을 돕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유산을 청산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일본의 자기 개혁을 위한 실천이란 관점이었던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와다의 지적 여정은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를 통해 식민주의 문제에 대한 보다 역사적인 문제제기로 이어진다. 김항의 분석에 따르면 와다는 북조선의 변화를 위해 한국전쟁과 북조선 연구를 행했으며 여기서 일본의 역할이란 “20세기의 역사를 정리하여 남겨진 전후-식민지 후 문제의 처리를 이번 세기 안에 마무리”해야 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일본국가 및 일본국민의 의무”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일본인의 의무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한 편에서 군대와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와 다른 한 편에서 지역 내에서 벌어지는 참극에 무감한 고립주의가 동시에 자리 잡”은 이중구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다시 말해 일본 자신의 개혁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와다 하루키의 ‘동북아 공동의 집’이라는 “유토피아” 또한 이런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다. 김항에 따르면 이 새로운 유토피아는 “자신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지역 내 이웃들의 고통에 눈감아야 했던 것이 전후 일본의 조건이었다면, 냉전의 종식으로 이제 평화는 미국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역 내 주체들과 주체적으로 협력하여 미래지향적으로 구축해나가는 과제가 되었기 때문”에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런 맥락 속에서 김항은 와다가 위안부 문제에 실천적으로 개입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내 추측이지만 김항은 위안부 문제에 개입하는 와다의 실천 속에서 그의 사상의 “단절”의 계기를 포착하는 것 같다. “말하자면 이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비판과 극복보다는, 미래를 향한 지역 내 주체들의 대화가 과제가 되는 역사 단계로 이행했다는 인식이었던 셈”이라고 김항은 말하고 있는데 마치 와다가 이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비판과 극복”을 방기했다는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러한 방기를 전제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에 있어 난항을 겪자 와다는 점차 사상적 초점을 동아시아에서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로 옮겨갔다고 김항은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와다는 동아시아의 역사 주체 상호 간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유토피아를 모색하는 데에서,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를 지렛대로 삼아 동아시아 및 전 세계 차원의 평화와 공존을 모색하는 데로 초점을 이동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하는 문장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김항은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에 대한 와다의 이러한 입장이 식민주의와의 사상적 유착이라 주장하고 있다.
 김항에 따르면 <‘평화국가’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와다는 “전후 일본은 급변하는 동아시아 및 국제 정세 속에서 주체적으로 평화국가를 지키려 노력해온 것이지, 미점령군으로부터 강요된 헌법 아래 무장해제 당해 굴욕을 경험해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며, “패전 직후의 평화국가 구상을 천황과 주변 인물들의 자발적이고 자주적인 이념”이라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김항에 따르면 이러한 와다의 인식은 “순진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왜나하면 “군국주의자가 잘못 이끈 전쟁과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가련한 천황과 국민이라는 서사는 이미 1942년 시점에서 미국에 의해 고안된 심리전 전략”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를 감안할 때 천황과 주변 인물들이 자발적으로 평화국가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어떤 구상을 가졌더라도 미점령군의 승인 없이는 전후 일본의 기본 노선으로 채택”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와다의 이러한 주장은 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주의”가 내장되어 있는 서사이며 “미국과 일본 보수파의 서사”이기도 하다. 여기서 와다는 미국과 일본 보수파와 사상적으로 ‘내통’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김항은 더 나아가 “침략전쟁은 결국이 질서를 어지럽힌 일탈 행위”였다는 이 서사를 와다가 받아들인 “이 지점에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과 비판은 피식민지(인)와 피침략 지역(인민)으로 향하기보다는 인류의 정의라는 보편주의적 규범을 향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즉 “피해자에게 폭력을 가했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인류의 질서를 어지럽힌 것이 책임을 져야 할 과오로 인식되는 것”이다. 김항은 와다의 이러한 평화주의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식민주의가 착종된 난바라 시게라의 평화주의 평가에서 오류를 낳는 원인이 된다고 보고 있다.

 그에 따르면 난바라 시게루는 비록 천황의 전쟁책임에 대해 언급했지만, 아니 그의 천황 전쟁책임론은 대만인, 조선인 등과 같은 피식민지민의 추방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보다 “순수한” 일본 공동체의 완성을 위해서 제기된 것이었다. 난바라는 피히테의 관점을 받아들여 개인 - 국민 - 인류라는 세계사적 관점을 제시하는데, 여기서 국민은 단순히 개인과 인류를 매개하는 중간적 존재가 아니라 국민이 존재함으로써만 비로소 개인과 인류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천황은 이 국민 공동체의 형성을, 그것도 순수한 형태로의 분열과 대립이 없는 김항의 표현에 따르자면 ‘매끈한’ 공동체의 창출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다. 이런 난바라의 입장에서 이데올로기적 대립과 친일파와 같은 역사적 대립이 존재하고 있는 조선과 대만은 국민을 형성하지 못한 곳이고, 그렇기에 그들은 인류에 포함되지 않는다. 일본은 천황을 매개로 국민을 창출하여 인류 보편에 기여하는 문명국가이지만 조선과 대만은 일본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배제되어 자신들만의 국민을 창출했어야 했는데 하지 못한, 그런 비문명 지역이 되는 것이다.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이 난바라 사상의 중심축이라는 것이 김항의 분석이고, 그런 난바라의 주장에 동의하며 높게 평가하고 있는 와다의 사상도 난바라와 마찬가지로 식민주의에 오염되어 있다는 것이 김항의 핵심 주장이다.

 다소 난폭한 논리전개와 단견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또 논지 자체는 진부하기까지하다. 기존의 다른 논자들과 다를 바 없이 일본국의 평화헌법은 외부로부터 이식된 것이며 일본인의 주체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또한 일본인들의 그 평화 인식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몰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실제로 그런 면이 없지 않으나 한국인인 김항이 일본인에게 “일본인의 주체성”을 무시하라는 역사인식을 강요한다는 일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평화헌법이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은 사실이나 그것을 어찌됐든 지킨 것은 일본인들 스스로의 결단이고 당연하게도 일본인들의 그 결단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에 대한 역사적 해명을 이뤄져야만 한다. 일본인은 일본 역사의 전개에 있어 일본인 자신의 주체성을 세울 필요성과 의무가 있는 것이다. 김항은 이런 지점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다. 
 다시 본논의로 돌아가자면 김항의 논지는 결국 와다의 사상이 위안부 문제를 계기로, 그 이전부터 사상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단절을 경험한다는 데 그 핵심이 있다. 우선 한 가지 사실부터 지적하자. 김항 자신도 와다 하루키가 모를 리가 없다고 말했던 것이지만 와다 하루키는 이미 전후의 상징적 천황제가 미국의 정책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미국의 정책으로 쇼오와 천황의 전쟁책임은 추궁하지 않고 책임을 오로지 군부에게만 지운다는 방침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많은 일본인에게는 일억총참회에서 출발하여 군부에게만 전책임을 지우는 것이 홀가분했다. 국민들은 전쟁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느끼고 자신들도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맡아야 한다는 의식에서 너무 먼 상태”였다고 <역사로서의 사회주의>에서 말하고 있는 와다가 설마 김항의 지적처럼 “순진하기 짝이 없”게 “군국주의자가 잘못 이끈 전쟁과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가련한 천황과 국민이라는 서사는 이미 1942년 시점에서 미국에 의해 고안된 심리전 전략”이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그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와다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어째서 일본인의 ‘주체성’을 강조한 것일까. 이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로서의 사회주의>에서 나타난 와다의 현대사 인식 전체를 살펴보아야 한다.

 와다 하루키는 <역사로서의 사회주의>에서 1914년 이후의 세계사를 두 단계로 나누어 인식한다. 하나는 ‘세계전쟁시대’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전쟁시대’의 해체의 결과로 나타난 ‘세계경제시대’이다. 와다 하루키는 러시아혁명에서 기원한 현실사회주의 체제는 세계전쟁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나타난 전시체제라고 주장한다. 이 전시체제와 그에 대항하는 미국의 제국주의가 아시아에서 충돌한 역사가 바로 동아시아 30년 전쟁이라 불리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이다. 베트남전쟁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미국은 세계전쟁시대에서 탈피하기 시작하지만 소련은 시대의 변화를 모르고 소련판 베트남전쟁이라 할 수 있는 아프간 전쟁에 뛰어들어 체제의 동력을 소진한다. 결국 이 전쟁에서 패배한 소련은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체제를 변혁하고자 하지만 이미 끝나버린 세계전쟁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탄생한 전시체제가 변혁을 견딜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소련은 해체되고 미국도 세계전쟁시대의 후유증으로 점차 패권이 약해지기에 이른다. 와다는 이런 세계전쟁시대가 종말된 시대를 경제력에 기반한 세계경제시대라고 파악한다. 보다 효율적인 경제를 운영하며 비군사주의적 체제를 운영해온 독일과 일본이 이 시대의 주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와다는 독일과 달리 일본이 철저한 자기반성과 그에 기반한 정치철학에 따라 세계사에 있어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본다. 일본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의 ‘후방기지’로 편입되어 미국의 보호 속에서 모든 역량을 경제에 쏟아부어 세계적인 경제를 이루었을 뿐 스스로 어떠한 정치적 철학과 비전을 지니고 그러한 것이 아니다. 당연하게도 지역에서의 일본의 지위 또한 갖추지 못했다. 와다의 말을 옮기자면 “일본은 제2의 전후에 이루어야 할 것을 방치한 채로 있다가 제3의 전후에 마주친 것이다. 제3의 전후에 걸맞은 새로운 정신으로 제2의 전후에서부터 가지고 넘어온 문제를 해결해야만 새로운 시대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전쟁책임과 피식민책임을 회피한 일본국은 세계경제시대의 모순인, 세계에서의 불균등 발전에 대항할 사상적•정치적 기반을 갖추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세계경제시대의 모순으로 환경, 각국의 경제적 격차 등의 문제를 해소하지 못하고 인류사 자체의 존망이 위태롭게 된다.

 이 새로운 시대를 위해서는 바로 “우선 첫째로,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인식을 국민적으로 확립하고 그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표시하려는 노력, 전후 보상의 노력을 시작”해야만 한다. 둘째는 영토 문제의 해결이고 셋째는 “헌법과 자위대의 관계에 대해 합의를 만들어낼 필요”이다. 셋째가 중요한데 와다에 따르면 “이 헌법말고는 일본국가의 바탕이 될 만한 것이 주어져 있지 않”다. “이 헌법은 역시 15년 전쟁을 통해서 일본국민이 획득한 것”이며 “그 헌법과 자위대의 관계를 조정”함으로써 “세계전쟁시대가 끝나고 앞으로는 군축이 기본적인 과제”가 된 이 시대에 적응해야 한다. 그는 “미국군대에 더하여 러시아•중국•한국•북조선의 군대와 교류를 추진하여 상호신뢰를 구축하는 가운데 본격적 군축”을 행해야 “진정한 의미의 세계전쟁시대의 밖으로 나갈 수 있”고 “일본은 새로운 시대의 과제와 맞서나갈 수 있”다고 인식한다. 이런 와다의 인식 속에서 북조선이 차지하는 위치가 명확해진다. 와다는 일본과 북조선의 화해, 그리고 한반도에서의 평화 체제의 성립이야말로 세계대전쟁 시대의 완전한 탈피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조건이 된다. 그렇기에 와다는 동북아 공동의 집 구상에서 세계사의 주체로 한민족을 설정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실현의 주체로서의 한민족의 역할이 와다의 사상에서 중요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민족에 의한 세계전쟁시대의 완전한 마감과 세계전쟁시대에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세계경제시대의 마감이야말로 새로운 유토피아, 동북아 공동의 집을 건설하여 세계사의 모순인 환경, 경제적 격차 등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게 한다.
 이 책이 1992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한국어판은 1994년)은 와다의 사상적 연속성을 부정하는 김항의 주장에 대한 비판의 근거가 된다. 김항은 1995년 위안부 문제에 개입하고 좌절하면서 그의 사상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하지만, <역사로서의 사회주의>를 분석해보면 이와는 전혀 다른 관점이 나온다. 실상 김항이 1995년 이후의 사상적 변화라고 할 계기들은 1992년의 <역사로서의 사회주의>에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와다의 사상적 연속성을 담보한다. 다시 말해 와다 하루키는 ‘세계대전쟁시대 - 세계경제시대 - 동북아 공동의 집’이라는 세 단계의 현대사를 구상하고 있었고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평화헌법 문제는 이미 그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와다가 평화헌법을 수호하고자 하는 것은 보편주의와 식민주의가 착종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세계사의 2기인 세계경제시대조차 거스르고 1기인 세계대전쟁시대로 회귀하는 조치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수주의로의 회귀”라 인식하는 김항의 주장은 와다 사상의 연속성을 경시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와다는 일본의 개헌이 군축이라는 기본적인 시대적 대세를 거스르고 있다고 인식하기에 평화국가를 강조하는 것이지 자신의 사상을 배신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문제를 세계전쟁시대의 관점에서 인식하고 비판했으며 그것의 잔재를 처리하여 새로운 유토피아로 나아가려 했다. 그에게 있어 위안부 문제와 북조선 문제는 역시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처리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김항은 이런 연속성을 경시했다.

 덧붙이자면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도 김항은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를 지렛대로 삼아 동아시아 및 전 세계 차원의 평화와 공존을 모색하는 데로 초점을 이동”시켰다고 비판하는데 이 문제는 보다 복잡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지난 정부 시절 한일 위안부 합의의 결과로 치유화해재단이 탄생했는데 김항과 서경식 등의 한일 지식인들은 이 위안부 합의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 김항은 이 글에서 박유하에 대해 비판하며 보편적 인류 규범이 식민주의와 연결된다고 주장한다. 만약 김항의 주장이 옳다면 한일 위안부 합의를 그토록 비판했던 그 피해자 분들이 치유화해 재단의 지원금을 받았다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피해자 분들이 비난받아야 하는 것인가? 일본의 사과와 그에 따른 배상을 받아들인 피해자들은 잘못된 것일까? 그걸 재단할 권리는 대체 누가 갖고 있는가? 화해치유재단의 보고에 따르면 2017년 7월 현재 생존피해자 47명 중 보상금과 사과를 수용한 36명 중 34명에게는 배상금 1억이 지급되었으며 사망피해자 유족들 199명 중 보상금과 사과를 수용한 65명 중 48명에게는 2천만원이 지급되었다. 물론 돈을 받았다고 해서 일본 정부의 사과를 100% 수용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 분들 중에는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금을 수용한 분들도 계시며 그 분들의 의사 또한 중시되어야 한다. 합의에 대한 부정은 피해자의 의사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김항과 같은 지식인들이 그 문제에 대해 얼마나 생각을 해봤을지 의문이 든다. 혹여나 오해할 여지가 있을까 덧붙이자면 재단이 할머니 분들에게 배상금을 받도록 강요했다는 일부의 주장은 동의할 수가 없다. 우선 재단이 할머니 분들의 계좌를 알 수가 없다. 먼저 알려주고 신청해주셔야 비로소 그 계좌를 통해 입금하는 것이지 일부의 주장처럼 현금을 강제로 줄 수가 없다. 본인의 주체성이 전제되지 않은 보상금 지급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 아시아기금 때도 배상금을 받니마니 하는 문제로 피해자 분들 간에 다툼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보다 조심스러워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지식인으로서의 섬세함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항의 논문은 학술적 논문의 성격을 많이 잃었으며 김항 자신의 학자로서의 능력에도 의문을 품게 한다. 어떤 이의 말을 곡해하자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증거로서 김항의 논문은 사료적 가치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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