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07

Ki Young Kim - ['박유하에 대한 윤미향의 피끓는 절규' 와 '동지적 관계' 에 대해> '동지적 관계' 란...

(8) Ki Young Kim - <'박유하에 대한 윤미향의 피끓는 절규' 와 '동지적 관계' 에 대해> '동지적 관계' 란...

Ki Young Kim
29 May at 11:50 ·



<'박유하에 대한 윤미향의 피끓는 절규' 와 '동지적 관계' 에 대해>

'동지적 관계' 란 표현을 지금은 삭제판 '제국의 위안부' 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OOO OO 으로 처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부는 강압에 의한 성노예인데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였다니 천인공노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과연 그럴까. 이 표현에 대해 분노하거나 비판적인 이들을 두고 비판할 생각은 없다. 왜 내가 이 표현 자체가 문제가 전혀 없으며 심지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지를 얘기하고싶을 뿐이다.

'동지적 관계' 란 표현은 위안부 문제의 복잡성을 이루는 단면 중 일본군 전체에 속한 위안부의 (전체와 부분으로서) 관계에 대한 분석적 표현으로서의 의미가 있고 두번째로 그런 관계의 틀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감정(윤미향이 절규하는 내용은 이 부분에 대한 것)에 대한 서술의 배경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첫번째 의미에서 군과 위안부의 관계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되며
두번째 의미에서는 예술적이라고까지 느낀다.
'성노예' 라는 표현보다 난 이 표현에서 더욱 비극적인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제도화된 노예제도를 떠올릴 때 비참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노예 개인에 대한 감정 이입의 결과다.
노예 개인에 대한 감정 이입없이는 우리는 노예 제도에 대해 분노하지 않을 것이며 불합리함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란 측면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감성적 접근(실제로는 위안부의 당시 감정에 대한 분석적 접근) 자체는 문제 해결을 방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공감을 얻는 효과로 긍정적인 면이 많다. 다만,
위안부들이 느꼈던 감정을 나에게 이입함에 있어 위안부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윤미향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를 바탕으로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런 위안부 개인의 복잡한 감정에 대한 (위안부의 증언을 중심으로 풀어낸) 서술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감정 이입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최소한 나는 그랬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 해결에 방해가 된다는 주장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윤미향도 서술한 것처럼(내 생각에는 이런 위안부의 일본군에 대한 감정은 일부만 그렇지는 않았으리라 본다)전쟁 중 전방에 배치된 위안부 개인이 일본군에 대한 연민이나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다고 보기도 힘들다. 그리고 그런 감정에 대한 서술이 일본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감정은 스톡홀름 증후군과는 전혀 다르다.
위안소에 들어가는 일본군 개인은 일정 시간동안 위안부의 성에 대한 지배력을 갖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위안부에 대한 어떠한 지배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본인 자체가 언제 어디서 갑자기 죽을지도 모르는 전쟁을 치루는 불안한 개인으로 돌아갈 뿐이다. 그래서 '동지적 관계' 란 전쟁이란 소용돌이에 휘말려 소비되고 소외되는 개인으로서의 동질감을 공유한다는 의미 또한 있다.
위안부 문제는 거시적으로도 복잡하지만 이렇게 위안부 개인의 기억과 그 기억에 대한 감정 또한 요약 정리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래서 '제국의 위안부' 에서는 직접적인 증언들과 함께 위안부를 다룬 많은 책들을 인용하여 위안부의 일본군에 대한 기억에 대해 다룬다.
그래서 '동지적 관계' 란 표현에 대한 비판 또한 두가지(체계적 관계의 왜곡, 개인적 관계 혹은 감정 서술에 대한 불편감)로 나뉘어져 있으며 그 이유는 이 표현이 그 두가지를 모두 설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스템으로서의 '동지적 관계' 에 대해 말하는 것이 시스템의 '성노예적 성격' 을 부정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제국의 위안부' 에서 시스템의 전반적인 '강제성'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은 이 책의 내용이 편향되지 않고 균형을 잡고 있다는 방증이다.
'성노예' 란 표현의 핵심은 강제성과 소유권에 있다. 위안부 '성노예' 의 소유주(온전한 소유는 아니고 성에 대한 소유라고 본다) 는 군이 아닌 업자에게 있었다는 것은 꽤 알려진 일반적인 견해다. 군은 위안소의 운영과 관리를 하지만 위안부 개인에 대한 지배력은 업자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군 '성노예' 란 표현은 위안부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필요하고 대표될 수 있을지라도 그 구체적인 내용을 모두 담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시스템을 온전히 이해하는데 부가적인 설명도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현대에도, 또 그 당시에도 있었던 매춘 업소의 시스템을 군 내에 배치한 것이라는 사실을 포함한다. 매춘 업소의 형태를 갖추었다는 사실을 얘기함으로서 "그렇다면 위안부가 '매춘부' 라는 것이냐" 는비판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나는 묻고 싶다.
"매춘 업소의 모든 여성을 우리는 '매춘부' 라고 부르고 있는가?"
현재에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자유를 제한하는 억압적인 어떤 것이 개입되는 경우 우리는 이들을 '성폭력 피해자' 라고 규정한다. 그것이 매춘 업소에서 일어났다고 해도 성적 착취에 의한 피해자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이다.
일본군과 위안부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있으며 위안소의 설치, 운영과 위안부의 모집에 군이 관여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군만 관여한 것이 아니라 정부와 경찰, 각 지역 관리까지 사실상 일본 전체가 관여한 것이고, 전반적인 강제성 여부를 이미 일본은 인정한 바가 있고 이에 대해 여러 차례 사과한 바가 있다.
따라서 위안소의 그 형식이 매춘의 형태였다는 사실과 업자의 존재에 대해 얘기하고 그들(업자)의 책임을 묻는 것이 일본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니고 '성노예적' 측면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제국의 위안부' 의 반은 위안부에 대한 얘기고 반은 지원 단체 비판이다.
박유하 교수의 이런 비판을 이제서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에서 (지적 담론에 철퇴를 가하는 폭력적 성격의) 소송 문제 또한 그 구체적인 내용들이 무엇인지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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