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6

박인식 [서평] 화해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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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식 [서평] 화해를 위해서

1. 책을 읽기까지

지난 연말 <제국의 위안부-식민지 지배와 투쟁의 기억>을 읽었다. 언론에서 접한 비평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고, 수년간 소송에 끌려오면서도 왜 저자인 박유하 교수가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총선을 앞두고 위안부 할머니 한 분이 ‘정의연’ 운영방식을 공개비판하면서 위안부 문제가 새삼 화제로 떠올라 그렇게 접어두었던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저자가 소송을 겪으면서 펴낸 <제국의 위안부-지식인을 말한다>와 <제국의 위안부-1460일의 기록>을 읽고, 저자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소송 자료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모든 저서의 출발점이 된 <화해를 위해서>를 마지막으로 읽었다. 역주행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화해를 위해서> ‘읽기의 초점’을 명확하게 만들었다.

일련의 저서를 읽어오면서 저자가 피소 이후 오랜 시간동안 비난을 감수해가면서까지 목소리를 거두지 않는 이유를 나름 짐작했는데, 마지막으로 읽은 <화해를 위해서> 맨 뒤쪽에 실려 있는 ‘초판 서문’에서 그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대로 된 비판은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비판 대부분은 그런 이해가 빠져있다. 일본이 주변국의 비판에도 변하지 않고 있다면, 혹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 이유는 이제까지 비판한 방식과 내용에 문제가 있었던 까닭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저자 나름의 화해 방식을 제안한다. 그러면서도 저자의 방식이 “어디까지나 본격적인 논의를 위한 시발점일 뿐 최종적 대안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화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화해는 청산에서 시작될 것이지만 ‘과거의 완전한 청산’이란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다”고 스스로 밝힌다.
현안과 관련한 내용인데다가 일련의 저서와 자료를 읽는데 들인 시간이 아깝기도 해서 ‘서평’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하기는 했는데, <화해를 위해서> 말미에 실린 제대로 된 ‘서평’을 보니 이게 얼마나 어쭙잖은 일인지 알게 되었다. 그래도 시작했으니 이 글로 책읽기를 마무리 짓는다.

2. ‘합법’의 함정

<제국의 위안부>와 관련한 논쟁에서 첨예하게 대두된 것이 위안부 동원이 ‘합법적’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당시 법이 그러하니 범법이 아니라고 서술한다. 일본에 책임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상황을 가능하게 만든 제국주의의 책임을 지적하고, 그래서 일본이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일부 법학자는 당시 법이 존재한 것은 부인하지 않지만 법의 효력은 인정할 수 없고, 그래서 더 상위의 법을 만들어 죄를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와는 방법이 다를 뿐,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바는 다르지 않아 보인다.

저자의 이런 주장은 드러난 모양만으로는 일본 우파의 주장과 맞닿아 있어 오해의 여지가 있다. 저자는 법을 지배하는 ‘제국주의의 구조적 책임’을 묻지만, 일본 우파는 그렇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고 한다. <화해를 위해서>와 일련의 저서를 바르게 읽자면 먼저 저자의 주장과 일본 우파의 주장은 이와 같이 지향하는 바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일본 우파는 이와 같이 ‘당시의 법’을 들어 위안부 동원의 합법성을 주장할 뿐 아니라 자신들을 전범으로 규정한 ‘평화에 대한 죄’는 ‘그때까지의 국제법’ 역사에 없었다는 이유로 합법성을 부정한다. 반면에 일본 헌법이 ‘강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며 반발한다. 법이라고 다 합법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동시에 엄청나게 많은 민간인을 살상한 원폭투하가 당시 ‘(일본 헌법을 강요한) 미국이 중심이 되어 만든 전쟁 규범’을 어긴 ‘불법’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저지른다. 필요한 대로 법이라는 잣대를 휘둘러 대는 것이니, 결국 그들에게 법은 그저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합법성’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화해의 초석을 놓아가는 일이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3. 역사교과서

일본의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에서 만든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면서 불거진 역사교과서 파동에 대해서는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대동소이하게 서술되어 있고, 유독 ‘새역모’ 교과서가 그 중 편향 정도가 심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저자는 일본 교과서가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 삼아 한민족의 긍지와 자각을 박탈한 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 교육을 했다, 토지제도 근대화 명목으로 토지를 수탈해 많은 농민이 소작인이 되거나 만주로 쫓겨 갔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이 일본의 침략에서 비롯되었다”고 ‘명백히’ 기술하고 있다고 밝힌다. 심지어 유관순 사진과 함께 “일본군에게 지독한 고문을 당해 생명을 빼앗겼다”는 기술도 있다고 하면서 일본 교과서가 이 정도 자기비판은 담고 있는 것이 보통이라고 말한다.

이런 움직임과는 달리 ‘새역모’는 패전 이전의 역사를, 특히 과거의 전쟁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자학사관’이 일본에 팽배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패전 후 일본을 7년 동안 점령 지배한 미국과 그들에게 동조한 마르크스주의자, 교과서, 언론이 그런 사관을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것이 ‘새역모’ 교과서인 것이고.

이에 대해 저자는 ‘새역모’ 교과서가 양국의 ‘깊은 이해와 신뢰’보다는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어 일본의 공식 입장에 반하는 교과서인데, 이를 정부 이름으로 허용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한다. 이 지적은 검인정 교과서라고 해서 “교과서에 언급된 역사 해석을 판단할 수 있는가” 하는 관점은 제쳐두고라도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에 반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선뜻 동의되지 않는다. 저자는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새역모’ 교과서 방향과 반대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게 ‘표면적인’ 공식 입장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실한’ 공식 입장으로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새역모’가 “일본이 전쟁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현재의 헌법이 굴욕적이라며 불만을 품고 있지만, 설령 헌법을 개정한다 해도 지금처럼 일본의 젊은이들이 민족이니 애국이니에 관심이 없는 상태로는 그들을 전쟁에 동원하기란 어렵기 때문에 교과서를 통해 애국심을 주입하려는 것”이며, 그 일환으로 “교과서가 가져야 할 기본자세를 규정하는 ‘교육기본법’의 개정 운동에까지 나서고 있다”고 서술한다.

이것은 역사 해석의 문제를 넘어선 범죄 행위이다. [??] 결국 화해를 이루어야 할 상대가 이런 존재들이라는 말이니, <화해를 위해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얼마나 험난한 것인지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한일역사공동연구회’의 제1차 연구결과가 “정부의 공식 견해를 대변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로도 다시 한 번 입증된다.

4. 위안부

저자는 <화해를 위해서>에서, 그리고 이어진 일련의 <제국의 위안부> 저서에서 일관되게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친다.

“여성이 성을 파는 것은 자유의사에 의한 ‘자발적’인 일 같아 보여도,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여성이 국가와 남성에게 봉사하게 되어 있는 가부장제 구조 속의 일이다. 위안소가 ‘인정된’ 장소였고 ‘합법적’이었다는 그들의 주장은 그 ‘법’이 국가와 군이 만든, 남성을 위한 ‘법’이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그 ‘합법성’은 문제가 없기 때문에 합법적인 것이 아니라 남성 중심의 국가가 그들 자신을 위해 만든 규율이었기 때문에 합법적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다른 일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자원’한 처녀들이었건, ‘매춘’을 하게 될 것을 알고 간 여성들이었건, 당시의 일본이 군대를 위한 조직을 발상했다는 점에서는 그 구조적인 강제성은 결코 희석되지 않는다.”

이것이 저자 주장의 핵심이고, 그에 대해 이의가 없다. 그러나 저자가 이와 같이 주장의 진의를 수없이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국에서조차 오독과 악용의 대상이 되어 피소되기에 이르렀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이 저자의 주장을 자신들의 강제성을 희석할 목적으로 악용할 수 있다”고 염려하는 것이 지나친 것인가? 오해는 마시라. 그만큼 험난한 길이라는 말이다.
저자는 일본 정부가 ‘도의적 책임’을 인정한 것이 비록 일부 인사에 한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양국 화해를 위한 진실한 것이며, 그것은 양심적 지식인의 자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가한다.

 그러니 이를 수용한 후 이를 발판으로 화해를 이루어나갈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도의적 책임’을 인정한 무라야마 수상이 담화 발표와 관련한 기자회견에서 조선 병합조약’이 “도의적으로 부당했다”고 하면서도 법적 부당성은 인정하지 않아 일본 정부의 입장을 고수했다.
물론 저자가 판단한 대로 무라야마 수상이 인정한 ‘도의적 책임’이 진실한 것일 수 있다. 다만 내각 수반으로서 정부의 공식 입장을 번복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실한 것인데 ‘법적 책임’을 인정할 수 없다는 반발에 밀려 ‘도의적 책임’이라는 표현을 썼건,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아서 ‘도의적 책임’이라고 썼건 그것이 상황을 바꾸지 못한다는 점에서 결과는 다르지 않다. 저자가 ‘도의적 책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그것이 상황을 바꿀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니 하는 말이다. <화해를 위해서>나 <제국의 위안부>에서 양심적 지식인이 ‘법적 책임’을 인정했다는 서술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양심적 지식인이 생각하는 ‘도의적 책임’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극한 조건 속에서 <화해를 위하여> 노력한다는 것은 참으로 지치고 고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저자의 노력이 더욱 돋보인다. 저자의 진심을 이해하고, 동의하고, 지지를 보낸다. 비록 지난한 일이겠지만 저자의 노력으로 작은 진전이라도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한다.

5. 야스쿠니신사 참배

일본 수상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태평양전쟁 A급 전범 14명을 1978년 비밀리에 합사한 이후에 문제가 되었다. 비밀리에 합사했다는 것은 그것이 드러낼 수 없는 일이었다는 반증이고, 그 이후 일본 천황이 더 이상 참배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저자가 서술한 대로 참배 강행을 지지하는 일본 우파 인사들이 A급 전범들이 처형된 것을 ‘적의 손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도쿄재판’은 이긴 자들에 의한 불공정 재판일 뿐이고, 이런 생각을 공유하는 이들이 참배 지지파가 된 것이다. 물론 참배를 강행하는 수상들은 ‘전쟁 가해자이기 이전에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기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저자도 “고이즈미 수상이 이들을 ‘조국의 미래를 믿고 전장에서 산화한, 뜻하지 않게 목숨을 잃은, 가족을 떠나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정을 끊으면서까지 조국을 위해 산화한’ 이들로 ‘이해’하고 있다”고 서술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A급 전범을 비밀리에 합사하고 그 때문에 천황조차 참배를 거부하는데, 주변국들이 이는 전쟁을 정당화하는 일이라고 비난하는데, 어떻게 “이 전쟁에서 세계 많은 사람에게 커다란 참화를 안겼고, 특히 아시아의 이웃나라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참혹한 위해와 고통을 강요해서 깊은 반성과 함께 애도의 염(念)을 표하고 싶다”는 수상이 ‘전범을 비밀리에 합사’한 야스쿠니신사 공적 참배를 강행할 수 있는 것일까. 피해국에서 이를 ‘의도적 외면’이요 자국을 욕보이는 행위로 판단하는 것이 무리한 일일까?
야스쿠니신사 참배 논란의 본질은 전범이 추앙의 대상이 된다는 데 있다. 이는 전쟁을 정당화하는 일이고, 결과적으로 전쟁 책임에 대한 일본정부의 모든 사죄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다. 저자는 “전범이 함께 묻혀있다는 것 때문에 국립묘지야스쿠니 신사가 완전히 같을 수는 없지만, 이 보다는 국가를 위해 몸 바치는 일을 찬양하는 구조 자체에 문제의 본질이 있다”고 본다. 이는 해석의 문제일 것이니 저자의 의도를 놓고 시비를 가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국민 대다수가 전범의 존재가 문제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주장은 본질을 비껴가는 것이며, 따라서 의미가 있을지 회의적이다.
물론 전범의 존재가 이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국가가 인간을 도구화했고, 도구가 된 이들이 ‘전쟁’이라는 국가 범죄의 피해자라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다.
저자는 야스쿠니신사에서 전범을 분사[분리]하는 일은 국립묘지에서 친일인사를 파묘시키자는 발상과 다르지 않으며, 그런 주장이 일어난다면 과연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겠는지 묻는다. (이미 일어났다.) 그러나 ‘전범 분사’와 ‘친일인사 파묘’가 결코 같은 맥락으로 다루어질 일이 아니다. ‘전범 분사’는 전쟁 책임에 대한 국제적 추궁이니 피해국의 합의가 필요한 일인 반면에 ‘친일인사 파묘’는 우리 내부의 문제이니 내부적으로 합의할 일이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참배의 문제가 아니다. 전범을 합사한 채 참배를 고집한다면 나는 그것이 전쟁을 정당화하는 또 다른 범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6. 독도

저자는 독도에 대한 한일 양국의 이해를 근대 이전, 근대 초기, 해방 이후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이 중 일본의 시각을 좀 더 길게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는 일본 쪽의 의견이 자세히 알려지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독도를 ‘우리 땅’으로 주장하기 위해서 그들의 주장을 제대로 들어볼 필요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나는 독도에 대해 아는 것이 독도 분쟁으로 야기된 감정에 이르지 못한다. 뭔가 주장하려면 먼저 사실을 충실히 알아야 하겠어서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글도 읽고 인용한 문서를 확인하기도 했다. 고작 그런 지식으로 저자의 견해를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저자의 서술이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 상당히 달라 섣불리 접근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기회가 되면 이 주제만 따로 생각해보고 싶다.
저자는 “독도 영유권 문제에 온 힘을 바쳐 연구해온 분들에게는 이 책에서 시도된 요약이 너무 거친 것일 수 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거기에 비하면 내 이해는 거친 것에 조차 미치지 못하니 먼저 내 거친 이해부터 보완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 한다.

7. 화해를 위해서

저자는 한일 양국이 화해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로 역사교과서, 위안부, 야스쿠니신사, 그리고 독도를 꼽는다. 그리고 그 모든 문제는 ‘역사 기억 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판단한다.

“(근대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은) 경계를 확정하여 영토 구분에 나섰으며, 확정된 영토를 지키거나 확장하기 위해 군대를 만들었고, 군인을 위해 여성을 제공했다. 그리고 확정되거나 새로 획득한 영토에 대해서는 교과서를 통해 국민에게 시각적으로 각인시킴으로써 그 영토 내부의 일원임을 자각시켰다. 독도 문제는 그런 영토 구분의 움직임이 빚은 문제이며, 야스쿠니와 위안부 문제는 그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동원된 군인과 여성에 관한 문제다. 교과서 문제란 그 영토와 군대와 여성에 대해 국가가 어떤 식으로 공식적으로 ‘기록’할 것인가를 둘러싼 문제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 모두는 공동체 내부의 구성원이 공동체의 과거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결국 잘못된 ‘역사 기억 방식’을 바꾸지 않고서는 화해는 요원하다는 것이니, 내 관점만 고집할 게 아니라 상대 관점에서,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보고 싶지 않고 회피하고 싶은 모습까지, “함께 기억하라”는 것이다.
회피하고 싶은, 치부부끄러운 부분일 수밖에 없는 기억을 떠올리고 내 문제를 인정하는 일은 결코 쉬울 수 없다. 내 치부를 인정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상대 입지를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해를 이루고 그것을 진전으로 이어가자면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대가가 아닐 수 없다. 대가 없이 진전을 이루겠다는 욕심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고 범죄를 낳을 뿐이다.
저자는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이 보여준 사과와 배상이 그들로서는 최선의 것이었다고 서술한다. 우파의 반대와 국민감정을 거스르면서까지 ‘법적’으로 문제없는 일을 오로지 <화해를 위해서> 감수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진정성을 가진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과 연대하여 화해를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양심적 지식인들, 또한 그들과 궤를 같이하는 인사들이 진정성을 가졌느냐, 그 진정성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역량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텍스트를 읽어가는 동안 양심적 지식인들과 정치권 일부가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는 했다. 그러나 진정성의 수준과 실천 역량에 대한 의심은 없애지 못했다. 그들이 우파가 쳐놓은 ‘도의적 책임’이라는 수사(rhetoric)에 깔려있는 ‘완강한 공동방어선’을 극복하는 게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안부 뿐 아니라 다른 문제도 <화해를 위해서> “그들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출발하자”는 저자의 주장을 따를 경우 (그것이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될지라도) 그 과정에서 일본의 책임이 현저히 탈색되지 않을까, 결국 근본적인 해결이 요원해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조차 이런 한계를 거듭 확인하게 되면 결국 화해의 몸짓을 보이는 것으로 책임을 다한 것처럼 ‘자기합리화’하는 선에서 주저앉게 되지는 않을지 걱정스럽기도 하고.
저자는 이 책에서, 또한 이 책이 출발점이 된 일련의 <제국의 위안부> 저서에서, 그리고 소송 과정에서 일관되게 한일 양국의 <화해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서술하고 있다. 텍스트를 읽고, 비판을 살피고, 소송 과정을 따라가노라니 이런저런 이유로 화해는 요원해 아득히 멀다보인다. 논의며 노력이 의미 없다는 말이 아니다. 역사란 불가능을 극복한 기록이지 않은가. 그러니 노력하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그 노력이 결실 맺을 수도 있지 않겠나. 그렇기는 해도, 내가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8. 읽기를 마치며

하다 보니 저자의 책을 역주행해서 읽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저자의 주장을 파악한 후에 주장의 근원을 살핀 셈이 되어서 오히려 저자의 의도를 깊이 있게 읽을 수 있었다. 또한 저자가 제기한 관점에 대한 생각을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었다. 그래 봐야 채 두 달도 안 되는 시간에 뭘 제대로 생각했고 뭘 정리할 수 있었겠나. 그렇기는 해도 한일 양국의 <화해를 위해서> 시민으로 무엇에 관심을 두어야 할지, 어떤 노력을 지지하고 어떤 시도에 반대해야 하는지 감은 잡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에 쏟은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언급된 주제에 대해 앞으로 차근차근 살펴보아야겠다.
<제국의 위안부> 파일을 보내주시고, 일련의 저서와 소송 자료까지 살필 기회를 만들어주신 저자의 세심한 배려에 감사드린다. 그 덕분에 일단 ‘한 번 읽기’는 마칠 수 있었다. 앞으로 ‘깊이 읽기’를 하자면 질문 거리가 만만치 않을 텐데, 저자께서 그 또한 정성껏 답변해 주실 것으로 기대하고 미리 감사를 전한다.
아울러 이런 기회가 만들어진 데는 페이스북 주 사장의 기여가 빠지지 않을 것이니 그 또한 감사. 페북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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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Park Yuha
잘 읽었습니다. 긍정적인 평가에 다시 감사드려요. 특히 제가 생각하는 화해인용, 다시 사용해야겠어요.^^
법과 도의 문제, 다시 잘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아무튼 15년 전 생각이니까요.
다만 미리 말씀드릴 수 있는 걸 우선 말씀드리자면

 “국가”의 행위를 진정성 운운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표면에 드러난 것,그게 전부이고(뒤에서 어떤 일과 생각이있었건) 그걸 기준으로 평가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긍정적인 측면이든 그 반대든.

본문에도 쓴 거 같은데 호소카와 수상이 방한해서 사죄를 말했을 때 조선일보 김대중씨가 그건 마음에서 우러난 게 아니라는 취지의 말을 했죠. 물론 논문같은데서 그 배경과 한계를 분석하는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야말로 지극히 ‘정치적’인 대응이었다고 생각합니다(식민지 트라우마가 만든 것이라고 해도) .

그리고 저는 그런 식으로 모든걸 정치로 몰아가는 사람들을 혐오합니다. 그 영향력과 파괴력이 얼마나 큰지 알기 때문이죠. 사실 제가 당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구요. 생리적으로 폭력이나 싸움이 싫고 , 동시대와 차세대의 ‘만들어진 ‘갈등 없는 우애를 바라는 것이어도(물론 역사엔 무관심하고 문화만 좋아한다는 이들에 대한 시각도 일단 긍정이지만 그 한계를 늘 말해 왔죠)

어떻게든 ‘정치적’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사람들이 많죠. 결국은 자신들의 시각으로 세상을 판단하니까요. 뿐만 아니라 그런 시각을 다시 ‘인권’ 운운으로 포장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제기하신 시각을 처음 드러낸 서경식선생 같은 경우, 그리고 리틀 서경식이라 할 수 있는 정영환의 경우 개별인으로서의 ‘인간’을 소중히 여긴다는 생각이 거의 들지 않았습니다. 개인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이 민족을 정말 소중히 여긴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공동체로서의 체제유지가 중요한 거겠죠.
엉뚱하게 다른 사람 이야기를 했지만 선생님 의도가 그들과 다른 곳에 있다하더라도
사실 이 모든 논란의 근저에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바로 그 “법적책임”에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고발까지 당한 사람이기도 해서 의견을 말씀 드렸습니다 .

 · Reply · 10 h ·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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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저 번보다 이 책에 대한 서평에서는 책에 대한 비판적인 부분이 많은 것 같군요. 다시 말하자면 저자보다는 서평자가 일본인들을 못 믿겠다는 식의 판단이 더 보입니다.
예를 들자면
1] 교과서 문제에 관하여 "이것은 역사 해석의 문제를 넘어선 범죄 행위이다"라는, 저로서는 내리지 않을 (못할) 판단이 있고.
2] 또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의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
3] 또, "전범을 합사한 채 참배를 고집한다면 나는 그것이 전쟁을 정당화하는 또 다른 범죄에 지나지 않는다",
4] "일본의 책임이 현저히 탈색되지 않을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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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개인으로서는 기본적으로 한국인이라고 일본인보다 더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한국에도 여러 그룹들이 있어, 다 다르고, 서로가 상대방이 틀렸다고 하는 것처럼, 일본에도 역시 비슷한 상황이라서, 일본에 몽땅 하나로 도덕적인 판단하기는 힘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일본에서 먹혀들어갈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니 화해는 더 힘들어지고, 그 이유가 꼭 일본에 있다기 보다, 적어도 반, 또는 그 이상이 실제로는 도덕적이지 않은 편이 상대에게 높은 도덕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결론적으로는 저는 박유하 교수님의 시각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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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의견에 대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1) 교과서에 대한 언급 중 ‘역사적 해석이 아닌 범죄’라고 판단한 부분은 ('새역모'의 역사교과서가 아니라) 글 바로 앞 문단에 있습니다.
저자는 ‘새역모’가 “젊은이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교과서를 통하여 애국심을 주입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역사 해석을 넘어선 범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 교과서가 그런 시도를 한다면 그것도 범죄이긴 마찬가지겠습니다.
2) 의구심의 대상은 일본 양심적 지식인의 ‘진정성’이 아니라 ‘진정성의 수준과 실천 역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자의 댓글에 대한 답글로 제 견해를 밝힌 것처럼,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선의와 진정성은 크게 의지할 바가 못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일본 양심적 지식인이 일본 정부 결정에 변화를 이끌어 낼만한 역량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역량이란 지식인의 숫자일 수도 있고 그들의 열정일 수도 있겠습니다.
한일 화해는 참으로 지난한 일입니다. 그런 지난한 과정을 지나는 동안 지치지 않고 초심을 유지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이 도중에 주저앉게 되지 않을까 걱정한 것이지요. 저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습니다만. 다시 읽어보니 그들의 진정성을 부정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쩌면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조차 이런 한계를 거듭 확인하게 되면 결국 화해의 몸짓을 보이는 것으로 책임을 다한 것처럼 ‘자기합리화’하는 선에서 주저앉게 되지는 않을지 걱정스럽기도 하고.”
3) 야스쿠니 문제는 일본이 최소한 비밀리에 합사한 전범을 ‘분사하는 선’까지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 전쟁 책임을 묻는 것은 단순히 책임을 묻는 것 외에 전쟁을 다시 일으키지 않는다는 보장을 요구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피해자로서 요구할 수 있는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4) 저는 박유하 교수의 저서를 한 권씩 읽어가면서 “이렇게 하면 화해를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보다는 “화해란 참 멀고도 험한 길이겠구나”하는 쪽으로 생각이 차츰 기울어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쓴 <지식인을 말한다> 서평 중에 김훈 선생의 <남한산성>을 인용한 부분이 있습니다. 명분을 지킬 것인지, 오해를 무릅쓰고라도 실질적인 해결을 이끌어 낼 것인지. 동일한 갈림길에서 박유하 교수는 오해를 무릅쓰는 길을 선택한 것이지요. 그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을 설명한 것입니다. 다시 읽어보니 제 생각은 낙관보다는 비관에 가깝네요. 박 선생님께서 정확히 보셨습니다.
국가와 국민을 한 덩어리로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박 선생님의 그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다시 한 번 고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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