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01

H2O의 블로그 전두환 정권의 ‘간첩 만들기' - 1980년대 반공, 반북의 역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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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 정권의 ‘간첩 만들기' - 1980년대 반공, 반북의 역사 5 > | 책읽기 & 서평


H2O 2015. 1. 25. 22:56

http://blog.daum.net/hy2oxy/8692244



< 전두환 정권의 ‘간첩 만들기' - 1980년대 반공, 반북의 역사 5 >

"남파간첩은 50년대와 60년대에 가장 많았고, 70년대 이후, 구체적으로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후 북한이 직접 간첩을 남파하는 전략을 폐기하면서 크게 줄어들었다. [김창금 <되짚어본 ‘조작의혹’ 간첩사건 : 한겨레> 1995. 7.31]
그러나 80년 이후에도 검거 간첩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는 괴이한 일이 발생했다. 전두환은 정치적 위기 때마다 간첩 사건을 터뜨리며 국민들을 불안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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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광주항쟁 이후인 10월 전남 보성군 회천면에서 이 지역 주민인 정종회와 정추낭, 정길상이 간첩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들은 중앙정보부에서 한국전쟁 당시 월북한 집안 친척인 정해진과이 연락 여부를 추궁받았고, 이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 끝에 간첩으로 몰렸다.
워낙 살벌했던 시절이라 변론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정춘상은 사형을 언도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정종희와 정길상은 88년 12월에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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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표였던 이헌치는 81년 귀국해 삼정전자 과장으로 근무하던 81년, 임신중이던 아내와 함게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되었다.
이헌치의 아내는 구속 상태에서 육군통합병원에서 아들을 출산했는데, 천주교인권위원회와의 면담에서 이헌치는 “당시 보안사가 작성한 진술서대로 진술하지 않으면 아내와 아들을 없애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았다”고 말했다.

간첩조작사건 가운데는 60년대와 70년대 납북되었다가 귀환한 남북 어부들을 희생양으로 한 것도 적지 않았다. 납북되었다가 귀환한 어부들에게는 대개 “납북되어 북한 체제시 지도원으로부터 세뇌되어 간첩교육을 받고 귀환한 후 국가기밀을 탐지하고 이를 북한에 전달하려했다”는 혐의가 씌어졌다. 물론 구체적인 혐의 사실은 거의 없었다.

김남주의 시 <함정>이다.
“아부지/ 오야, 인자 핵교 갔다 오냐/ 어떻게 생겼을까 북한 사람들은/ 가금없이 먼 소리를 한다냐/ 얼른 집에 들어가 밥묵고 염소금겨야제/ 성샌님이 그려갖고 오락했당게 북한 사람 얼굴을/ 아부지 어무니나 언니 오빠한티 물어갖고/ 머시라고야 시킬 것도 없었능갑다 느그 선상은/ 벨 것을 다 그려 갖고락 하게/ 너한티만 그러더냐 딴 학상들한티도 그러더냐?/ 나하고 순임이한티만 그랬당께/ 아부지 증말 북한 사람들은 머리에 뿔났을까?/ 그 사람들은 맨당 깡냉이죽만 묵는다는디 증말 그러까?/ 아부지는 가봤다 왔을께 알 꺼 아녀/ 황씨는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사람이 사람답게 생겼제 으떻게 생겼으까/ 이렇게 말해줄까 하다가 그것도 삼켜버렸다/ 납북되었다가 달포 만에 고향인 갯마을에 돌아온/ 황씨는 그후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 순임이 삼촌이 지서에 불려간 것은 다음날 밤이었고/ 그날 밤 항씨는 묻지 않았다/ 아들에게/ 북한 사람들을 어떻게 그려다 바쳤느냐고”


사적인 원한 관계에 의해 간첩으로 몰리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간첩 혐의로 무기징역을 받은 이성국의 가족들은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경찰의 친지를 간통으로 고소한 것밖에는 없다”고 말했으며, 정삼환의 가족들은 정삼환이 “유부녀를 겁탈한 새마을 지도자 ㅂ씨의 고소장에 증인으로 서명한 일이 있는데, ㅂ씨는 평소 보안대 사람들과 가깝게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문정우 <보안법 그물에 걸린 납북어부들의 한 : 시사저널> 1993. 3]

간첩으로 몰렸을 경우에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
서승은 “빨갱이라고 낙인이 찍히기만 하면 사회적 차별과 배제를 받았다”고 말한다. 연좌제는 81년에 법적으로 없어졌지만, “가족 구성원 중에 간첩이 나왔다고 하면 가족과 친척 모두 끌려가 두들겨 맞은 끝에 몇 명은 연좌해서 투옥되고 가정은 풍비박산” 되었고, “남은 가족들은 훗날까지도 요시찰자로 찍혀 소관 경찰 정보과의 정기적인 사찰을 받”았다. 연좌제 때문에 가족들은 “공무원이나 회사원도 될 수 없”었고, 결국 “식모나 행상, 날품팔이 등을 하며 목숨을 부지”했다.
기세문의 아들의 경우 전남대 의과대학에 합격햇지만 빈곤과 사회적 박해로 끝내 자살하고 말았는데, 이런 비극이 적지 않았다. [서승 <서승의 옥중 19년> 역사와비평사 1999]

간첩으로 찍히면 죽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납북 어부 정삼환의 동생 정남도는 첫 면회에서 “형보고 죽으라고 할 만큼 증오했었다”고 술회했다. [문정우 <보안법 그물에 걸린 납북어부들의 한 : 시사저널> 1993. 3]
실형을 산 사람들의 상당수는 아내가 집을 나가 집안이 풍비박산 나거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간첩 자식’이라는 눈초리를 받아 아이들이 비뚤어지게 자라기도 했다. 85년 납북 어부 안정호의 형은 동생의 일로 인해 이혼을 당했으며, 어머니는 “친척마저 피하는 통에 몇 번이고 자살하려 했다”고 말했다. [최진섭 <납북 귀환어부 간첩 만들기 : 월간 말> 1989. 9]

정삼환의 경우, 그가 출소한 후에 가족들은 집 안에 칼을 두지 않았는데 “정씨의 한이 깊어 그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성학은 납북되었다 돌아온 어부들 가운데 힘든 법정 투쟁 끝에 유일하게 무죄 선고를 받았는데, 무죄 선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미 그는 간첩으로 낙인찍힌 상태였고, 그의 가족들은 간첩 가족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친지가 3공화국 말기에서 5공 초기에 걸쳐 약 1년여 동안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는 것을 지켜본 전태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만큼 우리 국민은 ‘간첩’에 민감한 반응을 보일 정도로 투철한 반공의식으로 무장돼 있음도 이때 알았다. 그런데 문제는 사건에 휘말린 당사자가 무죄로 밝혀지더라도 명예회복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처음엔 죽 끓듯 하던 여론도 결과엔 누구 하나 관심 조차 기울이려 하지 않아 치명적인 상처만 남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간첩 조사나 발표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불충분한 조사나 발표는 국민에게 불화만 조성하여 북한이 노리는 또다른 목적을 이루게 하는 행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전태수 <간첩단 사건 발표 시중을… : 동아일보> 1992. 11]”(p.226~230)

: 강준만, 김환표 저 <희생양과 죄의식 : 대한민국 반공의 역사> 제5장 ‘1980년대의 반공’ 중에서…

○ 부정하게, 불법적으로 정치권력을 찬탈한 정권의 공통점은 여론조작과 이슈조작이죠. 한국에서 정치권력이 가장 손쉽게 이용해먹을 수 있는 대상은 바로 이북(북한)입니다. 분단체제의 필연적인 결과이자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적 통일로 진행하려는 데 가장 암적인 존재는 바로 '분단체제의 수혜자’이 부정한 정치권력입니다. 이승만부터 박정희, 전두환에게 이르기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공통점이죠.

○ 부정한 정치권력이 간첩조작에 맛을 들이는 이유는 간첩을 조작하여 도모하고자 하는 의도, 즉 야권이나 지식인, 국민들에 대한 공포정치와 협박정치가 통하기 때문입니다. 진보진영뿐 아니라 야당과 시민사회단체, 지식인과 언론, 그리고 깨어있는 시민들이 정권의 간첩사건 바표, 종북몰이, 북한 이용 행위에 대해 섣불리 동조하지 않고 의혹과 진실규명이라는 잣대를 분명하게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효과가 없으면, 줄어들면 저들이 반복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오히려 저들에게 부메랑이 되는 겁니다. 작년에 드러난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처럼요…

○ 여기에서 안타까운 점은 야권 내에서 정치적 이해관계, 정파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저들의 간첩조작이나 종북몰이, 여론조작에 편승하는 개인 또는 세력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정치적 경쟁자(세력)에 대한 근거 없는 마타도어보다 실체 없는 종북몰이가 더욱 위험합니다. 전자는 당사자들끼리 갈등하고 상처를 입으면 그만이지만, 후자는 야권전체에 진보진영 전체에 색깔론이 입혀지고 뿌리 깊은 불신과 분열이 조장되기 때문입니다. 2013년 이석기 의원 등에 대한 내란음모 여론조작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간첩 수준으로 이미지를 덧씌운 후 야권의 분열이 정점에 달했고, 이에 편승하여 헌법재판소는 정당해산을, 대법원은 내란선동을 판결한 것이니까요.

○ <1980년대 대한민국 반공, 반북의 역사> 1~4은 http://blog.daum.net/hy2oxy/8692234 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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