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8

오늘의 역사: '6.25전쟁' 이재봉

오늘의 역사: '6.25전쟁'
‘6.25전쟁’에 관해  이재봉
 
(1) 전쟁의 명칭에 관해
 
우리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이름 짓는 데 날짜를 포함하기 좋아한다. ‘3.1절’, ‘4.3제주항쟁’, ‘4.19혁명’, ‘5.16쿠데타’, ‘5.18광주항쟁’, ‘6.25전쟁’, ‘8.15광복절’ 등으로 말이다. 나는 이게 좀 불만스럽다. ‘3.1절’, ‘5.16쿠데타’, ‘8.15광복절’ 등과 같이 어떠한 일이 일어나 그 행위가 오래 지속되지 않고 하루에 끝났다면 이런 명칭도 괜찮다. 그러나 ‘4.3제주항쟁’, ‘4.19혁명’, ‘5.18광주항쟁’, ‘6.25전쟁’처럼 운동이 며칠 이상 지속되었다면 어느 특정한 하루를 잡아 명칭을 정하는 게 바람직한지 의문이다.
 
특히 ‘6.25전쟁’은 몇 달도 아니고 몇 년 동안 지속된 것이다. 게다가 전쟁이 6월 25일 갑자기 시작된 것도 아니다. 남쪽 안에서 일어난 이념 갈등은 빼더라도, 1949년부터 38선 일대에서 남북의 군대가 격렬하게 충돌한 적이 적지 않았다. 미군이 이 땅에 발을 디딘 1945년 9월부터 1950년 6월 이전에 분단에 따른 갈등과 투쟁 때문에 거의 10만 명이나 죽었는데, 전쟁이 1950년 6월 25일 갑자기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부적절하고 ‘6.25전쟁’이라 이름 붙인 것도 어색하다. 이 명칭엔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북한 괴뢰군이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남침을 시작했다”는 점을 세뇌시키기 위한 의도가 배어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한국사에서나 세계사에서나 무슨 전쟁이 일어난 시기를 공부할 때 연도를 넘어 날짜에다 요일과 시각까지 암기한 적이 또 있는가.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그 배경과 이유보다 언제 누가 시작했는지에만 초점을 맞춘 역사 인식을 강요당한 셈이다.
 
참고로, 북한은 이 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 부르는데, 미국이 점령해서 식민통치하고 있는 조국의 남쪽을 해방시켜 통일한다는 취지와 목표를 드러낸 이름이다. 미국은 ‘한국전쟁 (The Korean War)’이라고 하는데, ‘베트남전쟁’이나 ‘이라크전쟁’처럼 전쟁이 일어난 장소를 포함시킨 명칭이다. 중국은 ‘항미원조 (抗美援朝) 전쟁’이라 부름으로써 ‘미국에 대항해 조선 (북한)을 도와준 전쟁’이라는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유럽의 한 학자는 ‘한국전쟁’이라 표기하는 것도 전쟁의 성격을 왜곡시킬 수 있다며, ‘한국에서의 전쟁 (War in Korea)’이라고 이름 붙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전쟁’이라고 하면 남북한만 전쟁을 벌인 것 같은 인상을 주기 쉬운데, 전장은 한반도지만 전쟁 주체는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진영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전쟁’이라고 불러야 더 정확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이 2003년 이라크를 침략해 전쟁을 벌일 때 남한 언론은 하나도 빠짐없이 ‘이라크전쟁’이라 썼지만, 미국 언론은 ‘War in Iraq (이라크에서의 전쟁)’로 표기한 경우가 많았다는 점도 참고하기 바란다.
 
(2) 전쟁의 성격에 관해
 
앞에서 북한의 ‘조국해방전쟁’이란 이름을 소개하며 “남조선을 해방시켜 통일한다는 취지와 목표”를 드러낸 것이라고 했듯이, 6·25전쟁은 분명히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다. 그런데 2005년 강정구 동국대 사회학교수가 한 인터넷신문에 기고한 <맥아더를 알기나 하나요>라는 제목의 글에서 “6.25전쟁은 통일전쟁이면서 동시에 내전이었다”고 썼다가 검찰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고 대학에서 직위 해제된 적이 있다. 이에 앞서 2001년엔 김대중 대통령이 6.25전쟁을 “무력에 의한 통일 시도”라며 앞으로는 결코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반드시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데 대해 국회에서는 북한의 입장만을 대변했다며 대통령직을 사퇴하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6.25전쟁을 ‘침략전쟁’이라고 해야지 어떻게 ‘통일전쟁’이라고 하느냐는 억지였다. 1945년 9월 남쪽에 들어온 미군이 “점령군인가 해방군인가” 하는 불순하고도 무식한 질문과 마찬가지로. 점령군도 되고 해방군도 되었듯이, 침략전쟁도 되고 통일전쟁도 된다. 둘의 성격이 서로 다르거나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하며 보완적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분명히 ‘남침’과 ‘전쟁’이라는 방법으로 ‘적화’와 ‘통일’이라는 목표를 이루고자 했다. 이게 통일을 위한 전쟁이지 분단을 위한 전쟁이었단 말인가.
 
보수주의자들은 6.25전쟁을 북한이 남한을 적화하기 위해 기습 침략을 감행한 전쟁이라고 한다. 맞다. 진보주의자들 가운데 6.25전쟁을 북침전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을지 모르겠는데, 김대중 대통령이나 강정구 교수는 분명히 6.25전쟁을 북침전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물론 한국전쟁을 1950년부터 시작된 ‘6·25전쟁’으로 한정하지 않고 분단 이후 시작된 전쟁으로 범위를 넓혀 본다면 미국이 전쟁을 부추긴 점도 있고, 남침이 먼저냐 북침이 먼저냐 따지기가 애매하거나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6.25전쟁’만 떼어놓고 본다면 북한이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해 먼저 침략을 저지른 남침전쟁이다. 그렇다고 적화통일은 통일이 아니고, 침략전쟁은 통일전쟁이 아니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통일은 여러 가지로 추구할 수 있다. 평화적 수단에 의한 통일도 있고, 전쟁에 의한 통일도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확장하기 위한 녹화 (綠化) 통일도 있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퍼뜨리기 위한 적화 (赤化) 통일도 있다. 서로 다른 두 체제가 공존하며 수렴될 수 있는 통일도 있고, 한 체제는 반드시 없어져야 할 통일도 있다. 이 가운데는 바람직한 통일도 있고 꼭 피해야할 통일도 있다.
 
6.25전쟁은 무력에 의한 통일 시도였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퍼뜨리기 위한 적화통일 시도였다. 수단과 방법이 나빴어도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고, 추구하는 목표와 가치가 달랐어도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다. 김 대통령이나 강 교수가 이러한 통일 시도의 방법과 목표를 바람직하다고 했다면, 나를 비롯해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비난 받을 수 있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위협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런데 6.25전쟁이 통일전쟁 또는 통일 시도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가 도대체 왜 시빗거리가 되는지 기가 막힐 뿐이다.
 
1950년대에는 남쪽에서나 북쪽에서나 무력에 의한 통일을 추구하다가, 남쪽에서는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북쪽에서는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앞으로는 남쪽에서든 북쪽에서든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에 의한 통일은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 게 중요하지, 통일전쟁이냐 아니냐라는 말도 되지 않는 시비는 없어져야 한다.
 
(3) 미국과 중국의 참전에 관하여
 
미국은 남쪽을 살렸고 중국은 북쪽을 구했다. 미국이나 중국이나 자신들이 추구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키기 위해 각각 남쪽과 북쪽에 군대를 보냈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2-3개월 만에 끝나고 사회주의로의 통일이 이루어졌을 것이며, 중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5-6개월 만에 끝나고 자본주의로의 통일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두 나라의 개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남북이 각각 자신의 체제를 지킬 수 있었다는 점이요, 부정적으로 평가하면 빨리 끝났을 전쟁이 확대되고 그에 따라 희생자가 엄청나게 늘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강정구 교수가 6.25전쟁을 통일전쟁이라고 부른 것보다 미국의 개입이 없었으면 전쟁이 빨리 끝났을 테고 사람들이 덜 죽었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더 큰 비난과 처벌을 받았는데, 미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유명한 정치학자가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을 정당화하거나 미화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1950년부터 1952년까지 한국전쟁에 미군포병 연락장교로 참여했다가 1968년 ≪The Korean Decision (한글 번역본: 미국의 한국참전 결정)≫ 이라는 책을 펴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글렌 페이지 (Glenn Paige) 하와이대 정치학교수가 1977년 자신의 책을 스스로 비판하며 하나의 폭력에 대해 또 다른 폭력으로 대응한 것을 반드시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반성했던 것이다. 미국의 개입 때문에 중국까지 참전하여 전쟁의 규모가 커지고 남북 양쪽에서 수백만 명이 죽게 된 것을 바람직하다고만 할 수 있느냐는 뜻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그의 책 ≪To Nonviolent Political Science: From Seasons of Violence≫가 1999년 안청시 서울대 정치학교수와 정윤재 한국정신문화원 정치학교수에 의해 ≪비폭력과 한국정치≫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판되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지금은 남한이 북한보다 정치적으로 훨씬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풍요롭다. 쉽게 말해 체제 경쟁은 끝났다. 그러기에 남한에는 그 때 수백만 명이 죽었을지라도 사회주의 체제에 흡수되지 않았던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1940-50년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북쪽이 남쪽보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또는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모든 분야에서 더 안정되어 있었고 훨씬 개혁적이었으며,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 체제를 원했었다. 따라서 지금의 기준이 아닌 당시의 상황을 바탕으로 한다면 엄청난 인명의 희생을 막고 사회주의 체제로의 통일을 바랐을 사람들이 많았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4) 전쟁의 피해에 관하여
 
6.25전쟁의 피해와 관련하여 1998년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당시 대통령 정책자문 기획위원장이던 최장집 고려대 정치외교학교수가 오래 전 발표했던 논문에서 “한국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북녘 인민들이었다”고 쓴 구절에 대해,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계층은 무슨 빨갱이 같은 소리냐며 흥분했던 것이다. 6.25전쟁을 통해 남북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인민군에 의한 남쪽 양민의 피해만 큰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오래 전부터 ‘노근리’를 통해 밝혀지고 있듯이, 남쪽 양민들은 미군과 국방군에 의해서도 끔찍한 피해를 당하지 않았는가. 따라서 친북이나 반공이라는 감정을 떨쳐버리고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최 교수의 주장은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미군 조종사들이 북한을 공격할 때 더 이상 폭격할 목표물을 찾지 못할 정도였다면, 6.25전쟁 중 북쪽의 피해가 어느 정도였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스페인 출신의 세계적인 화가 피카소가 1951년 6.25전쟁을 소재로 그린 스케치가 있다. “조선에서의 학살 (The Massacre in Korea)”이란 제목이 붙은 이 그림은 벌거벗은 임산부들과 아이들을 향해 총칼을 겨누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그림을 보면 언뜻 인민군들이 남한 양민을 학살하는 것을 떠올리기 쉽겠지만, 공산주의자 피카소는 미군이나 남한군이 북쪽에서 저지른 학살을 묘사했을 것이다. 내가 그림 제목을 ‘한국에서의 학살’이라 하지 않고 ‘조선에서의 학살’이라고 번역하는 이유다.
 
미국은 6.25전쟁 중 북한이 1세기 동안 걸려도 복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철저히 파괴하려 했다고 한다. 북한의 모든 산업시설을 초토화하여 휴전협정이 맺어진 이후에 북한이 피해 복구를 쉽게 하지 못하고 경제개발에 어려움을 겪으면,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못하다고 선전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렇게 북한은 전쟁을 통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어느 쪽 군인들이 먼저 전쟁을 시작했느냐는 문제와 어느 쪽 양민들이 더 큰 피해를 입었느냐는 문제는 분명히 별 개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5) 전쟁의 경과와 결과
 
한국전쟁이든 6.25전쟁이든 1953년 끝났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쟁이 ‘실질적으로는’ 끝났을지라도 ‘법적으로는’ 종결되지 않았다. 1953년 7월 맺어진 것은 전쟁을 쉬거나 멈춘다는 휴전 또는 정전협정이었지, 전쟁을 끝내거나 평화를 추구하자는 종전 또는 평화협정이 아니었다. 70여년이 지나도록 전쟁을 완전히 끝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남한과 중국은 1992년 적대 관계를 풀었지만, 북한과 미국은 아직 국교를 정상화하지 못하고 있으며, 남북관계는 불안정하다. 따라서 진보세력이든 보수세력이든 앞으로 6.25전쟁을 생각하거나 기념하면서, 전쟁을 언제 누가 왜 먼저 시작했는지 따지고 상대방에 대한 원한이나 적대감을 키우기보다는 왜 아직까지 휴전 또는 정전협정을 종전 또는 평화협정으로 바꾸지 못하고 있는지 반성하면서 어떻게 평화와 통일을 진전시켜야 할지 고민해보는 게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이재봉의 법정증언≫, 78-87쪽.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