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7

YoonSeok Heo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과 그 합리성에 관하여 - 책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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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Seok H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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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과 그 합리성에 관하여 - 책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 해석
(上)>
* 아주 긴 글입니다.
1. 양극화된 사회적 담론, 그 근원에 대해
어떤 사회적, 문화적 현상을 설명하는데 있어 경제문제를 빼고 애기할 수는 없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이뤄지는 백신접종률 등을 말미암아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앞둔 한국 역시 마찬가지로 여러 굵직굵직한 주요 정치·사회·경제적 이슈가 눈에 띈다.
그중에서도 보수정당에서 탄생한 첫 30대 당수 ‘이준석’ 현상과 그가 주장한 공정한 경쟁, 능력주의 구현에 대한 여러 분석이 매체를 불문하고 쏟아져 나왔다. 특히 이준석 현상에 자리잡고 있는 세대 간 갈등(특히 민주당을 포함한 586세대의 위선과 내로남불에 비판적인 2030 세대)과 젠더문제, 안티페미니즘을 앞두고 여러 공론화가 진행 중이다. 경제이슈로는 바이러스 시대에 강타한 재난 양극화와 좁혀지지 않는 소득·자산 불평등,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여 살아가는 시민들에 대한 경제적 기본권으로의 ‘기본소득’ 관련논쟁 등이 대선이슈로 급부상 중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실과 그 트렌드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낡은 사고와 생각에 사로잡히면 언제든 나락으로 추락할 수 있는 현실이 내 눈 앞으로 다가온 느낌이다. 나를 포함한 여러 다수의 사람들은 사회가 설정한 ‘정상가족’ 의 라이프 실현을 위해서라면 한정된 양질의 일자리 경쟁의 치열함을 감내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와는 거리가 멀며 이미 ‘한량’인 듯한 자세로 세상과 경쟁과 담을 쌓고 스스로를 공동체로부터 소외 및 배제시키는 커뮤니티가 존재한다. 더 이상 사회가 부여하는 테제에 종속되지 않으려는 의지를 넘어 체념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최근에 존재하는 여러 공론적 이슈를 바라보는 두 집단의 시선은 극과 극이다. 한쪽은 격렬한 정념을 드러내는 한편, 다른 한쪽은 무관심과 냉소로 일관하고 있다. 여론의 양극화가 더욱 고착화 되는 와중에 결국 이 집단 속에 대표되지 않은 <중간자적> 입장은 사회적으로 표출되지 못하고 있다. 적당히 노력하고 중간 수준의 라이프를 구현하는 삶은 이제 없는 것과 다름 없다. 성 안에 진입이냐 추락이냐가 시민들의 삶을 규정짓고 압박하고 있다.
페친 중 Jinwoo Kim님의 과거 포스팅에서 언급했듯 90년대 청년세대는 최초로 절대다수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과 아파트를 얻지 못할 가능성이 아주 크다. 정상가족의 형성과 근대적 소비주체로서의 개인을 조직할 수 있는 사회적 경제력과 생산구조의 혁신과 진보는 정체된 채, 반(反)근대적 · 탈(脫)근대적 성격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나름 긍정적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 사회가 일본이라고 지적했는데 일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일본사회는 책이나 미디어를 통해서 지속적이고 낙관적 경제성장을 가정한 과거의 정상성에 기인한 문화나 태도를 더 이상 개인에게 강요하는 조류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최근 도요타 사내 직장 괴롭힘으로 인한 자살사건에서 드러나듯이 일류 대기업과 같은 경쟁조직에서는 그러한 조류가 정착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래도 그와 관련된 사회지도층들의 책임의식이나 조직 내 연대적 문화의식은 한국보다는 낫다는 인상을 갖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고도성장시기부터 유지해온 한국인 특유의 세속적 욕망과 신분상승의 인정·문화투쟁을 일본식 관용모델로 대체하자는 주장은 현실에서 당장 구현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한국인들은 일본식 달관에 결코 만족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꾸준히 들려오는 금리인상이나 테이퍼링 예고소식에도 불타오르는 국내 주식, 부동산 시장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안타까운 화재로 목숨을 잃은 물류노동자와 소방관의 순직을 둘러싸고 쿠팡에 대한 불매운동과 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는 양상이다. 그러나 ‘로켓배송’ 이란 명목 하에 전부터 지적되어 왔던 강도 높은 노동과 작업현장의 열악함을 애써 외면해오며 이들의 비윤리적 경영행태를 ‘혁신’ 이라 칭하며 용인해왔던 것은 바로 한국의 소비자들 자기 자신이다. 이렇듯 한국인들의 특성 상, ‘초식동물화’를 요구한다고 그들의 생존전략을 중단기적으로는 바꿀 것 같지 않다.
결국 정치를 하고자하는 사람들과 사회공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모두 경제문제, 현장과 현실에 연동한 문제의 점진적 개선에 초점을 맞추어야한다. 물론 현재에도 경제학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과학 분야에서 관련 연구와 논의가 꾸준히 진행되고 있지만 학자들 마다 자신들이 배우고 체화한 '앵글(Angle)' 이 워낙 다양한 만큼 보통사람들은 어떤 기준을 갖고 참고해 의사결정을 해야 할지 힘들다.
나는 이번 글에서는 흔히들 ‘비주류’ 라고 간주되는 마르크스 계열의 경제학을 전공하는 지식인의 책을 빌려 현실세계를 설명하고자 시도했다. 그간 ‘주류’ 경제학의 관점에서 전개되어온 대부분의 담론들은 경제가 지속해서 성장할 수 있다는 낙관론을 근거로 현실을 분석하고 전망한다.
지속적 경제성장은 최적의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의 연속선상이다. 이에 따르면 고정자본의 생산이나 유동자본의 회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금융위기나 불황은 경제주체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등 과 같이 금융자본의 일시적인 ‘방종’ 에 의한 시장의 잠정적 일탈에 불과하다. 위기가 발생하면 이에 대응하는 정부의 적절한 개입과 전 세계 각국 정부의 정책적 공조가 발맞추어지면 곧 다시 경제가 정상궤도로 올라갈 것이라 가정한다.
역사적으로 경제위기가 발생하면 곧바로 정부는 재정적자와 통화완화 정책 등을 통해 경기부양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는 실질적으로 금융경제의 팽창과 비대화를 초래했지, 실물경제에서의 뚜렷한 개선은 그에 따라가지 못했다.
과거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후반까지 구가한 자본주의 ‘황금기’를 지배했던 케인스주의의 유효 수요창출 정책과 현재 제조업의 디지털 화(化) 등 공급 측의 확대 및 진보가 진행되고 있지만 과거 경제지표 수준의 완전고용과 고성장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경제의 성숙기에 아이러니하게 투자열풍과 자산시장의 활황현상은 경제성장의 둔화,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중지’(breakdown)로 다가가기 이전에 발생하는 사회적 병리현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소득으로는 온전히 개인의 최소한의 행복을 뒷받침할 수준의 기반을 만들지 못함이 명확한 가운데, 좋든 싫든 코인이나 주식 등의 자산투자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까지 사람들이(특히 청년세대들) 몰리고 있다. 경쟁에서 탈락하거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2030세대 대다수는 자신의 본업에 충실히 해내는 성취감 내지 자기인격 수양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들의 욕망을 실현할 마지막 배출구로 투기열풍에 올라타는 ‘한탕주의’ 의 모습은 청년세대를 묘사하는 하나의 자화상이다. 역설적으로 2030세대는 가장 물질적으로 수혜를 입은 세대인 동시에 가장 박탈감과 격차에 시달리는 세대로 기록될 것이다.
결국 완화되기는커녕 커져만 가는 계층, 성별, 세대 간 갈등이나 문화투쟁 모두 사실상 한국만의 특수성뿐만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보편적 속성 내에서 기인하고 있는 측면을 더 이상 무시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기술진보와 제도혁신을 말미암아 자본의 수익률과 생산성 향상을 전제하는 경제성장기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정의 기준이나 평등의 척도 등에서 지적되는 조그마한 결함에도 용인할 수 있는 정서적 관대함이 있었고 정부의 재분배 정책에도 관용적인 편이었다.
현재와 같이 불투명한 경제적 전망과 함께 정착된 장기 저성장 시대에서는 과거에 비해 성장의 과실을 얻고자 하는 경쟁의 강도는 올라가기 마련이고, 당연히 타인을 바라보는 여유나 인정은 각박해진다.
과거에 비해 다원화된 사회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생산과 분배구조의 획기적 개선이 있지 않고야 점차 세대, 계층, 성별 간 스며드는 사회적 갈등의 소용돌이는 완화되지 않을 것이다. 억압자-피억압자를 포함해 피억압자들끼리의 상호 대립과 공공연한 투쟁 끝에 현실화되는 ‘계급적 공멸’을 어떻게 제어하고 이들을 달랠 수 있을까.
개인과 집단 모두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더 이상 인문적 감수성과 문화비평에 글을 쓰는 대신, 한 권의 책을 디딤돌 삼아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생산과 분배체계를 작동시키는 근본적 원리를 이해하고 글을 쓰기로 하였다..
2. 무한한 경제성장과 중립적 기술진보가 불가능한 이유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의 저자 한지원 선생은 4차 산업혁명이나 디지털 경제체제를 설명하기 위한 앵글로 마르크스 경제학이론을 차용한다. 저자는 핵심개념인 <편향적 기술진보> 와 <노동가치론>을 빼고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편향적 기술진보>에서 ‘편향적’ 이라는 말은 자본제 사회에서 기술진보의 성격이 인력의 ‘노동을 절약’ 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며 기계투자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노동절약적 기술은 동시에 자본 즉 기계자체의 가격을 낮추는 기술진보(과거 산업혁명과 같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기계투자의 가격대비 이익의 비중 즉, 이윤율은 떨어지기 마련임을 지적한다. 경제학에서는 기술진보는 노동과 자본을 동시에 줄이는 ‘중립적 기술진보’를 전제하지만 이는 역사적으로 일시적인 현상(포드주의 혁명)에 불과하였다. 설령 혁명의 효과가 나타나더라도 시간이 흘러 경쟁기업에까지 수혜의 공유가 이루어지면 노동을 절약하기 위한 기계의 가격은 다시 비싸지며 이윤율은 낮아진다.
<노동가치설>은 사회 내 생산에 필요한 분업을 조직하는 인간 사이의 관계적 측면에서 노동을 조망한다. 어떠한 생산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먼저 토지, 원자재와 같은 자연자원이나 기계로 대표되는 생산수단이 필요하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노력인 ‘노동’ 이 투입되지 않으면 상품경제의 생산물은 창출되지 않는다. 즉, 사회적으로 순수하게 투입되는 생산요소는 노동뿐인데, 외부조건에 변화가 없다면 전체적인 사회적 생산력은 구성원들이 얼마나 많은 노동을 ‘투입’ 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기술진보의 사례로 거론되는 ‘산업혁명’ 은 역사적으로 생산에 필요한 인간의 노동을 줄이는 방향이 아닌 최대로, 강도 높게 ‘추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시간당 노동 지출이 증가하는 ‘노동생산성의 향상’을 보여줬다. 이 같은 정의에 따르면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의 등장 등을 통해 전파되는 노동의 ‘종말’ 과 같은 현상은 지나치게 표면적인 현상을 과장한 것에 불과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생산은 노동이 시장에서 거래되며 분업을 통해 상품생산에 활용된다. 먼저 경제학이론에서는 효용과 가격을 동일선상에 둔 채, 개별 상품차원에서 가격을 정의한다. 사용가치와 내재가치를 구분하지 않고 상품과 ‘교환’ 되는 화폐의 양으로 상품가격이 정해짐을 가정한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노동가치설에 의하면 효용과 가치는 별개의 영역이다. 상품이 화폐의 양으로 표현된다면 그 생산에 필요한 노동 역시 화폐의 양으로 수량화되기 때문에 노동 그 각각의 육체적·정신적 노력의 개별성과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상품실현의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개별적 차이를 잃게 된다. 파편적이고 이질적인 노동의 과정이 상품생산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공통된 속성을 치환시켜 나가는 ‘상품가격의 추상화’ 로 귀결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노동의 필수불가결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노동보다 우위에 있는 기제는 유지한다. 이윤율이 지배하는 자본제 사회에서 자본가는 생산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계의 물리적·기계적 마모를 복구하는(감가상각비) 비용과 생산자(노동자)가 스스로 생산과정에 필요한 육체적이고 정신적 능력을 유지·발전시킬 수 있도록 하는(임금) 비용이 수반된다.
다만 소유자가 이런 복구비용을 지출하는 과정에 생산에 투입된 노동 중 일부를 얻고자 하는데, 이것이 ‘잉여노동’ 이다. 인건비를 공제한 이윤의 본질은 여기서 나온다. (마르크스는 이를 ‘착취’ 로 개념화했다.) 너무 당연한 소리지만 노동한 인간이 온전히 자신이 실현한 가치를 다 가져가게 된다면 자본 측이 가져갈 수 있는 이윤은 줄어들고 이는 자본제 사회가 움직이는 동기를 박탈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에 체제유지에 장애가 될 것이다.
이렇듯 이윤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동기와 경제운영 원리는 노동을 ‘대체’ 하는 것이 아닌 ‘절약’ 하는 쪽으로 기술진보를 편향적 방향으로 이끈다는 원리를 현실경제에서의 성장과 분배를 분석하기 이전에 먼저 이해해야 한다. 개별기업은 자본에 투자하여 일시적으로 노동을 절약하는 ‘특별이윤’을 맛보지만 경쟁기업 모두가 시간이 지난 이후 자본투자에 성공하면 개별기업이 누리는 특별이윤은 사라지게 되며 전체적으로 잉여노동의 상대적 추출이 감소하게 되는데 이것이 ‘평균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지금까지도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 디지털 기술혁신과 빅테크 기업(마이크로소프트, 구글, 페이스북 등)의 성장을 평가한다. 20세기 산업혁명의 역사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체제를 이끌었던 포드 자동차의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을 통해 더 많은 노동을 절약하는 동시에 기계나 공구 등의 자본투자 비율역시 감소시킴으로서 중립적 기술진보의 달성을 보여줬다. 압도적으로 높아진 상품생산력과 자본-노동 생산성을 바탕으로 대중의 상품소비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유효수요 창출이나 실물투자로의 자본의 흐름을 강제한 금융규제 등의 제도적 변화는 전 세계적으로 지속적 경제성장과 그에 따른 사회국가-복지국가의 조화를 가능케 했다. 그러나 이 같은 황금기가 전체 장기시계열의 관점에 근거하면 사실상 일시적인 ‘예외’ 에 불과함을 지적한다.
20세기 후반이후, 대규모 자동화와 인공지능, 스마트 팩토리 등의 실현에으로 엄청난 노동절약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기업들의 평균자산 수익률(순이익 ÷ 기업이 보유한 총자산)은 1960년대에 두 자릿수에서 90년대 정보통신혁명과 세계화의 경제적 효과로 인해 잠깐 반등한 이후, 현재까지 한 자릿수를 유지하며 하락세이다. 자본의 지나친 소모적 투입이 주된 원인으로 뽑힌다. (표1)
디지털 거대기업은 정보나 플랫폼 등의 지적재산권의 개발·독점을 통해 자신들의 네트워크에 진입하는 사용자로부터 정보통행세(광고료 등), 즉 ‘지대’를 받는 방식으로(추가적인 노동의 투입 없이도 무제한 서비스 제공이 가능하므로) 이윤을 얻는다. 이는 가치생산이라기 보다는 ‘가치이전’ 즉, 일종의 이전소득이자 광의의 지대의 성격에 가깝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노동가치론의 측면에서 누군가의 이득(노동 없는 상품의 가격↑)은 누군가의 손해(노동 있는 상품의 가격↓)가 되는 제로섬 게임의 속성을 지닌 만큼, 이들 기업의 성장이 거시적인 국민경제 전체의 성장과 연결되지 않는다. 이를 위시한 채 노동생산물의 상품과 지대추구의 상품을 ‘효용의 테두리 내’ 에서 설명하는 것은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3. 불평등을 가리키는 지표로서 통계적 인용과 그 허구성
2010년대 들어서서 경제적 불평등에 관한 논의는 국내외를 불문하고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었다. 수많은 불평등 이론과 관련한 서적들이 번역되어 한국에도 소개되기도 하였는데, 그 중 브랑코 밀라노비치의 『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는 ‘세계화’ 현상에 따른 글로벌 차원의 불평등에 주목했다.
경제성장 초기에는 임금의 정체와 잉여노동의 활용에 따른 자본이윤의 증가로 말미암아 불평등이 증가하다가 점차 경제성장 덕에 노동력의 부족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와 함께 공교육의 확대를 말미암아 교육 내지 임금격차가 감소하기 시작하며 점차 불평등이 개선됨을 표현하는 <쿠츠네츠 곡선>은 한번이 아닌 반복하며 나타나는 파동의 연장선상이라고 밀라노비치는 주장한다.
그리고 이 파동에서 공산권 국가의 몰락과 자본주의 체제로의 세계경제 편입-개방-확대가 이루어짐에 따라 글로벌 노동시장은 과거에 비해 노동 공급량이 2배에 이르기 시작했다. 이는 선진국 노동자 개개인에게 찾아온 경쟁의 격화를 의미하며 동시에 아시아 신흥공업국 노동자의 경제적 지위는 상승하기 시작한다. 선진국 노동자의 지위가 떨어질수록 그에 따른 불평등이 주목되기 시작했다. 한국 역시 97년 IMF 위기 이후, 가속화된 세계화와 정보화의 바람이 정보통신기술 등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대기업을 위주로 기업생태계를 바꾸기 시작했다. 구조조정과 함께 중간숙련의 일자리의 국외유출은 점차 실현되어 노동자 간 임금격차와 불평등은 고착화되었다고 진보진영 내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는 담론이다.
그와 더불어 진보진영 내에서 자주 인용하는 불평등 관련 통계로 ‘임금분배율’을 인용한다. 외환위기 이후 지속적인 임금분배율의 하락은 노동생산성 상승분만큼의 임금이 상승하지 못했다는 증거로서 활용된다. 하지만 이 역시 자영업자의 소득에서 자영업에 근무하는 노동자의 실제소득(임금) 뿐만 아니라 귀속임대료(이윤) 등의 처리방향, 어떻게 임금과 이윤을 정확히 구분 및 보정할 것이냐 등 여러 한계점과 논란이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윤을 통해 조직되는 경제체제 내 사실상 임금분배율의 변화는 불평등 등을 결정하는 주요변수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오히려 (표8)을 참고하면 임금분배율의 변화는 하락하는 자본생산성의 변화보다 그 폭이 작다. 또한 논란이 되고 있는 귀속임대료 등 부동산과 관련된 가공소득과 자영업 부문의 이윤을 제외한 채, 자영업 노동자 임금을 포함시켜 계산해보면 임금분배율의 추이는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표7) 즉, 자본주의 체제지속의 핵심으로서의 임금은 자본주의 재생산에 필요한 만큼 시장법칙에 조정되고 있다. 물론 이는 임금에 관한 과학의 법칙이지 도덕의 영역이 아니다.
4. 소득주도 성장론이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은 이유
진보진영의 ‘동일노동, 동일임금’ 이나 보수진영의 ‘공정한 경쟁’ 이란 구호 모두 공정한 제도와 절차를 담보한 시장 내에서 생산에 기여한 만큼 소득을 가져가는 것으로 전제하지만 마르크스 경제이론에 의거해 저자는 애시 당초 임금문제를 공정성을 기준으로 다루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왜냐하면 산업사회가 도래한 이후 현대경제는 이윤율, 투자, 기술, 실업자 규모, 자본집약도 등등 여러 외생적 변수가 상호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이다. 특히 자본주의는 자본투자로 노동생산성을 향상하고 이를 통해 이윤추구를 늘리는 구조로 움직인다. 별다른 노동생산성의 향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인위적으로 임금만 노동생산성을 상회하는 방향으로 인상한다면 당연하게도 이윤율은 낮아질 것으로 자본은 전망하기 때문에 투자 및 고용 감소와 실업증대 등의 자본의 반격이 이루어진다.
이는 문재인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이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의 노동정책의 성과가 결코 성공과는 거리가 먼 이유이기도 하다. 노동시장의 독립성을 전제로 임금의 공정성만 분석하는 이론도 다면적이고 입체적인 문제접근과는 거리가 멀다. 자본주의에서 임금은 독립변수가 아닌 이윤율의 종속변수이다.
결론적으로 잘못된 현실진단을 바탕으로 내놓은 설익은 정책은 사회갈등만 오히려 증폭시켰다. 근본적으로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이 전제한 수요의 선순환 (‘임금상승 → 소비증가 → 설비가동률 상승 → 설비투자 확대 → 고용증가 ’) 과 공급의 선순환 (‘임금 상승 → 노동절약적 투자 증가 → 자본집약도 상승 → 노동생산성 증가’)이 갖는 문제점은 자본투자 및 자본집약도의 확대가 언제나 자본생산성의 상승과 노동생산성의 향상을 전제한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생산성의 지속적인 하락 속에서도 자본투자가 과거대비 수준으로 꾸준히 유지하였는데 89년 3저 호황(저달러, 저유가, 저금리)이후에도 자본투자가 증가했고(자본스톡 증가율의 상승) 노동자 대투쟁을 통한 임금인상의 확대로 인해 나쁘지 않는 임금분배율과 경제성장률(자본스톡증가율+자본생산성증가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투자규모에 비례해 자본생산성증가율은 정체되기 시작했고(편향적 기술진보) 97년 국가부도 사태를 기준으로 이러한 과잉투자의 조정은 앞당겨졌다. 그 과정에서 자본의 이윤회복을 위해 도입된 신축적인 노동시장을 위한 비정규직 확대와 파견법 도입 등 제도적 유연화-이원화는 후일 OECD 국가대비 기형적으로 높은 비율의 자영업자들을 양산해내기에 이르렀다. 국내외 시장경쟁의 격화와 함께 커진 기업 격차(자본집약도의 차이)에 따른 노동생산성의 격차는 고용주의 지불능력과 사업규모별 임금격차를 반영하였다.
이러한 디테일을 위시한 채 도입된 일률적으로 한 쪽으로 비용을 전가시키는 최저임금의 급진적 인상이나 일률적인 정규직화 정책은 실질적인 내실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결과적으로 경제주체들의 혼선과 혼란만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책이 워낙 방대한 까닭에 다음 장으로 넘겨 실물경제와 유리된 자산시장의 활황을 설명하기 위한 <가공자본=금융>이 갖는 개념적 측면과 함께 화폐론과 축적론을 도구삼아 정부의 재정적자와 중앙은행의 양적완화, MMT 이론과 연동된 기본소득 등에 대해 분석하고자 한다. 특히 경제주체가 기민할 수밖에 없는 향후 금융시장의 방향성에 대해서도 마르크스 이론이 갖는 합리성과 한계에 대해서도 서술해보고자 한다. 경제문제 분석은 다양한 학제 간 접근과 노력, 통찰을 요구함을 다시 한 번 절절히 느낀다.


















24Chee-Kwan Kim, 許修禎 and 22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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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吉城

능률적인 경제 발전에 따라 문화, 행복도 등의 균형의 문제도 언급되기를 다음 글에 기대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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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현

글 잘쓰시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Hyunju Pearl Kim

부전자전 글도 길고
내용도 충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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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Seok Heo
2sthuSponseSored ·



<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 그 미래성에 관하여> :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 해설(下)
* 아주 긴 글입니다.
5. 임금격차는 어떻게 줄일 수 있는가?
앞서 전편 글의 말미에 한국경제는 자본생산성의 지속적 감소와 과잉투자의 정상화에 따라 초래된 국가부도사태 이후, 기업 규모별 임금격차의 심화과정을 지적하면서 이를 고려하지 않는 임금의 일률적 인상이나 노동시장 규제는 필연적으로 자본의 반격을 야기 시킴을 지적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는 다른 정책적 방향성에 대해 한지원 선생이 책에서 내세우고 있는 해법은 다소 원론적이라 독자입장에서는 조금 아쉽운 마음이 들었다.
그간 재벌개혁이나 중소기업 지원정책 등이 진보진영에 의제로 올라오면서, 대기업 주도의 경제력 집중심화와 원·하청 불공정 거래 등으로 인한 시장경제의 불완전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저자는 사실 대부분 대-중소기업 간 발생하는 상당 수 ‘거래 관행’ 의 문제는 자본 간 격차, 즉 경쟁력 자체의 열위관계가 주 원인이라 분석한다.
높은 자본집약에 성공한 기업은 생산성 우위를 바탕으로 생산성 낮은 기업을 지휘하는 원·하청 관계가 자연스레 형성되는데 당시 경제성장이 보장된 시기인 만큼, 자본은 노동 측이 요구한 ‘한정된’ 울타리 안의 고용안정과 지속적 임금상승을 보장할 수 있었다. 각 개별기업 실력 자체는 공평한 시장경쟁의 보장을 위한 독과점 규제나 일방적 지원 등으로 길러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림 4,5,6에서 알 수 있듯이 고급 직무지식이나 자본집약도가 떨어지는 도소매·음식·숙박업 등은 저임금 노동자가 밀집해있는 분야이다. 세계적으로도 제조업에 비해 서비스업종의 자본집약도에 한국은 낮은 축에 속한다. 자본생산성의 격차는 노동생산성 격차로 이어지고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수출제조업에 집중되어 있는 노조의 치열한 임금인상 투쟁은 더욱이 내수서비스업과 제조업 간 임금격차를 더 크게 벌렸다.
이러한 점을 지적하며 대기업 노조의 투쟁으로 확립된, 연차가 쌓일수록 임금이 상승하는 ‘연공제’ 개혁에 대한 노동·사회학자들(이철승, 정승국 등)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저자가 주장하는 해법도 이 같은 맥락에 맞닿아있다. 모든 저임금 노동자의 최저임금이 1만원으로 인상되고 비정규직을 철폐하자는 주장은 늘어난 자본투자만큼 노동생산성이 오르지 않는 현대경제체제에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시장법칙에 종속적인 임금노동제의 궁극적 지양에 관한 생각만 갈릴 뿐, 노동자의 윤리와 사회적 합의에 따른 임금의 평등성과 연대성을 높이는 방향<하후상박(下厚上薄)>으로 임금격차의 점진적 축소를 제안한다.
그러나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대기업과 공공부문에서의 고용을 어떻게 극대화 할 수 있는 있는지, 고용에 친화적이며 사회전체로 합의 가능한 ‘직무급’ 등으로의 임금체계나 임금수준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혹은 연공급 축소에 따른 기존 기득권층의 반발과 그에 대한 정치적 대응은 어떤 전략으로 가져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방법론이 다소 부족하다.
한 가지 국가적 차원에서 해야 할 산업정책의 방향으로 저부가가치 서비스 영역으로의 대기업 진출을 통한 ‘규모의 경제’ 촉진전략과 사회복지 분야 등에서의 공공영역 확장 내지 ‘국영화’ 전략의 조합을 내세운 것이 저자가 언급한 유일한 정책적 차원의 언급이었다.
저자는 스웨덴 사례로 노동조합 주도의 ‘연대임금 모델’을 소개하며 한국 역시 현재 처한 경제적 환경에 적합한 연대임금, 연대고용 정책이 필요하다고 글을 맺는데 아무래도 저생산성-저임금 부분을 구조조정하고 고생산성-신산업 부문으로 인력을 숙련, 배치, 전환시키는 일련의 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최종적 경제주체는 사실 강한 ‘국가’ 이다.
하지만 다원주의적 시민사회의 저발전과 국가-사회 간의 일원적이고 수동적 관계를 탈피하지 못한 한국의 정치사회적 토양에서, 정교한 제도적 프로그램이나 사회경제적 집단의 미세이익의 조정·타협이 결여된 채 행하는 국가의 일방적 확장이 오히려 잠재적인 자본생산성의 하락을 초래할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과거에 비해 자본통제가 극히 어려운 21세기를 맞아 국가의 기능 확대 이전에 박정희 시대에서 비롯된 ‘발전국가’적 유산을 어떤 방향으로 대체할 것인지에 관한 논의가 먼저 선결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는 결국 국가와 시민 간의 관계설정에 관한 철학적 영역에서부터 시작해 국가적·사회적 차원의 행정·복지·정치적 전략 및 방법론에 이르기까지 앞으로 학제 간의 통합적 연구와 논의가 더 진행되어 풀어나가야 할 문제라고 본다.
6. 마르크스의 <화폐론>과 한국의 재정지출을 제약하는 요소에 관해서
통화주의 경제학의 대부인 밀턴 프리드먼은 ‘화폐’ 는 실제가치와 관계없는 ‘교환수단’ 에 불과하고 이에 대한 사람들의 확고한 ‘믿음’ 이 있다면 어느 것이든 화폐기능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경제 분석가들 역시 이에 근거해 교환수단으로서 화폐가 교환대상보다 그 양이 많아지면 돈의 상대가치가 하락하는 ‘인플레이션’ 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이는 <화폐수량설> 에 근거한 주장이기도 하다.
얼핏 당연해 보이는 화폐수량설의 결함 중 하나는 물가상승과 인플레이션을 구분하지 않는 점이다. 사실 이 점은 나름 부분적으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직관으로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실 지금도 이 부분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지 스스로 의구심이 든다.)
저자의 주장에 의하면 <물가상승> 은 단순히 ‘상품’의 가치가 변하면서 그것과 교환되는 화폐의 양 역시 변화하게 됨을 의미하는데, 화폐의 수량증가는 상품생산에 필요한 ‘노동 의 증가’(노동생산성↓)로 이해하면 된다. 즉, 생산에 필요한 노동의 증가가 화폐로 표현되는 것을 물가상승으로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역사상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노동생산성이 하락하는 경우는 전쟁이나 공황 등을 제외하면 극히 드물다.
반면 <인플레이션> 은 ‘화폐’ 자체의 가치변화에 의해 그것과 교환되는 화폐량의 변화를 가리킨다. 화폐가치의 하락은 ‘가치척도 기능을 하는 등가물’의 상품의 가치하락을 나타내며 화폐로 표현되는 ‘노동의 감소’(노동생산성↑)를 의미한다.
이러한 특성 탓에 인플레이션은 급격한 물가상승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로 정부의 지급능력을 기반으로 한 중앙은행 부채가치의 실질적 하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중앙은행은 적절한 화폐의 유통을 통한 경기침체(디플레이션)의 방어가 주 목적으로 하는 통화정책을 구사하기 때문에 현대경제체제에서 인플레이션은 항상 존재한다고 봐야한다.
직관적 이해를 위해 극단적인 경우를 빌려와 논의하자면,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사례로 거론하는 과거 짐바브웨나 독일 모두 내-외부적 변화로 인해 촉발된 생산체제의 붕괴로 인한 생필품 부족으로 이와 연동된 다른 상품으로까지의 급격한 ‘물가상승’ 이 일어났는데 이 물가상승에 대응해 정부는 식량 등 공공물품 조달을 위한 화폐발행이 난무하면서 화폐가치가 하락하는 ‘인플레이션’ 이 발생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과거에 비해 현대 자본주의는 단순한 돈(화폐)이 아닌 ‘부채(신용)’을 통해 조직되고 순환되는 경제체제인 만큼 금융에 대해 이론적 배경을 더 자세히 정리해보겠다.
노동가치설의 논리에 의하면 화폐의 본질은 단순한 교환수단이 아닌 강력한 발권력을 갖는 경제주체(흔히 정부)에 의해 ‘보증’된, 확고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상품에 대한 ‘보편적 등가물’(general equivalent)로 정의할 수 있다.
화폐를 발행하는데 있어 많은 노동이 필요치 않지만, 중앙은행은 자신이 보유한 자산과 강제통용권을 기반으로 국가 내에서 국채와 같이 미래에 시민들이 지출한 노동에 대한 청구권에 가격을 붙여 ‘가공(fictitious)’화된 자본의 형태로 미래노동을 앞당겨 쓸 수 있다. 이러한 메커니즘이 금융자본의 운영원리를 설명하는 핵심근원 중 하나이다.
이렇게 경제활동의 채권·채무관계가 확립되면서 ‘신용’을 바탕으로 한 가치창조가 일어난다. 가령 자금을 차입해 공장을 짓고 공장을 가동해 일자리창출과 이윤추구가 이루어져 빚을 갚는 것이 사회적으로 모두 이득인데 이러한 신용관계에서는 빚을 최종적으로 청산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바로 화폐이다.
화폐는 기본적으로 앞서 언급했듯 보편적 등가물이기 때문에, 빚을 청산하지 않고 다른 빚으로 대체해 나가며 지불시기를 늦출 수 있겠지만 이러한 사슬이 영원히 이어질 수는 없다. 근본적으로 신용과 화폐는 구분되기 때문에 경제위기시에는 모두가 지불수단으로서 화폐를 찾는다. 즉 화폐가 채권과 채무관계를 청산하지 못하면 채권, 채무자가 줄줄이 파산하는 부도의 사슬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가공자본 특성 상, 미래에 대한 경제주체들의 기대로부터 말미암아 시장에서 화폐로 표현되는 노동의 가치는 크게 널뛰기할 수 있다. 즉, 가공자본을 자산으로 발행되는 현대화폐는 필연적으로 그 시간이나 기대의 크기에 제한이 없을뿐더러 근본적인 불안정성을 띄고 있는 것이 주요 특징이다.
특히 미국 주도로 달러가 세계화폐로서 기능하고 있는 시기에 한국은행의 주요 자산의 90퍼센트가 국외자산으로 달러로 표시된 금융상품이다. 여기서 무제한적 양적완화와 재정확대를 주장하는 MMT이론의 전제, ‘화폐의 가치는 정부의 지불능력’ 이라는 주장은 한국의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한국의 화폐는 미국 시민의 노동을 기반으로 발행되고 있기 때문에 화폐가치 역시 수출대기업의 국제경쟁력에 의존하고 있으며 동시에 미국의 경기변동에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전히 97년 IMF 체제관리 이후, 한국 주식 및 채권시장에서 한국의 원화가 갖는 지위는 ‘위험자산’ 에 가깝기 때문에 우리나라 정부가 자국 화폐가치를 토대로 한 자국의 국채를 자산으로서 보유 및 지지하지 못한다. 이는 정부의 지불능력에 대한 신뢰가 아직 상대적이지만 국제적으로 낮은 편에 속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러다보니 자국의 신뢰를 바탕으로 기축통화로 자국화폐를 사용할 수 있었던 미국이나 일본, 일부 유로국가를 제외하면 한국처럼 무역비중이 높고 화폐가치의 변동성에 취약한 국가들(스웨덴, 호주, 대만 등)은 국가채무 비율에 민감히 반응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물론 2020년과 같이 바이러스 충격 등으로 인한 경제봉쇄로 야기된 심각한 불황 등 위기의 상흔이 완전히 치유되지 않는 현실에서 불평등과 잠재성장률의 촉진을 위해 정부주도의 낮은 금리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국채매입 등의 통화정책과 총수요 확대를 위한 적극적인 재정정책의 조기추진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진보적 경제학자들(이강국, 홍장표 등)의 주장도 존재한 만큼, 앞으로의 글로벌 금융시장의 전망과 맞물린 재정확대에 대한 논쟁은 어떠한 결론으로 귀결될지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저자가 소개한 마르크스의 경제학의 금융이론에 따르면, 재정확대의 선결조건으로 장기 저성장을 유지하는 저인플레-저금리 상황이 (뒷부분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예정이지만) 언제까지 유지될 것일지 먼저 짚어봐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천문학적인 정부부채와 달리 60프로에 머무르는 일본의 가계부채에 비해 한국의 가계부채는 GDP 대비 100프로, 선진국 중 최고수준에 달한다. 향후 일본보다도 빠르게 진행되는 고령화에 대응하기 위해 늘어나는 사회복지 중장기적 지출 등을 감안한다면 민간저축을 기반으로 정부가 국채를 더 많이 발행해 채무를 늘리는 선택지에도 세대 간 세(稅)부담 등을 둘러싼 갈등 내지 위험성의 잠재성이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국제금융 시장에서 갖는 한국화폐의 신용도 상, 은행이 양적완화와 같은 방법으로 국채를 사 모은 것도 모험에 가깝다. 여러 논의가 진행 중이지만 아직 한국의 대내외적 경제 환경(금리, 환율 등)을 고려한, 국가 채무비율을 어느 선까지 지탱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예측하거나 기준을 세우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은 국가부채의 증가는 궁극적으로 가계부채와 기업부채 문제가 야기 시킬 수 있는 경제위기에 대한 정부의 대응역량을 훼손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확장 재정으로 미래성장률을 끌어올리는 해법은 일시적일지언정, 전편에 언급하듯이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속성에 기인한 현실 문제의 궁극적인 해법이 되지 못한다. 또한 부채 지불의 사슬(잠재적 위험)을 미래세대로 전가되는 측면에서 윤리적으로도 타당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7. 글로벌 금융시장 이슈, 인플레이션과 금리인상의 전망
앞서 살짝 언급했지만 현재 학계나 경제기관 등 세계 금융시장의 동향과 전망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이들의 논의를 먼저 이해하기 위해 먼저 미국경제가 갖고 있는 금융화의 특성과 달러화의 패권이 확립되어가는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미국경제는 1971년 이후 근 50년간 대부분의 시기를 재정적자로 버텼다. 재정적자로 인한 GDP 대비 정부 채무도 꾸준히 향상되어 2007년 말 60%대에서 2019년 말 100%대로 상승했는데, 코로나19 위기 이후에는 130%대에 이른다.
더불어 2008년 초 1조 달러 수준이던 연준 자산 역시 금융위기 이후 2015년 4.5조 달러, 코로나19 이후 2020년 말 7조 달러 수준으로 팽창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빚이 늘어난 만큼 미국이나 세계의 경제 규모가 커진 것도 아닌 점이다.
그러나 지속해서 증가하는 재정적자와 국가채무는 미국정부의 지불능력을 위협해 화폐가치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는 세계 각국이 달러를 비축하는 것이 금융시장의 불안과 위기로부터 자국을 지키는 길이라는 인식이 공통으로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세계금융시장을 지배하는 제이피모건, 골드만삭스, 시티, 모건스탠리 등의 미국의 대형은행들을 통해 거래되는 자본과 금융자산 규모는 미국주도 금융세계화의 파워를 상징하며 2000년대 들어서 가파르게 증가한 무역적자, 세계 군비의 절반을 단독으로 지출하며 갖춰진 수준 높은 첨단무기 등의 군사화 전략은 과거서부터 현재까지 달러화의 가치를 보장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 금융시장이 팽창한 데는 미국과 유럽의 금융기관들이 주도한 ‘증권화(securitization)'에 있다. 대출자금 조성을 위해 주택담보증서를 다시 담보로 잡아 시장에 판매하는 ‘모기지증권’ 등의 연쇄적 파생상품의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신용이 팽창하며 부동산 시장 등 자산가격을 끌어올리는 거품이 형성된 것이다. 그 끝은 모두가 아는 2008년 금융위기이다.
그러나 미국 연방 준비은행(Fed)의 양적완화 정책 덕에 금융위기가 더 큰 불황으로 번지지 않았다. 모기지 증권의 가격폭락으로 인한 채무청산 과정에서 나타난 화폐 기근 현상을 방지하고 민간은행의 파산을 막고자 2008년부터 2012년에 이르기까지 추가적으로 화폐를 발행해 2조 달러가량의 부실채권을 연준이 사들인 까닭이다.
단, 연준의 자산매입 정책이 즉각적으로 시장에 현금을 푼 효과를 갖지 못했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은행은 연준이 지급한 본원통화를 유통 및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해 ‘법정지급준비금’ 이외에 엄청난 양의 현금을 ‘초과지급준비금’으로 다시 연준으로 예금했다. 결과적으로 은행파산을 막기 위한 자산구성의 대체에 그쳤기에 정부의 기대에 부합하는 인플레이션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표4)
대신 금융위기 이후 여러 차례 걸친 양적완화로 촉발된 엄청난 유동성의 공급 대부분은 주식이나 부동산 등 자산시장으로 흘러갔다. 이에 시장의 과열양상을 진정시키고자 2014년 하반기에 미국 연준이 본격적으로 금리인상 등의 출구정책을 의제에 올리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연준의 금리인상 사이클을 보면, 과거 한 번 금리인상을 단행하면 여러 차례 무서운 속도로 인상한 패턴을 갖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를 본능으로 직감한 시장참여자들이 느끼는 지불사슬의 부담감은 상당했다. <그래프 49, 책 『환율과 금리로 보는 앞으로 3년 경제전쟁의 미래, 저자 오건영』 참조>
연준의 기대와 달리 금융시장의 극단적인 조정 국면과 함께 나타난 <달러화 강세 → 수입 물가 및 국제 유가의 하락 → 중국과 산유국 등 신흥국의 부채 부담 증가 혹은 자본유출 → 미국 수출 및 내수소비의 정체 발생> 의 패턴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국내외 실물경제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국내를 포함한 세계 각국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에 금융시장의 정상화를 위한 긴축을 쉽사리 단행할 수 없었고 코로나19 위기에 이르기까지 번번이 실패했다.
원론적으로 연준이 결국 국채보다 가공성이 더 큰 모기지 증권의 채무 해소를 하지 못한 상태를 유지하게 되므로 화폐 불안정성은 더 크게 키우는 셈이 된 것이다. 또한 보편적 등가물로서 화폐의 최종기반인 노동을 위시한 채 커진 화폐량의 규모를 감안해보면, 달러가치가 보장된 조건에서의 변화가 찾아올 시 추후 화폐가치의 폭락을 초래할 위험성도 제기된다.
저자는 궁극적으로 인플레이션 발생은 은행의 대출증가에 따른 시장에 유통되는 통화증가 속도의 증가(통화승수의 상승)여부와 최종 대부자인 ‘정부’의 지불능력에 대한 신뢰의 지속가능성에 달려있음을 주장하며 경제활동의 정상화가 찾아올 것으로 예고한 올 하반기에는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질 것이란 예측을 내놓는다. (물론 다수의 이코노미스트 등의 전망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측면이 있지만 기본적인 앵글이 다르기에 이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다.)
번외이지만 앞서 길게 설명한 마르크스적 관점뿐만 아니라 논거와 팩트 중심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일관된 논리체계와 분석도구를 사용해 자본주의 30년 장기동향을 다룬 런던 정경대 교수 찰스 굿하트의 인플레이션 전망 역시 짐짓 흥미롭다. 책 『인구 대역전』 중 ‘생산가능인구와 피부양자의 인구구조’ 변화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고금리 시대를 전망하는 방법론의 측면은 가히 신선하고 ‘혁명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미래 저출산·고령화가 고착화된다는 가정 하에 전 세계의 생산가능인구의 ‘노동자’ 보다 피부양자의 ‘고령자’ 가 많아지게 된다면, 생애주기 사이클 상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 세대의 저축은 줄어들지만 수요를 담당하는 고령자의 소비는 증가하는 추세로 전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장기적으로 저축의 감소(투자↑)는 고금리를, 소비의 증가는 인플레이션을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 핵심논지이다.
하지만 바로 이웃나라에서 알 수 있듯이, 굿하트 교수가 언급한 전형적인 인구구조의 변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일본’ 경제를 두고 앞으로 고금리와 인플레이션의 가능성을 논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일 듯싶다.
기본적으로 아직 고령자가 취업전선에 뛰어들고 있으며, 청년세대의 완전고용이 이루어져도 과거 20년 동안 임금인상의 폭이나 추이는 정체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 결합된 경제성장 종착지인 경제체제의 필연적 결과로서의 ‘작동중지’ 로 다가서는 자본순환의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한 까닭에 발생한 오류이다.
과연 앞으로 세계 금융시장의 동향은 어떠한 방향으로 움직일까? 현재 나타나는 물가상승 지표는 단기적이고 일시적 물가상승에 그칠까? 구조적 인플레이션 서막의 시작일까?
8. 부동산 문제를 바라보는 마르크스적 입장 정리
기본적으로 부동산 문제를 바라봄에 앞서 마르크스주의 입장의 설명은 명료하다. 마르크스주의 연구자이신 손민석 선생이 말했듯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내 모두가 집주인이 되려는 욕망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 이유 중 도시라는 공간은 자본의 흐름 속 생성-발전-소멸을 거듭하기 때문에 국가가 이러한 자본의 흐름에 개입 및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본의 흐름을 잘 좇아 개인들이 주택마련에 들이는 비용을 낮추고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국가가 보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일반적으로 경제와 인구가 팽창하는 시기에는 도시화와 자본집약이 진행되며 도시로의 인구이동이 일어나기 때문에 대도시의 토지가격은 빠르게 상승한다. 하지만 반대로 경제와 인구가 감소할 때도 토지가격이 상승할 수 있다.
예컨대 호황시기 자본이 ‘집적(conccentration)’되는 양상이 불황기에는 ‘집중(concentralization)’ 으로 이동함에 따라 미래 전망이 좋다고 판단되는 도시로의 자본과 인구가 흡수되어 관련 토지가격이 상승한다. 이런 식으로 한국은 서울이 초집중화 되는 반면 지방은 서서히 몰락하는 것이 도시 생성과 소멸의 메커니즘인데 국가는 이 흐름을 지연시키거나 가속화시킬 뿐 문제해결의 주체가 되기는 상당히 어렵다.
토지가격은 현재가 아닌 미래 수요공급에 대한 기대, 청구권(임대료, 이자, 배당 등)을 기준으로 형성된다는 측면에서 가공적인 성격을 갖는다. 특히나 토지는 생산이 불가능해 현재나 미래에 대한 공급이 제한된 반면(공급의 비탄력성), 가격에 대한 기대는 무제한이므로 수요 측 요인에 상당히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정부의 주택시장 개입이 자칫 균형가격을 무너뜨릴 정도로 주택수요자와 공급자의 심리적 위축이나 왜곡을 초래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결국 가공자본의 확대와 미래 수입에 대한 청구권 가격의 끊임없는 변동은 근본적인 자본주의 소유법칙에서 파생되는데 이를 철폐하지 않는 한, 유동성 과잉공급 시대에 공공주도 주택공급이나 세금부과 및 대출규제 등 수요억제 정책 등도 일시적일 뿐 궁극적인 주거문제의 대책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 과정서 발생하는 문정부의 어정쩡한 정책은 집값 상승 및 경제주체들 간의 비용전가만 초래했다.
9. 자본주의의 혁신인가 변혁인가
이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한국경제와 세계정세를 조망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오늘날 한국을 포함한 세계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윤소영의 ‘S’자 궤도(그림16, 로지스틱 곡선)에서 볼 수 있듯이 편향적 기술진보로 인한 이윤율 하락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윤율 위기 속 경제성장은 일시적일뿐 하락추세인 자본생산성을 반등시킬 수 있는 자본 측의 혁명이 나오지 않는 한 국민경제의 정체 및 축소 단계에 이를 수밖에 없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이러한 자본순환의 메커니즘 위기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그림 17에서 도식화하듯이 상품화폐 경제에서는 필요에 따른 생산조직이 아닌 화폐→화폐로 자본이 순환하며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원리를 바탕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코로나 방역으로 인해 경제의 불안정성이 커지자 화폐-생산-상품으로 이어지는 자본순환의 흐름이 폐쇄되기 시작했다. 그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각국 정부는 팔 걷고 나서 통화와 재정정책의 조합으로 유동성 공급에 매진했지만, 이는 금융경제와 실물경제의 괴리만 심화시켰다.
자본축적이 이루어지지만 이윤율이 하락되어 생산에 이용되지 못한 과잉자본과 과잉인구는 자본주의적 내적 모순의 집합체이다. 과잉자본은 금융화를 통해 경제의 예측가능성을 떨어트리고 혼란을 가중시킨다면, 과잉인구는 “상대적 빈곤과 노동의 고통, 무지, 포악 도덕적 타락”을 심화시킨다.
이미 한국은 심화된 자산불평등과 함께 2016년 촛불시위가 그 전조의 본격적 시작으로 서막을 올렸고, 문재인 정부 들어서 팬덤 및 혐오정치, 반(反)자유주의적 포퓰리즘의 심화로 귀결되고 있다.
현재까지는 어느 정치·사회세력도 이 같은 체제의 위기를 제어하고 대응할만한,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현실과 유리된 진보-보수 간 대립과 투쟁의 언어는 ‘갈등의 사회화’를 통한 정치적 이익 합의의 도달은 고사하고 적대적 분노의 상호 분출로 귀결되고 있다. 오늘날 세대교체와 청년정치 등의 레토릭과 슬로건도 정확히 언표화되지도, 이념과 가치적으로도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명확히 정의되지 않은 채, 성별·계층·세대 간 불안-분노-냉소의 감정은 해소되지 않은 채 잔존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구체제를 뒤로 할 새로운 형태의 대안적 생산 및 소비 양식으로 등장한 20세기 사회주의는 실패로 끝났다. 사회주의는 사회적 분업에 참여하는 개인의 인격과 노동능력을 극대화시킬 만한 동기나 유인을 설계할 제도적 측면이나 문화적 규범을 창출하지 못하였다.
또한 계급을 지양하는 것이 아닌 공산당 등의 계급을 ‘대체’ 하는 독점적 경제체제를 유지하였는데 그 운영으로부터 발생하는 비효율성과 부패 등은 체제몰락을 앞당겼다. 개인을 완성하는 사회가 아닌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로의 타락만을 보여주었다.
결국 대안적 생산 및 소비체제의 설계 및 준비를 위해 먼저 해결해야 할 선결조건으로 첫째, 시장의 결함과 한계를 어떻게 보완하고 효율적 자원배분과 공정한 결과분배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둘째, 개인의 자유로운 공동체로서 계급 사회를 어떻게 지향하고 사적소유라는 유인이 없어도 지적·물리적 생산력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셋째, 시민이 생산의 전 과정에서 소외되지 않은 채, 어떻게 노동과정과 분배를 조직하는 경영자적 기능을 수행할 주체와 역량을 길러낼 것인가? 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한 해답은 미래세대를 짊어질 시민들 자신들의 몫이 될 것이다.
10. 에필로그 - 일본의 사례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다만 나의 관점에서 하나 결곡한 제언을 간단히 드릴까 한다. 책에서 언급했듯이 『자본』에서 상품화폐를 지양한 경제를 연합적(association) 생산양식으로 설정한다. 생산과 분배과정에서의 노동자들이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경영조직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적 과정을 강조하는 말이다.
최근에 우연히 알게 된 드라마 중 일본의 『육왕陸王』의 일부분을 보면서 느꼈던 점은 한국과 달리 생산과 분배를 담당하는 ‘기업’ 이라는 사적조직을 바라보는 한 차원 더 높은 수준의 사회적 시선이었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기업가를 모토로 다루는 영화나 문화가 한국보다 많이 나오는데 기본적으로 가업을 소중히 여기며 대대로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문화가 있어 그런 듯하다.
비록 규모가 영세한 중소기업이며 매출 및 수익이 떨어져 은행 등으로부터의 자금융통에 어려움을 겪는 시기임에도 회사를 이끄는 경영자와 종업원들 간의 상호 신뢰도 및 주인의식은 여전히 끈끈하다. 스스로 생산과 분배를 담당하는 주체로서 종업원들은 결코 소외되지 않는 모습이다. 또한 조직의 번영과 유지를 위한 책임의식을 경영자뿐만 아니라 조직의 종업원 역시 마찬가지로 공유한다. 그렇게 어려운 시기임에도 정도(正道)를 걸으며 기능 좋은 상품을 만들어 시장에서 인정받은 끝에 대박을 터트려 무너져가는 기업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뻔한’ 스토리다.
하지만 한국의 그 어느 드라마 중 이러한 기업과 종업원의 연합적 관계를 묘사한 작품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내 입장에서 신선한 충격이었다.
저자의 말대로 ‘일본형’ 자본주의가 장기침체의 연속선상인 자본주의의 작동중지 상태에서 선진국이 도달할 최선의 경제체제일지 모른다면 이 같은 기업인과 종업원 간의 관계와 규범, 문화적 측면은 체제 위기를 극복하지는 못할지언정, 위기를 공동체적 조화로 위기를 제어하고 개인의 행복을 함께 지켜줄 수 있는 하나의 일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이에 대한 고민은 다음 글에 적어두기로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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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Chee-Kwan Kim, 許修禎 and 7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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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ghyeon Lee

아울러, 왜 직접적인 생산노동만이 가치를 창조하느냐고 보는가에 대해서는 맑스가 명확하게 말은 안 하고 있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거는 조금 거칠게 보면, 이렇게 설명해볼 수 있습니다. "노동 안 하면 물건이 만들어지니? 먹고 살 소비재/생산재가 나와?" 조금 더 정교하게 보자면, 자연물을 실제로 변형해서 자기가 쓰게 만드는 것은 인간이고 그 인간이 자연물을 변형하는 근원은 노동이라는 점이라는 시각에서 나옵니다. 근대적인 인본주의 시각이라고 볼 수도 있고,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라고 비판하는 견해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원료나 기계는 어떻게 되는가? 일단은 원료 자체는 가만히 있으면 아무 변화도 없기 때문에 가치를 창조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고요, 기계의 경우 동력이 있으면 자기가 스스로 작동한다는 점에서는 일반 원료와 다르지만 결국 그 기계는 인간의 노동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가치를 스스로 창조했다고 보아야하느냐 이런 문제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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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ghyeon Lee

음... 평 써주신 것에만 비추어보면 책은 일단 전통적인 정치경제학에서의 상품화폐 내지 상품화폐와의 태환가능성이 보장된 태환화폐와 불환화폐를 명확하게 구별하고 있지 않아서 혼동을 일으킬 우려가 있어보입니다. 맑스의 얘기는 상품화폐 내지 태환성이 보장되는 태환화폐에서는 교환의 일반적 등가물(그리고 이것은 상품)으로서의 화폐의 사회적 재생산에 필요한 필요노동시간(예컨대 금화라면 금을 캐서 주조하는데 드는 사회적필요노동시간)이 변동하지 않는 한, 보편적인 인플레이션은 없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교환에 필요한 것을 초과하는 화폐는 축장되거나 그에 부족한 화폐는 축장되었던 것에서 꺼내져 나온다는 것이지요.
반면에 불환화폐의 경우 발권력에 의존하는 것이고, 따라서 상시적인 보편적인 인플레이션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맑스도 얘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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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YoonSeok Heo

이동현 아하 태환화폐와 불환화폐의 구분하는 개념적 설명이 필요하군요. 이에 대해 착종의 여지가 있을수도 있겠군요.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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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ghyeon Lee

그래서 화폐수량설이 적어도 불환화폐에서는 어느 정도 들어맞는다고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경제원론 수준에서의 화폐수량설의 문제는, 이걸 화폐의 종류에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본다는 점에 있죠. 좀 나쁘게 말하면 몰역사적 관점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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