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7

YoonSeok Heo 근대 일본과 유학의 역할 -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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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Seok H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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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과 유학의 역할 -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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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제각각 다르겠지만, 나는 인문학을 포함해 사회과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세상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그에 관한 법칙이나 흐름을 독해하고 미래사회상의 변화를 대비하기 위함에 가장 큰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학은 정말 다양한 분과과목이 있다. 그 만큼 세상은 넓고, 깊고, 다양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통섭할 지식과 지적역량을 기른다는 것을 역사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도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이 명명하듯이, 기존의 지식체계를 뒤흔들만한 새로운 사료를 바탕으로 하는 연구에 의해 한 시대를 풍미하던 세계관과 지식의 ‘패러다임’ 교체(과학혁명)가 자주 이루어지는 현대는 더 그러하다.
역사학도 마찬가지다. 특히 요새같이 ‘포스트 코로나’, ‘4차 산업혁명’ 등의 선진미래를 전제로 선전되는 구호를 논한다는 것은 앞으로 현대 인류가 누려왔던 기존의 자본주의적 생산-소비 양식의 변화방향을 예측하고 개인은 이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새로운 역사적 분기점이 머지않아 닥쳐올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양사에서 주지하는 ‘early modern'에서 ’modern' 으로의 변천, 동양사에서 주지하는 ‘근세’ 에서의 ‘근대’ 로의 이행과정에서 어떠한 <근대적> 요소들이 서로 반응, 수용, 길항, 변용 되었는지 조명하며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에 관련하여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박훈 교수의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는 일본의 대표적 사회변혁이었던 ‘메이지 유신’ 을 주제로, 주로 정치사적인 관점에서 ‘근대’ 의 의미를 서구의 역사적 경험에 입각해 바라보는 것을 지양하는 대신, 서구의 학문적 개념의 ‘묽은(thin)' 차용을 통한 일본 내지 동아시아의 역사적 경험을 포괄한 그 실태를 한층 구체화, 진전시켰다는 점에서 굉장한 수작이라고 느꼈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을 한 층 높이고 싶은 사람이나, 일본에 대해 공부하고 알고 싶어 하는 사람 모두에게 강추하고 싶은 책이다.
박 교수는 책의 메인 주제인 메이지유신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상식으로 도쿠가와 체제, 에도 막부에 대해서도 전반부에 나름 알기 쉽게 풀어썼다.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2604453273145418&id=100007423117391 내가 개인적으로 일본의 근대화를 조망하며 쓴 글에서도 지적했지만 일본 에도막부는 거대한 토목공사와 함께 발달한 관개시설 등으로 인한 농업생산량의 증가, 막대한 은(銀) 생산량을 바탕으로 한 국제무역의 전개, 병농(兵農)분리와 조카마치(城下町) 설립에 의한 높은 도시인구 비중과 도시화 비율 등의 경제력이 바탕이 되 있었다. 즉, 사실상의 메이지 유신은 막부의 유산과의 단절을 꾀한 ‘혁명’ 의 성격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물론 박 교수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경제사 관점에서의 에도막부가 아니다. 일본은 서양의 외압에 위기의식이 싹 트인 사건으로 평가받았을 시기가 18세기 일본 에조치(蝦夷地), 지금의 사할린과 훗카이도 일대에 러시아인들이 출몰했을 때다. 객관적으로 당시 서구 열강의 침략의 기색이나 조짐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를 계기로 수많은 일본의 지식인들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서양의 침략을 필요이상으로 우려했고 이에 관한 과민한 위기의식을 보였다. 이러한 위기감은 이후 19세기 적극적인 체제변혁을 꾀함에 있어 움직이는 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각심의 부재는 최근 일본이 바이러스 방역을 포함한 정치경제에 있어 기대에 못 미치거나 과거 경제력에 비해 퇴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는 점을 반추해보면 충분히 수긍이 간다.
사실 에도 막부가 중국이나 조선의 앙시앵 레짐(구체제)와 비교했을 때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 중 하나가 꼭 높은 경제력이나 선진적인 정치제도인 것은 아니다. 지배 계급(무사)은 아편전쟁 이후 30년이 가까운 기간 동안 덴포개혁(天保改革) 등 서양의 제도도입을 통한 자기 혁신을 추진했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반대세력에 대항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보유함에도 불구, 이에 대한 해체를 용인하여 내란 등의 정치적 부담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 그러하다.
어떻게 아무런 물리적 저항 없이 지배계급의 기득권 포기가 가능했던 것일까? 박훈 교수는 이에 대한 해답으로 중국과 조선을 포함한 아시아에서의 주류적 학문사조였던 ‘유학’적 공론(公論)정치의 확산과 일본적 변용을 제시한다. 지금까지도 일본사나 동아시아 역사를 공부했던 사람조차 일본이 근대화를 상대적으로 조선과 중국에 비해 빠르게 쟁취할 수 있는 요인으로 유학 등의 전근대적 요인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서구 열강의 국가 모델수용이 용이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19세기는 일본 역사상 유학, 그 중에서도 주자학이 가장 번성한 시대이기도 하였다.
유신 이전, 17~18세기 도쿠가와 체제는 초기 유학을 장려했지만 그 중요도나 영향력은 매우 미미했다. 원래 막부는 병영(兵營)국가적 봉건체제를 기본성격으로 삼고 있었기에 일본 지배계급인 무사(사무라이)들은 무예연마에 힘썼지 상대적으로 정치나, 문예(文藝) 등에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실제로 중앙 막부의 쇼군(將軍)들은 직접 행정이나 정치를 담당하는 대신 그 하급가신인 로쥬(老中) 등이 막정을 총괄하고 지방의 다이묘들을 관리-감시하는 역할을 하였고 국사 역시 막부 치하의 소수의 관료들이 주도하여 정국을 이끌었다.
이 시기 조선은 오히려 유학적 공론정치가 꽃을 피운 시기이다. 흔히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예송논쟁’ 도 유학적 공론정치의 한 갈래이다. 전국적으로 펼쳐져 있는 당파, 학파를 바탕으로 서원, 항교 등을 통해 중앙정치에 사대부들이 스스럼없는 정치적 발언이 가능했다. 전국에서 올라오는 상소를 통한 왕과 정부에 대한 비판과 견제기능이 작용한 것이었다.
이 같은 공론정치가 조선은 19세기 소수가문에 의한 세도정치와 대원군의 서원철폐 등을 말미암아 쇠락하게 되었다면 반대로 일본은 무사들이 유학경전을 공부하고 학교에 다니며 점점 국가 대사에 관심을 갖고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박훈 교수는 이를 ‘사(士)대부적 정치문화’ 라고 명명한다. 이 사대부적 정치문화가 바로 병영국가 도쿠카와 체제를 동요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막말 건재한 물리적 군사력을 갖고 있음에도 막부의 권한포기를 종용한 것은 사무라이들의 의식개혁과 함께 서서히 진행되어온 막부의 정치적 리더십의 쇠락이었다. 조선은 반대로 상서, 붕당정치, 당쟁 등의 사대부적 정치문화가 크게 위축된 시기에 쇠퇴했다.
다만, 조선의 유학적 공론정치를 주도한 사대부를 일본의 ‘공부하는’ 사무라이와 동일시하는 것은 자칫 근대화를 이끄는 역사적 요인을 향한 오독을 초래할 수 있다. 박훈 교수가 지적하듯이 조선은 학파를 중심으로 공론장을 이끌었다면 일본의 공론정치는 ‘학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전개되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조선의 학파는 정연한 이론체계와 더불어 누대에 걸쳐 확립된 학문체계에 따른 상호배타성이 강한 반면, 일본의 학적 네트워크는 이론체계에 따른 구별도 약했고 누대에 걸친 계보도 없었으며 상호 중복적이며 유연했기 때문에 상호 배타적이지 않았다. 이것이 조선의 당쟁이 환국정치와 같은 상대를 파멸시키는 파국으로 치닫지 않게 한 결정적 요인이라고 박훈 교수는 분석한다. 서구의 의회제도나 민주주의를 ‘기능적 등가물’ 로서의 유학적 공론화로 치환시켜서 비교사적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도 동-서양 문명을 더 잘 이해하는데 있어 의미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 우리가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서 배워야 하는 점은 무엇일까? 일본의 유학화는 정치사상적으로 도쿠가와 체제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 직후 정점을 찍었지만 1871년 폐번치현(廢藩置縣) 이후, 일본은 급격히 서구화와 문명개화, 부국강병 노선으로 치달았으면서 유학화도 점차 사그라진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사대부적 정치문화와 유학적 정치사상이 서구화의 가교(假橋)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이었다. 중국과 조선은 체제 이데올로기로서 유학이 내재화-신념화되어 있었기에 서구화에 있어 방해가 되었던 한편, 일본은 도구적 수단으로서 유학이 작용했다는 점이 메이지 유신의 성공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세상을 바라보기에 앞서, 신념으로서의 ‘목적론적’ 관점을 가진다는 점은 과거를 입체적으로 분석하고 미래를 구체화시키는데 있어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예컨대 역사학자 김용섭 선생은 한국사에서 ‘경영형 부농’ 등 자생적인 근대화 발생요인을 찾기 위한 연구에 온 힘을 다했는데, 이는 지금도 여전히 역사학계에서 논쟁과 비판의 이슈 중 하나이다. 일본에서는 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가 도쿠가와 시대의 유학자 오규 소라이에게서 ‘사상의 작위(作爲)’ 라는 근대성을 찾아내어 주자학을 서구화와 거리가 먼 기성질서의 옹호사상으로 일축시켜 더 이상의 학문적 탐구를 무색하게 하였다.
최근 바이러스 방역을 둘러싼 서구의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현상(現象)을 보면 꼭 서양의 모델이 아시아가 좇아야 할 이상향으로 바라볼 이유가 없고, 자신들의 역사적 유산이 꼭 후진적인 것으로만 치부할 필요가 없음을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서구의 발전모델이나 학문적 개념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아시아 각 나라들이 내재하고 있는 역사적 경험에 입각하여 추출된 개념 모델을 바탕으로 근대를 총체적으로 비교-분석하며 이해하고 미래를 그리는 것이 후속 학자들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이를 위해 전제되어야 할 연구자의 태도는 메이지 유신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신념과 목적을 배제한, <유연함>과 <개방성> 그리고 변화를 미리 감지할 수 있는 <민감함> 이다.











15Chee-Kwan Kim, 許修禎 and 13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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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e-Kwan Kim

저는 역사상 혁명 주도세력이 혁명완수후 스스로 자멸해버린 경우를 명치유신 이외에 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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