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4

[자료분석] ‘정의기억연대사태’ 예견한 여성학자의 논문 : 월간조선

[자료분석] ‘정의기억연대사태’ 예견한 여성학자의 논문 : 월간조선


자료분석
‘정의기억연대사태’ 예견한 여성학자의 논문
“정대협의 ‘對日투쟁’ 과정에서 ‘주변인’ 된 ‘위안부 피해자’들”


글 :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소녀가 관헌에 끌려가 하루 수십 번 폭행당했다”는 전형적인 각본은 다양한 경험의 당사자들에게 또 다른 억압과 피해를 경험하게 할 수도 있다. …사회의 기대에 맞게 자신의 경험을 재구성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의 경험은 전형적인 상과 달리 매우 다양하다.”(김정란 박사 논문 中)

활동가와 일부 피해자 간의 이런 대응의 차이에는 계급적 차이가 놓여 있다. 높은 교육 수준을 갖춘 지식인 활동가들은 오랜 세월 빈곤한 삶을 영위해온 생존자들의 삶과는 너무나 다른 계급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 “정의연에 30년간 속을 만큼 속았고 이용당할 만큼 당했다”는 이용수
⊙ 위안부 문제에는 분노하지만, 피해자의 ‘고통’과 ‘늙고 병든 삶’에는 무관심한 세태
⊙ ‘강제로 일본군에 끌려간 순결한 조선의 딸’로 정형화된 ‘일본군 위안부像’
⊙ “할매들은 다 죽어가잖아… 주면 주는 대로 타 먹게 내버려둬야지!”(위안부 피해자 석복순)
⊙ “기금=부당한 돈… 피해자에게 ‘거부’만 허용한 정대협”
⊙ “피해자에게 전쟁범죄 희생자란 숭고한 지위 혹은 불쌍한 노인 중 양자택일 ‘부탁’한 정대협”
⊙ “정대협, 기금 수령하면 ‘위안부 운동’ 파국 맞을 것이라는 위기감 때문에 반대”
⊙ “정대협, 자신들의 ‘원칙’ 외에 모든 해결 노력을 ‘졸속 타협’으로 간주”
⊙ “‘민족’과 ‘역사’라는 거대담론 앞에서 피해자 존재는 비가시화”

사진=뉴시스
그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단체’를 자처해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연)’가 ‘회계 부정 의혹’ 등 각종 논란에 휩싸였다. 이는 정의연과 지난 30여 년 동안 함께 활동해온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씨의 기자회견에서 비롯됐다.

이씨는 지난 5월 7일, “정의연이 그간 많은 기부금을 받았으면서도 위안부 피해자를 위해 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정의연의 ‘위안부 관련 활동’에 대해서는 “30년간 속을 만큼 속았고 이용당할 만큼 당했다”고 비판하면서 앞으로는 ‘수요집회’에 불참하겠다고 밝혔다.

이씨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때 10억 엔이 일본에서 들어오는데 윤미향만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사자인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지적인 셈이다. 또 정의연 활동을 발판으로 국회 입성에 성공한 윤미향 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 당선인을 향해 “자기 사욕 차리려고 위안부 문제 해결하지 않고 국회의원 한다”고 꼬집었다.

해당 논란의 ‘본질’은 정의연이 그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사실상 ‘독점’하고 정부와 국민 여론을 좌지우지하며 일종의 정치·사회적 권력이 됐고, 그 과정에서 경제적 이득도 취했다고 의심받는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 ‘운동’의 진정성에 대해 당사자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이의를 제기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위안부 피해자는 정의연을 ‘위안부 피해자 지원 단체’라고 여겼는데 정의연은 그렇지 않았다는 데 있다. 또 정의연이 지난 30년 동안 ‘위안부 문제’ 관련 활동을 하면서 조직이 성장하고, 그 관계자들이 정치권에 진출하는 등 ‘입신’한 반면, 위안부 피해자들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소멸’해가는 상황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대협 투쟁 논리에 피해자들이 따라야 하는 ‘주객전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씨는 지난 5월 7일,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와 관련한 각종 의혹을 제기했다. 사진=뉴시스


지금과 같은 논란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고’됐다. 정의연의 전신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의 운동 방식은 피해자를 앞세우면서도 그들의 목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들의 의견을 주입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같은 정대협 활동의 ‘한계’와 ‘문제점’에 대해 분석한 게 바로 2004년 7월, 여성학자 김정란씨가 박사 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전개와 문제인식에 대한 연구: 정대협의 활동을 중심으로〉이다. 논문 내용에 따르면 김 박사는 연구 시작 이후 수요집회에 참석하고, 생존 피해자와 활동가를 면담했다. 위안부 관련 단체 실무자들과 친분을 쌓았고, 그 과정에서 여러 활동가의 생생한 경험과 고충을 들을 수 있었다. 정대협 등 단체 주관 각종 행사에도 참여했다.

해당 논문에서 김 박사는 “정대협은 운동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희생’을 강요했고, 자신들이 제시한 ‘정답’을 거절한 피해자들을 배제했고, 피해자들을 ‘주변화’하면서 그들을 운동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비판했다. 한마디로 ‘주객’이 ‘전도’돼 정대협의 투쟁 논리에 피해자들이 끌려가는 식이 됐다는 지적이다. 이 같은 문제들이 쌓이고 쌓여서 이제는 위안부 피해자는 참석하지 않는 ‘그들만의 수요집회’가 개최되고 있다. 이에 과연 정의연 또는 정대협 운동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위안부 문제 해결의 ‘본질’은 무엇인지 살피기 위해 해당 논문의 핵심 내용을 요약·정리했다.


초창기엔 주효했던 정대협의 ‘민족 감정’ 호소

김정란 박사는 정대협의 초창기 활동 방향과 그 성과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정대협이란 ‘창구’가 생기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됐다고 얘기한다. 수치심에 평생 괴로워하며 입을 닫고 살던 피해자들이 정대협의 적극적인 독려와 ‘민족 감정 호소 전략’에 힘입어 ‘용기’를 내 증언에 나서게 됐다는 것이다.

〈한국의 정대협은 90년 이래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위안부’ 운동은 정대협의 독창적이고 발빠른 움직임으로 그 연대의 범위가 국내외적으로 확장되고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는 등 가시적인 성과를 가져왔다. 정대협의 활동은 일반 시민으로 하여금 ‘위안부’ 피해에 대한 의식을 재고하게 하였고, 무엇보다도 생존자들이 스스로 존재를 드러내게 하였다. 소극적이고 냉소적이던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를 변화시켰으며, 아시아 여성들에게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상기시킴으로써 각국 내에서의 문제제기를 촉발하였다.〉

〈정대협은 대중매체를 통해 피해자들의 생사 여부를 묻고 그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어 주기를 호소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국내 최초의 생존자인 김학순이 나타났던 것이다. (중략) 피해자들이 침묵을 깰 수 있었던 데에는 ‘위안부’ 문제를 일본과의 관계에서 다뤄야 할 정치적 문제로 보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중략) ‘위안부’의 삶이 개인의 타락이 아니라 민족의 피해이며,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민족 모두의 문제임을 강조하는 전략을 통해서였다. 피해자를 손가락질해왔던 많은 사람도 일제 피해에 대한 분노를 공유하고 있었고, ‘위안부’ 문제는 이러한 민족적 분노와 연결됨으로써 전과 다르게 인식될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위안부’ 피해자는 민족적 피해의 대변자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에 분노하면서도 피해자 고통은 외면한 국내 여론



위안부 피해자 관련 활동을 기반으로 국회 입성에 성공한 윤미향 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 당선인은 이용수씨의 문제제기에 “할머니 기억 달라졌다”고 주장했다. 사진=뉴시스
김정란 박사는 ‘민족 감정’을 자극한 정대협의 초창기 전략은 막강한 지지 기반을 마련하고 대중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했지만, 운동이 진행되면서 ‘민족’이 더욱 강조됐고 그 와중에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점점 ‘민족’이란 ‘거대 담론’에 묻히는 상황으로 변질됐다고 비판했다.

그로 인해 여론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일본의 잔인성’에 대해서는 분노하면서도 정작 피해자 개개인의 삶, 그들에 대한 구체적 관심과 지원에는 ‘무관심’했다고 꼬집었다. 과거 일본제국군대의 행각에 주목할 뿐 피해자들이 경험한 고통은 외면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얘기다.

〈정대협의 활동은 국제적으로 크게 호응을 얻은 것에 비하여 국내에서의 관심과 지지는 상대적으로 저조하며, 활동의 대부분이 소수의 개인과 단체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형편이다. 막강한 대중동원력을 가진 민족주의에 호소함으로써 정대협은 적지 않은 지지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지의 기반은 민족 동질성에 토대를 둔 다소 관념적인 것이었으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구체적 관심과 지원으로 이어져 지속되지는 못했다. ‘위안부’ 이슈는 많은 사람에게 식민지 피해의 극단적 고통을 상기시키고 일제의 잔인성을 웅변하지만, 늙고 병든 여성 피해자의 구체적 삶은 연상시키지는 않는다. 그들이 지금 살아서 개별적인 욕구를 가진 개인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다.〉



다양한 경험 가진 피해자의 ‘기억 재구성’ 강요하는 ‘위안부像’



김정란 박사는 2004년 자신의 박사 논문을 통해 정대협이 사실상 ‘독점’한 국내 위안부 지원 활동과 대일본 투쟁의 ‘의의’와 ‘한계’에 대해 분석했다.
김정란 박사는 정대협이 일본군의 ‘잔인성’ ‘강제성’을 강조할 목적으로 ‘강제로 끌려간 순결한 조선의 딸’이란 ‘위안부상(像)’을 강조했다고 비판했다. 피해자가 겪은 각자의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경험을 ‘단순화’했다는 지적이다. 그럴 경우 피해자들은 ‘경험’과는 무관하게 정형화된 ‘틀’ 속에 자신을 맞춰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는 현재 국내외에 설치된 이른바 ‘평화의 소녀상’ 관련 찬반 논쟁과도 맞닿아 있는 대목이다.

정대협은 소위 ‘수요집회’ 1000회를 맞은 2011년 12월 14일, 서울 종로구 소재 일본대사관 앞에 처음 ‘평화의 소녀상’을 세웠다. 소녀상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단발머리를 한 10대 중반 소녀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박유하 세종대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소녀상이 모든 위안부 피해자를 포괄하지는 못한다”는 취지로 비판하면서 ‘소녀상’ 이미지의 일반화에 반대했다. 다음은 정대협이 정형화한 ‘위안부상’에 대한 김 박사의 지적이다.

〈‘위안부’ 문제가 제기되는 과정에서 일제의 잔인성과 강제성은 부각되었다. ‘위안부’ 범죄는 ‘역사상 유례없는 비인간적 행위’로 간주되었고 이와 반대로 피해자들은 순결성, 무력함, 순진무구함 등 그들의 피해자성이 강조되었다. 특히 피해자들이 ‘스스로 원해서 간 것이 아니라 강제동원되었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중략) 그러나 “소녀가 관헌에 끌려가 하루 수십 번 폭행당했다”는 전형적인 각본은 다양한 경험의 당사자들에게 또 다른 억압과 피해를 경험하게 할 수도 있다. 자신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사회가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되면, 지금까지처럼 침묵하거나 아니면 사회의 기대에 맞게 자신의 경험을 재구성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의 경험은 전형적인 상과 달리 매우 다양하다. (중략) 그것은 문제화의 시점에서는 필요한 것이었지만, 위안부 문제를 더 심도 있게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한계를 지니는 것이었다. 강제성에 대한 강조는 자발성을 그 대립항으로 허용함으로써 왜곡된 비난을 ‘자발적’ 참여자에게 부과하는 논리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정의연 사태와 유사한 상황은 1990년대에도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제사회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강조하며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압박해 2015년 12월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을 타결했다. 그 결과 일본이 10억 엔을 제공하고, 국내의 ‘화해치유재단’이 이를 피해자들에게 나눠주는 방안이 추진됐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무산됐다. 사진=뉴시스
초창기, 자신의 피해 사실을 증언하며 일본을 국내외에 고발하는 주체로 나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점차 ‘객체’로 주변화된 시점은 이른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아시아여성기금) 논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아시아여성기금’은 태평양전쟁 중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돼 피해를 당한 여성들에 대한 보상 사업과 여성의 명예와 존엄 등에 관련된 문제 해결을 목적으로 설립된 재단법인이다. 과거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상이 속속 드러나고, 국제사회의 압박이 거세지자 일본 정부는 사태 해결을 위해 ‘국민 모금안’을 구상했다. 이는 피해 사실에 대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아니라 ‘도의적 책임’에 따른 일본 국민의 ‘사과’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정대협은 ‘일본 정부의 사죄와 법적 배상’을 주장했지만, 일본 정부는 기금 설립을 강행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해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각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일본 국민이 모금한 위로금(피해자 1인당 200만 엔)’과 일본 정부가 지원하는 ‘의료비(1인당 300만 엔)’, 일본 총리의 편지를 함께 전달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이는 2015년 12월, 박근혜 정부 당시 우리나라와 일본이 타결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에 따라 추진된 ‘치유금 지급 사업’의 ‘원조’ 격이다.

참고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른 ‘치유금 지급 사업(사망 피해자는 2000만원, 생존 피해자는 1억원)’은 중단됐다. 일본이 지급한 10억 엔(100억원)으로 위안부 피해 생존자와 사망자 유족에게 치유금 명목의 현금을 지급하는 사업을 진행할 주체인 화해치유재단(2016년 7월)은 문재인 정부 들어 해산됐다. 당시 재단 소관 부처인 여성가족부는 “박근혜 정부가 졸속으로 설립했고, 피해자들에게 치유금 수령을 종용했다”는 식의 이유를 들어 해산했다.

한편 화해치유재단 출범에 앞서 이에 반대하며 ‘정의기억재단’(2016년 6월)이 설립된 바 있다. 정의기억재단은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을 무효로 하고 합의 강행 중단을 요구하는 세력이 모여서 만든 재단이다. 이 재단에서는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10억 엔을 돌려주고, 한국인들이 100억원을 모금하자는 캠페인을 벌였다. 정의기억재단과 정대협이 통합해 출범한 단체가 현재 각종 논란에 휩싸인 ‘정의연’(2018년 7월)이다. 이 같은 ‘한일 위안부 합의’ 반대 세력의 논리와 행태는 20년 전, ‘아시아여성기금 논란’ 때도 ‘판박이’처럼 똑같았다.



정대협의 ‘정답’ 강요… 안 따른 피해자는 ‘배제’

1995년 7월에 발족한 아시아여성기금은 한국과 대만, 필리핀 등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보상’하려 했지만, 국내의 경우 정대협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성과’를 내지 못했다. 당시 정대협과 아시아여성기금 측은 ‘기금 수령’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묻혔다. 그들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정대협은 기금을 수령한 국내 일부 피해자에 대해서는 ‘섭섭하다’면서 이들을 ‘위안부 관련 활동’에서 배제했다. 정부지원금 대상에서도 제외됐다. 아시아여성기금은 “당사자도 아닌 ‘정대협’이 왜 나서서 피해자들의 선택을 막느냐”고 비판했다.

정대협은 1990년부터 지금까지 일본에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7개 사항을 요구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일본군 위안부 범죄에 대한 일본의 범죄를 인정하고 사과할 것
2.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상을 즉시 규명할 것
3. 일본 정부와 일본 국회에서 할머니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것
4.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공식 보상
5. 일본 역사 교과서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공식 기재 및 교육
6. 위령탑 및 사료관을 건립할 것
7. 전범자와 책임자 처벌 및 징계(1994년에 추가)〉

정대협은 자신들의 ‘원칙’을 ‘절대선’으로 여기는 듯한 행태를 보였다. 이 ‘원칙’에서 벗어나는 해결 방식은 ‘거부’했다. 이 같은 ‘잣대’는 위안부 피해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됐다. 정대협은 아시아여성기금의 위로금을 ‘더러운 돈’이라고 비난했다. 이를 수령한 피해자들과도 ‘갈등’을 겪었다.

이에 대해 김정란 박사는 논문에서 ‘현실적인 여건’을 언급하면서 정대협의 ‘원리주의적 사고’에 ‘의문’을 제기했다. 또 정대협의 일방주의적 태도로 인해 ‘권리 주체’인 피해자가 ‘주변부’로 밀려났고, 위안부 피해자들 사이의 내분도 심화했다고 지적했다.

〈생존자들의 남은 생이 길지 않다는 것은 무시되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이용되어서도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이다. 실제로 생존자들의 수는 점차로 줄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급성을 감안하여 국민기금(아시아여성기금)이 국가보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불충분한 것일지라도 하나의 타협안으로 받아들여야 했을까? 아니면 ‘국가에 의한 배상’이라는 물러설 수 없는 원칙을 끝까지 견지해야 했을까? 국민기금에 참여한 일본의 일부 시민들은 이러한 시급성을 인정하였고, 정대협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의 시민단체들은 국가배상이라는 원칙을 고수하였다.〉

〈국민기금과의 대응에서 정대협의 방침은 ‘전적인 거부’였다. 그것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한국 대 일본’이라는 대립적 구도 설정에 의해서 가능했으며, 그 가운데 일부 피해자는 주변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위안부’ 문제는 양자택일적인 기금 수령 여부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왜곡된 선택이 피해자 개인에게 강요됨으로써 불신의 씨앗이 배태되었고, 그 불신의 골은 현재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


아시아여성기금 논란 계기로 단체와 피해자 갈등 심화



정대협 등 국내 위안부 지원 단체가 주관하는 이른바 ‘수요집회’다. 김 박사는 “정대협의 ‘민족 감정 호소 전략’ 덕분에 막강한 대중 동원력을 갖는 데 성공했지만, 대중은 일본군의 ‘잔인함’에 분노할 뿐 ‘늙고 병든’ 피해자들의 ‘삶’에는 무관심했다”는 취지로 비판했다. 사진=뉴시스
김정란 박사는 논문에서 ‘아시아여성기금 논란’에 대해 “상당기간에 걸쳐 일치단결된 모습으로 기금에 반대하던 피해자와 지원단체에 97년 1월 일부 피해자가 비공개적으로 국민기금을 수령한 사건은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며 “국민기금을 둘러싼 생존자와 활동가, 생존자와 생존자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다음은 이어지는 김 박사의 분석이다.

〈정대협은 국민기금을 ‘민간위로금’ 혹은 ‘동정금’이라고 부르면서 이를 ‘가난한 아시아 피해자들의 입막음을 위한 술수’이자, ‘범죄은폐와 법적 배상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술수’로 규정하였다. 그렇다면 피해 당사자들의 의견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희생자들의 의견은 다양하였다. 한편의 피해자들은 정대협과 인식을 같이하면서 거부의사를 밝혔고, 한편의 피해자들은 국민기금 측에 편지를 보내서 수령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이런 분명한 의사를 밝히지 않은 침묵하는 다수가 있었다. 거부의사를 분명히 한 피해자들은 운동의 전면에 있었던 분들로 이들의 입장은 활동의 과정에서 고양된 정치적 의식을 드러낸다. 그러나 모든 피해자가 이러한 판단을 가졌던 것은 아니며 (중략) 또 다른 부류의 생존자들은 국민기금을 수령하기로 결정한 피해자들이다.

처음 7명의 기금 수령이 알려지자 활동가들은 즉각적으로 국민기금 측의 ‘공작’을 비난하는 동시에 기금을 수령한 할머니에 대한 섭섭함을 표출하였다. ‘이 극소수 할머니들의 행동은 다른 많은 할머니를 더욱 굴욕스럽게 하고 있다’고 평가되었으며 더 열악한 상황에 있는 필리핀 할머니와 비교하면서 ‘낯뜨겁지 않게’ 흔들리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기금을 수령했거나 이를 원하는 피해자들은 전적인 거부를 표명한 정대협과는 의견을 달리하였고 이후 양자의 갈등은 첨예화되었다.〉


“주는 돈 받아서 쓰고 죽겠다… 다른 뜻은 없다!”

김정란 박사는 이와 관련, 위안부 피해자 석복순씨의 증언을 논문에 인용했다. 이는 그가 언급한 것처럼 정대협이 주장하는 ‘원칙’ 외에 다양한 피해자들의 ‘의견’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음은 해당 증언이다.

“우리는 나이 먹고 자꾸 죽어간다. 아무 데고 마저 주는 돈 받아서 쓰고 죽겠다. 다수가 이거야. 그냥 딴 뜻은 없는 것 같아. 할머니들 요구가 무리도 아니고. 거기서 인제 또 정대협에서 (국민기금을) 주지 말라고 일본에 소문을 퍼뜨려 놨더라고. 그래서 기금을 주지 말라는 얘기지. (그러니) 보상을 주나? 안 주지. 아무 거고 몇천만 원이나 주면 주는 대로 할머니들 타 먹게 내버려두지. 죽는 놈 죽고, 사는 놈 살고, 오래 살면 이제 보상 타는 놈 타고, 이렇게 해결해야지. 하는 일이 답답해요. 할매들은 다 죽어가잖아. 그런데 모금을 받지 말라, 그것 받으면 더러운 돈이다, 화냥년이다, 이런 귀 거슬리는 소리만 하더라고.”

김 박사는 이에 대해 “하나 둘 피해자들이 사망하는 상황에서 국가배상을 마냥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이 국민기금을 받고자 하는 피해자들의 판단임을 알 수 있다”며 “위의 이야기는 기금 수령을 원하는 피해자들이 있고, 이들이 기금 수령을 막는 정대협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또 그는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국민기금이 ‘더러운 돈’이고, 그런 돈을 받는 사람은 비난받을 대상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라며 존중돼야 할 피해자의 ‘선택’이 부정되는 상황을 지적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김 박사의 논문 대목이다.

〈‘기금=부당한 돈’이라는 공식을 설정하고 ‘거부’ 이외의 어떠한 방법도 허용하지 않은 정대협의 전략은 결과적으로 일부 피해자들에 대한 배제를 기정사실화했고, 피해자들 간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이러한 상황이 초래된 배경에는 일방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한 국민기금 측의 오만과 수령 거부라는 유일한 대응만을 피해자들에게 허용한 활동가들의 판단과 결정이 존재하고 있었다. 활동가들은 국민기금을 일제의 마수로 이해함으로써 이에 대한 강력한 반대를 피력하였다.〉

〈기금 수령 사실이 알려진 후 정대협이 발표한 성명은 “지난 11일에 일본의 국민기금을 받아들인 일곱 명의 할머니들의 행동은 올바르지 못했다고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고 언급하였다. 이에 대해 와다 하루키(기자 주: 당시 아시아여성기금 사무국장이며 현재 도쿄대 명예교수로 있는 대표적인 일본의 ‘진보 지식인’이자 한국전문가)는 ‘할머니들의 행동이 정의에 위배된다는 것은 어떠한 근거에 입각한 것이며, 그런 식으로 단죄할 권리는 누구에게서 부여받은 것인지’를 되물었다. 동시에 ‘할머니들은 인간으로서 그 주체성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의 운동단체가 일부의 ‘위안부’ 피해자에게 사회적 제재를 가하고, 일본의 국민기금 측이 이들의 권리를 대변하고 옹호하는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기금 수령 피해자를 일본이 옹호하고 한국이 비판하는 모순

정대협은 아시아여성기금에 대응하기 위해 시민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기금 수령을 막기 위해 우리 국민이 그들을 돕자는 취지였다. 모금 운동의 성과는 시원치 않았다. 김정란 박사에 따르면 1차 모금(1996년 10월~1997년 5월), 2차 모금(1997년 8월~1998년 1월)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지급된 돈은 각각 350만원, 410만원에 불과했다. 이는 당시 환율로 6000만~7000만원가량이었던 일본 측의 ‘위로금’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러자 정부가 나섰다. 이 과정에서 아시아여성기금의 위로금을 받은 피해자는 제외됐다. 김 박사는 ‘위안부 문제’가 한일 양국의 민감한 외교 현안으로 떠오르긴 했지만, 피해자의 인권은 전혀 중시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다음은 김 박사 논문 내용이다.

〈정대협은 ‘정부 지원’을 요구했다. 정부는 생활지원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우리 정부의 생활지원금 3150만원은 국민기금을 받지 않는다는 각서와 함께 국민기금을 수령하지 않은 피해자들에게 지급됐다. (중략) 피해 당사자들은 지원단체가 인정하는 한에서만 정부 지원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여기서 ‘위안부’ 문제는 한일 간의 민감한 문제로 간주되고 있을 뿐 피해 당사자의 인권 문제로 간주되고 있지 않다.〉

김 박사는 한국의 위안부 지원 단체가 아시아여성기금의 돈을 받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비난하고 오히려 일본이 옹호하는 ‘모순’된 상황에 대해 논문에 상세하게 적었다.

〈공개서한에서 국민기금 측의 와다 하루키는 국민기금이 추진하는 보상사업의 당사자는 피해를 본 할머니와 일본 정부 및 기금이라고 전제하였다. 그리고 정대협은 피해자 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기금으로서는 피해자를 직접 만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방침이라고 밝혔다. 또한 시민연대의 모금액을 국민기금을 거부하는 피해자에게만 지급한 것에 대해서 그 이유를 묻고, 그것은 기금을 받은 할머니들을 차별하는 처사라고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서 시민연대의 김성재는 ‘시민연대의 성금은 그야말로 순수한 도덕적 성금이기 때문에 국민기금이 부당한 줄 알면서도 그걸 받은 할머니들에게 이 성금을 나누어 줄 수 없다’고 밝혔다. 김성재의 이 주장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시민연대의 모금이 ‘위안부’ 피해자가 아니라 국민기금에 대해 특정 입장을 가진 피해자에게만 적절한 것이라는 함축을 담고 있다.〉

김 박사는 논문 작성을 위한 취재 과정에서 만난 정대협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그들이 아시아여성기금을 거부한 ‘이유’를 말한다. 그에 따르면 정대협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아시아여성기금을 수령한 이후의 ‘상황’을 걱정했다. 일종의 조직 존속과 운동 동력 상실에 대한 ‘위기감’ ‘두려움’을 느꼈다는 얘기다. 다음은 김 박사의 논문 내용이다.

〈동시에 거기에는 정대협의 ‘위기감’이 존재하고 있었다. 생존자들이 국민기금을 수령할 경우, 할머니들은 흩어질 것이며, 그렇게 되면 ‘위안부’ 운동은 파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위기감이 뭐였냐면, 정대협의 위기감이, 국민기금 받고 그러면 할머니들 뿔뿔이 흩어지고 운동이고 뭐고 아무것도 안 된다는 거죠. (왜 흩어지게 되죠?) 지금까지의 결속력은 일본에 대한 사죄, 배상 투쟁이거든요.’(D와의 인터뷰)

‘위안부’ 운동의 전개에 있어서 피해자의 존재는 결정적이다. ‘위안부’ 피해의 당사자가 살아서 눈앞에 있다는 것은 ‘위안부’ 이슈가 지금 현재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매우 효과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생존자의 대중에 대한 호소력과 설득력은 그 어떤 것보다 월등하였다.

즉 ‘위안부’ 피해자들이 가진 상징적인 의미는 상당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으며, 정대협은 이들의 존재가 ‘위안부’ 운동의 성공적 전개를 위해 필수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기금의 수령은 그 자체로써뿐 아니라 그것이 가져올 여러 파급 효과에 대한 고려 속에서 격렬한 반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과의 ‘타협’이 그리도 ‘부정한’ 것인가?

김정란 박사는 아시아여성기금 논란과 관련해서 일방의 입장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그는 논문에서 “마음이 담기지 않은 공허한 사과가 자본주의적 덫이 될 수 있는 반면, 이데올로기 주도의 행동주의 운동에서 핵심적인 요소(피해 당사자의 주체성)를 간과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적절한’ 사과의 필요성에 동의하지만, 그들의 소진된 삶에 대해서 경제적으로 보상받을 자격이 있다고 느낀다. 특히 그들의 나이를 고려한다면 그러하다. 그들이 소망하는 것은 50년 넘게 박탈되었던 존엄과 건강, 물질적 풍요와 행복, 그 모든 것을 보상할 수 있는 응분의 마땅한 조치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적절한, 진정한 사과란 어떤 것일까. 사과와 보상의 방법은 경제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진실을 밝히고, 기억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은 보상의 중요한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선택한 것은 경제적인 보상이라는 자본주의적 방식이었다. 그것은 보상의 수혜자가 잘못을 저지른 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게 만드는 방법이기도 했다.〉

〈‘민족’과 ‘역사’라는 거대담론 앞에서 기금 수령의 당사자로서 생존자의 존재는 비가시화될 수밖에 없다. 생존자에게 주어진 선택은 기금을 수령할 것이냐 여부가 아니라 전쟁범죄의 희생자라는 숭고한 위치를 택할 것이냐, 아니면 불쌍한 노인으로 전락할 것이냐의 선택이었다.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선택될 수 없었다. 정답이 이미 제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대협은 피해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수령 여부에 대한 결론을 도출하기보다는 이미 결정된 방침을 따라줄 것을 피해자에게 부탁하는 방식으로 국민기금에 대처해왔다.〉

김 박사는 논문에서 “‘위안부’ 문제를 ‘식민정책의 골수’로 ‘전후 문제해결의 핵심’으로 파악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국민기금은 이에 대한 해결로서는 턱없이 부족한 것임이 틀림없다”면서도 “‘위안부’ 문제를 피해 당사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치유해야 하는 과제로 인식한다면 국민기금에 대한 대응은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피해자 개인에게 사과가 전달된 적이 없는 현재의 상황에서 일본 총리의 사과편지는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굳이 그것이 국회에서의 결의를 통한 사죄가 아니더라도 피해자 개인들에게는 마음의 한을 풀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일본 시민의 성금 또한 동정과 시혜의 차원으로 폄하되기보다는 이제까지 전쟁에 대해서 진지하게 반성하지 않았던 일본 내의 사회적 분위기를 개선하고 사고의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 동시에 반성의 마음을 ‘위안부’ 피해의 당사자에게 전하는 방법으로 인식될 수 있다.

정부(일본)의 지원에 의한 의료비 지급이 피해 당사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은 당연하다. 피해자에게 어떠한 유익을 줄 수 있는가, 이들의 고통을 치유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가의 차원에서 국민기금을 검토했다면, 그에 대한 대응은 전면 거부가 아니라 의료비 지원을 더 상향조정하고, 피해자들의 구체적 요구사항을 추가 요구하는 등의 방식으로 좀 다르게 대응했을지도 모른다. 의료비 지원이라는 ‘명목’이지만 국고에서 지원되는 비용을 ‘실질적인’ 국가배상으로 간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는 개인 피해자의 인권문제로 인식되지 않았다.〉


“피해자와 활동가의 너무도 다른 계급적 배경”

최근 이용수씨는 “윤미향이 일본 정부가 10억 엔을 준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지만, 피해자들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사실관계를 떠나서 이는 기존 ‘요구 사항’에서 벗어나는 일본 측과의 ‘합의’는 ‘부정’한 것으로 취급하는 정대협의 사고, 경제 사정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는 피해자의 ‘현실’이 빚은 갈등이다. 16년 전, 김정란 박사는 양측이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소위 ‘활동가’와 피해자의 너무 다른 ‘계급적 배경’이라고 지목했다.

〈국회 결의를 통한 사죄와 국가적 차원의 법률적 배상의 원칙은 양보할 수 없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원칙하에서 그 이외의 모든 해결의 노력은 졸속한 타협으로 간주된다. (중략) 그러나 수혜의 당사자가 받기로 결정했을지라도 그것은 허용될 수 없는 것인가? (중략) 그러나 하나의 입장을 일관되고 강력하게 추진하는 정대협의 전략은 다른 입장을 수용할 만큼 성숙한 것은 아니었다. 국민기금의 수령을 둘러싸고 운동단체가 정보를 제공하되 최종적 판단은 피해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주장이 활동가들 사이에서 제기되었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중략) 피해자들의 경제적 필요는 활동가들에게 우선적인 가치가 아니었다. (중략) 그러나 피해 당사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부정적 가치가 부여되었고, 수령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피해자는 기금의 수령을 원했고 실제로 이를 수령하였다. 활동가와 일부 피해자들 간의 이런 대응의 차이에는 계급적 차이가 놓여 있다. 높은 교육 수준을 갖춘 지식인 활동가들은 오랜 세월 빈곤한 삶을 영위해온 생존자들의 삶과는 너무나 다른 계급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필리핀 단체는 어떤 경우에도 위안부 피해자 비난하지 않아”

김정란 박사는 정대협의 원리주의적 사고와 운동 방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아시아여성기금 거부 운동 과정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피해자들에 주목하면서 정대협 등 국내 위안부 운동 단체들의 활동 방향에 대한 시사점을 제시했다.

〈그러한 과정(아시아여성기금 거부)에서 일부 피해 당사자들의 주체성은 상당히 훼손되었다. (중략) 국민기금과 관련하여 피해자들은 선택과 판단의 주체였는가? 그들의 현실적 상황이나 바람은 국민기금에 대한 입장의 결정 과정에 반영되었는가? (중략) 피해자의 선택과 활동가의 주장이 상충할 때 활동의 중심에 있는 여성들은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하는가. 이것은 운동에서 피해자가 과연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활동가와 피해자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필리핀 활동가의 말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을 제공한다.

“우리 조직은 위안부들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아직도 국민기금을 받은 피해자들도 존경하고 있다.”

필리핀의 지원단체인 ‘릴라 필리피나’는 일본이라는 일국을 대상으로 싸움을 한정하지 않았으며, 싸움의 중심에 피해 당사자를 위치시켰다. 어떠한 경우에도 이들은 롤라(‘할머니’를 뜻하는 타갈로그어)들을 비난하거나 배제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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