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3

"결혼 혹은 같이 오랫동안 같이 사는(삶을 나누는)것에 대한 이야기.

(3) Facebook


希修
 
(중첩 공유가 안 되는 듯 하여 페친이신 송원영 님의 글은 긁어서 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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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혹은 같이 오랫동안 같이 사는(삶을 나누는)것에 대한 이야기. 
난 성애적 관계는 하나의 유용한 수단이라 생각한다.
타인들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기위한,
그러니까 '의리'를 형성시키는 수단.
같이 살다보면 꼭 누가 큰 잘못을 하지 않아도 같이 살기힘든 순간이 오게 마련이다. 그때 성애적 관계는 끈을 이어주는 주요수단이 될 수 있다.(단순히 섹스 행위를 말하는게 아니라, 섹스하는 관계를 말하는 것임.)
그래서 만일 다른 수단을 찾을 수 있고, 그 수단을 통해 '의리'가 형성된다면 꼭 성애적 관계여만 하는건 아니라고 본다. 
그 다른 수단을 찾기 힘든게 문제이긴 한데, 어떤 경로든 찾아진다면 수단의 종류는 상관없다. 
중요한건 '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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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acebook.com/commie.song/posts/4238926799483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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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gyu Shin
https://www.facebook.com/Pilgyu.S/posts/4054330141309890


0. 며칠 전 드라마 '마인'에 정서현(김서형)이 남편 한진호(박혁권)에게 '저 성소수자에요'라고 커밍아웃을 하는 장면이 등장했고 엄청난 화제가 되었어요. 뭐 적어도 제 부근의 퀴어들에게는 말이에요.

1. 대부분 사람들은 정서현이 '성소수자'라고 스스로를 지칭하며 커밍아웃을 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요. 사실 저는 정말 퀴어한 장면은 그 다음에 등장했다고 생각해요. 일단 한진호는 정서현이 성소수자임을 놓고 아내를 비난하지 않아요. 다만 '심플'하게 사는 자신에게 '복잡한 일'이 발생한 것을 난감해 하죠.
그리고 한진호는 결혼을 깨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2. 그러니까 우리는 이성애 부부란 자연히 성애적 관계를 기반으로 형성되고 유지된다고 생각하곤 해요. 물론 실제로 결혼할 때의 그 마음을 계속 유지하며 백년해로하는 이성애 부부도 분명히 있지요. 하지만 모두가 그렇던가요?
시간이 흐를 수록 다양한 이유로 섹스리스로 사는 부부도 많습니다. 그 '다양한 이유' 중에 하나가 이제는 배우자가 너무 가족 같아서(근데 님들 가족되려고 결혼한 거잖아요)인 경우도 있고요. '아이 때문에 같이 산다'는 말은 실제로 이성애 부부 당사자가 하기도 하지만 젊은 부부에게 조언처럼 전달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3. 그러니까 이성애 부부라고 늘 사랑과 성애로만 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다면 사실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는 거죠. '이성애 부부'가 아니라 그냥 '이성(異性) 부부'라면 둘 중 하나가 동성애자인게 상관이 있을까요? 그러니까 남편이 게이거나 아내가 레즈비언이라면? 어차피 애정과 성애가 전제된 관계가 아닌데?

저는 '마인'이 이 질문에 굉장히 이상한 방식으로 답을 던졌다고 생각해요. 애초에 정서현과 한진호는 사랑해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 결합한 부부에요. 혼인으로 두 사람은 원하는 걸 얻었고 집안에서 각자 역할을 수행하며 자리를 차지했고 심지어 공통의 적이 생기자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기도 하죠. 사랑과 성애만 빼고 다 있는 거예요.
그러니 한진호가 정서현의 유일한 사랑이 여자임을 알았다고 해서 결혼을 깰 이유가 없는 거죠. 실제로도 그러지 않고요.

4. 그러니까 '마인'의 저 장면은 우리가 이성애 혼인 관계에서 당연히 전제한 것과 가졌던 환상을 제대로 박살내요. 그런데 이런 식의 이야기는 원래 아주 멜로 드라마틱하게 진행되거나 두 인물이 비탄에 빠지거나 아니면 그 중 하나가 죽거나 하는 게 보통입니다. 예를 들어 다른 드라마나 영화에서 아내가 커밍아웃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

(1) 섹스리스에 아무 애정도 주지 않던 남편이지만 갑자기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며 아내를 비난하고 내쫓는다(혹은 병원에 가둬버린다)
(2) 부부 관계를 깨지 않으나 아내를 엄청나게 비난하며 집안의 수치이니 평생을 숨기라고 강요한다
(3) 남편이 놀라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보통의 전개는 이렇습니다. 하지만 정서현과 한진호는 자신들의 상황을 그냥 쿨하게 수용해요. 둘과 비슷한 관계에 있는 다른 작품속 캐릭터들이 (1), (2), (3)을 무한의 굴레처럼 순환하는 동안 말이에요. 그러니 놀랄 수 밖에.

5. 정서현과 한진호는 정략 결혼을 했지만 그렇다고 서로가 서로를 이용해먹는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정서현은 한진호를 한심하게 여겼지만 나름 그의 미래를 걱정했고 한진호는 정서현이 인간미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난장판 집안을 잘 끌고가는 능력은 인정하고 감탄했죠. 말하자면 둘은 좋은 동료 관계였습니다.

6. 사실 아까 '이성 부부 관계에 대한 전제와 환상'을 언급하기도 했는데 사실 그건 저의 것이기도 했어요. 저도 결혼에 대해서 비슷한 생각을 가졌고 '사랑'과 '성애'가 사라진 부부 관계는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이성 부부'들을 엄청나게 놀려먹었고 비아냥 거렸지요.(단 제 친구들이 하나둘 속속 결혼하기 전까지요)

하지만 정서현과 한진호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건 실패한 결혼이 아니게 됩니다. 그들에게 결혼이란 늘 그런 것이었으니까요. 얼마든지 다른 관계와 요소들로 채워질 수 있는 것 그러하니 심지어 배우자의 성적 지향이 나를 가르키지 않아도 별로 상관 없는 것, 그것 또한 다른 방식으로 작동되는 관계였던 셈이죠. 

7. 그러니까 한편으로 '마인'은 제가 가지고 있던 편견도 다시 돌아보게 해준 드라마입니다. '이성 부부' 관계의 환상을 걷고 현실적인 비판(을 가장한 원한에 찬 비아냥)을 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저 역시도 환상에 기반한 편견을 기준으로 그 관계들을 평가했던 것이죠. 부부라면 당연히 가운데에 사랑과 성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요. 이렇게 되면 저는 이성 중심의 혼인 제도에 적대적이면서도 동시에 그 제도가 만든 가장 보수적인 기준에 기대어 판단을 하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제가 동성애자라고 자연히 거기서 자유로운 게 아니었어요.
그걸 지금까지 몰랐던 것이죠.

8. 우리가 생각했던 상식과 정상성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그 관계를 냉소적으로 보거나 조롱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리고 그 관계에 진지함이나 호혜가 없다고 그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것도요. 세상이 상상하고 규정한 방식대로 특정한 관계의 내용을 채워야 할 이유는 없죠. 모두가 나름의 방식으로 행복하다면 그건 성공한 관계입니다.
이성 관계나 이성 부부 관계도 여기서 예외일 필요가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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