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19

알라딘: [전자책] 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

알라딘: [전자책] 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

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  |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총서 기초연구시리즈 16 epub 
박훈 (지은이)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2021-05-30 

종이책 페이지수 520쪽

책소개

지금까지 메이지유신 정치사 연구에서는 '서구의 충격(Western Impact)'의 영향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근대주의적' 설명 방법이 주로 채용되어 왔다. 그러나 19세기 전반~중반 사무라이들의 모습을 사료를 통해 관찰해 볼 때 두드러진 것은 어떤 종류의 '근대성'의 출현이 아니라, 이들이 '사대부'와 같은 정치행위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사료상에 나타난 19세기 일본은 유교(유학), 그중에서도 특히 '주자학의 전성시대'였다. 즉 본래 유교에 적합하지 않은 병영국가적 성격을 갖고 있던 도쿠가와 체제는 '서구의 충격' 이전에 이미 '유교적 영향(Confucian Influence)'으로 인해 특히 정치 분야에서 동요, 변질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그 과정을 '사대부적(士大夫的) 정치문화'의 확산이라는 관점으로 설명하고 있다.


목차
머리말

서론 ‘이쿠사(戰)’가 아니라 정치

제1장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보는 관점과 ‘사대부적(士大夫的) 정치문화’
제1절 본서의 문제의식
제2절 ‘근세’ 동아시아 정치사 이해를 위한 개념: ‘사대부적 정치문화’
제3절 중국·조선에서 ‘사대부적 정치문화’의 행방
제4절 ‘사대부적 정치문화’의 의외의 출현, 막말일본(幕末日本)

보론 1 막말유신기 유교의 위치에 대한 기존의 시각과 그 비판

제2장 ‘연속하면서 혁신’: 막말 정치사와 메이지유신 연구사
제1절 막말유신사 연구의 현황: ‘개별 실증’ 연구의 심화, 그리고 매몰
제2절 전후역사학(戰後歷史學)과 막말유신사(幕末維新史) 연구: 이데올로기 과잉
제3절 ‘연속하면서 혁신’: 메이지유신 연구의 현재적 의미

제1부 ‘학적(學的) 네트워크’와 ‘학당(學黨)’

제1장 미토번(水戶藩)의 번교와 ‘학적 네트워크’
제1절 번교 홍도관(弘道館)과 신분제
제2절 홍도관과 ‘학적 네트워크’
소 결

제2장 구마모토번(熊本藩)의 ‘학적 네트워크’와 ‘학당’의 형성
제1절 번교 시습관에서의 ‘학적 네트워크’ 형성: 『히고 나카무라 죠사이일록(肥後中村恕齋日錄)』을 중심으로
제2절 ‘학당’의 형성: 나가오카 겐모쓰·요코이 쇼난의 사숙·학습회를 중심으로
제3절 ‘학당’과 학정일치·붕당
소 결

제3장 사쓰마번(薩摩藩)의 ‘학당’, ‘근사록당(近思錄黨)’
제1절 사숙·학습회와 ‘근사록당’
제2절 ‘근사록당’을 통해 본 ‘학당’의 특징
소 결

제2부 공론정치: 상서와 정치공간

제1장 19세기 일본에서 공론정치의 형성 과정과 그 의의
제1절 도쿠가와 일본의 담합정치와 공론관습의 취약성
제2절 19세기 전반 일본에서 정치정보의 유통
제3절 19세기 전반 ‘토의정치’의 활성화와 공론정치의 형성
소 결

제2장 막말기 미토번에서 봉서(封書)의 정치적 등장과 그 역할: ‘토의정치’의 형성
제1절 미토 번정(藩政)의 특징과 번정 기구
제2절 도쿠가와 나리아키 이전 미토번정의 추이와 상서 장려
제3절 봉서의 정치적 등장과 ‘토의정치’의 형성
소 결

제3장 막말기 미토번의 남상(南上) 운동과 공론정치
제1절 미토번 남상운동의 전개 과정
제2절 미토번 남상운동과 정치공간
소 결

제3부 군주친정(君主親政)과 정치변혁

제1장 ‘명군’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민정 활동과 그 의의: 지방 역인 접촉과 순행
제1절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친정
제2절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지방 역인 접촉
제3절 다이묘의 순행: 나리아키의 영민 접촉
제4절 ‘명군’ 나리아키 친정의 역사적 의미
소 결

제2장 막말기 미토번 당쟁에서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역할
제1절 미토번의 당쟁과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등장
제2절 실각 이전 나리아키와 후지타 도코
제3절 실각 이후 나리아키와 후지타 도코
소 결

제3장 에치젠번(越前藩) 마쓰다이라 요시나가(松平慶永)와 군주권력
제1절 1863년 ‘거번상락’ 추진 배경과 과정
제2절 ‘거번상락’의 좌절과 요시나가의 역할
소 결

보론 2 막말유신기 정치변혁과 봉건·군현론

제1절 도쿠가와 시대의 봉건·군현론
제2절 왕정복고는 군현제?: 막부의 봉건에서 천황의 봉건으로
제3절 판적봉환: 봉건과 군현 사이의 줄타기
제4절 폐번치현과 군현제의 설득: “서양 각국은 모두 군현”
소 결

결론

<각 장의 초출일람(初出一覽)>
<日文要約>
<本書の目次>
<各章の初出一覽>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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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접기
책속에서
P. 5
현재의 개념과 가치를 잣대로 과거를 설명하려는 접근 태도, 즉 회고적 사고는 과거를 제대로 인식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다. 적어도 ‘서양의 충격’에 직면하기까지 일본인 혹은 동아시아인이 지향한 것이 ‘근대화’였다고 볼 근거는 없다. 이것은 근대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회고적 사고 습관에서 발생한 오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접기
P. 4~5
이 시기 일반 사무라이들을 정치적으로 활성화시키고, 자신들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투쟁에 뛰어들게 한 것은 무엇일까. 필자는 유학 학습과 그에 따른 ‘사대부적 정치문화’의 급격한 확산이라고 본다. 이런 과정에서 사무라이는 더 이상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학문을 배우고 정치에 뛰어들어 천하대사를 담당하려는 ‘사(士)’로 변화해 갔다[사무라이의 ‘사화(士化)’].  접기
P. 65
전후역사학은 대담한 가설을 허용했지만 그것은 어떤 정치적 편향의 범위 내에서였다. 즉 전전(戰前) 강좌파가 제시해 놓은 메이지유신 이해의 큰 틀을 넘어서는 것은 음으로 양으로 제한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이었다.
P. 84~85
장기간에 걸친 태평 시대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허리춤에 칼을 차고 있는 사무라이들에게 학교라는 것이 꼭 반가운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번교 설치라는 거대한 ‘사회개혁정책’에 사무라이들은 이렇다 할 저항을 하지 않았다. 만약에 조선의 양반이나 청의 신사(紳士)들을 강제로 무도장(武道場)에 다니게 했다면 어떤 결과가 빚어졌을까. 번교에서 배우는 학문, 특히 유학은 무술?불교?신도?난학 그 어느 것보다 사무라이들에게 정치적 관심을 환기하는 것이었다. 번교를 만든 번 당국의 거듭된 금지령에도 번교는 당국의 예상을 넘어 사무라이가 정치화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18세기 후반부터 전국적으로 번교가 설립되었다는 사실의 정치적 의미에 한층 더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접기
P. 111~112
구마모토번은 도쿠가와 시대 번 중에서도 미토번과 더불어 일찍부터 유학이 발달한 곳 중 하나였다. ‘명군’으로 유명한 호소카와 시게카타(細川重賢)가 번교 시습관(時習館)을 설립한 것이 1755년(寶曆5)으로, 유력한 번 중에서는 이른 편에 속하는 것이었다. 설립 당초 시습관에서는 소라이학(?徠學)이 우세했으나 점차 주자학이 대세를 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학문 방법은 송유(宋儒)의 주석에 대한 훈고학적인 탐색과 사장적(詞章的)인 취미를 주로 하는 것이었고, 학문을 정치 혹은 시사 문제에 연결시켜 접근하는 경향은 매우 약했다.  접기
P. 161~162
‘근사록당’은 ‘근사록사태(近思錄崩れ)’라는 권력투쟁 가운데 그 모습을 선명히 드러냈다. 이것은 『근사록』 등 주자학의 주요 텍스트를 읽는 학습회에서 출발한 ‘근사록당’이 1804년 번정을 장악했다가 반격을 당하여 사쓰마번 정치투쟁사상 최대의 처벌자를 낳은 정변을 말한다.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정변의 이름과 그 주도자들에게 『근사록』이라는 주자학 텍스트의 이름이 붙어 있다는 점이다. 어떤 정치세력의 명칭에 특정 서적의 이름이 붙는 경우가 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조선, 중국도 아닌 사무라이 사회 일본에서 이런 명칭이 생겨난 것에 필자는 주목하고 싶다.  접기
P. 188
공론정치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각 정책 결정의 장에서 토론과 논변에 의해 의사 결정이 이뤄지는 관습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를 ‘토의정치’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것은 여전히 구래의 정치관습[관례]이나 정치 시스템은 존재하고 있으나, 정치를 움직이는 새로운 요소로서 ‘토의’가 등장하고, 번주든 번 정부의 실권자든 정책의 결정이나 정치행위에서 과거에는 중요한 행위자가 아니었던 성원을 포함한 사람들과의 토의를 당연시하고, 그 과정을 무시하고는 어떠한 정책의 결정이나 정치의 행위도 무리 없이 이뤄질 수 없는 정치상황을 지칭한다.  접기
P. 228
통사는 번주의 측근이면서도 고쇼(小姓)를 지휘하는 고쇼가시라(小姓頭)의 휘하에 있지는 않았다. 번주 직할의 역직이었으며, 따라서 정부에 속하지 않았다. 즉 통사는 번 기구상에서 집정 등이 통제할 수 없는 번주 직할의 기구였던 것이다. 후술하는 것처럼, 이러한 통사가 봉서상정(封書上呈)의 루트가 되었던 사실은 봉서자와 번주의 직접적인 연결을 의미했다.  접기
P. 284
한편 사숙의 인적 네트워크는 미토번 내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각 번으로부터 하라 이치노신(原市之進)의 청아숙(靑莪塾)에 찾아오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한 『대빈록(待賓錄)』을 보면, 1851년(嘉永4)에서 1857년(安政4) 사이에 청아숙이 전국적 교류의 장이 되어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아이자와 야스시의 남가숙(南街塾)... 더보기
P. 305
도쿠가와 후기 유학이 확산되면서 군주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특히 중하급 무사들의 정치참여가 활발해지자 군주친정에 대한 요구는 더욱 강화되었다. 가로합의체제하에서는 번 내 몇 개의 최고 가문들이 번정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다수 가신이 이에 끼어들 여지는 적었다. 그러나 이들이 일단 정치에 뛰어들게 되자 가로합의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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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박훈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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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통찰로 역사와 현재를 연결하는 일본사학자.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로,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도쿄대학 총합문화연구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메이지유신을 비롯한 일본의 근대화 과정과 정치 변혁, 일본인의 대외 인식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고 있다.
또 저자는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 다양한 매체에서 칼럼을 연재하며 일본 역사의 올바른 이해를 돕고 있다.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에서는 메이지유신을 이끌었던 주역들의 삶을 조명하며, 근대 일본이 탄생할 수 있었던 비결과 전략을 분석한다.
저서로는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 등이 있으며, 『사료로 보는 아시아사』, 『근대화와 동서양』 등을 함께 집필했다. 옮긴 책으로는
『일본의 설계자, 시부사와 에이이치』, 『일본이란 무엇인가』가 있다. 접기
최근작 : <서울리뷰오브북스 2호>,<서울리뷰오브북스 1호>,<세계의 도시와 건축> … 총 15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사대부적(士大夫的) 정치문화’ 확산의 관점으로 메이지유신의 새로운 면모와 흥미롭게 대면한다.

지금까지 메이지유신 정치사 연구에서는 ‘서구의 충격(Western Impact)’의 영향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근대주의적’ 설명 방법이 주로 채용되어 왔다. 그러나 19세기 전반~중반 사무라이들의 모습을 사료를 통해 관찰해 볼 때 두드러진 것은 어떤 종류의 ‘근대성’의 출현이 아니라, 이들이 ‘사대부’와 같은 정치행위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사료상에 나타난 19세기 일본은 유교(유학), 그중에서도 특히 ‘주자학의 전성시대’였다. 즉 본래 유교에 적합하지 않은 병영국가적 성격을 갖고 있던 도쿠가와 체제는 ‘서구의 충격’ 이전에 이미 ‘유교적 영향(Confucian Influence)’으로 인해 특히 정치 분야에서 동요, 변질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본서에서는 그 과정을 ‘사대부적(士大夫的) 정치문화’의 확산이라는 관점으로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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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없는 유신, 유신 없는 근대? 새창으로 보기 구매
 마치 조선에서나 볼법한 극렬한 당쟁의 여파로, 미토번은 정작 결정적인 순간엔 힘 한 번 못쓰고 폭삭 망해버렸다. 하지만 미토번은 망해도 망한 게 아니었다. 두꺼비는 뱀에게 잡아먹히지만, 두꺼비 뱃속의 새끼들은 결국 뱀의 몸을 뚫고 세상에 나온다는 80년대 운동권의 프로파간다처럼 미토번의 정신적 후예들이 천하를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일단 막말 유신지사들의 ‘이념적 나침반’이었던 후기미토학부터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미토번에서 나온 것이었다. 후기미토학의 이데올로그였던 후지타 도코(藤田東湖)와 그 제자 아이자와 야스시(會澤安)의 유명세는 80년대 대한민국의 김영환이나 이진경(박태호)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리라.

 

  실제로 그 유명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비롯, 각지의 수많은 지사들은 흠모하는 ‘선생님’ 밑에서 배우고자 국경(당시 일본에선 번이 곧 나라였으므로)을 넘어 미토번으로 유학을 떠났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모교’와의 연계를 이어갔다. 그저 밖으로부터 사람들이 들어오기만 했던 게 아니다. 미토번의 사무라이들도 자의로든 타의로든 번을 떠나 천하를 유랑하며 깽판도 많이 쳤지만, 그 과정에서 ‘사대부적 정치문화’를 다른 번에 전파하기도 했다. 여러 모로 튀었던 미토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의 행보 또한 ‘유교적 이상군주’로서의 천황을 상상하는 모델이 되어주었다.

 

  이처럼 ‘주자학의 극단적인 일본적 변형’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미토학, 그리고 이를 매개로 형성된 ‘사대부적 정치문화’야말로 메이지유신의 원동력이었을 수도 있다는 게 박훈의 설명이다. 상당히 파격적인 주장이지만, 그의 책에서 마땅한 비판거리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꼼꼼한 실증이 뒷받침되고 있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그가 몇 겹의 가정과 제약으로 자신의 주장이 ‘확대해석’될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실증’을 중시하는 역사학자가 ‘거대서사’ 혹은 ‘이데올로기’를 이야기할 경우 필연적으로 택할 수밖에 없는 길일 것이다. (다른 얘기지만 긴 시간의 흐름을 다루는 역사학이 외려 다른 분과보다 ‘거대서사’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퍽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지난 2018년 네이버 열린연단 강연에서 그가 유교의 공론정치와 문재인 정부의 공론화위원회를 연결짓자 평안도 악센트가 인상적이었던 한 원로학자가 “포퓰리즘을 옹호하다니, 지식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며 비판하던 모습 역시 생생히 기억하고 있기에, 이러한 신중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아쉬움을 지울 수 없는 이유는, 박훈이 예상되는 거의 모든 비판을 선제적으로 반론함으로써 더 이상의 논의를 막아버린다고 느껴져서다.

 

  가령 박훈은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의 ‘유교적 근대론’과 선을 그으며 자신은 “유교에서 근대적인 의의를 찾으려는 시도에는 부정적”이라고 선언한다. 그의 입장은 유교가 서양에서 발생한 근대를 도입하는 촉매 역할을 한 뒤 ‘자살’했다고 여기는 와타나베 히로시(渡邊浩)에 가깝다. 그간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를 비롯해 그가 쓴 논문과 칼럼 등을 읽으며 유교는 그저 ‘사라지는 매개자’에 불과했던 것 아닌가하는 의문을 품어왔는데, 이 책에서 아예 와타나베의 입을 빌려 그렇다고 못을 박은 셈이다. 심지어 그마저도 “‘시대의 맥락(context)’과 이용하는 주체의 성격, 그리고 이용 수준” 삼박자가 모두 맞아 떨어질 때만 겨우 가능할 뿐이다.(p.51.)

 

  하지만 유교가 기껏해야 촉매 혹은 사라지는 매개자에 불과하다면, 과연 그 중요성을 이렇게까지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유교를 촉매로 사용할 수 있었던 ‘시대의 맥락’과 주체의 성격, 그리고 역량이 더 중요했던 것은 아닐까? 박훈이 교양서로는 이례적일 정도로 자주 인용하는 요나하 준(與那覇潤)의 『중국화하는 일본』을 통해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중국화하는 일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https://brunch.co.kr/@msg2012/12 참고)

 

  요나하는 일본이 근대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건 ‘중국화’(‘유교화’로 치환해도 무방하다)를 감행하며 겸사겸사 ‘서양화’도 패키지로 추진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반대로 중국은 송나라, 한국은 조선왕조 때 이미 ‘중국화’를 달성해버렸기에 구태여 ‘서양화’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게 요나하의 설명이다. ‘중국화’를 보편이자 필연으로 여기는 요나하로서는 일본이 그만큼 시대의 흐름에 뒤쳐졌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였겠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일본은 그때까지 중국과 전혀 다른 사회였기 때문에 ‘중국화’를 매개로 ‘서양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요나하에 따르면 당시 일본은 ‘일본(에도시대)형’으로 따로 분류될 만큼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핵심은 ‘먹고사니즘’이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오사카의 거대 사찰인 이시야마 혼간지(右山本願寺)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래, 일본의 지배세력은 종교나 사상이 아니라 안전·생계보장을 통해 통치의 정당성을 보장받았다. 다시 말해 ‘질서의 수호자’로서의 권위를 흔들지 않는 이상 종교나 사상에 비교적 유연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떠들어봤자 칼을 쥔 건 자신들이니 말이다. (에도시대의 ‘인쇄혁명’역시 역설적으로 말과 글이 쓸모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건 아닐까?) 그 점에서 일찍이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가 ‘정치의 발견자’라며 추켜세웠던 오규 소라이(荻生徂徠)는, 그저 이를 ‘사후추인’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https://brunch.co.kr/@msg2012/8)

 

  실제로 유교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19세기 중반에도 막부는 서양에 열린 자세를 유지했고, 필요하다면 그들의 문물을 적극 흡수했다. 로주(老中)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는 1842년부터 1857년까지 서양화 정책을 진두지휘했고, 그가 발탁한 인재들은 서양에 대한 이해도로나 실무능력으로나 당시 일본에선 따를 자가 없었다. 권력의 원천이 종교나 사상이 아닌 무력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1860년대 중반에 이르면 막부 내 강경파 인사들 사이에서 쇼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한 뒤 군현제를 실시하여 능력본위의 정치를 펼쳐야 한다는, 훗날의 메이지 신정부를 연상케 하는 주장이 등장하기까지 한다.(p.433.)

 

  이처럼 무인사회라는 특성상 막부를 비롯한 일본사회 전반이 서양의 새로운 종교나 사상에 비교적 열려 있었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도 던져볼 수 있다. 유교 없는 메이지유신은 불가능했을지언정, 메이지유신 없는 ‘근대화(서구화)’는 가능하지 않았을까? 막말로 막부의 ‘내부총질러’인 미토번이 조금만 더 고분고분했고,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조금만 더 일찍 쇼군에 등극했더라면 앞서 이야기한 막부 강경파의 꿈이 실현되었을 수도 있다.

 

  정리해보자. 유교는 분명 메이지유신에 일정한 역할을 했으나, 이를 완수한 뒤 ‘자살’했다. 그리고 어쩌면 메이지유신은 일본의 ‘근대’와 별반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유교는 ‘근대’와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비약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지금처럼 양자의 관계에 대해 지나치게 신중한 태도를 고수한다면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될 질문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를 돌파할 방법은 이전까지 수많은 연구자가 그러했듯 무턱대고 유교에서 ‘근대의 맹아’를 추출하는 게 아니라, 메이지유신 이후 유교의 향방에 대해 성실하고 치밀하게 추적해가는 것이리라.

 

  저자가 일본, 나아가 동아시아의 근대를 이해하는 틀로서 ‘봉건·군현론’이라는 유력한 테제를 제시했음에도 정작 이 맥락에서 일본의 의회개설을 사유하지 못한 점 역시 아쉬운 부분이다. 중국사학계의 거인인 민두기와 『중국화하는 일본』으로 일본사회를 뒤흔든 요나하 준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탄생한 ‘봉건·군현론’은, 근대전환기 일본과 중국의 지식인들이 실제로 이 틀을 통해 바람직한 국가의 모습을 상상했다는 점에서 강한 설명력을 갖는다. 문제는, 정작 저자가 일본 근대화의 중요한 특징으로 꼽는 의회개설은 ‘봉건·군현론’을 통해 설명하지 못하고(혹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에 따르면 에도시대까지만 해도 일본에선 자국의 봉건제를 고대의 이상에 부합하는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여겼다. 반면 군현제는 각 번의 자율성을 찍어 누르려는 막부 강경파의 획책, 그러니까 비난받아 마땅한 ‘패도(覇道)’에 불과했다. 그랬기에 메이지유신 역시 오늘날의 이해와는 달리 초창기엔 막부의 봉건에서 천황의 봉건으로 이행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막상 왕정복고 이후에는 군현제 긍정론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는데, 그 시작은 1869년 1월의 판적봉환(版籍奉還)이었다. 당시 유신을 주도한 주요 번들은 판적봉환을 일단 영지와 인민을 천황에게 바친 뒤 다시 그 주인으로 인정받는, 다시 말해 천황의 봉건으로 이해했으나 역설적으로 이는 왕토왕민 사상을 다이묘의 입을 통해 강조한 꼴이었다. 이즈음 널리 확산된 서양에 대한 지식 역시 부국강병을 위해선 중앙집권과 능력위주의 인재선발을 중시하는 군현제가 필수적이라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번 내에서도 점차 출세에 목마른 중하급 사무라이들이 점차 실권을 잡으며 군현제는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추세가 되었고, 결국 1871년 7월 폐번치현(廃藩置懸)이 이루어진다.

 

  이처럼 막말 정치사는 봉건에서 군현으로의 점진적이고 상호침투적인 이행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막상 의회개설을 이 흐름에 어떻게 포함시킬지를 생각하면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 의회제란 군현보다는 봉건의 맥락에서 지지 또는 정당화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가령 의회개설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평가받는 19세기의 공의여론(公議與論) 사상은 공의기구 설치를 요구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각 번의 다이묘가 주체가 되는 열번회의(列藩會議)였다.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브레인이었던 니시 아마네(西周)가 제안한 의회제 역시 각 번의 다이묘를 상원에, 각 번에서 선발한 번사 한 명씩을 하원에 배치하는 등 봉건제를 기초로 삼고 있었다.(p.434.)

 

  반면 군현제의 경우 긍정되었다 해도 중앙집권이나 능력위주의 인재선발이 이유였지, 의회제와 관련해서 논의된 사례는 적어도 이 책에선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박훈의 말마따나 메이지유신 이후 “정부 원로에서부터 자유민권운동의 급진파에 이르기까지” 만인이 헌법제정과 의회개설의 필요성을 공유하고 있었다면(p.188.),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요나하처럼 의회개설은 ‘중국화’를 추진하며 겸사겸사 딸려온 ‘서양화’의 부산물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박훈은 이를 중국, 러시아, 오스만 제국, 조선 등 다른 비서구 지역과 구분되는 일본만의 위대한 성취라고 여기는 만큼, 보다 자세한 설명이 요구된다. 구체적으로 메이지 일본에서 의회제는 군현제에 봉건의 뜻을 깃들게 하는 것(㝢封建之意於郡縣之中)으로 받아들여졌는가, 아니면 아예 군현제의 맥락에서 새롭게 긍정되었는가?

 

  사실 이 책에는 채 담아내지 못했지만, 박훈은 이미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한 대답을 준비했다. 네이버 열린연단 강연에서 그는 일본의 의회제가 명백히 봉건제의 영향으로 등장했다고 이야기했을 뿐 아니라, 19세기 일본의 공론정치가 어떻게 근대 의회제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져왔는가를 러프하게나마 스케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메이지 초기 헌법 초안을 연구하는 많은 모임이 여전히 주자학 텍스트를 공부하던 ‘회독(會讀)’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언급으로 보아(p.62.), 근대 이후 유교의 향방에 대해서도 연구를 시작한 듯하다.

 

  무엇보다 박훈은 「결론」에서 정밀한 실증을 통해 ‘근대적’ 공업과 ‘전통적’ 소농경영이 융합하는 양상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 경제학자 다니모토 마사유키(谷本雅之)를 언급하며, ‘또 다른 근대’의 편린을 드러내고자 하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언제나 그의 글에서 중요한 인사이트를 얻었던 한 사람의 독자로서, 결코 쉽지 않겠지만 무척이나 흥미진진할 앞으로의 연구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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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찬근 2020-03-12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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