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4-05

서북청년단과 한경직 목사와 기독교 - 나무위키

(2) Okjin Park - 서북청년단과 한경직 목사와 기독교 - 나무위키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서북청년단과 한경직 목사와 기독교 - 나무위키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 규장문화사, 1982.)
1945년 9월에 한경직은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했으나 소련군의 진주로 그 해 10월 월남했으며 12월에 김재준의 도움을 받아 일본의 천리교 건물을 사들여 오늘날 '영락교회'의 시초인 '베다니 교회'를 열었다. 다음 해인 1946년에 교회에 속한 청년들이 중심이 된 서북청년회가 11월에 출범했으며 이들이 바로 서북청년단의 시초였다.
그 서북청년단은 잔혹하리만큼 철저한 반공정신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1947년에 3월 1일에 제주도에서 일어난 소요사태로 경찰 66명이 해임되자, 그 후임으로 투입되었다. 이후 벌어진 4.3 사건 때 제주도의 남로당이 5.10 총선거에 반대해 무장단을 결사해 경찰서를 습격하고 60여명이 사망하자, 제주도 한라산 일대에 계엄령을 내리고 그 주변부의 민간인들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남로당 무장대로 규정해 학살, 약탈, 강간 및 살인연습 등을 자행하였고, 그 중 서북청년단 무장단의 활약(...)이 가장 돋보였다.
이후 서북청년단은 한국 내 남로당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전향한 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한 '보도연맹'이 6.25 전쟁 중에 북한군에 부역행위할 가능성이 있다는 추정 이유로 북한군 미점령지역의 보도연맹 인원들을 예비검속 차원에서 대량학살한 보도연맹 학살사건 에서도 가장 앞장서서 학살에 나섰으며 그 밖에도 이승만 초상화와 태극기를 가지고 다니며 강매를 하였고 이에 불응하면 공산당 빨갱이로 누명을 씌워 고문, 폭행, 살해 등을 일삼고 가족들을 상대로 협박, 금품 갈취, 성상납, 강제결혼 등을 하였다.
이후 서북청년단은 5.16 군사정변 시기에 해체되었고, 그 참가인원들은 지방으로 옮겨 교회를 건축하고 자신들의 '반공행위'를 내세우며 목회를 하였다.
한경직은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공식 석상에서 인정하고 사죄하였으나, 영락교회에서 시작된 서북청년단의 만행에 대해서는 함구하였으며, 사죄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위의 발언처럼 자신의 저서를 통해 이들이 반공의 선두였으며 자랑스러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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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오금숙 (제주 4 3연구소 연구원)

4 3당시 산에 쌀을 올렸다가 곤욕을 치른 이춘형 할머니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증언 1 : 나는 1949년 1월경 여러 사람과 경찰서와 헌병대로 끌려 다녔습니다. 경찰서에서는 손을 뒤로 묶은 채 천장에 매달아 놓고 때렸어요. 헌병대로 옮겨진 후에는 전깃줄을 엄지손가락이나 뺨에 대는 전기 고문을 받았습니다. 나는 2주일 정도 수감되어 나왔지만 산에서 심부름하던 처녀들은 희생이 컸습니다. 아무개 처녀는 순경이 자신과 결혼을 하면 살려주마고 했지만 끝내 거절하여 죽었습니다. 또 아무개 처녀는 '다라쿳' 목장 부근에서 토벌대에게 잡혀 산채로 유방이 도려졌어요. 그녀는 고통을 참지 못해 땅바닥을 긁어 대 손톱이 다 빠졌고 그녀가 죽은 부근에는 잔디가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춘형(李春珩, 96년채록, 채록당시 8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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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증언 2 :얼굴이 고왔던 강상유는 명문가 집안에 시집갔으나 4 3당시 홀로 된 상태였었는데 탁대위는 강제로 그녀를 범한 후 함께 살다가 어쩐 일인지 그녀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서청단장인 김재능도 여자들을 많이 괴롭혔어요. 그는 양 아무개를 범했지만 그녀는 죽을 위기에 놓인 남동생을 살리기 위해 감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토벌대에게 누가 당했다더라'는 소문이 퍼지면 우린 전전긍긍했어요. 당시 멋쟁이 여성들도 많았는데 무서워서 가급적 나들이도 삼갔고 일부러 바보처럼 꾸미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강소희姜曕熙, 96년 채록, 채록당시 7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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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증언 3 : 나는 그때 마흔 두 살이었어. 경찰관이 다짜고짜 '네 서방 어디 갔나. 폭도질 하러 갔지' 하고 윽박질렀어. 내 남편은 해방 이후에도 일본에 계속 살았지. 그렇게 얘기해도 주먹질이야. 경찰은 그 사이에 겁을 먹고 골방에 숨어 있던 내 며느리를 붙잡아 공회당 터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며느리를 걸상 위에 누인 후 배 위에 긴 나무를 깔아 놓고 두 놈이 통나무 양쪽에 앉아 '네 서방 간 곳을 대라'고 고문했지. 차라리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달려드니 내 뺨을 때리면서 그 짓을 계속했어.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지.

경찰은 여러 사람을 심문하다가 갑자기 한 할아버지를 불러내 엎드리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또 할머니를 지목, 그 위에 올라타 마부 흉내를 내면서 빈 터를 돌게 했다. 고난향 할머니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때 그 하르방은 60세 가량이었고 할망은 그보다 몇 살 위였어. 두 사람은 괸당(친척)이었어. 마치 하르방 말에 채찍질하라는 듯 마늘 뿌리를 할망 손에 쥐어 주더군. 할망이 머뭇거리자 또다시 윽박질렀어. 사람의 얼굴을 갖고 어떻게 그런 짓을 시킬 수 있나.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자 '똑똑히 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어. 그런 모욕을 당할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어.

(高난향, 89년 채록, 채록당시 8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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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증언 4 : 토벌대는 큼직한 장작으로 무지막지하게 때렸어. 그러다가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모두 옷을 홀랑 벗겼지. 나는 당시 마흔 살이었는데 체면이고 뭐고 가릴 여지가 있나. 그냥 옷을 벗으라 하니 벗을 수밖에. 토벌대는 옷을 벗긴채 또 장작으로 매질을 했어. 그러다가 싫증이 났는지 얼마 없어서 처녀 한명과 총각 한명을 지명해 앞으로 불러내더니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짓을 강요하는 거였어. 인간들이 아니었지. 두사람이 어쩔줄 몰라 머뭇거리자 또 매질이야. 그러다 날이 저물어 가자 주민 4명을 끌고가 총을 쏘아 버렸어.

(좌봉左奉, 94년 채록, 채록당시 8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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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경찰 내부에서의 여성에 대한 성고문도 계속 발생한다. 4 3당시 서귀포 경찰서장을 역임했던 김호겸씨는 자신이 목격했던 일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증언 5 : 1948년 11월경 경찰서에서 숙직을 하고 있었는데 여자의 비명 소리가 나서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취조실로 가보니 한 여자가 나체인 상태로 거꾸로 매달려 고문당하고 있었어요. 내가 일본도를 들고 가서 화를 냈더니 취조하던 수사대원은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튿날 경찰청장에게 "최난수가 너무 한다. 이런 식으로 하면 제주 사람들은 점점 더 육지 사람들에게 등을 돌린다. 그러면 사태 진압이 어려워진다"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육지 출신의 특별수사대 경감 최난수는 막무가내였습니다."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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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1949년 3월 3일에는 한 군인이 처녀를 강간하려다 반항하자 총살한 사건이 벌어져 가족과 주민을 분노케 했다. 군인의 겁탈을 죽음으로 막은 사람은 강매옥(姜梅玉, 당시 19세)이었는데 강매옥의 언니 강경옥씨는 지금도 학살자의 성씨와 얼굴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증언 6 : 당시 친정집에는 군인 3∼4명이 임시 주둔했는데 그 중에서 '최상사'라는 놈이 동생을 죽였습니다. 동생은 참 예뻤죠. 그놈들은 처음에 처녀들을 몇 명 집합시켰다가 동생이 제일 곱다고 생각했는지 덮쳤습니다. 그러나 마음대로 안되자 총을 쏜 겁니다. 동생은 배꼽 부근에 총을 맞아 창자가 다 나올 정도로 처참한 모습으로 숨졌습니다.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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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심지어 임신 중이던 여성들에 대해서도 토벌대의 만행은 그치지 않았다. 토산리의 한 증언자는 "중산간을 순찰하던 토벌대가 임신부의 배를 창으로 찌르고 총으로 쏘았다."고 했다. 당시 29세였던 안기정씨는 임신 중에 토벌대가 쏜 총에 맞아 죽었고 선흘에 살고 계신 차경구 할머니는 임신 중에 보름간 고문당해 결국 아기를 유산 시켰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증언 7 : 남편은 목수일을 하느라 잠시 조천리에 가 있던 48년 9월 말께입니다. 하...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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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49년 1월 성읍리 주민들은 토벌대가 저지르는 한 모자(母子)에 대한 총살극을 지켜봐야 했다. 그들은 남편이 산에 올랐다는 이유로 그 부인과 갓난아기를 아무 거리낌없이 죽였다.

증언 8 : 대부분 토벌을 갔지만 마을을 지키기 위해 경찰 몇 명이 남이 있었습니다. 경찰은 민보단과 부인 회원을 모이게 한 후 한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그 여인은 난산리 출신으로서 신풍리에 시집간 사람인데 남편이 산에 오르자 자기 친척이 있는 우리 마을에 와서 살고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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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4 3이 양민 학살이라는 증거는 이렇듯 힘 약한 여성이나 노약자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희생사례가 많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 남성이 입산을 하면 그의 부인과 자식, 장모까지 학살하는 사례가 있었다. 그 당시 팽배했던 동서 냉전의 분위기는 어린아이들까지 '빨갱이 새끼'로 몰아 넣어 학살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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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이 시기에 여성에 대한 성폭행이나 강간 살해는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났으며, 사태가 완화돼 무장대와의 충돌 사건이 발생하지 않을 때에도 토벌대는 불가항력의 주민들을 처형했다. 주로 재력 있는 사람들이 금품을 갈취하려는 서북청년단에게 끌려가 희생되었다.

서청이 강제결혼을 감행하게 되는 원인은 두 가지 정도가 있는데 하나는 성적 대상물로 맘에 드는 여자를 골라 강제 결혼하는 사례와 또하나는 제주에 안착하려는 목적으로 재정적인 확보를 위하여 재력가의...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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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강제결혼 사례를 몇개 더 들어보자.

증언 10 : 나는 48년 11월 2일 서청 출신 박 아무개에게 끌려갔다. 그는 악명이 높았고 지금도 제주에서 잘 살고 있다. 그의 부인은 교사 출신 고아무개인데 그가 지서 주임 시절 강제 결혼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할 수 없이 애낳고 살고 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그들이 부부 동반한 것을 본적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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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이런 성폭행에 관련된 증언은 본인 자신이 하기 힘든 것임에 틀림 없다. 그래서 채록하는 과정에서도 당사자 본인의 증언보다 간접적인 증언을 더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아래의 증언자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직접 증언했다.

증언 12 : 난 해방 직후 음악동지회 시절부터 노래를 잘 부르기로 성내에 소문이 났었기 때문에 차출되었다. 이때 노래를 부르면서 토벌대 핵심부에 있던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그런데 서청단장 김재능이 나를 노렸다. 김재능이란 놈은 나이든 여자든 젊은 여자든 어떻게 하면 하룻밤 잠자리를 같이 해 볼까 궁리하는 놈이었다. 김재능에게 얼렁뚱땅 '다음에 보자'고 하여 도망쳐 나온 적도 있다. 또 2연대장이 날 노렸다. 한 번은 자신의 부하에게 날 몰래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그 부하들은 우리집 담을 넘다가 실수해서 우물에 빠지기도 했다. 나는 결국, 날 도와주었던 2연대 헌병 대장과 결혼했다.

(金아무개, 96년 채록, 채록당시 7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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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당시 서북청년단 서귀포 단장은 임아무개였는데 한 재력가의 사위가 됐다. 경찰 사찰계에서 근무하던 서청출신 김아무개도 역시 재력가의 사위가 되었다.

한 피해 여성과 교원양성소를 같이 다녔다는 할아버지는 아래와 같이 증언하였다.

증언 13 : 한 군인 장교가 교사를 하던 한 여성을 탐내서 그녀를 위협해 같이 살고 있었는데, 그 여성의 동생을 보고 반해서 이번에는 같이 살던 여성을 버리고 그 동생과 결혼하려 했다.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하자 군인들은 총으로 위협했다. 그 여성의 집은 양철집(그 당시의 양철집은 부잣집의 상징)이었는데 총구멍으로 범벅이 됐다. 결국 그 군인장교와 결혼한 동생은 육지에 가서 살다가 나중에는 이혼 당했다고 한다.

(李아무개, 98년 3월 채록, 채록당시 7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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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국전쟁사 Ⅰ}(445쪽 ∼446쪽)에 제주 여성과 결혼한 사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기록에는 제2연대장 함중령은 '과거 9연대 시절 민폐가 있었음을 인식, 이를 막아 신뢰를 얻었다'면서 그 증거로 '뒷날 제주도 여성과 결혼한 사병이 적지 않았다'고 적혀 있었다. 자신들의 욕심과 재정 확보를 위해 강제결혼한 것을 '신뢰를 얻어서 결혼했다'고 표현하는 이 기록을 보고 한탄을 금할 수 없었다. 강제결혼 당한 여성들은 어쩌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살아갔을 것이다. 이렇듯 여성의 인권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와 같은 왜곡된 기록을 통해 여성들의 인권은 더욱 실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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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3. 살아남은 여성들의 수난

4 3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으며 아픈 기억들을 오래도록 남겼다. 49년 1월 27일 정방폭포에서 희생된 사람 중 한 명인 송군옥의 아내는 남편이 죽은 후 눈이 멀었다. 주민 백문수 씨는 어린 손녀가 할머니의 지팡이 노릇을 하며 길을 지나던 모습을 이렇게 증언했다....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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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4 3 이후의 제주 경제는 극도의 가난으로 점철되었다. 초토화 작전으로 집은 불타고 재산도 상실된 가운데서 가장을 잃은 여성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동광리의 박경생 할머니는 4 3당시 39살 나이였다. 남편과 두 딸, 아들 한 명 등 전 가족이 몰살당한 후 50년 가까운 여생을 의지할 데 없이 홀로 어렵게 살다가 95년 작고하였다.

또 토벌대에게 총살당한 사람의 가족은 국가에서의 지원은커녕 연좌제에 묶여 장래가 막히기도 했다.(물론 실제야 어찌하였든 법률상으로 연좌제 폐지는 1984년에 이루어졌다) 연좌제인 경우 대토벌시기에 '대리학살'이라는 형태로 엄청나게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다. 그리고 끔찍했던 4 3 사태는 끝났지만 유족들은 자신의 조상들이 토벌대에게 죽었다는 이유 하나로 또다른 피해를 당해야 했다.

증언 15 :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서청 출신 순경들에게 구둣발로 채이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6 25가 나자 육군에 입대해 항공학교 조종사 모집시험에 합격했습니다. 1년 동안 1백 회 이상 출격하는 기록을 세웠지요. 그러나 어느 날 특부대에서 부르더니 아버지의 일을 이야기 하면서 더 이상 조종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는 작은 아들이 ROTC에 합격하고도 못 들어갔습니다.

(홍문평洪文平, 97년채록, 채록당시 6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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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이승만 장로는 서울에서 열린 서북청년단 총회에 참석하여 서청원들에게 "당신들이야말로 신원이 가장 확실한 사람들"이라고 격려하면서 '저기 남쪽 끝 외딴 섬에 빨갱이들이 있다'고 일러주었다. 대통령의 격려를 받은 서청은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빨갱이를 타도하러 가는 애국자들'로 둔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서청은 이북에서 쫓겨온 상태였고 "빨갱이들은 모두 씨를 말려야 한다"면서 극도의 증오감과 복수심을 안은 채 제주에 들어온 것이다. 그런 그들이 제주에 와서 '빨갱이 여편네'를 고문, 강간, 살해하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법률적으로도 죄의식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동서 냉전이 몰고 온 국가 폭력이고 잔혹한 인권유린이다.

한반도를 자신의 영향권 내에 두려는 미국과 남한만에서라도 권력을 장악하려 했던 이승만 정권에 의해 강화된 냉전 체제는 집단적 광기의 인권유린을 가능케 했던 가장 근원적이고 직접적인 요인이었다. 1948년 8월 24일 이승만 대통령과 주한미군사령관인 하지 장군 사이에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이 체결된다. 이것은 미군이 완전 철수하기 전까지 주한미군사령관이 한국군의 작전권은 물론, 미군 주둔에 필요한 기지와 시설의 지배권을 계속 갖는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미군정의 지원과 방조 하에 자행된 집단광기적 인권유린은 '서북청년단'의 만행에서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미군과 더불어 이승만은 서북청년단의 무소불위적 폭력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며 이들을 자신의 정권 장악에 이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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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ung Hyun Yang 서북청년단에 대해선 결국... 반공이란 우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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