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26

東學運動에 대한 유영익 교수의 再評價 - 원광대 사학과 이주천



column3-1

東學運動에 대한 유영익 교수의 再評價

원광대 사학과  이 주 천


1.

올해는 동학운동(학자의 견해에 따라 동학혁명, 갑오농민전쟁, 등 여러가지 개념을 주창할 수
있으나 편의상 운동으로 정의해 보았다)이 일어난지 꼭 100주년이 4년 앞으로 다가섬에 따라 학술계와 대학사회는 동학운동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일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 발맞추어 본교 사학과에서는 11월 9일 법당 4층에서 한림대학 사학과에 재직하고 계신 유영익 교수를 초청하여 {東 學亂(?)의 再評價}라는 제목으로 特講을 들을 기회를 가졌다. 물론 고고미술사학과와 공동으로 주체한 학술강연회였지만 여기에 국사교육과학생들도 대다수 참석하였고 강연이 끝난 후에도 열띤 토론이 진행되어 학생들의 동학운동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새삼 실감케 한 날이 되었다.


본고는 동학운동에 대한 새로운 학문적 가설이나 역사적 해석을 시도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 날 유영익 교수의 {東學亂(?)에 대한 재평가}라는 특강은 비록 그의 학문적 시도가 아직은 완성된 것이 아닌 것일지라도 기존의 한국역사학계에 큰 충격과 반향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기에 그의 견해를 소개하고 결론적으로 앞으로의 東學史硏究에 관한 필자의 입장을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2.

유영익 교수는 우선 과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현재 역사가가 가진 편견이나 지적 이데올로기가 과거의 진실한 역사상을 왜곡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맞추어 역사를 해석하려는 경향이 근자에 와서 더욱 심화되었다고 말했다. 유교수는 한국의 근현대사 를 근대민족주의와 사회주의(민중주의와 민주주의도 여기에 포함)의 입장에서 보려는 2가지 견해가 두드러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따라서 그런 입장에서 동학운동(유교수는 강연에서 동학난으로 용어를 통일해 사용했으나 동학난이란 성격을 지지하기 때문에 사용한 것은 결코 아님)을 제1기와 제2기로 나누어서 제1기는 1894년 4월에서 6월까지로 '東學義擧'로 보고 제2기는 1894년 10월부터 12월까지로 '東學義兵'으로 규정지었다. 유교수는 제2기 동학의병기를 근대 조선말기의 의병운동 의 일환으로 파악했고, 이 점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논란의 대상이 되는 부문은 제1기에 관한 성격규정인 데 유교수에 의하면 "초기 동학의 거사는 국한된 목표, 즉 부패한 집권세력인 민씨일파의 제거와 부패한 관리들의 숙청 등을 요구한 것이었으므로 결코 처음부터 社會革明을 원한 것이 아닌 일종의 忠君愛國의 정신으로 義擧를 일으켰다" 는 것이다. 그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다만 봉기가 장기화되면 보다 농민혁명으로 변질될 가능성 은 충분히 내재해 있었다"고 부연하여 설명했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 유교수는 동학운동관계의 사료를 하나하나 제시해 나갔다. 유교수에 의 하면, 동학이 사회혁명적 성격을 가지는데 있어서 기존의 학계가 가장 많이 인용하는 부분이 폐정 개혁 12개조 중 12조인 "土地는 分作케 한다"는 부분이다. 그는 1차 사료에서 이 항목이 구체적으 로 열거되어 있는 지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국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한 {東學亂記錄 2卷}(1959), {駐韓日本公使館記錄}(1989), {서울주재 미공사의 外交公文}, 黃玹의 梧下新聞}, 김윤식의 {續陰 晴史}, 鄭喬의 {大韓季年史}, 아세아문화사편 {東學思想資料集} 3권(1979), 천도교의 {天道敎書}, {天道敎創建史}, {侍天敎繹史} 등을 면밀히 살펴보니 토지균분에 대한 언급이 없음을 발견하게 된 다. 그런데 오지영이 쓴 <동학사> (1940)에서 폐정개혁 12조 토지는 분작케 한다는 조항이 들어있 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유교수는 하바드대학 도서관에서 오지영의 <동학사>원본을 발견하여 그 책 표지에 「역사소설」이라는 부제를 보고 경악했다. 그는 또 1940년에 쓴 오지영의 (동학사)는 개정판으로 1920년에 쓴 초판과 내용이 약간 틀림을 발견했다. 유교수에 의하면 오지영의 <동학 사>가 가장 많이 해방후에 인용되고 있는 문제의 책으로서 1940년대에 사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동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서 해방전에는 한국인으로 황의돈, 장도빈, 김유기, 차상찬 등이 있 고, 일본인학자, 국지겸양, 전보교결, 미국인으로 Isabella B. Bishop와 Honer B. Halbert등이 있으나 12조 토지균분(土地均分)에 관한 내용을 보지 못했다고 유교수는 주장했다.

해방후의 연구 실적을 보면, 사회주의 학자인 전석담의 「갑오동학란의 재검토」(1946)와 공산당원이 박헌영의 「동학란과 그 교훈」(1947)은 그 내용이 비슷하다. 박헌영은 전석담의 글을 주로 인용하면서 전봉준의 노선을 비판했다. 즉 전봉준은 군주제를 지지했으며 토지혁명과 민주주의정 권의 수립에 관한 구체적 내용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1950년 이후는 김용섭의 「전봉준 공초연구」(1958), 오길보의 「갑오농민전쟁과 동학」(1959)등
은 오지영의 동학사를 인용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뒤의 많은 학자들도 정도에 따라 다르나 직간접으로 오지영의 글을 인용하거나 재인용하는 잘못을 범했다고 유교수는 지적했다.
필자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선 이기백의 「한국사신론」(1973)을 보니 참고문헌속에 오지영의 <동학사>(1940)가 포함되어 있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에서는 동학운 동당시에 토지균분에 해당하는 조목을 설명되지 않고 『첫째는 양반관기들의 부당한 가령주구를 배격하는 조목들이며, 둘째는 외국상인의 침투에 따른 상행위(商行爲)를 반대하는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p.319) 그러나 한우근의 [한국용사](1973)를 보면 참고문헌에 오지영의 <동학사>가 인용되었음은 물론 12개의 설명이 자세히 수록되어있다.

『그것은 먼저 동학교인과 정부사이의 오랜 혐오감을 없이하여 서정(庶政)에 협력해야할 것을 전 제하고, 탐관오리, 양반, 부호들의 횡포와 침학을 엄징할 것과 노비문서의 소각, 신분차별의 개 선,과부재가의 허용, 토지균분제의 실시 등 사회개혁 정강을 선포하고 외제(일본인)과 내통하는 자에 대한 엄징을 다짐한 것』이었다.(p.461)

Ⅲ.
유교수는 결론적으로 말해서 다음 3가지 점에서 그의 [동학의거-동학의병]논을 구체화시켰다.

첫째, 전봉준의 교육적 배경이 유학자의 집안이라는 점이다. 그의 부친이 고부군수에게 부당하게 창살당하였고, 이것이 그가 봉기한 직접적인 이유라는 것이다. 그는 한시(漢詩)에 능통했으며 무 엇보다 그는 유학자요 일급 학자라는 것은 거사보고문에서 쓴 내용을 보아 잘 알수 있다는 것이 다.
둘째, 천도교의 기록에 의하면 대원군과 공모를 도모했다는 점이다. 대원군은 왕도사상(王道思想)을 가진 인물로서 민씨일파를 제거하려했고 그것에 동학 교도들을 이용하려 했다는 점이다. 즉, 동학교도들이 혁명이나 계급전쟁을 원했다면 대원군에게 접선할 필요는 없었다는 것이다.
셋째, 봉기시의 결문과 폐정개혁안의 내용은 보수주의적인 함축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폐정개혁안의 내용은 원래 주로 지방악질관리의 제거, 보부상의 척결, 대원군의 복귀, 세금의 인하, 대전통법에 따른 대동법(大同法)시행령의 요구가 대부분이었지 양반제도를 철폐하라거나 노비를 없애거나, 토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는 것이다.

유교수는 이점에서 특히 청중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최근 서강대 박사과정의 노용필이 1989년에 동학연구, [오지영의 인물에 관한 연구]에서 자신과 유사한 견해를 발표했다고 말했다. 노용필은 오지영이 쓴 초고는 1920년에 써졌고 재판(1940)의 12개의 내용과는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다는 것 이다.

Ⅳ.
유영익교수의 강연은 그 자체가 대단한 지적 충격을 청중들에게 안겨주었다. 그는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하바드대학에서 갑오경장의 개혁에 관한 연구로서 1972년에 박사학위를 받았 으므로 그의 학문적 권위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특히 유교수가 오랫동안 미국에서 단련한 철저한 사료비판의 정신은 만인의 귀감이 되기에 족했 다. 최근 한국의 사학계가 이데올로기에 의해 편향된 역사서술 태도가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 음을 고려해볼 때 역사가 랑케가 말한 [과거의 있는 그대로의]역사상의 구현정신은 높이 평가할 가치가 있는 태도였다.
그러나 유교수는 동학운동에 대한 해석이 논리적 일관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몇가지 의문점을 지 적해 보고져 한다.

첫째, 유교수의 동학운동에 대한 해석은 정치, 경제면에 국한하여 폐정개혁12조에 국한한 것으로 동학을 사상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분석하는 측면을 도외시한 면이 있다. 동학교의 성립배경과 그것이 가지고 있는 민중성과 외세관은 동학의거로 규정짓기에는 너무도 포괄적인 시대정신을 함 유한 것이 아닐까?
둘째, 보다 중요한 의문점은 전봉준 개인과 동학군과의 관계이다. 전봉준이 유학의 배경을 가지고 동학포고문을 작성했지만 전봉준의 동학의거에 대한 사상적 토대와 기반이 반드시 거기에 가담 했던 대다수 농민들과 같은 것이었을까?
거사를 일으킨 지도층(유학층: 양반)과 농민층은 과연 이해관계가 일치했을까? 또 만약 동학농민 층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구체적 증거는 무엇인가? 또 동학운동의 궁극적 실패요인은 무엇인가?
필자는 유교수의 동학의거에 대한 견해에는 많은 부분을 동의하나

 ①전봉준을 위시한 동학지도층 은 양반계급으로서 민비세력의 척결을 요구하는 국가시책을 시정하라는 차원으로 머물렀으나, 동 학교도의 대부분을 차지한 농민들이 전봉준 등과 같은 유교적 사교방식에서 머물러 있었다면 그구체적 증거가 사회 경제적 측면에서 미세하게 분석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 동학 농민 들의 회고록이나, 아니면 그들 후손들을 찾아내어서 구체적인 연구를 진행시켜야 할 것이다. 

②동 학운동이 유교수의 지적대로 사회혁명으로 진화하지 못했다면 그 원인은 다름아닌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외압때문이었다. 동학농민층이 봉건지주세력을 분쇄할 힘을 키우기 전에 일제의 대륙 침입은 한반도의 독립을 위협했던 것이고 이러한 국권의 위기 속에서 반봉건과 반외세의 기치를 앞세웠지만 근대화된 일본군과 관군의 토벌작전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 제1차봉기 때에 동학군의 지도층의 세계정세에 대한 정보의 부재, 우유부단성 등이 혁명적 열기를 약화시켰 던 것이고 이것이 민비집권층에게 시간을 벌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동학운동이 실패한 후, 수 많은 동학교도들이 변절하였고 또 은신처도 도피하여 후세의 사가들이 동학을 연구하는데 큰 어려움을 주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정부의 가혹한 탄압은 동학운동에 참가한 인물들이 자필적 기록을 외면하게 하거나 말살시키는데 일조를 했다.

이번 유영익교수의 동학에 대한 난(?) 특강은 기존의 역사가들이 얼마나 사료비판에 철저했었나 하는 반성과 함께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인 [기록보존의 문제점]이 한국의 역사연구에 큰 장애 물로 부각되고 있음을 다시한번 되새기게 한 점에서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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