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26

1906 손민석 - [장석준 칼럼] 동학농민혁명군은 농지 개혁을 바랐는가 내 기억에 장석준 선생이 인용하고 계시는 노용필...


손민석
54 mins ·

[장석준 칼럼] 동학농민혁명군은 농지 개혁을 바랐는가

내 기억에 장석준 선생이 인용하고 계시는 노용필 선생의 그 논문에서 노용필 선생은 폐정개혁안 12조에서의 토지분작은 오지영의 ‘개인적인 희망사항’이라고 보인다고 지적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국내 학계에서 이에 대해 검토한 사례 자체가 그다지 없다.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이 문제를 직접 다룬 가장 최근의 연구논문이 배항섭 선생의 ‘<동학사>의 제1차 동학농민전쟁 전개과정에 대한 서술 내용 분석’이라는 것인데 여기에서도 결론은 그 내용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 부분은 사실 국정교과서 파동이나 이런 것이 일어났을 당시에도 논란이 되었던 것인데 토지개혁 내용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상당히 많은 부분이 논란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동학농민봉기는 조선왕조에 가해진 최후의 일격이면서 그 모순이 집약된 대사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근대로의 이행에 있어서 조선왕조라는 전근대 사회의 전개 과정에서 배태된 모순이 세계자본주의와 접촉하는 와중에 폭발한 것이기 때문에 이 사건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조선왕조의 사회구성체의 성격이 달라진다.

내가 기억하기로 자본주의 맹아론을 주장하며 한국 사회경제사 연구에 큰 영향을 미친 김용섭 선생 또한 석사학위였나 아무튼 그 연구의 시작을 동학농민봉기로 했던 걸로 기억한다.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어째서 농민들이 토지분작 같은 요구를 하게 되었는가, 대규모의 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는가 등으로 나아갔던 걸로 기억한다. 그의 결론은 한국 사회가 유럽사회와 마찬가지로 ‘세계사의 기본법칙’을 준수하며 나아갔다는 것이고, 그런 맥락에서 동학농민봉기는 ‘아래로부터의 근대화’ 길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그러한 의의가 있는 것인데 장석준 선생의 말이 맞기 위해서는 농민들이 토지개혁을 요구할 수 있는 조건이 존재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장석준 선생이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부동산 불균형으로 인해 제2의 농지개혁과 같은 토지개혁을 요한다고 보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농민들이 토지분작을 요구하며 대규모로 봉기하기 위해서는 조선왕조 하에서의 토지모순의 상황이 심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듯 조선왕조의 전개 속에서 배태된 모순이 토지개혁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조선왕조의 사회구성체가 유럽의 그것과 같은 유형의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과연 그러했던가. 조선왕조는 유럽 사회와 같이 사적 영주(=지주)에 의해 모순이 배태되는 사회였던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지주라는 말 자체가 일본제국을 통해 수입된 사회에서(동양에는 애당초 ‘지주’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19세기의 사상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것을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지주가 사회경제적으로 주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건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조선왕조에서는 토지관계가 국가를 중심으로 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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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봉기에 관한 연구나 자료들을 보아도 동학군이 지주를 공격하였다는 사례는 내가 기억하기로 거의 없다. 동학군이 문제삼았던 것은 ‘국가기구’이지 지주가 아니다. 안병태 선생이 이미 1970년대에 지적했던 사실이다. 왜 그러했던가.

조선왕조가 국가적으로 환곡제를 운용하며 농민의 가계를 뒷받침해며 사회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던 것이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생산성의 하락, 재정운용의 실패 등이 겹치면서 환곡제가 사실상 해체되어버린다. 19세기 당시 지방수령들은 중앙에의 상납분, 자체적인 지방재정 운용비, 그리고 환곡 등의 비축분의 확보라는 압박 속에서 재정을 충당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지방관이 지방 유지들과 결탁하거나 환곡에 들어갈 곡식까지 횡령하는 경우나 이무(移貿)라고 하여 일종의 환곡을 갖고 장사질을 하는 행위까지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중앙재정은 중앙재정 나름대로, 지방재정은 지방재정 나름대로 모두 곤란을 겪고 있었고 그러한 곤란은 곧바로 농민에게 전가되었다. 악순환이었다.

환곡이 축나는 다양한 사례와 그 유형에 대해서는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매우 자세하다. 송찬섭 선생은 이에 대해 1810년대에서 1860년까지 반세기만에 거의 1천만 석에 달하는 환곡이 거의 탕진되었다고 지적하였다. 관료기구의 제도적 미비가 부정부패, 기강해이 등을 낳았다고 본다. 팔레 선생의 지적처럼 조선왕조는 제도적으로 배태된 문제를 제도로 해결하지 않고 양반 관료의 개인적 심성에 기대어 해결하려 하는 무능한 국가였다.

환곡의 분배기능이 해체되자 곧바로 쌀가격은 폭등하였고 소농의 가계 운용의 안정성은 점차로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전남 지방의 쌀값은 1850년대까지 1석당 2~3냥 수준이었는데, 1860년대 이후 4~6냥으로 배나 뛰었다. 사회적 위기를 방지할 환곡이라는 방파제가 사라지자 농민의 대규모적 몰락이 시작되었다. 조선왕조는 오늘날의 한국사회가 그러하듯이 개인의 파산 위기를 지탱해줄 공동체적 기제들이 존재하지 않는 원자화된 사회였다. 기껏해야 친족공동체정도가 개인을 보호하고 지탱해줄 수 있었지 그 외의 다른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는 위기를 해소하는 역할보다 되려 위기를 추동하는 역할을 하였으니 그에 대한 농민의 반응이 어떠했겠나.

1894년의 위기는 1997년의 위기와 같이 보아야 한다. 외환위기와 동학농민봉기라는 두 사건은 하나는 근대 한국사회의 전개 과정에서 배태된 모순이, 다른 하나는 전근대 한국사회의 전개 과정 속에서 배태된 모순이 폭발한 것이다. 두 사건 모두 위기를 추동했던 것은 국가였지만 정작 위기의 해결 과정에서는 “국가의 부재”가 두드러졌다.

‘국가의 부재’는 원자화된 개인들의 각자도생을 낳는다. 그 각자도생 속에서 사회적 삶의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살아남기 위해 개인들은 가혹한 경쟁 속에 놓이게 된다. 이 압박을 견디지 못하는 개인은 낙오되거나 도태되어 사회로부터 스스로 탈출하고자 한다. OECD 국가 가운데 1위, 세계 2위의 자살률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매년 인구 10만 명당 31명의 한국인들이 자살을 택한다.

이런 압박을 견디기 위해서라도 개인은 자신이 속한 이익단체의 이해관계에 목숨을 걸고, 그 이해관계를 위해 극한의 대립을 택한다. 정치는 ‘공공’을 다루는 공간이 아니라 사적인 이익집단들의 극한의 대립이 펼쳐지는 장이 된다. 그리고 여기서 이기는 사적 이익집단이 사회 전체에 자신의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국가의 부재’가 모든 사안의 “국가로의 환원”을 낳은 것이다. 한국인들이 지니고 있는 그 강렬한 국가로의 귀속의지, 그리고 국가에 자신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기 위한 강렬한 평등주의는 모두 국가의 부재가 낳은 산물이라 생각한다.

정의당과 같은 오늘날의 진보좌파 정당이 해야 할 일은 “자본”의 시대에 “토지” 분배와 같은 것을 고민하는 게 아니다. 지대를 줄이는 고민은 분명 필요한 것이지만, 전근대 사회에서의 생산수단의 재분배와 현대 사회에서의 그것은 전연 의미가 다르다. 보다 구체적인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국가의 부재’라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 개인의 재생산에 드는 비용을 어떻게 사회화하여 보다 효율적이고 높은 수준의 통합성을 갖춘 공동체를 창출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장석준 선생의 고민은 그런 의미에서 좀 잘못된 것이라 생각된다. 여기에는 무의미한 정파적 입장과 계급투쟁의 관점만 존재할 뿐이지, 사회 전체의 발전을 어떻게 추동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사라져 있다. 참 아쉽다.




PRESSIAN.COM

동학혁명 참가자가 남긴 거의 유일한 기록을 들추다
동학농민혁명을 다룬 드라마 녹두꽃이 SBS에서 방영 중이다. 요즘은 1차 봉기가 전주화약으로 끝나고 아직 2차 봉기가 시작되기 전인 1894년 여름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데, 특히 전주화약 장면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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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om Chang Kang 크 명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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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감사합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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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om Chang Kang 복지국가를 한다 하더라도 '생산성'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정의당에게는 오히려 '제조업' 정책을 어떻게 할것인가가 가장 중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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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그렇지요. 어떻게 노동력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할 것이며, 특히나 제가 항상 말하는 자영업과 같은 이들을 어떻게 줄일 것인가에 대해 산업정책 - 노동정책 등을 연계시켜서 고민해야 하는데.. 좀 아쉽습니다 그런 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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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om Chang Kang 학교 도서관에 신청한 여영국 의원이 도의원 시절 창원 성산 상남동 자영업에 대해 쓴 책인 '상남동 사람들'이 와서 오늘 빌렸는데요. 거기서 자영업시장이란 노동시장의 그림자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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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강범창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노동정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니 도태된 이들이 모이는 곳이랄까요. 저는 여기서도 위에서 말한 ‘국가의 부재’를 많이 느낍니다. 한국은 기묘하게도 국가가 굉장히 강하면서도 정작 필요한 곳에는 없는 것 같아요. 전에 법학 수업 들을 때도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그러시더군요. 공법 수업을 담당하면서 할 말은 아니지만 국가는 여러분을 도와주지 않으니 무조건 개인이 알아서 잘 조심해서 사는 수밖에 없다고. 적절한 표현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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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om Chang Kang 같은 흐름인거 같아요.
그 양반은 일터와 거리에서 깨달았으니, 우리같은 먹물들과는 또 다른 눈을 가질 수 있죠. 그래서 요즘 주목하고 있습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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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om Chang Kang 역설적이게도 ‘국가의 부재’가 모든 사안의 “국가로의 환원”을 낳은 것이다.

이 문장이 아주 날카롭게 찌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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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강범창 그 책은 읽어봐야겠네요ㅎㅎ 그런 환원이 제일 문제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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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om Chang Kang 저도 이제 읽기 시작했어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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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om Chang Kang 또 상남동이 한국의 3대(제 기준에서... 나머지 두개는 여수와 울산) 중화학공업 도시 가운데 하나인 창원에서 가장 큰 번화가니까 더욱 두드러질 것이라 기대하며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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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 Jin Jang 허락해주신다면, 공유하고 두고두고 읽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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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언제나 제 글은 거의 전부 다 전체공개입니다ㅎㅎ 편하게 이용하셔도 괜찮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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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2352426595033465&id=100007984419688 요링크 이용하시면 글까지 공유됩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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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m Choi 국가의 부재가 국가로의 환원을 낳는다. 마치 진공 속으로 공기가 빨려들어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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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이게 사실 우익 쪽에서는 저 말을 안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게.. 오지영의 <동학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게 된 건 북조선의 사학자 오길보가 <동학사>의 폐정개혁 부분을 인용하여 그것이 일본학계에 반영되었던 게 계기라 한다. 북조선의 역사서술에 동의하는 사회주의적 어쩌고 그러면서 비난하는건데.. 참 피곤한 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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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참가자가 남긴 거의 유일한 기록을 들추다
[장석준 칼럼] 동학농민혁명군은 농지 개혁을 바랐는가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2019.06.25 14:37:59

동학혁명 참가자가 남긴 거의 유일한 기록을 들추다


동학농민혁명을 다룬 드라마 <녹두꽃>이 SBS에서 방영 중이다. 요즘은 1차 봉기가 전주화약으로 끝나고 아직 2차 봉기가 시작되기 전인 1894년 여름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데, 특히 전주화약 장면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만큼 뜨겁고 강렬했다.


농민군 대장 전봉준은 초토사 홍계훈에게 화의 조건으로 당당히 폐정개혁안을 내밀었다. 드디어 화약을 맺고 호남 곳곳에 민중 자치 기관인 도소와 집강소를 설치한 뒤에는 다시 전라도관찰사 김학진에게 새로 정리한 폐정개혁안 12조를 제시했다. 혁명군으로 나선 민중의 간절한 바람을 아우른 이 개혁안의 마지막 조항은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하게 할 것"이었다.


얼마나 명쾌하고 대담한 요구인가! 갑오년 농민혁명군 역시 역사상 가장 철저한 민주주의 혁명들의 공통 요구였던 토지 개혁을 바란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조항이 논란거리다. 동학농민혁명을 돋보이게 만드는 폐정개혁안 제12조가 정말 사실인지 의심스럽다고 한다. 아니, 허구라고 단언하는 이들까지 있다.


폐정개혁안 12조를 전한 오지영의 <동학사>

학교 다닐 적에 국사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일수록 의아하게 여길 것이다. 여러 국사 교과서에 농지 개혁이 포함된 폐정개혁안 12조가 실려 있고, 각종 시험 문제로도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봉준이 정부에 이를 요구했다는 기사는 오직 한 문헌에만 나온다. 1940년에 발간된 오지영의 <동학사>다. 다른 문헌에는 전하지 않으며, 당대 자료도 없다.


그러니 역사학자라면, 의문을 던질 만도 하다. 동학농민혁명이 있고 40년도 더 지난 뒤에 출간된 책에 처음 나오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게다가 또 다른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오지영의 <동학사> 초판은 '소설(小說)'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었다. 폐정개혁안 12조가 완전히 허구라 주장하는 이들은 이를 결정적인 근거로 든다. <동학사>가 사료 가치가 전혀 없는 창작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렵지 않게 반박될 수 있다. 오지영의 <동학사>는 역사가가 쓴 체계적 사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소설'이라 부르며 떠올리는 그런 픽션도 아니다. 굳이 말하면, 회고록에 가깝다. 한문 세대에 속했던 오지영은 자신의 회고에 '동학사'라는 제목을 붙이며 겸양의 의미로 '小說'이라는 말을 덧붙였을 뿐이다. '한 소박한 참여자의 회고' 정도의 뜻이겠다.

검증을 하려면, 폐정개혁안의 본래 내용은 전혀 달랐다거나 그런 정리된 요구안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들을 찾아내야 한다. 아니면, 유일한 증언자인 오지영이 어떤 인물인지 뜯어보아야 한다. 많은 이들에게 생소할 이름인 오지영, 그는 과연 믿을만한 증인인가?


오지영(吳知泳)은 1868년생이다. 갑오년 봉기가 처음 시작된 전라북도 고부군 무장현이 고향이다. 전봉준처럼 그도 몰락 양반 집안 출신으로, 시대의 대안을 찾아 헤매다 스물 세 살 되던 1891년에 동학에 입교했다. <동학사>의 회고에 따르면, 갑오년 이전에 이미 관리들의 눈 밖에 나 고향에 더 머물 수 없게 되자 처가인 익산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농민혁명을 맞이했다(오지영의 초기 행적에 대해서는 노용필, <'동학사'와 집강소 연구>, 국학연구원, 2000.을 주로 참고했다).


농민혁명 와중에 그가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는 베일에 가려 있다. <동학사>에서는 자신이 해월 최시형이 끄는 동학 북접의 밀명을 받고 농민혁명을 이끄는 남접에 파견돼 남북접의 조정 역할을 맡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역시 <동학사> 외에는 오지영이 최시형과 그토록 가까운 인물이었다는 기록이 없다.





▲ SBS 드라마 녹두꽃 ⓒ SBS 제공

한편 1차 봉기 이후 익산 집강소에서 활동한 인물들 가운데 오지영이라는 이름이 끼어 있는 자료가 있다. 그렇다면 익산에 머물다가 1차 봉기에 호응해 참여했다고 볼 수 있겠다. <동학사>의 회고를 다 믿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가 동학농민혁명에 적극 가담한 것만큼은 사실인 것이다. 그는 고부 봉기와 전주성 함락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익산에서 도소 및 집강소를 조직해 활동했고 남북접이 연합한 2차 봉기에 함께 했다.


이 점에서 <동학사>는 쉽게 무시할 수 있는 문헌은 분명 아니다. 우리에게는 농민혁명군에 참가한 이들이 직접 남긴 기록이 거의 없다. 전봉준도, 손화중도, 김개남도 그런 글월을 남기지 못했다. 절명시나 창의문의 몇 단락, 적들이 남긴 취조 문서 정도에서 그들의 속마음을 유추해야 한다. 아니면 갑오년 사건 자체가 주제는 아닌 <백범일지> 같은 문헌에서 단편적 회고를 접하며 만족해야 하는 처지다.


<동학사>는 이런 상황에서 농민혁명 참가자가 책으로 남긴 거의 유일한 회고다. 40여 년 뒤에 정리됐기에 기억이 왜곡됐을 수도 있지만, 정반대로 적대자들의 기록에는 남을 수 없는 기억과 만나는 희귀한 통로일 수도 있다. 농민혁명군이 당장 실현할 과제로는 여기지 않았지만 궁극 목표로는 염두에 뒀던 바가 다른 기록이 아니라 한 참가자의 회고에만 전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동학사>의 증언에 회의하는 역사학자들도 있지만 또 다른 적지 않은 학자들이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동학농민혁명, 천도교 혁신운동 그리고 고려혁명당


흥미로운 것은 이후 오지영의 인생 역정이다. 동학농민혁명이 참담한 패배로 끝난 뒤에 그는 다른 동학 교인들처럼 목숨을 부지하고 입에 풀칠할 길을 찾으며 한 세월을 보낸 듯하다. 한때는 고관대작에게 줄을 대 관직을 얻어 일한 적도 있었다(오지영의 후기 행적은 김정인, <천도교 근대 민족운동 연구>, 한울. 2009.를 주로 참고했다).


그러다 다시 뜻을 펼칠 기회가 열렸다. 1904년 일본에 망명 갔던 손병희가 귀국해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하고 대대적인 포교 활동에 나섰다. 오지영은 이에 호응해 익산에서 천도교 간부로 활약했다. 천도교가 문명개화 노선을 채택하자 그 역시 호남학회에 가입해 애국계몽운동을 벌였다. 국권을 상실한 뒤인 1911년에는 손병희의 인정을 받아 경성에서 천도교 중앙 간부로 활동하게 된다.


이후 천도교 역사에서 오지영이라는 이름이 전면에 부각되는 것은 3.1운동 직후인 1920년대 초다. 그때 천도교 안에서는 혁신운동이 벌어졌다. "중앙집권에서 지방분권으로", "독재에서 중의(衆議)로", "차별에서 평등으로"를 내걸며 교단 제도 전반을 뜯어고치자는 운동이었다. 오지영은 이 운동에 앞장선 중견 간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운동의 중심에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 항일 민족해방운동의 풍운아가 있었다. 바로 최시형의 아들이며 손병희의 조카인 최동희(1890-1927)다.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 최동희는 3.1운동 전부터 천도교의 대일 투쟁 노선을 두고 숙부 손병희와 대립했다. 그는 갑오년 봉기 같은 무장 투쟁을 부르짖으며 연해주 등지를 떠돌다 3.1운동으로 손병희가 투옥된 뒤에 귀국했다. 돌아오자마자 그는 천도교 혁신운동에 착수했다. 그는 교단을 철저히 민주주의 방식으로 운영하려 했다. 교주가 일방적으로 권위를 행사하는 게 아니라 교인들이 뽑은 의정원이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체제를 꿈꿨다. 천도교 안에 일종의 민주공화정을 세우려 한 것이다.


중견 간부인 오지영은 이런 최동희의 구상을 열렬히 지지했다. 당시는 3.1운동의 여진 속에 사회운동이 급성장하던 시절이었기에 천도교 혁신운동 역시 교단 안팎에서 뜨거운 관심과 지지를 받았다. 한때는 이런 분위기에 압도된 천도교 내 각 파벌이 혁신파의 요구를 상당히 수용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손병희가 옥고 끝에 병사한 1922년에 보수파 연합의 거센 반격이 시작됐다. 권동진, 오세창의 천도교 구파, 최린, 이돈화의 천도교 신파 모두 혁신파를 공박하며 옛 교단 질서를 복구했다.


최동희, 오지영 등 혁신파는 결국 기존 교단에서 나와 천도교연합회라는 독자 조직을 결성했다. 천도교 내부 혁신에는 일단 실패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혁신파의 목표는 단지 교단 혁신만이 아니었다. 최동희는 천도교를 민주적 대중조직 형태로 재편한 뒤에 이를 항일 투쟁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 그는 동학농민혁명의 강령을 "왕실 전복, 귀족 박멸, 빈부귀천의 계급 타파, 국토 평균 분작"으로 재정리하고 동학 사상을 바탕으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통합하려 했다. 더 나아가 그는 코민테른과 제휴하여 만주에 혁명 근거지를 건설하려 했다.


천도교 혁신파의 이런 대담한 구상은 어느 정도 성과를 내기도 했다. 1925년 무렵 최동희는 길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조직 정의부와 접촉했다. 그는 정의부의 이념적 지주였던 양기탁과 만나 만주와 국내를 이으며 항일 투쟁을 지도할 정당을 건설하기로 합의했다. 1926년 정의부와 천도교연합회에 형평사(백정의 신분해방운동) 일부 간부까지 가세해 새 당을 창당했다. 민족 해방과 계급 해방의 동시 실현을 내건 고려혁명당이었다.


오지영은 바로 이 고려혁명당의 야심 찬 사업 중 하나로 만주에 조선인 자치촌을 건설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고려혁명당 창당 직후에 익산의 천도교연합회원 230여 명을 길림으로 이주시켜 농장을 건설했다. 이 농장에서는 모두가 공동 경작을 하고 수확물을 공동 관리했다. 그래서 "인내천 취지 아래 건설된 공산국"이라는 평까지 받았다.


그러나 곧바로 시련이 닥쳤다. 혁신파의 구심인 최동희가 풍찬노숙 끝에 얻은 폐병으로 1927년 돌연 세상을 뜨고 말았다. 고려혁명당 역시 1926년 말부터 오동진, 정이형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이 대거 체포돼 사실상 와해 상태에 이르렀다. 오지영 등은 항일운동 기지를 건설하려던 애초 구상이 실패한 상황에서 공동농장을 어렵게 꾸려가야 했다. 그러다 결국 농장을 정리하고 국내로 돌아왔다.


귀국 과정에서 천도교 신파의 최린 등에게 도움을 받은 오지영과 동지들은 1940년에 추진된 천도교 교단 재통합 과정에 참여했다. 통합의 주 당사자는 구파와 신파였지만, 혁신파의 남은 이들 역시 이에 합류했다. 통합을 주도한 신파는 당시 노골적인 친일 노선을 걷고 있었다. 따라서 신파에 사실상 흡수된 구파와 혁신파 잔존 세력 역시 일제에 협력하는 길을 걷기에 이른다. 적극적 친일 행위자 명단에서 오지영의 이름은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결과는 이러했다.


<동학사>는 바로 이 시점에 세상에 나왔다. 모처럼 교단을 재통합하는 과정에서 오지영은 천도교, 아니 동학의 역사를 정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일제가 가장 떠들썩하게 승리의 나팔을 울리던 그 때에 그는 갑오년의 기억을 다시 불러내 활자로 남겼다.


토지 혁명이라는 이상의 '증거'가 되다

이것이 <동학사> 저자가 남긴 삶의 궤적이다. 그는 과연 믿을만한 증인인가, 아닌가? 여전히 뭐라 단정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농민혁명군 폐정개혁안에 토지 혁명의 이상이 담겨 있었는지 여부도 판정하기 난감하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발상을 전환해보면 좋겠다. 우리는 이제껏 오지영이 폐정개혁안 제12조의 신뢰할만한 '증인'으로 자격을 갖췄는지 물었다. 그러나 그를 '증인'이 아니라 '증거'로 바라보면, 어떨까? 단지 폐정개혁안이 토지 개혁 요구를 담고 있었는지 목격한 이가 아니라 갑오년 그때 굳이 말하지 않아도 통했던 토지 혁명의 열망을 이후 평생에 걸쳐 시도하고 또 시도한 인물로 바라본다면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천도교 혁신운동과 고려혁명당 창당, 만주 공동농장으로 이어진 그와 동지들의 끈질긴 시도야말로 농민혁명군이 가슴에 품고 있던 단단한 씨앗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사실 오지영의 여정은 <동학사> 집필로 끝이 아니었다. 해방 다음해인 1946년 2월 19일에 서울에서 좌파 정당과 대중조직을 총망라한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이 결성됐다. 이날 창립대회장에서는 임시정부를 떠나 민전에 합류한 김원봉, 장건상, 김성숙 등이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런데 그만큼 뜨거운 박수를 받은 인물이 또 있었다. 여든을 바라보는 노구의 오지영이었다. 오지영은 천도교 혁신 세력 대표로 민전에 참여했다.


이날 오지영은 갑오년 농민혁명군의 함성이 해방 공간의 노동자, 농민운동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다들 그래서 감격하고 환호했다. 물론 우리는 이후 역사가 어떤 비극의 터널을 뚫고 나아가야 했는지 잘 알고 있다. 오지영 옹을 환영했던 그 세대 사회운동은 짓밟히고 말았고, 오지영 자신은 1949년-1950년 초 즈음에 고단했던 삶을 마쳤다.


그러나 우리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오늘날 부동산 계급 사회 타파를 바라며 '제2의 토지개혁'을 염원하는 이들의 가슴에서 갑오년으로부터 이어오는 그 열망은 새롭게 꿈틀대고 있다. 그들에게 '폐정개혁안 제12조'란 더는 진위를 물을 필요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다른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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