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08

Ki Young Kim - <정의연을 공격하면 "토착왜구", 토착왜구란 무엇일까요> 생각해본 적 없이 그냥 넘어가던...



(9) Ki Young Kim - <정의연을 공격하면 "토착왜구", 토착왜구란 무엇일까요> 생각해본 적 없이 그냥 넘어가던...







Ki Young Kim
24 May at 22:21 ·



<정의연을 공격하면 "토착왜구", 토착왜구란 무엇일까요>

생각해본 적 없이 그냥 넘어가던 단어였는데요.
일단 어감이 안좋은데도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님께서는 이 용어를
즐겨 쓰시는 것 같아요.

'토착' 과 '왜구' 의 합성어일텐데요.

토착은 대대로 그 땅에 살고있다는 뜻이고

왜구는 동북아의 해상에서 약탈을 일삼던 해적 집단을 말합니다.
일본인 뿐만 아니라 국적은 다양했죠.
특히 후기 왜구는 중국인이 많았습니다.

왜구가 꼭 일본인을 지칭하는건 아닙니다.
X바리, X깨, X키 등과 같은 국적별 비하표현이 아니에요.

그래서 한국인을 지칭할 수도 있겠죠.

노략질을 일삼는 양아치 애들 정도로요.

한국인이 이 표현을 쓴다면 그 대상은
한반도에 살면서 약탈을 일삼는 양아치 집단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북한이 떠오르네요.)

약탈은 물리력을 동원할 수도 있겠지만
현대에는 사기를 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선한 마음으로 중고등학생들이 한푼 두푼
모은 성금이나 세금으로 마련된 국가 보조금을
지 마음대로 써버리고는 공개도 안하고

배임 횡령의 의혹까지 받아 수사 중인 단체가
바로 '토착왜구' 에 가까운 것이지,

그러한 문제적 집단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토착왜구와는 거리가 멀죠.

실제로 해방 이후에 한국에 남아
정착했던 일본인들에 대한 글이 있어요.

다소 길지만 읽어볼만합니다.

참고

‘토착왜구’를 죽인건 누구인가 (by 박유하)

일본을 미워하는 마음, 이해한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유지시키는 건, 청와대청원이 보여준 것처럼 “과거의 악행” 이상으로 “당하고만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뻔뻔하게도 사과할 줄 모른다”는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인식이 우리 안에 자리잡게 된 건 실은 최근 30년이다. 해방이후 민족주의는 언제나 존재했지만, 실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랐고 예를 들면 이승만때는 일본인은 세명이상 모이지 못하게 하는 식으로 박해가 심했는데, 박정희정권이 들어서자 그때까지 일본인인 걸 감추고 살아야 했던 이들조차 오히려 자부심을 느끼며 살았다니, 분위기는 급변했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경제개발과정에서 일본인기술자들이 많이 들어와 활동한 것도 이유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런 분위기는 이후에도 어느정도 이어진 것 같고, 반일감정은 물론 면면히 존재했지만 80년대는 “이토록 검소한 일본수상”같은 기사가 신문에 날 정도로 아직은 일본의 장점에도 주목했던 시대였다. 당시의 구호 “극일”에는 호의까지는 아니더라도 증오보다는 아직 충분히 모르는 상대에 대한 긴장감이 강했다.

요는 우리의 현재의 대일관은 옳고 그르고를 떠나 냉전체제 붕괴이후의 30년에 걸쳐 형성된 “역사적”인 감정이라는 얘기.
그런 마인드를 만드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 건 80년대엔 신용하, 90년대엔 전여옥, 박경리, 조정래, 김진명등이다. 그리고 90년대엔 아직 고전하던 정대협이 2000년대 중반부터 힘을 얻으면서 그에 가세한 반크와 함께 영향력을 강화시켰고, 2010년대엔 서경덕/전우용/호사카등이 같은 역할을 했다. (to be continued)2)
그런데, 우리가 언제나 피해자였고 일본이 가해의 죄값을 치르지 않았다는 인식은 (전에도 쓴 것처럼) 해방직후부터 다음해 봄까지 북한지역에서 죽은 3만명의 일본인들의 죽음을 잊어야만 가능한 인식이다. 물론 직접적인 책임은 그들을 방치한 소련군에게 있지만, 그토록이나 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전염병과 아사와 동사로 죽어간 사태에서 그 땅에 있었던 조선민족이 무관했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물론 직접적인 살해와 강간도 아주 적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 남편과 함께 한국에 살게 된 일본인 처들. 5000명 혹은 1만명으로 이야기되는 그들에 대해 해방후 한국은 정말이지 가혹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일본에서 결혼해 한국에 따라 와 보니 남편에게 본처에 심지어 아이까지 있는 경우는 부지기수였고, 이어진 외도와 도박과 폭력에서 법대까지 나온 엘리트와 노동자들은 다를바가 없었다. 그 이전에, 조선인인 줄 모르고 속아 결혼한 사람도 많았고, 예전엔 흔한 일이었지만 강간 비슷한 관계로 시작해 결혼하게 된 경우도 많았다.
그럼에도 시어머니등 가족들의 구박도 예외는 거의 없었고, 일본인의 피를 받은 아들조차 엄마한테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흔했다.

그녀들은 첩을 들인 남편에 의해 사망자로 처리되어 무호적/무국적자가 된 경우도 많았고, 그 때문에 고국에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었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이 한국전쟁 와중에 버림을 당하거나 도망치는 경우가 많았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혼자 살아가야 했던 이들은 시장바닥에 앉아 콩나물을 팔거나 거리행상을 해야 했고, 운좋게 식모가 된 이도 있었지만 거지가 되어 구걸을 한 이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은 영도다리아래에도 있었고 동대문시장에도 있었고 미군기지 에도 있었다.
그렇게 거리로 나가도 구두닦이 소년들이 “쪽바리”라며 돌을 던졌기 때문에 그녀들은 가능한 한 숨어 지내거나 산속에 굴을 파고 살거나 자살을 했다. 그런 과정에서 혼혈아들—아이들도 죽어갔다.

그런 일본인부인을 얻은 직업군 중 단연 많아보이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징용공들이다. 연애한 이들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 그녀들은 “내선일체결혼”이라는 말에 속아 자의반 타의반으로 결혼했다. 그런데 일본인 부인을 출세나 대우개선의 수단으로 생각했던 조선인 남편들 중 어떤 이는 해방이 되자 부인에게 대놓고 “복수하려고 결혼했다”고 말한 이도 있었다.(to be continued)3)
이런 남편과 가족들을 비난하는 건 물론 쉬운 일이다. 일본인처의 남편들을 그렇게 만든 건 우선은 그들 자신이니까.
하지만 그 이상으로, “일본인 처””일본인 엄마”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비난하고 차별하고 자리에서 내몰고 직장에서 잘라 생계를 어렵게 해 조선인남편들이 부인에게 화풀이하도록 만들고 때로 미치거나 자살까지 하도록 만든 건, 그래서 아이들마저 영양실조로 죽어가게 하거나 어렵게 성인이 되었어도 결혼을 어렵게 만들어 ‘연좌제’적 차별을 대대로 이어왔던 건 , 주변사람들—해방후 한국사회였다.

그러니, 한국인으로 살아가려 했던 일본인처라는 이름의 토착왜구, 그녀들과 함께 살아가려 했던 조선인 남편이라는 이름의 ‘토착왜구’ , 그리고 여섯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는 혼혈아라는 이름의 ‘토착왜구’들을 온전한 삶으로부터 떼어내 죽인 건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물론 그 중에서도 그들을 죽여야 한다고 앞장서서 죽창을 드는 이들은 언제나 있었고 오늘도 있다. 토착왜구보다 이들이 더 나쁘다고 말했던 이유다.

그럼에도 우리 안의 ‘토착왜구’이야기가 기억되지 않고 역사화되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 ‘토착왜구’들이 살아갈 공간을 빼앗고 간접살해하면서 구축해 온 “순수 한국인들의 올바른 역사”에 흠집이 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 자신의 ‘순정한’ 권위와 ‘순결한’ 권력에도. 415선거가 “한일전”이라고 외쳤던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얘기다. (계속)4)
그런 일본인들의 증언. 우리가 아직 제대로 귀기울이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역사” (=공적기억)가 되지 않은. 피해국에서 잊으려 했던 가해국여성들과 그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 이야기.(각각 다른 사람들.)
————-

“남편도 부인이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백안시당해 우체국을 그만두어야 했어요. 시골에서도 우리가 받은 건 차가운 눈길이었고, 남편은 부모와 친척들한테 일본인을 아내로 두고 있는 사실을 심하게 반대당하다 결국 정신이 이상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은 순식간에 수렁에 빠져 버렸고 네 아이들 중 두 명이나 영양실조로 죽었습니다. 죽기 전 마지막 말이 “아빠, 오늘 아침밥 있어?”였어요.”

“시어머니가 ‘넌 우리집 며느리가 아니다’라면서 새끼줄로 때렸습니다. 남편은 전혀 말리지 않았습니다. 마을사람들한테 일본어로 도와달라고 해도 모른 척 했습니다.”

"남편은 도청 (현청)에 근무했지만, 아내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친일파라며 냉대받다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도청을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남편은 정말 외로웠겠지요. 혼자 괴로워 했습니다. 그 후 전매국에 취직했지만, 역시 아내가 일본인인 친일파라며 박해받고 그만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사람이라 결혼은 안한다 했더니 남편이 말하길 “너와 결혼하는 대신 그사람(소개인)한테 오십엔 줬다 "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나는 인신매매된 셈입니다.
남편은 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오지의 탄광으로 가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난 도망 갈수도 없었고, 한명 또 한명 아이를 낳아 다 합하면 여덟 아이를 낳았지만 살아남은 건 셋입니다.”

"그는 언니랑 결혼하더니 곧바로 직장(은행)상사한테 “일본인 아내를 얻었습니다”라며 인사갔는데, 나는 왠지 언니가 그의 출세를 위해 이용되고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불쾌했어요 .(중략) 후에 군인이 된 조카는 "어머니 얘기는 누구한테 하지 말아 주세요. 더구나 전 군인이라 어머니가 일본인이라는게 알려지면 곤란하거든요.”라고 했어요.(중략) 시대가 달라지면서 대접받기도 하고 귀찮은 존재로 여겨지기도 하는 언니가 불쌍했어요. “
"
"제 인생은 뭐였나 싶어요. 한국인이 같이 살자 했고, 그 땐 조선인도 다 천황의 자식이라고 하던 때여서...바다를 건넌 것 뿐인데 인생이 뒤바뀌어 버렸어요 "(계속)5)
당연한 얘기지만 ‘일본인처’주변에 있었던 이들 모두가 다 이들을 박해한 건 아니다. 허준의 <잔등>에 거지행색으로 헤매는 일본인들을 밀고하는 소년과 함께 그들에게 따뜻한 국밥을 먹였던 할머니도 등장했던 것처럼.
작가 허준은 자신이 본 현실 중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는 일로 눈앞의 역사를 은폐하거나 미화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태도야말로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 가장 성실한 태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이 아니라 도덕(주의), 개인보다 국가니 민족이니에 주목하는 이들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그런 태도를 잊는다.

오사카에 징용와서 결혼까지 하게 된 남편이 자신을 유곽에 팔려고 하자 1살짜리 아들만 데리고 무작정 도망쳐 나왔던 한 일본인처는 섬진강 마을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그곳에 정착했다. 1981년, 62세 나이에 섬진강뱃사공으로 일하던 그녀를 찍은 일본의 다큐는 “그래도 손주 있고 성실한 아들 있으니 건강 잘 챙기면서 지내다 보면 좋은 날도 올 것”이라고 배를 탄 마을사람들이 그녀를 위로하는 장면을 남겼다. 마을사람들은 아직 존재했던 마을축제에도 그녀를 불렀는데, 며느리의 한복을 입은 그녀가 수줍게 웃으며 아리랑가락에 맞춰 원을 그리며 춤추고 있는 모습은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또 일본인처의 조직이었던 “부용회 부산지부”의 대표를 오랫동안 지냈던 이의 남편은 “나 때문에 우리 처가 한국에 와서 고생이니까”라면서 회원관련한 부인의 모든 활동을 묵묵히 도왔다.

그럼에도 그런 이들은 예외적 존재였다는 게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 이들이 있어 다행이고, 사회 대다수의 생각과 행동에 저항했던 그들이야말로 피해자들과 함께 기억되어야 할 이들이지만, ‘다른’이들에 대한 배척이 압도적인, 여전히 변하지 않은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상, 그런 이들의 존재가 변명이 될 수는 없다.6)
사실 이 글을 쓴 건 “일본인처”자체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박해 받았던 이들에 대한 환기와 기억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더 중요한 건 직접적 가해자들의 심리와 행동 이상으로 가해자들을 발생시킨 사회적 심리와 구조에 대해 아는 일이다. 일본인처 이야기가 그동안 가끔씩 신문과 방송에 등장했음에도 여전히 가해자로서의 자기인식은 공적기억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우리가 목도중인 그런 현황이 수많은 은폐와 기만의 결과이고, 여전히 현재형이라는 사실을 아는 쪽이 실은 더 중요하다. 30년동안 이어져 온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구호도 그런 은폐와 기만 없이는 불가능하다.

국경이 닫히고, 국경을 넘긴 커녕 집 문턱도 넘기 쉽지 않게 된 코로나기간동안 나는 1950년대와 70년대에 국경을 넘으려 했으나 넘지 못했던 이들에 대해 생각하며 지냈다.
누가 넘을 수 있었고 누가 넘지 못했는지까지 쓰지는 않겠다. 다만 그렇게 만든 최대 원인이 냉전체제 말고도 제국이 남긴 잔재—“호적”에 있었다는 이야기만 해 둔다. 앞에서 국적이야기를 했지만 국적을 결정적으로 규정한 건 실은 가부장제의 대표적 시스템인 호적이었다. 말하자면 민족문제로 보이는 일들이 실은 더 넓고 깊게, 젠더문제이자 계급문제인 경우는 너무나도 많다.

50년대에 국경을 넘으려 했으나 결국 넘지 못하고 쓸쓸히 죽어간 사람 중에 화가 이중섭이 있다. 그리고 우리사회에 남게 된 일본인처들 대부분은 한일수교후 다시 넘어보려 했으나 넘지 못했던 60년대말 70년대초에 귀국을 희망했으나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만든 건 과거와 현재의 국가정책이었고, 그런 국가정책 뒤에는 “법”이라는 이름으로 배척해야 할 사람이 누군지를 정한 “사회적 주류”들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해방이후 일본관련해서 가장 잘한 일은 일본 제국이 만든 호적법을 없앤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일에 앞장섰던 ‘여성’ 들이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주류들을 보호하기 위해 현실의 여성의 권리를 뒷전에 두기도 한다. 물론 그 자신들이 이미 주류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맞다. 이 며칠 이어진 긴 글은 오거돈시장의 성추행이 선거종료후에 밝혀진 데에 자극받아 쓰게 된 글이다. ‘토착왜구’ 를 몰아내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어 성공한, 일찌기 없었던 선거의 의미를 함께 확인해 두고 싶어서다. )

과거와 현재에서 온전히 결백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자신을 포함한 그 모두의 책임을 하나씩 물어야만 역사와 제대로 마주하는 게 된다.
그럼에도 이런 글을 보면 “식민지배 정당화”라고 멋대로 비약시켜 부정에 급급한 사람들이 있다(<제국의 위안부>가 겪고 있는 것도 똑같은 사태다).
하지만 ‘피해’에 그나마 의미가 생길 수 있다면 다른 이들이 똑같은 고통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의 자장 안에서다. 그 때 피해는 비로소 경험의 유한성을 벗어나 공유가능한 ‘가치’가 된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권리가, 그대로 자신의 책임을 상쇄시켜도 되는 권리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토착왜구’의 죽음에서 우리는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그럼에도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건 “현시점에서의 정치적 주류”다. 과거에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지만, 오늘 일어나고 있는 일은 주목 여하에 따라 내일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끝. 부처님 오신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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