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06

(7) 손민석 | 리영희 황장엽과의 대담」

(7) 손민석 | Facebook


손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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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얘기가 나와서 갑자기 든 생각. 내가 처음 읽은 황장엽 책은 <인류사회는 어떻게 발생하였으며 발전해 왔는가>(나라사랑, 1989)였다. 철학연구자가 이런 책을 쓰는구나. 내용은 사실 너무 진부했다.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에 입각한 역사발전단계론적 서술. 딱히 인상깊은 구절 하나 없는 그런 책이었다. 그 다음에 읽은 책이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한울, 1999)였는데 이 책은 좀 재밌었다. 일본유학시절 관련 부분에서 한달 일하면 학자금과 몇달치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었을 정도로 식민지 말기 전시상황이 노동력 수급에 있어 큰 문제를 겪고 있었다는 점이 짧게나마 서술돼 있어서 기억에 남는다. 그런 상황이었는데도 일본제국 내에서 철학 연구를 하겠다던 젊은 황장엽도 재밌었지만, 이 지경에 이르고도 조선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냅두는 제국의 속좁음이랄까, 아집이랄까 그런 것도 재밌었다. 그 다음에 민주주의, 인간중심철학 등에 대한 책 몇 권을 읽어보았지만 지적 자극은 딱히 없었다. 몇권 펴서 읽다 말았다. 연구를 위해서 억지로 읽으라면 모를까, 일반적인 사람들이 읽을 필요는 없는 책들이다. 
 나중에 이종석 교수의 언급에서 1999년에 황장엽을 상대로 조선노동당의 권력구조에 대한 여러가지 질문을 던졌고 황장엽이 상당히 놀랐다는 일화를 들었다. 나름 자신의 연구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게 된 계기 같다. 이종석의 <현대북한의 이해>(역사비평사, 2000)의 서문에도 실려 있다. 꽤 재밌는 일화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둘의 관계는 1999년 이후로 대단히 안 좋게 바뀌었다. 황장엽이 계속해서 미국 등을 오가며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고 김정일 정권을 없애야 한다는 발언을 이어가자 이종석 교수가 공개적으로 미국행을 만류하며 비판하는 글을 썼기 때문이다. 황장엽은 이에 대해 답변을 내놓으며 마지막 문단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북한에 있을 때 세상에는 절대적인 천재가 한 사람밖에 없다는 주장을 반대해 보려고 헛되이 많은 애를 썼지만, 여기 남한에 와서는 천재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들이 풍기는 냄새 때문이다. 아마도 젖비린내인 것 같다."
 스웩이 넘친다. 문예쪽에 과문하지만 한국 힙합 쪽에서도 이정도 디스는 흔하지 않은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과 만나서 대화를 나눴고 교류를 했던 연구자를 두고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라고 하다니. 이후로 이 둘은 평행선을 달리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종석은 황장엽이 조선노동당의 권력구조에 대해 가장 깊숙이 알고 있는 이 중 하나라는 점을 인정하며 나름대로 평가를 지속해왔다. 망명 이후의 활동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황장엽이 망명한 이후에 남한의 진보적 성향의 인사들과 이렇게 엇나가는 과정은 결국 북조선에 대한 입장차이 등이 반영된 것도 있지만 황장엽 본인의 성격 탓도 있을 것이다. 리영희와 황장엽의 대담은 그걸 대단히 잘 보여준다. 링크는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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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주체사상’ 이데올로그, 황장엽과의 대담」
RHEEYEUNGHUI.OR.KR
4-5. 「‘주체사상’ 이데올로그, 황장엽과의 대담」
4-5. 「‘주체사상’ 이데올로그, 황장엽과의 대담」1)(1998년 5월 4일 『한겨레』, 신화) 황장엽 우선 『한겨레』창간 10돌을 축하합니다. 사실은 지난해 우리가 오면서부터 만나고 싶었던 몇 안 되는 분 가운데 하나가 리영희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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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
Ki-In Chong
북한의 언론도 보면, 그 수사학이 매우 흥미로워서 지인들과 관련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한국과 비교하자면 1970년대 김지하 시에서 나타나는 언어유희, 장광설이 판소리에 직접적 뿌리를 대고 있는데, 이 김지하 시를 읽을 때 느끼는 통쾌함 같은 것을 북한의 글을 읽으면서 종종 느낍니다. 누가 이것도 연구해야 하는데... ㅎㅎ 북한의 수사는 전통문학과 소비에트의 정치담론에서의 공격적 언어 등이 결합해서 발전한 것 같은데, 흥미로운 연구 주제인 것 같습니다.
 · Reply · 4 d
===

4-5. 「‘주체사상’ 이데올로그, 황장엽과의 대담」

남북관계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1-21 17:30
조회
583

4-5. 「‘주체사상’ 이데올로그, 황장엽과의 대담」1)(1998년 5월 4일 『한겨레』, 신화)


 



황장엽 우선 『한겨레』창간 10돌을 축하합니다. 사실은 지난해 우리가 오면서부터 만나고 싶었던 몇 안 되는 분 가운데 하나가 리영희 선생님이오. 늦게 만나게 됐습니다. 며칠 전에 통일원 출입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제가 그렇게 말했어요. 우리가 단시간내에 인터뷰 등 형식에 치우치다 보니 하고 싶은 말 다 하지 못하고 오해만 불러일으켜요. 그래서 오늘도 리영희 선생님과 단독으로 만나자고 했는데, 들어보니 『한겨레』창간 10돌이라고 해서 그럼 공개 대담을 하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북한 동포를 해방시키기 위해 넘어온 사람이지, 편안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야. 절대 오해하면 안 된다. 그래서 난 망명이 아니다. 그래서 『한겨레』를 만나자고 했어. 『한겨레』를 생각하면 말이 통할 것이다. 또 엄청난 정보를 제공해서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이 달라질까 했더니 하나도 달라지지 않아. 우린 다 이야기했어. 난 김일성의 이론 서기로 7년 이상 일했어. 당 중앙의 비서로도 7년 이상 일했어요. 40년 동안 그 중추부에서 일했어. 우리는 나름대로 북한의 저 비참한 상태를 어떻게 끝내겠는가, 여기에 대한 전략을 이야기했어요. 이 전략이 실시되지 않는 것은 정부가 아닌 언론기관의 책임이다. 가장 큰 발언권은 언론이 가지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전략문제를 이야기하면 비밀을 보장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여기 와서 보니까 그걸 비밀로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황씨는 자신이 1년여 만에 상당히 변했다는 『한겨레』사설의 지적에 대한 불만, 북한이 곧 무너질 것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남한에서 믿지 않는 것에 대한 불편한 심기, 노동당 농업 담당비서 서관히(희)를 북한에서 총살한 것에 대한 소감 등에 대해 길게 말을 이었다. 그는 이런 얘기를 하면서 때로는상기된 표정을 짓기도 하고 흥분하기도 했다).
리영희잠깐, 저는 기자회견이 아니라 대화로 알고 왔는데요. 대화란 것은 혼자 오래 말하는 것이 아니고 좀 짧게 이야기가 오고 가는 것으로 압니다. 서로 짧게 많은 일에 관해서 이야기를 주고받읍시다.
황장엽아니, 기자회견이고 뭐고 만나서 대화를 못 하겠어요.
리영희대화는 얘기가 많이 오고 가는 것을 대화라고 하는 거죠.
황장엽아니, 난 대화를 그렇게 하자는 거요.
리영희저를 신문사 사람으로 대우하지 말고, 황 선생과 처음으로 뵙는 사이에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으니까 이야기가 오고 가야 독자들도 많은 것을 새로 알게 되고 의구심을 풀 수 있지 않겠습니까?
황장엽내 얘기 좀더 듣고 말씀하시오. 그래서 전략문제도, 보니까 우리가 제기해서 정책화되는 게 아니라 국민이 지지해야 되는데, 지지를 위해선 언론기관의 힘이 커요. 그러니까 이건 서론이에요. 무엇을 쓰는가는 신문사 쪽에 달려 있지만, 답변하기 싫은 것은 안 해도, 나는 거짓말은 안 합니다. 내 이야기를 쓰면서 내가 하지 않은 말은 쓰지 마시오.
리영희난 이걸 대화로 알고 왔는데…… 그리고 쓰고 안 쓰고, 또 어떻게 쓰는가는 신문기자가 할 일이고.
황장엽(상당히 흥분해 책상을 치며) 대화고 뭐고 내가 이야기 하는데 왜 자꾸 끼어드냐 말이에요. 처음에 조금 이야기하고 하자는 것인데. 아 글쎄, 내가 다 이야기하겠다니까. 우리가 목숨을 버리고 왔다는 거 압니까? 우리가 안기부의 말을 듣는 사람이냐?
리영희(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대화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먼저 사적인 얘기를 하지요. 제가 태어난 것은 1929년이니까 올 70이고, 제가 알기로 황선생은 1923년생으로 알고 있는데……?
황장엽난 원래 음력으로 하면 12월 7일 임술생이라고. 양력으로 하면 1월 20일께.
리영희그래서 저에게는 다섯, 여섯 살 위의 형님이신데, 오늘은 제가 공인의 소임을 받고 왔으므로 호칭은 황 선생으로 하겠습니다. 제 호칭은 리 교수로 해도 좋고. 개인적으로는 형님 같다는 심정입니다. 제가 알기로 안기부가 그동안 황 선생 오신 뒤 1년 동안 보호하고 협의하는 시간을 보냈는데, 이제 남한 사회의 한 자유시민으로서 안기부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자유롭게 발언하고 활동하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민주주의가 제대로 돼 있진 않지만, 그래도 남한에서는 일정한 지위와 권위를 지닌 개인은, 사유재산만 공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상과 인격과 행동거지를 국민 앞에 공개하고 선택받는 것 아닙니까? 하물며 세계의 이목을 끌면서 오신 황 선생께서는 말할 것도 없겠죠. 지난 1년 동안 남한의 많은 사람들에게서 여러 가지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거부 반응도 있고 우호적인 반응도 있죠. 개인으로서는 나는 황선생에 대해 특별히 우호적인 것도 아니고, 선입관을 가지고 거부적인 것도 아닙니다. 아주 냉정하게 지식인으로서 어려운 결단을 내리고 내려온 그 지식인의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내 의견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황장엽좋아. 뭐든지 물어보시죠.
리영희물어보는 것도 있고 의견을 얘기할 수도 있겠죠. 간단히 제 소개부터 하지요. 본래 평안도 출신이면서 해방 전에 내려와 중학교 마치고 전쟁을 치르며 육군 보병으로 7년 동안 복무했습니다. 나온 뒤에는 언론계에 있다가 한양대에 갔습니다. 주로 국제ㆍ외신 관계를 담당해서 조금이나마 공부를 했습니다. 그동안 황 선생께서 쓰셨거나 발표한 내용을 대부분 진지하게 읽었습니다. 이 내용에는 많은 이야기하고 싶은 사항과 문제, 해결해야 할 제안이 있지만, 동시에 남한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의 주인공인 과거 북한 주체사상의 철학적 입안자에 대한 회의도 있습니다. 그런 문제를 이 기회에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황장엽근데 무얼 읽었습니까? 파일이라는 걸 읽었습니까?
리영희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국내에서 발표된 것인데, 1997년 2월 12일 중국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쓰셨다는 자필 진술서와 서울 도착 인사와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으로 1997년 7월 10일에 말씀하신 것과, 9월 24일 『조선일보』에 난 「주체 연호로써 북을 구원할 수 없다」와 10월 20일의 「김정일 계승비판」과, 마지막으로 내려오시기 전인 1996년 8월에 북한에서 작성해서 외부로 유출된 「조선문제」란 장문의 논문입니다. 국내에 보도된 것 가운데 나머지는 모두 국민이 진지하게 받아들였지만, 유독 「조선문제」란 논문에 대해서는 나머지 글들을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뭔가 석연치 않아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진지하고 솔직하고 정확하게 얘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만, 이것이 과연 황 선생 자신의 글인가, 남한 정보부의 작품인가, 의문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자료의 진위를 규명하고 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황장엽그 「조선문제」는 내가 썼습니다. 거기(북한)서 그게 노출되면 총살됩니다. 그땐 내가 목숨을 내놓자고 생각한 겁니다. 난 99퍼센트까지 2년 내로 (북한이) 전쟁한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남한의 실정은 아주 달랐거든요. 그래서 빨리 나가서 이야기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은 지금은 남한 사정이 복잡하니 대선(대통령 선거) 끝나고 와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욕했어요. 무슨 대선 끝나고 오라고 하겠는가.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글을) 보냈어.
리영희용어가 다른 것과 좀 차이가 나고…….
김덕홍(옆에서 듣고만 있다가 답답하다는 듯) 북한 사람들이 보면 우리 형님이 쓴 거라고 단박에 알아. 그거 의심하지 않습니다.
리영희고맙습니다. 귀중한 사실입니다. 남한에서는 황 선생 오시기 전에 벌써 중국에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직접 입국하시게 될 때까지 반응이 참 많았습니다. 이를테면 남한의 극우 반공 개인이나 세력은 쌍수 들어서 영웅으로 모셨고, 그러면서도 같은 극우반공 집단 등이 과거 박정희 시대에 위장해 내려왔던 이수근을 알고 있기 때문에 회의적이기도 했죠. 하지만 대체로는 많은 분들이 높은 지위에서 누리던 모든 것을 버리고 내려오니 ‘민족 사랑의 화신’이라는 좋은 반응도 있었습니다. 민주적 결단을 한 지식인이라는 반응도 있었고. 다른 한쪽으로는, 말에 가식할 필요 없으니 그대로 표현한다면…….
황장엽그런 전제 놓지 말고, 그냥 이야기해. 나도 책상 두드리며 이야기하는데…….
리영희변절자가 아니냐, 여태까지 북한의 주체사상과 그에 입각한 국가이념을 수립한 그 사람이 저런다는 것은 책임 회피가 아니냐, 위장적 평화주의자가 아니냐, 그리고 그렇게 열성적이라면 북한에 남아 개혁을 해야지 여기 나와 어떤 영향력을 미칠까, 하는 등의 회의론도 있었습니다. 또 다른 일부는 이것은 민족 평화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대감을 조장하려는 위험한 인간이라는 평도 있었습니다. 혹시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존경받는 인간 집단인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황씨가 전쟁과 남북 간 적대감을 부추기려는 의혹이 있으니 북으로 돌아가라는 성명을 내기도 했습니다. 저는 오늘 황 선생을 백지 상태로 대하지만…….
황장엽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물론 상상 외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여기 사람들이 너무도 북한의 실정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추측에 대해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치 독일의 헤스와 비슷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난 그 사람과 상종하지 않습니다. 난 (북한에서) 책도 맘대로 못 쓰고 강의도 내 맘대로 못하고, 군대에 가서 했어요. 내 이름으로 나간 것은 대부분이 위작이고, 초벌을 한 것을 가필한 것도 있습니다. 내 사상이 조금이라도 반영된 것은 모두 김정일, 김일성의 이름으로 나간 것들입니다.
리영희그 사실은 남한에서는 잘 모르는 사실인데요. 알겠습니다. 권력자가 학자의 이론과 사상을 도용하는 것은 어느 나라나 그러므로 이해가 갑니다.
황장엽우선 여기 오니깐 묘한 말들이 다 있어요. 김정일하고 우리 집은 직접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1958년부터 김일성의 이론 서기 4명 가운데 3명은 경제학을 했고, 나는 철학을 하면서 글 써줬지. 통일을 염원하고 동포의 비참한 상태를 구원한다는 정신을 가지고 글을 써주었지요.
리영희저 개인적으로도 비슷한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닙니다. (1930~40년대 일본의 중국 침략 전쟁시) 일본과의 화해를 통해 중국 인민의 참상을 자기 나름으로 구제하고자 한다면서 항일전쟁의 무익성을 호소하기 위해 일본으로 탈출, 일본의 괴뢰가 된 장개석 정부의 부총통 왕정웨이(汪精衛), 유럽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전쟁 협상을 하자고 히틀러에 대항해 단신 영국으로 갔던 루돌프 헤스 부총통의 전례가 머리에 퍼뜩 떠오릅니다. 전적으로 옳은 비유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역사적 전례가 생각납니다. 선생이 여기서 남한 동포를 설득하고 남한 동포들의 이해를 바탕으로 북한 해방이라는 민족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남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의문이 일단 풀려야 하는 것이 전제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망명의 동기는, 첫째는 이념 차이이고, 둘째는 정책 차이입니다. 선생은 주체사상을 창립하셨는데, 권력자들에게 악용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통일은 또한 평화적 통일이어야 하는데, 그쪽에서는 무력통일을 주장했습니다. 셋째는 세대 차이입니다. 제1대 김 주석과 가깝고 지금도 심정적으로 그런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이 김정일 세대에 와 2, 3세대에 의해 교체되는 과정입니다. 선생의 글 가운데 김 주석에 대한 비판은 없고 김정일에 대해서는 극렬한 비판이 절절한 것으로 미루어보건대, 새 권력자에게 무슨 이유에선가 애총에서 벗어난 개인 관계가 있는 것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넷째로는 권력투쟁입니다. 강경 수구세력과 온건 국제파 등의 권력관계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랜 기간 동안 북한에서 「조선문제」같은 논문을 쓸 때부터 남한에 올 것을 구상했고 메모가 미국 동포를 통해 나간 것으로 봐서, 안기부의 회유 공작이 성공한 것으로 짐작이 가기도 합니다.
황장엽김정일하고는 사사로운 대립은 없어요. 1994년 김 주석 장례식 때는 제일 먼저 나에게 전화했어요. 이거 못된 놈이지만 아버지가 죽었다고 먼저 전화하는 거 보고 봐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두고 보니 안 되겠어요. 권력투쟁은 해본 적 없지만, 그가 나를 기술자로서 이용했지, 정치가로서 이용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난 하고 싶은 말을 좀 했지요.
리영희남한에서 북한을 공부하거나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 정치적으로 통용되는 것이 북한 내의 정책집행 과정과 사상노선에서 온건파ㆍ국제파, 수구세력ㆍ유격대 세대 등인데 이런 구분이 적절합니까?
황장엽사람들을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니깐 파를 형성할 순 없어. 생각이 온건한 사람, 맹종하는 사람을 가를 수 있지만, 거기선 매일 충성을 맹세하지 않으면 못 견뎌.
리영희남한에 온 북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이 귀순자, 탈북자, 망명자, 투항자 등 여러 가진데, 선생께서는 망명이라는 용어를 쓰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황장엽처음에 망명이라고 쓰지 말라고 했어요. 자기 조국에 왔는데 무엇 때문에 망명인가. 여기서 안착할 생각은 없어요. 북한에다 남한 실정을, 남한에다 북한 실정을 알려주고 있다가, 투쟁하다가, 김정일의 탄환에 맞아 죽어도 좋고. 그저 집 안에 앉아서 죽지는 않을 것이오.
리영희남한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에서 생각났는데, 장승길 이집트 주재 대사처럼 왜 미국을 택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황장엽여기가 우리 조국인데 뭐.
김덕홍장승길 대사가 미국에 간 건 조국을 배반한 것이에요. 통일이 돼도 북한이나 남한 사람 모두 그 사람 대접하지 말아야 해. 그 사람은 자기만 잘살자고 간것이에요. 북한도 남한도 조국인데.
리영희굉장히 신선한 각도의 해석입니다. 통일 남북한 어디에 대해서도 배반자가 아니냐는 시각이군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불러줘야 하는지?
황장엽관계없어요. 망명자도 좋고 투항자도 좋아. 우리는 자기가 할 일을 한다 그거예요.
리영희내려와서 정부에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도 대북정책에 큰 변화가 없다고 실망하시는데,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황 선생께서 지금껏 강조한 대로 대한민국 정부가 정책을 변화시키리라 기대하셨다면, 한국 정치권력의 구조, 정치논리에 미흡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황장엽그럴 수 있어. 거기서 생각한 것에 비해 남한 사람들이 북한 실정을 정말 모르고, 김정일, 마르크스주의, 주체사상에 대해 잘 모르고, 어느 지경인지도 잘 모르고, 정확한 통계를 내놓아도 잘 믿지 않는 상태니까.
리영희그것만이 아닙니다. 북한뿐만 아니라 소련, 중국, 동유럽 등 공산주의ㆍ사회주의 환경 속에서 오래 살면, 남한의 정치가 민주주의와는 한참 먼 한심스러운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떤 한 인물의 이론으로 정부가 이리저리 끌려가거나 돌아서기에는, 해방 50년 동안 축적한 의회민주주의 여론의 기능과 원리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북한 같았으면 김일성, 김정일이 하자면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지만, 아무리 황 선생이 좋은 권고와 정책 변화 제안을 해도 남한 정부가, 훌륭한 민주주의는 아니지만, 다양한 모양새와 정당 정치를 하고 있으므로 예상했던 것처럼 쉽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황장엽우리는 우리대로 할 일이 있으니까.
리영희우리는 북한 김정일 그 사람 개인이 위태로운 성격이거나 북한 정권의 무책임성, 작태를 충분히 이해는 합니다. 강조하시는 부분에 동조하면서도, 북한만이 평화와 남한과의 공존ㆍ통일을 거부하고 오로지 군사력으로 전쟁 통일 방식만 추구하고, 남한은 정반대로 시종일관 평화ㆍ우호ㆍ전쟁 반대를 견지해오고 있는 양 생각한다고 느껴지는데. 실제로 북한이 그런 것은 이해가 간다 하더라도 남한이 북한과 정반대로 오로지 평화와 민족적 통일과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혹시 알고 계신 것 아닌가, 북한만 일방적으로 비판하니까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김덕홍남한의 경우 전쟁의 방법으로 통일하지 말자는 건 명백하지 않습니까? 우린 그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통일은 목적입니다.
리영희쌍방 정권이 전쟁으로 통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말로써 글로써 같다고 보지만, 남한 정권을 구성하는 권력집단의 전략이 끝까지 이런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렇게 자신이…….
김덕홍김정일 자신이 북한 정권을 혁명 정권, 계급 해방의 수단이라며 남한을 해방시켜야겠다고 공공연히 지적하고 있고, 노동당 강령ㆍ규약에도 다 있어요. 현실적으로 1960년대 초까지 공업화를 완성한 다음엔 전쟁 준비만 하고 있습니다. 독재 유지를 위한 것을 통일을 위한 것으로 대의명분을 세우고,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을 내부에서 교육시키고 있고요.
리영희재미난 일은, 잘 아시겠지만, 이승만, 박정희 30여 년에 걸쳐 남북한 통일정책을 보면, 6ㆍ25는 북이 도발한 것이지만 6ㆍ25 이후 국가적 잠재력이 큰 쪽이 약한 쪽보다 언제나 평화와 통일을 먼저 여유 있게 제창합니다. 1950~70년대는 남한이 북한보다 열악해서 평화통일을 주장하기만 하면 사형에 처하고, 통일 주장하면 반공법,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했어요. (그래서)비참하게 삶을 끝맺은 사람이 많아요. 그때 북한은 우월하니까 평화통일을 주장했고. 위장이었겠지만 표면적으로는 그랬죠. 지금은 남한이 북한 경제력의 스무 배이고 (군사ㆍ정치ㆍ외교 어느 모로나) 우월해지니까 평화를 내걸 수 있게 되었어요. 거꾸로 남한이 유연한 정책으로 역전하고, 북한은 반대로…… 진의가 있냐 없냐가 아니라 능력이 우월해지면 (평화를 내세우고), 열세이면 자기보호 차원에서 거부하고. 1974년을 분수령으로 남북한 입장이 역전된 것으로 봅니다.
김덕홍북한은 통일 대남정책에서 일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1960년대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달라진 게 하나도 없습니다.
리영희남ㆍ북한 사이에 총체적 국력 차이가 날 때, 상대방을 군사적ㆍ경제적으로 궁지에 몰아넣는 것은 결국은 상대방에게 살아남기 위해서 핵무기 같은 군사력밖에 의지할 것이 없지 않느냐는 생각을 갖게 하기 쉽죠. 1970년대 초에 남한의 박정희 정권이 그랬고, 지금은 북한의 김정일 정권이 그렇고요. 이중의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황장엽여기서 토론할 문제가 많겠지만, 역사적인 문제를 가지고 논의할 시간은 없어요. 한 가지만 이야기하면 현재 남북이 대립해 있는데 우리 민족의 적지 않은 부분이, 100여만 명이 죽는 곳은 북한이야. 테러 국가로 우리 민족을 망신시키는 곳도 북한입니다. 문제를 상대적으로 볼 때 북한이 나쁘다는 건 명백해. 이런 조건에서 북한을 계속 지지하는 것은 반역자다. 남북 대립에서 북한이 나쁘다는 것, 북한이 우리 민족을 망하게 하는데도 긍정ㆍ부정이 다 있다고 해서 화해하겠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오. 그런 문제들을 더 토론하자면 오후에 합시다.
리영희역사적인 이야기는 좋지 않다고 하는 것에 이의가 있습니다. 역사는 과거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오늘을 보고 내일의 방향을 잡기 위한 것이므로 과거는 과거사가 아닙니다.
황장엽근데 우리는 지금 당장 급해. 북한 동포들이 매년 100여만 명씩 죽는데 그걸 어떻게 구할 것인가? 나는 선생을 만나자고 한 게 한겨레 정신을 가지고 북한문제도 함께 걱정하자는 취지요. 북한에 대한 실정을 잘 모르는 것 같아. 임수경이 왔을 때, 황석영이 왔을 때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었어. 그때 황씨에게 제일 우수한 제자를 뽑아서 보냈어. 도청장치가 돼 있는 상황에서 한계가 있어. 나중에 황석영 씨를 만나 소감을 물어봤어요. 여기 와서도 그랬어요. 제일 먼저 이야기해주고 싶어. 그러나 북한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좋아. 하지만 와서 보니 관심이 없어. 고등학생 60퍼센트, 대학생 30퍼센트가 관심이 없어요.
리영희사실입니다.
황장엽북한에 대해 좋게 말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관심이 있으니 바로 세워주면 우리하고 의견을 같이할 사람이오. 그래서 같이 만나자고 한 것입니다.
리영희잘 알겠습니다.
황장엽내가 이 나이 될 때까지 많은 사람들 만나봤어. 내가 선생을 오해할 사람이 아니야. 한마디 한마디 뭘 이야기하자는 건지 알아요. 그런데 당장 급하단 말이야. 우리가 그걸 직접 보지 않고는 모릅니다. 어지간히 비참하면 우리가 오겠습니까? 거기서 투쟁할 만한 조건이 되면 왜 오겠습니까? 그래도 저는 김정일과 관계가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해 못 합니다. 우리는 유물론자요, 밥이나 먹고 계속하죠.
(점심 식사 뒤 다시 만나자, 김덕홍 씨가 봉투를 내놨다.)
김덕홍북한 동포 돕기 성금으로 형님하고 나하고 100만 원씩 준비했습니다.
리영희한겨레신문사 사장에게 전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황장엽오후에는 시간도 있고 한데 오순도순 잘합시다.
리영희황 선생의 통일문제 전략과 관련해 남한 국민들이 오해하고 있는 문제를 이야기하겠습니다. 황 선생이 쓴 글들에 들어있는 통일전략에서 한마디로 북을 말려 죽이는 전략으로 표현되는 내용이 많습니다. 한 예로 이런 것이 있어요. “북을 쇄국정책 그대로 지속토록 하라. 개혁하면 북이 강화되니까, 쇄국정책을 조장해주라. 고립화를 지속시켜야 한다. 경제 생산력을 계속 약화시켜야 한다. 남한은 군사비를 계속 투입해서 북한을 소모케 해야한다. 경제 봉쇄를 계속 강화하는 것이 좋다. 농업 개혁을 원조하는 노력 하지 말고 지연시키는 것이 좋다. 그래서 북한의 남한에 대한 식량 의존도를 계속 높이도록 하라.” 이것이 통일의 방법으로 기술돼 있습니다. 오해의 여지가 있을 것 같은데요?
황장엽제가 요구하는 것은 개혁ㆍ개방입니다. 그런데 김정일이 개혁ㆍ개방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 글은 개별적인 사람에게 참고로 전술로서 준 것일 뿐입니다. 북한의 강점은 두 가지, 군사와 사상입니다. 우리는 경제적 우월성과 국제적 우월성이 있지. 전략은 적의 약한 고리를 우리 강점을 가지고 때리는 것입니다. 지금 식량문제가 보통 문제가 아니야. 매년 100만 명이 죽는 것보다는 빨리 붕괴시키는 게 나아요. 이건 정부로는 내놓고 얘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화해한다고 이야기해야지 김정일을 타도하자고 대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빨리 망하게 하는 방법은 식량이오. 식량을 우리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거지. 동포적인 견지에서도 응당 우리가 해결해줘야 해요. 동포애나 정치적으로나 옳아요. 남한 동포들이 자기를 잊지 않고 원조해준다는 것을 알면 그 (북쪽) 사람들이 전쟁 하겠는가? 15만 톤 주고도 욕먹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200만 톤은 주어야지. 세계에다 선포하고. 그걸 왜 적십자를 통해서 줍니까? 웬 인도주의인가? 동포애적인 견지에서 우리가 책임져야지. 둘째는 거기 사업이 다 망해서 1995년에 군수공업은 당에서 관리하는데 군수공업 담당비서가 하는 말이 노동자가 50만 되는데, 아주 기술 수준도 높은데, 그중 2,000명이 굶어 죽었다고 그래요. 조금만 더 가면 군수 상태가 마비됩니다. 아직은 군수공장만은 남아 있지만. 내 글을 발표했을 때는 너무 화가 났어. 우리가 한국에 오는 걸 반대하는 사람이 이렇게 했을 거라고 생각했지. 전쟁을 전혀 못 하게 하고 사상문제라면 그렇게 하자는 의미에서 (그런 방식을) 제기했는데. 다 발표해버렸어. 학자라는데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느냐는데, 내 이야기는 개혁ㆍ개방하자는 것이에요. 개혁ㆍ개방만 되면 80퍼센트는 통일한 거요. 이젠 개혁ㆍ개방으로 이끄는 방법을 바로 생각해야지. 그때 우리 타산(계산)은 이렇게만 하면 2년이면 (북한이) 망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제기했는데, 지금은 이렇게는 안 되겠다, 다른 방법으로 해야겠단 말이야.
리영희그렇다면 여기에서 이제 말씀한 논리와 전략하고, 거기서 떠나오기 전에 미리 써서 밖으로 반출한 논문에서, 모든 면에서 약화시켜 북한 붕괴를 촉진시켜야지, 쌀 주고 하는 것은 결국 뱀을 키워주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것과는 내용적으로 모순입니다. 지금 남한에 온 뒤에 생각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본래 그렇다고 하셨지만, 사람들에게 밖으로 활자 등으로 알려진 것은 모순이거나 생각이 달라진 것 아니냐 싶군요.
황장엽생각이 달라진 건 없어요. 빨리 해방시키기 위해 무슨 방법이 적합한 것인가, 고통스럽지만 처음에는 이 방법을 택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남한) 국민들이 지지 안 하기 때문에 어렵지, 전략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리영희남한의 국민이 안 해준다는 것은 그런 논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죠.
황장엽근데 충분히 토론한 일이 없어요. 여기 와서 그 누구하고도 이런 문제를 갖고 하루 종일 토론한 적이 없어. 그것은 1996년 8월에 쓴 것인데, 그땐 내가 이젠 안 되겠다, 남한과 협의해 빨리 붕괴시켜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리영희그걸 쓰실 때인 1996년 8월 남한 상태는, 국회에서 국가보안법, 노동법 등 군사정권하에서 강행됐던 모순된 법률들을 고칠 때였습니다. 그래서 시위도 일어나고 노조 파업도 제법 있었죠. 그런 때 황 선생이 쓰신 글에서 “남한 내부에서 정부 반대해 투쟁하는 세력은 적이다. 타협이나 조정이 안 될 ‘적’”으로 표현했고, 학생운동도 ‘내부의 적’이라고 했습니다. “남한 곳곳에 공작원이 배치돼 장기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학생운동이나 노조운동이 북한 지령받고 조종되는 것이고, 혁명 지하조직이 파고들어 활동하고 있다든지, 군대ㆍ경찰ㆍ정보기관에 고정간첩들이 있는 것이 문제다. 이것을 방임하고 있다는 것은 정권의 직무유기 정도가 아니라 범죄 활동이다.” 남한 내부 상황을 이렇게 판단하셨습니다. 안기부가 주장하는 그대로의 각도이고 상황 판단이며, 개개인의 양심, 민주 의식, 정권에 맞서 개인도 집단도 권리 행사할 수 있다는 초보적 이념에 찬물을 끼얹는 견해여서 오해를 많이 받을 수 있었습니다.
황장엽거기에 대해 조금 이야기하죠. 난 아까도 얘기했지만, 남북이 대립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운명을 망치고 있는 게 북이라고 봐요. 현 단계에서 난 자본주의 이상을 지지하지는 않아요. 내가 무슨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모르는 사람이야? 지금으로서는 1년에 100만 명씩 사람을 죽어 나가게 하는 것은 저쪽이오. 그것에 반대해서 투쟁하는 것이 선차적인 문제지. (북한의) 대남사업이라는 걸 어지간히 알고 있을 거 아닌가? 방대한 부서가 있어. 지하조직만 있느냐, 작전부도 있어. 해외조사부는 제3국에 나가 대남사업을 해요. 대한항공 폭파 사건은 거기서 한 것이에요. 대남사업 부서만 이렇게 있고, 그 외에 외화벌이하는 기관이 230개 있어요.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모두 대남 부서가 장악하고 있어요. 다 첩보사업이지. 그 외에 국가보위부가 있고, 군대정찰국도 있어요. 자연발생적으로 나오는 운동은 없어요. 다 지도해서 나오지(남한 반정부 운동과 관련한 언급). 만나서 북한의 실정을 이야기해주는데도 북한을 지지한다면 그거 반역자요.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이야기했는데, 내가 옆사람에게 속삭이듯이 이야기한 걸(남한에서) 발표해버려서 오해를 샀지만 겁날 것은 없어.
리영희예, 그렇습니다. 다만 지금도 남한의 민주화운동, 학생운동은 북한 여러 가지 부서에서 파견된 고정간첩에 의해서 조작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황장엽나는 학자로서 보지 못한 건 이렇다 저렇다 하고 싶지 않아요.
리영희남한의 어떤 대학총장이 황 선생의 글을 미리 읽었는지, 남한의 모든 민간운동이 그런 지령하에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겁을 집어먹고 움츠렸죠. 이런 견해나 관찰은 남한 사회를 상당히 오해할 소지가 있어요.
황장엽그래서 우선 「조선문제」, 그거 내 개인 견해를 이야기한 건데, 그걸 발표한 것 자체가, 난 왜 이렇게 하는지 모르겠어.
리영희남한 상황에 대한 평가와 분석에 관해서는, 김정일이가 있는 한은 전쟁이다, 고칠 수 없는 당연이다라고 결론을 내고 계시지요? 남한에서 황 선생의 이런 상황판단에 대해 좀 불안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어요. 특히 군사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황 선생 주장ㆍ판단처럼 남한에 비해 북한이 압도적으로 강하고 남한은 허약한 상태인가, 힘의 우열과 제반 국력 비교에서 많은 사람은 남한에서 황 선생 의견에 동조하길 꺼려요. 사실 전쟁이라는 것은 어느 경우나 여섯 가지 기본 요소가 있잖습니까? 현재 쌍방 군사력 비교, 총동원할 수 있는 전쟁수행 총능력, 전쟁수행에 있어서 국민과 정부 간의 충성관계, 국제적 동맹관계, 전쟁이 아무리 숭고한 목적을 위해서라도 전쟁 결과 잃을 것이 얻을 수 있는 것과 비교할 때 ‘남는 장사’냐 아니냐, 마지막으로 지도자의 의지죠. 김정일의 전쟁 의지를 강조하지만 나머지 모든 조건이 남한보다 떨어진다면, 아무리 미친 놈이라도 의지만 가지고 전쟁을 결정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황장엽그가 전쟁과 뗄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음대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어요. 그가 전쟁의 의지만큼은 확고부동하다고 이야기했지요.
리영희황 선생의 많은 글 전체를 통해서 보자면, 남한에 대해 권장한 골자는 요컨대 남한 정부가 내부의 이러한 정부 비판세력을 제거하고, 군사력ㆍ공안력을 강화해야 한다…… 이런 것이 주취지로 요약돼 나옵니다.
황장엽내가 무슨 뭐 이견을 이야기했는가?
리영희했지요. 전쟁할 모든 조건이 자기에게 불리할 때도 전쟁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겁니다. 전쟁의 공포를 남한 국민에게 주어온 역대 30년 동안의 군사정권과 황 선생이 권고하는 방식이 같다는 것이죠.
황장엽그건 이 다음에 이야기합시다.
리영희재미나는 것은, 1993년 현재 남한의 국민총생산이 약 4,000억 달러, 군사비가 연간 130억 달러인데, 북한은 국민총생산이 그해 고작 220억 달러입니다. 아무리 군사비를 짜낸다 해도 20~30억 달러가 한계겠지요. 지금 남한 군사비가 계속 늘어났고, 1995년에 남한 군대가 미국에서 무기와 장비를 도입한 액수만 해도 43억 달러를 넘어요. 북한 총군사비보다 월등하죠. 신무기 들여오는 액수만 해도 북한 총군사비보다 많은 겁니다. 홍수 난 뒤에는 더 말할 것도 없겠고.
황장엽그렇다면 미국 군대가 나가도 아무 일 없지 않은가?
리영희거기까지의 판단은 어렵지만, 정부는 미군의 필요는 있다고 보는 거죠. 북한 군사력을 과대평가해서 남한 국민에게 공포감을 주는 것은 군사정권과 비슷하다는 인식을 줄 수 있습니다.
황장엽거부감 가진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도록 해요. 우린 전쟁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야 되겠어요.
리영희언제나 심각하게는 생각해야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얼마나 생각해야 하는가를 중시해야죠.
황장엽그건 전쟁 전문가, 군사 전문가들이 할 일이고,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것을 다 털어놓을 순 없잖아요.
리영희황 선생 말씀하신 거 떠나서 지난 1년 동안 남한 사회를 돌아보셨는데, 글에서나 도착하면서나 대한민국을 극구 찬양했던 것만큼 남한 사회의 도덕, 문화 등등이 찬양할 만하다고 생각 드십니까?
황장엽난 극구 찬양한 일은 없어. 인사야 그 정도로 해야지. 북한과 대비하면 천지 차이니까.
리영희저는 황 선생이 이 사회의 자유인이 됐을 때 따뜻하게 받아들여지고, 지식인의 고뇌에 찬 결단을 한 것에 대한 오해가 풀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황장엽감사합니다. 그러나 바라지 않아요. 오해하고 있는 사람은 계속 오해하라고 해요.
리영희그런데 북한을 개혁ㆍ개방을 하지 않도록 고립화해야 한다는 말씀을 했기 때문에…….
황장엽김정일이 독재하는 상황에서 진정한 개혁ㆍ개방은 못 합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연방제가 어떻고 해서 내가 성을 냈어요. 연방제 할 시간이 있는가? 편지 거래, 이산가족 만나는 것도 못하는데 그건 다 거짓말이야.
리영희실제로 동독 붕괴에서 보듯이 북한의 내일에 대한 예측은 누구도 하기 어렵지만, 큰 흐름으로는 고립 봉쇄를 계속하면 머지않아 붕괴되겠죠. 그랬을 때 걱정되는 일이 있어요. 북한의 기아 상태를 분석한 ‘국경 없는 의사회’의 보고를 보면, 3년 전 한 살 아이들부터 적어도 40살까지 살아남는다 해도 앞으로 60여 년 동안 영양실조의 여파로 기형아가 많을 것이라고 합니다. 남한 주도하에서 통일됐을 때 이 세대들이 공백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남한 주도하 통일에서도 식량문제는 해결돼야 하는데…… 식량 지원문제가 발생했던 3년 전부터 지원을 반대하는 개인이나 세력이 사실상 90퍼센트가 넘어요. 교회에서 이 운동을 제기할 때 추진 인구수가 남한 전체 인구의 5~6퍼센트 정도에 불과했어요.
황장엽지금 다 굶어죽는데, 보고 가만 있다가, 개혁ㆍ개방으로 나아가면 (북한에서) 자기들끼리 하겠다고 할 겁니다. 우리 굶어죽을 때 도와주지 않았다고. 어쨌든 우리가 동포애적 견지에서 식량만은 대주고 기형아가 나오지 않도록 하면서 전쟁을 막으면 되지 않아요? 그러나 전략 물자는 줘서는 안 돼요.
리영희김영삼 정부가 3만~5만 톤을 보냈다고 극우 보수ㆍ반공세력이 김영삼 정부를 곤혹스럽게 해, 지방선거에서 참패했습니다. 그래서 다음해 총선 때는 보내주기로 한 쌀을 안 줬습니다. 이렇게 쌀 보내고 안 보내고 하는 것이 남한 내 현실 정치의 이해관계, 누가 국회의원 되느냐 안 되느냐에 좌우됐어요.
김덕홍그 사람들은 민족의 통일을 왜 하자고 하는 거요? 민족이 다 죽고 기형아만 남아 통일하면 뭐하냐고. 15만 톤 보낸 것 아는 북한 사람은 다 감사했어요.
리영희황 선생이 북한을 떠나기로 했던 지난해 초를 기준으로 할 때, 3년 전 홍수가 들기 전 상태, 즉 정상적 국가 운영 상태라 하더라도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물적 기반이 남한과 북한이 20 대 1이고, 물적 기반뿐 아니라 다른 기반이 감히 전쟁은 상상도 못할 것인데, 물론 북쪽에서 보신 그대로 말씀하셨겠지만, 과연 가능한 것인가요?
황장엽여기서 전쟁 한번 걸어보죠. (북한은) 꼭 (한판) 합니다.
리영희남북의 국가의 힘을 비교할 때 북한 인민이 남한에 비해 정권 세뇌 정도가 심할 테니까, 위조된 정신력은 앞서겠지만, 이를 빼면 앞설 게 하나도 없어요. 앞으로 많은 남한 시민들을 접촉하면서 이런 궁금증을 풀어주시길 바랍니다. 오불관언이라고 말씀하셨으니까 할 수 없지만. 남한 사회는 사람들의 의견이나 여론이 작용하는 사회라 그렇습니다.
황장엽그걸 언론기관에서 해야지.
리영희이러한 사실들이 충실히 보도되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
황장엽우리가 기대를 걸었던 건 『한겨레』가 그래도 자주적으로 사고를 하고 통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만났는데 의견 차이가 많아요. 전쟁문제 가지고도 이야기하는데 미국 군대 나가면 안 돼. 전쟁문제는 이제 그만두고, 현재 개혁ㆍ개방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에 대해 내가 처음에는 전략적인 것을 이야기했지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어요. 영국 왕세자비가 죽었을 때 신문들이 대단하게 썼지만, 통일에 대해서 쓰는 사람은 없어요.
리영희그 대신 통일원에서 지원하는 예산 3,000억 원이 대학 세미나, 외국 석학 불러들여 쓸데없는 소리 시키고 하죠. 연구 용역비 몇백만 원씩 쓰는 것만 모아놓으면 큰 도서관 하나 나올 겁니다.
황장엽그 돈 가져다가 쌀이나 약품 사서 보내지.
리영희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추상론만 하고 앉아 있어요. 이론적으로 연구된 것은 더 이상 필요 없을 정도로 많아요.
황장엽여하튼 남한 국민들에게 북한의 실정을 알려줘야 해요. 북한을 스탈린식 사회주의와 동일시하면 안 돼요. 동유럽하고도 달라. 중국은 개혁ㆍ개방으로 나아갈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문호를 개방하면 비밀이 다 드러날 텐데, 원한에 사무친 사람들이 가만 있겠는가?
리영희상당히 시간이 걸릴 겁니다. 왜냐하면 남한에서도 40년 동안 오로지 북한에 대한 적대감, 증오감을 심어주는 것으로 정권을 유지했어요. 교과서도 그런 얘기로 가득 차고, 라디오ㆍ신문ㆍ텔레비전의 전쟁주의가 40년 이상 지속돼서 국민들 의식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참 힘들고 힘든 얘기입니다.
황장엽북한 사람들은 여기 실정 전혀 몰라요. 외화벌이, 대외사업하는 사람들은 좀 알지. 여기 와서 보니까 잘못 생각한 게 많아요. 하물며 거기 있는 사람들이야. 북한 동포들이 남한 동포를 알기만 해도 큰 변화가 올 텐데, 『한겨레』가 선두에서 그런 이야기들을 반복해서 해야 돼요. 그저 때때로 해서는 효과가 없어요. 국민이 이해하려면 이야기한 것을 형태를 달리해서 또 선전을 해야 해요.
리영희좋은 말씀인데 이 문제는 아셔야 합니다. 남한 자본주의 신문은 자본 극대화를 위해 매일 화제를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놓고 결과적으로 천박한 신문을 만들어내는 해독이 있습니다. 같은 주제를 가지고 되풀이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신문 방식으로는 독자를 잃어버린다고 생각합니다.
황장엽사람을 달리해서 자꾸 쓰면 되지 않는가? 정부 당국자들이 하는 건 내놓고 민간 차원에서 그렇게 하자는 소립니다. 우린 그걸 위해 노력하자는 거죠.
리영희앞으로 나올 저서에는 대충 오늘 말씀한 것과 같은 철학과 방향이 들어가겠습니까?
황장엽제목이 『북한의 진실과 허위』요. 너무 허위가 많아서 그렇게 쓴 거지. 그런데 앞으로도 다시 만날 생각이 있습니까?
리영희만나는 것은 좋습니다. 다만 다른 것은 많이 통하는데, 한 가지 남한 민주운동에 대한 견해는 많이 다르군요. 이제 공식대담은 이 정도에서 끝내시죠.

•『한겨레』, 1998.5.14, “한겨레 창간 10돌 특별대담”



1) 남한으로 망명한 전 북한 김일성대학 총장중앙 당 국제담당비서북한 국가 이념인 주체사상의 창제자로 알려진 황장엽(黃長燁씨와의 이 대담은황씨에 대한 정보 당국의 조사보호 기간이 끝나서 남한의 공개 사회와의 접촉이 허가된 뒤한겨레신문사와 정보 당국의 협의로공개적 보도를 전제로 남한의 지식인과 대담형식으로 갖게 된 황씨의 최초의 심중 토로다. ‘대담의 사이사이에 끼어들어 황장엽 씨를 대신해 발언한 김덕홍 씨는 황씨와 함께 망명해 온북한 정부 대외무역분야의 간부였던 인물이다본래 안기부와 한겨레의 합의로는 리영희와 황장엽 두 사람만의 자유로운 대담으로 돼 있었으나안기부가 지정한 대담 장소에 가보니 김씨가 황씨 옆에 앉아 있었고델리케이트한 화제에서는 황씨를 젖히고 김씨가 발언하곤 했다이 대담은 1998년 5월 11일에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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