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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 : 책&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 : 책&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

등록 :2016-06-24 
독일학자 베른트 슈퇴버 연구서
세계사 시각으로 한국전쟁 다뤄
“미·일·독일에 번영 안긴 전쟁”

한국전쟁-냉전시대 최초의 열전

베른트 슈퇴버 지음, 황은미 옮김/여문책·1만7000원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독일에도 강한 영향을 끼쳤다. 서독 사람들은 같은 분단국인 독일에서도 남북한과 같은 ‘형제간의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서독에 ‘경제기적’을 안겨주었다. “전쟁 직전에는 공산품 생산이 무너지고 실업자가 약 200만명으로 늘어났다. 이제 속담처럼 된 ‘한국 붐’은 서독에서 제한 없이 생산력을 가동하도록 했다. 미국이나 다른 서방국가들이 군수품에 대한 엄청난 수요를 더는 충당할 수 없게 되자 서독이 생산력을 가동해 필요한 군수품을 생산해냈다. 몇년간 서독은 이러한 틈새를 군수품을 선두주자로 삼아 잘 메워나갔고 서독 경제는 회전기계처럼 잘 돌아갔다. 그리하여 1952년에는 해외무역이 두 배로 증가했다.”

당시 요시다 시게루 총리 등 일본 통치자들이 일본을 살린 천우신조라며 환호하게 만들었다는 피해자 한반도의 비극은, 2차대전 때의 또 다른 가해자 독일(서독)의 경제에도 “전설적인 도약”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베른트 슈퇴버 포츠담대학 역사학과 교수의 <한국전쟁>은 해제를 쓴 한성훈 연세대 역사와공간연구소 연구교수의 말대로 독일어권에서 나온 한국전쟁 관련 서적으로서는 “매우 드문 책”이다. 출간 뒤 독일에서도 주목을 받았다는 이 책은 “독일 독자들을 위한 입문서일 뿐만 아니라, 냉전의 각축장이었던 한반도에 관한 독일인의 첫 작업이자 체계적인 연구서”다.

지은이는 일제 식민지배 시기부터 시작해 한국전쟁 발발과 그 전개 과정을 살피고 그 결과를 나라별, 주제별로 비교했다. 슈퇴버 교수가 보기에, 한국전쟁으로 어떤 나라보다 더 큰 정치경제적 ‘기적’을 누린 곳이 미국이었다. 한국전쟁은 미국에 “정치경제적으로 비할 바 없는 번영의 서막”을 열어젖혔다. “거의 모든 서방세계가 정치경제적 번영에 편승했다. 자랑스러운 10년인 1950년대에는 미국이 자체 수요를 충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경제성장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의 힘겨운 전쟁이나 전 세계적인 냉전이 축소되지 않을 것이라는 자의식이 생겨났다. 정치외교적으로는 소련이 미국의 적수로서 일정 기간 무적으로 등장했지만 미국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세계 최대강국이었다. 삶의 질과 특히 생필품 공급에서 어느 나라도 미국을 꺾을 수 없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그린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지은이는 이런 상황이 당시 미국에서 ‘매카시 선풍’이라는 광신적 ‘빨갱이 사냥’의 성행 요인이 됐을 것으로 본다. “매카시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중산층에게 풍요의 자유를 잃는 두려움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소련·중국과 공모한 북의 남침 자체가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불렀겠지만, 한국전쟁으로 가속력을 얻은 미국의 ‘고원경기’ 수혜자인 중산층이 매카시의 극우 반공주의가 위험하다고 매도한 자유의 일부를 제한해도 좋다고 동의한 것이 매카시 선풍의 배경이 됐다는 얘기로 들린다. 고도성장기의 일본이나 한국 사회, 특히 중산층의 ‘보수화’도 유사현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전쟁이 일어난 그해 1월12일 딘 애치슨 당시 국무장관이 미국의 동아시아 방어선에서 한반도와 대만을 제외한다고 선언한 ‘애치슨 라인’에서도 보듯, 미국은 그때까지 한반도에 별 관심이 없었고 잘 알지도 못했다. 냉전 해체 이후 사회주의권에서 나온 자료들을 많이 인용하는 슈퇴버는 이 애치슨 선언이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동의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고 본다.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이나 한반도 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봤다는 것이다.

무관심했던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은 한국을 사랑했다거나 중요하다고 판단해서가 아니라 “아직 어느 편에도 결정적으로 속하지 못한 특정한 구역을 적의 손에 넘어가지 못하게 하려는 저의”에서였다고 슈퇴버는 얘기한다. 북의 남침 뒤에야 미국은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 결과 최대 450만명이 희생당한 대참사를 거친 뒤 어느 쪽도 서로 넘겨주지 않은 현상유지의 분단상태로 한반도는 다시 고착됐다. 미국은 당시 독일에서도 동독이 서독을 공격할 경우, 서독 시민들이 동족끼리의 통일을 우선시해 저항도 하지 않고 항복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고 슈퇴버는 썼다.

적대진영에 관할지를 넘겨주지 않겠다는 서방 열강들의 행태는 2차대전 뒤에도 다시 인도차이나를 지배하려 든 프랑스나 말레이시아를 놓지 않으려 했던 영국, 인도네시아에 집착했던 네덜란드, 그리고 프랑스 뒤를 이어 베트남전에 개입한 미국의 행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18년 1차대전이 끝난 뒤 ‘민족자결주의’ 14개 조항을 발표한 우드로 윌슨의 말을 믿고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단을 보내 일본의 한국 지배를 뒤엎으려다 냉대받고, 오히려 당시 전승국이던 일본에 패전국 독일이 가지고 있었던 중국과 태평양에서의 이권을 보상으로 안겨주는 걸 목도한 이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식민지 해방운동이 대부분 서구에는 적대적이고 소련에 우호적이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슈퇴버는 지적한다.

“외부의 시선”,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전혀 다른 관점과 맥락”이 주는 이점을 이런 데서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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