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30

한국 유치원의 역사

유아교육정보


한국 유치원의 역사 | 碧松論談
碧松 2011. 6. 8. 17:05
http://blog.daum.net/chs625/1530234


한국 유치원의 역사

 
Ⅰ. 유아교육사와 유치원교육사의 이해

 유아교육사에서 보육교육의 역사와 유치원 교육사는 엄격한 의미에서 차이가 있다. 영유아교육법과 교육기본법의 차이이다. 영유아교육법의 유아교육은 보육교육이 주를 이루는 유아교육으로서 영유교육법이 정하는 아이들은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다. 즉 가정에서부터 각종 시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유아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며, 유치원의 유아교육은 교육기본법이 정하는 교육기관에서 유아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유치원 교육의 역사를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우리나라 유치원 교육의 효시를 놓고 한 때 논쟁이 있었다. 경성유치원이라는 설, 나남유치원이라는 설, 이화유치원이라는 설 등 각기 자기 나름의 논지가 있다. 우리나라 유치원의 효시가 정설로 입증되기도 전에 어디에 근거를 두었는지 모르지만󰡐유치원 교육 100주년󰡑기념행사를 한 예도 있다. 우리나라에 서구식 유치원교육제도가 들어올 당시는 문물의 개화란 조류 앞에 갈피를 잡을 겨를도 없이 외세에 의해 난립을 가져왔다. 따라서 우리 땅에서 실행된 교육이라고 해서 막연히 우리나라 유치원 교육의 효시라 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에 서구식 소위 신식 유치원이 설립된 것은 우리가 독자적이었느냐 아니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즉 주체성의 문제이다. 개항과 함께 외래의 신문물의 유입으로 유치원 설립에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당시 일본은 식민통치의 수단의 목적으로, 선교사는 선교의 수단의 목적으로 유치원 설립의 각축장을 방불케 하였다.

 
이에 영향을 받아 일제 침탈에서 벗어나려는 우리는, 어린아이 때부터 주체성의 확립이라는 우리의 목적에 맞는 유치원을 설립의 필요성이 선각자들에 의해 싹트기 시작했다. 일제에서 벗어난 독립이라는 명제 앞에 유치원의 설립이라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재정도 유치원에 대한 인식도 운영의 경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설립된 유치원을 우리나라 유치원의 효시로 가리는 일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서구식 유치원이 우리나라에 유입된 당시 어느 것이 우리의 것이고 어느 것이 남의 것인지를 가리는 것은 바로 우리나라 유치원 역사를 바로 아는 일이다. 즉 유치원의 설립과 교육의 효시는 주체를 가름하지 않고 막연히 오래되었다고 효시로 볼 수는 없다.


어느 나라고 그 나라의 유치원 교육의 효시를 가늠하는 것은 설립과 운영 등 모든 면에 있어서 주체로 가늠하고 있다.


첫째 설립의 추체이다. 유치원 설립자가 누구인가이다. 즉 자기 나라 사람인가 아닌가. 둘째 설립 목적의 주체이다. 설립 목적을 자기 나라 사람의 교육에 두고 설립한 것인가 아닌가.

셋째 교원의 주체이다. 즉 가르치는 교원의 구성은 주로 자기 나라 사람인가 아닌가.

넷째 교육목표의 주체성이다. 즉 자기 나라 사람의 양성에 목표를 두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나라 사람의 양성에 두고 있는가.

다섯째 교육 내용의 주체성이다. 즉 자기 나라 문화와 역사를 중심으로 한 내용의 편성인가 아니면 다른 나라 문화와 역사를 중심으로 편성한 내용인가.

여섯째 말고 글의 주체이다. 교육에서 사용하는 말과 글이 자기 나라의 것인가 아니면 다른 나라 것인가. 유치원의 설립과 교육의 효시를 가리는 일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유치원의 설립과 교육의 운영에 있어서 주체를 가리지 않고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결정을 내린다만 이는 진정한 효시가 될 수 없다고 본다. 아직도 우리는 어떤 유치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유치원인가 하는 효시에 대한 논의에 따른 결론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유치원 교육의 효시를 가리는 일이 우리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

 

한 나라의 유아교육의 역사는 그 나라 민족이 사회를 형성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물론 처음 시작은 가족 단위였으며, 점차 씨족에서 부족 사회로 이동하면서 유아교육의 형태도 변화했을 것이다. 가정에서 개인을 대상으로 하던 유아교육은 소그룹에서 점차 대그룹으로 확대 운영되었을 것이다.

 

 

국가가 형성됨으로써 유아교육은 국가 사회의 필요에 의해 제도화되어 일정한 장소에서 집단적으로 운영 실시되었다. 유아교육의 형태는 국가가 창출해온 문화의 영향과 필요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 따라서 나라마다 서로 다른 형태의 유아교육이 있어 왔다.

 

 

사회가 변화 발전함에 따라 새로운 문물의 수용으로 유아교육의 형태는 변모가 거듭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일 수는 없다. 우리나라의 유아교육의 옛 모습이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1123년에 국신사(國信使)로 왔던 서경(徐競)이 송(宋)나라로 돌아가 1124년에 쓴『고려도경(高麗圖經)』이다. 여기에󰡐졸오동치역종향선생학(卒伍童穉亦從鄕先生學)이란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 유아교육은 마을 단위의 서당에서 훈장으로부터 유아를 대상으로 교육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서양은 1816년에 오웬(Rober Owen)에 의해 방직 공장에 성격형성학원 안에 유아학교의 설립으로 실시된 보육교육을 비롯하여 1840년 프뢰벨이 유치원을 설립함으로써 오늘날까지 발전해 오고 있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보육이 있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아직 찾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빈민의 구제를 목적으로 구휼(救恤)이란 제도가 있었다. 우리나라에 서구식 보육교육이 들어 온 것은 1885년이다.

 

 

당시는 병인박해(丙寅迫害)의 여파로 천주교의 구제 사업은 용이하지 않았다. 그 후 천주교의 백주교(부랑(Blanc) 신부)가 천주교의 박해 및 정부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노쇠자(老衰者)와 병자(病者) 고아들의 구제의 필요성을 느껴 곤당꼴(美洞:지금의 을지로 1가 미국대사관 서북방)에 집 한 채를 사서 영해원(嬰孩院)을 설치하고 무의탁한(無依托) 고아들을 수용하여 여교우(女敎友) 몇 명으로 하여금 이들을 보육케 하였다. 공식적인 최초의 보육기관이다.

 

 

서양이건 동양이건 간에 유아교육은 처음 시작은 농경사회에서는 가정에서는 가족으로부터 또는 독선생의 초빙으로, 수공업 사회에서 공장 산업 사회로 발전하면서 가족이나 지역 단위에서 소규모로 이루어지던 것은 유아교육은 필요에 따라 공장이나 혹은 대단위의 지역 사회에서 집단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 서구식 유아교육이 들어온 것은 대략 개화기로 보고 있다. 서구식 유아교육이 들어오기 전에는 『소학(小學)』에 담긴 사상을 중심으로 일상적인 사람이 되는 교육과 함께 가정에서는 가족으로부터 또는 독선생의 초빙하여『천자문(千字文)』을 비롯하여『동몽선습(童蒙先習)』,『계몽편(啓蒙編)』,『소학(小學)』,『명심보감(明心寶鑑)』 더 나아가서는 사서삼경(四書三經)까지도 가르친 경우가 있다. 마을의 서당도 이와 같은 내용을 가르쳤으며, 주로 과거 준비의 초기 단계였다. 성장한 후에는 학당, 서원, 성균관 등의 교육 기관으로 진학을 하였다. 스승을 찾아 유학을 한 경우도 있다.
 

Ⅱ. 조선인 설립 근대식 유치원

1. 유치원 관계법 제정

대한제국은 개항과 더불어 시작된 개혁의 의지로 중앙행정 조직의 개편을 단행하였다. 1894년에는 조선조의 교육을 관장해 오던 중앙행정 관제의 하나였던 예조(禮曹)가 폐지되고 대신 1894년 6월에 학무아문(學務衙門)이란 새로운 중앙행정 관제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각 분야에서의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예조에는 유치원 교육을 관장하는 부서나 관제가 없었다.

중앙행정 부서와 관제가 1907년 12월 18일에 개정됨으로써 학부 관제가 신설되었다. 이때부터 중앙행정 체제에 유치원 교육과 관련된 부서의 신설과 새로운 법규가 제정되었다. 즉 종래는 없었던 유치원에 관련된 부서와 규정이 탄생을 보게 된 것이다. 즉, 학부 관제에 ‘보통 교육 및 유치원에 관한 사항(제4조제2항)’을 신설함으로써 정부의 유아교육에 대한 중요성의 의지를 보여주었음을 물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법적 조치가 수반되었다. 이로써 우리나라에 최초로 유치원에 관련된 법제화가 이루어지는 연원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1909년 1월 학부 분과규정이 구체적으로 명문화되었다. 즉 학부 분과규정에 학사 업무의 관장 사항으로 ‘고등여학교 및 유치원 교육에 관한 사항(제6조 제3항)’을 규정함으로써 고등여학교에 부속 유치원을 부설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1907년에는 학부 직할학교 직원정원령이 제정되었다. 1908년 4월 2일에는 고등여학교령이 제정되었다. 이 고등여학교령 제 10조에는 부속유치원을 설치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제시되었다. 이들 영에 따라 관립, 사립 고등여학교의 설립은 물론 부속유치원을 설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908년 4월 1일에는 관립 한성고등여학교가 설립 개교되었으며, 초대 교장에 어윤적(魚允迪)이 취임하였다. 이 학교 학칙에는 부속유치원 설치에 관한 조항(제2조)을 명문화 하였다. 제4장 제18조부터 제24조까지는 유치원 교육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즉, 유아의 연령, 유아의 정원, 보육항목, 보육일수, 보모 1인의 보육유아 수, 보육료, 휴업일 및 입원․퇴원에 관한 절차 등에 관한 규정가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한편, 이 규정에 의하여 ‘한성고등여학교를 장치 설립할 터인데 학교 부속으로 유치원을 설치한다더라.‘는 신문의 보도기사가 있으나 유치원 설치, 개원일시나 교육 내용 및 운영에 관한 사항에 대하여는 상세히 언급하고 있지 않음으로써 부속유치원이 설립 운영 되었지 알 수 없다.

 

 

‘성내유지(城內有志)인 모모(某某)씨가 유치학교를 설립하야 교육의 전서(前徐)를 발달하기를 주의(注意)하고 교사(校舍)와 재정(財政)을 연구 중이라 하더라’

 

 

대한매일신보는 기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때부터 정부 차원은 물론 일반 사회에까지 유치원 교육에 대한 관심은 확대되었으며, 이 시기의 유치원 교육은 서양의 근대식 교육의 수용과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09년 7월 9일 고등여학교령 시행 규칙(학부령 제2호)이 발표되었다. 이 규칙에 의해 고등여학교에 부속유치원 설립의 후속 조치가 구체화되었다. 즉, 고등여학교에 유치원을 부설 또는 폐원하려면 공립은 관찰사, 부윤(府尹: 시장) 또는 군수가, 사립은 설립자가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아야 하며, 세칙을 마련할 때에는 학부대신에게 보고하도록 의무 규정을 두었다.

 

 

그 후 일제가 제1차 조선교육령(1911. 8. 22)을 제정 공포할 당시는 유치원에 관한 규정은 없었으나, 1922년에 조선교육령을 개정하면서 소학교령에 유치원에 관한 규정을 신설했다. 일제는 제1차 조선교육령을 제정 공포하면서 그들의 식민정책의 야욕을 노골화하였다. 즉, 조선인을 ‘충량한 국민(조선교육령 제2조)’으로 육성한다는 규정이 이를 실증하고 있으며 이때부터 일제는 식민지 동화정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법제화를 진행시켰다.

 

 

일제가 종래의 유치원 교육에 관한 법 규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법에 명문화시킨 것은 1922년 2월 16일 소학교령에 유치원에 관한 규정을 포함시키면서 부터이다. 이 규정은 모두 13조 부칙으로 구성되어있다. 그 내용을 보면 유치원에 들어갈 수 있는 연령을 4세였던 것을 3세부터 7세까지의 유아로 하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 유치원 설립비용 부담, 설립요건, 설립절차, 보육목적, 보육항목, 유치원의 설비 등 유치원 설치 운영상에 관련된 조항들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였다..

 

 

1922년 3월에는 조선공립학교 관제(칙령 제152호)가 개정되어 공립유치원에 원장과 보모를 둘 수 있게 하였고, 1922년 4월에는 보모의 정원에 관련된 조선공립학교 직원정원 규정(총독부령 제54호)을 제정 공포하였다. 1922년 8월에는 유치원 교사의 자격과 보수를 결정하는 내용인 공립유치원 보모의 자격, 봉급 등에 관한 건(총독부령 제110호)이 발표되었다.

 

이 규정에 따라 공립유치원의 경우는 도지사가 보모 중에서 원장을 임용할 수 있게 하였고 보모는 판임으로 대우하도록 처우 규정이 마련되었다. 특히 공립유치원에서 근무하는 보모의 자격 및 봉급에 관한 규정은 유치원 교사의 자격 기준과 근무 경력을 소학교령에 준용함으로써 유치원 교사의 신분보장과 처우가 초등학교 교원과 형평성을 잃지 않고 유지하도록 하고 있다. 당시 유치원 교사의 자격기준은 보모면허증을 가진 자로 하고 있다.

 

이 외에도 1943년 3월 8일에는 사범학교령(칙령 제109호)를 개정하여 사범학교에 부속 유치원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부속유치원의 원아의 입원 및 퇴원, 보육료 등에 관한 규정은 문부대신이 정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설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2. 조선인이 설립한 유치원


1907년부터 유치원에 관련된 법제화가 이루어짐으로 해서 이후부터 많은 유치원이 설치 운영되기 시작했으며, 그 실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중앙 유치원

개항 이후 새로운 문물의 수용을 위한 내수외학(內修外學) 등의 사상적 기저는 점차적으로 이의 실천으로 옮겨져 소학교를 비롯한 중등학교 수준의 학교가 조선인에 의해 속속 설립 운영되었다. 조선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 의해 포교와 선교뿐만 아니라 자기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목적 등으로 서구식 근대적 교육기관인 소위 신식학교가 설립되었고, 이들은 점차 확대되어 갔다.

이에 영향을 받은 우리는 우리 교육 기관 설립의 필요성을 절실히 인식하게 된다. 즉, 외국의 유치원 교육이 유입된 지 20년이 가까워 오도록 조선인을 위한 유치원의 설립은 없었으나, 설립의 필요성만이 강조되었다. 이 때 조선인의 유아교육을 목적으로 조선인에 의해서 설립된 사립 유치원이 바로 중앙유치원이다. 중앙유치원이 정동교회 부속 유치원의 분원으로 설립된 것은 1916년 9월 20일이다. 원아 25명을 가지고 개원을 한 이 유치원의 창원 정신은 다음과 같다..

‘장래의 조선을 위하여 잘 싸울 용사를 양성하는 기관을 세워 국민의 앞길을 열어 줌을 목적으로 하며, 취미 있는 방법, 쉬운 교육과정, 부드러운 사랑으로 원아들을 가르치며, 규칙적인 유치원 생활은 원아들을 건실한 사회인으로 양성하는 것이다.’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만들려는 계책으로 교육이 추진되고 있는 당시에 ‘조선을 위하여 잘 일하고 잘 싸울 용사를 양성한다.’는 교육 목적은 분명히 한 중앙유치원은 조선인의 유아를 위한 유치원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유치원의 설립 장소가 교회였으며, 운영의 책임을 외국인 선교사가 맡았다. 즉, 중앙유치원의 원장은 유치원 경영에 경험이 있는 정동유치원 원장인 프라이(L. E. Frey)가 겸하도록 위촉하였다.

실제 경영은 원장 대리인 브라운리(C. G. Brownlee)가 경영을 맡았다. 서구식 유치원을 모르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설립은 하였으나 경영 관리는 유치원 교육에 경험이 있는 기독교계 선교사들에게 위임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 설립의 주체는 박희도(朴熙道), 장락호(張樂浩), 유양호(柳養浩) 등 3인이었다. 이 당시의 교사는 이화유치원 사범과 출신인 백남신(白南信), 장필순(張弼順)등이 맡았다.

박희도는 3.1독립 운동을 주도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조선민립대학 설립의 발기인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와이엠씨(YMCA) 간사인 그는 좌담이나 강의로 남녀 학생들에게 민족혼과 독립운동 정신을 일깨워 주었던 인물이나 여기서는 유치원 설립 및 운영에 관련된 사항에 관하여 논급한다. 3.1독립 운동에 연류 되어 2년 동안 옥고를 겪은 다음 출옥하여 중앙유치원 원감으로서 경영에 힘스는 한편 ‘신생활(新生活)’잡지사를 만들어 민족 계몽운동을 전개하다가 1922년 11월에 발행된 ‘신생활’지의 기사가 문제가 되어 3년의 유죄 판결을 받고 또 함흥 감옥에서 영오의 생활을 했다. 그는 1924년에 출감한 후 중앙유치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28년에 중앙보육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유양호는 젊은 실업가로서 사업에서 얻은 이윤을 교육 사업에 투자했다. 그는 1918년 북간도 용정에 대성중학교의 기반을 닦아 주었고, 청송유치원과 경성여자상업 학교를 견지동 천주교 교회당을 빌어 창설했으며, 민립대학 설립 운동에도 참가하였다. 그는 김병노(金炳魯), 김성수(金性洙), 장두현(張斗鉉), 이하용(李河用), 김윤수(金潤秀) 등과 함께 민립대학 회금위원(會金委圓)이 되었으며, 중앙유치원 창립에 참가하여 원감, 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중앙유치원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3.1독립 운동을 전후하여 전도사였던 박희도(朴熙道)와 김창준 목사가 민족 대표의 일원으로 체포 투옥됨에 따라 교회는 심각한 운영난에 부딪히게 되었다.원아들의 가정 역시 피검자가 많았고 상가의 철시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휴원할 수밖에 없었다.

3.1독립 운동 이후 브라운리가 중심이 되어 유양호(柳養浩)를 설립자로 1920년 5월 5일에 중앙교회에서 재개원을 하였다. 수업은 9시 30분부터 정오까지 하였으며 교육 대상 유아는 5세에서 8세까지였다. 1919년 가을 교회가 개축됨에 따라 시설 설비에 주력하였으며, 교사로는 이화학당 유치사범과 출신인 박채봉(朴彩鳳), 배애주(裵愛主), 이자성(李茲成) 등을 채용하여 봉직케 했다.

교실 하나 없이 교회당 건물을 쓰던 중󰡒교사 없이 교회당을 빌어쓴다는 것은 30만 조선인이 사는 서울에 조선인이 경영하는 유치원 하나 없다는 것은 민족적 수치󰡓라는 취지 아래 중앙유치원 확장과 모범이 되는 유치원 설립을 목표로 1921년 10월 11일 명월관에서 발기 창립총회를 열었다.


여기에서 이사장에 윤치호(尹致昊), 이홍국(李泓國), 이병조, 김명식(金明植) 등이 선출되었으나 실현을 보지 못했다 유치원의 교육 내용은 노래, 유희, 그림, 수공 등이었다. 노래는 독일 민요 등 수준이 높은 것을 가르쳤으며, 이것은 미국 선교사들이 본국에서 받은 교육 방법을 적용한 것이었다.

(2) 조양유치원
 
1922년 3월 이강혁(李康爀)에 의해 서울의 연지동에 조양유치원(朝陽幼稚園)이 세워졌으며, 1925년 8월에는 이기춘(李起春)의 기부를 얻어 재단 법인으로 바뀌었다. 어린 아동들에게 정신과 육체를 조화적으로 발달시켜 사회에서 완전한 인간이 되도록 하는데 교육 목적을 두었다. 이러한 목적을 성취(成就)하기 위해 이 유치원에서는 습관 형성을 위해 오관의 발달을 조화롭게 했다. 유희, 회화, 수기, 자유 운동 등 아동의 흥미를 중심으로 가르친 조선인 유아를 위해 설립한 유치원이다. 이 유치원은 옥통(玉通:구슬), 10종 은물, 점화집, 숫자 놀이 등 다양한 교구를 구비하고 있었다..

(3) 이외의 유치원

한편 1910년에 조선인에 의해 밀양에 유치원이 설립되었다. 이 유치원은 밀양군 시의소(市議所) 내에 설립되었다. 박장억(朴章億), 한춘옥(韓春玉) 양씨는 월료(月料)를 담당했고, 기타 회원은 해원(該員) 일체 경비를 분담하여 일심시무(壹心視務)하는 고로 해원 학도가 50여인에 달하여 진취지망(進就之望)이 대유(大有)하더라는 대한매일신보의 보도가 있으나 그 후의 존속 여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외에 조선인에 의해서 세워진 유치원은 금정유치원(錦町幼稚園, 金應圭:1920), 용만유치원(龍灣幼稚園, 李昌洙 外:1920), 함산유치원(咸山幼稚園, 安相弼:1921)등이 있으며, 기독교 목사인 김필형(金弼涥)에 의해 삼광유치원(三光幼稚園, 1923)이 서울에 세워진 예도 있다..

(3) 포교를 위해 설립한 유치원

당시 조선 불교에 의해서 유치원이 설립되고 있다. 즉 1924년 10월 경남 산청군 산청면에 설립된 대원사(大源寺)의 산청유치원(山淸幼稚園)이나, 1928년 1월에는 부산에 있는 범어사(梵魚寺) 에 설립된 동래유치원이 바로 불교가 설립한 것이다. 동래 유치원은 1930년에 교직원 3명이 있었으며, 원아 90명(남자 46명, 여자 44명)이 교육을 받았다.

산청 유치원은 교직원 1명에 30명의 원아가 다니고 있었다. 이 두 유치원은 모두 조선의 불교에서 설립한 것이나 설립의 취지와 목적 및 교육 내용에 관해서는 알 수 없다. 또 1929년 9월에는 조선불교중앙총무원(朝鮮佛敎中央總務院)에 의해 서울의 수송동에 대자유치원(大慈幼稚園)이 개원됐다. 이 유치원은 조선불교(朝鮮佛敎) 31본산연합사업(31本山聯合事業)의 일환으로 설립된 것으로 교육 목적은 불교 정신에 입각하여 지육, 덕육, 체육을 함양하는데 있다. 원아들에게 유희, 창가, 동화, 수공, 율동, 은물 등을 교육했으며, 자모회를 조직하여 유치원을 운영했다.


(4) 친일파 주축으로 설립한 유치원

조선인에 의해 설립되었으나 친일을 교육을 한 유치원이다. 교육 대상을 조선인으로 하되 교육 목적과 내용을 일제 식민지 동화 교육 정책에 따른 유치원이 바로 경성유치원(京城幼稚園)이다.이 유치원은 조선인인 친일파의 한 사람인 조중응(趙重應)의 주도로 세워진 유치원이다. 1913년 4월 자작(子爵) 조중응을 대표로 경성부 북부 재동에 설립된 이 유치원은 친일파 사업가 등의 발기에 의하여 설립한 것으로 일종의 귀족 유치원이었다. 이 유치원은 1913년 초 민병석(閔炳奭), 조중응(趙重應), 경성부윤(京城府尹), 유혁노(柳爀魯), 한상용(韓相龍), 백완혁(白完爀), 안형환(安涥煥), 백인기(白寅基), 예종석(芮宗錫) 등이 설립자 대표 회의를 개최하고 설립 방법과 유치 방법을 논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그들은 원칙을 원안대로 통과시키는 대신 원사(園舍)가 신축될 때까지는 경성 여자고등 보통학교의 교실 하나를 빌어 동년 4월 1일에 개원키로 결정을 했다. 유치원의 입원 자격은 창설자의 자녀에 한하였다. 자녀를 입원시킨 창설자들에게 기금을 100원 이상 기부하게 했다. 원아의 1개월분 보육료는 2원이었고, 일본인 원장과 보모를 고용하였다. 교육 내용은 일본의 풍습과 습관을 가르쳤다.

특히 일본어 교육에 치중하는 등 친일파들이 조선인을 동화시키기 위해 설립한 유아교육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유치원 원아 수료식에서 이완용(李完用), 송영 경기도지사(松永 京畿道知事)등이 참석하여 ‘동화교육(同化敎育)에 있어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것을 치하하고 있음에서 잘 입증되고 있다. 유치원에 입원 자격은 만 3세부터 학령 전까지의 어린이었으며, 교육 시간은 일주일에서 24시간으로 하루 평균 4시간 정도였다.

 

 

(5) 이외의 유치원

 
한편 1910년에 조선인에 의해 밀양에 유치원이 설립되었다. 이 유치원은 밀양군 시의소(市議所) 내에 설립되었다. 박장억(朴章億), 한춘옥(韓春玉) 양씨는 월료(月料)를 담당했고, 기타 회원은 해원(該員) 일체 경비를 분담하여 일심시무(壹心視務)하는 고로 해원 학도가 50여인에 달하여 진취지망(進就之望)이 대유(大有)하더라는 대한매일신보의 보도가 있으나 그 후의 존속 여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외에 조선인에 의해서 세워진 유치원은 금정유치원(錦町幼稚園, 金應圭:1920), 용만유치원(龍灣幼稚園, 李昌洙 外:1920), 함산유치원(咸山幼稚園, 安相弼:1921)등이 있으며, 기독교 목사인 김필형(金弼涥)에 의해 삼광유치원(三光幼稚園, 1923)이 서울에 세워진 예도 있다..

 
Ⅲ. 기독교계가 설립한 유치원
 

1. 기독교의 선교 활동

선교사들이 조선에 와서 선교 활동을 시작한 것은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이후 2년여가 지난 1884년부터라 하겠다. 조선에서 병원 운영과 교육 사업을 하기 위하여 고종의 윤허가 필요했다. 미국 선교 본부의 지시에 따라 윤허를 얻기 위하여 입국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조선에서의 선교 활동에 매우 조심성과 신중성을 보였다. 초기의 선교사들은 직접적인 선교 활동보다는 영어학당을 열어 젊은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활동 이외도 의료 활동, 사전 편찬, 번역 사업 등에서 활약을 하였다.


1888년경부터는 선교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 학교 내에서의 종교교육을 강화하였다. 1890년에는 교회를 중심으로 초등교육 수준의 교회 학교들을 많이 세우는 등 교육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게 된다. 이 때 기독교의 선교 활동 중 유치원 교육 활동 역시 활발했다. 1914년의 이화유치원의 설립을 비롯하여 많은 유치원이 설립 운영되었다. 이상금에 의하여 1913년부터 1926년까지 기독교계 유치원이 101개원에 달하며, 이들 중 39개 유치원이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유치원으로 보고 있다.


김양선(金養善)은 1927년까지 177개 기독교계 유치원이 설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계 유치원이 급증한 것은 1893년 1월에 채택한 재한장노교연합회 선교 정책의 영향이 크다 하겠다.

이 때 채택된 선교 정책을 보면,

첫째, 전도의 목표를 상류층보다 근로 계급의 계도(啓導)에 두는 것이 낫(勝)다.

둘째, 모성은 후대의 양육에 중요한 영향을 주는 관계 상 부녀자의 계도와 청소년의 교육을 특수 목적으로 한다.

셋째, 군소재지에 초등학교를 설립함으로써 기독교 교육에 성과가 많은 터이니 선교부 소관 학교에 재학한 남학생들을 교사로 양성하여 각 지방으로 파송한다.

넷째, 교육받은 교역자를 배출하는 희망도 우리 교육 기관에 실현될 것이니 이 점에 항상 관심을 두어야겠다.

다섯째, 모든 문서 사업에는 한자의 구속을 벗어나고 순한글을 사용함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1897년 선교부에서는 선교 정책에 따라 지방에 학교를 설치할 것을 인정하였다. 선교부가 청소년 교육을 전담함으로써 선교 활동의 수단으로 교육 사업이 활발히 각지로 확대 진행되었다. 지역별 선교 활동은 유치원 설립 운영에 영향을 주었으며, 지역적 특성을 띄었다.


2. 기독교가 설립한 유치원


(1) 이화유치원


1914년에는 기독교 선교사인 브라운리(Charlott Georgia Brownlee ‘富來雲’)가 당시의 부인병원이었던 보구여관(保救女館)자리에다 16명의 유아를 모아 교육을 시작했다. 이것이 오늘날 이화 유치원의 연원이다. 당시 이화학당장이었던 프라이(E. Frey)가 1912년에 휴가차 미국에 갔을 때 유치원 교사 양성 기관인 신시내티 유치원 학교(Cincinnati Kindergarten Training School)에 다니는 브라운리를 만나게 되었다.


평소 유아교육에 관심이 있던 그는 브라운리에게 조선에 와서 유치원 교사로 근무할 것을 요청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는 조선에 왔고, 1914년에 이화 유치원을 개원케 되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에 기독교계 유치원의 설립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화유치원은 선교사들은 유치원 교육 활동에 필요한 유치원 교사를 양성하기 위하여 1915년에는 이화유치원에 이화 유치원 사범과를 부설 운영하였다. 이 유치원 사범과에서 유치원 교사가 양성됨에 따라 선교 활동과 관련된 기독교계 유치원의 설립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데 기여하였다.

(2) 영화 유치원

1917년 3월 28일 기독교 선교사인 헤스(Margaret I. Hess)에 의해 경기도 인천부 우각동 42번지에 있는 영화여학교에 영화유치원을 설립되었다. 교육 목적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서 유아들의 천진한 성품을 보육하는데 있었다. 헤스(M. I. Hess)는 제물포에 처음으로 설립되는 유치원을 모범 유치원으로 경영하기 위해 유아들에게 필요로 하는 교구를 미국에서 주문하거나 기부의 교섭으로 완비했다고 한다.

 

 

다른 유치원과는 달리 교육 연한이 2년이었고, 학년으로 대별하여 3기로 구분하였다. 또한 1년 과정을 이수해야 2년으로 진급하며, 2년을 보육한 다음에는 수료증을 주었다. 한 학년을 3학기제로 하고 있는 이 유치원의 보육 과정은 글자, 셈수, 창가, 유희, 수공, 은물, 율동, 위생, 회화 등이었다. 한글과 일본어 등의 글자 지도는 물론 1에서 1,000까지의 셈수를 가르치었다.

 

 

특히 회화(그리기)에 있어서는 1년 과정은 연필을 사용했고, 2학년 과정에서는 크레파스를 사용하였다. 과목별로 시간수가 정해져 있었으며, 1년은 과목당 16시간, 2년은 과목당 18시간을 가르치도록 원칙에 규정되어 있었다.

 

 

(3) 호수돈 유치원

 

 

선교사들이 세운 유치원으로 1919년 와그너(Ellasue Wagner, 조선 이름:‘王來’)에 의해 개성군 송도면에 세운 호수돈 동ㆍ남ㆍ북 및 중앙유치원이 있었다. 이 유치원은 원장인 하워드(Clara Howard, 조선이름: ‘許吉來')가 경영하였다. 이들 유치원은 아동의 신체 발달에 유의하고 관습 본성에 따라 발휘하여 완전한 국민이 될 수 있는 기초를 형성하는데 있었다. 원장 하워드(Clara Howard)는 1923년에 조선에 와서 호수돈 여자고등 보통학교 교원을 역임했고, 이화유치원 사범과에서 강의를 했다.

 

 

(4) 이외 선교사가 설립한 유치원

 

 

이 외에도 선교사인 모리스(L. O. Morris, 조선 이름:‘慕儀’)에 의해 설립된 유치원은 강릉의숭유치원(1919), 원주정신유치원(1918), 횡성유치원(1919) 등이며, 회령의 회령유치원(1919)은 야소교장노파(耶蘇敎長老派)가 설립한 것이다. 당시 기독교 선교사들은 지역 담당으로 선교 활동을 하였으며, 그들은 해당 지역에 기독교계의 유치원을 많이 설립하였다.

 

 

Ⅳ. 일본인이 설립한 유치원

 

 

1. 일본인의 포교 활동

 

 

1876년 일명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인들은 가족을 데리고 조선에 이주해 오기 시작했고, 그 세력이 점차 강대해지자 이주 숫자는 점점 증가되었다. 이들은 그들 자신들의 생활에 이익을 위해 단체 구성의 필요성을 느껴 외무성 관리관 주재 하에 거류민 단체를 구성하고 회의소를 설치하고 전담 사무원이 사무를 관장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곧 일본인들의 부산 거류민 자치 기관이다.

 

 

그들은 자치 기관인 이 회의소에서 자신들에게 제기되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코자 했다. 그 한 문제가 자기들의 자녀 교육의 필요성이었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교육 기관의 설치 문제가 대두되었고, 그 해결책으로는 학교 설립을 결정하였다. 따라서 회의소(당시 부청 밑)의 방 하나를 교사로 하고 우에노 게이스케(上野敬介) 주임이 아동 13명을 모아 놓고 독서, 산술, 습자를 가르친 것이 1882년 5월이며, 이것이 일본인들이 행한 조선에서의 첫 교육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녀 교육을 구실로 학교를 설립했으나, 데라고야식(專小屋式) 교육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소학교였으며, 이러한 경향 각지로 확대되었다.

 

 

이를 계기로 1883년에는 원산에 1885년에는 인천에, 1897년에는 서울에 이 같은 학교를 설립했다. 그 후 이들의 교육 문제는 유아교육에까지 확대되어 1897년에는 서울에 이 같은 학교를 설립했다. 그 후 이들의 교육 문제는 유아교육에까지 확대되어 1897년에 부산에 처음으로 사립 유치원을 설립하게 된다. 이 때 설립한 유치원이 사립 부산유치원으로 조선에서의 근대 서구식 유치원 설립의 효시로 기술되고 있다.

 

 

조선에 근대식 일본 유치원이 유입되는 과정을 보면 두 가지 형태로 분류된다. 하나는 일본인 승려가 일본 불교의 포교를 목적으로 유치원을 설립 운영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 거주민이 자기 자녀를 교육할 목적으로 설립한 유치원을 들 수 있다. 1897년 개항지인 부산에 설립한 사립 부산유치원을 비롯하여 1907년 함경남도 원산부의 사립 원산유치원, 1909년 함경북도 경성군 나남읍의 나남유치원 등은 설립의 주도적 역할이 일본 불교 종파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일본이 명치유신 이후 대륙 진출의 야욕을 갖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일본 불교의 각 종파들은 다투어 우리나라에 진출을 꾀하였다. 개항을 하거나 조차지가 생긴 곳에서는 반드시 일본 승려들이 포교소를 설치하고 포교 활동을 하였다. 이 때 포교 활동을 한 일본 불교의 종파로는 일연종, 진종, 조동종, 진언종, 현화종, 정토종 등이며, 이들은 일본의 유력한 종파로 망라되어 있다. 일본이 조선에 최초로 상륙시킨 불교 종파는 진종 대곡파이다. 대곡파는 병자수호조약 이후 일본 외무성 데라지마 이에노리(寺島家則)의 권고에 의하여 1877년에 부산에 별원을 설치하고 포교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1881년에 일연종과 현화종이 차례로 들어왔다. 본원사는 원산(1880), 인천(1884), 서울(1890) 등지에 별원을 설치하였고, 그 이후 군산, 진남포, 개성, 신의주 등지에 포교소를 세우고 포교 활동을 하였다.

 

 

포교 활동으로는 신자의 확보보다는 우선 병원과 유치원을 설치 운영하는 일이었다. 1878년 오무라 엔싱(興村圓心) 부산에 본원사(本願寺) 별원을 세원 이래 1910년까지 전국 각지에 세운 병원과 포교소가 무려 63개소였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오무라엔싱(興村圓心)의 여동생인 니모꼬는 의사, 교사, 취사부 등을 데리고 와서 포교 활동을 벌였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일본 불교 종파들이 조선에서 포교 활동으로 유아교육을 추진할 때 초기는 조선인 아동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고 일본인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조선인 유아들은 한두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1910년 한일합병 이후로는 조선인 유아가 점차 늘어갔다.

 

 

2). 일본불교인이 설립한 유치원

 

 

(1) 사립 부산 유치원

 

 

사립 부산 유치원은 1897년 3월 3일 대곡파 본원사 부산 별원의 윤번(輪番)인 구스하라 하까끼(管原濱城)에 의해 개항지인 부산부 서정에 있는 기타하마(北濱) 통신부 가옥에서 20명의 일본 유아를 대상으로 시작했다. 사립 부산 유치원의 설립 경위를 부산교육사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유아 보육 기관을 설치해야 한다는 많은 거류민들의 바람이었지만 자치 단체에서 운영할 만한 재정적 … 여유가 없었다… 대곡파 본원사 부산 별원의 윤번인 구스하라 하까끼는 … 유치원을 운영하기로 결심하고 영사 거류민 총대(總代)의 원조를 구함과 동시에 유아 20명을 모아 개원식을 했다’

 

 

이 유치원은 개원한지 3개월만인 1897년 5월 28일에 본원사로 이전하였으며, 1905년에는 거류민단의 보조 없이 운영할 만큼 원세가 강해졌다. 1906년에는 원아수가 120명에 이르렀고, 교사는 모두 일본인이며 일본인 유아들이 교육의 대상이었으며, 조선인 유아는 2명이 취원했다.

 

 

(2) 나남 유치원

 

 

나남 유치원은 1909년 4월 정토종포교자원(淨土宗布敎資源)에 의해 함경북도 경성군 나남에 설립되었으며, 교사와 원아는 모두 일본인으로 자기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유치원을 설립한 것이다.당시 일본 불교가 조선에서 포교원을 설립한 종파는 본원사, 정토종 외에 조동종, 승원사 등이 있다.

 

1900년대 일본인이 조선에 설립한 유치원으로는 대구 유치원, 부산 유치원, 원산 유치원, 평양유치원, 진해유치원, 대전유치원, 군산유치원 외에도 완산유치원(전북 전주군 전주면)은 1926년 전주불교부인회가 설립했고, 명조유치원(전남 목포부 하정)은 1922년 정토사약견우도(淨土寺若見祐道)에서 설립했다. 대화(부산 부평정), 부산진(범일정), 마산(완월동) 유치원 등도 일본 불교 종파들에 의해 설립 운영되었으며, 교사와 원아는 모두 일본인이었다.

 

 

3) 일본 거류민이 설립한 유치원

 

 

(1) 인천기념유치원

 

 

인천기념유치원은 1900년 5월 개항지인 인천에 살고 있는 일본인 거류민들의 기부금에 의해 인천부 산수정에 세워졌다. 이 유치원은 일본인들이 그들의 황태자(후에 대정천황으로 즉위)의 성혼 경사를 기념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다. 이처럼 일본인들은 조선을 자기 나라처럼 마음대로 교육 기관을 설립하는 등 일제 식민지를 위해 개항지에 전초 기지를 마련하고 있었다. 인천기념유치원은 1912년 4월에 거류민단이 폐지되고 학교 조합이 결성됨으로써 공립 유치원으로 이관되었다.

 

이 유치원의 교육목적은 유아에게 적당한 보육을 실시하여 신체를 건전하게 발달시키고 선량한 습관을 길러 가정 교육을 보충하는데 있었으며, 교사와 원아는 초기에는 모두 일본인이었고, 보육 내용으로는 유희, 가창, 관찰, 담화, 도화, 수기 등을 다루었다.

 

 

(2) 경자기념경성유치원

 

 

1900년 10월에 인천기념유치원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이 그들의 천황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서울에 경자기념유치원을 설립하였다. 이 유치원 역시 서울에 살고 있는 일본 거류민과 경성부인회 독지부인 등의 의연금을 거출하여 남산 본원사 일부를 빌려 개원을 하였으며, 1928년에 경성학교조합으로 이관되었다. 1936년에 원명이 경자기념경성공립유치원으로 개명되었고, 1937년에는 원사를 신축하였다. 이 유치원은 4학급에 167명의 일본인 원아들을 수용했으며, 교사는 모두 일본인이었다. 교육 방침은 원아들의 발달을 돕고 원과 가정과의 연락을 도모하여 국민 교육의 기초를 닦는데 두었다.

 

 

(3) 덕풍 유치원

 

 

1925년 6월 1일 일본인인 오무라 토시코(興村敏子) 의해 덕풍유치원이 서울의 수송동에 세워졌다. 이 유치원은 ‘일시동인(一視同人)’을 내용으로 하는 내선융화를 교육 목적으로 표방하였으며, 4학급에 152명의 원아를 수용하였다.

 

 

(4) 이외의 유치원

 

 

조선 각지에 거주하는 일본 거류민들은 지역마다 유치원릉 설립하여 일본의 동화 정책에 기여했다. 동화정책에 투철했던 애국부인회는 경성유치원을 비롯하여 일본인들은 자기들의 거류지에 유치원 설립을 확대해 나감으로써 그 수는 급격히 증가해 갔다. 즉, 군산유치원(1909), 대구유치원(1906), 원산유치원(1908), 대전유치원(1913), 용산유치원(1913), 평양유치원(1914), 부산유치원(1915), 진해유치원(1915), 창덕유치원(1915) 등이 그 예이다. 일본인들이 설립한 유치원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으며 초기와는 달리 조선인 유아의 입원이 허용되었고, 교육 내용이 노골적으로 ‘일시동인’과 ‘내선일체’를 표방하는 등, 조선인 어린 유아들에게까지 일제의 동화 정책인 일본인화를 꾀했다.

 

 

Ⅴ. 유치원 교사 양성 기관의 설립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능가할 수 없다 한다. 이처럼 교육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것이 교사 교육이다. 이러한 교사 교육의 중요성은 개화기 우리가 근대 교육을 수용할 때 교육입국의 정신에 따라 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한성사범학교관제(漢城師範學校官制)를 제정 공포한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유치원 교육 역시 관제의 사범 교육은 아니나 유치원 설립을 계기로 동 유치원 내에 사범과를 부설하여 유치원 교육 이론과 실천을 직접 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 유치원 교사 양성 기관은 대부분 유치원에 부설되고 있어 유아교육을 담당할 인재 양성에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치원 교사 양성 기관인 보육학교의 교육 내용을 세 보육학교의 교육과정을 비교하여 보면 이화보육학교는 성경, 교육학, 심리학, 보육학, 유희, 음악, 일어 및 한문, 영어, 자연과학, 도화, 수공, 동화, 실습 등이며, 중앙보육학교는 윤리학, 교육학, 아동심리학, 보육학, 율동유희, 음악, 일어, 영어, 자연과학, 미술, 수공, 동화, 실습 등의 과목이었다.

 

경성보육학은 윤리학, 교육학, 심리학, 보육학, 무용 율동, 음악악기, 일어, 자연학, 아동미술, 수공, 아동문학, 실습, 교육사, 아동의학, 체육 등으로 교과목에 있어서 유사한 점이 있는가 하면, 학교에 따라 교과목에 있어서 특수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1. 이화유치원 사범과

 

 

보육학교가 설립되기 이전에도 유치원 교사 양성 기관이 있었다. 1915년에 설치한 이화학당의 ‘유치원 사범과’가 우리나라 최초의 유치원 교사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초기에는 1회 졸업생이 1명, 2회 1명, 3회에는 7명이었으나 4회부터는 30명으로 증가되었으며, 1921년에는 유치원 사범과 건물이 정동에 신축되었다. 이 유치원 사범과는 1928년 3월에 이화보육학교로 교명이 개칭되었다.

 

 창립 연월일을 1928년 3월 14일로 정한 이화보육학교는 1935년 3월에 대현동 신축 교사로 이전하였으며, 1939년까지 12회에 걸쳐 274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수학 년한은 3년이었다. 그 후 1943년 12월 일제의 전시 임시교육령의 발표로 이화여자전문대학은 여자 청년 양성소 지도자 양성과로 바뀌었고, 보육과가 이에 흡수되는 수난을 겪는다. 1927년까지는 유치원 사범과 교육과정에 인지교육, 주일학교 교육방법 및 어머니 유희와 노래, 율동 등을 첨부하여 교육했다. 모집 정원은 100명이었고, 입학 자격은 여자고등보통학교와 고등여학교를 졸업한 학생으로 만17세 이상인 자였다. 설립 목적은 덕성을 함양하고 유아교육의 방법을 교육하는데 있었다.

 

 

이화 유치원 사범과의 교육과정은 주로 수공, 은물, 유희, 교육학, 아동심리, 성경, 한문 등이었으며, 브라운리가 직접 교육을 담당했다. 브라운리는 프뢰벨의 저서인 인지교육, 어머니의 노래와 유희 및 어린이의 세계, 어린의 낙원, 어린이의 동산 등을 번역하며 소개했다. 번역서들은 유치원 교사들을 교육하는데 기여함으로써 당시 조선의 유치원 교사들이 프뢰벨의 교육 사상의 영향을 받은 미국계 유치원 이론이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중앙유치원 사범과

.

1922년에는 박희도(朴熙道)에 의해 중앙유치원내에 유치원 사범과가 설립되었다. 유치원 사범과의 수학 년한은 2년이었다. 고등 보통 학교 졸업자와 동등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면 누구나 입학 할 수 있었다. 유치원 사범과는 1928년 9월에 인가를 얻어 중앙보육학교로 승격했다.

 

 

중앙보육학교는 여자고등 보통학교를 중퇴한 사람들이나 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보육 실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보모 자격을 얻기 위해 입학을 하였다. 이 학교에는 속성과가 있었는데 수업 연한은 1년이었다. 또 이과는 중앙보육 학교로 승격한 이후에도 별과로 남아 있었다. 아동의 보육에 관한 전문적 지식과 기능을 익혀 졸업 후 직접 유치원 보모에 종사할 수 있는 자격을 얻도록 하는 것이 이 학교의 교육 목적이었다.

 

 

또한 보육 실습을 위한 부속 유치원이 있었으며, 상급 학년은 여기에서 실습을 하였다. 2학급에 70명이 재학했던 이 학교 교수진은 학교장에 박희도(朴熙道), 교원으로는 독고선(獨孤琁), 차사백(車士百), 이형우(李亨雨), 홍난파(洪蘭坡), 장익(張翼), 왕준진(王濬珍), 조병옥(趙炳玉), 박용래(朴容來), 김상매(金尙梅)등이 있었으며, 중앙보육학교의 유아교육 이론과 실천은 일본 유학 출신들이 주축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보육 이론 및 실습은 차사백(車士百)이 담당했다. 그러나 기본 재산이 없는 이 학교는 경영난에 빠질 수밖에 없었으므로 이를 1932년에 임영신(任永信)이 인수했다. 그는 1934년에 흑석동에 신축 교사를 짓고, 이전했으며,1936년부터 이곳에서 강의를 하였다. 중앙보육학교는 매년 하기 전국보육강습회를 개최하였고, 조선보육학회(朝鮮保育學會, 1931년 창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유아교육 발전에 기여했다. 학생 생활로 음악회, 연주회, 순회공연 등이 활발했다.

 

 

3. 숭의여학교 보육과와 경성보육학교

 

 

1924년 평양에 있는 숭의여학교가 보육과를 신설했으며 수업 년한은 2년제였다. 이 학교에는 숭의여학교의 졸업자가 많이 진학했다. 지방 교회에서 필요로 하는 유치원 보모를 양성하는 것이 이 학교의 목적이었다.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유치원 시절부터 철저히 교육을 시키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에 보육과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 학과의 설치 동기이다.

 

 

1926년에는 서울이 수송동(옛 숙명여자중ㆍ고등학교 부근)에 경성보육학교가 독고 선(獨孤 旋) 에 의해 설립되어 유치원 교사를 양성해 냈다. 경성보육학교의 교수들은 주로 일본 출신자들이 주축이 되어 유치원 교육 이론과 실천을 담당했다.

 

이 외에도 갑자유치원 사범과를 비롯하여 다음과 같이 각지에 유치원 교사 양성 기관이 유치원에 부설되어 신설되는 유치원의 교사의 수요를 충를 충족시켰다.

 

 

                       유치원 교사 양성 기관

 

        명     칭            소   재    지  설립년도          양성기관 설립자

이화유치원 사범과      경          성 1915 2             브라운리

중앙유치원 사범과      경          성 1922 2(별과1)   박희도

재령유치원 사범과      황해도 재령 1922 미상         김용승

전주유치원보모양성과 전북 전주    1923 1              전주유치원부설

중의유치원 사범과      평남 평양    1924 2              중의유치원부설

효성유치원 사범과      함북 나남    1925 1              관북 불교회

갑자유치원 사범과      경       성    1926 1(보육2)    류일선(경성보육인가)

숭의여학교보육과       평남 평양    1927 2 1            924년설립추정

연생유치원 사범과      전북 전주    1930 2              강치붕(남문교회)

 

* 출처: 이상금, 1987, p. 237

 

 

 

<각주>

 

 

1) 柳弘烈, 高宗治下西學受難의 硏究, 乙酉文化社, 1962, pp. 512-540.

2) 大韓每日申報,隆熙2年1月22日2面

3) 상계서, 隆熙2年4月8日2面

4) 상계서, 隆熙2年7月31日2面

5) 孫仁銖, 1971, pp. 97-105

6) 朝鮮總督府學務局, 昭和 17年

7) 中央大學校史, 中央大學校校史編纂委員會, 1970, p. 77

8) 상계서, pp. 75-89

9) 孫仁銖, 1971, p. 80;

전계서, 中央大學校史, pp. 75-89;

大韓每日申報, 1913. 3. 8

10) 東亞日報, 1923. 7. 30

11) 전계서, 中央大學校校史,pp.82-83

12) 상계서, pp. 82-83

13) 西村綠也, 昭和 5年, p. 131

14) 大韓每日申報, 1910. 4. 11.

15) 李相琴, 1987, pp. 64-65

16) 西村綠也,昭和 5年, p. 131;

朝鮮總督府學務局, 昭和 4年, pp. 439-458

17) 朝鮮總督府學務局,昭和5年,pp.447-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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