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20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 Wikipedia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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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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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 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 칸토 우다 이신 사이 쵸 센진 갓사 츠지  ) 이란 주의자들이 우물  독  넣었다”는 시위 가 흘러, 그것을 믿은 관헌 과 자경단 등이 다수의 조선인 과 공산주의자 를 학살 한 사건 이다. 정확한 희생자 수는 불분명하지만, 논자의 입장에 따라 추정 희생자 수에 수백 명 ~ 약 6000 명과 매우 넓은 차이가있다 [1] .

혼쇼 이시하라 방면 대선 풍지 진경, 제도 대지진 화보

개요 편집 ]

지진 재해시 편집 ]

다이쇼 12년( 1923년 ), 관동지방 은 지진 에 의해 괴멸적인 피해를 입고 민심과 사회질서가 심한 혼란에 빠진 것을 받아 내무성 은 계엄령 을 선고해 [2] , 각지의 경찰서 에 치안 유지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 때 내무성이 각지 경찰서에 하달한 내용 속에서 "혼란에 휩싸인 조선인이 흉악범죄, 폭동 등을 획책하고 있기 때문에 주의하는 것"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 내용은 행정기관이나 신문, 민중을 통해 퍼져 조선인 이나 잘못된 중국인 , 내지인 인 곳의 일본인 (聾唖者등)이 살상되는 피해가 발생했다.

도쿄 일일신문(1686호)에 “불을 찔러 생존에 시달리는 우시고메” “비와 불과 조선인과의 3방 공격”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아츠타. “불에 휩쓸리지 못한 유일한 땅으로 남겨진 우시고메의 이틀밤은, 불신선인의 방화 및 우물에 독약 투하를 경계하기 위해, 청년단 및 학생의 유지들은 경찰, 군대와 협력해 , 철연하고, 요코쵸마다 줄을 치고 만명을 부속해, 통행인을 누구 하는 등 긴장해, 각 자동봉, 단도, 겨드랑이를 휴대하는 등 살기 시작, 초중학생등도 동봉을 들고 집의 주위를 경계해, 목적지 재외 거류지에 있어서의 의용병 출동의 느낌을 나타냈다.이치가야마치는 고지마치 롯쵸메로부터, 히라카와마치는 풍하의 관계로부터(토소 신문지 찢어져 미상) 인련의 선인이 우물에 고양이 이라즈를 투입하지 못하는 현장을 경계원이 발견해 즉시 체포했다. 을 이룬다"라고 말 제목 아래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가 기재되어 있었다. 「도쿄부 시모오시마 부근은, 다수의 선인과 지나인이 빈집에 들어가, 야간 왕에게 탈탈 강간을 하고, 또 사회주의자는, 시군에 있는 대다수의 선인이나 지나인을 선동해 내지인 와 싸움을 이루고, 그리고 관헌과 지방인과의 난투 내란을 일으키도록 노력하고 있는 용서가 아니고, 다수 이재민의 울음을 듣고, 그들은 혁명 노래를 고창해 있기 때문에 , 시민의 격상은 그 국에 이르고 있다.」[4]


辛基秀『映像が語る「日韓併合」史』(1987年8月発行)で”No. 508 「自警団と死体」” [5]裵昭『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写真報告』( 1988년 10월 발행)에서 “지진 재해 후에도 관동 각지에서 자경단에 의한 학살이 일상적으로 행해졌다.” [6] 라는 설명문이 붙은 사진.

죽창 이나 일본도 ,  등으로 무장한 민간인이 자경단 을 결성해 조선인(과 그들에게 잘못된 중국인)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조선인과 오해되어 중국인이 희생된 사건, 오키나와・아키타・미에 출신자가 희생된 검견천 사건이나 아키타 출신자가 희생된 츠마누마마치 사건 [7] , 카가와 출신 일가 9명 가 희생이 된 후쿠다무라 사건 등 지방 출신의 일본 내 지인도 살해당했다. 또 조선인 희생자 이외에도 사회주의 나 무정부주의 의 지도자를 살해한 움직임이 있어, 무정부주의자의 오스기 에이・이토노에다・오스기의 6세의 조카타 종이 들이 살해당한 달걀 사건 , 사회주의자 10명이 희생된 거북이 사건 도 일어났다.

일본의 치안 당국의 대응 편집 ]

자경단으로부터 조선인·중국인 수백명을 지킨 오카와 조요시 가나가와 경찰서 츠루미분 서장과 같이 폭도에의 단속 및 사상자를 수반하는 폭도와의 충돌이나, 요코하마의 조선인 226명을 9월 23일 불 입두련병장 육군포창에서 보호수용하여 임시치료소를 개설하는 등의 움직임이 있었다 .

희생자 수와 윤위금 편집 ]

정확한 희생자 수는 불분명하지만, 2008년 3월 중앙 방재 회의에서는 지진 재해 전체의 희생자의 1~수퍼센트가 살해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즉, 1천~수천명) 9] . 당시 관청 기록으로는 사법청 보고서에서는 민간에서 살해하고 기소된 건수로 조선인 233명, 내지인 58명, 중국인 3명 [주석 1] [11] . 계엄업무상보에 따르면 군에 의해 살해된 인원수는 적어도 조선인 39명, 내지인 27명, 군민공동의 살해에 의한 희생자로서 조선인 약 215명(중 약 200은 중국인과의 설 있음)으로 이다 [12] . 내무성은 248명, 조선총독부 도쿄 출장원은 전망수로 813명을 꼽았다. 조선인 희생자에게는 사망 원인이 재해인지 학살인지 구별하지 않고 1인 200 엔 [13] 에 지불되었다 [14] .

관청 기록에 의한 살상 사건 피해 사자 수-2018년 재해 교훈의 계승에 관한 전문 조사회 보고서 1923 관동 대지진【제2편】제4장 제2절 살상 사건의 발생
종별사법성 보고서 게재 계엄업무상보 게재합계
기소사건경찰에 의한군통패 불명군대에 의한경찰·민간인 공동
피해자조선인내지인중국인내지인조선인조선인내지인조선인
도쿄392512 2719약 215약 328
가나가와242     8
지바7420  1128 115
사이타마941      95
군마184      22
토치기62      8
이바라키 1      1
후쿠시마 1      1
합계233583213927약 215약 578
 주: 계엄업무상보 게재 경찰 민간인 공동의 피해자 중 약 200은 중국인과의 설 있음

사학자 야마다 아키요 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기관지 '독립신문( 김승학 사장)' 1923년 11월 5일자로 보도된 조선인 조사단 보고서의 6661명설이 부정확한 숫자인 원인은 관헌의 피해 은폐로 지적했다 [16] [17] [18] .

“조선인의 희생자수는 재일본 관동지방 이재 조선동포 위문반이 관헌의 협력을 얻지 못한 채 조사를 진행했다. 전후에 발표한 것이 있다.모두 장소와 인원수의 기재로, 합계는 요시노 원고가 2,613여명……최씨의 것이 2,607여명 또는 3,459여명……최씨에 따르면, 단은 이 조사를 근거로 희생자수를 5천명으로 추정했다고 한다.여기의 조사의 최종 보고로 여겨지는 것이, 11월 28일자로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 기관지 「독립 신문」 사장에게 송부 12월 5일에 동지에 게재되었다.이것은 합계 6,661명(현재 내역을 재계산하면 6,644명이라고 야마다 아키지 씨가 지적하고 있다)에 이르지만, 그 중 가나가와현에서 시신을 발견 할 수 없었던 1,795명과 제1차 조사를 종료한 11월 25일에 각 현으로부터 보고가 왔다고 하는 추가분 2,256명은, 부현명만으로 그 이하의 지명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야마다 쇼지씨는 , 사이타마현에 관한 수치를 검증해, 이 추가분을 산입하지 않는 쪽이 현재까지 얻을 수 있는 다른 정보와 가까운 것을 지적해, 「추가 합계수의 근거를 오늘 해명할 수 없다」라고 하고 있다. "

— [19]

2013년 11 월 도쿄한국대사관 신축이전 작업 중 관동대지진 한국인 희생자 290명의 명부가 처음 발견됐다 일본 지진 재해시 피살자 명부 286명을 조사한 결과 28명의 희생자를 확인하고 2015년 12월 보도되고, 제1차 조사와 함께 한국 정부 인정의 관동 대지진 시 학살 희생자는 총 40명 되었다 [21] .

다이쇼 9년(1920년) 64명 여성 14명, 아이치현 남성 522명 여성 143명, 교토 남성 823명 여성 245명, 오사카 남성 5,445명 여성 845명, 효고 남성 3,059명 여성 711명, 후쿠오카 남성 7,161명 여성 672명) 에 거주하고 있었다 [22] .

쇼와 5년(1930년) 국세조사에 따르면 419,009명의 조선인(도쿄 38,355명, 가나가와 13,181명, 지바현 1,728명, 사이타마현 1,164명, 아이치 35,301명, 오사카 96,943명, 교토 27,7 , 후쿠오카 34,639명)가 거주하고 있었다 [23] .

요시노 작조가 조선 이재 동포 위문반에서 들은 조선인의 피해, 다이쇼 12년 10월 말일까지의 피해 상황 [24]
하나, 요코하마 방향   
1. 가나가와현 하시모토마치 아사노 조선소 앞 광장학살 (현금 500엔 강탈)사십팔이름
2. 가나가와 경찰서 내순찰 자살이름
3. 程ヶ谷町학살삼십일이름
4. 우물가야마치우동(현금 2백엔 강탈)삼십여명
5. 네기시초오른쪽삼십오이름
6. 히지카타바시에서 하치만바시까지오른쪽백삼이름
7. 나카무라마치오른쪽이름
8. 야마테마치 매지오른쪽이름
9. 고텐마치 부근오른쪽사십여명
10. 야마테 혼마치 경찰 서립 야 교번소 앞 오른쪽이름
11. 와카야 별장 부근오른쪽여명
12. 신코야스마치오른쪽이름
13. 코안쵸에서 가나가와역에 이르다  오른쪽百五十九이름
14. 가나가와 철교오른쪽오백여명
15. 도카이도선 지가사키역 앞오른쪽이름
16. 구라기군 가나자와무라 오른쪽십이이름
17. 쓰루미초오른쪽일곱이름
18. 가와사키오른쪽이름
19. 쿠보초오른쪽삼십여명
20. 도베오른쪽삼십이름
21. 아사마초 오아사마산오른쪽사십이름
22. 도야마, 카모야마오른쪽삼십이름
이상 시체 매장지급수 1. 쿠보산 화장터 천여명(요코하마 부근 피해자) 아오키초 미쓰자와 공동묘지 2백명(가나가와 부근 피살) 3. 가나자와무라(불상) 4. 지가사키마치 구 도카이도 선로 화장 5. 쓰루미초, 소지데라 야마우치 매장 6. 가와사키초 당지 매장 또는 가지고 귀국
둘, 사이타마현 방면   
1. 가와구치학살삼십삼이름
2. 아카바네 아라카와오른쪽삼백이름
3. 오미야오른쪽두 명이름
4. 쿠마가야오른쪽육십일이름
5. 혼조오른쪽86 [주석 3]이름
6. 와세다무라오른쪽17이름
7. 진보하라오른쪽24이름
8. 기거오른쪽십사이름
9. 나가사와오른쪽십사이름
세, 군마현   
1. 후지오카학살18이름
네, 지바현   
1. 나라시노 군영 쿠라우치학살십이이름
2. 후나바시오른쪽삼십팔이름
3. 법전촌오른쪽육십사이름
4. 지바시오른쪽이름
5. 유산오른쪽이름
6. 남행덕오른쪽이름
7. 마바시오른쪽일곱이름
8. 다나카무라오른쪽이름
9. 사하라오른쪽일곱이름
10. 활천오른쪽이름
11. 나리타오른쪽이름
12. 가손자오른쪽이름
오, 나가노현   
1. 카루이자와 주변학살이름
로쿠, 이바라키현   
1. 쓰쿠바 혼마치학살사십삼이름
2. 츠치우라오른쪽이름
일곱, 도치기현   
1. 우츠노미야학살이름
2. 에나스군오른쪽이름
하치, 도쿄 부근   
1. 츠키시마학살삼십삼이름
2. 카메이도 서내오른쪽87이름
3. 고마쓰쵸오른쪽46이름
4. 테라시마 청지오른쪽22이름
5. 테라시마 경찰서 내오른쪽십삼이름
6. 무코지마오른쪽삼십오이름
7. 테라지마 테이 역오른쪽일곱이름
8. 스자키 비행장 부근오른쪽26이름
9. 니혼바시오른쪽5이름
10. 후카가와니시마치오른쪽십일이름
11. 오시가미오른쪽오십이름
12. 혼쇼구 잇쵸메오른쪽이름
13. 오시마 시치쵸메오른쪽이름
14. 오시마 산쵸메 활동 사진관 내오른쪽26이름
15. 오시마 핫초메오른쪽백오십이름
16. 고마쓰카와 신마치오른쪽일곱이름
17. 아사쿠사 공원 내오른쪽이름
18. 가메이도역 앞오른쪽이름
19. 후추오른쪽이름
20. 세타가야, 산겐자야오른쪽이름
21. 신주쿠역내오른쪽이름
22. 요 츠야 미츠케오른쪽이름
23. 아즈마바시오른쪽팔십이름
24. 우에노 공원 내오른쪽십이이름
25. 센주오른쪽십일이름
26. 왕자오른쪽팔십일이름
오른쪽 합계 2천 613명 〔히가시오요시노 문고〕   

지진 재해의 배경 편집 ]

당시 일본 정부는 지진 발생 전에 발생한 조선의 3·1운동 이나 대만 의 대규모 시위를 유혈진압한 경험으로 이들 통치령의 독립운동을 하는 일부 민중의 저항에 경계감을 안고 있다. [25 ] 당시 조선인에 대한 무이해와 민족적인 차별의식도 배경으로 생각된다 [26] . 일본 국내에서는 다이쇼 데모 클래 시에 의해 노동운동 · 민권운동 ·여성운동 등 지배권력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저항·권리확대운동의 활성화와 거기에 대항하는 보수적 세력의 급신, 총리 암살과 공황에 의한 정치경제로 의 불안으로부터 사회 체제가 흔들리고 있었다 [25] . 또, 국외에서도 영국·미국과의 대립, 시베리아 출병의 대실패 등으로부터 국제적인 고립화를 깊게 하고 있어, 관동 대지진은 이른바 내우외환의 상태를 쫓아내도록(듯이) 일어난 대재해였다 [25 ] .

야마모토 내각은 9월 7일에 치안 유지령을 공포했다. 이 계엄령이 해제된 11월 15일까지의 도쿄·가나가와·사이타마·치바의 재해지 1부 3현민의 시민적·정치적 자유가 정지한 상태 중, 대지진 발생 직후의 9월 1일 오후 3시 이후, 도쿄나 요코하마 등에서 「사회주의자 및 선인의 방화 많아」 「불명선인 폭동」이라고 하는 시위가 발생해 갔지만, 시니어 중에는 경찰이나 군이 흘린 것도 있다 [27 ] 이들 보도나 전문에 의한 소문에 접해 불안을 부추긴 각지의 민중이나 유지에 의해 자경단이 결성되었지만, 그 중에는 지역의 관할 경찰의 주도·지도로 조직된 자경단도 있었다. 이들 자경단의 일부에 의해 조선인·일본인·중국인들이 학살되어 갔다 [27] . 육군과 경찰은 이 혼란을 기화로 사회주의자나 노동운동가들의 말살을 획책하고, 10명이 군대에 학살된 거북이 사건 및 무정부주의자들이 헌병 대위들에게 살해된 감옥 사건 이 실행되고 하지만 이런 ‘ 백색 테러 ’에 대한 책임 추궁과 비판은 저조했다. 당시의 사회에 있어서는 치안 유지와 피해자 구호 활동의 일환이며, 군이나 정부나 경찰이 위신을 되찾았다고 환영받는 상황이 되고 있었다 [27] .

쿠로사와 아키라 의 자전 '파랑의 기름-자전과 같은 것' 중에서는 당시 중학 2학년이었던 쿠로사와의 관동 대지진 때의 체험이 말해지고 있다. 그중에 쿠로사와의 아버지가 긴 수염을 낳고 있다는 이유로 조선인에게 잘못되어 폭도에 둘러싸인 이야기나, 쿠로사와가 우물에 쓴 낙가키를 마을 사람들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어 그렇다고 하는 표지」라고 오해해 소란이 된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28] .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는 이 자경단에 참가해 활동을 하고 있던 것을 알고 있지만, 「혹은 자경단원의 말」(『문예 춘추』 단의 비정상적인 살육 행위에 대해 “자연은 유냉연하게 우리의 고통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서로 자비해야 한다. 논쟁을 이기는 것보다 간편하다”고 비판을 하고 있다. 또, 아쿠타가와의 「대진잡기」(『중앙공론』1923년 10월호)의 5장에서는, 조선인에게의 허위의 소문을 믿는 민중을 「선량한 시민」이라고 야유하는 등, 지진 재해 후 의 일련의 살해 사건에 대해 비판적 시점을 가지고 있던 것을 알고 있다 [29] .

각주 편집 ]

각주 사용법 ]

주석 편집 ]

  1.  이 233명이라는 숫자는 기소된 사건의 피해자수이며, 당국에 인지되어도 기소되지 않은 사건에 대해서는 고려되지 않았다 [10] .
  2. ^ 이 차이는 자금의 출처가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인에 대한 은하금은 일본 정부로부터(예산 총액 1000만엔을 분배했기 때문에 1인당 액면이 작아졌다)이며, 조선인에 대한 조의금은 조선총독부로부터이다.
  3. ^ 조선이재동포 위문반의 기술로는 80(80)이 되어 있어, 6명의 차이가 그대로 요시노작조와 조선이재동포 위문반의 수의 차이가 되고 있는 것, 이 이외의 숫자는 같고 있는 것 등에서 요시노 작조가 '80'을 '86'으로 오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출처 편집 ]

  1. 야시마 아리유키 (2019년 9월 29일). “ 관동 대지진의 조선인 학살 사건 코이케도 지사의 추도문 불송부 등 문제가 되고 있는 배경에 다가온다 ”. 코리아 월드 타임즈 . 2020년 6월 28일 시점의 오리지날 보다 아카이브. 2020년 6월 28일에 확인함.
  2. ↑ 중앙 방재 회의 재해 교훈의 상속에 관한 전문 조사 회 2008 제 2 장 제 1 절 , pp. 70-72.
  3. ↑ 중앙 방재 회의 재해 교훈의 계승에 관한 전문 조사 회 2008 제 2 장 제 1 절 , p.
  4. 강덕상·금금동편 『"조선인 학살 사건 법학 박사 요시노 작조" 현대사 자료(6) 제3부 강제 수용과 조사 인민에 의한 조사』 미스즈 서방, 1963년, 358페이지.
  5. ^ 신기수『영상이 말하는 ‘한일병합’사’ 노동경제사, 1987년 8월 15일 초판 발행, ISBN 4-947585-29-3 , 272페이지.
  6.  아키아키 『칸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사진 보고』, 1988년 10월 7일 발행, 그림자 서방, 64~65페이지.
  7. 아키타 아키라 신보사(2017년 9월 1일). “호쿠토 세이(9월 1일자)” . 아키타 아키라 신보 . 오리지날 의 2017년 9월 4일 시점에 있어서의 아카이브. 2017년 9월 1일에 확인함.
  8. 요코스카시 지진재지 간행회 편 『요코스카시 지진재지 : 부록·부흥지』 요코스카시 지진재지 간행회, 1932년, 133페이지 .
  9. ↑ 중앙방재회의(2008년 3월). “ 1923 관동대지진【제2편】제4장 제2절 살상 사건 발생
  10. ↑ 중앙 방재 회의 재해 교훈의 계승에 관한 전문 조사 회 2008 제 4 장 제 2 절 , p. 209.
  11. ↑ 중앙 방재 회의 재해 교훈의 상속에 관한 전문 조사 회 2008 제 4 장 제 2 절 , pp. 206-208.
  12. ↑ 중앙 방재 회의 재해 교훈의 계승에 관한 전문 조사회 2008 제4장 제2절 , pp. 206–207.
  13.  자경단에 살해된 선인의 수는 혼란의 때이며 그 결과에 의하면 압사자 소사자 피살자 미행이 된 선인은 총체로 832명이다. 23할을 초과하는 것은 어느 정도로 추정될 수 있다. | 미스즈 서방 간 현대 자료집 (6) 「관동 대지진과 조선인」수록 【관동 지방 지진 재해시의 조선인 문제 조선 총독 ​​관방 외사과】 p.
  14. ↑ 중앙방재회의(2008년 3월). “ 1923 관동대지진【제2편】제4장 제2절 살상 사건 발생
  15. ↑ 중앙방재회의(2008년 3월). “ 1923 관동대지진【제2편】제4장 제2절 살상 사건 발생
  16. ↑ 야마다 쇼지 『관동대지진시의 조선인 학살―그 국가 책임과 민중 책임』 창사사, 2003년, 183페이지. ISBN 4915970221  .
  17. ↑ 야마다 쇼지(2015년 9월 1일). “ 관동대 지진·조선인 학살은 ‘정당방위’가 아니다 수를 오늘도 명확하게 할 수 없는 근본 원인은 관헌이 학살된 조선인의 시신의 은닉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 주식회사 시노도스. 2017년 9월 1일 열람.
  18. ↑ 스즈키 토시오 「칸토 대지진을 둘러싼 교육 현장의 역사 수정주의」 「오하라 사회 문제 연구소 잡지」No.668, 호세이 대학 오하라 사회 문제 연구소, 2014년 6월 25일, 26페이지, ISSN 09129421 , 2017년 9월 1일 열람.  
  19. ↑ 중앙방재회의 재해교훈의 계승에 관한 전문  사회 ( 2008년 3월). “ 1923 관동대지진【제2편】칼럼8 : 219 .
  20. ↑ “도쿄에서 발견 3·1운동과 관동대지진의 한국인 희생자 명부” (일본어). 연합뉴스 (서울특별시, 대한민국: Yonhap news agency). (2013년 11월 19일)
  21. ↑ “관동대지진 시 조선인 학살 희생자 40명 확인=한국정부” (일본어). 연합뉴스 (서울특별시, 대한민국: Yonhap news agency). (2015년 12월 16일)
  22. 내각 통계국 (1920년). “ 국적민적별 인구-부현, 다이쇼 9년 국세조사 ”. 총무성 통계국. 2017년 9월 1일 열람.
  23. 내각 통계국 (1930년). “ 민적 국적별 인구-부현, 총무성 통계국 쇼와 5년 국세조사 ”. 총무성 통계국. 2017년 9월 1일 열람.
  24. 강덕상·금금동편 『"조선인 학살 사건 법학 박사 요시노 작조" 현대사 자료(6) 제3부 강제 수용과 조사 인민에 의한 조사』 미스즈 서방, 1963년, 360페이지. “다음에 조선인의 피해의 정도를 말한다. 之れ은 조선이재동포 위문반의 일원으로부터 들은 것이지만, 此의 조사는 다이쇼 12년 1월말일까지의 것이고, 이후 분은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주의해야 한다.".
  25. ↑ c 기사카 준이치로「관동대지진:역사적 배경」 「일본대백과전서초등학교 .
  26. ↑ 중앙방재회의(2008년 3월). “ 1923 관동대지진【제2편】제4장 제2절 살상 사건 발생
  27. ↑ c 기사카 준이치로 「관동 대지진:정치적 반동과 조선인・중국인의 학살」 「일본 대백과 전서」초등학교.
  28. 쿠로사와 아키라 『파랑의 기름-자전과 같은 것』 이와나미 서점. ISBN 978-4006020378 .  요점 페이지 번호 ]
  29. 고다마 치히로 「칸토 대지진과 문호 : 나리모토 대학 도서관의 전시로부터」 「나리호쿠 국문」 제47호, 나리키타 대학 문학부 일본 문학과, 2014년 3월, 86-56페이지, hdl : 10928/526 .

참고 문헌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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