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25

독립군 포로 사진 : 네이버 블로그


독립군 포로 사진 : 네이버 블로그

만주의 독립군 세력을 일제는 비적, 공비, 마적, 항일군 등으로 호칭했다. 
아래 사진이 일본 관점에서 조선인 독립군의 전형적 이미지였다.
(비적의 야습이란 제목으로 비적떼가 농가의 토루를 넘어가는 사진이다)
독립군 포로 사진 두 건을 발견했다.

1. 1920년 청산리 전투 후의 포로 추정 사진
https://www.kobay.co.kr/kobay/item/itemLifeView.do?itemseq=0512J37IXYJ
한국현대사
독립군 포로 사진
지킬박사
2020. 1. 31.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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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 kmji98님의 블로그
22. 1. 25. 오후 11:16 독립군 포로 사진 :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kmji98/221791772495 2/10
가운데 4명이 독립군 포로, 좌우양끝이 일본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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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 kmji98님의 블로그
22. 1. 25. 오후 11:16 독립군 포로 사진 :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kmji98/221791772495 3/10
포로의 군모에 태극마크가 있다.

2. 1922년 광정단 사건 포로
삼수 령성 경찰관 주재소 三水 嶺城 警察官駐在所 습격사건
1922년 (대정11년) 9월에 광정단이라는 독립군 조직이 함경도 삼수군 령성리의 주재소를 공격하여 일본군 순사 3명을 사상시키고 제복과 장비를 노획하고 전선, 전주 등을 파괴했다.

위 사진 상단에는 일본군과 일본 경찰이 서있고 하단에는 시체 2구가 누워있고 포로 1명이 앉
아 있다. 포로의 모자에 태극마크가 있고 양손엔 태극기가 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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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포로의 다른 사진.
(성명은 한진술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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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붙잡힌 광정단원 2명.
김창감(좌), 김서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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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의 군복과 장비상태가 잘 드러나도록 연출시킨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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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국의 난에 토벌군 <상군>의 지도자였던 증국번은 광신도반란군의 기세에 눌려 연패했
다. 누전누패라고 보고를 올리려다 누패누전으로 바꿔 썼다. 싸우면 판판이 졌다가 아니라 져도
계속 싸웠다라는 의미이다. 독립군의 투쟁은 연전연패이지만 연패연전이기도 하다. 싸우면 지
는데 왜 싸우냐고 할 수도 있고, 지더라도 계속 싸우니 얼마나 가상하냐고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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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정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로고

광정단 [ 匡正團 ]

유형
단체
시대
근대
성격
독립운동단체
설립일시
1922년 4월
해체일시
1924년 11월
목차
정의개설연원 및 변천
정의
1922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개설
1919년 3·1운동 후 많은 무장 독립운동 단체가 결성되었으나, 1920년 일본군의 간도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1921년 이후 임시 군사연합회를 조직하여, 국민단을 구성하는 등 각 단체 통합 운동이 전개되었다.

연원 및 변천

장백현(長白縣)을 중심으로 활약하던 대한독립군비단·흥업단·대진단(大震團)·태극단·광복단의 5개 단체가 연합하여 만들어진 대한국민단(1921.10)을 1922년 4월 광정단으로 조직하였다. 그리고 8월 환인현(桓仁縣)에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중심으로 여러 독립운동 단체가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결성하였다.

광정단 단장에 김호익[金虎翼, 이칭: 김호(金虎)], 총무에 윤덕보[尹德甫, 일명: 병용(秉庸)], 군무장(軍務長)에 강진건(姜鎭乾), 재무장에 김관용(金寬用), 비서장에 장승언(張承彦)이 임명되었다.

그 뒤 1923년 6월 조직 개편을 단행하여 단장에 윤덕보, 부단장에 김호익, 총무에 석계(石桂), 비서에 김성진(金聲振), 재무부장에 김국태(金國泰), 서무부장에 장승언, 경호부장에 정철명(鄭哲明), 군사부장에 이한평(李漢平), 군법과장에 김용대(金容大), 문화부장에 한성일(韓性一), 산업부장에 최진용(崔鎭鏞)으로 재편되었다.

그런데 이전에 군비단 단장으로 국내 진입작전을 중시하던 윤덕보가 단장으로 된 것은 국내 진입 작전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선 안도현(安圖縣) 산중에 군영을 설치하고, 수백 명의 장정을 모집하여 2개월간의 군사훈련을 시켜 장백·안도·무송·임강 등 각 현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장백현 14도구 북방자(北房子)에 재봉소를 설치하여, 군복 등 군수품의 자급 자족을 꾀하였다. 중앙 본부는 무송현(撫松縣) 왕파방자(王杷傍子)에 정하고, 원문화(元文化)를 단장으로 하는 암살단을 별도로 편성하여 임강현(臨江縣)에 두었다.

그리고 무송현에 참모부를 설치하고, 참모장에 이덕신(李德信)을 임명하였으며 기금을 모아 무송현에서 30리 떨어진 지점에 동차구(東岔口) 대진동(大鎭洞)에 백산무관학교(白山武官學校)를 설립하려고 하였다.

1923년과 1924년에 소속 독립군을 국내에 진입시켜 일본 식민 통치 기관의 파괴, 친일파숙청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무기 구입·군대 양성 등의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24년 10월 독립군을 3개대로 편성, 제1대는 나성(羅性)이 150명을, 제2대는 김백(金伯)이 3백명을, 제3대는 남익(南翼)이 50명을 지휘하였다. 김호익·윤세복(尹世復) 등은 중국과 정치적 교섭을 벌였으며, 김용대는 무기구입을 담당하였다.

1924년 11월 남만주 각 단체 대표자들이 길림(吉林)에서 단체통합을 결의하고 정의부(正義府)를 결성하자 이에 합류되면서 해체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한국독립사』(김승학, 독립문화사, 1965)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애국동지원호회, 1956)
『무장독립운동비사』(채근식, 대한민국공보처, 1949)
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저자/제공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로고 http://www.aks.ac.kr
[네이버 지식백과] 광정단 [匡正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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