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19

무교회신앙 자료실 | [박상익]서평<김교신의 신앙과 저항>(<기독교사상>2012년 11월호) - Daum 카페



무교회신앙 자료실 | [박상익]서평<김교신의 신앙과 저항>(<기독교사상>2012년 11월호) - Daum 카페



[박상익]서평<김교신의 신앙과 저항>(<기독교사상>2012년 11월호) |▶[김교신선생]
박상익|조회 550|추천 0|2012.10.12. 15:33http://cafe.daum.net/nonchurch/Tiom/82



<기독교사상> 2012년 11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한국과 일본: 진리에 입각한 화해와 평화

니이호리 구니치 지음, 김정옥 옮김 <김교신의 신앙과 저항>(익두스, 2012)



한중일 3국의 영토분쟁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분쟁의 주범은 일본이다. 일본인 중에서도 우익 정치인들이 그 분쟁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우익이 아닌 정치인들도 표를 얻기 위해 우경화 일색의 발언을 한다. 그 결과 일본의 사회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우경화 되고 위험한 애국주의에 휩싸이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일본인이 같은 생각인 것은 아니다.



얼마 전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를 비롯한 지식인 1,270명이 정부 비판성명을 내고, 일본 정부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넌센스이며 식민지 지배과정의 침탈이었다는 역사적 인식을 상기시켰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도 신문 기고를 통해 동아시아 문화권이 확산되는 시점에 일본 정부가 영토분쟁을 일으키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하며 자성을 촉구하고 나섰다. 일본 내에 양심 세력이 엄존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해준다.



김교신과 야나이하라

일본이 침략 야욕에 광분하던 20세기 전반기에도 일본에는 양심 세력이 있었다. 도쿄제국대학 경제학 교수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 1893-1961)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기독교인이자 식민지 정책 전공자인 그는 조선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젊은 날 그는 3.1만세사건을 초래한 총독부의 무단정치와 경제적 착취 일변도의 통치정책을 통렬히 비판하는가 하면, 독립 국가를 지향하는 조선 민족 중심의 경제정책과 자주적 지위의 허용, 조선 의회의 개설 등을 주장했다. 급기야 1937년에는 <주오코론(中央公論)>에 발표한 논문‘국가의 이상’에서 일본 군국주의를 비판했다가 그 해 12월 도쿄제국대학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5년 11월 모교에 돌아와 1951-58년 두 차례에 걸쳐 도쿄대학 총장을 지냈다.)



야나이하라의 주장은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과 학생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그가 교수직에서 물러났을 때 가장 아쉬워한 것도 조선 학생들이었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야나이하라는 1940년 초가을 조선에 와서 3주 동안 전도 여행을 하게 된다. 그는 당시의 속내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대학을 그만둔 것을 조금도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는 지금도 학문을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더욱 넓고, 더욱 높고, 더욱 깊은 것을 내게 주셨습니다. 나는 식민정책이라는 학문으로는 여러분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 그것보다 소중한 것,그것보다 영원한 것을 갖고 여러분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인도하셨습니다.



그는 식민지 정책 이상의 것, 즉 복음을 가지고 조선 사람 앞에 서려고 했다. 그래서 신앙의 스승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0-1930) 서거 10주년을 기념해 서울에서 5일간에 걸쳐 ‘로마서 강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야나이하라는 그 무렵 총독부 정책과 일본 군부에 대해 맹렬한 비판을 퍼붓고 있었다. 특히 ‘내선일체’, ‘동화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조선어 말살정책, 창씨개명, 조선 기독교인 박해에 대해서도 격분했다. 군부와의 죽기 살기 대결로 인해 신변에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야나이하라는 조선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목숨을 건 조선여행을 한 셈이다. 이 프로그램의 실질적 주최자는 같은 스승 아래서 신앙을 배운 김교신(1901-45)이었다. 당시 야나이하라는 47세, 김교신은 39세였다.



야나이하라는 1940년 8월 22일 도쿄를 떠나 23일 부산 해운대 온천에서 휴식한 후 경주, 평양, 함흥, 흥남, 나진, 청진, 원산을 방문하고,금강산 관광을 마친 다음, 9월 7일 목적지인 서울에 들어왔다. 그 사이 부산, 평양, 함흥, 흥남에서 강연을 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9월 9일부터 13일까지 5일간 성서강의와 강연을 했다. 경성(서울) YMCA에서 9일부터 5일간 ‘로마서 강의’를 하고, 그밖에도 교회와 대학에서5회에 걸쳐 강연을 했다. 분주하고 힘겨운 전도여행이었다.



8월 말이 되자 김교신은 날마다 준비에 바빴다. 매일 아침 날이 새자마자 일어나 집 앞에 흐르는 개울에서 냉수마찰을 하고 심신이 말끔해진 다음 가까운 산에 올라가 새벽 고요한 중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야나이하라를 맞이할 날이 가까워짐에 따라 김교신의 기도 시간도 길어졌다. 김교신의 아내 는 그 무렵 남편이 묘하게 들떠있는 것을 느꼈다. 김교신에게서 야나이하라의 신앙과 학식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기 때문에 그녀도 야나이하라와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김교신이 야나이하라 일행을 처음 맞이한 곳은 평양이었다. 김교신은 8월 27일 오후 서울을 떠나 평양에 도착했다. 이튿날 오전 8시 정각, 야나이하라 일행을 태운 열차가 평양에 도착했다. 김교신은 신앙 선배인 야나이하라를 반갑게 맞이하며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야나이하라는 노고를 치하하면서 김교신의 손을 꼭 잡았다. 일행은 평양에서 박물관과 고적을 견학한 다음 신양리 교회로 향했다. 여기서 야나이하라는 에베소서 2장을 강의했다. 김교신은 그날 밤차로 평양을 떠나 서울로 돌아왔다. 󰡔성서조선󰡕의 교정, 인쇄 등으로 연일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했기 때문이다.



북한 지방 여행을 마친 야나이하라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9월 7일이었다. 김교신은 이날 오후 서울역에서 야나이하라를 맞이했다. 저녁때는 야나이하라 일행을 위한 만찬에 참석했다. 9월 8일은 일요일이었다. 야나이하라는 김교신이 주관하는 주일 성서집회에 참석했다. 김교신이 먼저 누가복음 8장 19-21절로 말씀을 한 후, 야나이하라는 시편 84절을 강해했다. 야나이하라는 그날 저녁 서울의 한 조합교회에서 ‘기독교의 논리와 윤리’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김교신도 참석해 청강했다.



9일 저녁 7시 YMCA에서 드디어 ‘로마서 강의’가 시작되었다. 당초 정원은 70명 예정이었으나 신청이 쇄도해 8월 말에 정원이 차버렸다. 결국 정원을 늘려 150명까지 받았다. 수강 희망자는 조선 사람이 3분의 2, 일본 사람이 3분의 1이었다. 서울 시내 거주자가 많았지만,북쪽으로는 압록강, 남쪽으로는 부산에 이르기까지 조선 전역에서 수강자가 모여들었다. 만주의 길림, 대련에서 온 사람도 있었고, 야나이하라를 따라 도쿄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



야나이하라는 전심전령을 기울여 연일 로마서를 강의했다. 강의는 청중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야나이하라 본인도 만족했다. 이 강연에 대해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하게 내게 다가왔다. 경찰 정치의 탄압 아래 있는 조선 사람들에게 개인과 민족의 구원에 대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크나큰 사명으로 느껴졌다. 그리하여 나는 ‘이방인의 사도’라고 자처한 바울의 로마서를 가지고 조선 해협을 건너온 것이다. 5일간에 걸쳐 로마서를 강의할 때 내 혈관 속 한 방울의 피도 그리스도의 열심에 불타오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야나이하라의 서울 강연은 역사책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과 조선의 신앙 동지들 사이에 있었던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를 드러낸 놀라운 ‘사건’이었다.



김정식과 우치무라 간조

야나이하라의 서울 강연을 소개한 대목에서 볼 수 있듯이 󰡔김교신의 신앙과 저항󰡕은 기존 문헌들과 사뭇 다른 관점에서 김교신의 신앙과 생애를 조명하고 있다. 종래의 김교신 관련 논저들이 대체로 한국 내부에 시선을 국한하고 있는데 반해, 이 책은 일본인 저자의 관점에서 김교신을 중심축으로 삼아 한일 두 나라의 신앙적 교류를 조명하고 있다. 번역자가 김교신의 넷째 따님인 김정옥 여사란 점도 이채롭다.



김교신의 스승인 우치무라 간조의 조선관 형성 과정에 대한 설명도 흥미롭다. 우치무라 간조가 처음 만난 한국인은 김정식(金貞植, 1862-1937)이다.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태어난 김정식은 독립협회에 속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운동을 추진한 사람 중 하나였다. 이 운동은 정부(대한제국)의 탄압을 받아 1902년 김정식은 정치범으로 체포되었고, 옥중에서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3년의 옥살이를 마치고1904년 3월 석방되어 옥중 동지들과 함께 연동교회에 입교하는 한편, 황성기독교청년회에 가입하고, 초대 한인 총무가 되었다. 1906년 8월에는 일본 도쿄에 파송되어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현 재일본 한국YMCA)를 창설하고, 초대 총무가 되었다. 그는 일본에 머물면서 우치무라 간조와 교분이 두터워져 무교회주의 신앙을 조선에 도입하는 데도 큰 구실을 하였다. 그는 1914년 귀국해 YMCA운동을 이어갔다.



일본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무렵부터 김정식은 우치무라의 집을 자주 방문했다. 매주 토요일 열리던 우치무라의 성서 강의에도 열심히 참석했다. 처음에는 우치무라의 강의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2·3개월이 지나자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유창하지 못한 일본어였지만 질문의 내용은 우치무라를 놀라게 하곤 했다. “이 사람은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교우 여러분보다 깊이 있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 질문은 우리나라 사람에게서 보기 드문 일입니다.”



김정식을 알기 전까지 우치무라는 러일전쟁에 대해서는 ‘비전론’을 주창하면서도 조선의 식민지화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지지했다.우치무라에게 조선 민족은 이를테면 ‘역사 없는 민족’이었고, 일본의 ‘평화적·경제적 식민주의’의 대상이었다. 그러던 우치무라의 생각이 바뀐 것은 1907년 이후의 일이다. 실제로 우치무라는 1910년 한일병합을 통렬히 비난한다. 우치무라의 조선관이 바뀐 데에는 김정식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서로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깊은 우정을 맺었다. 우치무라는 “조선 사람 중의 조선 사람”이라고 부르던 김정식과의 교류를 통해 조선에 대한 인식이 깊어져갔다. 한편 김정식도 우치무라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우치무라 선생은 수많은 조선인 기독교도들에게 그야말로 선한 사마리아인이었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우치무라의 신앙과 사상은 김정식을 통해 뜻있는 조선 사람들 사이에 조금씩 알려졌다. 아마 김정식에 의해 류영모 등의 지도자들을 거쳐 전해졌을 것이다. 김교신은 1921년 1월 16일 도쿄 위생회관에서 진행된 우치무라의 로마서 강의에 출석한다. 김교신은 첫 회부터 마지막까지 언제나 맨 앞줄에 앉아 한마디로 놓칠세라 경청했다.



로마서강의는 1921년부터 이듬해 가을까지 60여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김교신은 일기에서 “마치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했다”고 기록했다. 김교신 외에 함석헌, 송두용 등의 조선 청년들도 우치무라의 문하에 들어갔다. 김교신은1925년부터 함석헌, 송두용 등과 함께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여 성서연구에 힘썼다.



참 신앙인이자 참 조선 사람, 김교신

복음전도에 전념하기 위해 양정교보 교사직을 사임했던 김교신은 1940년 9월 야나이하라의 서울 강연이 행해지던 무렵 다시 교직에 복귀한다. 복직 배경에는 경제적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재취임한 학교는 서울의 제1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였다. 이 학교 교장 이와무라(岩村)가 길을 열어주었다. 이와무라는 도쿄고등사범학교 지리박물과 출신으로서 김교신의 동문 선배였다. 모처럼 재취임했지만 김교신은 불과 반년 만에 학교를 사임한다. 가장 큰 이유는 김교신이 일제의 동화정책을 완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창씨개명을 거부했고 김교신이란 이름도 바꾸지 않았다. 조선 민족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키려 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는 김교신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시는 공식적인 장소에서 조선말을 사용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당연히 수업도 일본말로 해야만 했다. 그러나 김교신은 끝끝내 조선말로 수업을 진행했다. 당연히 교내에서도 문제가 되어 이와무라 교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학생들 중에도 조선말 수업에 반발하는 자가 있었다. 누구보다도 조선인으로서의 자존심이 강했던 김교신은 분명한 태도로 동화정책에 동조하는 학생과 대치했다. 진정한 조선 사람으로서의 긍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제1고보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와무라에게 더 이상 누를 끼칠 수도 없었다.



김교신은 우치무라를 스승으로 삼고, 야나이하라 등과 형제 이상의 각별한 우정을 나눴으면서도 동시에 조선을 지극히 사랑한 참 조선 사람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김교신과 그의 일본인 신앙 동지들의 애국심이, 탐욕과 이기심이 아닌 신앙과 진리에 입각한 애국심이었기 때문이다. 한일 문제에 대한 접근법 역시 양심과 진리에 바탕을 둘 때 가능하지 않겠는가? 한국 기독교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다.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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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중기 12.10.12. 20:02
1940년 9월 야나이하라 선생님이 서울 강연을 하였을 때에 십자가 사건이 접목의 사건으로 이야기 한 것을, 일생 야나이하라 선생의 필기를 (속기사)인 '모미야마 다미고'이라는 사람이 기록으로 남긴 책이 그 필기인이 사후 (野에 香의 花의 요우니) 그의 추모집에 실린 것을 일본의 나미코 선생이 보내주어 읽은 적이 있습니다. 박 익상 선생님의 말씀과 같이 한일 관계의 좋은 관계를 저도 늘 희망하고 바라는 사람입니다. 또한 한일 문제에 있어 박선생님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의 진리의 시각으로 접근을 공감합니다. 좋은 기고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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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 12.11.29. 17:08
한일 문제에 대해 한국 기독교는 '생각'이라도 해봤는지 궁금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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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12.11.28. 22:32
좋은 글 제가 모셔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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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 12.11.29. 17:08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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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람의 나귀 13.04.24. 20:15
누군가는 하늘만 바라보며 걷다가 하수구에 빠지고
누군가는 땅만 바라보고 걷다가 위에서 떨어지는 돌맹이에 맞아 뒹구는데....

좋은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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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 13.04.25. 14:13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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